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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기록

2013년 1월 12일의 꿈 (뉴욕 테러의 현장에서)

by 통합메일 2013.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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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날씨는 정말이지 형편없었다. 칙칙한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빽빽이 들어선 빌딩들 덕분에 야박하게 내다보이는 하늘이란 것이 그렇게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엄마와 동생이 출근준비로 늑장을 부리는 동안 미리 건물 아래로 내려와 담배를 피우며, 나는 내가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근본적 원인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핵심은 드러나지 않았다. 1층에 있는 명품 브랜드 매장 앞을 서성이며 한 개비의 담배를 온전히 태울 때까지도 드러나지 않는 것, 그것은 바로 내가 왜 이곳에 있는가 하는 거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춥지는 않다는 것이다. 오늘부터 한파가 풀린다는 엊그제 일기예보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오늘은 금요일이다. 한파가 끝나서 잠시 따스해져 어쩌면 내심 봄을 기대하게 할지도 모를 그런 금요일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명품 매장의 쇼윈도에 눈길이 걸렸다. 시선을 잡아챈 것은 가방이었다. 얼마 전 동생이 새로 산 것처럼 한쪽 어깨에 메는 약간 큰 크기의 갈색 여성백이었다. 나는 다른 어딘가에서 그것을 본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분명 난 어디선가 그것을 봤고 그 인상이 내 시선을 이 가방에 멈추게 한 것이다. 그렇게 느낌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그게 어딘지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와 동생이 준비를 마치고 집에서 내려올 때까지 나는 가방에 대해 밝혀내지 못했다.
"늦으면 니 탓임"
"아니 왜? 오빠가 협조를 제대로 해주지 않아서 이런 건데?"
"아놔 이게 미쳤나 진짜"
"엄마! 오빠가 구박해요!"
"정환아 왜 그러니!"
그런 시시껄렁한 얘기를 하며 우리는 약간 잰 걸음으로 걸어갔다. 엄마와 동생과 나는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뉴욕에서 일한다는 느낌을 제대로 팍팍 받을 수 있는 고층 빌딩의 고층 직장이었다. 하지만 대체 어쩌다가 우리는 뉴욕에서 이런 생활을 하게 된 것일까. 뭐 말 해 입만 아프지. 다 내 동생 때문이 아니겠는가. 동생에게 코 꿰여 딸려온 것이다. 평소에 동생을 코쟁이라고 놀리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았는데 이런 현실에 직면하게 되다니 괜스레 어깨에 힘이 빠졌다.

그렇게 걸어가는 데 버스정류장 앞에서 나는 한 늙은 거지를 목격했다. 덴젤 워싱턴이랑 똑같이 생긴 이였는데 정류장 앞 상가와 상가 사이의 틈에 쪼그려 앉은 채였고, 한 쪽 눈에는 백내장이 심해 보였다. 하얗게 번진 눈동자 위로 수많은 군중들의 걸음이 내비쳤다. 그 때 나는 가방의 정체가 떠올랐다. 어제 퇴근할 적에 건물 1층에서 본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가 바로 그 가방을 매고 있었다. 사실 가방보다 더 강하게 각인된 것은 그녀의 몸매, 그 중에서도 다리였다. 그녀는 흔히 황금비라고 하는 다리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발뒤꿈치와 발목의 축이 만들어 내는 삼각형, 그리고 발목의 축에서 종아리의 가장 넓은 부분이 만들어내는 삼각형, 그 삼각형으로부터 무릎까지의 거리, 오금으로 짐작해보는 무릎 뼈의 크기 등으로 구성된다. 단순히 길고 가느다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각 부위가 정밀한 기계의 부품처럼 적당해야 하고 규격에 맞아야 한다. 그녀는 그런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힐끗 한 번 보고선 놀란 나머지 다시 몇 번인가 뚫어져라 뒤돌아보며 쳐다봤던 것이고 덩달아 그녀가 매고 있던 가방 역시 나의 뇌리에 깊이 남았던 모양이다.
머릿속으로 몇 번인가 그녀의 다리를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회사 앞이었다. 찌푸린 하늘에 꽂힌 회색 건물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빨아먹고 있었다. 사람들은 얼른 잡아먹히고 싶어 꾸역꾸역 회전문을 뚫고 들어갔다. 그 꼴이 마치 난자에 먼저 닿기 위해 경쟁하는 정자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자와의 수정에 성공하기 위해 그 어떤 정자보다 열심히 난자를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언젠가 봤던 다큐멘터리에서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1등으로 난자와 만난 정자가 무조건 수정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고, 1등으로 만났다고 하더라도 난자의 성에 안 차면 나중에 온 정자에 밀려 수정에 실패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1등 정자가 아무리 부지런해 봤자 태어날 때부터 잘 타고난 정자에게는 당해낼 방법이 없다는 교훈을 알려주는 다큐멘터리였다. 인간은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정자 때도 그랬는데 하물며 지금에야'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모든 것은 벌써 (알 수 없어 특정할 수 없는) 그 때 결정된 것이라고 해야 할까. 굳이 따지자면 나는 후자로 마음이 기우는 것 같았다.

