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을 읽고

무중력 증후군 독후감

by 통합메일 2012. 4. 19.
반응형

무중력 증후군 독후감

1.소개

2.줄거리

3.구성

4.작가가 바라보는 현대 사회 (현대인의 불안의 원인)

5.현대인(불안의 결과) 무중력자가 되는 것.

6.언론과 이슈

7.중력의 세상에 존재하는 무중력 (현대인이 짊어진 짐에 대하여)

8.마음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작가의 처방.

1.소개

이 책은 1980년 생 윤고은 작가의 작품이며 제13회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했다. 일단은 책의 제목이 무척이나 수상하다. 오쿠타 히데오의 책 제목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이 단어는 우리로 하여금 우선 ‘그런 질병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아마도 작가가 만들어 낸 질병이겠구나.’하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거기에서 부터는 더 이상의 짐작이 힘들다. 이것은 책을 펼쳐서 어느 정도 읽어 나간 뒤에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의 흐름을 주도 하고 있는 하나의 화두는 ‘새로운 달의 등장’이다. 하지만 작가는 독자들이 쉽사리 책의 제목이 되는 ‘무중력 증후군’과 달의 등장을 연결시킬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아이템을 섣불리 보여주지 않는 정성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중반에 가서야 그 정체를 드러내는 무중력 증후군이라는 병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적잖은 상징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온전한 상징에 가까워서 한 번에 말로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고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맛이 우러나는 소재다.

처음에 달의 등장을 최초의 모티브로 삼았을 때는 이외수 작가의 장외인간(이 작품에서는 달이 등장하는 게 아니라 달이 사라지는 것이 최초의 모티브로 작용한다.)을 패러디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읽어 나갈수록 ‘패러디’라는 단어로 치부할 수는 없을 만큼 작가의 사고가 탄탄하고 논리적이며 참신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나아가 글이 주는 분위기나 문체 또한 일품이다. 세상을 서늘하고 메마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묘사들에서는 편혜영 작가가 떠올랐고, 각종 위트나 풍자에서는 박민규 작가가 생각났다. 그렇다고 윤고은이라는 작가가 위에 언급된 작가들의 짬뽕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팔색조라는 의미의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평가라고 해두고 싶다.


2.줄거리

나는 20대 후반의 청년이고, 부동산 회사에서 텔레마케팅 일을 하고 있다. 경기가 불황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이 업종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일은 언제나 팍팍하고 사람들은 모두가 안 쪽 주머니에 사표를 품고 다닌다. 그런 어느 날 새로운 달이 떠올랐다. 이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언론은 모두 함께 입을 모아 새로운 달이 세상에 미칠 영향에 대해 떠들어댔다. 사람들은 그런 언론에 귀를 기울였다. 기실 사람들이 언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슈가 된 것이 달이라는 것만 새로울 뿐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현상이다. 그저 사람들에게는 입을 모아 떠들 이슈가 필요했을 뿐이다.

새로운 달이 떠오름으로 인해 이슈가 된 것은 ‘무중력’이다. 달이 늘어남으로 인해서 지구의 중력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서 무중력자라고 분류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그들의 세력도 시시할 뿐이었지만 규칙적으로 또 다른 달이 떠오르면서 그들의 세력은 점점 확대되어 가고 그 현상에 대한 집착은 세상을 집어삼킬 위세였다. 사람들은 지구의 중력을 아예 끊어버리겠다는 명분으로 지표면을 뚫고 들어갈 기세로 자살을 하거나 달로 이주하게 해달라고 시위를 벌였다. 내 주위 사람들에게도 그런 영향은 마찬가지로 작용했다. 어머니는 달구경을 하고 오겠다며 집을 나갔고, 어항 속의 금붕어가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심플라이프라는 잡지의 기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는 그녀를 퓰리처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녀는 내가 앓고 있는 원인 모를 통증에 대해 관심이 있었고 우리는 함께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받았다. 그녀는 나를 포함한 여섯 명의 종합검진 결과를 토대로 기사를 쓸 생각이었다.

