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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프레데터는 이렇게 말했다

by 통합메일 2018.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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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터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중학교 2학년 때 즈음이라고 생각된다나는 그때 처음으로 프레데터를 만났다어느 계절이었을까춥진 않았던 것 같다아마도 늦봄이나여름그래 아무리 늦어도 가을에는 일어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굳이 한정을 짓자면 유난히 길고 길게 느껴져 무서울 정도로 많은 추억을 촘촘하게 품고 있던 그해의 여름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싶다.

그때만 해도 내가 살던 동네는 그 도시에서 새로 개발된 아주 깔끔한 동네였고내가 살던 아파트도 그와 함께 꽤나 젊은 건축연수를 자랑하고 있었다다만 조금 특이한 점이 있었다면 완전히 새로 개발된 지역이 아니라기존에 개발됐던 곳을 몇 년이 지난 후에 새로 개발한 탓에 내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지도 위에 그 경계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몇 년 터울을 두고 옛 것과 새것이 공존하고 있던 그런 동네였다.

아이들은 그렇게 옛 것과 새것을 구분하지 않고 여기저기에 촘촘히 자신의 집을 가지고 있었다그리고 내가 살던 아파트의 통로에는 내 또래의 아이들이 3명이나 살고 있었다. 6, 10, 15그 중 나는 10층에 살던 아이였다우연의 일치인지 그런 층수(層數)에 따라 아이들은 묘한 서열을 이루었다. 15층에 살던 아이는 줄곧 1등을 했고, 10층에 살던 나는 15등 정도를, 6층에 살던 아이는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사이를 치열하게 넘나들고 있었다는 기억이다그래서 그 때의 나는 종종 사람이 주거하는 고도(高度)와 학습능률 간에는 어떤 연관관계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만약 우리 집에서 15층 사이에 또 다른 아이가 살고 있다면 그 아이는 아마도 10등이나 7등 정도를아니 잘하면 3등 정도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예나 지금이나 대개의 엄마들이 그렇듯 우리 엄마도 공부 잘하는 아이와 어울릴 것을 요구했고그래서 아주 잠시나마 15층에 사는 아이를 중심으로 패가 형성될 뻔도 하였지만 역시 예나 지금이나 그렇듯이 그런 것은 엄마들이 억지로 하란다고 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그래도 나는 부지런히 6층과 15층을 왔다 갔다 했던 것 같다두 녀석은 서로 다른 또래그룹과 어울렸기 때문에 서로 마주치면 인사만 주고받는 사이였지만 나는 그 둘 사이에 묘하게 끼어 있는 그런 구도였다.

15층에 살던 녀석은 바로 요즘 흔히 일컬어지는 엄마 친구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학원이나 과외는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상위권 성적을 줄곧 유지했고걸걸하게 분위기 있는 목소리에리더십까지 있어서 모든 아이들이 그를 좋아했다여자아이들에게 인기도 많았기 때문에 같은 통로에 산다는 이유로 이따금씩 나에게 편지를 건네면서 녀석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는 여자아이들도 있었다그럴 때면 나는 왠지 대단한 벼슬이나 보좌관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는데그 당시에는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던 것 같다.

반면에 6층 아이는 좀 기묘한 녀석이었다는 생각이다빼빼 마르고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는데언제나 눈 밑에 다크서클이 시커멓게 얼룩져 있는 녀석이었기 때문에 어쩐지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녀석이었다.

주로 내가 그들의 집으로 놀러가는 경우가 대다수였는데일단 우리 집에 있는 컴퓨터는 그 당시에 유행하는 게임을 하기에는 너무 낡은 것이었고집에 외부인을 들이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엄마 때문이었다. 15층에 가면 보통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녀석이 수집한 레고를 구경하거나바둑을 두거나책을 보거나 하면서 비교적 점잖은 유희를 즐겼던 것 같다. 6층에 놀러 가면 또 얘기가 달랐다채광이 잘 안 되는 것인지 아니면 두껍게 쳐놨던 커튼 때문인지 언제나 어두컴컴한 분위기와 그 집 특유의 향냄새 같은 게 일단 제일 먼저 다가왔다녀석도 꽤나 좋은 컴퓨터를 갖고 있었고무엇보다도 유난히 일찍 성에 눈을 뜬 녀석의 집에는 놀랄만한 자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바야흐로 주먹과 돈과 야한 것이 아이들 사이에서 권력으로 작용하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특히나 힘이나 돈의 유무와 상관없이 아이들은 야설이나 애로 비디오나 미연시 게임 앞에서는 눈이 뒤집어졌다자연스럽게 그런 자료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녀석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신의 자료들의 가치를 재확인해나가고 있었다녀석도 그런 권력자들 중에 한 명이었고녀석의 주변에는 유난히도 그런 자료들의 냄새를 맡고 기웃거리는 아이들이 많았다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점점 거만해져가는 녀석을 마주하게 되었다급기야 녀석은 나에게도 자료를 가지고 유혹을 하기 시작했다이를테면 무엇을 해주면 야설 몇 편 복사해 주겠다라는 식이었다나는 좀 기분이 나빴다굳이 준다면 사양하지는 않겠지만그때의 나도 이미 어느 정도의 자료를 보유하고 있었고삼촌으로부터 빼돌린 국산 애로비디오 소유자로 유명했기 때문에 아쉬울 게 없었던 것이고무엇보다 녀석에게 달라붙어 어떻게 조금이라도 잘 보여 게임 하나그림파일 하나 얻어 보려고 꼬리 치는 아이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 같아 꽤나 불쾌했다그래서 나는 녀석의 그런 태도에 상당히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주곤 했고녀석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나에게 신기함을 느끼는 것도 같으면서도 계속해서 나를 유혹해왔다.

