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와 거지
사람들이 지나간다. 담배연기 건너 건물 입구를 통해 뿜어져 나오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동자에 성에라도 끼는 것처럼 시야가 뿌옇게 될 때가 있다. 잘 봤어? 못 봤어. 어땠어? 어려웠어. 공부한 거 많이 나왔어? 안 나왔어. 남자도 여자도. 선배도 후배도. 그래 정말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재잘재잘 조잘조잘 말이 많다. 시험이라는 것이 끝난 직후 바로 그 시간에는 모두들 이렇게 그 동안 인내심이란 놈으로 묶어 두었던 그 무엇인가를 해방하는 심정으로, 아니 혹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 그렇게 그들 안의 그 무엇인가를 분출해낸다. 건물 출입구의 구석진 곳에서 그들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다 보니 나는 그렇게 그들처럼 누군가에게 시험에 대한 에피소드나 어려웠던 점을 토로할 수가 없었는데 나는 어쩌면 오히려 그게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저 아주 적당히 아주 건전한 정도의 거리를 두고 그들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고대 그리스 시대의 어느 철학자께서 바로 ‘사회적 동물’이라고 가리키신 ‘인간’이라는 존재이기 때문에 완전히 격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나가는 이들 중 나를 알아보는 선배나 후배가 있으면 서로 인사를 주고받을 정도는 된다. 나는 그렇게 붙임성 없는 사람은 아니다. 적절한 웃음과 겸양. 그 정도의 조미료는 주머니에 항상 넣어 다니는 준비성도 꽤나 철저하다.
그리고 담배를 피운다. 뻐끔 뻐금. 일단 불을 붙였으면 연기를 빨고 뱉고, 이 따끔 침을 뱉어주고, 재를 털어주는 그 과정을 반복한다. 문득 공사장에 세워져 있는 허수아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전국방방 곡곡의 공사현장에 동시 취업된 바로 그 실감나는 허수아비. “어우 난 진짜 사람인줄 알았네”라는 말을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끄집어내는, 언제나 항상 한쪽 팔에 번쩍번쩍하는 ‘불봉’을 들고 쉼 없이 1초에 한번 꼴로 팔을 휘젓는, 그리고 사실 살금살금 뒤로 돌아가서 보면 뒤꿈치 부근에 차량용 납축전지를 달고 있는 그 처량한 녀석 말이다.
하지만 사실 그 녀석은 그렇게 처량하다거나 불쌍하다거나 하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녀석은 아니다. 오히려 그 녀석은 모든 이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 주었으면 한다. 세상 사람들은 너무 하나만 생각하는 측면이 있다. 그 허수아비 녀석이 오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그 불봉을 흔들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보통 홀로 서서 무심히 흔들어 주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도 모를 녀석이 하루 아침에 굴러들어온 돌이 되어 그 달콤한 보직을 독차지 해버렸다.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그 설레임. 짬밥 싸움에서 밀려 자기 차례가 날아갔음을 깨달았을 때의 그 안타까움을 홀로 우적우적 삼켜버린 아주 간사한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빌어먹을. 많은 사람들이 이따금씩 욕을 하고 눈을 흘기지만 녀석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 있어서도 나는 녀석이 내심 부러웠다.
“그게 그래서 그렇게 됐다.”
소장님이 그렇게 말을 마무리 지었을 때 나는 일단 그 말을 어디에선가 들었던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도무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대체 어디에서 들었던 것일까? 주섬주섬 꺼내는 그의 말에 집중하며 그의 눈동자를 적절하게 응시하는 와중에 머릿속은 온통 그 대사의 출처를 추적하고 있었다. 이른바 머릿속은 전시 체제였던 것이다. 전국의 패트롤카가 모두 출동하고 계엄령이 내려지기 직전에 범인은 결국 체포되었다. 그리고 순순히 자백을 했다. ‘짐 캐리’가 주연한 ‘브루스 올 마이티’에서 짐 캐리가 방송 앵커를 하며 멘트를 마무리할 때 즐겨 쓰던 대사였다는 것을. 체포된 범인의 복면을 벗기니 짐 캐리의 얼굴이 크게 움직이면서 말했다. 그래서 그랬던 겁니다.
“금방 또 연락할게”
입맛을 한번 다시며 소장님은 제법 능숙하게 일을 마무리 지었다. 아마 그의 입장에서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흔히 말하는 바로 그 유명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모두가 비슷비슷 고만고만한 사정에 나는 딸린 처자식도 없고 아직 젊었기 때문이다.
‘금방이 언젠데요?’
되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랬다가는 이번 삶에서 그 금방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예의바르게 공손하게 순종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성실하게 응대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꾸벅 절을 하는 나를 보며 소장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 만족한 것인지 나에 대해 만족한 것인지를 모르겠지만 아무튼 만족시켜준 것이니 좋은 일을 한 것 같았다.
“저 허수아비가 사람까지 내쫓는 거 같네”
자식이 둘 다 고등학생이라던 허 기사님은 나의 상황 설명에 유난히도 섭섭한 내색이 짙었다. 언제나 퉁명스러운 대답에 참 무뚝뚝한 아저씨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꽤나 정이 들었던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 다음 다음 언젠가는 자신의 차례가 오지 않을까 해서 그러시는 걸 수도 있었겠다. 그래도 그렇게 아쉬워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림이 괜찮았다. 그나저나 정말 허수아비가 사람을 내쫓은 것일까. 말마따나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찾아온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허수아비를 한번 흘겨보고는 돌아섰다. 역시나 변화가 없는, 뻔뻔한 표정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부럽게 만드는 녀석이었다.
