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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고

by 통합메일 2010.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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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고

 

박민규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내가 대학교 1학년이던 2003년 ‘국어와 작문’이라는 교양과목을 수강하게 되면서이다. 조별로 문학 및 애니메이션을 주제로 팀별 발표 수업을 진행했는데, 우리 조는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를 주제로 부여받았고, 옆 조가 부여받은 주제가 바로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이었다. 대학이라는 지성의 전당에 들어와서 듣게 된 아주 교양스런 강좌의 주제라고 하기에는 뭔가 어린아이들이 보기에 더 적합해 보이는 만화영화의 제목을 갖고 있던 그 책, 대체 어떤 책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내 머릿속 어딘가에 박민규라는 이름 세 글자를 각인시켜 놓은 듯하다. 물론 내가 『지구영웅전설』을 읽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다.

‘국어와 작문’이라는 강좌명을 내걸었던 그 수업에서는 교수님의 취향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조가 준비했던 애니메이션 원령 공주를 분석한 발표가 1등으로 가장 높은 학점을 받을 수 있었다. 함께 작품분석과 레포트 작성을 도맡았던 단짝 친구와 함께 자화자찬하는 추억이 남았고,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은 점차 기억 뒤켠으로 사라져 갔다.

내가 다시 박민규씨의 소설을 만난 것은 한강씨가 「몽고반점」으로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2005년도 제2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였다. 이 책의 뒤편에 수록되어 있던 작품이 박민규씨의 「갑을고시원 체류기」였다. 처음으로 접한 그의 작품이었고, 그때부터 이미 나는 그의 작품에서 알 수 없는 매료감을 느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09년 나는 동생의 책꽂이에 꽂혀있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책을 읽게 됐다. 이번에는 장편소설이다.

 

 

1)작가와 ‘풍자’

작가 박민규씨를 얘기할 때 뗄 수 없는 것은 바로 ‘풍자’가 아닐까 한다. 「갑을고시원 체류기」나 『지구영웅전설』, 그리고 바로 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도 역시 공통적으로 그의 풍자를 만날 수 있다. 나는 비교적 어떤 책을 읽으면 일종의 민감성 때문인지 얼마간 그 책의 분위기나 어법에 매료되서 나도 모르게 그런 문체를 따라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현상은 박민규씨에 대한 경우에 있어서는 굉장히 심각했고, 아마 누구라도 그의 책을 읽은 후라면 그의 선글라스를 빌려 쓴 것처럼, 세상의 풍자거리에 시선을 두게 되고, 머릿 속으로 조잘조잘 풍자의 실타래를 돌돌돌 풀어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충동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그 풍자에는 어떤 힘이 있는 것일까?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본 나는 ‘사소한 일을 굉장히 과장해서 말하고, 굉장한 일을 너무나도 무덤덤하게 표현해 버리는 것에서 느껴지는 아이러니함’이라고 정리해 보았다. 친한 사람의 죽음, 이별, 사건 등으로부터 화자인 우리들에게서 조금 동떨어있는 듯, 혹은 아주 두꺼운 통유리가 우리의 감정을 막아서고 있는 듯, 혹은 애초에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인 듯 깜작 놀랄만한 그러한 반전과 사건들 앞에서도, 그의 덤덤함에 우리도 마찬가지로 좀 더 덤덤해지거나 혹은 그 덤덤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리고 한편 방귀라든가, 도다리, 괴성이나 고함 등의 단편적인 일에 대해서는 엄청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소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사고를 확장시켜 나간다.

이러한 풍자가 주는 힘은 무엇인가? 그 무덤덤함으로 인해 더욱 더 심층적인 감정이입을 시도해볼 동기를 부여해 주는가? 혹은 단편적 사건들에 대한 과장적 의미 부여를 통한 익살적인 요소들의 획득인가? 그러고보니 어디에선가 이러한 풍자를 또 본적이 있는 것 같다. 잠시 생각의 시간을 거친 후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구체적으로 짚어내기에는 내 기억력의 한계가 너무 구체적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하루키의 글에서도 박민규씨의 것처럼 집요하고 노골적이지는 않아도, 그런 풍자를 만나 볼 수 있던 것 같다.

