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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박민규의 「핑퐁」을 읽고

by 통합메일 2011.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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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의 핑퐁을 읽고

1.작가론 (작가: 박민규)

박민규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몽고반점>이라는 단편소설이 2005년 제 27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한강이라는 작가가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 200여 페이지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 바로 <갑을고시원 체류기>라는 다소 기이한 제목의 단편소설이었다. 그리고 그 짧은 소설은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박미라는 인간을 궁금해하도록 만들었다. 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 당시에는 일단 독서의 깊이가 깊지도 못하여 대강 줄거리만으로 작가를 평가하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게 던진 궁금함의 무게는 대상을 수상한 이들보다 더 무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날 나는 박민규라는 작가를 다시 만나게 된다. 대학교 1학년 때 들었던 국어와 작문이라는 수업에서 교수님께서 학생들에게 부여한 과제물 중에 그의 지구영웅전설이라는 장편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과제를 선택했고 그렇게 한번 이 작가는 나와 엇갈렸다.

다행한 것은 이후로는 그와 그렇게 엇갈리지도 아니 엇갈릴 수도 없었다는 점이다. 국내 내로라하는 각종 문학상 수상집에 우수상을 포함하여 심지어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고, 하나 둘 그의 장편이 발표되면서 어느새 대한민국 문단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제법 공고해졌다.

그리고 작가 신경숙이 엄마를 부탁해로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했던 2009~2010년도에는 그녀와 함께 나란히 여러 도서 판매몰 등의 투표에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게, 박민규였다.

2.인물론 (못 그리고 모아이)

이 작품의 스토리는, 아니 그 스토리를 이루고 있는 구도는 상당히 간단명료하다. 크게 보자면 단 두 명의 주인공만이 등장할 뿐이다. 그리고 그 두 명의 소년은 그들의 학교생활을 통해 붙여진 별명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을 뿐, 그들의 집안사정이나 가족들의 인물들은 이 이야기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는 상태이다. 험악한 세상에 먼저 던져진 현존재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

이라는 이름의 화자와 모아이라는 이름의 화자의 친구이다. 각각 반자의적으로 붙여진 인물의 별명이었고, 그것은 그들의 모양새나 그들의 신세를 대시 말해주고 있다. ‘이라는 별명은 언제나 머리를 못처럼 두들겨 맞는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고, ‘모아이라는 이름은 저 멀리 아이티섬에 세워진 사람 얼굴 모양의 석상을 닮았다는 계기에서 붙여지게 된 것이었다. 모아이석상 과연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대체 어떻게 이들은 친구가 되어 함께 이 책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왕따이다.

어릴 적 나는 왕따라고 생각되는 것을 당해본 적이 있다. 아무래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가 그런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행한 것은 수도권이 아니라 지방에 있는 학교였기 때문에 그 당시 전국을 휩쓸던 왕따라는 문화가 그렇게 완벽하게 전달되지는 않았다는 것이고, 불행한 것은 신설학교라 선후배 간의 전통 같은 것이 없어서 그런 신종 문화가 창궐할 경우 자율적으로 통제하고 누군가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나 문화 같은 것들이 전무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2년 동안 나의 전쟁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언제나 놓을 수 없는 긴장이 있ᄋᅠᆻ고. 머리 어딘가의 나사가 잔뜩 풀린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항상 등 뒤를 조심해야 했고, 습관적으로 나를 향해 날아오는 손이나 발에 대하여 습관적으로 상대방도 나도 아프지 않은 부위를 그리고 그런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차라리 내가 더 아픈 부위를 갖다 대는 기술을 터득할 수 있었던 그런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깐, 언제나 반항과 굴욕의 아슬아슬한 외줄을 초점 없는 눈동자로 걸어갔던 시절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벌써 십여 년이 흘러. 나는 이 작가의 책에서 다시 그 시절을 만났다.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던, 꿈속에까지 찾아왔던, 잊기 위해 너무나도 노력했던, 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그런 일들 그런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이해하지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아이라는 두 명의 중학생 소년들이다. 그리고 이 두 소년을 친구로 만들어 준 것은 다름 아닌 왕따였다. 두 소년의 특징이 상이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제공되는 그들이 받아들이고 또 살아내야만 하는 왕따도 그에 맞추어 약간 달라졌다. 책에서 표현되고 있듯 그것은 북극에 사는 에스키모와 남극에 사는 펭귄의 심정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공존은 참으로 유일하게 따뜻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치 지구의 심층으로 손을 뻗어 그 가운데에서 서로의 손을 잡은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왕따.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갈취. 그리고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방관하고 고개를 돌리는 세상.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 우주였다.