오랜만에 P를 만난 것은 그렇게 허수아비에게 밀려났던,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형이 사고를 내서 모아놓은 돈이 모두 그쪽으로 들어갔던 겨울 방학이었다. 눈을 떴을 때 차가운 공기가 고대 백악기 쯤 되는 시절의 바다처럼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나는 그 바다의 가장 밑바닥에서 경악스러울 정도의 생존력을 가지고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심해생물 같았다. 무슨 꿈을 꾸긴 꿨는데 생각은 나지 않는 그런 상태. 하지만 무슨 깨달음이 깊게 각인되어 문득 세상은 참 모든 게 다 순식간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듯 하여 입을 쩍 벌리고 뚫어질듯 천정을 응시하고 있었다.(이 입은 깨어날 때부터 이미 벌려져있기는 했다.) 그래 실로 순식간이다. 잘 나가던 집이 망하는 것도,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도, 내성적이던 나의 성격이 살아남기 위해 변하는 것도, 간만에 구한 괜찮은 알바가 잘리는 것도, 형이 아버지의 트럭으로 사고를 내는 것도, 그 동안 모아놓은 돈이 비디오의 앞으로 감기 버튼을 누른 듯, 혹은 개수구로 물이 빨려 들어가듯 쪼르르륵 소리를 내며 바닥을 보이는 것도 모든 게 다 참 별게 다 순식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것 중에 제행무상이라는 게 있다고 하던데 이게 바로 그것인가 싶어 혹시 해탈한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한편으론 또 어두운 집착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던. 그 날의 아침은 그러했다.
그렇게 한참을 심해 바닥에 누워 있다가 빙하기가 오기 전에 일어나야겠다 싶어서 일단 수면 위로 올라왔다. 깨달음 따위는 이미 저 멀리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후였다. 녹이 슬어 쇳가루 묻은 비명을 내지르는 문을 열고 만난 세상에는 이미 빙하기가 어느 정도 도래해 있었다. 오늘도 알바 자리를 구해야하는가 하고 생각을 하며 대학가 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대학가의 시급은 너무 싸고 생활정보지에는 변변찮은 자리가 없어서 인터넷 아르바이트 알선 사이트에 들어가 보려고 갔던 게임방에서였다. 금연석에는 자리가 없어서 재떨이 가득 담배꽁초를 쌓아 올리는 놀이를 즐기는 사람의 옆자리에 앉았다. 제대로 피우지도 않으면서 불만 붙여 손가락 사이에 끼워놓고 게임에만 열중하던 사람이었는데 덕분에 생연기가 내 자리로 그대로 날아와 독일 어디엔가 있다는 그 유명한 수용소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물가가 저렴한 대학가의 PC방이었기 때문에 시간당 500원이라는 상당히 싼 가격에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는 조건이었지만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돈이라곤 마침 종이 조각보다도 얇게 느껴지는 500원짜리 한 개뿐이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서둘렀다. 형이 저지른 사고 뒷수습을 하려면 최대한 돈이 많이 필요했고, 인터넷에 구인광고를 올린 사람들은 최대한 돈을 적게 주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시급을 ‘상담 후 결정’이라는 문구로 표현했다. 법정 최소시급 이하로 적을 수는 없으니까 상담 후에 최소시급 이하의 시급을 정하겠다고 힘차게 외치는 연사들의 향연인 것이다. 최근에 올라온 광고들을 훑고 작업창을 최소화 시켜 바탕화면에 나오는 컴퓨터 사용시간을 보니 벌써 1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초과되는 거야 어떻게 넉살로 때울 수 있을 것도 같지만 부러 그렇게 흉한 꼴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눈 여겨 봐둔 전화번호들을 대강 메모해서 프로그램들을 종료시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문득 비어있는 옆의 자리가 보였다. 화장실에라도 간 것일까. 수 없이 많은 아바타들이 뭘 사겠다고 팔겠다고 연신 떠들어대고 있는 게임창이 모니터를 채우고 있었고 모니터와 키보드 사이에는 담배 한 갑이 놓여있었다. 순간 팔을 뻗어 그 담배갑을 챙기고 싶다는 충동이 초라한 오른팔의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을 타고 흘렀다. 내가 피우는 담배는 아니었고, 파란색 케이스의 일제 담배였다. 담배를 마지막으로 피운게 언제더라. 어제였나. 이참에 끊어야 돈을 아낄 수 있는데 흡연욕구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얌마”
깜짝 놀라 몸이 움찔. 좋은 기분은 아니다. 역시 도둑의 발은 저리게 마련이다. 제기랄 담배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게 티가 났던 걸까. 남의 게임화면을 왜 보고 있냐고 따져오려나. 소리를 지른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찰나에 그렇게 수많은 생각들이 어디선가 태어나서 비누방울처럼 맥없이 터져버렸다. 나를 얌마라고 부른 사람은 역시나 내 옆자리에서 담배꽁초 쌓기 놀이를 하고 있던 남자였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P였다. 어 너였냐?
“그려, 여기서 뭐 하는 겨? 어쩐지 아까 보니깐 너 같더라.”
