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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

영화 <변호인> 영화감상문

by 통합메일 2014.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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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 (2013)

The Attorney 
9.6
감독
양우석
출연
송강호, 김영애, 오달수, 곽도원, 시완
정보
드라마 | 한국 | 127 분 | 2013-12-18
글쓴이 평점  




영화 <변호인> 영화감상문

목차

1.소개

2.줄거리

3.부림 사건

4.노무현에 대한 향수

  (1)고인에 대한 연상

  (2)영화의 정치화(평점 테러)

  (3)영화에 대한 진정한 평가란

5.감정의 과잉과 변증법

  (1)영화 속의 과잉

  (2)영혼 분열의 대한민국

  (3)이성과 감정의 정치적 변증법

6.정치공학과 정치철학 (법공학과 법철학)

  (1)철학과 공학의 딜레마

  (2)어 퓨 굿 맨(A few good man)의 모티브

7.국가란 무엇인가

  (1)안보와 민주주의-홉스, 로크, 루소의 국가관과 관련하여

  (2)국가실재론과 국가유명론

8.북한은 왜 나쁜가? 영화 속의 불의한 정권은 왜 나쁜가?

9.애국주의의 흉터

5.시민불복종

  (1)법실증주의와 자연법론

  (2)시민불복종의 조건

7.민주주의 - 우리 아이들은 그런 세상에 살지 않도록.


1.소개

이 글은 영화 <변호인>을 시청하고 작성한 영화감상문이다.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티브로 하여 제작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양우석 감독이 연출을 맡고, 제작사 NEW가 배급을 맡은 이 영화는 33일 만에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고, 대한민국 영화중에서 아홉 번째로 천만관객을 동원한 영화로 기록되게 되었다. 2013년 12월 18일 개봉했으며, 송강호, 김영애, 오달수, 곽도원, 시완, 송영창, 정원중, 조민기 등이 출연했다. 필자는 대학에서 윤리교육을 전공했으며, 그 동안 공부하고 생각해온 사회계약론 및 국가권위 및 정당성의 문제, 자연법과 법실증주의의 문제 그리고 시민불복종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 감상문을 작성하였다. 글의 분량은 23페이지다.


2.줄거리

최종학력이 부산상고 졸업인 고졸 청년 송우석은 사법고시생이다. 사법고시에 붙기도 전에 그는 결혼을 했고, 자식까지 낳았다. 그는 지독하게 가난했다. 당장 아이를 낳은 아내의 병원비가 없어서 장모에게 손을 빌려야 할 처지였다. 돈이 없어서 국밥집의 밥값을 떼먹고 도망치기도 했다. 자식이 태어났건만 여전히 무능한 자신을 바라보면서 잠시 사법고시를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 모진 노력 끝에 마침내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로 임용이 됐다가 변호사로 전업하여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왔다. 막상 판사가 되기는 했지만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그는 학연이 없었기 때문에 변변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고, 그러한 한계를 직시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홧김에 내려오긴 했지만, 막상 고향에 돌아오니 변호사 딱지만 달았지 제대로 돈벌이를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선배 변호사를 찾아가 돈을 빌려 사무실을 내고, 당시 사법서사들이 주로 맡아서 처리하던 부동산 등기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변호사임에도 체면을 차리지 않고 나이트 삐끼마냥 여기저기 명함을 돌리면서 영업을 뛰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 그의 사무실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사무장도 뽑고 비서도 뽑았다. 많은 돈을 벌었다. 그도 이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게 되었다. 번듯한 아파트로 이사한 날,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7년 전 그가 무전취식을 했던 그 국밥집을 찾아갔다. 밥값을 갚으려는 그를 국밥집 주인아주머니는 참으로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의 사법고시 합격 소식을 마치 자신의 일인 것 마냥 기뻐했다. 그가 건네는 돈도 극구 사양했다. 오래된 빚은 돈이 아니라 얼굴과 발로 갚는 것이라며 자주 찾아오라고만 했다. 그녀의 말대로 그는 정말로 그 국밥집을 자주 찾았다. 사무실 직원들은 물론 동창회도 그 국밥집에서 열었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잘 나가는 변호 송우석은 정말이지 세상을 다 가진 것 가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송우석 변호사는 동창회 모임 멤버들을 데리고 국밥집을 찾는다. 잘 나가는 변호사가 된 그는 동창회의 회장까지 역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잘 나가는 친구를 둔 송우석의 동창들은 입을 모아서 그를 칭찬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 와중에 씁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이가 한 명 있었으니, 송우석의 동창이자 부산신보 신문기자로 일하고 있는 이윤택 기자였다. 그는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좀처럼 녹아들지 못하더니 이내 따로 앉아 TV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TV에는 이른바 땡전뉴스라고 하는 당시의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정을 전하는 뉴스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윤택과 송우석 사이에 말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좀 알고 살라고. 지금 세상에서 가장 못 믿을 것이 신문이고 방송이라고, 이윤택은 송우석에게 그렇게 말했다. 한편 송우석은 서울대까지 가서 저렇게 데모하는 학생들은 다 공부하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라며 이윤택이 옹호하는 이들을 폄하했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살아온 세상은 데모 몇 번으로 그렇게 쉽게 뒤집히는 세상이 아니라고 말했다. 언쟁은 갈수록 점입가경으로 격화되어갔다. 윤택은 윤택대로 고졸 학력인 송우석이 가지고 있는 대졸자들에 대한 열등감을 자극했고 결국 두 사람은 몸싸움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가게에는 주인집 모자와 송우석만 남게 되었다. 윤택과 우석의 논쟁을 지켜본 주인집 아들 박진우는 이전과 달리 송우석에게 쌀쌀맞게 대했다. 아직 잔뜩 술에 취한 송우석은 자신이 가게를 부숴서 그러는 거냐며 그에게 돈을 내민다. 하지만 민주정신으로 인해 현정권에 대한 강한 반감과 분노를 가지고 있는 진우는 그렇게 내미는 돈을 받지 않았다. 감정이 격해진 우석은 그만 그런 진우에게 욕을 하고, 국밥집 주인아주머니가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자신의 아들에게 욕을 하는 우석을 그녀는 소금까지 뿌려가며 거칠게 내쫓았다. 그렇게 씁쓸하게 우석은 가게에서 쫓겨났고, 지독하게 쓴 입맛을 다셔야했다.

한편 그때 즈음 저 멀리 서울에서는 무시무시한 음모가 벌어지고 있었다. 바야흐로 때는 1981년인가 1982년, 광주민주항쟁에서 정부의 공권력이 군사력을 동원하여 민간인을 학살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렇게 엄청난 사건이 있었건만 정부가 방송을 장악한 탓에 그러한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국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어가기 위해서 정권을 잡은 이들은 용공사건을 조작하곤 했다. 이번에는 부산에서 그런 일을 벌이기로 뜻을 모았고, 그 일을 위해서 차동영 경감이 파견되었다. 그렇게 파견된 차동영은 부산의 강 검사와 함께 국가보안법 사건을 조작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문  당하는 이들의 응급처치와 치료를 위해 육군에서 군의관 한 명을 차출한다. 윤 중위라는 이 군의관은 고문의 실상을 낱낱이 목격하고 나중에 법정에서 결정적 증언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드디어 차동영 경감을 앞세운 정부의 공산혁명세력 조작이 시작되었다. 자의적으로 불온서적을 규정하고 그러한 서적을 근거로 하여 한 무리의 대학생들을 체포했다. 그리곤 가족들에게 연락도 하지 않은 채로 구금하면서 각종 고문을 통해 그들로부터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지만 지독한 고문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국밥집 아주머니에게 아들의 소식이 전해진 것은 재판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체포 된지 두 달 만에야 그녀는 아들의 행방을 알 수 있었다. 그 동안 그녀는 자식의 행방을 찾아 부산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녔고, 심지어는 무연고 시체 공시소까지 뒤지곤 했다. 아들을 만나기 위해 그가 수감되어 있다는 부산구치소를 찾아갔지만 면회가 거절되었다. 원래 법이 그렇다는 교도관의 말 앞에서 그녀는 수긍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는 송우석 변호사를 찾아가게 된다.

그즈음 송우석은 그동안 재미를 보던 부동산 등기 업무에서 손을 떼고 세금 관련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처음 그가 부동산 등기 업무를 시작했을 때 다른 변호사들은 그를 비웃기에 바빴지만 그가 그 일로 제법 많은 돈을 벌게 되자 다른 변호사들도 앞다투어 송우석을 따라 부동산 등기업무를 맡게 되었고, 또 그럼으로써 사법서사라는 직종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을 빼앗기게 되자 맨 처음 그 일을 맡기 시작한 송우석 변호사를 규탄하는 시위까지 열기도 했던 것이고, 이 일도 더 이상 비전이 없다고 판단한 송우석 변호사는 상고를 졸업한 자신의 경험을 살려 면세 업무를 주력 사업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이제 송우석은 부동산 등기 전문 변호사에서 세금전문 변호사로 탈바꿈했고 이름을 날렸다. 세금 업무를 유명세를 타자 해동건설이라는 국내 10위권 안에 드는 굴지의 기업에서 손을 내밀어 오기 시작했다. 해당 기업에서는 송우석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조건으로 스카웃 제의를 해왔다.