그런 식으로 서로를 밀고 당기던 어느 날이었다여느 날처럼 녀석은 도발이 먹히지 않자 지쳤는지 거실에 있는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고 열심히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손님을 불러다 놓고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지만 일단 나는 그냥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TV를 켜기 위해 리모콘을 찾았다이제는 녀석과 나 사이에 그런 풍경이 꽤나 익숙해질 만 할 즈음이었나 보다그리고 나는 TV밑 진열장 안에 놓인 비디오 테이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야 이거 재밌냐나는 그래도 남의 집 살림이라고 조심스럽게 진열장의 유리문을 열고 테이프를 꺼내 들어 보이며 물었다응 뭐 재밌어볼만해게임에 한창 빠져들었던 녀석은 내가 말을 건지 한참 만에 마치 내가 아직까지 자신의 집에 있다는 것에 놀라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어깨너머로 보이는 모니터 화면에는 한창 유행하던 미연시 게임이 펼쳐지고 있었다커다란 눈에 파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자아이의 그림이 떠있었고그 여자아이는 화면 하단의 텍스트 대화창을 통해서 녀석에게 자신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지를 묻고 있었다. 1.더듬더듬 2.키스한다. 3.고백한다. 4.도망친다뭐 그런 식이었다이래저래 많은 아이들이 그렇게 사랑을 배워가던 시절이었으니까 말이다그래 사랑 말이다주어진 선택지에서 가장 알맞은 답을 골라나가야만 원하는 목적을 얻을 수 있는 방식의 게임이었는데얼핏 봐도 고지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같았다까만 배경에 돋아난 글씨들 중에 류노스케군……이제 안돼와 같은 구절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나는 잠시 고민을 아니 할 수 없었다말을 걸기에는 좀 부적절한 상황 같이 여겨지긴 했지만 그래도 어쩐지 녀석의 뒤에서 장승처럼 서서 하아으으으음’ 같은 문구를 보며 어떤 선택지를 고를지 함께 고민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결국 나는 입을 열었다야 나 이제 갈란다나 이것 좀 빌려주라바로 보고 갖다 줄게말이 끝나자 녀석에는 이번에는 조금은 반가움이 묻은 속도로 고개를 돌려보이고는 하지만 역시 침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어 그래그렇게 해.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바라봤다부엉이 머리라고 놀림을 받던 곱슬은 오늘도 어김없이 제멋대로 뻗쳐있었다나는 볼 근육을 잡아당겨 이를 드러내고는 거울에 비친 그것을 한번 살펴보았다별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손에 쥔 테이프를 살펴봤다엘리베이터의 조명은 그리 밝은 편이 아니었지만 녀석의 집에 비하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그리고 그래서 테이프에 붙은 표지도 더욱 잘 보였다얼룩덜룩 검붉은 색이 뒤엉켜 있는 배경에 역시 좀 더 확고한 검은색으로 프레데터2’라고 쓰여 있었다그리고 그 밑에 작게 영어로 ‘predator2’라고 적혀 있는 것 같았는데 인쇄상태가 조악해서인지 제대로 읽기가 힘들었다. ‘2’라고 적혀 있는 걸로 봐선 1편이 앞에 있는 모양인데 그걸 안 보고 봐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고 문이 열렸다겨우 4층의 높이를 올라온 것뿐인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그렇게 나는 프레데터와의 첫 만남을 갖게 되었다.

