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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

프리즈너스 영화감상문-선악의 혼탁

by 통합메일 2014.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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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즈너스 (2013)

Prisoners 
7.4
감독
드니 빌뇌브
출연
휴 잭맨, 제이크 질렌할, 비올라 데이비스, 마리아 벨로, 폴 다노
정보
범죄, 스릴러 | 미국 | 153 분 | 2013-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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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즈너스 영화감상문

목차

1.소개

2.줄거리

3.탁월하고 만만치 않은 완성도

(1)아름다운 불친절

(2)선악의 혼탁

4.프리즈너스(죄인들, 수감자들, 포로들)

(1)수감자

(2)죄인

1.소개

이 글은 영화 <프리즈너스>를 시청하고 작성한 영화감상문이다. 이 영화는 두 가정의 여자아이들이 한꺼번에 영문도 모르게 납치되면서 시작되며,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해 아버지 배역의 휴 잭맨이 펼치는 연기가 일품이다. <그을린 사랑>을 연출한 드니 빌뇌브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주연 배우로는 휴 잭맨, 제이크 질렌할, 테렌스 하워드, 폴 다노가 출연한다. 얼핏, 이 영화는 흔한 유아 납치물로 여겨지기 쉽지만,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되면 그런 오해의 여지는 거짓말처럼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자식을 찾을 실질적인 방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을 소름기칠 정도의 디테일로 묘사하는 동안 관객은 어느새 영화에 깊이 빠져서 헤어 나올 길을 찾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매료된 관객을 영화는 최후의 반전을 가지고 습격한다.

 

2.줄거리

한가로운 휴일, 평화로운 마을 두 부부의 딸이 사라졌다. 가족들은 딸들을 찾아 나섰지만 찾을 수 없었고 결국 경찰에 신고했다. 마을이 발칵 뒤집어졌다. 그리고 그 날 밤 유력한 용의자로 정신지체자인 알렉스 존스가 체포된다. 알렉스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이유는 아이들이 사라질 당시 집 근처에 놓여있던 캠핑카 속에서 그가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알렉스를 심문하지만 알렉스는 혐의를 부인했고, 결국 그를 풀어주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유괴된 아이의 부모 중 목수인 켈러 도버는 강하게 항의한다. 풀려나는 자신의 멱살을 잡은 도버에게 알렉스는 내가 떠날 때까지 아이들은 울지 않았어요. 내가 떠나니까 아이들이 울었어요.”라고 속삭인다. 마치 당신만이 알아야 한다는 것처럼, 당신은 알아야 한다는 것처럼. 그 말 한마디에 도버는 더욱더 심증을 굳히게 된다. 그것은 곧 확신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이 사건의 수사를 맡은 형사 로키는 알렉스는 범인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다른 방향으로 수사를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일단 성범죄 전과자들을 찾아 나섰다. 전과자들을 방문하다가, 역시 성범죄 이력이 있는 어느 타락한 신부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신부는 술에 취해 쓰러져 자고 있었다. 그 집에서 로키는 숨겨진 지하실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미라가 되어버린 시체 한 구를 발견했다. 신부를 두들겨 패자 신부는 그가 연쇄아동살인범이라 죽였던 것이라고 실토했다. 고해성사를 한답시고 신부를 찾아와서는 자신은 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며 그 수단으로 아이들을 유괴해서 죽이고 있다는 떠들어 댔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아이들을 죽이겠노라 다짐하며 떠나기에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어서 그를 죽였다는 것이다. 이 사건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신부도 그 이상은 아는 게 없었다. 죽어버린 살인마에게 가족이 있었다는 것 밖에는.

