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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집에 가는 길

by 통합메일 2018.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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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는 길

 


 

땅은 화가 나 있었다누군가 잘근잘근 씹어놓은 검은 하늘 밑으로 무수한 빛들이 힘겹게 땅의 표정을 비추고 있었다제법 밝은 빛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땅의 혈색은 좋질 않았다변함없이 시커먼 얼굴로유흥가의 가로등 불빛 아래 희번덕이는 눈빛으로 살벌하게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무겁게 내리깐 눈동자아무리 걸어도 그 눈동자를 벗어날 수 없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젖은 아스팔트는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미끄러움으로 인해 더욱 더 위험해 보였다이미 상당히 늦은 시간일 텐데도 불구하고 드문드문 코너에서 만나거나 저 멀리에서 걸어오는 사람의 형상은 지하 무저갱에서 뱉어 올린 가래침과도 같이 느껴졌다나는 그들을 의식하는 것이 너무 티 나지 않게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긴장시킨 채로 그들을 지나쳤다며칠 전에 사서 신은 쪼리가 발가락 사이를 압박하며 파고들어왔다아픈 걸음이 점점 질퍽해지는 땅 위에 까슬까슬한 발자국을 이어 나갔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타는 갈증이 밀려와 입을 조금 벌리고 빗방울을 받아들였다그러고 보니 우산도 잃어버렸구나얼마나 걸었을까그것도 모르겠다이미 취할 대로 취해버려서 많은 것들이 희미했다버릇처럼 소지품을 확인했다휴대폰담배지갑담배는 없지만 휴대폰이랑 지갑은 잘 가지고 있었다.

발은 점점 더 아파왔다생전 처음 신는 쪼리라서 아직 좀 더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본능적으로 후회가 밀려왔다아냐 그래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잖아그나저나 어쩌나 이렇게 된 거지실시간으로 끊어져가는 기억너머로 유독 환하게 빛나고 있는 편의점 간판이 보였다. GS25인가세븐일레븐패밀리마트무엇이든 상관없겠지일단은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무척 반가운 대상이다조금만 힘을 내자망망대해에서 육지를 발견한 표류자처럼 나는 마지막 힘으로 노를 젓듯 걸음을 옮겼다주섬주섬 정신을 가다듬어 내가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됐는지를 생각하면서.

 

*

N이 휴가를 나왔다는 사실은 녀석의 미니홈피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도서관도 장기(長期휴관에 들어가서 마땅히 갈 곳이 없던 나에게는 인터넷의 미니홈피가 세상을 보는 유용한 창문이었다사람들은 그곳에서 자신의 일상을 적었고목적어가 생략된 미련과 그리움을 묻혀놓았고마찬가지로 목적어가 생략된 분노와 욕설을 나름대로 의미심장하게 적어두곤 했다. N은 함께 대학교 학부 생활을 공유한 마지막 후배였다. N이 입학하고 반 년 뒤에 나는 코스모스 졸업을 했고그로부터 또 반 년 뒤에 그는 입대했다.

나는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 사람이고또 혼자서도 참 잘 노는 사람이다.’ 본가(本家)가 있는 도시에서 살 때의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정의 내리며 살았다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어느 정도 맞는 일이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성격이 잘 맞지 않아서 하루에 몇 마디 말도 하지 않는 동생과 몇 달 동안 살아내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대개의 것이 그렇듯 나에게도 한계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일전에 한 번 이 도시에서 만난 적이 있는 N이었기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방명록에 글을 남기기로 했다.

휴가 나온 모양이로구나즐거운 시간이 되기를형 아직 너희 동네에 있으니까 혹 생각이 있으면 저녁이라도 한 끼 하는 것도 좋겠구나.’

집에서 학교를 다니던 도시에서자취생이 아니라 자가생이라는 신분으로 관계를 형성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기분이 글에 묻어나왔다뭔가가 뒤바뀐 기분나의 도시를 떠나 남의 도시에 얹혀살고 있는 이의 기분이었다몇 번인가 문장을 고치고글을 남길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결국 남기기로 했다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었다.

저 멀리 인터넷 공간으로 문장 몇 개를 날려 보내고 나니 문득 방 안의 고요가 짙어졌다일상을 무료하게 만들고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가볍게 몸을 일으켜 작별인사도 없이 철제 현관문을 닫고 뛰쳐나가버린 기분이었다머리 위로 나있는 창문을 뚫고 서향집의 햇살이 늦잠에서 깨어나고더위 먹은 바람이 부들부들 떨며 불어 들어오고 있었다저녁을 향해 달려가는 여름이었다그 무엇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존재감에 나는 잠시 멍하니 허공을 마름질하다가 다시 인터넷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인기 강사의 공무원 시험대비 강의가 1.4배속의 속도로 내 귓바퀴를 타고 흘러 내려갔다그리고 한 개의 강의를 거의 다 들었을 무렵 휴대폰 문자 메시지가 울렸다나는 강의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살짝 미소를 지었다.