그런데 그때 국밥집 아주머니가 송우석을 찾아왔다. 구치소에 갔다가 아들을 얼굴조차 못 보고 돌아온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이 사건에 분노하는 선배 변호사도 그에게 사건을 맡아주지 않겠느냐고 부탁을 해왔다. 처음에 송우석은 그들을 외면하지만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남아있는 정의감이 그로 하여금 다시 그녀를 돕게 만들었다. 우선 그는 하주머니와 함께 구치소를 찾아가 법률적 능력을 이용해 불법 체포되어 수감 중인 박진우와의 면회를 성사시킨다. 그런데 막상 만나본 아들은 그 상태가 좀 이상했다. 잔뜩 겁에 질린 듯 사람과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고 그저 잘못했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그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쓰러지듯 안기는데, 쓰러지면서 그의 살갗이 드러나고 그 위에 얼룩진 피멍들이 발견된다. 진우의 몸을 본 송우석은 순간적으로 고문을 확신했다. 듣기로 진우가 연루된 사건은 <부면동 사건>이라고 했다. 정부에 의하여 계획적으로 조작된 반정부 용공분자 사건. 분노한 송우석은 밤을 새워 그들이 읽었다는 불온서적을 분석하고, 선배 변호사를 찾아가 자신이 이 사건의 변호를 맡겠노라고 공언한다. 하지만 증거는 없었다. 다음날이 바로 첫 공판이었기 때문에 증거 없이 재판장에 들어가야 했다. 법원에서 그는 강검사와 판사를 만나게 된다. 강검사는 여러모로 인맥이 넓은 인물이었다. 법원에 모든 인물들이 그의 편인 것만 같았다. 재판 관련자들 모두가 무난한 진행을 기대했지만 재판이 채 시작하기도 전에 송우석은 각종 이의를 제기하면서 이 재판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걸 예고했다. 송우석은 피고인들이 쓴 자술서는 고문에 의해 강요된 것이기 때문에 증거능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주장했지만 검사 측은 고문은 없었으며, 피고인들 몸에 남은 상처들은 피고인들이 자해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첫 공판이 끝나고 송우석은 진우의 기억을 토대로 불법 구금과 고문이 이루어졌던 장소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장소를 찾아냈다. 각종 흔적을 통해서 그곳에서 고문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신한 그를 누군가가 기습했다. 그를 기습한 것은 이 사건을 진두 지휘한 차동영 경감이었다. 차동영은 송우석을 흠씬 두들겨 팬 다음 건물 바깥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곤 쓰러져 켁켁 대는 송우석에게 우리나라는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그저 쉬고 있을 뿐인데 당신 같은 사람들이 마치 전쟁이 끝난 줄 아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게 다 누구 덕분인지 생각해보라고, 그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 목숨 걸로 빨갱이들을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외쳤다.

두 번째 공판과 세 번째 공판이 이어졌다. 송우석은 영국 대사관을 통해 영국 외교부와 접촉하여 국가가 지정한 불온서적이 사실은 전혀 불온하지 않은 책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하지만 그런 반박은 별 힘을 얻지 못했다. 나아가 그는 학생들을 불법 감금하고 고문한 차동영 경감을 증인으로 세운다. 하지만 증언대에 선 차동영은 자신의 죄를 실토하고 뉘우치기는커녕 고문은 전혀 없었으며 피고인들의 상처는 자해의 흔적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곧 국가라는 취지의 발언을 외쳤고, 국가는 곧 국민이라고 주장하는 송우석과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공판을 앞둔 어느 날 그 동안 우리가 잠시 잊고 있던 한 인물이 송우석 변호사와의 비밀스런 만남을 주선한다. 송우석은 자장면 배달부로 위장하여 그를 만나러 갔다. 그는 바로 고문 피해자들의 응급처치와 치료를 맡았던 군의관 윤 중위였다. 그는 피해자들을 위하여 기꺼이 증언하겠노라고 했다. 송우석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되었다. 무례를 무릎 쓰고 판사의 집을 찾아가서 증인 신청을 받아줄 것을 요구했다. 판사는 거절했지만 외신기자들을 앞세우고 들어오는 송우석의 요구를 결국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공판, 드디어 윤 중위의 증언이 이루어졌다. 불법 구금과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이 증언되었다.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검사 측도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반대 심문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눈치 빠르게 재판장 밖으로 나갔다 온 차동영, 그는 쪽지 한 장을 검사에게 건넨다. 증인으로 윤 중위가 들어오는 것을 본 그는 재빨리 바깥으로 나가서 육군 헌병대로 전화를 걸어, 정식으로 휴가를 얻어 나온 윤 중위를 탈영병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차동영이 건넨 쪽지를 받아든 강 검사는 윤 중위는 비열한 탈영병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의 증언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판사는 그 말을 받아들여서 그의 모든 증언을 삭제한다. 그리고 윤 중위는 헌병대에 끌려가게 된다.

그렇게 모든 게 끝났다. 박진우를 비롯한 학생들은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고, 거기엔 2년 뒤 가석방되는 조건이 달렸다. 국밥집 아주머니를 비롯한 모두가 최선을 다 한 그를 격려했다. 뜨끈한 돼지국밥 그릇이 그의 앞에 놓였다. 정말 그게 최선이었을까. 그런 표정으로. 조금은 초점이 풀린 눈으로, 그는 힘겹게 국밥을 입에 떠 넣는다.

이제 화면이 바뀐다. 5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 때는 바야흐로 1987년. 6.10 민주 항쟁이 일어났던 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추모제의 진두에 선 송우석. 시위 도중에 그는 체포되었다. 법조인이 실정법을 위반하면 어쩌냐는 검사의 질문에 그는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가 무시당하는 국가에서 살아가는 법조인이기에 더욱더 그러한 실정법을 어겨가면서도 싸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영화는 송우석이 재판을 받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삼는다. 재판관이 법정에 입장하고 송우석의 변호인 석에 앉은 그의 선배 김상필 변호사는 판사에게 변호인 명단을 제출한다. 송우석의 변호를 자처하는 변호사가 너무 많아서 이렇게 명단으로 만들어서 제출했다고 했다. 그 명단에는 부산 지역의 145명의 변호사 중에서 99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판사는 한 명 한 명 그 이름을 불러나간다. 그리고 그 이름의 행렬은 좀처럼 끝날 줄을 몰랐다. 피고석에 앉은 송우석의 뒤로 하나 둘 일어서면서 빽빽해지는 변호인들의 숲. 그 지지가 선사하는 든든함에 송우석은 젖은 눈시울로 우리를 바라본다.



3.부림 사건

이 영화에는 <부면동 사건>이라는 정부가 조작한 용공단체 사건이 등장한다. 이것은 과거 1981년에 부산에서 발생했던 부림 사건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부산의 학림(學林) 사건'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1981년 3월 출범한 제5공화국의 군사독재 정권이 집권 초기에 통치기반을 확보하고자 민주화운동 세력을 탄압하던 시기에 일어난 용공(容共) 조작사건이다. 1981년 9월 부산 지검 공안 책임자인 최병국 검사의 지휘하에 부산 지역의 양서협동조합을 통하여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교사·회사원 등을 영장 없이 체포한 뒤, 짧게는 20일에서 길게는 63일 동안 불법으로 감금하며 구타는 물론 '물 고문'과 '통닭구이 고문' 등 살인적 고문을 가하였다. 이로써 독서모임이나 몇몇이 다방에 앉아서 나눈 이야기들이 정부 전복을 꾀하는 반국가단체의 '이적 표현물 학습'과 '반국가단체 찬양 및 고무'로 날조되었다.

그해 9월 7일 이상록(부산대 졸업, 선반공)·고호석(교사)·송세경(회사원)·설동일(농협 직원)·송병곤(부산대 졸업, 공원)·노재열(부산대 4년)·김희욱(교사)·이상경(부산대 1년) 등 8명이 1차로 구속되었고, 10월 5일 김재규(상업)·최준영(설비사무사)·주정민(부산대 졸)·이진걸(부산대 4년)·장상훈(부산대 졸업)·전중근(공원)·박욱영(부산공전 졸업)·윤연희(교사) 등 8명이 2차로 구속되었다. 또 이듬해 4월 도피중이던 이호철(부산대 졸)·설경혜(교사)·정귀순(부산대 졸업)등 3명이 3차로 구속되었고, 대학 시위중에 구속된 김진모·최병철·유장현(이상 부산대 4년)과 탈영병 김영까지 연루되어 모두 22명이 구속되었다. 이들 중에는 재판을 받으러 법원에 와서 처음 대면하였을 정도로 무관한 사람들도 있었다.