 

2)『삼미슈퍼스타즈』

대체 뭐지 이팀은? 왜 이 소재를 가지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가? 소설은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소설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인지 내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이 글을 읽고 있는 나는 글 속의 주인공과 ‘삼미슈퍼스타즈’라는 팀과의 연결고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러한 문제점은 초반부를 약간의 지루함으로 기억되게 만들었다. 물론 내가 ‘삼미슈퍼스타즈’라는 야구팀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접했고,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3년이라든지 작가가 말하고 있는 시절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시대이거나 혹은 내가 언어적 능력이라도 제대로 익혔을지 궁금할 정도로 내게는 생소한 시절들이기도 할 것이지만, 정말이지 소설의 초반부에서의 나는 ‘삼미슈퍼스타즈’라는 팀의 함의를 제대로 인식하기가 힘들었다. 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 같은 독자를 위한 배려였는지, 작가는 그 초반의 분량 동안 삼미슈퍼스타즈에 대해 부단히 묘사하고, 풍자하며, 찬미한다. 그러한 배려를 통해 내가 얻게 된 이 팀에 대한 인상은 한마디로 ‘구제불능팀’이라는 것이었다.

 

 

3)프로와 아마추어

본문에서도 언급이 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들의 삶에서 ‘프로’라는 단어는 그리 낯설지 않은 단어가 되었다. 얼마전 유행했던 “왜 이래 아마추어 같이”라는 개그도 역시 그런 아마추어라는 개념의 맞은편에 존재하는 ‘프로’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발상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말이 아니고, 우리의 역사에서 등장할 계기가 없던 낱말인데 이제는 어느새 우리의 일상에서 언제 등장하더라도 별 거부감이 들지 않을 단어가 되어버렸다. 책에서는 그 이유를 바로 한국 프로야구의 출범으로 들면서, 일종의 음모론까지 풍자의 형식으로 제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프로’라는 단어가 아주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소년들에게, 즉 순수했던 우리들에게는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었던 ‘프로’라는 것이 사실은 현실에 그 무엇인가를 뒤집어씌운 잘못된 것이라는 거다.

 

4)가짜 야구, 가짜 인생

이 소설은 한 남성의 유년시절부터 중년시절까지의 에피소드를 ‘삼미슈퍼스타즈’라는 야구팀과 관련시키면서 주욱 훑어내려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소년에게 충분하게 감정을 이입하고 그 소년의 입장이 되어 볼 수 있을 것이며, 대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는 나는 주인공의 대학을 다니며 일종의 방황기를 겪는 시절을 묘사한 부분이 가장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래, 누구나 겪는 그러한 시절. 결국은 우리들의 인생의 단편들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과는 달리 이 소년에게는 그리고 이 소년의 친구인 ‘조성훈’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다. 그게 바로 ‘삼미슈퍼스타즈’, 이제는 사라져버린 야구팀에 대한 추억이며, 그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자부심이다.

5)진짜 야구 진짜 인생.

이 소설은 급변하는 세상, 그리고 급변하는 내부의 어떤 요인 때문에 정신없이 쓸려지나가는 우리들의 삶과 길고도 짧은 인생을 그린다. 그것은 우리들의 시절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며, 그것은 모두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또 서로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글 속에서 그러한 서로 다른 모습,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우리, 즉 주인공의 삶의 단편들은 ‘삼미슈퍼스타즈’라는 팀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서 진정한 하나의 인생으로 합쳐지게 된다. 마치 그 순간을 위해서 그렇게 멀고도 긴 길을 돌아온 것처럼 말이다.

 

6)세상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렇다. 이 책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세상은 참 아름답다”는 것이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우리는 중년의 주인공을 만날 수 있다. 유년시절 프로야구에 대한 선망으로 가득찬 똘망똘망하고 야심차며 순수한 소년에서, 젊음을 가지고 그 열정을 어디로 분출할지 몰라 하던 청년에서, 이제는 중년이 되어 가정을 버리고 직장에 헌신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한 중년 가장으로서의 주인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작가는 그러한 중년의 주인공을 묘사함으로써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라고 말이다. 가슴 속에 열정은 없고, 꿈도 없고, 하루하루는 전쟁이며, 더 이상의 목표는 있되 이상이랄 것도 없으니 철학이 끼어들 자리도 없다. 관료제의 폐해와 열린사회를 문신한 이 사회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킨 채 그 구성원들에 대한 속박을 풀어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결국 이 사회에서 잠시라도 방심하면 도태되고 낙오자로 낙인찍히는 그러한 삶을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대체 이러한 현실에서, 돈에 의해 모든 것이 판가름 나는 자본주의의 굴레 안에서 아무리 빛깔 좋은 변명과 전환을 시도하려 하더라도, 결국에는 돈 앞에서 굴복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작가는 다시 한번 말한다.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기에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다”고. 언제부턴가 이 세상은 모든 사람들에게 ‘프로의식’이라는 것을 주입함으로써, 가만히 있는 사회에 무한 경쟁의 색을 입히고, 조금이라도 방심하고 숨을 고르며 금방이라도 뒤쳐져서 낙오자로 낙인찍혀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강박관념 우리에게 속삭여왔던 거라고 말이다. 사실 이 사회의 정상적인 코스, 질 좋은 가이드라인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세상은 그냥 그곳에 있는 것이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직함, 명예 따위의 것들이 촘촘하게 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상실하는 순간 나는 균형을 잃은 블록처럼 와르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 같지만, 사실 그것들을 잃은 그 순간이 지나고 다시 정신을 차리면, 그리고 천천히 손발을 살펴보고 다시 세상을 둘러보면 기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내가 그런 것들을 얻기 이전부터 세상이라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어 왔다. 내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아니고 내가 무엇을 얻거나 잃는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 더 많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딛고 있는 땅덩어리나 지구 혹은 우주라는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얼마나 작고 미약한가. 무한히 넓은 우주에서 미약한 인간이 자신의 사유로 마음에 드는 것들에만 의미를 붙여 그것들만을 세상으로 ‘규정’하고, 자신이 만든 그 울타리 안에서 그 나름대로의 룰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결국은 그 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파먹어 가며 죽어 간다.

