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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천명관의 『고래』 독후감 – 존재의 과잉에 대한 반성과 진정한 실존

by 통합메일 2013.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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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의 『고래』 독후감 – 존재의 과잉에 대한 반성과 진정한 실존

1.소개

2.구성 및 줄거리

3.해학과 자유분방함

4.고래와 삶(실존에의 의지에 대한 반성)

5.맺는말

1.소개

이 문서는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천명관 작가의 장편소설인 『고래』를 읽고 작성한 독후감이다. 필자가 ‘천명관’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아마도 트위터에서였고, 그가 최근에 출간한 장편소설인 『나의 삼촌 브루스 리』라는 소설이 존재한다는 것을 건너건너 알게 되었던 것이 계기가 아니었나한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동생의 책꽂이에서 천명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고래』가 꽂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부리나케 읽어 내려갔다. 천명관은 기존의 문학적 전통이나 유행에 빚을 지지 않은 작가라는 수사가 따르는 인물이다. 그만큼 독창적인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러한 작가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불리는 만큼 본 소설은 처음 책장을 넘기기 시작할 때부터, 책을 읽어가는 내내, 그리고 책장을 덮고, 그 느낌을 기록하기 위해 백지를 마주하는 시점까지도 기묘한 인상으로 남아있음을 나는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2.구성 및 줄거리

소설이라는 것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좋은 소설일수록 서두에서의 몰입이 힘겨워 쉽사리 책에 집중하기가 힘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려 하는 작가의 심술 때문에 그럴 것이고, 소름끼칠 정도로 세심한 묘사에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그것은 작가가 만들어 놓은 그 소설의 세계에 들어가는 문이 튼튼하고 두껍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한다.

이 작품이 바로 그렇다. 물론 그것만 가지고 책의 초두에서부터 ‘그래 몰입이 힘든 것을 보니 이 책은 분명 좋은 책임에 틀림없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이 책의 서두는 몰입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이 소설과 견줄 만큼 어려웠던 책은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개인적 취향에 기인하는 경험이겠으나, 아직까지도 이 소설을 떠올리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책의 초두에 징그럽게 묘사되는 ‘개망초’라는 이름의 식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만큼 개인적으로는 분명히 몰입이 어려웠다.

그렇게 힘든 몰입으로 내가 처음 접하게 되는 인물은 바로 ‘춘희’다. 처음으로 등장한 인물에 나는 당연히 앞으로의 이야기가 그녀를 중심으로 전개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마 나를 비롯한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러한 예상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접한 이야기들의 영향일 테고, 우리가 흔히, 그리고 무심코 치부하는 삶의 흐르는 모습을 이 책에 대입했을 때 피할 수 없는 결과일 것이다.