검사측은 이들에게 국가보안법·계엄법·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적용하여 징역 3~10년을 구형하였고, 재판정은 5~7년의 중형을 선고하였다. 당시 변론은 부산 지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김광일·문재인 등이 무료로 맡았는데, 특히 노무현은 고문당한 학생들을 접견하고 권력의 횡포에 분노하여 이후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이들은 1983년 12월 전원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으며, 이후 부산 지역 민주화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였다. 부산 지역 사상 최대의 용공조작 사건으로 꼽히는 이 사건은 2000년대 이후 사법부에서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어 재심 판결을 받았다. 사건 피해자들은 1999년 사법부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기각되었다. 그러나 2006년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근거로 다시 재항고해 2008년 대법원에서 계엄법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재심 판결을 받았다.1)


4.노무현에 대한 향수

(1)고인에 대한 연상

서두의 <소개>에서 미리 적었듯이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소문으로 큰 이슈가 되어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제작사 측에서는 주인공 송우석의 이름도 주연배우 송강호와 양우석 감독의 이름을 조합한 것일 뿐이라고 하면서 이 영화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것은 우연일 뿐이라고 일축하기는 했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요소, 이를테면 가난에 찌든, 최종학력이 고졸인 남성이 사법고시를 포기하려고 하다가 결국 다시 도전하여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속물 변호사가 되었다가 다시 훌륭한 인권 변호사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하지 않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제작진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쨌든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고인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연상의 파급력은 입소문을 타면서 사회 전반이 이 영화를 고인의 일화를 그린 작품으로 낙인찍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 같다.


(2)영화의 정치화(평점 테러)

그런데 그러한 연상은 고인을 대하는 태도와 맞물려서 개인이나 정치적 군중 집단에게 있어서 상이한 평가로 이어지게 되었다. 고인을 훌륭하게 평가함으로써 그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주체에게 있어서 이 영화는 고인에 대해 더욱 더 자세하게 알 수 있고, 고인을 추억할 수 있는 훌륭한 매개체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고인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내리는 주체에게 있어서 그 영화는 고인을 미화시키기 위해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머지않아 두 주체 간의 갈등으로 이어졌고, 그러한 갈등이 구체화된 것이 바로 포털 사이트에서의 영화 평점 테러 사건 같은 것들이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이 영화에 대하여 가장 높은 평점인 10점을 주었고, 후자의 경우에는 가장 낮은 평점인 0점을 주었다. 이를 흔히 ‘빵점테러’라고 일컬었고, 인터넷의 영화 평점 페이지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갈등은 미약하게나마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영화평론가 허지웅은 전자든 후자든 이 영화를 극도로 정치화함으로써 영화 그 자체에 대한 감상을 방해하고 있다고 양쪽을 공히 비판했다가 이 영화를 옹호하는 진영으로부터 양비론자라는 비판을 듣고, 심지어는 협박 메일을 받기도 했다.


(3)영화에 대한 진정한 평가란

확실히 이 영화를 두고 벌어지는, 약간은 변증법적이기도 한 이 논쟁을 바라보면서 나는 확실히 그 갈등이 정치적으로 전개되면서 이 영화도 알게 모르게 정치적 영역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영화라는 것을 평가함에 있어서 실로 다양한 요소들이 고려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 영화를 평가함에 있어서 역사적, 혹은 정치적 요소가 영화 그 자체에 대한 평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러한 측면에서 나는 그러한 영화 외적인 요소들이 영화 그 자체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영화를 평가함에 있어서 내적 요소와 외적 요소를 구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질문부터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런 요소들을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내적요소라고 한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구성, 스토리, 음악, 촬영기법, 호흡, 개연성, 현실감, 액션, 배우들의 연기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외적인 요소에는 어떤 것이 있겠는가? 쉽게 말해서 내적 요소를 제외한 모든 것이 외적인 요소라고 할 것이다. 이를테면 위에서 언급된 역사적 혹은 정치적 요소들이 바로 그런 것이고, 캐스팅 된 배우의 인지도 같은 것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를 평가함에 있어서 외적인 요소를 끌어들여서 후한 평가를 내리는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결론이 반갑지 않을 것이다. 영화의 기법이나 완성도가 조금은 부족하고 아쉬운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다루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나 정치적 의지가 바람직하고 훌륭하다면 영화 그 자체에 대한 평가도 그러한 요소들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면 이른바 영화 평론에 있어서의 형평성이 무너진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과 정치적 의지에 대해 크게 공감하는 부분들이 있지만, 평화를 평가함에 있어서는 가급적 영화 외적 요소들은 배제된 채로 평가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소재와 의도만 가지고 영화를 평가한다면, 영화평론이라는 것 자체의 존재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자극적인 소재를 가지고 다수가 공감할 만한 의도를 내세워 만들기만 하면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영화라고 한다면 애당초 평가라는 것이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나는 애써 이 영화에 대한 좋은 평가에 집착하는 이들이 대중의 선호도와 영화에 대한 평가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나는 좋은 영화가 반드시 대중의 인기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귀납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사실이다. 전문가들에 의해서 명작으로 분류되는 영화들은 많지만 그것들이 항상 대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어온 것은 아니다. 평가는 그저 하나의 당위일 뿐이다. 그것은 바람직한 기준일 뿐이다. 나는 그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궁금하다. 그들은 정말로 영화에 대한 평가에 임하면서 보편성 검사를 거치기는 했던 것일까? 그들은 보다 많은 대중이 그런 영화를 보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그 근원적 동기를 따져 들어가 본다면 그들은 이 영화 그 자체가 주는 감동 보다는, 보다 많은 대중들이 자신이 이 영화에서 발견한 고인에 대한 평가에 동의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있어서는 대중들이 고인에 대하여 그렇게 자신이 동일한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된다면 굳이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그 어떤 다른 매체라도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한 평론이 아니지 않은가? 그저 영화를 수단시 하고 그러한 동기에서 이루어진 평가가 진정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이 영화에 대하여 영화 외적 요소를 이유로 평가절하 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5.감정의 과잉과 변증법

(1)영화 속의 과잉

이 영화에는 감정이 과잉되는 장면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영화평론가 허지웅의 지적처럼 주인공 배역을 받은 배우가 송강호가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쓰레기로 전락했을 법한 장면을 나는 몇 번인가 목격했던 것 같다. 이는 노래로 비유할 수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감정의 과잉은 노래를 부르면서 남용되는 기교와도 같은 것이다. 적절히 사용하면 그것은 노래에 개성을 부여하면서 또 다른 차원의 완성도를 가져온다. 하지만 그것이 남용된다면 한 순간에 노래를 싸구려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영화를 회상해보면 절정 부분은 물론이고 서두 부분에서부터 이미 ‘드라마틱’이라는 수사가 절로 떠오를 정도로 그 서사가 하나 같이 극적이다. 이를테면 주인공 송우석 변호사가 가난한 상태에서 부동산 등기 업무를 맡아 봄으로써 잘 나가는 변호사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비록 짧게 묘사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 하나만 가지고도 영화 한 편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은 소재다. 빚을 갚기 위해서 국밥집 아주머니를 찾아가는 장면은 또 어떤가. 7년 전 밥 값을 떼먹고 도망친 송우석을 그녀는 오히려 반갑게 맞이하면서 그의 성공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데, 그러한 스토리 역시도 매우 극적으로 묘사가 된다. 아주머니가 송우석을 껴안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배우 송강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영화는 오직 그의 표정 연기만으로 진행되는 순간을 갖는다. 경상도의 인심이라는 소재를 어필할 수도 있는 연출로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지나치게 감정이 과잉되어 피곤하게 다가오는 장면이었다. 이러한 장면이 잊을만하면 또 새롭게 튀어나온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게 되는데, 이를 거꾸로 말하면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는 말이고, 더욱 박하게 표현하자면 호흡이 거칠다는 말이 된다.

물론 이러한 연출은 장점도 있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이 영화를 봤는데 영화만 보면 졸음에 괴로워하시는 어머니께서도 지루함 없이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이 영화를 보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감상에 대하여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나서 스토리를 돌아보면 어디에 포인트를 맞춰야 할지 난감해진다. 임팩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영화 전체에 산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감상문에서도 줄거리만 세 페이지 분량이 나온 것도 그런 연유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이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에는 그러한 감정과잉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그렇게 큰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주연배우인 송강호 때문인 것 같다. 시나리오 상의 감정과잉이 엄존하기는 하지만 능력 있는 배우라면 그것을 훌륭하게 소화해 냄으로써 모종의 절제를 이루어 낼 수 있는 모양이다. 앞서 사용한 비유를 예로 들자면 음정과 음량이 넘친다 하더라도 가수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음색을 통해서 그러한 과잉을 상쇄시킬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송강호라는 배우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연기의 색깔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과잉을 상쇄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생각이 든다.


(2)영혼 분열의 대한민국

하지만 이 영화를 비롯하여 과거의 민주화를 소재한 영화들을 둘러싼 작금의 세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런 세태 속에서 이러한 감정 과잉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하는 주체들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몇 년 전에 제작두레를 통해 제작되어 개봉한 만화가 강풀 원작의 영화 <26년>에 대해서 대중이 보낸 평가를 보면 더욱 이해가 쉬우리라 생각한다. 그런 세태를 보면 대중은 영화의 완성도 보다는 그 영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소재와 그 의도에 더욱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나아가 그런 영화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감정의 과잉에 대해서 본능적 불편함을 느끼는 대신 오히려 그들은 그런 과잉에 대하여 열광해 마지않는 것 같다는 것이 나의 분석이다.

