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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무

교원임용고시 5수째, 또 떨어지다.

by 통합메일 2014.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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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적은 글 대로 오늘은 2014년 중등교원임용고시 (공립 중등학교교사 임용후보자 선정경쟁시험)의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이다. 지난 10월에 많은 임용고시생들이 각자 지원하고자 하는 지역의 교육청 홈페이지에 가서 원서접수를 하고, 2013년 12월 6일에 해당 지역교육청이 지정한 시험장에 가서 시험을 봤다. 나도 그 중에 한 명이었다. 그리고 딱 한 달이 지난 오늘 그 시험 결과가 발표되었다. 나는 세종시로 시험을 봤다. 매년 충북만 쓰다가 작년에 하필 충북 커트라인이 높아서 0.6점 차이로 탈락한 경험 때문에 차마 또 충북을 쓰지는 못하고, 대신 집에 가깝고, 새롭게 발전되는 세종으로 지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떨어졌다.


이 짓도 어언 5년 째다. 03년도에 대학에 들어가서 사범대로 전과를 하고, 나름 큰 꿈을 품고 대학생활을 했던 것 같다. 과 학생회장 일을 하면서 참 즐거웠다. 과 내부에서 세력 다툼이나 남녀 간의 알력 싸움도 있었지만 우리과 학우들은 정말 좋은 사람이 많았다. 말년에 잘못된 연애를 시도하다가 결국 모든 평판을 잃으면서 졸업을 하기는 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대학생활은 미련과 아쉬움과 추억으로 점철되는 것이었다. 아마도 많은 우리과 학우들이 그러리라 생각한다.


다만 졸업을 하고, 임용고시라는 벽을 마주하게 되노라면 그때부터는 세상과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 전공 임용고시 경쟁률은 10 대 1 안팎이다. 우리과 한 해의 졸업정원은 약 15명 정도다. 그 말은 졸업하는 사람들 중에 한 두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험에 낙방한다는 확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실력이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는 학교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합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중에서도 누군가는 또 탈락을 한다는 의미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는 훨씬더 많은 사람들이 탈락을 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돌아보면, 위에서는 행복했고 즐거웠다고 적어두었지만, 그런 한편으로 우리는 신나게 웃다가도 어느 순간 문득 알 수 없는 불안에 걷잡을 수 없는 침묵을 공유하는 경험을 숱하게 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지금 나와 함께 웃고 있는 이 사람이 나의 경쟁자라는 사실은 분명히 슬프고 씁쓸한 일이지만, 그러한 사실에 스스로가 익숙해져간다는 사실을 목도하는 일은 그것보다 몇 배나 더 못 할 짓이었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 시험만 어렵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런 의미라면 이것은 어떤 의미로든 어리광으로 받아들여져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동안 심심하면 한 번씩 대두되는 임용이나 청년 일자리에 대한 사회정책적 비판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에 대한 이야기로 읽혀졌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중등보다 비교적 경쟁률이 약한 초등임용고시생들의 탄식과 고통에 대한 고백에 대해 공감한다. 2 대 1이든 10 대 1이든 함께 4~6년이라는 세월을 같이 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비릿하게 자조 섞인 미소를 흘리며, "이 중에서 누군가는 떨어지겠지."라고 말하곤 잠시 뜸을 들였다가 "하지만 모두 다 붙었으면 좋겠다."라고 주문처럼 되뇌이는 말에 너나 할 것 없이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리는 일에는 변반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쩜 세상은 이런 것일까.


한정된 재화 때문이다. 굳이 말해야 입만 아픈 소리다. 당연한 말이다. 


지지난 시험까지만 해도 '내가 떨어짐으로써 다른 누군가 정말로 이 직업이 간절한 사람에게 기회가 돌아갔으리라 믿는다.'고 합리화하며 힘겹게나마 스스로 자위하는 일이 가능했다. 하지만 5수에 이르니 '이젠 나도 간절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젠 나에게도 기회가 와도 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과 함께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유난 떨며 공부해도 된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게 맞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게 되었던 것 같다.


불합격을 확인하고, 올해 함께 공부한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어떻게 됐니. 나 떨어졌다."라는 내 질문에 후배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아주 미안한 음색으로 "나..나는 잘 됐어."라고 대답했다. 나는 있는 힘껏 씩씩하게 "그래 잘 됐구나. 아이고 나는 뭐 어떻게 어떻게 계속 살아봐야지"라고 말하며 웃었다. 웃어야 하는 사람과 미안해야 하는 사람이 바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통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조만간 또 보자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1차 시험 이후로 함께 2차 시험을 준비했는데 이제는 함께 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뒤에 남은 사람만큼이나 혼자가 되어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사람의 마음 역시 한없이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나는 짐작했다.


이제 이렇게 서른을 맞았다. 노곤하고 지겨운 일상에서 저녁을 맞듯 그렇게 서른을 맞이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의 저녁이 한없이 혼란스럽게 다가오는 일을 어쩔 도리가 없다. 돌아온 집에서 나보다 앞서 절망한 아버지가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맞이해 주셨다. 술이나 한 잔 할테냐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술이야 좋지만, 내키지 않았다.


노력, 운, 정책....원인이야 무엇이든, 이것이 내 삶의 무게라면 피하지 말고 온전히 맞이하는 게 삶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차분한 저녁으로 돌아가리라. 물론 그것이 어린시절에 꿈꾸던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의 저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저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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