그녀는 분명히 이야기의 주인공이 맞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녀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책 초두에서 그녀의 등장은 그저 우리가 꽤 많은 책장을 넘기고 난 후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야기는 그녀의 어머니 금복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조금 더 올라가서 장차 이 소설의 이야기가 신나게 전개될 ‘평대’라는 지역에서 국밥집을 하던 노파의 유년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소설의 서평에 자주 거론되는 ‘3대를 망라하는 이야기’라는 구절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를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국밥집 노파에서 시작하여 금복에게로 이어져 마지막으로 춘희에게까지 향하는 대서사를 이해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선 국밥집 노파는 지독한 박색이다. 엄청나게 못 생겼다는 말이다. 그런 몰골을 가진 그녀는 어느 부잣집에서 식모 노릇을 하며 살아갔는데, 그 집에는 칠푼인지 팔푼인지 모를 아들이 있었다. 부잣집이었지만 모자란 아들을 대놓고 기르기엔 체면이 없었는지 그 집에서는 그런 아들을 숨겨두고 키웠는데 그런 아들을 보살피는 것이 바로 그 노파의 일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 노파가 아직 ‘노파’라고 칭하기에는 지나치게 젊은 시절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 아들에게는 기이한 사연이 있었으니 바로 머리가 모자란 만큼 성기의 크기가 무척이나 크다는 것이다. 그런 물건에 홀린 노파는 결국 그 모자란 아들을 꾀어 성관계를 맺게 되고 그런 일을 거듭하게 된다. 그러다 결국 들통이 나서 몰매를 맞고 쫓겨나게 되는데, 그런 봉변까지 당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칠푼이 아들에 대한 미련이 남았던 것인지 늦은 밤 몰래 아들을 납치해서 달아난다. 그리고 어느 개울가에서 그와 마지막 관계를 맺고 그를 물에 빠뜨려 죽여 버린다. 이후 사방을 떠돌던 그녀는 딸을 낳았고 다시 어느 집 식모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의 괴팍한 성미 때문인지 아니면 지난 날 죽여 버린 칠푼이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홧김에 딸의 눈을 불쏘시개로 찔러 실명시킨다. 그리고 돈을 모아 평대에 주막을 차린 노파 모녀. 박색의 노파였지만 주막을 운영하는 그녀를 넘보는 남자는 많았다. 그 중 한 사내에게 노파는 진득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 사내는 그녀에게서 만족하지 못하고 그녀의 외눈박이 딸을 넘봤다. 딸에게 남자를 빼앗겼다는 사실에 분노한 노파는 딸과 통정하고 있는 사내를 찔러 죽이고, 딸은 양봉장수에서 팔아 넘겼다. 벌꿀 두 통에. 이후 노파는 지독하게 돈을 모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제 진정 노파가 ‘노파’라는 이름으로 밖에 불릴 수 없게 된 때가 됐다. 그런 어느 날 벌꿀장수에게 팔아넘긴 딸이 돌아왔다. 벌꿀의 독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은 백발이었다. 돌아온 그녀는 노파를 윽박지르며 모아둔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노파는 지독했다. 딸은 자신의 어머니는 죽였지만 결국 노파가 숨겨놓은 돈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제는 금복이라는 여인의 인생으로 넘어간다. 사실 노파와 금복은 핏줄 같은 것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대체 두 인물이 어떻게 연결될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결국 나중에는 연결이 된다. 산골짜기 마을에서 태어나 일찍이 어머니를 잃은 금복.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끔찍이 사랑했으나 그녀에 대한 욕구를 느끼는 자신을 부정하기 힘겨운 나머지 하루하루 술에 찌들어 살아갔다. 그런 상황에서 금복은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고 어느 날 마을을 찾은 생선장수와 함께 집을 떠났다. 자신의 딸이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의 아버지는 그날 밤 마을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 생선장수와 함께 마을을 떠난 그녀는 항구 도시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고래라는 존재를 만나게 되었다. 크고 웅장함을 상징하는 그 존재는 그녀로 하여금 그러한 커다랗고 장엄한 것에 대한 집착 내지는 목적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갖도록 만들었다. 타지에 나온 그녀는 별 수 없이 생선장수와 함께 살게 되었고, 지혜를 짜내어 생선을 말리는 사업을 벌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하루하루 돈 버는 재미에 살아가던 그녀에게 ‘걱정’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남자가 나타난다. 금복과 같이 젊고 싱그러운 여자에게 늙은 생선장수는 지나치게 소박했던 것이다. 힘이 장사인 걱정은 처음으로 금복을 담을만한 큰 그릇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살게 되었고, 금복의 지혜로 걱정의 임금도 대폭 상승되면서 두 사람은 그야말로 행복은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걱정이 부두 공사 현장에서 사고로 큰 부상을 입게 되면서 자신의 몸을 추스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금복은 항구에서 생선을 손질하는 일을 해야 했고, 방구석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게 된 걱정은 그렇게 고생하는 금복을 의심하며 매질까지 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칼자국이라는 사내가 등장했다. 그는 그 도시에서 커다란 극장을 가지고 있는 사내였으며, 그 지역의 경제권을 쥐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금복에게 알 수 없는 매력을 느낀 그는 그녀에게 갖은 호의를 베풀지만 금복은 그에게서 풍기는 기분 나쁜 힘을 감지하고는 그를 멀리한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영화라는 것은 그녀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결국 점차 그에게 의지하게 되어갔으며 나중에는 걱정을 보살펴준다는 조건하에 칼자국이라는 사내의 집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비록 지조를 버리는 행위라고는 하나 자신의 남편을 좋은 환경에서 보살필 수 있게 되었고, 또 이런저런 고생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제법 무탈하게 지내게 되었다. 물론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걱정이 사리분별을 하지 못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칼자국의 집에서 지내던 어느 날 걱정은 문득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는 엉망진창이 된 자신의 몸을 발견했고, 이름 모를 남자와 함께 자고 있는 금복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내 곧 모든 것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그러한 현실을 견딜 수 없게 된 그는 태풍이 휘몰아치는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항구에서 바다로 몸을 던졌다. 그런 상황을 칼자국은 몰래 뒤에서 지켜봤다. 그리고 또 그러한 칼자국을 금복을 뒤늦게 목격하게 된다. 금복은 앞뒤 정황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칼자국이 걱정을 바다로 밀어 죽인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작살로 칼자국을 찔러 죽였다. 이후로 그녀는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폐인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 물론 누구의 아이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쌍둥이 자매가 운영하는 주막에 이르게 되었고 그곳에서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바로 춘희다. 어릴 적 서커스단에서 생활하다 늙은이가 되어 주막을 경영하게 된 쌍둥이 자매는 금복을 따사로이 맞아주었다. 자신이 낳은 아이지만 금복은 춘희에게서 모성애를 느낄 수가 없었다. 걱정을 닮은 춘희의 생김새와 행동거지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쌍둥이 자매의 주막에서 신세를 지던 금복은 평대로 와서 낡은 주막을 개조해 다방을 차리게 되었다. 개발붐이 일고 있던 평대였기에 다방은 장사가 아주 잘 됐다. 그렇게 순조롭게 다방을 경영해 나가던 그녀였지만 그 정도로는 성미에 차지 않았다. 지난 날 바다에서 봤던 고래처럼 어떤 웅장하고 거대한 것에 대한 희구가 여전히 그녀의 마음 속 어딘가에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태풍이 심하게 휘몰아치던 그 날에 금복이 다방 2층의 집에서 자고 있을 때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진 지붕 속에는 엄청난 돈이 나왔다. 사실은 금복이 빌려서 개조한 그 주막은 아주 오래전 박색의 노파가 운영하던 주막이었던 것이고, 딸에게 죽음을 당하면서 까지도 굳게 입을 다물어 지킨 돈이 바로 그 주막의 지붕 속에 들어있던 것이다. 그런 내막을 알리 없는 금복은 말 그대로 돈벼락을 맞은 상황에서 이내 곧 정신을 차리고는 그 돈을 투자할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지붕에서 나온 돈 중에는 땅문서도 섞여있었는데 그곳은 평대 근처의 습지에 대한 소유권을 담은 문서였다. 금복은 ‘문’이라는 사내를 고용해서 그곳을 답사했다. 그리고는 그곳에 벽돌공장을 세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고 또 많은 돈이 들어갔다. 원체 습지였던 곳에 공장을 세우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흙과 자갈을 부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금복은 해냈고, 벽돌공장을 세웠으며, 쌍둥이 자매도 불러들여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춘희라는 존재는 그녀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상태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야망만이 존재했던 것이다. ‘문’의 열정으로 최상의 품질을 가진 벽돌이 생산되기 시작했고, 이내 곧 벽돌은 전국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금복은 다시 큰 돈을 벌었다. 그리고 또 다시 금복은 그 돈을 어디에 쓸지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새롭게 투자하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극장을 짓는 일이었다. 처음으로 칼자국의 손에 이끌려 구경하게 된 극장의 마력과 고래로부터 받았던 인상이 합쳐진 그것은 고래의 형상을 가진 극장이었다. 물론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들었다. 자연히 벽돌공장에 대한 일은 그녀의 뇌리에서 점차 희미해져갔다. 벽돌도, 춘희도, 벽돌에 혼을 담던 ‘문’도.