나는 그러한 세태가 대한민국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감정의 과잉이 바로 대한민국의 현 자화상인가? 일견 타당하지만 그것은 부족한 표현이다. 대한민국은 이성과 감정이 철저히 분열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인간의 영혼이 이성과 감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때 인간은 두 가지 능력을 공히 가지고 있지만, 두 능력을 조화롭게 사용하는 방법을 망각해 감으로써, 영혼의 부조화와 분열을 경험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대한민국은 때로는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때로는 철저하게 감성적이다. 그리고 그렇게 철저하게 감성적이 되는 지점에서 인간의 감정은 과잉하여 흘러넘치게 된다. 그런 증상이 구체화된 현상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감정 과잉된 매체에 대한 열광이 아닌가 한다.

이 글에서 굳이 인간의 본질이 이성인지 아니면 감정인지를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으며, 물론 영화는 감정의 대상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한 매체라고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 한 쪽으로 치우지는 일이다. 이것은 일종의 메타인지의 부재 문제 같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기 객관화에 있어서 장애를 겪는 문제다. 한없이 감정적이 되는 스스로를 객관적 시각에서 조망하지 못하는 인간은 쉽게 감정의 과잉을 경험하게 된다. 다양한 시각을 경험하지 못할수록 그런 증상은 더욱 심해지고 또 수월해진다.

그런 증상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진영화와 양극화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21세기가 된지도 어언 15년째다. 밀레니엄이라는 화두에 의해 이끌려져 나온 것들 중에 하나가 개성이다. 21세기의 인간이라는 것은 ‘개성’이라는 것을 정체성 중의 커다란 특징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이다. 그 이전까지의 인간은 스스로의 개성을 발산하기는커녕 자신의 개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90년대에도 물론 개성이라는 화두가 사회의 커다란 이슈 중의 하나였지만, 당시의 개성이라는 것은 선택의 폭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문화 산업이 발달함으로써 선택의 폭이 매우 넓어졌고, 커뮤니케이션의 도구가 발달함으로써 자신과 비슷한 개성을 지향하는 사람들과의 연대가 가능해졌다. 그러한 개성은 비단 문화나 패션의 영역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서도 공히 작용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같은 취향 혹은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연대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자신과 뜻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였지만, 동시에 그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시야에서 배제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은 점차 자기 객관화의 능력을 상실해 나가기 시작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의 상실은 마침내 영혼의 능력 중의 하나인 감정이 과잉되는 스스로의 상태를 조망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고 말이다.


(3)이성과 감정의 정치적 변증법

하지만 이 영화를 그런 감정의 과잉을 통해서만 바라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록 분명히 영화가 시종일관 철저한 감정의 과잉을 향해 치닫고 있기는 하지만 영화의 전개 부분에서 이성과 감정 사이의 변증법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장면이냐 하면 국밥집에서 동창 신문기자와 송우석 기자가 언쟁을 벌이는 장면이다. 극중의 송강호는 “내가 살아온 세상은 데모 몇 번으로 그렇게 쉽게 뒤집히는 세상이 아니야. 데모 몇 번으로 그렇게 바뀔 것 같았으면 나는 세상을 몇 번은 바꿨을 거다.”라고 말한다. 여러 후기에서도 사용된 이 대사는 아직 정치적 각성을 이루지 못한 송우석 변호사의 정체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대변해주고 있는 문장이라고 생각된다. 분명 그 말을 하던 당시의 그를 생각해보면 그런 말을 할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졸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사법고시에 합격했지만, 사법고시 합격이라는 훈장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이 대학 졸업장이라는 것이었을 테다. 데모로도 바뀌지 않는 세상, 그것이 바로 그가 살아온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입장에서 서울대라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정부에 대항하는 시위를 일삼는 행위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세상을 주도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그가 갖지 못한 그 결정적인 무기는 바로 대학 졸업장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로서는 세상보다는 그런 세상을 바꿀 무기를 제대로 챙기지 않는 학생을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 동창 신문기자는 ‘데모하는 학생들이 문제가 아니라, 데모를 하게 만드는 세상이 문제’라고 말한다. 학생들을 비난하는 송우석의 발언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발언은 송우석의 발언에 대한 안티테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상반되는 발언들이 만나면서 우리는 변증법의 가능성이 열리는 장면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변호사 송우석이 정치적 각성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변증법적 단절의 단면을 엿볼 수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데모하는 학생이 문제냐 아니면 데모를 하게 만드는 세상이 문제냐. 이 장면에서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을 마주한 나는 매우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오 함께 영화를 본 내 어머니는 80~90년대의 대학생 시위를 방송으로 목격하면서 ‘데모’라는 것에 대해서 어느새 본능적 거부감을 가지고 살아온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문민정부 출범 이후 20년 동안 그 거부감이라는 것도 제법 무뎌지기는 하였으나 이따금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때면 아직까지 그 신념이 잔존해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심경이 복잡했다. 과연 어머니는 그러한 언쟁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실지 궁금했다. 결국 데모를 하게 만드는 세상이 나쁜 것이라는 주장을 암시하고 있는 그러한 언쟁의 장면이 어머니로 하여금 이전에 가지고 있는 거부의 감정을 수정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인지 없을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혹 수정하게 만든다면 어머니를 감정 과잉의 인간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인지 염려도 되었다.

분명, 그 언쟁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데모를 하게 만드는 세상이 문제다.’라는 답을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장면을 변증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즉 내가 생각하기로, 나쁜 것은 학생도 세상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해당 장면에 숨겨진 함정을 간파해내야만 한다. ‘데모를 하게 만드는 세상이 나쁜 것이다.’라는 주장은 동창 신문기사의 입장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려지는 그 친구 역시도 스스로를 완전하게 긍정하고 있지 못한 인간에 다름 아니다. 그 역시도 스스로를 비겁한 인간으로 규정짓고 있는 인간인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나쁜 세상을 만든 것이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학생들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비겁한 주장이지만, 무조건 세상의 탓만 하는 것도 비겁하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귀책의 사유가 정부에게 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정확한 사실인식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의 올바른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시작하며 현실 개혁을 위한 올바른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다시 학생들에게로 시선을 돌려서 그들이 개혁에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를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스스로들이 왜 그렇게 비겁한 채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지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만약 그런 성찰과 반성이 없이 그저 데모를 하게 만드는 세상이 나쁜 것이라는 선에서 사고를 더 이상 전진시키지 않으면 그것은 데모를 하는 학생들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과 현실적으로 그리 큰 차이를 갖지 않는다. 물론 도덕적이고 정치적 의도적인 측면에서의 차이는 갖는다. 하지만 그런 언쟁이 결국에는 사회의 개선을 위한 것임을 염두에 둘 때 결과적으로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며 바람직한 전략의 수립을 사고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소기의 성과와 의의를 확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가 이 영화를 감상함에 있어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감정과 이성의 변증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명문대 졸업장을 획득해서 사회의 지도층이 되어 사회를 변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성적 입장으로 본다면, 데모를 하게 만드는 세상의 부조리에 천착하여 그에 저항하는 이들의 의도에 공감하여 그들을 옹호하는 주장은 감정적 입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이에서 어떤 변증법적 해결책을 찾아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6.정치공학과 정치철학 (법공학과 법철학)

(1)철학과 공학의 딜레마

그런 의미에서 떠올리게 되는 것이 정치공학과 정치철학, 혹은 법공학과 법철학의 문제다. 아마 이러한 용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생소한 용어일 것이리라 생각한다. 정치철학, 법철학이라는 말은 비교적 낯이 익지만 정치공학과 법공학이라는 명칭은 선뜻 그 의미가 쉽게 와 닿지 않는다.