길게 찢어진 눈에 통통한 볼 살과 두드러져 보이게 덧난 송곳니는 지옥에서 온 악마의 표정을 순식간에 천진난만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양 뺨의 홍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붉은 악마와 순진한 시골 소년의 간격.
“알바 자리 좀 구해볼라고 왔지. 여기서 게임하던 게 너였냐? 아오 난 어떤 새끼가 담배를 이 지랄로 피워대나 했네. 명 줄어 임마.”
“에이 몰러 한번 사는 세상 그냥 놀다 가는 거지 뭐”
“그냥 죽으면 다행인데 남 고생 시키는 게 문제지. 이게 와우냐?”
모니터 화면을 가리키면서 내가 물었다.
“어 와우. 아 노가다 힘들어 죽겠네. 이제 슬슬 갈라고 더 앉아 있으면 죽을 것 같아서”
좀 전의 담배 얘기 때와는 달리 이번에 언급된 죽음에는 제법 진지함이 묻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눈 밑이 좀 거뭇거뭇해 보이는 듯도 했다. 같은 과 동기인 이 녀석은 뭐 그냥 그럭저럭 친한 정도랄까. 나란히 서 있는 나무, 여름에 잎이 무성해지며 이따금 스치다가 또 겨울이 되어 앙상해지면 닿지 않게 되는 그런 나무 두 그루 정도의 관계였다. 그나저나 이 게임 중독성이 참 강하다던데 몸이 저렇게 될 정도로 게임만 주구장창이라니 내심 참 철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 그나저나 시간 초과한 건 아니겠지? 계속해서 실없이 주저리주저리 썰을 풀려는 녀석과 대충 마무리를 짓고 서둘러 1층 카운터로 내려왔다. 사용자 카드를 서둘러 건냈지만 알바는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느릿느릿 바코드를 찍었다. 어이 비슷한 연배 같은 데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서로서로 좀 도웁시다. 삐빅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컴퓨터가 바코드를 인식했다. 돈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과연 시간을 넘겼을까. 제발.
“600원입니다.”
시큰둥하게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며 알바가 말했다. 왜일까. 갑자기 배가 고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채워져 있던 속의 내용물들이 어디론가 순간이동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배가 고파온 사람의 처지를 눈치 채지 못하는 알바가 야속했다. 알겠으니 밥 좀 먹고 와서 계산하겠다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이고 500원 밖에 없는데”
이제는 꽤나 능숙한 동작으로 호주머니를 뒤지다가 이 세상 누구도 심지어 나 자신조차 주머니에 500원 밖에 없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했다. 궁극의 기술이었다. 인간이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위기를 만회할 수 있는 기술의 정점. 하지만 알바도 만만치는 않았다. 이른바 쳐다보지 않기 기술을 시전 했다. 그러다 쩝 소리를 내며 입맛을 한번 다셔주는 센스까지 잊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 정도에서 ‘뭐 어쩔 수 없죠.라던가 ‘다음에 갖다 주세요’ 같은 말을 꺼내기 마련인데 이 양반은 만만치가 않다. 아 정말 배가 고프다. 잠시 그 앞에서 아무 말도 아무 짓도 못하다가 결국 나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100원만 달라고 해야겠군.
“어? 안 갔어?”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 앉아서 게임하고 있는 사람보다는 계단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친 사람이 돈 꾸기가 수월한 것이다.
“어. 하하 지갑을 깜빡하고 나와서 100원이 모자라서 너한테 100원만 꿀라고…….”
“아 그려? 내려가 나도 이제 갈라고 그랴.”
P는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계산을 했다. 지갑도 안가지고 다니는지 앞주머니며 뒷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들이 마술사의 모자에서 튀어나오는 토끼처럼 껑충껑충 튀어나왔다. 종이로 만든 지폐인데 녀석의 허벅지만큼이나 두꺼워보였다. 꿀꺽. 아 역시 배가 고프다. 집에 먹을 게 뭐가 있더라.
“뭐 먹을래?”
태연하게 돈을 내고 밖으로 나온 녀석은 사전에 같이 저녁을 먹기로 약속이나 한 것 마냥 선뜻 그렇게 물어왔다. 아마도 당황하게 만들려는 의도였겠지만 나도 만만치는 않다. 단박에 그 속셈을 파악하고 쾌재를 불렀다. 오늘 저녁은 어떻게 잘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놀라는 척은 해줘야한다.
“응? 웬 저녁?”
이렇게 최대한 네 의도를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게 예의더라.
“밥이나 같이 먹자고. 뭐 먹고 싶어? 어디 갈까?”
“아 근데 그게 내가 지갑을 놓고 와서 좀 그러네 하하”
“으이그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얼른 말햐 배고프다”
이것은 있는 자들이 즐겨 쓰는 전형적인 ‘호기’. 이제는 확실해졌다.
“하……. 그러면 뭐 근처에 가까운 데로 가지”
고기는 매우 맛있었다.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예전에는 - 그러니깐 지금처럼 서씨 아들이 아니라, 서사장님 아드님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는 말이다. - 일주일에 세 번 넘게 고기를 먹는 때가 심심찮게 있기도 하였다. 아 생각만 해도 참으로 기름진 시절이다. 아무튼 지금은 지나치게 담백한 시절이고 오랜만에 입 속으로 들어간 고기들은 바로 기름의 요정이 되어 몸속 곳곳에 흩뿌려졌다. 거기에 덧붙여 반주로 마시는 소주 한잔의 매력. “크아” 소리가 빠져서는 안 된다. 마무리는 다시 담백하게 공기 밥에 된장찌개로. 완벽했다.