새까만 비디오 재생기가 추르릅 소리를 내며 테이프를 빨아 먹었다삼성전자가 만들어 일본에 수출한 것을 일본에 갔을 때 사서 다시 한국에 가져온 것이었다문득 뻥 뚫린 베란다를 쳐다보니 뉘엿뉘엿 해가 기울고 있었다그리고 비디오를 다 봤을 때의 세상은 상당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과연 녀석의 말대로 꽤나 재미있는 내용이었다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운 좋게 만나게 되는 그런 영화라고 중학교 2학년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1편의 내용이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편을 보지 않아도 영화를 즐기기에는 크게 무리가 없었다부패하고 어지러운 인간의 세상이 있고그런 세상에 외부인인 외계인 프레데터가 나타난다골치 아픈 마피아들을 해치우긴 하는데 살해의 목적이나 살인범이 누군지 알 수 없어서 경찰은 사건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런 내용이었다무엇보다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주인공인 프레데터가 사용하는 각종 첨단 무기들이었다자신의 몸을 투명하게 만들거나표창 같은 걸 던지거나몸에서 자유자재로 밧줄이 쏘아져 어디에든 대롱대롱 매달리기도 하는 그런 기술들이 참 부럽고 멋지게 느껴졌다그리고 영화는 스토리를 매듭짓지 않은 채 묘한 여운을 남기며 엔딩 크레딧을 올리면서 좀 더 엄연한 현실감을 선사해주는 것이었다고만고만한 인간들의 세상에 돌연 나타난 천하무적의 프레데터너무나도 인상 깊은 영화라서 나는 한 번 더 테이프를 돌려봤고 결국 녀석에게 약속한 대로 바로 돌려주지는 못했다다음날 시골에서 놀러온 사촌동생에게 그 비디오를 보여줄 요량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 사촌동생을 억지로 앉혀서 프레데터의 신기술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이미 저녁이 지난 시간이었기 때문에 나는 누군가 싶어 인터폰의 화면을 유심히 바라봤다여자였다문을 여니 침침한 저녁의 시야 속에 녀석의 누나가 서 있었다어 안녕 나 찬기 누난데그 비디오 좀 받으러 왔는데고등학생이라고 들었던 녀석의 누나는 세상에서 가장 허스키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부석거리는 그녀의 표정에서 나는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고 서둘러 바로 비디오에서 테이프를 뽑아서 그녀에게 건넸다와당탕하는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뒤로 한 채 현관문을 닫고 돌아서니 사촌동생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호기심과 아쉬움과 해방감이 윤회하는 표정이었다.

그 뒤로는 왠지 녀석의 집을 찾지 않게 되었고엘리베이터에서 녀석의 부모님을 마주치게 될 때면 짐짓 저는 아닙니다저는 공부 밖에 모르는 순진한 아이랍니다하는 표정을 짓게 되었다아직까지 뭔가 달라진 것은 없었다단지 녀석의 누나가 내게 쥐어주고 간 이상한 예감만이 문제였다그리고 그것은 몇 주 뒤에 어떤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어오면서 좀 더 확실하고 걸쭉한 예감으로 농도가 진해져 갔다녀석이 어느 날 밤 녀석의 아버지가 아끼는 흔들의자에 앉아 컴퓨터로 야설을 쓰다가 극심한 피로를 느껴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로 잠이 들었다는 소문이었다물론 모니터는 환하게 녀석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고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컴퓨터 앞에서 잠이 든 아들을 발견한 녀석의 아버지는 대체 이 녀석이 컴퓨터로 뭘 하는지 찬찬히 모니터를 훑어봤다는 것이었다그렇게 되자 나는 그 소문과그 날 밤 찾아온 녀석의 누나와프레데터의 상관관계를 추리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아빠가 시켜서 왔다는 투로 말을 했는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왜 하필이면 아들 친구에게 아들이 아니라 딸을 보내서 그 늦은 시간에 SF장르의 비디오를 받아오게 했을까그에게 프레데터는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을까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녀석의 아버지를 찾아가서 프레데터를 좋아하시냐고 물어볼까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그리고 무엇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은 전학을녀석의 가족은 이사를 가버렸다이제 우리 통로에는 나와 15층 녀석만이 남았고 왠지 나는 디딜 곳이 없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졸업을 일 년 정도 남기고 나는 왕따를 당하기 시작했다말하자면 복잡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우리학교 2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이루어진 음란물 단속 때문이었다역시 어디까지나 소문으로만 들은 것이지만 발단은 6층 녀석이라는 것 같았다자신의 아들이 심각한 음란물 중독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녀석의 부모님은 학교에 이 사실을 알렸고이 정도 상태가 되도록 방치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따지고 들었다학교 측에서는 학년부장 선생님을 통해서 녀석과 면담을 했는데그 면담 내용 중에 나를 비롯한 몇몇 아이들의 이름이 거론되었다는 거 같았다뭐 그 즈음에 좀 같이 어울려 다니기는 했지만 나는 적잖이 억울했다그런 걸 즐기기는 하지만 정말 제대로 탐닉하는 녀석들을 생각하면 나는 비할 바가 아니었고죄가 있다면 몇 번인가 보여 달라고 애원하는 아이들을 모아서 집에서 애로비디오를 단체 관람시켜준 것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아무튼 먼저 잡혀 갔던 녀석이 돌아와서 너도 아마 잡혀갈 거라고 넌지시 예고했던 대로 다음날 오후 방과 후 자습 시간에 학년부장은 나를 찾아왔다이상하리만치 다정하고 온화한 표정이었다상담실로 나를 데려간 그는 문을 닫기가 무섭게 낯을 바꾸었다그리곤 또박또박 대사를 외듯이 말했다선생님은 다 알고 있어솔직하게 대답하면 괜찮겠지만 거짓말을 하면 더 큰 벌을 줄 것이고부모님께도 연락이 갈 거야그렇게 말하며 그는 내게 학년명부를 내밀었다사진이 첨부된 명단이었다우리 학교 학생이 이렇게 많았던가처음 보는 학생명부를 떨리는 손길로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겼다. 15층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옆에는 새하얀 A4용지와 볼펜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마주 앉은 학년부장은 허리를 꼿꼿이 편채로 팔짱을 끼고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나는 눈알을 굴려 메마른 공기 속에서 프레데터를 찾았다자신을 투명하게 만들고 어디 구석이나 천정에 매달려 나와 학년부장을 주시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결국 나는 그를 한 번 더 실망시키게 된 것인가인류를 대표해서 그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는데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장이라도 그가 표창을 던지든 해서 어떻게든 내 앞에 앉은 이 악당을 해치워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는 섣불리 인간세계에 간섭하는 존재가 아니었다그저 신중한 표정으로 팔짱만 끼고 있을 뿐이었다최대한 기억을 더듬는 척을 하면서 나는 한번 천천히 같은 학년 아이들의 얼굴들을 훑어봤고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선생님 정말로 비밀은 지켜주시는 겁니다최대한 진중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나는 말했다그리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이 번쩍하면서 뺨이 얼얼해지고 바로 냄새나는 통증이 뒤따라왔다기대한 적 없는 빠르기였다.