며칠 후 엄마가 돌아왔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멀쩡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내면은 멀쩡하지 않았다. 완전한 무중력자가 되어 돌아온 엄마는 무중력에 열광하는 세상의 흐름을 쫓아서 무중력 미용실을 개업했다. 장사는 호황이었다. 세상은 시끄러웠다. 사실 그 이전에도 세상은 마찬가지로 시끄러웠지만 사람들은 달 때문에 새삼 세상이 새롭게 시끄러워졌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의 책임을 달로 돌리는 것이 유행이 됐다. 순수열혈의 소설가 지망생이던 친구 구보는 맘을 고쳐먹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최근 유행하는 무중력 섹스를 테마로 한 무중력 판타지아를 개발, 판매하는 사업이었다. 장사는 호황이었고 바빠진 구보는 새로운 일상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다니는 부동산 회사에서는 무중력자를 선언한 사람들이 퇴사를 했고, 사장 역시도 무중력의 흐름에 도취되어 달에 투기를 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름하여 달나라 납골당 주식회사였다. 하지만 때마침 사람들은 무중력과 달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며칠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달이 떴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사람들은 그 규칙성에, 그 규칙적인 두려움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결국 무중력을 테마로 한 사업들은 다시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엄마의 무중력 미용실이나, 사장의 달나라 납골당이나, 구보의 무중력 판타지아나.

무중력에 대한 관심이 쇠퇴하면서 세상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았지만 사실 애초부터 세상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집착하고 집중할 이슈가 생겼다가 사라졌을 뿐이었다. 세상이 조용해질 틈도 없이 새로운 기사가 떴다. 퓰리처가 나를 소재로 ‘무중력 증후군’이라는 질병에 대한 기사를 쓴 것이다. 원래는 존재하지도 않는 병이었지만 사람들은 새로운 이슈에 열광했고 너 나 할 것 없이 기사에 나온 증상을 호소했다. 심지어 병원에서도 그 병에 대해서 이골이 난 듯 그 병을 진단하고 약을 처방해주었다. 모두가 입과 손을 모아서 이슈를 만들어내고 그 이슈에 동조했다. 심지어는 그 병의 소재가 된 나조차도 그 기사를 보고선 새롭게 무중력 증후군에 걸렸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사실이 이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슈가 사실이 되는 세상이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증상도 그 병에는 추가됐는데, 살인이나 절도의 충동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확실히 그 병에 걸렸다는 것을 증명이라고 하고 싶어 하는 듯 세상은 갑자기 살인과 절도로 시끄러워졌다.

결국에는 무중력 증후군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과 심지어는 새로운 달이라는 것도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졌다.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 듯 했지만 이내 흐지부지 잊혀 갔다. 사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로 세상에 존재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런 이슈가 세상에 있었다는 것, 그뿐이었다.

퓰리처는 만년필 증후군이라는 병을 새롭게 개발해서 기사화했고, 세상은 다시 만년필 살인으로 시끄러워졌다. 그 시끄러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사람들은 무엇에라도 집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구성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과 관찰자 시점을 넘나들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경험하는 일들이 사건의 주된 요소가 되는 동시에 나는 철저히 사회를 관찰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초반에는 보통 나의 일상적인 문제들이 사회적 문제들과는 별개의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에 나는 온전히 사회를 관찰하는 역할에 그치지만 중후반부로 넘어가게 되면 내가 소재가 된 무중력 증후군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나는 아무도 모르게 세상의 한 중심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나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와 정확히 일치하게 되고,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회의 문제를 진심으로 파악하고 공감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이야기는 주인공인 나의 생활세계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전개된다. 작품에서 보이는 주인공의 생활세계는 가족(아버지, 어머니, 형)과 회사(사장, 조부장, 이 과장, 홍 부장), 친구(구보), 언론(심플라이프 기자 퓰리처), 사회(무중력자)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이들이 세간의 변화에 따라 체험하게 되는 일들로 소설은 움직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여성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남성 화자의 자아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점이다. 여성 작가들 중에는 간혹 무리하게 남성 화자를 채택했다는 느낌을 주는 이들도 있어서 나는 처음엔 이 작가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내심 걱정을 했는데 완독한 결과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 최소한 어디 대놓고 흠잡을만한 구석은 없는 화자였다. 사실 그래도 이 점만으로 이 작가의 필력에 대해서 원 없는 칭찬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4.작가가 바라보는 현대 사회 (현대인의 불안의 원인)

소설은 비록 주인공의 생활세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유로 어쩌면 한 개인의 좁은 시야에 갇힐 수 있다는 위험에 처하지만 사실 작가는 오직 사회적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다. 개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 그것은 철저히 사회적 이야기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 자신이 고대 그리스 철학적 사고에 입각하여1), 사회를 떠난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 집필에 임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선 작가는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내가 일하는 회사에서 목격할 수 있는 모습들은 쳇바퀴 돌 듯 똑같은 일상이며 그 일상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시간에 쫓기고, 상사의 눈치를 보며, 퇴근한 뒤 모여서 상사의 험담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화장실에서 하는 낙서를 통해서만 자신의 속마음을 분출하는 익명성에 의존하는 모습들이다.