“입가심으로 한잔 더 할까?”
기름칠한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P가 물어왔을 때는 이미 꽤나 거나해져서 그런 유혹을 뿌리칠 정도의 이성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모르겠다. 이제 주머니는 비었고, 이 몸뚱이 하나 동동 띄워 흘러가는 곳으로 유유히 가리.
“응 뭐 그러던가.”
‘아 너무 거만한가.’ 말을 하고서도 약간 후회가 되었다. 다행히 녀석은 별로 개의치 않아하는 듯, 오히려 계속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에 즐거워보였다. 함께 담배를 맛있게 피우고 녀석이 앞장섰다. 그리고 발걸음이 닿은 곳은 굳건한 성문처럼 보이는 고급스러운 술집의 입구였다.
담배를 다 피우고 나니 이미 주위엔 아무도 없다. 각자의 일이 끝났으니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라지는 이들의 세상이다. 편리한 세상. 밥을 어떻게 해야 하나. 굳이 주머니나 가방을 뒤져볼 수고도 필요 없다. 집을 나설 때 언제나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고 지갑을 두고 나오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깊고 깊은 곳으로의 잠수. 살아남기 위한 능력을 기르는 것.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편해진다. 점점 살아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굶을까 생각도 해보지만 아무래도 영 배가 고프다. 결국 집에 가기로 했다. 어차피 학교에 다시 나와야 하기는 하지만 운동 삼아서 다녀올 수도 있겠다. 발품을 제대로 팔아 마련한 방이었다. 과 동기 녀석 한명과 같이 학교 주변을 몇 바퀸가 걷고 걸어서 산삼을 발견할 정도의 희열을 느낄 정도의 방을 찾아냈다. 낡고 헤진 문에는 그 만큼이나 변색된 종이가 붙어 있었고, 대충 휘갈긴 필체로 쓰여 있었다. ‘16만원, 보증금 없음.’ 고향에서 같이 이 학교로 진학한 친구와 그 친구의 누나. 원래는 그 두 사람과 함께 투 룸의 자취방에 살았었다. 누나가 한쪽 방을 쓰고 나와 그 고향친구는 또 다른 방을 쓰는 형태였다. 그렇게 일 년여 지내다가 갑작스럽게 해고를 통보받는 것처럼 집을 바꾸려고 하니 집을 알아보라는 말을 들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서 씨 아들이 되어버렸기 때문일지. 아니면 가출한 동기 녀석을 몰래 며칠 재워준 것이 들통 난 것 때문일지. 물어보기도 뭣했다. 한창 겨울이 가을을 밀어내던 날에 어찌어찌 이사를 했다. 내가 재워줬던 동기 녀석은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이사를 하고 그 방에 살게 되면서 얻은 최초의 깨달음 -여러모로 깨달음을 많이 주는 방이었다.- 은 세상에 비싼 게 비싼 값어치를 못하는 법은 있어도, 싼 건 역시 싼 값을 한다는 것이었다. 명색이 주방에 화장실까지 딸린 파격적인 조건의 방이었지만, 주인도 어떻게 처분하기가 난감해서 어쩔 수 없이 내놓은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거기다 벌레는 어찌나 많은지. 뭐……. 선택의 여지는 없으니까.
운동인지 노동인지 모를 발걸음 끝에 집에 돌아와 주인을 닳아 메마른 냉장고를 열었다. 주황색의 불빛이 조용히 밝히고 있는 그 공간에 있는 것은 김치통과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물병 뿐 이었다. 망설일 필요도 없이 김치통을 꺼내고 전기밥솥 뚜껑을 열었다. 헉 근데 밥이 없다. 생각해보니 지난밤에 허기가 져서 밥을 다 먹어버렸다. 시계를 보니 아직 그럭저럭 시간은 있다.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냉장고 문을 열어 얼음을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베풂’을 받는 자의 의무는 뭘까? 일단 까다롭게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겠다.
“응 뭐 아무거나. 난 잘 모르겠네.”
무슨 술 좋아하느냐는 P의 물음에 나는 ‘아무거나’를 주문했고, P는 역시 ‘아무거나’를 알아차리고는 J&B를 시켰다. 아버지가 서사장님이던 시절 선물로 종종 들어오던 술이었다. 어쩌면 급하게 꾸린 서씨네의 짐 속 어딘가 에도 몇 개 묻어 들어갔을지도 모르지. P는 제법 능숙한 동작으로 잔에 얼음을 채우기 시작했다. 큰 잔에는 얼음, 작은 잔에는 술을 부으며 말했다.
“친구 한명 더 올 건데 괜찮지?”
아까도 말했지만, 베풂을 받는 자는 가려선 안 되는 법이다. 새로이 온 친구는 비슷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깐 나와 P를 적절히 50대 50으로 적절히 섞어놓은 기분이랄까. 좀 더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나라는 토양에 P라는 씨앗을 심어 태어난 인간? 아 이건 비유가 뭔가 이상하구나. P의 씨앗이라니. 아무튼 간단히 말해 P처럼 집이 든든한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P처럼 게임 방에서 담배탑 쌓기 놀이에 열과 성을 하다는 그런 친구였다.
“와우가 그렇게 재밌냐?”