그로부터 며칠간 아니 몇 주간 나는 방과 후 자습시간은 물론 쉬는 시간에까지 상담실을 들락거리는 아이들을 지켜봐야했다몇몇 아이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면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보였기 때문에 나는 시선을 책상에 못 박고 그저 곁눈질로 그들이 지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그렇게 왕따가 시작되었다모든 아이들은 아니었고속된 말로 학교에서 좀 논다고 하는 애들 중의 일부가 문제였다뭐 일단 그네들은 약간 어줍게 노는 아이들의 무리에 껴보려 하는 나의 시도를 전부터 아니꼽게 바라보던 이들이었기 때문에 크게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긴 겨울이 시작됐다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들었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음 해 3학년이 되었을 때는 왕따를 주도하던 녀석들의 대부분이 나와 같은 반으로 배정되었다대한민국 교육의 반 배정 시스템을 저주할 시간도 없었다틈만 나면 날아오는 그들의 손과 발에 대비하여 나는 언제나 긴장의 고삐를 늦춰선 안됐다당연한 애기일지도 모르겠지만나를 도와주는 녀석은 거의 없었다동조하는 녀석들이 대부분이었고잘 해봐야 왜 그렇게 맞고 사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녀석들이 있을 뿐이었다. 15층에 사는그래도 이웃사촌이고 누구보다 오랜 친구라는 생각에 명단에 넣지 않았던 녀석도 그런 부류였다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그로서도 대체 나라는 존재는 이해할 수 없었나보다.

그리고 그러한 긴장 끝에는 그들에 대한 저주그들을 찢어 죽이는 상상피가 흥건하게 고인 바닥의 풍경이 그려졌고조금 더 걸어 나가 보니 그 뒤에는 잠이 왔다그 시절에 대한 기억을 잃었을 정도로 꼬박 한 학기를 잤던 것 같다모든 선생님들이 나를 매일 졸거나 혹은 자는 아이로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잊혀 가는 것 같았다마치 프레데터처럼 그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그 때만큼은 안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 같다감히 선생님하고 거래를 하려고 하느냐며 따위를 올려붙인 학년부장은 그래도 양심의 가책이었는지 아니면 나를 잊었는지 약속을 지켜주었다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당신들의 아들이 좀 이상해졌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계셨다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그것은 사실 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문제였고말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리고 아이들로부터 완전히 잊혀지고선생님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을 무렵 나는 한 번 크게 맞았다더는 봐 줄 수 없다는 담임선생님의 결정이었나 보다졸다가 끌려간 교무실에서 나는 나를 포기한 줄로만 알았던 많은 선생님들로부터 돌아가며 매를 맞아야 했다실로 하늘 같은 사랑이었다왠지 나는 그제야 잠에서 깬 것 같은 기분이었다남은 하루를 온전히 교무실에서 보낸 후 전교생이 귀가해버린 고요한 복도를 걸어나와 고개를 들어 찌푸린 눈으로 바라본 하늘은 참으로 눈부셨고 또 높았다그렇게 긴 잠에서 깼을 때는 어느덧 가을이 찾아오고 있었다.