이런 사회적 문제들은 우리들의 집까지 따라온다. 현대 사회의 전면에서 고진분투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에 대한 기성세대의 시선은 곱지 못하다. 이것은 주인공인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과 언행에서 잔인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고 친숙하게까지 보이는 장면들이다.

한편 모든 이들이 생존전선에서 싸우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의 친구 구보는 기성세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가는 또 하나의 젊은 세대를 대표한다. 사회적 기준에서는 무능력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적 여유와 경제적 여유가 충족되는 직장을 추구하는 그의 모습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작품에서 묘사된 현대 사회의 모습을 볼 때 나는 작가가 이 사회의 모습을 무척이나 열심히 분석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나는 흔히 일컬어지는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들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이 소설이 공유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5.현대인(불안의 결과) 무중력자가 되는 것.

작가는 현대사회와 그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이는 단지 기술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그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현대인들이 취하는 어느 특정한 방식에 천착한다. 다시 말해 그 현대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지만 그 사회에서 현대인들이 모두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닌바 작가는 가능한 선택들 중에서 한 가지에 집중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작가는 현대인들이 끊임없이 무엇인가 시달리며, 언제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삶에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고 파악하는 듯하다. 회사원들은 실적과 상사의 눈치에 시달리고, 부모는 자식들의 출세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걱정하며, 젊은 가장은 앞가림 못하는 동생과 집안의 생계에 대한 부담을 짊어지고 살고, 청년들은 자신의 꿈과 돈 사이에서 끊임없이 후회하고 고민하고 갈등하고 방황한다.

그런 상황에서 회사원들은 저들끼리 모여 상사의 욕을 하거나 낙서를 하고, 부모들은 닥치는 대로 신앙에 의존하고, 청년들은 타협과 정절 사이에서 헤맨다. 혹은 그런 고민을 잊기 위해서 병적으로 많은 동호회에 가입하기도 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작가는 하나의 변수를 던진다. 그것은 그 무엇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이다. 그런 고통과 심지어는 자신이 그런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는 현실 자체를 잊게 만들어 줄 무엇인가를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이 작가의 근본적인 아이디어가 아닌가 한다.

달이 나타났다는 말에 사람들은 달을 핑계로 일상의 짐을 벗어던지고 힘겨운 일상에서 탈피해 달로 가고자 한다. 사실 그게 달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도망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건물을 쌓아올리는 만큼 인류는 스스로에게 짐이 되었고 그 높은 건물들은 동시에 탈출구이기도 하다.

또한 작품의 후반에 등장하는 ‘무중력 증후군 자가검진표’의 마지막 증상이 현실화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설득력이 약하지만 이 부분은 현대인들이 얼마나 유행에 집착하고,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지는 보여준다.



6.언론과 이슈

이러한 현대인들의 집착에 충실하게 일조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다. 작가는 현대사회에서 언론이 가진 영향력에 대해서 아주 극단적인 사례를 보여주는 듯하다. 물론 그것은 과장되어 있고, 허구에 기대고 있지만 그만큼 언론이 가진 힘과 그 폐해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책의 초입 부분을 읽고 있을 즈음의 나는 아직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언론의 모습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달의 등장이 추가적인 임팩트 없이도 세상에 많은 파동을 낳는 것에 무척 공상적인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그것은 소설의 모습이 무척 작위적이라고 느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가면서 나는 곧 작가가 말하려 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었다.기실 딱히 과학적으로 변한 것은 없는데 사람들은 무한한 변화를 경험한다. 그들은 변화와 뉴스에 중독되어 있다. 핑계거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일탈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살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일탈을 위해 산다. 현대 사회는 너무나 정적이다. 지루하고 뻔해서 미칠 것 같다. 그렇게 달이 나타난 이후의 변화들을 읽으며 나는 점점 이 세계에 몰입되어 갔다.