다시 켈러 도버 쪽으로 돌아와 보면, 그는 경찰이 풀어준 용의자 알렉스를 납치해서 폐가처럼 되어버린 자기 아버지의 집에 그를 감금한다. 그리고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유괴된 딸의 아버지인 버치와 함께 그를 고문하기 시작한다. 처음에 버치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그를 돕길 주저했지만 딸을 찾지 않을 거냐는 도버의 윽박에 이내 협력하고 만다. 얼굴이 부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가 될 때까지 지독한 고문이 이루어졌지만 알렉스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나중에 버치의 아내에게 이 일이 발각되지만 그녀 역시도 도버를 말리지는 못하고 그저 방관만 할 뿐이었다. 자식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들은 죄책감과 싸웠다. 더 이상 때리면 알렉스의 생명이 위태로울 지경이 이르자 도버는 나무를 잘라서 감옥을 지었다. 그 안에 알렉스를 가두고, 그가 대답을 할 때까지 뜨거운 물을 끼얹었다.

한편 형사 로키는 행방불명된 아이들을 위한 기도회에서 수상한 남자를 목격했다. 그의 뒤를 쫓자 그 남자는 도망쳐 버렸고, 로키는 그를 강하게 의심하여 수배를 건다. 그 남자는 사라진 소녀들의 집에 몰래 침입하여 아이들의 옷을 훔쳐갔다. 얼마 뒤 아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매번 다른 치수의 어린이용 옷을 사간다는 의복가게 점원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로키는 그의 집을 찾아가 그를 체포한다. 그리고 그의 집을 수색하는데 그의 집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방들이 잔뜩 널려있는 방이 있었다. 그 가방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뱀과 아이들의 옷이 들어있었다. 벽에는 미로가 잔뜩 그려져 있었다. 싱크대에는 피 묻은 돼지머리가 놓여있었다. 로키는 체포된 그를 심문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미로만 그려댈 뿐이었다. 사실 그는 어린 시절 납치됐다가 탈출한 사람이었다. 미로를 풀면 집에 갈 수 있다는 납치범의 말대로 그는 열심히 미로를 풀었고, 그 기억이 트라우마가 되어 미로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한편 유괴된 기억을 되살려 이번에는 자신이 아이들을 유괴하는 입장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서 차마 정말로 아이들을 유괴하지는 못하고 아이들의 옷을 훔치거나 사서 그 옷에 돼지피를 묻혀 가방 안에 모아둠으로써 그러한 욕망을 해소하는 인간이었다. 이런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는 로키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미로에 열중한 그를 윽박질렀다. 그리고 흥분한 로키를 말리기 위해 다른 경찰관들이 들이닥치는데 일순간 취조실은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그 틈에 미로에 집착한 사나이를 경찰관의 권총을 빼앗아 자살을 했다. 귀중한 참고인이 그렇게 죽어버렸다.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는 생각에 좌절한 로키는 홧김에 책상을 뒤엎는데 죽어버린 참고인이 그리던 미로가 일전에 신부의 지하실에 발견한 유괴범 시체의 목에 걸려있던 팬던트의 문양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편 로키 형사는 집에 침입자가 있었다는 도버 부인의 신고에 도버의 집에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우연히 도버의 지하실을 둘러보게 되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는 말을 좌우명을 삼고 살아가는 도버는 지하실에 온갖 물건들을 쌓아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물건들 중에 절반이나 비어버린 양잿물 자루를 발견한 로키는 그가 지금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도버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만 미행은 들통이 나버렸다. 도버는 형사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고는 주정뱅이 행세를 하며 그의 추격을 따돌렸다. 나중에 도버가 알렉스를 감금하고 고문하는 집을 로키가 찾아내기는 하지만 그 집을 방문하고도 로키는 알렉스가 그곳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참고인이 자살해 버림으로써 사건은 또다시 미궁으로 빠지는 듯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적과도 같이 버치 부부의 아이가 발견되었다. 유괴범의 집에서 혼자 탈출한 거였다. 구조되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아이를 도버는 찾아갔다. 그런데 도버를 본 아이는 도버에게 아저씨도 거기 있었어요. 우리의 입을 막았어요.”라고 했다. 사람들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도버가 아이들을 납치했다는 말인가? 하지만 당사자인 도버는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아이가 자신을 본 것은 며칠 전 방문했던 알렉스 숙모네 집에서였던 것이다. 아이는 그 집의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었고, 입을 막아서 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저 도버를 바라만 봤던 것이다. 도버는 부리나케 그 집으로 달려갔다. 형사 로키도 도버를 쫓아갔다. 로키는 그가 아버지의 폐가로 간다고 생각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버는 폐가가 아니라 알렉스 숙모네로 갔기 때문에 폐가에는 감금된 알렉스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로키는 알렉스를 발견하게 된다.

