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와 술과 취미와 꿈
<쓰레기에는 이름이 없다.>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그런 문장이 생각났다. <침묵의 냄새>, <맹목의 역사> 같은 조합도 생각이 났다. 비가 오려는지 바람이 많이 불었다.
세수를 하고 책상에 앉으니 성민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해”, “공부”, “그려? 알았어.” 술 먹자고 할 요량으로 전화한 목소리는 미안한 포물선을 그리며 추락했다. 바람이 불고 꿉꿉해서 술이 땡긴다는 그의 생각에 나는 동의했다. 동의라기보다는 공감했다. 나는 최대한 단조롭고 엄숙하며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려 그려”하며 전화를 끊었다. 술이 먹고 싶었고, 대화가 하고 싶었지만, 그럴 처지가 아니었고, 아마도 막상 만나면 할 얘기도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고, 운 좋게 늘어놓을 얘기가 서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며, 막상 전화를 끊고 나니 굳어버린 시간과 돈이 반가웠다. 그런 일로 스스로가 가증스럽지는 않다. 나의 감정이 그렇다면 거기에 솔직하게 마주하는 일이 더 낫다. 표현하지 않는 이상 스스로의 감정을 인정하는 일은 모든 병폐를 예방하는 일이다. 이른바 양명이 말하는 격물치지다.
전화를 끊은 내 앞에 공부, 술, 취미, 꿈같은 단어가 떠올랐다. 객관식인가 했다. 저녁을 먹으며 엄마는 여전히 타이르듯 말했다. 언제나 나는 잘 타일러지는 아이였고, 튕겨져 나가도 수월하게 다시 어미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는 아이였다. 원망스러운 것은 시간, 도와 합치되지 않는 세상, 나를 받아주지 않는 시험, 뭐 그런 것들.. 아니 하다 못해 내 자신이었다.
여전히 나는 잘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제법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분명 조금씩 부러운 일들이 점점 더 자주 목격되고, 그래서 배알이 꼴리며, 또 그래서 억울할 때가 있다. 나는 나의 억울함이 무섭다. 그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구원해주는 것은 저들은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일, 내 나름대로의 선민사상 같은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민으로써 그들을 무시한다기 보다는 서로 걸어온 길과 걸어가야 할 길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정해안과 이충호라는 내 안에서 정반대로 분류되는 인간형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기묘함이리라는 생각이다. 짐작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고, 들여다보지 못하는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덧붙여, 나에게는 제법 든든한 내가 있다.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의 씨앗이며 열쇠인 동시에 종료버튼이기도 한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마지막의 순간까지 살아갈 수 있는 힘이라는 것도. 그것은 지겹지만 또 한편으로는 결코 질릴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곧 세상이다. 세상이 나고, 내가 세상이다. 나의 자유로운 세상이 있다. 타인과 함께하는 삶을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한없이 치명적인 것이지만, 포기할 수 없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20130625 오늘은 횡성수설이 좀 심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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