그와 동시에 그녀에게는 특이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점차 남성처럼 변해가기 시작했다. 남자 옷을 입었고, 남자처럼 말하고 행동했으며, 심지어는 계집질까지 했다. 더욱더 신기한 것은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그녀의 변화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도 그녀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오직 평대에 들어서는 거대한 극장, 그 웅장한 고래의 형상에 취해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춘희는 철저히 소외됐다. 천부적으로 동물적인 감각을 타고난 그녀의 유일한 친구는 쌍둥이 자매가 데려온 코끼리 ‘점보’와 ‘문’ 뿐이었다. 의붓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문’은 벽돌공장에서 그녀를 돌봤다. 딱히 그녀를 돌봐줄 사람이 없던 것이다. 때로는 평대에서 코끼리 점보와 함께 놀기도 했다. 인간과 동물 사이였지만 그녀는 점보와의 소통이 가능했다. 하지만 어느 날 교통사고로 인해서 점보는 죽고 말았다. 벽돌을 굽던 ‘문’ 역시 죽고 말았다. 그녀는 결국 철저히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어느 날 평대의 극장에서는 커다란 화재가 발생한다. 그 화재로 금복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평대는 유령도시가 되었고, 춘희는 방화 혐의로 잡혀 들어갔다. 감옥 안에서 그녀는 우람한 체구와 괴력 때문에 죄수 결투에 끌려 나가게 되었다. 그녀를 이용해서 돈을 벌어보려던 간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폭력을 원치 않던 그녀는 결투를 위해 배운 기술을 바로 그 간수에게 사용해버렸다. 결국 그녀는 독방에 수감되고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간수는 철가면을 쓰고 철저히 그녀를 유린했다. 하지만 감옥의 시계도 흐르고 흘러 결국 그녀는 다시 평대로 돌아왔고, 다시 벽돌공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벽돌을 만들었다. 벽돌을 만들면 사라진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릴 적에 알고 지낸 사내를 만나게 된다. 춘희는 그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 가족을 부담스러워한 사내는 춘희를 떠났다. 다시 춘희는 혼자가 되고 벽돌을 만들었다. 홀로 아이를 낳았다. 모성애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법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현실에서 결국 아이는 그녀의 품에서 죽고 말았다. 남자는 그녀에게 돌아오던 길에 그만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다. 그녀는 다시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해서 벽돌을 만드는 일 뿐이었다.