 

*

천상 내가 거기 가야겠네요.”

엄마아빠나로 구성된 식탁을 나서면서 나는 넌지시 말을 흘렸다아빠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일 테고엄마는 반신반의한 표정이겠지아니 어쩌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표정일지도 몰랐다세상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들이 살면 살수록 늘어나는 것이다다 먹은 밥그릇을 싱크대에 담그고 부엌을 빠져 나갈 때까지 엄마와 아빠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그나마 엄마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주말에 동생이 왔을 때였다.

나야 뭐 오빠가 와주면 좋지.”

너무 밑지고 들어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는지 동생은 그렇게 반응했다나는 조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사회생활도자취생활도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녀석은 퇴근하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삶의 고통에 대해 어설픈 하소연을 하는 것을 일상의 주요한 구성요소로 포함시키고 있었다한 두 개의 문턱을 넘어오는 엄마와 동생의 전화 통화를 듣고 있으면 삶의 기구함과인정의 답답함 같은 것들이 뱃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공부만 한답시고 세상에 대한 적응력을 제대로 배양해내지 못한 동생이 답답했고마음 주는 사람 하나 없어서 그런 고됨을 제 엄마에게만 풀려 하는 것이 짜증났으며대책 없이 딸의 투정을 받아주는 엄마가 답답하고 짜증났다.

그런 그들을 향해 별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저 나 역시도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군대를 다녀온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대학까지 나와서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보다는 앞만 보고 달려서 한 번에 자신의 직장을 잡은 동생이 부모님에게 더 큰 위안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일상에서 그 불확실함 때문에 엄마와 싸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어느새 나의 삶을 많이 닮아 있었다엄마는 끊임없이 내가 어딘가로 가기를 바랐다내가 집에 있으면 엄마는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고그러다보면 뭔가 할 일이 생겼고그러다보면 엄마는 다시 몹시 불안해했으며그러다보면 결국에는 서로의 감정을 다치게 했다어쩔 도리 없이 나는 독서실이나 도서관으로 갔다파블로프의 실험 같은 나날을 살아가는 동안 나는 아침 일찍 집에 나서서 모두가 돌아오는 시간에 함께 돌아오는 것이 부모님에 대한 도리라는 것을 자극-반응을 통해 어렴풋이어쩌면 너무 뒤늦게 깨달아가고 있었다.

결국 동생과 함께 자취 생활을 하기로 결정이 났던 날엄마는 딸에게 해주는 것처럼 아들에게도 이것저것을 많이 챙겨주려 했다나는 왠지 그런 것도 다 짜증이 나서 다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엄마는 내가 해달라는 것만 해주면 된다고 말했다하지만 몇 번 씩이나 같은 말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결국 또 서로 감정이 상하게 됐다한 술 더 떠서 떠나기 며칠 전부터 엄마는 반복적으로 내게 다짐을 받아냈다.

니가 가면 현아가 좋기는 하겠는데 엄마는 니가 괜히 거기 가서 공부를 제대로 못할까봐 걱정이다.”

엄마는 이 상황의 요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정곡을 찔린 나는 힘겹게 그 다짐에 긍정하며 엄마를 안심시키고자 했다더 이상 갈등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고그 다짐을 부정하는 순간 내가 이 집을 떠나는 정당성이 사라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게 몇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엄마와 다짐을 하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모종의 결의를 다지게 됐다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엄마의 의도와는 부합하는 일이었다.

며칠 뒤 주말에 왔다가 하룻밤을 자고 떠나는 동생과 함께 나는 집을 떠났다동생은 여전히 집을 떠나기 싫어하는 표정이었지만그래도 엄마의 표정은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어쩌다 아들까지 그리로 보내는가 싶어 허탈하게 웃어 보이는 엄마를 뒤로 하고 나는 가볍게 기차에 올랐다무궁화호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집으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나는 이것을 도피라고 해야 할지여행이라고 해야 할지봉사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오랫동안 시커먼 차창을 바라봤다.

 

*

형 오늘 시간 괜찮으시면 함께 저녁이나 하시겠습니까지금 마침 Y도 휴가를 나와 있습니다.’

방명록을 본 N이 보내온 문자의 내용은 그랬다강의가 끝날 때까지 확인하지 않다가 강의가 다 끝난 뒤에야 아껴뒀던 간식을 먹는 기분으로 휴대폰을 들었다내용을 읽어보니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아쉬운 선배의 입장을 부각시키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의 입장에 서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딱히 특출난 재능은 없어도 이런 고운 심성 때문에 절로 마음이 가는 후배였다그나저나 Y라니, Y가 휴가를 나왔구나.