이 작품에서 언론은 철저히 사람들을 선동하는 매체다. 사건의 진실성이나 논리 따위는 이미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작품 속에서 우리 사회의 언론을 대표하는 ‘퓰리처’의 대사에서 우리는 그런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질문의 답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뉴스가 되느냐 덜 되느냐 그게 중요할 뿐이죠. 그러니까 두 부류로 말했다는 게 중요한 거죠.”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그런 뉴스에 현혹되는 이유는 인간 내면에 시한폭탄처럼 심어진 이분법적 사고관 때문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일단 핵심이 되는 생각은 ‘기사로 만들면 그게 곧 사실이 된다. 그게 이 세상이다’라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매체는 발달의 극을 달렸다. 하지만 SNS 괴담과 같은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런 매체들이 가져오는 정보의 범람과 유언비어의 확산은 폐해로 남는다. 거기에 더하여 그런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심리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그 원인은 과학기술과 집단 이성에 대한 맹신이며 그 근원은 근대로 추적해갈 수 있을 것이다. 하버마스가 비판하는 도구적 합리성을 의심해볼 수도 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결과이며, 교육이 이성의 사용법이 아닌 지식의 나열만을 주입할 결과이기도 하다. 이 경우는 다소 과장됐지만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건강불안증도 미디어의 역할이 한 몫을 차지한다.

알게 모르게 우리가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되는 의학상식들, 이를테면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떠오르게 되는 ‘KBS 생로병사의 비밀’ 같은 프로그램이 전달해주는 정보들은 인간의 생활에 유익한 것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수용하는 이로 하여금 지나친 불안을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그리고 인간의 사회는 그러한 불안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그 집착의 이유는 사실 또 다른 불안이다. 근본적인 불안을 잊기 위해 다른 불안에 집착하는 것이다.

253페이지에 나오는 장면. 병원에서 있지도 않은 병을 공장 식으로, 책임감 없이 진단하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고 풍자의 극이다. 한의원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사람들의 강박관념을 얼마나 교묘하게 이용해 먹는지 그 과정에서 언론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7.중력의 세상에 존재하는 무중력 (현대인이 짊어진 짐에 대하여)

하지만 모든 것을 언론의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어떻게 보면 언론은 인간의 고질적인 집착을 슬쩍 거드는 역할만을 했을 뿐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익을 철저히 챙겼을 따름이다.

근본적인 원인을 파고 들어가면 그것은 질병에 걸린 사회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다. 그 문제란 무엇일까? 이는 작가가 소설 속 중요한 소재인 ‘무중력’에 부여한 상징을 통해서 조심스럽게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중력자가 된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며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달이 뜨고, 그것이 지구의 중력 약화라는 개념으로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앞 다투어 무중력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무중력자로 커밍아웃한 이들이 취하는 행동은 자살을 하거나, 사표를 내거나, 달 이주를 요구하는 집회에 참여하는 등의 행위다. 이들 행위의 공통점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ㆍ도덕적 책임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일종의 ‘짐을 내려놓는 행위’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의미심장한 것은 작가가 이 행위를 하필이면 ‘무중력’과 연관시켜 놨다는 것이다. 짐을 내려놓는 것 그 짐은 마치 중력과 같아서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를 짓누르고 우리는 좀처럼 그것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며 살아간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그 의식하지 못하는 짐을 끊임없이 거부한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며 살아간다. 언제나 사표를 품에 넣고 다니는 행위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 조금만 노력하면 그것은 의식할 수 있는 행위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한다.’는 점이 그 사실을 철저하게 가려버린다. 모두가 다 불안하고 두려움에 빠져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하나의 위안으로 다가오는 것이지만 근본적인 두려움과 문제를 은폐하는 역기능을 초래하기도 한다.

하지만 달이 등장하고 무중력이라는 것이 그 전까지는 철저히 중력이 지배하던 이 땅위에서 구현될 수도 있다는 희망이 번지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그 짐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했지만 그때는 소극적이고 무의식적이었다면 이제는 의식적이고 적극적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두려움이나 불안을 대하는 올바른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사회적 짐을 의식하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행위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행위이다. 오히려 사회는 또 다른 불안에 대한 이슈에 집착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을 따름이다. 이에 편승하는 행위들이 엄마의 무중력 미용실 개업이나 구보의 무중력 판타지아 사업 같은 것들이다. 물론 이런 행위들은 사태의 껍데기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보기 좋게 실패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결국 사회가 걸려 있는 병이라는 것은 무중력 증후군이 아니라 자신의 불안과 고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 알 수 없는 것을 외면하고 부정하기 위해서 또 다른 불안을 만들어 내고 끊임없이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도달 가능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해결 가능한 것이라면 그것이 해결되는 순간 인간은 다시 원래의 문제에 직면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끊임없이 이슈를 요구한다. 언론은 매우 친절하게 여기에 호응한다. 날조된 기사도 상관없다. 사람들에게 이미 그런 조건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끊임없이 스스로를 불안하게 만들어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유행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현상’, 작가는 그것을 인간이 본질적인 자신의 질병을 외면하려 하는 행위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8.마음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작가의 처방.