하지만 이제는 그래서는 안된다. ‘삼미슈퍼스타즈’가 프로야구에서 언제나 꼴지, 그것도 기록적인 참패의 행진을 기록하며 프로를 강요하는 세상 안에서 꿋꿋하게 진짜 야구(소설에서의 표현)를 해온 것처럼, 우리도 최소한 가끔이라도 진짜 인생을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소속의 부재’에서 오는 불안감. 그것은 아주 어릴 적부터의 교육으로 인해서 어느새 우리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진짜 세상을 살아갈 능력이 아주 약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공동체라는 것은 중요하고,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그저 개체로서의 개인일 뿐만 아니라 사회 속의 개인으로 간주되어야 할 필요성도 분명히 존재는 하지만, 공동체가 개인을 위해 존재할망정, 개인이 공동체를 위해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 역시 분명한 것 아니겠는가?

 

7)우리들의 진짜 인생

내가 이 책을 읽은 시기는 아주 묘한 시기였다. 함께 졸업시험을 치른 다른 학우들과는 달리 코스모스 졸업으로 반년 일찍 대학을 졸업하고, 교원임용고시를 치르기 위해 이제는 학생이 아닌 신분으로 어느덧 모교가 되어버린 대학의 도서관을 왕래하던 시기였다. 분명히 나는 인생의 불확실함과 소속의 부재가 주는 엄청난 불안감에 짐짓 나는 아닌 척 무표정한 표정으로 일관했지만, 분명히 나의 마음속에는 눈이 여러 개 달린 외계 생물체가 여기저기 사람들이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바깥세상을 염탐하고 있던 그런 시기였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일종의 마음의 평안을 찾은 듯하다. 확실하게 이 책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좀 더 세상을 넓고 그리고 편안하게 바라볼까 한다. 전공의 특성상 교원임용고시에 낙방하면 다시 1년을 기다려 재수를 하거나, 학원 강사로 나서거나, 혹은 이런저런 제2ㆍ제3교육계로 나아가는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결과들을 맞이하는 것을 역시 나는 아닌 척 하면서도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사실 그런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면 그다지 긍정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긍정하든 부정하든 최소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런 결과들을 두려워했던 이유는 학교를 다니면서 혹은 성장과정에서 부모님이나 다른 주위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취업실패자들에 대한 평판 때문이 아니었던가? 혹은 시험에 실패하고 의기소침해서 풀이 죽은 모습으로 마치 죄라도 지은 듯 살아가든 사람들을 보며 나도 떨어지면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근거 없는 의무감이 들었기 때문은 아닌가?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실패를 해도 시험에 붙는 것에 실패를 한 것이지, 인생 그 자체에 실패를 하거나 도덕적 혹은 법적으로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기 때문에 결코 그렇게 자신을 탓하면서 풀 죽은 어깨에 양팔을 달고, 혹은 아직도 꿈을 버리지 않았다고 소리치거나,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라며 스스로를 변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떨어진 건 그냥 떨어진 것이다. 인생 그리고 세상은 그냥 거기에 그대로 있다. 대신 나는 정말 책 속의 이야기처럼 좀 더 나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좀 더 확실하게 나의 맘대로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를 프로답지 못하다고 하건, 아직도 철이 안 들었다고 하건 상관없다. 왜냐고 묻는 다면, “이건 나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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