오늘 저녁에 보자고 답장을 보내 놓고는 일단 집안을 둘러봤다외출을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해둬야 할 일이 있었다우선은 점심 먹은 설거지를 해결하고밥을 안치고찌개를 고민하다가 된장찌개를 끓여놓기로 했다생활비를 동생이 부담하는 대신 요리와 빨래 같은 큼직큼직한 가사는 내가 담당하기로 한 자취계약’ 때문이었다정신없이 서둘러 하는데도 한 시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마지막으로 동생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빠 오늘 후배들이랑 술 마신다알아서 저녁 먹으렴

문자를 보내고 나니 역시나 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문자를 받은 동생은 우리 오빠는 이런 타지에도 아는 후배가 다 있구나참 대단하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물론 그렇게 생각해줄 가능성은 전무(全無)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생각만으로도 참 즐거운 일이었다곧 바로 답장이 왔다.

응 알겠어

 

그리고 곧 바로 N에게서 전화가 왔다.

예 형 저희 지금 형네 집 앞에 와있습니다.”

응 벌써 왔어되게 빨리 왔네?”

부리나케 옷을 입고 준비물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어떤 신발을 신을까 하다가 며칠 전에 인터넷 쇼핑으로 구입한 쪼리를 선택했다아직 적응이 덜 돼서 좀 아프긴 하지만 어차피 놀아도 이 근방에서 놀게 될 것이었다원래 살던 도시 보다도 작은 동네였다.

N과 Y는 사제복 차림이었지만 온 몸에 군인이라고 써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멀리서 걸어오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그들은 환하게 웃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그렇게 인사를 받아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고또 학부 시절이 생각나서 자꾸만 연방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애써 참으며 딴 곳으로 시선을 돌리기도 하면서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이야 이게 얼마만이냐!”

잘 지내셨습니까 형님

악수를 하면서 손을 내밀자 와락 잡아 들어오면서 반갑게 맞이하는 Y였다. N은 졸업하고 나서도 종종 만남을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Y의 경우에는 군대도 일찍 갔을 뿐더러 교류도 오랫동안 끊어져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훨씬 오랜만에 만난 Y에게 관심이 집중되었다.

뭐 이렇게 보기에는 그대로구만아니 어쩌면 속은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형은 살이 많이 빠지신 것 같습니다.”

아 그래?”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며 우리 셋은 쑥스럽게 웃었다.

 

*

처음 해보는 자취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집안일이 그럭저럭 꽤 재미있었다일단 동생이 생활비를 대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나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없었다인터넷에서 찾아낸 레시피를 보면서 더듬더듬 말을 배우는 것처럼 하나 둘 요리를 익혀 나가는 것도 큰 재미였다어릴 적부터 성격적인 측면에서 잘 맞지 않는 동생이었지만 그런대로 견딜만했다녀석도 그런 눈치였다무엇보다 엄마와 싸우지 않기 위한 발버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동생은 아침 일찍 출근하고나는 아침이나 점심 쯤 근처에 있는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다가 동생이 퇴근하기 전에 돌아와서 저녁을 만드는 일상이 계속됐다뙤약볕과 오르막길이 힘들 때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잘 계신지 안부를 물었고돌아올 때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열심히 서로를 정리하는 도시를 감상했다.

우리 아들은 정말 어디를 가도 적응을 잘하고 무엇이든 즐길 줄 아는구나.”

언젠가 한 번 집에 갔을 때 엄마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심 무척 기뻤다내가 원하는 모습을 엄마가 봐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근래의 나라는 존재가 무엇보다 목말랐던 것은 다름 아닌 칭찬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요 엄마 저는 현아랑은 달라요.”

동생이 들으면 또 한바탕 논쟁을 벌이고 험한 꼴을 보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에 나는 조심스럽게 둘러대듯 대답했다엄마도 그 눈치를 알고 씨익 웃어 보였다.

 

*

도시에서 가장 그럴싸한 유흥가는 자취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몇 분인가를 걸어서 우리는 어느 고깃집에 들어갔다물수건물병밑반찬 등이 나왔다군인을 만나면 늘 그렇듯 대화는 대개가 군대에 대한 것이었고이따금 학교 이야기가 섞여 나왔다.

근데 형여기 오신지 얼마나 되셨죠?”

“3월에 왔으니까 어디보자 벌써 4개월을 채워가네?”

그러고 보니 벌써 그렇게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그런가요지낼 만 하세요?”

뭐 그냥 그렇지동생 등살만 아니면 그럭저럭 천국일 텐데 말야.”

마주 앉은 녀석들은 씨익 웃으며 끄덕끄덕했다.

그나저나 Y는 따로 연락하는 선배 없니?”

저는 급하게 군대 가서 딱히 없습니다.”

그렇구나.”

