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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문장연습-미안해요

by 통합메일 2012.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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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연습-미안해요


“미안해요.”

“아니 괜찮아. 어쩔 수 없이 속이 쓰리기는 하지만 또한 어쩔 수 없이 이런 전개를 예상하기도 했어. 예나 지금이나 나는 마음 놓고 온 힘을 다해 상심할 수는 없는 종류의 인간이니까 말이야.”

“예상했던가요? 이런 결말을?”

“그랬던 것 같아. 어쩌면 모든 게 다 끝나버린 마당에 와서 애써 자기를 달래 보기 위한 방어기제의 작동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어렴풋하게나마 이런 스토리를 직감했고, 나아가 어느 정도는 그것을 원하기까지도 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게 중요하지. 구체적으로 예상했더라도 결국에는 바꿀 수 없는 일이라는 것과, 어쩌면 이런 비극을 내가,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세계의 이성이 원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 말이야.”

“위로가 되네요. 하지만 여전히 저는 미안한 걸요.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저는 이미 저의 마음과 당신의 마음을 너무 진하게 다 읽어버렸어요. 어째서 이렇게 부조리할까. 어째서 나는 이것들을 모두 다 알아버리게 된 걸까. 알아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아요.”

“그게 바로 내가 너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지. 자의든 타의든 당신의 존재에는 그런 성질이 뿌리박혀 있는 거야.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걸 할 수 있는 소질을 너는 가졌지. 그에 비하면 나 역시도 범인에 불과해. 어쩌면 내 역할은 당신의 그 가능성을 눈 뜨게 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바 있어. 일단 나에게는 그것으로 된 거야. 일단 각성을 했다면 그것으로 세상에는 축복이라고 생각하니까.”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건가요? 당신의 역할만 완수된다면 자신의 존재는 어떻게 할 건가요. 나를 미워하거나 그래야 하는 것 아녜요? 슬프지 않나요? 이런 당신을 볼 때면 그 마음이 의심스럽기까지 해요. 지금의 저는 그렇지 않겠지만 세상의 눈은 분명히 그럴 거라고요.”

“그런 수준은 이미 지나왔다고 생각을 해. 무엇보다 내 안에 숨 쉬고 있는 사랑의 기억들이 나에게 그런 수준의 사랑을 허용하지 않지. 나는 사랑이 의지의 문제임을 아는 인간이라니깐. 어때 너 정도라면 무슨 얘긴지 이해할 텐데. 이건 사랑의 원래 모습에 대한 이야기라고. 나의 존재는 슬퍼할 수도, 원통해 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것은 별개의 문제야. 물론 이따금 의지가 약해질 수도 있고 그리하여 너를 놓아버릴 수도 있어. 그것은 정말 가장 슬픈 일이지만 그것마저도 사실은 괜찮은 거야. 어쨌든 나와 세상과 신이 가지는 기억은 영원히 존재할 테니까. 그래 영원히 말이지. 그게 중요해.”

“그렇다면 당신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뭐죠?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는 건가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실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 아닌가요?”

“글쎄 딱 부러지게 부정할 수는 없어. 내가 이렇게 너를 향한 의지를 가진 이상, 그리고 그 의지의 특성상 답장을 기다리는 심정과도 같이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를 바라고 원하고 기대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아니 사실은 무엇보다 간절히 바라고 있고, 당신의 마음이 나의 방위를 향할 리 없음을 확인할 때마다 나는 남몰래 잘 익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걸. 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진정한 바람은 당신의 의지가 당신의 참뜻에 일치하는 일이야. 자신의 감정에 극단적으로 솔직하고 충실해지는 일. 내가 무엇을 바라든 오직 당신의 뜻대로 해야 하지. 그것이 나로 인한 당신의 의무이고, 그렇게 당신은 나에게 있어 신이 됩니다. 짐이 너무 무거울 수도 있어. 그 의무는 아가 당신의 의지가 향하는 상대방에게도 같은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니까 말이야. 결국에는 나의 이 심정을 똑같이 경험하는 날이 당신에게 올지도 모르는 일이야. 누군가는 또 신이 되겠지. 아니면 모두 함께 완전한 인간의 지위로 추락하거나……. 뭐 그렇게 둘 중 하나일 것 같구나.”

“그건 너무 가혹한 걸요.”

“가혹하든 행복하든 어차피 한 번의 생이고, 한 번의 인연이야. 진지하든 유흥으로 삼든 고문이든 위로든 인간의 관계에서 달라질 것은 별로 없어. 그러니 우리는 무척 다양한 선택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거의 아무런 선택을 하지 못하는 거지. 그것이 길이라면 가야해. 물론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얘기겠지만.”



사실은 가만히 ‘헤’ 하고 웃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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