한편 도버는 연장을 들고 알렉스 숙모네를 방문한다. 문을 고쳐준다는 핑계를 대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눈치 빠른 알렉스 숙모는 권총으로 그를 제압한다. 유괴범은 알렉스의 숙모였던 것이다.

이야기의 전말은 이렇다. 알렉스의 숙모, 그러니까 홀리 존스는 남편 존스 사이에 자식을 두었지만 그 자식들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등지고 만다. 그 일로 신을 원망하게 된 두 사람은 신에게 대항하고 능멸하고 조롱하는 의미에서 아이들을 유괴하며 죽이는 일을 반복해 왔다. 알렉스와 앞서 권총으로 자살한 남자는 모두 그런 유괴의 희생양들이었다. 그러다가 앞서 얘기에 나왔던 것처럼 그녀의 남편은 신부에게 고해성사의 명목으로 신을 조롱하러 갔다가 신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녀만이 남게 되었다. 혼자가 된 그녀는 유괴한 아이 베리에게 알렉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숙모와 조카의 관계가 되어 계속 아이들을 유괴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녀는 도버에게 환각약물을 먹게 해서 신체능력을 저하시키고, 다리에 총을 쏜 뒤에 지하 구덩이에 가둬버렸다. 다리에 큰 부상을 입은 도버는 꼼짝없이 지하구덩이에 갇혀버렸고, 그곳에서 딸의 호루라기를 찾았다. 딸은 이곳에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도버는 안도와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폐가에서 도버는 못 찾고 알렉스만 찾은 로키는 짚이는 구석이 있어 홀리 부인의 집으로 간다. 이미 도버는 지하 구덩이에 갇힌 상태였다. 문을 두드려도 기척이 없자 그는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고, 그가 들어설 때 유괴범은 정신을 잃은 도버의 딸에게 주사기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것을 목격한 로키와 유괴범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고, 유괴범은 사살됐지만 로키 역시도 눈가에 부상을 입게 되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몸으로,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에 로키는 위험천만한 곡예운전을 하면서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고 아이는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도버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아이는 돌아왔지만 그 아이를 찾던 아버지가 사라져버렸다. 로키는 수사 마무리를 위해 유괴범의 집에서 추가적인 증거가 없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더 추가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동료들을 철수시키고 혼자 남은 로키가 크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때 어떤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아주 미약한 소리였다. 잘못 들었나?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또 그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잘못 들은 건가? 순간 또 그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3.탁월하고 만만치 않은 완성도

(1)아름다운 불친절

2013102일에 개봉한 이 영화는 많은 호평, 특히 전문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것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연출의 탁월성 때문이 아닌가 한다. 확실히 이 영화는 만만한 영화가 아니다. 이 감상문에서 줄거리가 차지하는 분량이 저렇게 많은 이유 역시도 이 영화가 2시간 30분이라는 상영시간 동안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압축해서, 조각조각 띄엄띄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원체 추리물이라는 것이 영화가 전개됨에 따라서 조각난 증거들을 모아나가는 과정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일단 이야기의 전개가 도버와 로키라는 두 인물에 의해서 두 갈래의 방향으로 나아가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합치되는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다가, 이 이야기의 이전에 미리 설정된 또 다른 이야기의 증거들과 이 이야기의 증거들이 홉합되어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증거들을 수집하기만 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제시되는 증거들을 관객이 머리를 써서 분류한 뒤에 조립하는 노력이 요구되는 영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노력이 필요하다 보니 나처럼 영화 보는 눈이 없는 관객에게 있어서는 좀 지나치게 불친절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 촘촘한 구성과 연출에 시나브로 눈과 마음이 즐거워져서 영화를 보고 난 후 밀려오는 그 의미심장함이 가슴 깊숙이 자국이 남았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바 바로 감상문을 써보려고 했지만, 영화에 배치된 증거와 장치들이 워낙 많아서, 때로는 이 증거를 어느 쪽 이야기에 분류시켜야 할지 헷갈리는 경우가 있었다. 결국에는 영화를 세 번쯤 보고나서야 정확한 줄거리를 이해해 낼 수 있었다.