엄마는 들어가기 전에 커피를 한 잔씩 하자며 지갑을 빼들며 한 마리의 정자가 되어 테이크아웃 커피 노점상 쪽으로 갔다. 노점상에는 이미 많은 정자들이 줄을 서 있었고, 난자는 열심히 커피를.. 아니다.

엄마가 커피를 사러 간 동안 동생과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사태를 관전하고 있었다. 몇 해 전이던가 명절 장을 보기 위해 동네 재래시장에 가서 장바구니랄 들고 시장 한 켠에 이렇게 동생과 나란히 우두커니 서있던 기억이 났다. 장바구니를 들고 엄마를 졸졸 쫓아다니기엔 다리도 아프고 걸리적거리니까 생각해낸 꼼수가 그거였다. 시장 한 켠 한적한 곳에 우리가 서 있으면 엄마는 어미 새가 새끼에게 벌레를 물어오듯 차례상에 올릴 소고기, 생선, 떡, 황태포, 과일 등을 하나씩 들려주고 갔다. 동생은 왠지 안절부절 못하고 계속 엄마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 날 재래시장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그녀는 늘 엄마를 그리워했다. 멀리서 그리워했고, 가까이에서는 더욱 그리워했다. 오히려 멀리 떨어지면 별로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반면에 나는 멀리서 그리워했고, 가까이에서는 그리워하지 않았다.

결국 동생은 나와의 대기상태를 이탈하여 줄 서있는 엄마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쫄래쫄래 엄마를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었다. 동생이 엄마랑 같이 사이좋게 커피를 들고 오는 경우와 복잡한 데 뭐 하러 왔냐고 박대되는 경우. 내 기억에 엄마는 분명이 '복잡하니 여기 있어라'라고 하며 갔다. 결과는 후자였다. 멀어서 소리가 닿지 않아 동생과 엄마의 실랑이가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동생은 뭐가 그렇게 서운한지 잔뜩 삐져서는 돌아왔다. 통쾌하게 웃어줄까 하다가 그랬다가는 동생의 폭주성이 가진 역치를 초과해버릴 위험이 있어 보여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잠시 후 엄마 차례가 되었고 나는 눈치껏 다가가 엄마가 계산한 커피를 양 손에 집어 들었다. 동생은 더러워서 안 먹는다는 투로 내치더니 이내 커피를 받아 집었다. 덕분에 즐거운 금요일 아침이 되어서 동생에게 고마웠다.

커피를 들고 회전문을 들어가는 데 로비 경비실 앞바닥에 눈에 확 띄는 물건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어젯밤, 그리고 오늘 아침 명품 브랜드 매장의 쇼윈도를 통해 봤던 그녀의 가방이었다. 그것은 주인 찾아가라는 듯 보안검색대 부근의 바닥 골판지 위에 제법 곱게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에 꽂은 시선을 유지할 채로 보안검색대를 통과했다. 엄마와 동생도 내 뒤를 따라왔다. 하지만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의 숫자가 엄청나게 큰 굉음으로 이 건물 전체를 크게 울려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엄마와 동생이 무슨 일이냐는 듯 내 얼굴을 쳐다봤다.
"잠깐 다시 돌아가자. 걸리는 게 있어"