나로서는 딱히 두 사람의 공약수가 그것 밖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기 때문에 꺼낸 한마디였지만, 자못 후회가 될 정도로 ‘와우’라는 게임의 이름을 들은 두 사람의 눈동자는 번쩍 안광을 발했다. 그리고 나서 이후로는 한참 동안 둘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문외한은 열심히 경청하는 수밖에. 물론 정신을 잃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니 캐릭터는 지금 얼마여?”
두 사람의 대화가 절정에 치달았을 때 게임도 결국 돈 이야기로 치달았다. 아이템이 얼마고 캐릭터가 얼마고, 그런 것들을 줄줄이 다 꿰고 있는 사람들. 이 세상에선 그렇게 신기한 일도 아니다.
“한……. 60만 원 정도?”
순식간에 시세를 계산해서 말하는 재주 역시 게임을 즐기지 않는 나지만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60만원이라니. 캐릭터를 그 정도까지 키우는데 들어간 돈은 얼마란 말인가?
“그건……. 한……. 얼마 꼴아 박았지 우리?”
“한……. 백? 이백?”
이 점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쨌든 들어간 돈이 번 돈보다 훨씬 많은 것 같네? 손해잖아?
“에이……. 근데 사실 이건 돈을 보고 하는 건 아니고, 그냥 보람이랄까? 재미? 순수하게 좋아서 하는 그런 거 있잖아 그런 것 때문에 하는 거지”
그렇구나. 수긍 하는 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니.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거 원 철이 없다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다.
게임 이야기를 그만하게 만드는 건 쉽지 않았다.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주제를 버무려 관심이 집중되게 던져야 하는데 이것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며 하기 위해서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가 있긴 했지만 결국 주제를 바꿀 수 있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조금만 더 게임 이야기를 들었다간 눈이 돌아가 시신경이 꼬여버릴 것만 같았다. 다음 주제는 학교 이야기. 두 사람 다 학사경고를 맞아본 경험이 있었고, P는 한번, 새로운 친구는 두 번이었다.
“학고가 걱정은 걱정이다”
시골에서 포도 농사를 짓는 P의 집은 부농이다. 그것도 얼마나 부자인지 지방대에 자취하는 아들에게 중형차까지 딸려 보낼 정도이다. 하지만 대신 그만큼 부모님이 엄하신지 학사경고를 맞은 후로 타격이 좀 심하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끊지 못하는 저 굳은 의지. 언젠간 저 의지가 빛을 발해야 할 텐데. 그래도 걱정이라도 하는 P는 양반이다. 나와 P를 골고루 섞어놓은 저 친구는 당최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는 듯했다. 저게 진정한 깨달음이지 않을까? 아침에 깨달음이라고 생각했던 건 진정한 깨달음이 아님이 분명한가보다.
“학교를 쉴 수도 없고 이거……. 가기는 싫고”
담배 연기를 검은 천정으로 뿜어내며 P가 말했다.
“내가 대신 다녀 줄까?” 알바로 하는 거야. 한 달에 얼마씩 받고“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옆의 친구가 받아쳤다.
“미쳤냐? 그런데 꼴아박을 돈이 있으면 아이템을 하나 더 지르겠네. 그리고 너는 나랑 같이 게임해야지.”
아 정말 이쯤 되면 베풂을 받는 사람이라도 배알이 꼴리지 않을 수가 없다. 정말이지 철없는 철부지들 같으니라고. 세상에 어려운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배가 부르고 복에 겨웠구나. 스트레이트 잔에 술을 담아 찰싹 얼굴에 술을 뿌린 뒤 혀를 차고 철없음을 꾸짖고 똑바로 살라고 외치고 싶었다. 술값은 등 뒤로 뿌리면서 말이다. 아, 그래 돈만 있었다면 말이다.
“나 학교 다니고 싶은데. 나랑 바꿀까?”
하지만 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반동 심리인가 아니면 고대 심해에 서식하던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혀가 제멋대로 돌아가는 그런 병에 걸린 건 아닐까?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져있었다. 아니 대체 얘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안됐네, 진짜 힘들겠네.”
서사장님과 서 씨의 이야기, 형의 이야기 등등 몇몇 에피소드와 지금의 상황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들은 P의 반응은 그러했다.
“학자금 대출 같은 것도 있지 않어?”
역시 뭔가를 좀 아는 친구였다. 동족의 냄새가 난다.
“근데 그것도 신용등급이 문제가 되잖아”
“아…….”
정적이 흘렀다. 아무런 목소리도 지나가지 않는 허공. 읽어보니 ‘답이 안 나오네’라고 쓰여 있었다.
“진심이야? 나야 고맙지만……. 학고만 안 맞으면 돼. 잘 보면 더 좋고”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P가 말했다. 피식피식 웃는 것이 뇌의 반은 깨어있고 뇌의 반은 술에 얼근하게 취해있는 것 같았다. 나는 어느새 베푸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있었다.
“근데 정말 괜찮겠어? 어째 돈 들어갈 구석이 많아 보이드만”
P의 친구가 진심을 묻혀 걱정해주었다. 말없이 술잔을 집어 든다. 멋있게 스트레이트 원샷! 아 그런데 술이 없네. 비싼 술이라 그런가 양이 적구만. 40도짜리 공기를 스트레이트로 마시고 500cc 맥주잔에 담겨있는 물을 마셨다. 아 진짜 괜찮으려나.