그래서 모아이는 주인공인 에게 말한다.

“(왕따를 당한다는 것은) 소외가 아니라 배제다.”

우리는 세계가 깜박한 인간들이라는 것이었다.

3.인류

무엇일까 대체. 그가 말하는 소외배제사이는 거리라는 것은 말이다. 전자는 어느 정도는 개인의 존재 자아가 살아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개성은 살아지고 어느덧 사물과 다를바 없는 그런 몰인격적인 존재가 되어 볼품없이 어딘가로 치워져 버린다는 느낌이 강한 듯 하다. 그렇게, 그 두 소년도, 작가도, 독자인 나도 조용히 각자가 배제된 세상을 그려보았던 것 같다.

왕따가 무서운 이유. 왕따를 당하는 사람들을 가장 슬프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 이 글 속에 나오는 치수라든가 종두같이 직접적으로 피해자를 괴롭히는 인간들일까? 물론 그들의 존재가 누군가를 근본적으로 두렵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로 무서운 것은 내가 그렇게 당하고 있을 때 그 순간을 곁눈질로 목격하고 있는 방관자들이다. 단지 몇 걸음 거리에 떨어져 있을 뿐인데, 마치 수족관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 정도로 그들의 일상과 나의 일상은 너무나도 먼 거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점점 그렇게 차곡차곡 그들의 내면 안에 쌓여갈 나의 이미지가, 그것이 정말로 무서운 것이 아닌가.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더 이상 나빠지지도 좋아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나로 하여금 고개를 돌릴 수 없게 만드는 것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은 단지 한 교실의 다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사실 누구에게나 60억의 인구에서 그를 제외한 모두가 그를 방관하고 그를 배제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아직 만나지 못해서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도와줄 상황이 안되거나, 겁이 나거나 등등의 이유 때문에 그렇게 인간은 서로를 소외시키고 또 나아가 배제시키게 된다. 같은 인간이 같은 인간을.

4.핑퐁, 랠리

그렇게 왕따를 통하여 배제된 채 살아가고 있던 우리의 두 소년들. 그들의 일상에 드디어 전환점이 될 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이 등장했으니 바로 탁구이다. 그들이 즐겨 맞던주상복합아파트 건설현장 옆의 공터에서 그들은 낡은 탁구대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흘러 흘러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들은 시내에 있는 탁구 전문점을 찾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그들을 인도해 줄 쎄끄라텡이라는 외국인을 만나게 된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탁구를 가르쳤어. 어느 쪽이든 이 지루한 시합의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아직도 결판이 나지 않았단다. 이 세계는 그래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곳이야.”

그렇듯, 그는 확실히 두 소년에게 탁구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기도 하면서 그들을 도와주는 착한 어른이었지만, 이따금씩은 자신의 나이가 수 억년이며, 인류의 역사상 중요한 위인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과 쳤던 탁구게임의 이야기를 하는 듯 소년들로 하여금 이 아저씨가 확실히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발언을 종종하게 된다.

아무튼 그래도 그의 도움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소년들은 탁구를 배우면서 서로 탁구공을 주고받는 랠리를 통해서 일종의 교감을 계속해 나가게 된다. 마치 그 동안 배제됐던 그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자신의 라켓을 갖는 다는 것은 곧 자신의 의견을 갖게 된다는 것이라는 것을. 적어도 어렴풋하게 나마 그 소년은 느낄 수 있었다.