철학이라는 용어와 결합한 정치철학 혹은 법철학이라는 용어는 공학과 결합한 용어들에 비해서 원론적인 측면이 강하고, 정치 혹은 법이라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 의미에 충실한 개념이다. 정치란 무엇이고, 법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정치나 법은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윤리 당위적 문제들에 대해 사고하는 것을 정치철학 혹은 법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정치공학 혹은 법공학이라는 것은 그러한 정치와 법의 본래적 의미와 기능 혹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정의라는 것이 완벽히 실현되지 못하는 특징을 본질로 하는 현실적 맥락을 고려하여 그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인 전략을 수립하는 것에 관계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정치와 법이라는 것이 본래 지향하는 의미가 있었다 하더라도 현실적 맥락을 고려할 때 타협을 통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효율성과 효과성이 있다면 그러한 최선의 전략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이러한 철학과 공학의 갈등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위에서 언급한 송우석 변호사와 동창 신문기자 간의 언쟁도 이러한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치적 각성을 경험하고 법정에서 피고인의 변론을 맡은 송우석과 동료 박변호사의 대화 과정에서도 이러한 철학과 공학의 갈등을 발견할 수 있다. 송우석 변호사는 국가권력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측면에서 부당한 국가보안법을 이용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하는 행위를 강력하게 규탄한다. 이것은 정치철학 혹은 법철학에 입각한 행동이다. 확실히 그러한 행위는 정치와 법의 본래적 의미와 취지 및 기능을 고려할 때 부당한 행위다. 하지만 동료 박변호사는 송우석의 그런 행위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며 만류한다. 송우석과 달리 그는 판사의 권유대로 또는 관례대로 검사 측과 타협하여 최대한 피고인들에게 낮은 형량을 구형시키는 전략을 추구했다. 이것은 정치공학 혹은 법공학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와 법의 역할을 알고는 있지만 현실적 맥락에서 최선의 전략을 선택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이처럼 공학적 입장을 선택하는 것을 비겁한 행위로 묘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그런 묘사에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라는 것은 현재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절차를 가지고는 정의가 완벽하게 실현될 수 없는 불완전절차적정의가 통용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법치국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서 이러한 철학과 공학 사이의 딜레마는 좀처럼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다가온다. 물론 영화의 의도대로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싸우는 송우석 변호사가 영웅적 의인으로 비춰지고, 공학적 전략을 추구하는 박변호사는 무능한 비겁자로 비춰지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공학을 무시하고 철학만을 추구해서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그런 식으로 원론적인 입장만을 고수하여 결과적으로 더 무거운 벌을 받게 된다면, 피고인들의 입장에서 그래도 자신은 떳떳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는 징역 3년 형에 그쳤지만, 만약 그 형이 징역 15년이나 사형과 같은 중형이었다면 그렇게 간단히 철학적 입장에만 근거하여 행동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라는 것이다.


(2)어 퓨 굿 맨(A few good man)의 모티브

아마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어 퓨 굿 맨(A few good man)>이라는 영화를 떠올렸으리라 생각한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1992년에 개봉한 <어 퓨 굿 맨>은 롬 라이너 감독이 연출을 맡고 탐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다. 이 영화는 부대 내 가혹행위로 어느 병사를 죽게 만든 두 명의 해병대원들을 변호하는 변호사 ‘다니엘 캐피’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일단 법정 재판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닮아있고, 안보정책을 내세워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하고 있는 국가를 등장인물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닮아있으며, 그런 국가와의 대결과정에서 철학과 공학이 충돌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닮아있다.

군변호사 다니엘 캐피는 가혹행위로 동료 병사를 죽게 만든 두 명의 해병대원들의 변호를 맡게 된다. 그들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서 가혹행위를 했다. 재판을 쉽게 해결하기 위해서 주인공 변호사는 자신의 의뢰인들에게 군검사가 제시한 타협된 형량을 받아들일 것을 조언한다. 하지만 그 해병대원들은 그 제안을 거부했다. 그들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서 해병대원으로서 해야만 하는 일을 했던 것 뿐인데 그러한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그릇된 일을 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나아가 불명예 제대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약간 디테일이 다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도 철학과 공학이 충돌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변호사는 법공학을 그들에게 들이밀고 있는 것이고, 해병대원들은 자신들은 해병대의 법(규칙/정신)에 따라서 정당하게 행위했다고 주장함으로써 법철학적 측면에서 항변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영화 <변호인>에서의 송우석 변호사처럼, <어 퓨 굿 맨>의 다니엘 캐피 변호사 역시도 정치/법 철학적 입장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결국 두 명의 해병대원은 불명예 제대를 하게 된다. 좋은 결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훈훈한 결말을 보여준다. 불의에 타협하기 보다는 그래도 자신의 의무에 다했다는 점을 충분히 항변했다는 의미에서 그의 의뢰인들은 만족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나는 그러한 결말이 현실에서도 그렇게 훈훈하게 받아들여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또 한편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불의한 국가권력으로 대변되는 인물의 존재다. <어 퓨 굿 맨>에서는 ‘나단 R. 제셉 장군’이 바로 그런 존재였고, 영화 <변호인>에서는 곽도원이 연기한 ‘차동영 경감’이 그런 존재였다. 그러한 인물을 그려내는 방법 역시 기가 막힐 정도로 닮았다. 국가 권력을 상징하는 인물을 증인석에 앉히고, 변호인이 화려한 언변으로 그를 몰아가면, 불의한 국가의 하수인은 분을 이겨내지 못하고 폭발하여 그 더러운 치부를 관객들에게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은 하나 같이 자신이 국가에 지대한 애국을 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국민이 편히 발 뻗고 잘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것은 국가에 대한 신념의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히 어느 한 개인의 우연적 결함이나 일탈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문제가 되어버린다. 극중에서 이러한 인물들은 절대악으로 그려지지만 그들이 그렇게 인식되는 이유는 그들의 개인적인 인격의 도덕적 결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의 뒤에 존재하는 삐뚤거진 국가의 형상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의 당위다. 그래서 관객들은 그들이 느끼는 분노의 근원이 언뜻 보기에는 그 인물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좀 더 진중한 성찰을 통해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불의한 권력의 존재를 간파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영화 <변호인>에서는 의미심장한 대사가 등장한다. “국가란 무엇인가?” 극중의 차동영 경감이 송우석 변호인에게 묻는 질문이다. 이 대사로 인하여 <변호인>은 <어 퓨 굿 맨>을 모방했다는 의혹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한발짝 더 나아가 어떤 메시지를 보다 구체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숙제로 던진다. 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7.국가란 무엇인가

(1)안보와 민주주의-홉스, 로크, 루소의 국가관과 관련하여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국가라는 개념은 어떤 측면에서 바라보냐에 따라서 실로 다양한 모양새를 띠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선 이 영화 속에서 갈등하고 있는 차동영과 송우석이 국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부터 살펴보는 게 논의의 편의를 기하는 일일 것이다.

우선 차동영이 바라보는 국가의 모습을 그의 발언을 통해 유추해보자. 그는 매사에 있어서 ‘안보’를 최우선시 한다. 그에게 있어서 북한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은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존재들로서 조금만 방심해도 그 틈을 타서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그러한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는 국민들의 기본권 같은 것들은 어느 정도 제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생각하는 국가는 국민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야경국가이며, 그런 이유로 독재가 허용되는 국가이다. 그리고 그런 국가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국가 안보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애국자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국가관을 종합해보면 고전적 사회계약론자 중 홉스의 국가관이 연상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사회 구성원들은 절대자에게 그들의 자연권을 양도한다. 그리고 그러한 양도를 통해서 그들은 국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함께 양도하게 된다. 국가란 자신의 모든 자연권을 양도한 대상이며 그런 이유에서 국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은 곧 자신의 명령에 대해 스스로가 불복종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서 홉스의 사회계약론에서는 시민불복종의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국가가 애당초 국가성립의 동기가 되었던 시민 개개인의 안전을 더 이상 보장하지 못하고 나아가 시민들에게 그런 자신들의 안전과 생명 등을 스스로 포기하도록 하는 것을 요구하게 된다면 국가는 그때부터 존립의 이유를 잃게 되고 시민은 그러한 국가의 명령에 대해서 복종할 수가 없게 된다.


다음으로 송우석이 생각하는 국가를 보자. 극중에서 그는 “국가란 곧 국민이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발언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민주주의’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을 피 토하듯 외치는 그의 열연을 보면서 관객들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컥하는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헌법의 맨 앞에 놓일 만큼 가장 중요하고 가장 당연한 이치가 현실세계에서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무시되고 있는 현실과 그런 현실을 묵과해온 스스로를 새삼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국가관을 통해 바라보게 되는 국가는 언제나 국민의 기본권 뒤에서 그 자신의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부차적인 존재가 된다. 따라서 안보도 물론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안보를 핑계로 삼아서 독재를 통해 국민들의 기본권을 유린하는 행위는 결코 용인될 수 없게 된다. 국가란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그런 주장은 국민을 위하기 위해서 국민을 억압한다는 논리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애국자라는 것은 국민을 지킨다는 미명 아래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하는데 앞장서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서 국민 이외에 어떤 것과도 싸우는 사람이다. 이런 그의 국가관은 사회계론자인 로크나 루소의 국가관을 떠올리게 한다. 이 두 명의 사회철학자에게 있어 인간이 사회계약을 맺게 되는 이유는 상이하지만 사회계약을 통해 만들어진 사회에 존재하는 국가, 즉 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은 비슷하다. 로크의 경우 정부는 인민의 주권을 양도받은 존재가 아니라 인민으로부터 주권을 신탁 받은 존재이다. 즉 믿고 맡긴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국민의 자유를 제대로 수호하지 못함으로써 더 이상 그 존재 가치를 유지하지 못하게 될 경우 인민에게 주권을 돌려줘야만 하는 존재이다. 나아가 로크는 정부가 국가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삼권분립을 주장하기도 했다. 일찍이 그는 영화 <변호인>에서처럼 국가가 인민으로부터 신탁 받은 주권을 남용하여 인민의 자유를 억압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통찰했던 것이다. 그럼 다른 한편으로 루소는 어떠한가? 그는 “주권은 양도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대표되지 못한다.”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로크만해도 정부는 비록 주권을 신탁 받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계약을 통해 형성된 사회는 주권이 양도된 존재다. 하지만 루소는 그러한 주권의 양도 개념 자체를 부정한다. 주권은 애당초 국민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인민의 주권을 양도 받은 것이 아니고, 같은 이유로 주권을 대표할 수도 없다. 정부는 그저 인민의 의지를 대리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러한 국가관을 채택하는 입장에서는 시민불복종이라는 개념이 성립가능하게 된다. 국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국민의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법 역시도 그러한 원초적 목적의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 원초적 목적은 헌법으로 구체화된다고 하겠는데, 엄밀히 말하게 되면 그러한 헌법 역시도 그 원초적 목적의 하위에 존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다만 구체화된 어떤 기준으로서는 가장 원초적인 것이 헌법이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들이 등장할 때는 언제나 습관처럼 헌법을 들고 나오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원초적 목적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성문화시켜 놓은 것이 헌법이기 때문에 헌법에 그렇게 집착하게 되는 것이고, 헌법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그런 헌법에 근거하여 헌법에 위배되는 그 하위의 실정법에 대해서는 그것이 국가의 원초적 목적을 표현하고 있는 헌법에 위배된다는 이유에서 불복종이 가능해진다. 물론 이러한 불복종에 있어서는 완벽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다수의 동의를 얻고 있는 몇 가지 기준이 있으니 그것은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2)국가실재론과 국가유명론