 

다시 프레데터를 만난 것은 중학교를 졸업하고고등학교를 졸업하고대학에 들어 간 다음 휴학을 하고공익으로 병역을 수행하고 있던 시절이었다척추측만증으로 4급 보충역 판정을 받아 배치된 곳은 내가 사는 도시의 내가 속한 구청이었다뭐 역시 당연한 얘기일 수 있겠지만 나는 공공기관이라서 참 편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들어갔었는데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물론 내가 생각했던 서류정리나 민원업무도 하긴 하는데복지과에서 해야 할 물건 나르고 배달하기에 동원이 되고나무를 심거나갖은 잡일을 모두 함께해야 했기 때문이다대체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싶을 정도로 공익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도 좋지 않았다근 2년의 시간 중 1년은 어리바리 열심히 헤매기만 하면서 보낸듯하다그래도 다행인 것은 다음 1년 중의 일부는 노련해짐 덕분에 그럭저럭 괜찮게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15층 녀석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집해제를 몇 달 앞두고공무원들의 상반기 인사발령이 있던 날 녀석은 말끔한 차림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고등학교 졸업 이후로는 처음이었지만 나는 한번에 녀석을 알아볼 수 있었다나의 눈빛을 보고 조금 의아해하던 녀석도 따라서 나를 알아 봤다민원서류라도 떼러왔나 보다 싶어서 아는 체를 하려는데 녀석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며 싱긋 웃어 보이더니 그대로 바로 회의실과 구청장실이 있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행정고시를 한 번에 통과한 수재입니다과장에 의해서 그렇게 소개된 녀석은 꾸벅 인사를 하더니 상당히 겸손하게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군대를 늦게 가는 대신 학업에 열중해서 남들 보다는 조금’ 빨리 현장에 나오게 되었다고군대는 올해 말이나 내년 즈음에 영장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그리고 모자란 점이 많으니 앞으로 잘 부탁드린 다는 멘트와 함께 적절한 각도의 인사도 잊지 않았다공익 2년차인 내가 봐도 꽤나 완벽한 인사말이었다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녀석은 빠른 속도로 조직에 적응해 나갔다마치 공직을 위해서 태어난 존재처럼 언제나 정확한 표정과 정확한 음정으로 정확하게 공문에 의거하여 움직였다걸걸했던 목소리는 더욱 더 세련되게 다듬어져서 녀석을 만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녀석이 악수와 함께 내미는 첫 마디에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모든 직원은 1층 동편에 있는 여직원 휴게실을 지날 때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녀석에 대한 수다를 들어야만 했다어쩔 수 없이 나는 조금 씁쓸해졌다하지만 그래도 뭐 역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제 조금만 참으면 소집해제이고 지난 시간 동안 나름대로 동고동락함으로써 신의로 연결된 직원들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역시 또 뭔가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회식 자리에서였고 녀석이 민원 부서로 배정 받고 2주가 지나가고 있던 때였다아마도 나는 자신이 조직에서 이 정도의 분위기 메이커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평소보다도 조금 더 많은 양의 술을 마셨던 것 같다취기가 올라오니 어쩐지 녀석이 내 친구라는 사실이 조금이나마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그래서 나는 녀석과 과장이 말하고 있는 자리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너무 경망스럽게 앉았다 싶기도 했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서 일단은 안심을 했고그네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척 하다가 경험에서 우러나온 순발력을 이용하여 그 대화에 파고들었다과장님 이 친구 좀 잘 봐주세요저는 이제 나가지만 이 친구는 아직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제가 이 친구랑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라서 잘 아는데 정말 유능한 친구입니다사진촬영이라는 취미를 공유하고 있는지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고그래서 어쩌면 친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과장이었다과장은 잠시 시선을 술 잔 언저리에서 돌리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어디 공익이 감히 그렇게 마음대로 말을 하나어련히 윗사람들이 알아서 하는 거지구청에서 귀엽다 귀엽다 해주니까 이건 너무 한 거 아냐그래 뭐 이제 말년이라 이거야어디서 이래라 저래라야말년은 공익 아닌가너무나도 갑작스런 호통에 나는 그만 기가 확 죽어 버렸다나머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우리 쪽에 집중 되었다슬금슬금 그들 사이에서 새로운 화제가 돋아나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죄송하다고 말하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마주 앉은 녀석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정지됐던 시간은 과장이 젓가락인지 숟가락인지를 들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똘똘 엉켰던 여직원들의 화제도 다시 느슨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그래도 나는 쉽사리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그저 물끄러미 테이블 밑으로 뻗어 나온 녀석의 발만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이후로 나는 사람들에게 정신을 차린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애썼다특히나 과장에게는 더욱 신경을 썼다회식 다음 날 과장의 책상에 찾아서 꾸벅 인사를 하며 죄송했다는 말을 꺼냈지만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지나치게 통 큰 모습을 보여주는 과장이었다그리고 녀석에게도 이제는 실장님이라는 호칭을 꼬박꼬박 붙였다그 전에도 공석에서는 빼먹지 않았지만 이제는 사무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무조건 직함으로 호칭하기로 했다이거 원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뭐 어쩔 수 없지대신 어려워하기 없기다우린 친구잖냐녀석은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마지못해 그렇게 하자고 했다못 본 사이에 성장이 빨랐던 것인지녀석의 키가 10층에서 바라보는 15층만큼이나 커보였다.