먼 훗날 유명한 건축가에 의하여 평대의 벽돌공장 지대가 발견되었다. 그곳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벽돌이 쌓여있었다. 아주 좋은 품질의 벽돌이었다.


3.해학과 자유분방함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라는 팟캐스트의 첫 번째 소재가 바로 천명관 작가의 『고래』였다.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그 팟캐스트를 들었고 그들이 전하는 극찬에 설렜다. 엄청난 해학과 유머, 그리고 기존의 문학에 빚지지 않은 집필양식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하는 기대에서 유래하는 설렘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러한 평가들을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다양한 인물들을 소개할 때마다 그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독자가 그 인물에 대한 확고한 이미지를 그릴 수 있도록 섬세하고 재미난 표현들을 사용한다. 그리고 각종 사건마다 그가 붙이는 사족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것은 XX의 법칙이었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한없이 가벼워지는 일 없이, 어느 순간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가만히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독자는 전혀 다른 책을 읽고 있는 것처럼 참혹하게 뒤집어진 이야기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게 되는 것이다.


4.파이널 판타지

이 소설의 가장 커다란 재미는 무엇일까? 제일의 주인공을 꼽는다면 누가 될까? 누군가가 나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바로 금복이 주인공이며, 금복이 자수성가해 나아가는 과정이 바로 이 책의 가장 흥미진진한 재미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따금 그 유명한 게임인 ‘파이널 판타지’를 떠올렸다. 실로 이 책과 그 게임은 많이 닮았다. 맨손으로 고향을 떠난 그녀가 항구도시로 와서 생선을 말려 큰돈을 벌고 또 다시 왕창 망해버린 뒤 다시 다방을 차리고, 돈벼락을 맞고, 벽돌공장을 차려 마침내 고래 형상의 극장을 짓게 되는 그 과정은 마치 롤플레잉 게임에서 주인공이 하나하나의 임무를 완성해 나가면서, 그리하여 촘촘한 거미줄을 완성하며 결말을 향해 다가감으로써 우리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이 소설의 뼈대와 같은 존재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것이 천명관이라는 작가가 가지는 여러 장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실로 그는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입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소설의 지면에서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가장 대표적일 것 같고, 그와 함께 우리가 흔히 ‘이야기’라는 것을 떠올릴 때 그 개념을 이루는 주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재미거리’를 만들어져 ‘이야기답게’ 구성해낼 수 있는 ‘이야기꾼의’ 재능을 장점으로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금복의 성공가도는 얼핏 보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설이기에 용인될 수 있는 것이고 또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사실 독자들이 가장 편하게 즐겨 읽을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또 가장 갈구하는 것이기도 한 그런 것인 것이다.