곧바로 시민불족종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면 좋겠지만 그 전에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을 것 같다. 그 중에 하나는 국가실재론과 국가유명론의 문제다. 엄밀한 의미의 용어는 아니고 사회실재론과 사회유명론이라는 용어를 변용했다. 위에서 언급한 차동영과 송우석이 극적으로 갈등하는 장면을 보다 보면 이 양립 불가능한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국가라는 것은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국가라는 것은 그저 국민의 결합에 불과한 것인가? 사실 이것은 그 주어를 ‘사회’로 설정해야만 완전한 의미가 있는 주장이 될 것이다. 오늘날 현대 국가의 국민에게 있어서 국가라는 것은 실체가 있는 것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국민의 결합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당위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면 조금은 더 흥미로운 질문으로 바뀐다. 국가는 실체여야 하는가?, 아니면 그저 국민의 집합에 불과해야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차동영 경감이라면 국가는 실재하는 실체이며, 또 실체여야만 하다고 말할 것이다. 단순한 국민의 집합에 불과하다면 그렇게 국민을 억압할 수 없을 것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 안보정치를 할 수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송우석 변호인의 입장에서는 어떤가? 과연 그는 국가를 단순한 시민들의 집합에 불과한 것이며, 그래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서 나는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힘들다.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국가라는 개념을 구성함에 있어서 국민이라는 주체의 입지가 매우 강력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여전히 실체로서의 위상을 튼튼하게 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세계화의 영향이 지대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지구인이라면 자신이 지구상에서 어느 나라의 국민인가 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바, 국가는 단순한 시민들의 집합인 동시에 하나의 실체로서 엄연히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세상에서 자신들만 있다고 생각한 인류 초기 단계에서는 국가는 그야말로 국민들의 집합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어느 한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다른 국가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각각의 국가는 현실주의에 입각한 세계정치이론에 입각하여 무력을 비롯한 다양한 수단을 통해 서로의 이권을 침탈하려는 의도를 가진 존재로 서로에게 비춰지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라는 존재의 껍질은 점점 두껍고 단단해지게 된다. 그 실체가 공고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에 비해서 국가가 더욱 확실하게 가질 수밖에 없는 ‘실체성’이 아닌가 한다. 다시 말해서 사회는 국가에 비해서 비교적 그 실체성을 부정하기가 용이하지만, 국가의 경우에는 그 실체성을 부정하기가 사회에 비해서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송우석의 발언을 국가란 단지 국민들이 집합된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의 의견에 동의하기가 힘들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의 발언을 어떤 국가유명론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국가란 실체이지만, 그러한 실체는 국민들이 실제적으로 집합된 것이라는 주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8.북한은 왜 나쁜가? 영화 속의 불의한 정권은 왜 나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불편했던 것들 중에 하나는 북한에 대한 묘사였다. 사실 이것은 영화 자체의 탓이라기보다는 이 영화가 재현하고 있는 그 시대의 책임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재판 장면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하나의 구도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한쪽은 상대방을 빨갱이, 혹은 이적단체 찬양 인물, 공산주의자로 규정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혐의를 극구 부인하고 있는 구도다. 그러한 명제는 어떤 명제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 명제라는 것은 “북한은 나쁘다. 북한은 공산주의 사회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는 나쁘다.”라는 삼단논법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실로 바보 같은 주장이고, 나는 그런 바보 같은 주장이 횡행하던 시대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 장면을 보고 있자니 시나브로 짜증이 났다.

영화 속의 사건으로부터 무려 33년이 흐른 요즘에도 “북한이 왜 나쁘냐?”는 질문을 던지면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공산주의니까.”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줄로 안다. 시대가 흐르면서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국가라는 이유로 북한을 비판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이념교육의 커다란 오점이자, 상처이며, 수치다. 영화 속의 인물들을 보면 적어도 이러한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에는 공산주의 국가 북한에 대한 혐오가 하나의 당연한 상식이자 교양으로 받아들여졌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할 뿐, 공산주의자가 왜 나쁘냐고 항변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다. 불온서적 규정을 논박하는 송우석 변호사의 변론도 해당 도서를 저술한 작가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우방인 영국의 외교관이었다는 점을 근거로 하고 있지, 공산주의자가 왜 나쁘며, 나아가 그가 쓴 책이 왜 나쁘냐고 반문하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그 시대가 가지고 있던 한계이며,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해당 시대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북한은 분명히 나쁜 국가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21세기에 있어서 그런 국가를 비판할 때는 그 국가가 공산주의 국가라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 국가가 독재국가이며, 폐쇄적인 세습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력을 동원해 주변 국가들을 위협하고 세계평화를 위태롭게 만든다는 측면에서 비판해야 마땅할 것이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정치적으로는 가치중립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북한을 비판하는 주된 이유가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감히 생각하기로는 당시의 대한민국과 북한을 뚜렷하게 구분해주는 잣대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오직 그것뿐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지금에 와서야 우리나라도 민주화를 이루어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국민의 기본권이 비교적 폭 넓게 보장되는 사회가 되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안보라는 미명 하에 국민의 기본권이 억압되고 사회의 특정 계층들에게만 특권이 허용되는 등 그야말로 독재와 다를 바 없는 정치가 이루어졌고, 그러한 측면에서 남한과 북한이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에서 북한을 독재 체제라는 이유로 비판하게 되면 머지않아 그럼 남한도 독재체제인데 북한과 다를게 뭐냐는 반문에 부딪치게 될 것이 자명하다보니 독재 정권에서는 공산주의를 빌미로 삼아 북한을 비판했던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우리는 북한을 비롯하여 ‘불의한 정권’이 왜 나쁜지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국가권력을 남용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특정 세력들에게 특권을 허용하는 등 독재를 감행했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공산주의 때문이 아니라.


9.애국주의의 흉터

나는 ‘국가가 있어야 국민도 있다.’는 말을 매우 싫어한다. 물론 어릴 때는 나도 국가대표 축구 한일전 같은 걸 시청하면서 눈물까지 흘리는 등 누구보다도 애국심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소년이었으나, 언제부턴가 그러한 애국심에 내재된 허무를 통찰하고는 더 이상 애국이라는 단어에 동기화되지 않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이 영화에서는 차동영과 송우석이라는 상반되는 두 인물이 각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애국자를 규정한다. 한 명은 국민을 보호하는 실체로서의 국가를 상정하고 그러한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을 애국자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국가는 곧 국민이라는 전제 위에서 그 자체로 곧 국가인 국민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을 애국자로 보고 있다.