언급했듯이 작품의 끝을 향해 갈수록 무중력이나 무중력 증후군에 집착했던 사람들은 점차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작가의 묘사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그들이 언제 한 번이라도 제대로 떠난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저 몇 개의 이슈들이 사회를 훑고 지나갔을 뿐이고 사회는 익숙한 듯 그것을 흘려보내고 쉽게 잊어버린다.

작품 내의 이 과장과 홍 과장, 그리고 주인공의 친구인 구보와 엄마는 무중력자를 선언하거나 그것에 의존했다가 나름의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게 되는 인물들이다. 무중력자를 선언하며 사회적 짐을 벗어버린 이들이 겪는 좌절이 의미하는 것은 어차피 우리는 중력을 거스를 수 없듯이 사회적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고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우리에게 필수적이라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진정한 문제는 그런 인간 외부에 어떤 불안을 만들어 그것에 집착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을 작가는 던지고 있는 것도 같다.

구보의 회사에서 개발한 무중력 판타지아 속에서 울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은 무중력을 필요로 하는 것, 즉 현실의 부담과 짐을 벗어버려야 하는 주체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육체적 쾌락에 집착한다. 이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 사회에 유행한 ‘무중력 섹스’와 ‘무중력 판타지아’, 그리고 ‘무중력 미용실’이다. 어쩌면 작품 내에서 무중력자를 자처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해방시켜 진정한 자신의 삶을 찾고자 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방법을 잘못 선택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달이나 무중력 증후군 소동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져 오랜만에 다시 조용해진 세상이 돌아왔다. 하지만 쉴 틈도 없이 퓰리처는 ‘만년필 증후군’이라는 것을 개발한다는 소식을 전하며 작가는 이 사회가 쉽게 그런 이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 전체를 통해 숨어있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아마도 그것이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느끼고, 또 두려워하는 ‘소외감’이 아닐까 한다. 작품의 곳곳에서 주인공인 내가 소외감을 두려워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외감이라는 것은 이슈에 집중하고 유행을 따라감으로써 사회와 일치감을 느끼는 행위를 통해 잠시나마 그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나의 짐작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현대인은 소외감을 느끼지만 그것을 정작 마음이 아닌 몸이나 외부자아를 통해 인식한다. 그 이유는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문명에 비해서 현대인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서 인류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도 미숙한 상태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마음의 문제, 소외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이슈에 집착한다.

그런 이슈와 이슈 사이의 빈 공간에서 잠시나마 세상은 조용해졌지만 주인공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세상은 평온해졌지만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고, 오히려 집착할 이슈가 사라진 이상 더 이상 그 소외감의 책임을 돌릴 대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을 느껴 붕대를 사서 가슴을 동여맨다. 나름의 응급처치를 한 것인데 이 장면은 인간이 마음의 문제를 대함에 있어서 얼마나 미숙한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대인. 인간은 또 다시 달을 찾는다. 집착하고 두려워함으로써 소외감을 잊지 위해, 진짜로 두려운 것을 외면하기 위해. 언제쯤 그 지난한 방황이 마침표를 만나게 될까. 이 질문에 대해 작품의 끝에서 작가는 다소 친절한 모습을 보여준다. 엑스레이 사진 속, 주인공의 가슴 속에 찍힌 달의 모습. 우리가 집착하고, 추구하고, 사랑하며, 열광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 어디에 있는지 작가는 그런 방식으로 가리켜 주고 있었다. 그리고 독자로서의 나는 그것을 하나의 희망으로 받아들이며 책을 덮었다.



1) 고대 그리스에서 개인이란 언제나 사회 속에 존재함을 전제한 개인이었고 그런 이유에서 사회를 떠난 개인은 생각될 수 없었다. 이런 사고방식은 로마 시대에 와서 무너지게 된다. 현대에는 이 두 가지 사고가 혼합되어 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