4.고래와 삶(실존에의 의지에 대한 반성)

이 책에 대해서는 많은 평론가들이 다양한 평을 내린 바 있다. 그러한 평들에 대하여 이해하기도 하고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며, 공감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공감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내 나름대로는 이 책이 던지고 있는 혹은 품고 있는 중심적 메시지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추려 갈무리 해보는 것이라 하겠다.

책의 제목은 출판사의 영향력이 작용하기도 하지만 문학의 영역에서는 아무래도 작가의 결정이 지배적이지 않나 생각된다. 왜냐하면 책이라는 것을 작가가 만들어낸 일종의 완성된 하나의 세계로 간주할 때 그것에 붙여진 제목이라는 것 역시도 이미 창작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소설이 가진 제목이라는 것은 여타 장르의 책들이 가지고 있는 제목에 비해 그것의 상징성이라거나 혹은 무게감이라고 할 만한 것의 정도가 유난히 중요하고 무겁게 마련일 것이다. 때문에 자연히 소설을 감상함에 있어서는 그것에 붙여진 제목을 힌트로 주제를 추적해 들어가는 것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것이다.

이 책의 제목으로 사용된 ‘고래’라는 소재는 이 책을 집어든 독자로 하여금 대체 이 책에서 ‘고래’라는 존재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기대를 갖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줄거리에서 언급했지만 이 책에서 고래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주인공인 금복이 생선장수와 함께 고향을 떠나 항구마을로 왔을 때였다. 그곳의 모래사장에서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그 거대한 생물체를 봤다. 그것은 이제까지 그녀가 봤던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생물체였다. 그리고 그 웅장함에 그녀는 매료되었고, 그 웅장함이 그녀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삶이라는 것은 그것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그 웅장함을 잊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매료 혹은 집착은 그녀로 하여금 고래의 형상을 한 극장을 짓도록 만든다. 물론 그 모양을 따라 굉장히 웅장한 규모로 지어지게 된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작가는 이러한 금복의 집착을 통해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유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욕구나 야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인생 또는 삶과 어떻게 연결시키고 그것들을 삶의 내부에서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시키며 어떤 위상을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었다. 금복의 경우에는 삶은 있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웅장함과 연결되고 결부될 때만이 비로소 그 존재의 의미를 찾고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얼핏 보면 어리석은삶의 방식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이겠지만, 매슬로우가 주장처럼 욕구위계의 최상단에 위치하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인간이 태생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상정해 볼 때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그러한 자아의 실현을 전제로 해서만이 모종의 의미를 갖게 된다는 주장이 일견 설득력을 얻는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해 이루어진 평론들 중에서 ‘실존주의’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것들이 심심찮게 보이는 까닭도 바로 위와 같은 맥락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로서의 삶에 만족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그로부터 더 나아가서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고 실존으로서의 삶을 완성시키는 단계를 희구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금복이라는 캐릭터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리라는 생각인 것이다.


한편, 이러한 금복의 삶은 그와 대비되는 유형의 삶이 제시됨으로써 더욱 더 극명한 존재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앞서 내가 서술한 바와는 달리 금복의 삶은 분명히 바람직하지 않은 삶의 방식으로 규정되게 되는 듯하다.

그렇게 정반대로 대비되는 삶이란 다름 아닌 그녀가 낳은 딸자식인 ‘춘희’의 것이었다. 지극히 순수 지선한 춘희라는 존재에게 있어 웅장함을 향한 야망이나 자아실현을 통한 실존과 같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을 테다.

실로 그녀의 삶은 다분히 원시적이었다. 아니 오히려 ‘태초적’이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급속도의 발전을 통해 거침없이 번화해가고, 금복의 야망으로 인하여 탐욕과 야망의 절정을 치닫는 도시 ‘평대’에서 비정상적이고 기형적으로 유일하게 ‘태초’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던 존재가 바로 춘희였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리 무모한 진술은 아닐 것 같다.