보안검색대 앞의 뚱뚱한 흑인 여자 경비원은 내 어눌한 영어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Is it,, no no,, Was it in main robby, wasn't it?"
그녀는 그렇다고 했다.
나는 동생을 시켜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보고 싶다고 전하라 했다. 안 보여줄 줄 알았는데 경비는 흔쾌히 가방을 열어 보여줬다. 가방 안에는 유리병에 든 화장품이 들어 있었다. 등 뒤에서 엄마가 지각이라며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동생과 경비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나는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당신, 이 가방의 주인을 아나요?"
나는 안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이 가방의 주인의 다리를 아냐는 질문이었다면 차라리 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뭔가 이상했다. 그 이상한 느낌의 근원이 어제 본 그녀인지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심장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나는 초점 잃은 시선을 시커먼 가방 안에 숨기며 그 느낌의 근원을 추적했다. 그러다 드디어 실마리가 잡혔다.
"가방에 왜 화장품 밖에 안 들어 있지? 지갑도 없고, 그 흔한 명함 한 장 없이.."
다른 사람들도 그러고 보니 그렇다는 표정이었다.
"오빠 여기서 소리, 그러니까 오르골 소리가 나는데?"
나는 머리 꼭대기까지 소름이 끼쳤다. 정말 가방의 어딘가에서, 그 좋은 가죽을 뚫고 청명한 오르골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소라인지 알 수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부여잡고 나는 동생에게 경찰을 부르라고 전하라고 했다. 동생이 전하자 흑인 여경비는 넉살 좋은 웃음으로 손을 흔들며 이 나라의 경찰들은 모두 도둑놈에 개새끼들 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는 분통이 터졌지만 다시 조근 조근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허트 로커’에서 본 폭탄처리반의 약자가 EOU였나 뭐였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럼 어제 본 그 여자가 테러범이라는 말인가. 그렇게 좋은 다리를 가진 여자가. 동생이 알아듣게 잘 설명을 했더니 경비원은 약간 진지해지더니 그렇다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했다. 나는 엄마와 동생의 손에 끌려들어갔다. 이미 출근 시간을 한참 넘겼을 것이다. 엄마는 끊어지지 않는 알람 소리처럼 너는 오지랖이 너무 넓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들도 좀처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와 동생을 1번 엘리베이터에 태웠다. 층이 달라 나는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야했다. 사람이 많은 층이라 엄마와 동생은 매우 껴서 타야했다. 엘리베이터 한가운데에서 양코배기 냄새에 질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엘리베이터를 탔다. 작은 키에 베이지색 점퍼를 입고 낡은 야구 모자를 쓴 백인 할아버지가 함께 탔다. 단 둘 뿐이라 엘리베이터 안이 휑했다. 굽은 허리로 보아 '호호 할아버지' 수준은 되어 보이는 그였다. 가벼운 인사를 하며 버튼을 눌렀다.

'12층'
눌렀는데, 누른 것 같은데, 그래서 버튼에 불이 들어온 것 같은데, 불이 들어왔다 금방 꺼진 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내가 버튼을 헛눌러서 불이 들어오지 않았던 것인지 헷갈렸다. 다만 둘 중 어느 경우가 됐든 버튼을 다시 눌러야 한다는 사실은 같기 때문에 다시 버튼을 누르려 손가락을 뻗었을 뿐이다. 그리고 잔잔한 진동과 함께 울렁거림이 밀려왔다.
'이게 뭐지?'
그런 표정으로 할아버지와 나는 서로 마주봤다. 그리고 그 때 엘리베이터의 조명 등이 깜박였다.
'왔나'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까 그 가방에 들어있던 화장품이 폭약이라면, 그리고 이 정도 되는 덩치의 건물이라면..'
나는 서둘러 어림짐작으로 계산을 했다. 사실 계산에 사용할 요소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폭발 현장 주변과 1층에는 많은 인명피해가 있을 수 있지만 건물 구조에 영향을 주기는 힘들 것이다. 서둘러 현장을 벗어나 앨리베이터를 타길 잘했다.'
그렇게 계산이 끝나자 이제 건물이 기우는 것이 느껴졌다. 무척 거대한 것이 기울고 있고, 자신이 그것의 일부가 되어 함께 기울어 가는 것의 기분을 실감하면서 나는 몇 번인가 눈을 깜빡였고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이렇게 되면 고층보다는 저층이 훨씬 생존 가능성이 크니 그나마 나에겐 다행인데.. 엘리베이터의 외벽이 나를 보호해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엄마와 동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마침내 시야가 캄캄해졌다. 여전히 그 무엇인가가 기울고 있었고, 속이 울렁거렸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건물이 기우는 것인지, 세상이 기우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나 혼자만이 기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세상과 내가 믿는 세상과 실제로 내가 속한 세상의 괴리가 한순간에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었다. 분명 그래서, 반드시 그래서 이렇게 마음이 아려오는 것이리라. 우리는 모두 정자였을 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나는 대체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2013년 1월 12일 토요일의 꿈. 일어나자마자 아침에 옮겼다. 침대에 누워 폰으로 쓰고, 컴퓨터로 교정을 봤다. A4로 4매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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