나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괜히 물 잔에 자꾸만 손이 갔다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이유 모를 어색함이 흘렀다어서 술이 들어가야 할 것만 같았다.

참 너네 알지걔도 언제 한 번 여기 오기로 했는데.”

L은 내게는 두 학번 차이 나는 후배였고, N과 Y에게는 세 학번 차이 나는 선배였다.

“L형요그 형은 지금 어디 계세요?”

눈을 꿈뻑하며 Y가 물어왔다.

걔는 지금 노량진 가있잖아걔도 집 떠나서 고생이 많어특히나 외로움도 많이 타서아 문자나 한 번 보내봐야겠다.”

역시 어색함을 타개하는 데에는 제3자를 끌어들이는 게 최고인 듯싶었다나는 휴대폰을 꺼내서 지금 N과 Y랑 같이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고 있는데 니 얘기가 나와서 생각나서 연락한다고 L에게 문자를 보냈다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그래재밌겠네나도 함께 하고 싶다아 나도 오늘은 술이나 한 잔 하고 싶구만재밌게 놀아요.’

 

고깃집에 들어갈 때는 그래도 제법 환했는데 나오니 어느새 해가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우리는 2차로 술집에 가기로 했다술집이 밀집한 골목으로 들어가니 유흥가 특유의 활발함이 열기처럼 확 다가왔다.

너네 부대에서 공부는 좀 하니?”

대충 자리를 잡자마자 내가 묻자 조금은 답답한 얼굴이 된 그들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별로 없어서요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래 역시 그렇지나도 그랬던 것 같은데 역시 똑같구나근데 말야 역시 안 믿어지겠지만 나중에 가보면 그때가 그리울 때가 있을 거야지금 너네한테 이렇게 말하면 이 형이 지금 무슨 말 하는 건가 싶을 텐데 아무래도 형 나이가 되보니까 좀 그러네근심으로부터의 자유그게 참 매력적인 거라니깐전공도 좋고 다 좋은데 반드시 영어는 확실히 해놔야 돼영어만 확실히 해놔도 크게 믿는 구석 하나를 가지고 가는 거니까 말이야.”

술이 약한 N은 점점 눈이 감겨 갔고그나마 주량이 비슷한 Y만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군인은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Y와 함께 N을 비어있는 자리에 눕혔다처음에는 괜찮다고 하더니 한 번 눕혀 놓으니 세상모르고 잠이 들었다다른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점점 뻔뻔해지는 걸 보니 어지간히 술이 오른 모양이었다.

이제 일대일로 둘이서 대작을 하게 되자 나는 슬그머니 좀 더 심도있는 얘기를 꺼내고 싶어졌다.

그나저나 너 옛날에 형이 한 말 기억하니?”

어떤 거요너는 속이 시커머니까 그 속을 잘 숨기고 살라고 하셨던 거요?”

그래 바로 그거기억 못 할 줄 알았는데 용케 기억하고 있네역시 너는 센스가 제법이야.”

그거야 뭐 저한테 그런 말씀 해주신 건 형 밖에 없으니까요.”

묘한 칭찬에 Y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거 잘 지키고 있니군대에서도 그런 건 참 중요한데 말야.”

네 잘 감추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형이 그래도 보는 눈은 있거든양아치가 양아치를 알아보는 것처럼 동족을 알아보는 눈은 동족에게 있는 법이지그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할 게야.”

그렇게 말하고 나는 시선을 돌려 옆 자리에서 잠든 N을 바라봤다술에 지쳐 자고 있는 모습에서 내일 그가 겪을 고통을 읽을 수 있었다내일이 복귀라고 했는데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Y에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했다그리고 화장실에 가는 길에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응 엄마 저 여기에서 후배들을 만나서 잠깐 소주 한 잔 하고 있어요.”

어차피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잔소리 들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전화를 받았다.

그래너는 거기에도 아는 사람이 있고 참 대단하다.”

걱정했던 바와는 달리 의외로 온화한 반응에 나는 적잖이 안도했다아무래도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식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이 앞선 걸까그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괜히 없었을 죄책감이 들었다.

이번 주에 현아 집에 온다는데 너는 올 거니 어떡할 거니.”

저는 안 가려고요왔다 갔다 하는 것도 다 돈이고 시간이고 공부해야죠.”

그래우리 아들 열심히 하는 모양이구나근데 공부해야 한다는 사람이 그렇게 술 마시고 있으면 어떡해.”

아 엄마 저 최근에 술 하나도 안 마셨잖아요여기 아는 사람도 없어서 어쩌다 한 번 이렇게 오랜만에 마시는 건데요 뭐.”

그래 알았다조심하고많이 마시지 말고 얼른 들어가.”

