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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우물

by 통합메일 2013.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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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첨벙

또 누가 떨어진 모양이다

친구들은 안간힘을 쓰며 벽을 기어올랐다

축축한 벽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와글와글 울었다

너도 빨리 올라 오렴

호기심, 경멸, 동정, 혐오가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차피 입구는 막혔어. 올라가 봤자야

그래도 그 물 속에 있는 것보다는 낫잖아?

대답 대신 나는 검은 심연으로 잠수했다

말라비틀어진 청춘과, 시체가 된 꿈들이 부유했다

나는 수몰되어 끊어진 계단 밑에 숨었다

체온은 차디찬 수온을 닮아 가는데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꺾이지 않는 희망이 있었다

입을 벌리면 부끄러운 비밀들이 기포가 되어 솟구쳤다

모두 삼켜야만 한다

검은 물에 잡아먹히기 싫으면

검은 물을 잡아먹는 수밖에

나는 끊임없이 들이마셨다

내일을 지켜주지 못한 베란다 난간과

모기향처럼 피워놓았던 연탄

엉뚱한 곳에 박혀버린 식칼

너무 많이 삼켜버린 수면제

하지만 이번에도 사레가 들렸다

모두 다 토해버렸다

그을린 물 위로 나는 천천히 떠올랐다

그 새 친구들은 더 높은 곳까지 올라 있었다

모두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 봤다

누군가 닫힌 입구를 두드려 보지만 반응은 없었다

와글와글 와글와글

이젠 나도 슬며시 벽을 기어오르며

와글와글 와글와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잔뜩 힘을 주고

와글와글 와글와글

몰래 밑을 내려다보며

와글와글 와글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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