녀석이 발령 온 이후로 몇 개월 동안 내가 내 편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하나 둘 자석에 달라붙는 철가루들처럼 묘한 무늬를 그리며 그 녀석에게로 접근해 갔다다들 하나 같이 어차피 여기에는 오래 있지 않을 것이니 굳이 잘 할 필요까지야 있겠느냐며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물 밑으로는 서로 각자의 속셈이 있었다혹자는 내게 녀석의 좋아하는 물건이나 취미가 무엇인지 물어왔고혹자는 녀석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직원의 흠집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돌아다니기도 했다소집해제일은 명절연휴에 끼어 있었다그래서인지 그 날이 가까워져 올수록 직원들은 내게 차 키를 건네주며 자신의 차 트렁크에 있는 쇼핑백 좀 녀석의 차에 옮겨 실어달라는 등의 부탁을 해왔다그런 부탁은 보통 얼굴을 잔뜩 갖다 붙이고 속삭이듯 전달했기 때문에 그럴 때 마다 나는 사람들의 구취를 맡는 수고까지 도맡아 해야 했다소문이라도 났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들이 찾아왔다이제는 완전히 녀석의 전담 비서가 된 모양이 되놔서 나중에는 녀석이 아예 차의 보조키를 나에게 맡겨 놓을 지경이었다중학교 시절 나를 찾아오던 그 여자아이들이 생각났다다른 게 있다면 지금은 그런 부탁이 하나도 즐겁거나 반갑거나 뿌듯하지 않다는 거였다.

드디어 소집해제가 하루 앞으로 돌아왔고누군가의 제안으로 명절 회식 겸해서 나의 송별회를 하기로 했다. ‘겸 한다라는 게 왠지 찝찝했지만 그래도 호의로 받아들이기로 했다회식은 순조로웠다모임은 노래방으로까지 이어졌다노래 실력이 꽤나 좋고다양한 연령층의 노래를 소화해내는 재주가 있어서 노래방에서만큼은 인기가 최고인 나였다내 차례가 돌아와서 한창 부르고 있는데 녀석이 문을 열고는 황급히 내 이름을 부르면서 손짓을 했다나는 뭔 일이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왜요 실장님녀석은 말없이 계속 손짓만을 할 뿐이었다손목을 흔드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아 왜요 실장님 무슨 일인데요아 새끼야 빨리 좀 나와 봐나오라면 나오지 뭐가 그렇게 말이 많어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나 생각해서 마이크를 양보하고 밖으로 나갔다얌마 내가 나오라는 건 다 이유가 있지 않겠냐노래방 복도의 할로겐 등 밑에서 녀석은 내게 차 키를 건넸다보조키는 아까 미리 반납한 터였다아니 차 키는 왜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녀석에게 물었다녀석은 민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아니나도 이제 선물을 돌려야 할 것 같은데 이것 참 체면상 또 내가 직접 할 수는 없잖아깜빡깜빡 나는 눈꺼풀로 눈을 닦았다.

부장과 과장 및 7, 9급까지 차를 가지고 온 모든 사람들의 차 키를 받아서 녀석의 차에 실린 선물을 옮겨 싣고키를 돌려주고차를 가져오지 않은 사람들에겐 노래방 로비에 선물을 쌓아둬서 나가면서 가져가도록 하는 것이 그러니깐 녀석의 말에 의하면 마지막 임무였다어느 방에 쳐박혀 있는지 모를 과장과 부장을 찾아서 헤맸다그렇게 마지막 임무를 다 끝내고 나니 타이밍도 좋게 사람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남은 선물은 따로 모아서 차 안 가져오신 분들은 하나씩 들고 가시라고 안내하면서 인사를 했다마지막까지 이렇게 고생만 하다 가서 어쩌냐고 사람들은 말을 해주었다마침내 모든 인원이 다 퇴장하고 나는 내가 있던 방에 들어가서 싸늘한 주검을 수습하듯이 외투와 가방을 챙겨 나왔다건물을 나가니 녀석이 기다리고 있었다마지막 날이니깐 같이 가자.