“나도 좀……. 쉬어볼까 하고”
“나 지금 이 상황 꿈에서 본적 있는 것 같어!”
소파에 몸을 묻은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던 P가 돌연 외쳤다. 자는 줄 알았다. 데자뷰 현상이라고? 혹시 꿈이 아니라 동화책 아니냐?
신발을 대충 꿰어 신고는 다시 학교로 향한다. 빌어먹을 고물 전기밥솥의 취사버튼이 제대로 눌러지지 않아서 밥이 제대로 안됐고 결국 김치만 몇 개 주워 먹고 나와야만 했다. 이렇게 재수가 없다니. 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집에 왔다 가는 걸까. 빈속에 내려 보낸 김치 때문인지 속이 쓰렸다. 잠시 눈 붙인 사이 시간이 꽤 흘러버려서 서둘러야했다. 아 그런데 괄약근에 느껴지는 내압이 심상치가 않다. 불안? 아니 이건 두려움의 대상이 있기에 불안은 아니고, 걱정이다. 똥이 걱정이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 정문 닿을 때까지 이 어둠의 존재는 몇 번인가 바깥세상 구경을 시도했다. 제법 훈기가 도는 초여름이건만 그럴 때마다 오한이 느껴졌고 땀구멍들이 기름진 식은땀을 짜냈다.
계약을 했다고는 하지만 워낙 터무니없는 것이었으므로 사실 물리려면 그냥 물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호언장담을 하기도 했고 멋도 너무 심하게 부려버렸고, 무엇보다 어쩌면 정말로 쉬고 싶은 것, 쉬지 않으면 부서져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기에 물리지는 않기로 했다. 다음날은 역시나 언제나 그렇듯 심해의 밑바닥에 누워있었고, 몇 가지 고민들을 해결하는데 매진했다. 의외로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 2학년이니까 합동강의실에서 하는 교양과목 위주로 시간표를 채우면 될 것 같았다. 시험이야 학고만 면하면 된다고 했고, 사람들이 입방아 찧는 건 과 인원이 워낙 많고 P나 나나 그렇게 눈에 띄는 사람들은 아니었으므로 큰 문제는 아닐 것 같았다. 일단 집에는 청강을 하는 것으로 말해놓기로 했다. 나중에 들을 수업 미리 공부해 놓는다고 하면 설마 크게 뭐라고 하실까. 날이 밝기가 무섭게 P는 전날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끝까지 베푸는 자로 남았다.
“넌 왜 그렇게 철이 없니”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네가 한가롭게 그러고 있을 처지야? 학교 그만두고 취업이라도 해야 할 판에 뭐 하러 그러고 있어? 너네 과가 또 무슨 큰 비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는데, 아 나 엄마한테 참 실망이네 실망이야. 자식이 공부한다는 데 어떻게 그래요?
“실망은 내가 실망이다”
받아치려는 찰나 전화를 끊겼다. 화가 나면 상대방이 말을 하든 말든 전화를 끊어버리는 게 어머니의 버릇이었다. 하지 못한 말이 점액처럼 다시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갔다. 이것들은 어디에 쌓일까. 폐? 아니면 위? 소화기일까 호흡기일까. 낭만적으로 말하면 심장으로 흘러들어가거나 그러는 건 아닐까? 조금 미어지는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어쩌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일종의 반항심 같은 것도 작용 하는 걸까. 계획대로 수강신청을 했고, P 아니 P의 부모님께서는 등록금을 내셨다. 어렵게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거리가 멀어서 천상 또 내 발은 고생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걱정이었는데, 역시나 출석을 부르는 이름과 본명이 달라서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P와는 성도 달랐기에 아명이나 개명을 했다고 둘러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생각해낸 것이 서로 수업을 바꿔서 듣는다고 둘러대는 것이었다. 어쩌다보니 서로 맘에 드는 게 엇갈리는 수업들이 있는데 그 수업들만 바꿔서 듣는다고. 이 처세술은 꽤나 잘 먹혀들어갔다. 오히려 내가 P라고 둘러댔으면 나중에 더 위험할 뻔 했다. 물론 모든 이들을 속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친한 동기들의 경우에는 엄격한 보안을 요구하고 살짝 알려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숨기면 오히려 화를 부르는 법이니 말이다. 밥도 훔쳐 먹는 게 더 맛있는 법인지. 정신없이 너무나도 즐겁게 한학기가 지나갔다. 어색함이라고 할 만한 것도 한주가 끝이었다. 수업에 들어갔다가 집에서 밥을 먹고, 어쩌다 가끔 아주 가뭄에 콩 날 정도로 후배들 밥을 사주기도 하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MT에 따라갔다. 학생회 참정권 명단에 올랐고 체육대회에 가서 막걸리를 마시고, 친한 동기들과는 이따금 가볍게 술도 한 잔씩 할 수도 있었다. 동아리도 기웃거려볼까 했지만 그건 너무 무리인 것 같아 깔끔하게 포기했다. 가끔씩 P에게 전화가 왔고 예전의 그 고기 집에서 몇 번인가 식사를 같이 했다. P의 이름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적잖은 에피소드가 있었고, P의 역할을 수행하는 계획이 모두 잘 먹혀 들어가는 이야기를 하면 박수를 치고 깔깔거리며 웃거나 연신 감탄사를 토해냈다. 성적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안한지 만날 때 마다 거듭 학고를 절대 면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이렇게 바꿨는데 또 학고 맞으면......”