확실히 나는 차동영 경감이 이야기하고 있는 애국에 대하여 그것은 지금까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열광해 왔던 것이고, 이제 나는 더 이상 열광하지 않고 오히려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국가가 국민에게 그들의 자유를 비롯한 기본권들을 유보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내놓는 허울 좋은 개살구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은 국민에 의한 민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간주하는바 국민의 기본권 앞에서 국가는 언제나 자신의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애국이라는 가치는 그러한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데 아주 유용하고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도구가 된다. 애국의 가치는 아름답다. 그것은 꽤나 자극적이고, 그러한 이유로 그에 대한 일화나 사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손쉽다.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한 순국선열들의 이야기를 읽고 자란 사람이라면 국가가 내미는 애국의 손길을 뿌리치기가 힘들다. 성장과정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애국에 대한 강박관념이 도덕심의 일부로 자리잡아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그렇게 애국주의에 경도된 국민은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며 국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 보다는 스스로를 애국자라고 자위하며 국가의 뒤에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린다. 그것이 애국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애국주의 국가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애국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다. 우리나라가 북한에 대해서 도덕적, 정치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이유는 자본주의 따위가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설령 어떤 천재지변 같은 게 일어나서 우리나라가 하루아침에 북한보다 못 사는 나라가 되어버린다 하더라도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국민이라는 이유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의 독재정권들은 그러한 자랑스러운 자유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애국이라는 가치를 앞세워 국민들을 현혹시켜왔다. 사실 그러한 행위는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그 대상이 국가가 아니라 유수의 기업들에게도 이전되었다는 사실만이 달라졌다. 이제 국가는 국민들에게 국가를 위해서 희생하고 양보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한다고 국민들이 순순히 따라줄 세상이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신 오늘날의 국가는 기업들을 앞세워 장사를 한다. 기업이 잘 살아야 국가가 그리고 국민이 잘 살 수 있다는 말로 기업을 위해서 국민이 양보해 줄 것을 요구한다. 물론 과거보다 국민이 그런 요구에 순순히 잘 따라와 주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 성실하고 착한 국민들이기 때문에 아직도 그런 요구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 분들의 성의가 존경스러우면서도 답답한 현실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나는 국가보다는 민족이라는 가치가 더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실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의 많은 부분들이 무심코 국가와 민족의 개념을 동일시 해버린 과오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고맙고 존경하는 순국선열들을 생각해 볼 때, 사실 그들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게 아니다. 그들은 ‘민족’을 위해 희생한 것이다. 나아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애국이 아니라 애민이다. 그 민족의 개념에 북한은 넣어도 그만 안 넣어도 그만이다. 어차피 분단의 역사가 길어짐에 따라서 민족의 개념을 유지하는 것도 꽤 힘겨운 상황이다. 통일의 기조 중에 하나가 ‘열린 민족공동체 지향’인 것은 그만큼 작금에 있어서 민족의식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내가 국가 대신 민족의 개념을 제안하는 것은 적어도 민족은 그것의 번영을 위해서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할 가능성이 비교적 적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민족은 국가에 비해서 실체성을 부정하기가 비교적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같은 이유로 국가 대신 사회를 대입해도 될 것이다.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충성으로 개념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체성을 갖는 대상에 대한 충성은 그만큼 그 대상을 포함하는 요소로서의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기가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사실 국가든, 민족이든, 사회든 그 안에 존재하는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의 자유와 민주적 원칙이 보호될 수만 있다면 무엇이 되도 상관이 없다 하겠다. 하지만 민족이나 사회가 아니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 결과로 우리가 이렇게 스스로의 자유와 주권을 지키지 못하고 국가에 양보하는 데 익숙한 국민이 되어버린 현실은 나로 하여금 그러한 애국의 흉터를 치료하기 위해서라도 국가가 아닌 다른 개념을 가져올 필요성이 있다는 확신을 더욱 견고히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5.시민불복종

이제는 앞에서 언급했던 시민불복종에 대한 문제를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이렇게 호흡을 질질 끌면서 굳이 시민불복종을 글의 말미에 위치시키려 하는 이유는 영화에서 송우석 변호사가 부면동 사건 재판 이후에 인권 변호사로 재탄생하여 시민불복종으로 간주할 수 있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서 검사와 나눈 대화를 보면, 법조인임에도 불구하고 실정법을 위반한 이유는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함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고, 영화가 그러한 장면을 매우 의미심장하고 담아내면서 영화를 마무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위진압차량의 스피커에서 시위대를 향하여 “여러분은 지금 도로교통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방송을 하는 장면은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시위현장에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장면을 보면서 관객들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저런 측면에 있어서는 별반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나는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가 마지막으로 시민불복종과 시민의 정치화에 대한 숙제를 남겼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법실증주의와 자연법론

시민불복종에 대해서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법실증주의와 자연법론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앞으로의 논의를 진행하고 읽어나감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다. 필자 역시 이 분야는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필자의 무식으로 인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두산백과의 문장을 인용하고자 한다.

 

법실증주의

[ legal positivism , 法實證主義 ]

 

일반적으로 법률실증주의(法律實證主義)를 말한다. 법실증주의가 법사상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한 것은 19세기인데 이 시기는 근대국가가 확립되면서 근대법체계가 정비되는 때이다. 법실증주의는 법의 이론이나 해석·적용에 있어서 어떠한 정치적·사회적·윤리적 요소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법 자체만을 형식논리적으로 파악하려는 입장이다. 따라서 실정법을 초월하는 자연법(自然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연법사상에 대립된다. 법실증주의는 실정법체계의 완전무결성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법관에 의한 법창조 내지 자의적 판단을 배제하려는 사상인 것이다. 그리하여 법실증주의는 법학 및 실정법의 발전과 그것을 통한 국가권력의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법실증주의는 독일에서는 개념법학(槪念法學), 일반법학(一般法學)과 순수법학(純粹法學)으로 나타났으며, 영국에서는 공리주의법학(功利主義法學)과 분석법학(分析法學)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법실증주의는 법이 사회현상의 하나이며 전체 사회와의 관련 속에서만 그 본질과 기능이 제대로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을 도외시한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하였다. 법실증주의가 법체계를 다른 사회적 요소와 분리하여 독자적인 체계로 이해하는 것을 반대하여 법사회학(法社會學), 사회학적 법학과 법현실주의(法現實主義)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법실증주의는 법을 만능의 수단으로 이해한 결과, 법이라는 형식을 갖추기만 하면 어떠한 것도 허용될 수 있다고 하는 형식적 법치주의로 흘러 악법(惡法)도 법으로 인정함으로써 법을 빙자한 불법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러한 법실증주의의 경향은 20세기의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인권유린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으로 원용되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인간의 존엄에 대한 반성과 권리에 대한 통찰은 다시 실정법질서보다 시원적(始原的)이며 실정법질서의 상위에 있는 천부불가침(天賦不可侵)의 자연법질서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를 신자연법론(新自然法論)이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법실증주의 [legal positivism, 法實證主義] (두산백과, 두산백과)


이를 토대로 유추하자면 일단 법실증주의는 사회구성원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법이라는 것은 실정법만을 법으로 인정한다는 입장이다. 즉, 애당초 원초적 의미에서, 인간이라는 이유로 당연히 갖게 되는 법적 권리와 의무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적절한 절차를 통해서 제정된 법을 통해서만 인간은 그러한 권리와 의무를 지게 된다는 주장을 하는 입장이다.

다른 한편으로 자연법론은 법실증주의와는 달리 인간이 천부적으로 갖게 되는 법적 권리와 의무를 긍정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에 근거하면 인간은 비록 실정법으로 제정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자연권이라고 하는 천부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을 영화 <변호인>에 대입해 보면, 차동영 경감이 근거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은 이러한 법실증주의의 입장에 기인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인간 혹은 국민으로 천부적으로 혹은 자연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고, 소정의 절차의 통하여 제정된 것이라면, 다시 말해 법이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기만 하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법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즉 국가보안법이라는 법은 안보라는 미명 아래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악법이지만 그것은 소정의 절차를 통해 법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제정된 법이라면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고, 거기에서 도출되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 역시도 지켜져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법실증주의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한편으로 송우석 변호사가 근거하고 있는 것은 자연법이론인가? 다시 말해서 그가 자신의 의뢰인들을 변호하면서, 그리고 시위현장에서 체포되어 검사에게 취조를 받으면서 반복하여 언급하는 ‘국민의 기본권’이라는 것은 인간 혹은 국민이 그가 인간 혹은 국민이라는 이유로 갖게 되는 자연적이고 천부적인 권리를 말하는 것인가? 물론 그렇게 볼 여지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보지 않을 여지도 있는 듯하다. 이는 마찬가지로 그가 몇 번이나 언급한 ‘헌법’이라는 단어를 염두에 둘 때 그러하다. 앞서 어딘가에서 언급했듯이 사회에는 그 사회가 형성될 당시에 가장 근본적으로 고려했던 원초적 목적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자유민주주의가 그러한 원초적 목적이며 가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원초적 목적 및 가치가 성문법으로 구체화된 것이 바로 헌법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헌법은 우리 사회의 밑그림이 되는 가장 기초적인 법으로써 사회의 원초적 목적을 대변하는 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헌법의 위상이 문제가 된다. 일단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용법처럼 그것은 여타의 실정법의 상위법이다. 그 어떤 법도 헌법에 위배되어서 그 효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헌법재판소에 의해서 위헌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헌법은 실정법일까 아니면 자연법일까? 그것은 성문의 형태를 지녔다는 측면에서 즉, 법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실정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타의 실정법들과는 다소 다른 방식과 절차에 의해서 제정되었다는 점에 있어서 여타의 실정법들과는 구분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다른 어떤 실정법에 의거하지 않고 사회의 원초적 목적 즉, 법의 제정 이전에 존재하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재확인해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자연법에 가까운 듯도 보인다. 물론 굳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실정법에 속한다 할 것이지만, 그 커다란 구도를 살펴볼 때, 그리고 실정법은 자연법에 의하여 그 정당성을 부여받는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헌법은 자연법에 의해서만 비로소 그 타당성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고, 영화 속에서의 송우석 변호사는 몇 번씩이나 헌법은 언급하면서 국민의 기본권을 옹호하고 있지만, 실상 그가 기대고 있는 것은 헌법의 뒤에 존재하고 있는 자연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법실증주의와 자연법론에 대한 이러한 비교는 자연스럽게 시민불복종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게 된다. 적법하게 제정된 실정법은 그것이 무엇이든 법으로서의 존중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하는 법실증주의에서는 악법도 법이라고 하듯이 시민불복종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자연법론에 있어서는 실정법에 우선하며, 그러한 실정법의 정당성 근거가 되는 자연법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바, 그러한 자연법에 근거하여 불의한 실정법에 불복종할 근거가 마련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시민불복종의 조건

앞서 언급했듯이 영화는 마치 시민불복종에 대하여 관객들에게 숙제를 내리는 듯한 인상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아직 해결되지 않아서 그것은 우리들에게 그야말로 숙제로 다가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실정법 위반으로 잡혀가는 시민들처럼 오늘날에도 수많은 시민들이 불법시위 혹은 시위 중의 불법행위를 이유로 체포당하고 있다.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자부하고 있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그러한 행위는 여전히 용인되지 못하는 사회에 살아가기도 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시민들 간에 시민불복종에 대한 의견의 합치를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기실 그러한 합치는 물론이거니와 만족할만한 수준, 아니 유의미한 수준의 논의조차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 땅위에 그려진 자유민주주의의 현실이다.