통화의 내용이 나쁘지 않아서 기분이 괜찮았다화장실에 다녀와 보니 Y가 N을 일으켜 깨우고 있었다왜 깨우나 했더니 N을 택시 태워 보내고 자기가 술을 한 잔 사겠단다한 잔 얻어먹을 만도 한 것 같아서 나는 그러자고 했다.

 

*

내가 집을 떠남으로써 눈에 띄지 않게 되고동생의 죽는 소리가 줄어듦에 따라 엄마도 한시름 걱정을 놓은 듯했다하지만 그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내가 집안일을 해줌에 따라서 자취방에서의 생활은 나아졌지만 직장에서의 문제까지 해결해줄 수는 없었다동생은 싹싹함이나 사교성과는 거리가 멀었고 엄마는 딸과의 전화 통화에서 매일매일 그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나도 문제였다눈에 보이면 보이는 대로보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대로 불안한 것이 엄마의 마음인 모양이었다엄마는 내가 자취 생활을 즐긴다는 점에는 안도했지만 그 즐김’ 때문에 공부를 도외시 할 것을 우려했다결과적으로 엄마가 부담해야 할 걱정의 총량은 그리 줄어든 것 같지 않았다.

내가 가장 싫었던 것은 몇 주에 한 번 꼴로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건네 오는 걱정 섞인 잔소리였다오랜만에 돌아와서잠깐이지만 엄마와 붙어있다 떠나는 것은 나에게도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일단은 내가 없을 때 집에 무슨 일이 생길까봐 그런 것이 걱정이었다엄마는 꼭 다시 집을 떠나기 몇 시간 전부터 내게 다짐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아들자취 생활을 즐기는 것 같아서 좋긴 한데 너무 즐기기만 하면 안 돼집안일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공부를 해 공부를지금 제일 중요한 게 공부니깐.”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엄마의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어쩔 수 없이 화를 내버리고 말았다.

엄마 진짜 오랜만에 왔다가 가는 아들한테 해줄 말이 그것 밖에 없어가는 마당에 내가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겠냐고.”

하지만 집을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했던 다짐처럼엄마의 걱정 어린 잔소리도 좀처럼 끊이질 않았다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야속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그런 날은 저 멀리서 불을 밝히며 들어오는 기차가 유난히 밉게 느껴졌다.

 

*

Y는 N을 제법 능숙한 솜씨로 택시에 태웠는데완전히 술에 떡이 되어버려서 태운다보다는 싣는다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 광경이었다.

야 저렇게 취해서 집에 잘 가겠냐?” 걱정이 돼서 그렇게 묻자 괜찮습니다워낙 동네가 좁아서 다 알아서 가요.” 라고 대답했다아무래도 이곳이 집인 아이들이니 괜찮겠지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Y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향했다그곳은 원래 우리가 있던 술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또 다른 술집이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2차로 갔던 술집은 다양한 연령층이 앉아 있던 반면에 이곳은 연령대가 다소 낮은 것 같았다자리를 잡고 앉은 후에 짚히는 바가 있어서 나는 물었다.

여기는 무슨 아지트 같네?”

Y는 역시 알아보신다는 표정으로 웃음으로 흘리며 긍정의 표시를 했다타지에 와서 토박이들의 아지트에 온 것이 좀 께름칙하기는 했지만 괜찮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주위에서 Y를 보고 알은체를 해오고 낯선 얼굴을 하고 있는 나를 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오히려 그것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무래도 술기운 탓인 것 같았다.

주문을 하고 안주와 술이 나오고 우리는 시시콜콜한 화제로 대화를 이어갔다그러다 얼마 가지 않아서 누군가 Y에게 말을 걸어왔다노랗게 염색한 머리를 하고 있는 남자였다. Y가 형이라고 인사를 하는 걸로 봐서 Y보다는 나이가 많은 것 같았고겉보기로 나보단 나이가 어린 것 같았다.

오랜만에 왔는데 잠깐 형들한테 인사나 하고 와.”

그 남자는 일행을 빼앗아 가는 게 미안했는지 내 눈치를 슬쩍 보고는 Y에게 그렇게 말했다. Y도 내 눈치를 보기에 나는 흔쾌히 다녀오라고 했다그는 그럼 얼른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꾸벅하고는 어느 방향인가로 사라졌다.

홀로 남아 무료해진 나는 이제 나를 신경 쓰는 사람도 없어진 것 같아서 아까 문자를 보냈던 L에게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엉뚱한 사람에게 취중전화를 할 것 같았다. L는 한 번에 전화를 받았다.

응 뭐하냐?”

이제 자려고형 아직도 술 마셔?”

응 아직 마시고 있지. Y가 지금 여기서 아는 사람을 만나서 인사를 하러 가서 혼자 있게 돼서 전화했다.”

그렇구나말하는 거 들으니까 많이 취한 거 같네.”