나는 말을 채 다 맺지 못하고 킥킥대며 웃어댔고 P도 따라 웃었다. 그런 상황이면 정말 나도 어이가 없지만 당사자인 P는 하늘이 노랗게 보일 듯 했다.
하늘이 노랗다. 괄약근에 힘을 너무 준 탓인지 이제는 먹먹해져서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쥐가 나는 것도 같았다. 새거나 한 것은 아닐까? 문득 여학생이 뒤 돌아 보이면서 ‘나 괜찮아?’라고 물어보는 여성생리대 광고가 생각났다. 젠장 생리대라도 했어야 했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잊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다시 심호흡을 하고 잠수를 한다. 언제나 그렇듯 고대의 심해바다 그 밑바닥으로 말이다. 원래는 빛이 닿지 못하는 곳이지만 보이긴 보인다. 할리우드 영화의 수중 씬 처럼 머릿결을 멋지게 휘날리며 밑으로 밑으로 수영해 들어간다. 한참을 잠수해서 마침내 도달한 심해의 밑바닥! 그곳에 있는 것은,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똥밭이었다. 드넓은 심해, 그 거룩하고 고요한 공간에 빼곡하게 정렬되어 있는 것이 결국 수많은 똥들이라니. 어릴 때 서사장님 댁에서 키우던 청거북이가 생각났던 걸까. (먹는 족족 똥으로 환원해내는 재주를 가진 녀석이었다.) 그렇게 결국 똥 생각을 잊지 못하고 목적지인 건물에 들어선 것은 엉덩이 근육까지 얼얼해질 즈음이었다. 이미 양봉계곡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 이따금 미묘한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릴 터였다.
강의실에 가방을 놓고 화장실에 가려는데 또 기묘한 일이 발생했다. 마렵던 똥이 쏙 들어가 버린 것이다. 누구나 살면서 심심찮게 겪어본다는 그것! 막상 화장실에 앉으면 자취를 감추는 그것! 이 무슨 똥의 법칙이란 말인가. 잰걸음이 자연스럽게 느슨해졌다. 허탈하다. 심해에 뿌려진 똥들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오빠”
강의실 문을 나서다가 과 후배인 A를 만나서 아는 체를 했다. 같은 수업을 듣고 있는, 역할 바꾸기에 대해 최초로 의문을 제기했지만 또 한편으로 가장 쉽게 둘러대기 기술에 의해 설득당하고만 단순한 건지 영리한 건지 모를 꽤나 붙임성 좋은 친구였다. 옆의 남자친구로 보이는 남학생이 머쓱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인사 비슷한 것을 건넸다.
“아 예 안녕하세요”
활짝 웃어 보이며 인사를 했다. 악수도 청해서 했다. 남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게 필요한 법이다. 특히나 여자 앞에선 말이다. 그리고 특히나 꽤나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선 말이다.
“오빠 시험공부 많이 했어요? 아 저 어제 밤 샌다고 큰소리치다가 결국 잤어요”
“하하 그럴 것 같더라. 나야 뭐 알바 가느라고 별로 못 봤어. 괜찮어 우리에겐 요행이란 게 있지 않겠니.”
“그래요 오빠 이게 마지막 시험이죠? 시험 잘 보세요”
몸의 어딘가를 가렵게 만드는 귀여움을 발산하는 아이였다. 천천히 손을 흔들며, 혹은 네덜란드에서 온 국가대표 축구감독의 제스처를 따라하며 멀어져갔다. 파이팅이라는 건가.
허리를 꼿꼿이 폈다 구부렸다. 변기에 앉은 지 몇 분이 흘렀지만 몇 번의 방귀만이 힘없이 새어 나올 뿐 알맹이는 소식이 없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똥이 순간이동이라도 했단 말인가? 시계를 보니 시험시작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갈등의 순간이었다. 세상에 똥이 안 나오는 데 똥줄이 타들어가다니. 아 정말 이러다 시험 도중에 마려운거 아냐? 시간을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냥 일어서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무너지나요. 지난 올림픽 때 유행했던 멘트가 떠올랐다. 아 그래도 그나마 반가운 게 변기에 비데가 달려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비데 물을 맞아본 게 언제던가? 서사장님의 집에는 아주 좋은 비데가 있었지. 아무렴 최고등급의 비데였을거야. 자동세척기능에 그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던 탈취기능까지 갖춘.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도 심해 어느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은 아닐까. 버튼을 누른다. 지잉하는 소리와 함께 노즐이 나오고 그리운 감촉이 전해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괄약근이구나.
마지막 시험이라고 별 다를 것은 없었다. 합동강의실의 교양과목은 정교수의 경우에는 보통 조교선생님이 감독관으로 들어오시고 시간강사의 경우에는 혼자서도 감독을 많이 하신다. 마침내 받아본 시험지. 그러고 보니 하루 종일 똥 때문에 마지막이라는 걸 좀 잊고 있었던 듯하다. 이제 이걸 마치면 다시 돌아가야겠지. 그런데 어디로 돌아가지?