특히 로키에게 체포되어서 결국 권총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용의자의 경우, 마지막에 진범인 홀리 부인이 사살되었는데, 그럼 그 남자는 누구였는가, 하는 의문이 가시질 않아서 결국 인터넷 여기저기에 검색을 해서야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도버와 홀리 부인의 대화중에 홀리 부인이 남편이 뱀을 기르다가 뱀에 물려 죽었다고 둘러대는 장면이 있었다. 그리고 체포된 그 남자의 방에서는 뱀이 들어있는 가방이 발견되었다. 그게 힌트였던 거다.

이처럼 이 영화는 재미가 있기도 하지만, 그 재미를 100% 즐기기 위해서는 다른 영화와는 달리 모종의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그 불친절함이라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다소 불쾌하게 혹은 무감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거듭해서 보면 볼수록 내가 놓쳤던 그 어떤 것을 새롭게 발견하게 됨으로써 질리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는 점에서 있어서 이 영화는 참 즐겁다.

 

(2)선악의 혼탁

앞서 필자도 적었듯이 이 영화의 발단부분만 보면 그냥 흔한 납치 유괴물이겠거니 생각하게 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뭔가 좀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흔한 납치 유괴물>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유괴범은 어떻게 갱생이 불가능한 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하다못해 유괴범에게 동정의 여지를 남긴다 하더라도 최소한 유괴를 당한 부모나 그 주변사람들은 아무 죄 없는 순한 양으로 그려지는 것이 바로 그런 흔한 납치 유괴물이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러한 영화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선과 악을 제법 명확히 규정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면서 그러한 규정을 더욱 공고히 하는 측면이 있다 하겠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처음에는 이 영화 역시도 그런 선악의 경계를 명확히 그어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서 그런 경계가 급속히 희미해지기 시작하는 순간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자식을 유괴당한 도버가 용의자인 알렉스를 잔인하게 고문하는 장면이다. 하도 맞아서 더 이상 부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린 알렉스의 피투성이 얼굴을 봤을 때 그 누가 경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그것이 영화라는 점을 상기하고 있다면 그 순간에서 경악과 동시에 웃을 수 있겠지만, 그 웃음은 어디까지나 경악을 품고 있는 웃음이다. 솔직히 그 분장도 어떻게 했을까 싶다.

이와 같은 장면을 마주하면서 관객들은 순간 선악 혼탁을 목격하게 된다. 대체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란 말인가? 과연 알렉스는 진짜 범인일까? 그가 범인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가 범인이 아닌데도 저렇게 무자비한 고문을 저지른 도버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까? 자식을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 오히려 그게 인간적인 것이라는 변명을 통해서?

이러한 질문을 던지다보면 그 즈음하여 우리는 어렴풋하게 눈치 챌 수 있게 된다. 선악에 대한 규정은, 그것이 선사하는 감정은 사실과 진실의 문제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른바 서사의 힘이다. 비록 영화에서는 알렉스가 그렇게 선하고 순진하고 모자란 인간으로 나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고문이 그만큼 더욱더 잔인하게 비춰질 수밖에 없었지만, 만일 그가 진짜 극악무도한 유괴범이라면 어땠을까? 그 경우에도 우리는 동일한 감정을 느끼고 동일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결국 이 영화에서 모든 것은 진리와 사실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건네는 열쇠가 바로 이 영화의 제목인 프리즈너스(죄인들, 수감자들, 포로들)라는 단어다.