응 꽤 마셨지근데 너 여기 한 번 온다며언제 올 거야

글쎄뭐 두고 봐야지당장은 아니고.”

그래 알았다어여 자라.”

통화는 길지 않았다딱히 할 말도 없기도 했고자려고 한다는 사람을 오래 붙잡고 있는 것도 실례였고무엇보다 외로운 사람처럼 보이는 게 싫었다. Y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어쩐지 나는 점점 졸음이 몰려오는 것 같았고또 한편으로는 조금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그런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당황해야만 했다어느새 외로움에 이렇게 약해져 버렸나 하는 생각이그리고 나를 구성하고 있던 핵심적인 것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N에게 전화를 해보기로 했다몇 번인가의 신호가 가고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중후한 목소리나는 단박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N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 아버님 N을 택시 태워 보냈는데 잘 갔나 해서 전화 한 번 해봤습니다.”

지금 잘 들어와서 자고 있어요.”

아 예 알겠습니다죄송합니다.”

이번 통화 역시도 간략했다.

 

Y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몇 분이 더 흘러서였다근데 혼자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데리고 왔다그는 붙임성 좋게 자신을 Y를 무척 아끼는 형이라고 소개했다말은 시원시원하게 하는데 그 역시도 말을 섞다보니 점점 발음이 어눌해지는 것이 어지간히 마신 것 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대화는 나름의 형태를 갖춰가게 되었는데 이미 전부터 오랫동안 알고 지낸 두 사람이 대화를 주도하고 나는 웃음이나 동의로 반응을 하는 식이었다그리고 그 두 사람의 대화는 그가 Y를 몰아세우는 형국을 갖추고 있었다나는 나의 후배를 몰아세우는 그의 태도가 은근히 기분이 나빴다.

야 너 형들이랑 놀던 때 기억 안 나대학물 먹더니 완전히 바뀌었잖아 이거야 세상 어렵게 살지 말고 여자들이랑 놀면서 대충 졸업해서 대충 돈이나 많이 벌면 되는 겨 임마대학 나와서 괜히 좋은 직업 찾는다고 낑낑대면 뭐 하냐?”

아 그거 양아치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나 자신도 방금 그 말을 내가 한 것인지에 대해서 확신이 서질 않았다그래서 방금 그 말을 제가 한 건가요?”라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하지만 분위기라는 게 아무래도 그렇게 흘러가질 않았다.

뭐 양아치?”

그래 양아치라고 학문의 내재적 가치를 모르고 그렇게 막말하는 게 양아치 아녀야 너 아까 형이 말했지양아치는 양아치를 알아본다고제가 양아치거든요근데 내가 보기엔 아저씨는 양아치 맞는 거 같은데?”

오래전 책에서 본 단어를 끼워 넣은 문장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동안 그 남자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가게를 나왔을 때는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가게 앞의 한편에서는 한 무리의 사내들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면서 내가 있는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쑥덕대는 무리들의 사이로 이따금 욕설이 비집고 튀어나왔다그리고 Y는 열심히 그 무리에 섞여 열심히 뭐라고 설명을아니 해명을 하고 있었다비는 계속해서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내가 집을 나설 때 우산을 챙겼던가 안 챙겼던가괜한 말을 해서 일을 크게 만들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가만히 비를 맞고 있자니 시원하고 정신이 맑아지는 것이 왠지 만사가 다 귀찮게 느껴졌다한참 진땀을 흘리던 Y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형 죄송하지만 사과 한 번 하시죠.”

?”

나는 갑자기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그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내가 알고 있던 Y인가 싶을 정도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목소리는 분명히 그의 목소리였지만 언제나 내 말에 고분고분하고 수줍은 표정을 짓던 얼굴이 아니었다. ‘이놈 이거 마음이 저쪽에 가 있구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나는 가죽을 밀렵당한 표범처럼 가게 앞에 주차되어 있는 차의 본네트에 살짝 걸터앉았다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점점 취기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야 씨발 내가 왜 사과를 하냐양아치를 양아치라고 한 게 잘못인가?”

완고한 내 앞에서 Y는 초조한 듯 입술에 침을 바르며 사내들이 있는 쪽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그리고 다시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을 때 그의 얼굴에는 측은하고 답답해하는 표정이 올려져 있었다그 표정이 나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

형 그럼 도망이라도 가세요.”

나는 그럴 생각 없다는 표현으로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며 여유를 부렸다그러자 Y는 내 귓가에 입을 대고는 속삭였다.

형 진짜요이건 정말 장난이 아니에요.”