문제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몰래 다니는 학교는 더욱 더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공부도 더 잘됐다. 이전에도 고학생이라는 생각이 어느 정도는 들면서 열심히 했지만 이번 학기처럼 그렇게 수업만 들어도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사람 일이라는 게 참 야속하다랄까 그런 일들이 많은 것 같다. 답안을 다 작성하고 한번 다시 훑어보는 보통의 절차를 밟았다. 크게 훌륭하지도 않지만 그렇게 흠잡을 것도 없는 무난한 답안지. 학고는 당연히 면하겠고 어쩌면 잘하면 C급 장학급 정도는 기대할 수도 있지 않으려나? 요새 신입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힘들까? 그런 생각을 하다 아차 큰일 날 뻔 했다. 이름과 학번을 깜빡할 뻔 했다. 우리 과, 학번, 그리고 이름. P의 이름을 적으려고 손을 뻗다가 괜히 조그맣게 ‘왕자’라고 적어본다. 아니 거지라고 적어야 하나. 모르겠다 어차피. 펜으로 동글동글 덧칠로 지워버렸다. P의 이름을 적고, 짐을 챙겨 앞으로 나갔다. 답안지가 쌓여있는 곳에 답안지를 제출한다. 어지러운 무늬의 B4용지가 천천히 침몰했다. 시험 도중에 똥이 마렵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강의실을 나섰다.
“자 이제 끝인가”
나의 등장에 맞춰 밝아지는 햇빛에 대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출입구에 있는 벽돌로 된 나간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무는 데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얌마”
P였다. 어쩐 일이냐고 물으니 오늘이 마지막 시험이라기에 고마워서 같이 뭐 좋은 거라도 먹으러 갈까 하고 왔단다. 같이 담배를 피우며 주차된 곳으로 가니 일전에 봤던 친구가 조수석에 앉아서 스마트 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정말 엄청난 열정이다. 대한민국이 급성장하려면 저런 사람들을 키워야 하는데.
뒷자리에 앉았다. 중형차라 그런지 뒷좌석 공간이 제법 있었고, 시트도 고급스러웠다. 하긴 예전 서사장님 댁에는 이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대형 승용세단이 있었더랬다. 그래 그랬었드랬드랬드랬다. 행선지가 어딘지 P는 일단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조수석의 친구는 여전히 게임 삼매경이었다. 그래 우리나라 게임 산업의 미래는 밝다!
“끝난 소감이 어때?”
길을 건너는 사람들을 피해 운전하느라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P가 물었다.
“소감? 하하 뭐 그런 게 있겠어?”
“그래도 느낌이 있을 거 같은데, 어떻게……. 나 학고는 면하겠지?”
“응 뭐 학고는 당연히 면할 것 같고. 잘하면 C급 장학금 정도는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데.”
“와우! 진짜? 야야 들었냐? 나 장학금 탄댜!”
“C급? C급이면 얼마지? 그럼 나한테는 얼마나 주게?”
“미친, 그걸 내가 왜 너한테 줘”
확실한 것도 아닌데 괜히 말했나. 무심코 던진 말에 앞에 있는 두 사람은 또 재미나게 투닥 거렸다. 그나저나 뭘 먹으러 가는 걸까. 이제는 얻어먹는 게 도가 튼 거 같구만.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진통은 시작됐다. 시험 때도 잠자고 있던 용이 꿈틀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 맙소사. 이 차에 지리기라도 하면 어쩌지. 머릿속엔 다시 깊은 바다 속에 일제히 소집된 똥밭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지잉지잉하는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의 진동이었다. 조심조심 몸을 움직여 휴대폰을 꺼냈다. 요란한 화면이 일렁거렸고 발신자정보가 표시되어 있었다.
‘아바마마’
“전화 안 받어?”
P가 룸미러로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응 아버진데 나중에 전화 할라고”
“음, 그랴 그럼. 근데 너 어디 아프냐? 왜 그렇게 식은땀을 흘려?”
“어 똥마려워. 아깐 또 안 나오더니만.”
“차에서 지리거나 하면 안 된다. 그나저나 뭐 드실랴?”
장난을 반쯤 섞어 던진 말에 또 한 번 배알이 꼴렸다. 남은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킥킥대는 꼴이란 정말 철없는 짓이 아닌가? 아 내가 지금 똥만 다스릴 수 있었다면 따끔하게 다짐을 하는 것인데! 하지만 지금 나는 또 베풂을 받는 자가 아니던가? 그러니 결국 대사는 정해져 있다.
“뭐 아무거나 먹지”
“아……. 그 아무거나 말이지?”
“그래 그거 말이지.”
“나도 요새 그게 땡기더라고”
“그래? 나는 맨날 먹어서 잘 모르겠는데”
세 명의 능청꾸러기들이 탄 차가 웃음소리로 한바탕 들썩였다. 웃음소리를 타고 웃음을 흘리며 곁눈질로 창밖을 내다보니 똥밭을 지나고 있었다. 셀 수 없을 만치 많은 똥 덩어리들이 지평선까지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웃음소리에 부풀었다 쪼그라들었다 하는 것도 같다. 포도로 만든 중형 승용차는 그렇게 아무거나를 찾아 고대의 심해바다를 달린다.
-끝-
'시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편소설]그녀의 자리 (0) | 2018.10.30 |
---|---|
[단편소설]프레데터는 이렇게 말했다 (0) | 2018.10.30 |
[단편소설]집에 가는 길 (0) | 2018.10.30 |
고통과 시간의 복화귀선 (0) | 2016.12.10 |
고즈넉. 몸짱이 되자. (0) | 2016.12.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