 

 

4.프리즈너스(죄인들, 수감자들, 포로들)

이 영화의 제목 <프리즈너스>를 우리말로 옮기면 <죄인들, 수감자들, 포로들>이라는 의미가 된다.

 

(1)수감자

일단 가장 크게 와 닿는 수감자라는 단어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프리즈너스라는 단어를 하필이면 수감자라고 번역할 필연성은 이 영화에서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감금을 당하는 사람들이 그렇고, 영화에서 중요한 단서로 등장하는 미로가 상징하는 바가 또 그러하다.

이 영화에서 수감자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역시 도버에게 감금을 당하는 알렉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도버가 알렉스에게 행하는 고문의 잔인성과 창의성에 감탄과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알렉스는 아이들을 납치한 용의자로 의심받고 그렇게 고문을 당하고 감금을 당했지만 수감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또 있다.

바로 유괴당한 아이들이다. 이 영화의 발단이 되는 사건은 유괴. 아이들이 유괴당하면서 영화는 추진력을 얻기 시작한다. 아이들을 찾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영화와 관객이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 영화의 중심이 되는 사건, 아이들이 경험한 사건은 납치 혹은 유괴가 아니라 감금이다.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서는 아이들이 납치되는 장면이 관객들에게 보여지 않는다. 아이들은 납치된 게 확실할까? 물론 영화를 끝까지 감상한 관객이라면 납치유괴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사라진 직후의 영화 속의 인물이었다면 아이들은 그저 사라진 것일 뿐이다. 그 누구도 아이들이 유괴당하는 장면을 보지 못했으니 그 아이들이 납치된 것인지 가출을 할 것인지 알 수 없다. 영화가 그 장면을 보여주지 않은 까닭에 대하여 나는 그것이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납치가 아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봤다. 다시 말해서 정작 이 영화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아이들이 경험한 납치가 아니라, 아이들이 경험한 감금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납치가 있어야만 감금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아이들을 바깥세상과 그들의 부모로부터 단절시키는 행위의 정확한 명칭을 궁리해본다면 그것은 감금이라고 해야 마땅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고,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에 등장한 아이들 역시 수감자라고 불릴 여지가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그뿐인가? 수많은 아이들을 납치, 감금, 살해한 홀리 부인과 알렉스를 납치, 감금, 고문한 도버 역시도 감금되어 있는 인간이다. 그들은 무엇에 의해, 무엇으로부터 감금되어 있는가? 그들은 무지, 분노, 절망 등에 의해서 진리로부터 감금된 인간이다. 놓치기 쉽지만 홀리 부인과 도버에게 있어서 그들이 감금을 행하게 되는 동기는 묘하게 닮아있다. 홀리 부인 역시도 자식들을 잃은 슬픔 때문에 신을 조롱한다는 명분으로 아이들을 희생시키기 시작했던 것이고,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도버 역시도 자식을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흔히 속세에서 언급되는 인간성 혹은 인간미라는 개념을 염두에 둔다면 그들의 행위에 공감할 여지도 없진 않아 보인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의 윤리적 차원에서 바라볼 때, 그들이 행한 행위의 동기 혹은 목적은 결국 진리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무지, 분노, 절망 같은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다. 그것들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우리에게 그와 같은 감정과 결함을 부여한 것은 누구인가? 신인가? 아니면 우리들 스스로인가? 이러한 물음을 마주한 우리는 <프리즈너스>의 또 다른 의미인 죄인이라는 키워드를 집어 들어야 할 것 같다.