작가는 춘희를 통해 금복을 통해서 보여줬던 것과는 상이한 모습의 삶에 대한 태도를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그것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춘희라는 인물을 드러내 보일 때마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제시됐던 것 같다. 이를테면 춘희가 교도소에 있을 때 알게 된 ‘청산가리’라는 여자로부터 들은 “산다는 것은 먼지를 닦아내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먼지가 쌓이는 것이다.”라는 말이라든지, 코끼리 점보에게서 들은 “죽음보다 못한 삶은 없다.”라는 말이라든지 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대사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삶에 대한 태도는 존재 그 자체의 소중함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직시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결국 내가 보기엔 금복과 춘희가 보여주는 이와 같은 인생관의 구도를 통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라는 것은 ‘실존’이라는 것, 혹은 ‘자아의 실현’이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존재가 과잉됨으로써 초래되는 결과가 아니겠는가 하는 반성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존엄성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단순한 피조물 혹은 생명체로서의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향해 도약하는 것을 곧 실존에의 의지라고 간주하는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에 부여된 여러 가지 특수한 요소들의 필연적 결과일 수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사고에 불과한 것이고 나아가 결국 스스로를 인간이라는 테두리 안에 철저하게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음으로써 그것이 애초에 의도한 실존이라는 방향보다는 오히려 거꾸로 그 자아를 존재에서 철저히 가둬버리게 되는 역효과를 초래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의식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고래라는 것에 매료되어 그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초월하는 일이라기보다는 결국 인간이라면 당연히 고래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는 존재인바 그것은 지극히 종 특수적인 일이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편 금복의 딸인 춘희를 삶은 어떤가. 일단 그녀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존재다. 정확히 말하면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누구도 해치려 하지 않는 존재다. 인간은 모두 이러한 존재로 태어난다. 하지만 이내 곧 그러한 성질을 상실한다는 점에서 일생을 통해 그러한 삶의 방식을 고수한 춘희는 매우 이례적인 존재가 된다. 유년시절부터 주입된 우리의 도덕적 관념에 기대자면 이러한 인물에 대해서는 그저 ‘착하다’라는 수식어로 간단히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앞서 언급한 맥락과 결부하여 생각해 보자면 이것은 참으로 ‘비인간적인’ 혹은 ‘인간성을 초월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의 방식이다.

즉, 인간이 부여받은 생리적 조건과 환경적 조건을 고려할 때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의 것을 빼앗고, 타인을 미워하고, 더 커다랗고 아름답고 웅장한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춘희라는 인물이 살아낸 삶이라는 것은 이 작품에서 특유의 대비를 통하여 그 의의가 새롭게 부각될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그녀가 타고난 강인한 육체 덕분이기도 했다. 천부적으로 튼튼한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타인을 경계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튼튼한 육체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지독하게 괴롭힌 것이 있었으니 바로 ‘외로움’이라는 것이었다. 단단한 그녀의 피부도 외로움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평대에서 일어난 대화재로 사랑하던 모든 사람을 잃게 된 그녀가 원했던 것은 그저 그 사람들이 다시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는 일이었다. 이것은 진정한 실존이라는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작가가 암시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존재의 과잉으로 인해 야망에 지배당한 금복의 경우에는 오히려 외로움이 침범할 만한 빈틈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배신하고 그녀를 떠나가는 동안 그녀는 그러한 일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야망의 달성을 코앞에 둔 인간의 시야는 오직 자신의 존재로만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의 과잉으로 인해 인간은 외로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외로움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직 인간적인 채로 있다는, 그리고 진정한 실존에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지도 모른다.


5.맺는말

최근 듣기 시작한 팟캐스트가 하나 있다. <이동진의 빨간책방>이라는 팟캐스트인데 이 프로그램의 첫 소재로 채택된 것이 바로 천명관의 『고래』였다. 널리 알려진 『B1/F1』을 쓴 작가 김중혁과 함께 진행된 독서 대담에서 이 책을 묘사함에 있어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수사는 역시 ‘웅장함’이 아닐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실로 이 소설은 웅장하다. 물에 떨어뜨린 잉크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힘을 가지고 있고 그 속에서 아주 작고 반짝반짝 빛나지만 쉽게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핵심 알맹이로 품고 있는 그런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것은 작가가 우리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었을 테고, 그 책 속에 지어진 세상 속에서 작가가 목격한 모종의 진리였을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고 작가의 시선에 공감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겠으나 그러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다.’라고 말 할 수 있을 만큼 촘촘하게 혹은 성겁게 짜인 거미줄 같은 이 소설을 탐험해 나가매 그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는 생각이다.

굳이 줄이자면 그것은 매우 달콤한 꿈을 꾸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꿈과 작별해 나가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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