그렇게 시민불복종에 대한 공통된 의견이 결여된 현실은 상반된 결과를 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한쪽의 시민들에게 있어서는 집회나 시위를 무조건 쓸데없는 것, 현실 도피적 행위, 철없는 짓 따위로 치부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마치 정치적으로 각성하기 전의 송우석이 TV에 나오는 시위에 참여한 서울대 학생을 보면서 혀를 찼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다른 한쪽의 시민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행위가 어디까지가 시민불복종의 범주에 포함되는지 그 분명한 이해 없이 무작정 기본권이나 헌법만을 운운하면서 불법행위를 저지르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가장 마지막 챕터에서 다시 한 번 언급하겠지만,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우려하는 부분도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의 말미에서 시민불복종이란 무엇이며 그것의 조건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이 영화의 감상을 돌아봄에 있어서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이다.

시민 불복종(市民不服従, Civil Disobedience)은 국가의 법이나 정부 내지 지배 권력의 명령 등이 부당하다고 판단했을 때, 이를 공개적으로 거부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불복종에 있어서 그 정당성은 그것이 저항하는 법의 부당성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즉 모든 법이 완벽하게 공익을 추구하고 또 정당성을 지니는 것은 아닌바, 그러한 법이 바뀌기를 가만히 기다리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해당 법에 불복종 하는 것은 시민의 정당한 권위인 동시에 오히려 의무로서 인정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 밑에 전제되어 있는 내용은 결국에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진정으로 공공성과 공익성을 추구하는 쪽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민불복종의 성립하기 위한 조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학적으로 통일된 기준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기준들 중에 폭넓은 지지와 일치를 얻고 있는 조건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공익성, 위법성, 비폭력성, 공공성, 공개성, 처벌감수성

즉 시민불복종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행위가 공익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야 하며, 자신이 반대하고 불복종하고자 하는 법을 위반해야 하고, 가급적 비폭력적이어야 하며, 불복종의 행위가 특정 집단이나 계층이 아닌 공공 대중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고,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 불복종행위로 인한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시민의 기본권으로 놓고, 그것을 규제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시민의 기본권을 억압함으로써 헌법에 위배되는 악법으로 설정할 경우, 그러한 악법에 불복종하는 시민은 시민의 기본권을 수호한다는 공익성에 의거하여, 공공적이고 공개적으로 그리고 비폭력적으로 해당 법률에 불복종해야 한다. 이때의 불복종은 집시법을 위반하는 시위를 하는 것 등이 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러한 불복종으로 인해 처벌을 받게 된다면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

적어도 영화의 마지막에서 송우석이 행하는 시민불복종은 위와 같은 조건들을 충족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그것은 ‘정당성’을 얻게 된다. 따라서 그렇게 성립된 시민불복종은 그것이 갖는 정당성으로 인하여 다른 시민들에게 그것에 대한 긍정을 요구할 수 있고, 다른 시민들은 그것에 대한 긍정을 행할 당위를 갖게 된다는 생각이다. 즉, 위와 같은 기준들을 충족하고 있는 시민불복종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습관처럼, 국가권력에 대한 불복종을 무작정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엄연히 잘못이며 시민적 의무의 방기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시민불복종에 대해서는 철저한 비판과 반성이 요구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며 당위로 다가오는 것이란 생각도 든다. 오늘날 무조건 헌법이라는 단어를 앞세우며 스스로의 불복종을 정당화하기에 바쁜 세태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헌법 역시도 자연법 혹은 국가와 사회의 원초적 목적을 구체화 해 놓은 실정법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더 이상의 상위법이 없다는 측면에서 법치국가 최고의 존엄이며 기준이 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도 실정법인 이상 시민불복종의 본래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무조건 헌법에만 집착하기 보다는 그 이면에 존재할 법한 자연법에 대해서 성찰하고, 그러한 자연법과 실정법의 구도를 유념하는 동시에 위에 언급된 시민불복종의 기준들을 준수하고자 하는 노력이 반드시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7.민주주의 - 우리 아이들은 그런 세상에 살지 않도록.

지금까지 영화 <변호인>을 시청하고 내 머릿속에 남아있던 생각과 의문들을 중심으로 두서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왔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시종일관 쉴틈 없이 임팩트를 나열함으로써 무수히 많은 이슈와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지고 있고, 그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막상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영화의 중심 주제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대체 이 영화의 중심 주체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가 끝나고 ‘노무현’이라는 이름 세 글자만 떠올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굳이 말해 그러한 인물에 대한 천착은 방편에 불과한 것이고, 그러한 화려한 인물의 묘사 뒤에 웅크리고 있는 진짜 주제는 바로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가만히 생각해보면 민주주의는 시종일관 이 영화를 관통하는 화두였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만류하는 사무장에게 송우석이 던지는 대사, “우리 아이들은 이런 세상에 살지 않게 하려고 이러는 겁니다.”를 생각해 보면 ‘이렇지 않은 세상’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세상은 바로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된 세상일 것이고, 주인공 송우석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법정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이유 역시도 그런 민주주의 사회를 위해서인 것이다.

언젠가 어디선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공화국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말을,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주장의 근거로 사용된 중국과 일본을 염두에 두니 그 말이 실로 그럴듯하게 들렸다. 프랑스의 대통령들은 연설을 시작할 때마다 늘 ‘자랑스러운 공화국의 시민들이여.’라는 문장으로 서두를 장식한다고 했다. 그만큼 공화국의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하나의 자랑스러운 사실로 간주해도 될 만한 것이라는 주장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기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직도 여전히 그러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는 못한 것이 현실인 것 같다.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시대의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보다는 자본주의로 인한 경제적 발전을 가지고 북한에 대한 우월감을 느꼈던 것처럼,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경제력 같은 비정치적 요소들로부터 그 정체성을 부여받고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돌아본 그러한 현실이 나는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공화국의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공화국의 시민임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은 그러한 공화국이 제대로 된 공화국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닐까.

어쩌면 이 영화는 지금까지 내가 말했던 정치철학과 정치공학의 딜레마 사이에서 그러한 무한반복의 딜레마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이제는 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정치와 법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개인적 혹은 사회적 결단을 통해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본질에 대해서 성찰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변증법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시작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 이 국가가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다시 발견함으로써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곧 민주주의의 시민으로서의 주인의식을 획득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로 인하여 사람들이 정치철학에만 집착하여, 정치/법 공학을 외면하는 경향을 습득하게 된다는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물론 철학을 외면하고 공학에만 매몰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바람직하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에 대하여 내가 우려하는 것은 이 영화가 과잉된 감정의 붓으로 그려내고 있는 민주주의의 모습이다. 이 영화는 민주주의 정치 철학의 본질을 매우 극적이고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나는 그러한 장면들이 그 영화의 관객으로서의 시민들을 자유민주 정치적으로 동기화시키는 데 훌륭하게 작용하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효과의 이면에서 시민들로 하여금 정치공학에 대한 이해 없이 맹목적으로 정치적 선의만의 쫓게 만드는 세태가 유행할 가능성에 대하여 나는 우려스럽다. 사실 이 영화의 본래적 목적이 그러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영화만 가지고 그런 우려를 하는 것은 기우에 가깝다고 할 것이나, 이미 사회 전반에 걸쳐서 그런 과잉된 감정의 정치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이 영화가 등장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일종의 촉매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한다면 나의 이런 우려가 꼭 기우로 그치리라 장담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고, 다만 그동안 우리 모두가 경쟁적으로 외면해왔던 이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의 근본적인 정치적이고 법적인 이치를 재확인함으로써 미뤄왔던 스스로의 정치적 각성에 도전해 보는 계기가 되는 것으로도 이 영화의 존재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1) [네이버 지식백과] 부림사건 [釜林事件] (두산백과,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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