 

(2)죄인

이 영화에서는 종교적인 상징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애당초 홀리 부인이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하게 된 원인이 되는 것이 바로 신에 대한 증오였고, 홀리 부인의 남편을 죽임으로써 그러한 범죄에 부분적으로 브레이크를 걸게 되는 것은 타락한 신부였으며, 영화 중간에는 인간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음을 고백하는 문장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온다. 이러한 연출에 대해서 나는 그것이 말하고 있는 것이 어쩌면 인간은 라는 이름의 벽돌로 쌓아올려진 감옥에 감금되어 있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그러한 감옥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진리를 관조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어쩌면 인간은 현세에서는 그러한 일을 실현해내지 못할 수도 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원죄를 타고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에서 등장하는 아이들이라든지, 어린 시절에 유괴 당했던 알렉스 같은 경우에는 대체 그들에게 그 어떤 죄가 있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유괴된 것이 그들이 가진 원죄 때문이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원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다만 그 원죄는 그들의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을 납치하고 감금한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는 게 편안할 것 같다.

혹자는 이 영화를 의무론과 목적론, 즉 의무주의와 공리주의의 대립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나름 일리가 있는 분석이란 생각이다. 특히 도버라는 인물을 봄에 있어서 그러한 도구는 매우 탁월하게 자신의 기능을 수행한다. 도버가 알렉스를 고문하는 장면에 있어서 의무론과 목적론 중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상이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일단 영화 속의 주인공은 목적론을 선택한 듯 보인다. 언뜻 보기엔 그렇다. 딸을 찾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것일 위한 최선의 수단으로 알렉스를 고문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만약 그가 의무론에 충실했다면 그는 자신이 가진 이성적 능력으로 통하여 보편성을 가지는 법칙을 발견해 내고 그러한 법칙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선의지에 입각하여 행위를 했을 테고 그렇게 행위를 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인간에 대하여 오직 수단으로만 대해서는 안 된다는 준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테니 알렉스를 고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에는 그렇게 의무론과 목적론으로 양분할 수 없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일례로 도버가 알렉스를 고문하기 이전에 그 행위에 대하여 정당화하는 대사를 보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건 이미 사람이 아냐. 아이들을 유괴할 때부터 그는 사람이기를 포기한 거야.”라고 말이다. 무척이나 흥분한 표정으로 말하지만, 위에서 언급된 의무론과 목적론의 대립을 상기하며 읽어본다면 어지간히 의미심장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그러한 서사를 위와 같이 의무론과 목적론의 이분법으로 재단할 것을 미리 예상하고 그러지 못하도록 함정을 파놓은 것 같은 인상마저 받게 한다. 나아가 도버가 설정해 놓은 목적이라는 것이 사랑하는 자신의 딸을 위한 것이라고 할 때, 알렉스를 고문하는 일이 비인간적인 일로서 인간성의 정식이 어긋나는 것이라 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인 알렉스를 고문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그의 딸들에 대한 의무를 방기하는 일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목적론을 비판하고 의무론을 채택하게 된다면 의무론적 윤리학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단점, 즉 상충하는 의무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는 미로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 미로다. 어쩌면 우리가 갇혀 있는 감옥이라는 것은 이러한 의무들로 쌓아올려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러한 의무들 역시 원죄로부터 기인하는 것이고, 나아가 그러한 원죄에서 기인하는 무지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지에 상반되는 개념, 즉 진리에 대한 통찰은 단순히 어떤 과학기술이나 자연적 사실에 대한 인식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를 테면 신적인 혹은 철학적인 깨달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위에서 필자가 언급했던 것과 같은 의무의 상충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지식을 결여한 인간은 결국 스스로를 가두게 되고, 나아가 다른 누군가를 가두게 된다. 죄인을 찾기 위해, 혹은 죄인을 가두기 위해, 혹은 스스로를 가두기 위해 인간은 다른 누군가를 가두는 것이고, 다른 누군가를 가두기 위해서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다. 나아가 인간은 누군가를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 죄인이 되는 것이며, 죄인을 처단하기 위해 죄인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답답한 명제들의 연속이다. 그 답답함이 감옥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러한 어렴풋한 통찰만으로도 2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을 함께 헤맨 이들은 늘 우리와 함께 공존하지만 결코 우리는 인식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의 존재를 혹은 인식 가능성은 혹은 인식 불가능성 그 자체를 짐작이라도 해보는 경험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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