녀석은 직접 운전을 했다이제 다 끝났네감회가 어때그런 진부한 멘트를 녀석은 잘도 던졌다대충 얼버무리자 녀석은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나는 어미를 어떻게 매듭지어야 할지 몰라서 그냥 혼잣말 비슷하게 흐리게 대답하며 고개만 세차게 흔들었다그런 내게 녀석은 좀 더 씩씩해지라는 둥확고해 지라는 둥의 훈계를 추가했다말이 많아 진 걸 보니 안 그래보여도 좀 취기가 돌긴 한 것 같았다나는 안전벨트를 확인했다오늘 따라 음주 단속도 하지 않는구나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녀석은 자기 친구가 경찰에 있어서 음주단속을 어디에서 하는지 미리 알아봤다고 했다문득 세상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투박한 대화가 오고 감에 따라 나는 조금씩 말을 낮출 수 있었고우리말에 존재하는 높임법이 완전히 낮아졌을 때 녀석의 차도 속도를 멈추었다고생했다푹 쉬고조만간 언제 또 술 한 잔 하자동네 안쪽으로 들어가는 게 귀찮은지 녀석은 나를 큰길가에 내려줬다씁쓸했지만 그래도 가시방석을 벗어나니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병신 같은 새끼따가운 배기음을 내며 멀어져가는 차 뒤로 그런 단어가 툭 떨어졌다녀석의 목소리가 아닌 세상의 목소리였다그리고 아직 더운 밤공기하지만 역시 또 엄연히 가을이었다처음으로 마주한 사회그것도 사람들이 말하길 비교적 온순한 사회라고 하는 그곳에서 돌아왔다완전히 돌아온 것이었다집으로 가는 길에 문득 하늘을 바라봤다분명 높고 높은 가을 하늘일 텐데 별이 보이지 않았다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왠지 마음이 조급해져서 나는 고개까지 두리번대며 별을 찾았다다행히 저 멀리 구석에서 낮게 반짝이는 별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이제는 잠시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어떻게든 쉴 수 있겠지.

저녁을 묻는 어머니께 오늘 송별 회식해서 잘 먹었다고 둘러댔다모두가 잠든 밤불을 밝히지 않아 어두운 거실에서 지친 몸을 소파에 던져놓고 리모컨을 집어 들어 TV의 채널을 돌리던 중에 나는 그것을 볼 수 있었다화면의 우측 상단에는 흰색 반투명의 글씨로 에어리언 vs 프레데터라는 제목이 새겨져있었다얼마 전에 개봉 소식을 들었던 속편 영화였다양말도 벗지 않은 채로 나는 영화에 몰입했다처음에는 소파에 기대어 앉은 채였지만 점점 무너져 이내 완전히 옆으로 누워버렸다인간들과 싸우던 아니 인간들을 학살하던 프레데터는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존재인 에어리언이라는 괴물과 싸우게 된다물론 여기에는 인간도 등장한다그래서 약간 삼파전의 양상을 보인다역시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프레데터의 무기였다에어리언은 인간들보다 더 강하고 사나운 존재였기 때문에 그것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프레데터는 더 상위의 기술을 사용해야 했다그리고 드디어 인간은 프레데터에게 인정을 받게 된다처음에는 에어리언이든 프레데터든 모두 적으로 분류했던 인간들은 나중에 프레데터가 아군인 것을 깨닫고는 그와 함께 힘을 합쳐 괴물을 물리쳤고 프레데터는 그런 인간을 전사로 인정했던 것이다그에 대한 표시로 프레데터는 날카로운 손톱을 이용해서 인간 여전사의 얼굴에 한 줄의 흉터를 그려주었다그렇게 여운을 남기며 영화는 끝이 났다매우 반가운 기분이었고그 만큼 영화의 플레이 타임은 유난히도 짧게만 느껴졌다우주를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처럼 눈알이 뻑뻑해짐을 느꼈다눈꺼풀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돌려 유리창 밖에서 그르릉거리는 도시를 바라봤다영화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살아 있는 세상이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과연 프레데터는 있기는 있는 것일까가볍게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던져봤지만 아직까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돌아왔다아니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지하지만 있다고 해도 어쩌면 에어리언들이 인간을 다 죽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래도 프레데터라면 그렇게 내버려두진 않겠지그래 프레데터라면 말야아니 만약 내가 프레데터라면……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거룩한 소리를 내며 고른 숨을 몰아쉬는 세상은 미끄러운 혓바닥으로 나를 핥고 있었다.

