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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생각

빠른 생일자들에 대한 변

by 통합메일 2013.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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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커뮤니티 공간에서는 빠른 생일에 대한 비난이 심심찮게 이슈가 된다. 정확히 말하면 형 대접을 받기를 원하는 빠른 생일자들에 대한 분노가 그 기저를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관찰된다. 빠른 생일자들을 조준하는 비난의 논지는 빠른 생일이라는 개념은 학교 다닐 때나 통하는 것이지 사회에 나오면 어디까지나 학년이 아닌 나이로 계산하게 되는 것인 만큼 그러한 대접을 기대하거나 요구해서는 안 되며 그냥 동갑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에 대하여 관련된 필자의 인적사항을 밝히자면 필자는 주민등록상의 나이가 19850222로서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간 소위 빠른 생일로 분류될 수 있는 부류라고 하겠다. 비난의 대상이 되는 부류에 속하며 나는 빠른 생일들의 요구를 공격하는 이들의 주장에서 어떤 불합리의 인상을 받을 수 있었던바 이 글에서는 빠른 생일자들의 입장을 변호하는 동시에 그에 대한 비판을 논박하는 일을 시도해보도록 하겠다.


일단 나는 이 논쟁에서 <나이>라는 개념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나이는 태양력에서 365일로 계산되는 일 년을 기준으로 하여 인간의 생의 길이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이어져 왔는지를 말해주는 것인 동시에 형과 아우라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역할을 설정해주는 데 매우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빠른 생일에 대한 비판은 일리가 있는 듯하다. 그것이 근거하는 논리는 사회 대다수의 구성원이 합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합의와 모순되는 또 하나의 합의가 사회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빠른 생일들은 어떻게든 일찍 학교에 들어와서 최소한 12년 동안 실제로는 자신보다 한 살 위인 형들과 친구로 지내며 그들과 함께 시간을 공유해왔고, 그것은 나이가 어리더라도 함께 입학하여 친구로 지내며 그들과 함께 시간을 공유해왔고, 그것은 나이가 어리더라도 함께 입학하여 같은 학년인 이상 비록 나이가 다르다 할지라도 친구로 인식한다는 모종의 합의에 기초하고 있는 경험이다. 때문에 나 같은 경우 나의 준거집단이자 모집단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84년생들의 계층이지, 85년생들의 그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나를 비롯한 빠른 년생들에게 사회에 나오면 지금까지 네가 경험한 것들은 무효이고 이제는 양력 생일이 나이를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기 때문에 너는 84년생이 아니라 85년생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난처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간다고 해서 이전의 관계가 모두 일순간에 끊어지고, 그와 관련된 기억이 모두 삭제된다면 위와 같은 주장은 그나마 일말의 일리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인간은 기계가 아닌바 결코 그럴 수가 없는 존재이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의 삶의 경험과 기억에 의해 그 정체성이 결정되는 실존적 존재이며 구성적 존재이다. 어떤 이들은 지적하기를 빠른 생일자들은 친구들은 30살일 때 자신은 29살이라는 주장을 하며 궤변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행위가 빠른 생일자가 아닌 사람을 골려주려는 의도가 있다는 측면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는 것으로 지적될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어디까지나 농담인 그러한 발언을 가지고 인간의 정체성을 논하는 장에서 근거로 삼는 행위 역시도 그다지 바람직해보이지는 않는다는 것 역시 나의 생각이다. 장담하건대 모든 빠른 생일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윗 나이와 공유하는 것이다. 이즈음 하여 혹자는 학교를 다니지 않은 빠른 생일자나, 제 나이에 학교에 들어간 빠른 생일자의 경우에는 어떻게 생각 하냐는 질문을 해오기도 하는데 이것은 형용모순을 묻는 아주 답답한 질문이다. 일찍 학교에 들어가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빠른 생일자의 개념을 적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빠른 생일자로 분류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3월 1일 이전에 출생한 것으로 족한 게 아니라 그러한 이유로 인해 일찍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던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비자발적으로 말이다.


우리는 또한 그러한 입학행위에 깃든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일단은 내가 빠른 생일자가 된 이유는 나의 의지가 아니라 부모님의 의지였다는 점에서 장성한 이후에 그로 인해 나에게 주어지는 문책도 그 근거가 희박해진다. 그럴 땐 차라리 빠른 생일을 못마땅해 하는 이들과 빠른 생일자의 부모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는 기회를 주선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사실 근본적인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빠른 생일들이 일찍 학교에 들어갈 수 있던 이유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국가의 허용 혹은 방조하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일 년이나 빨리 학교에 들어갈 수 있단 이유는 민족이 고래로부터 사용하던 태음력을 국가가 부분적으로 긍정함으로써 입학연령을 결정하는 기간을 보다 폭넓게 설정했던 것이다. 물론 일찍 학교에 들어가더라도 실제 양력 나이를 칼 같이 적용하여 같은 학년에서도 호형호제를 지키도록 교육을 받았다면 이 논쟁을 유발시킨 사회적 갈등은 거의 별반 문제시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나의 교육과정을 통틀어 단 한 번도 그런 교육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나이가 달라도 동학년이면 친구라는 교육을 받았다. 그렇다면 대관절 빠른 생일을 인정하는 것이 바른길인가 아니면 부정하는 게 빠른 길인가?


여기까지 논지를 전개하니 문득 뭇 것들이 집착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된 이유는 국가가 태양력을 채택함에도 불구하고 태음력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흐르는 문화에서 나이에 따라 다양한 의무와 책임이 질서 있게 분배되기 때문에 빠른 생일이든 아니든 이러한 이슈에 한마디 거들지 않고는 배겨날 수가 없는 것이다. 후자는 사회에서의 한두 살 차이야 무의미하니 이런 일로 싸울 필요가 없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제안 역시도 모종의 가치를 포함하는 주장이라고 생각하는바 어느 쪽으로든 합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며, 앞서 밝힌 대로 국가에서 입학연령을 넓게 설정하여 그로인해 자신의 나이와는 다른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면 그러한 실정을 고려하여 빠른 생일을 인정해주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판단인 동시에 인간성의 실존적 본질을 이해하는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지적하는바 빠른 생일을 인정하는 게 소위 족보를 꼬이게 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있는데 내 친구가 또 다른 내 친구의 형이 되는 일이나, 형의 친구가 나의 친구가 되는 일이 과연 제대로 된 족보란 말인지 진심으로 되묻고 싶다. 그것이 제대로 된 족보가 되는 근거가 무엇인지 현재의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오히려 내가 생각하기로서는 나의 친구는 응당 또 다른 내 친구가 친구가 되어야 하고, 형의 친구는 내게 형이 되어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임머신을 개발하는 일과 현실의 특수성을 감안하는 일 중 어느 것이 보다 더 합리적인지는 물론 각자가 결정할 일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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