진짜와 정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간에 그 말에는 정말로 진심이 묻어 있었고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나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척 하다가 마지못해 하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걸었다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천천히태연하게터벅터벅명치 아래로 본능적인 떨림이 시작되었다한 번 더 나는 뒤돌아보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얼마를 더 걸었을까나는 처음으로 뒤를 돌아봤다그곳에는 자동차와 허공으로 채워진 텅 빈 거리가 있을 뿐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하지만 나는 왠지 누군가가 따라올 것만 같았다알 수 없는 이 도시에서 나에게 허락된 공간은 비좁은 자취방뿐이었다결코 방심할 수는 없었다나는 계속 비틀비틀 거리며 걸어갔다방향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동생의 집이 노출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또 다시 얼마간 걷다가 길을 걸어가는 여자에게 자취방의 방향을 물어봤다좀 멀다고 했다마지못해 방향은 알려주지만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이 여자에게 나는 위험한 존재로 느껴지는 것인가이 도시가 나를 거부하는 것처럼.

발가락이 아팠지만 정신없이 걸었다걷다보니 처음 보는 아파트 단지가 나왔다나는 뚜벅뚜벅 계속 걸어 들어가서 아파트 담벼락에 붙어 있는 화단에 몸을 숨겼다일단은 미행을 따돌려야 했고좀 쉬었다 갈 필요가 있었다다리에 힘이 풀려 흙바닥에 주저앉았다아파트 경비가 손전등을 들고 주차된 차량을 체크하고 다녔다그가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손전등의 불빛이 내가 숨어 있는 화단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그럴 때마다 나는 더욱 더 숨을 죽였다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만 했다.

 

*

편의점 간판이 가까워졌다나는 망설임 없이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서 담배를 샀다얼마 동안 걸었는지를 알 수 없지만 그 새 내 발음은 형편없이 꼬여있었다가지고 있는 현금은 없었다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결제했다편의점을 나와서 담배를 피우려던 나는 그러고 보니 라이터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어쩔 수 없이 다시 들어가서 조금 전보다 더 꼬인 발음으로 라이터를 샀다건장한 체격의 편의점 알바생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내가 내미는 체크카드를 받았다그 앞에서 나는 더욱 더 비굴하게 웃어보였다죄송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도 지어줬다.

나는 편의점 바로 앞의 대리석 보도블록에 걸터앉아 환한 조명을 등에 지고 어렵게 산 담배를 피웠다첫 모금을 빨았을 때 젖은 바닥에 앉아서 엉덩이가 무척 축축하다는 생각을 했고세 번째 모금을 내뱉었을 때 나를 향하는 시선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편의점 앞에는 알바생과 그의 친구로 보이는 사람이 나를 곁눈질로 훔쳐보며 담배를 피우며 서성이고 있었다문득 이 도시의 모든 인간들이 모두 다 한 통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렇다면 아까 아파트 경비에게 들키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의 일일 것이었다.

전화기를 꺼내 L에게 전화를 걸었다. N은 술에 취해 잠들었을 테고 Y는 믿을 수 없었다야심한 시각이어서 그런지 L은 몇 번의 시도 끝에 전화를 받았다자다 깬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조차 너무나 반가웠다그리고 그 반가움만큼 걱정도 컸다.

야 형이다. Y가 날 배신했어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이제는 니가 이 도시에 오는 게 걱정이다형 마음 알겠냐잘못하면 너도 다칠 수 있어조심해야 돼너 거기는 괜찮니아직 이 새끼들이 서울까지는 손을 뻗치지 못했을 거야아무튼 진짜 몸 조심해라형 말 알아듣겠냐지금 여기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한 통속이야아파트 경비며공무원들도 다 말이야.”

아주 오랜만에 말이라는 것을 한 기분이었고그래서 문득 지금 나와 대화를 하고 있는 존재가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겨졌다감정이 복받쳐 올라서 왈칵 울음이 터졌다어릴 적에 엄마를 잃어버렸을 때처럼 나는 아주 서럽게무엇인가를 토하듯 울었다정신없이 쏟아낸 울음 다음으로 L의 어쩔 줄 몰라 하는영문을 몰라 하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형 왜 그래 울지 마말 좀 똑바로 해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무튼 지금 형이 한 말 똑똑히 새겨들어정말 너도 위험할 수 있다고알겠지정신 똑바로 차려야 된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전화를 뚝 끊었다왠지 길게 통화를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휴대폰을 쥔 팔과 쥐지 않은 팔로 번갈아가며 눈물을 닦았다여전히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고덕분에 온 몸이 축축하게 젖어있었지만 어쩐지 무척이나 개운한 기분이 되었고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신이 맑아졌다눈물이 아니라 술을 흘린 것일지도 모르고술이 아니라 눈물을 마셨던 걸지도 모르겠다힘겹게 몸을 일으킨 나는 의연한 표정을 지으며 절룩절룩 걸어갔다어쨌든 돌아가야만 했다.