 

얼마 뒤에 드디어 나는 꿈에 그리던 프레데터를 만났다나는 프레데터끼리 싸우는 한복판에 있었다도심지의 관공서 같은 건물에서 벌어진 전투였다어떻게 된 일인지 벽이나 창틀은 온통 전투가 남긴 흉터로 가득했다너무나 갑작스럽게 전쟁의 한복판에 떨어진 꼴이라서 나는 허둥지둥 대며 몸을 건사하는데 급급했다그리고 그 와중에 전세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특유의 붙임성으로 이기는 쪽에 붙었다인생의 모든 경험이 함축되어 있는더럽고 힘겨운 공익 생활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만들어준어머니당신께서 언제나 아들의 자랑으로 생각하는 붙임성이었다조금은 기회주의자 같고박쥐같지만 아무튼 우리 팀이 이겼고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주위를 돌아보니 온통 프레데터의 초록색 핏물로 흥건했다만져볼까 생각도 했지만 에어리언의 피가 강한 산성인 것을 생각할 때 이 녀석들의 피도 만져서 별로 이득이 될 것 같진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영롱한 형광색으로 빛나는 그것은 콧물 같기도 했고언젠가 힘겹게 뱉어냈던 가래 같기도 했다.

전사자도 발생하는 치열한 전투가 끝난 뒤각종 공사자재가 쌓여져 있는 공터에서 모여 쉬고 있을 때였다폐차가 담장처럼 쌓여있는 공간이었다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인지 대여섯 명의 프레데터들은 하나 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터벅터벅 사방에서 천천히 모여들었다그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날카로운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모습은 정말로 인상적이었다대장을 중심으로 모여든 그들은 잡히는 대로 고물을 깔고 쪼그려 앉았다둘러앉은 전사들의 가운데에는 나무토막을 넣은 드럼통이 불타고 있었다한껏 달아오른 드럼통은 이따금 눅은 녹을 뱉어내며 쩡하는 소리를 냈다어쩐지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나만 혼자 인간이라서 불이나 쬐며 이리저리 살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는데갑자기 대장 프레데터가 다음 주에는 남녀공학 중학교로 일하러 간다고 자랑을 했다중학교라……그게 왜 자랑이 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중아니면 그다지 볼 것이 없다고 얘기해 주었다요즘 애들은 중3이 제일 예쁘다고딴에는 유머라고 껄껄대기까지 하면서 말했는데 프레데터는 날 좀 어이없는 눈빛으로 바라봤다그러다 그는 문득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드럼통의 이글대던 불꽃마저 다소 점잖아질 정도로 진지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나는 드디어 영화에서 봤던 그 여자처럼 프레데터에게 전사로 인정을 받는가보다 하는 생각에 몹시 설레였다그는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마치 내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리고 오랜 정적 끝에 그는 자신의 투구를 벗었다그의 흉측한 맨 얼굴이 드러났고 구청 직원들이 내게 얼굴을 들이밀 때 마다 맡아야 했던 것과 비슷한 묘한 구취가 들이닥쳤다드디어 그가 입을 움직여 내게 말했다.

 

내 아들

눈을 뜨니 시간마저 덮어버린 어둠 저 너머로 어머니의 형상이 보였다그만 소파에서 잠이 들어 버린 듯 했다.

들어가 자야지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무중력의 세계에서 지금 막 중력의 세계로 돌아온 기분이었다어머니가 손수 양말을 벗겨주신 맨발이 바닥에 닿자 지구의 환영인사가 느껴졌다오금을 타고 올라오는 중력을 씹으며 투덜거리는 걸음으로 침대로 갔다창문 밖이 온통 캄캄한 것이 세상도 이미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어쩐지 오한이 느껴져 양 팔을 쓸어내렸고허물 같은 옷을 벗고 바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서 데워지지 않은 이불의 촉감 전해져 올 때는 왠지 시시하다는 기분이 들었다이제는 또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설마 이보다 더 나쁜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이 정도의 고난을 이겨냈으면 무슨 일이든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아니다시 생각해보니 인생이란 그렇게 만만치는 않은 것 아닌가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이란 녀석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선사할 것이다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또 다시 프레데터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거의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었다반듯하게 누운 눈앞의 천정이 점점 한 덩어리의 거대한 어둠으로 변해갔다문득 프레데터들이 궁금해졌다다음 주에는 중학교로 근무를 간다고 했는데 어떻게잘하려나잘해낼 것이다그들은 어떤 어려움이 찾아오더라도 이겨낼 것이다우주에서 가장 사나운 괴수도 반드시 무찌르는 최강의 전사들이니까 말이다그나저나 중학교로 간다는 대장에게 했던 조언이 좀 잘못됐던 것 같다좀 다르게 제대로 된 대답을 할 껄 그랬다뭐라고 해야 했을까아니 그보다 대장 프레데터는 내게 무슨 말을 하려했던 걸까그 대답을 꼭 듣고 싶었다아마도 꿈이 이어진다면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나도 그들 같은 전사가 될 수 있을까이윽고 몸이 푹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침대보를 뚫고 매트리스 속 너머 어딘가에 존재하는 세상 가장 깊은 곳을 향하는 기분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투명해져서 나는 드디어 어둠의 캄캄함과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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