 

*

자취방이 있는 골목은 낮에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어림잡아 두 세 시간은 헤매서 돌아온 것 같았다나는 무덤 속에 다녀온 사람처럼 길 한 가운데 잠시 우두커니 서있었다몇 번씩이나 확인을 했지만 역시 불안했다분명 미행이 붙은 것 같았다동생의 집이 노출되면 큰일이다다행히 Y는 그 위치를 모른다엄청나게 돌아왔는데 이렇게 해도 미행을 떨어뜨리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발각되어서는 안 된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깊은 밤이라서 조심해야 했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럴 여유는 없었다어둠 속에서 깨어난 동생이 대뜸 역정을 냈다.

조용히 좀 해지금이 몇 신데 아직까지 연락도 안 하다가 이제 들어와?”

나는 변명을아니 설명을 하려고 했다.

야 나 진짜 엄청 힘들었어집에 오느라 죽는 줄 알았다넌 진짜 이 기분 모를 겨내가 이 집을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아 병신 닥치라고아 지긋지긋해 정말.”

아니 좀 들어보라니깐.”

듣긴 뭘 들어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지껄이고 있어아 짜증나니까 얼른 자빠져 자진짜 지겨워 죽겠어.”

예상치 못한 동생의 반응에 나는 얼어붙어버렸다성격이 안 맞긴 했지만 워낙 참한 척을 열심히 하는 터라 이 정도는 아니었다오히려 거침없이 욕을 하는 것은 보통 나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나는 참 많은 것들이 바뀌어버렸다는 생각을 했다무엇이 잘못된 걸까어디에서부터.

잠시 어둠 속에서 눈을 내리 깔고 우뚝 서 있던 나는 체념한 기분이 되어 천천히 욕실로 들어갔다자취방에서 유일하게 격리가 가능한 공간이었다엉덩이에 느껴지는 축축한 감촉이 아까 젖은 흙바닥에 앉았던 걸 떠올리게 해줬다옷을 벗고 대충 바지를 빨았다빤다고 하지만 취기가 여전해서 그저 물에 한 번 헹구는 것에 불과했다힘겹게 바지를 짜서 널고세수를 하고샤워기를 틀어 발을 씻었다쪼리 때문에 허물이 벗겨진 곳에서 진득진득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리곤 욕실에서 나와 최대한 신속한 동작으로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평소엔 눅눅하다고만 생각되던 이불이 상대적으로 참 보송보송하게 느껴졌다똑바로 누워 있자니 점점 천장이 밝아졌다계속 뚫어지게 바라보면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해지고 그 곳에 모든 것의 해답이 적혀 있을 것만 같았다그러다 문득 나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씨발년.”

!”

나는 깜짝 놀랐다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그렇지만 동생이 자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동생은 누운 자리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켜 욕을 하기 시작했다.

안 자냐자는 줄 알았네.”

이 병신이 어디서 욕질이야뭘 잘했다고!”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것을 느꼈지만 내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는 동생과 그 말에 동조하는 자취방의 안락함에 가로막혔다어쩌면 나는 정말 헛것을 본 것일까정말 알 수가 없었다그렇다면 대체 나는 왜 그렇게 먼 길을 돌아 왔단 말인가몇 번인가의 욕설이 더 날아오고대꾸를 하지 않고 있으니 다시 방은 천천히 조용해져 갔다.

나는 동생이 완전히 진정한 뒤에도 꾹 참고 있다가 이불에 누운 채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술기운 때문에 액정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새벽 4시였다찡그린 얼굴로 한 쪽 눈만 뜬 채로 화면을 눌러 나갔다엄마에게 문자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문자 메뉴로 들어가는 것도 힘들었지만 마지막 힘을 다해서 정신을 집중했다그리고 더듬더듬 오랜 시간을 들여서 하나의 문장을 완성해 나갔다.

 

엄마 나 집에 가고 싶어요.’

 

작성하는 시간에 비해서 문자는 순식간에 전송됐다액정화면이 전송 완료로 바뀐 뒤에도 나는 부동자세로 계속 그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답장은 오지 않았다어쩌면 내가 보낸 문자도 아주 먼 길을 돌아가느라 아직 엄마에게 닿지 못한 건지도 몰랐다일정 거리를 유지해야만 아름다움을 지켜낼 수 있는 존재의 필연성이 쫓아오지 못하도록생의 기구함을 조금이라도 따돌릴 수 있도록.

너무 많이 걸어서 그런지 누워있는데도 다리가 아팠다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이 팔꿈치를 타고 손을 따라 먼 길을 돌아서 휴대폰에 전해지고 있었다그 박동은 전파를 타고 멀리 있는 나의 집으로 열심히 걸어가고 있을 것이었다팽팽한 어둠 속에서 나는 그렇게 자꾸만 스며오는 눈물을 휴대폰 액정의 불빛을 빌려 오래도록 증발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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