5.핼리 혜성

이 혜성의 이름을 나는 참 오랜만에 들었다. 아니 혜성이라는 이름 자체를 정말 오랜만에 들었다. 과학만화를 즐겨 읽고 호기심이 많았던 어린 시절에는 차라리 그런 이름을 그런 단어를 접할 기회가 더 많았는지 몰라도 나도 이제는 좀처럼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 그런 어른이 되어 버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이 글에는 이름하여 핼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이 등장하게 된다. 물론 가상의 집단이겠지만, 그 모임에는 일단 모아이가 가입해 있고, 나중에 뒤이어서 도 그곳에 가입하게 된다. 대충 설명하자면, 핼리 혜성이 지구에 정면충돌해서 인류가 멸망하기를 바라는 모임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 인류에게 배제된 사람들이 결국 그런 인류를 부정하고 그것을 지워버리려는 의지였다.

아마도 그들의 살아생전에는 실제로 그 혜성을 만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항상 다음 달에는 행리 혜성이 날아와서 지구를, 인류를 지워줄 것이라고 간절히 믿는 그런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살아가야만 하는 그런 세상이었다.

: “긴장된 삶이구나.”

모아이: “겸손한 삶이지

4.실존

그들의 삶을 바꿔줄 수 있을 것 같던 탁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을 통한 랠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좀처럼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여전했고, 또한 그와 함께 여전히 세상은 인류는 그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렇게 완고한 인류 앞에서 결국 던져진 현존재는 절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왜 우리는 그 자체로 조재할 수 없을까? 왜 우리는 반드시 생존해야만 하는 걸까? 어떤 우연이 우릴 그렇게 고안한 걸까? 인체를 통해 태어나고 길러져야만 인간일까? 반드시 그래야만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영문도 모른 채 남아서 뭘 하려는 걸까? 이렇게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말이야.”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실존을 의심하게 된다. 생에 목적이 있다면 대체 무슨 목적일까. 목적이 없다면 대세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런 질문들을 통해 소년들은 각자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첫 번째는 인간이란 우주에 떠있는 행성들처럼 서로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고 너무나도 보잘 것 없이 작고 미약한 존재들이라는 것. 그리고 수 없이 많은 인류를 수 없이 많이 배제해버리는 인류이지만 그런 인류조차도 우주의 규모에서 따져본다면 역시 배제되고 있는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런 인간들은 마치 9V짜리 건전지 같이 별로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들이지만 그것들이 모여 누군가를 죽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들 다수인척 하는 거야. 이탈하지 않고, 평행으로 병렬로 늘어서는 거지. 그건 길게 오래 생존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야. 전쟁이나 학살은 그 에너지가 직렬로 이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지. <중략> 요는 인간에게 그 배치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이기가 있다는 거야. 인간은 그래서 위험해 고작 마흔 한명이 직렬해도 우리 정도는 감전사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래서 생존해야 해 우리가 죽는다 해서 우릴 죽인 수천볼트의 괴물은 발견되지 않아. 직렬의 전류를 피해가며 모두가 미비하고 모두가 위험한 이 세계에서 그래서 생존해야 해. 자신의 9볼트가 직렬로 이용되지 않게 경계하면서 건강하게 탁구를 치면서 말이야.“

그렇게 그들은 조용히 생존하기로 결정했다.

세상이 아무리 그대를 힘들게 하여도.

실존을 갖고 생존하기로.

설사 실존을 찾지 못하더라도, 생존하기로.

(나는 작가가 두 소년이 자살을 하지 않기로 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5.생존, 잔존

그렇게 가까스로 소년들은 생존했다. 아무도 그들의 고통을 모르고 아무도 복잡하고 뒤엉키고 뒤집어지는 그들의 속사정을 몰랐지만 꿋꿋하게 그들은 살아남았다. 그리고는 당당히 그러한 인류의 대열에 합류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마지막 사건이 등장하게 된다. 작가 특유의 위트와 상상력이 동원되어 결국 일이 터지는 것이다. 두 소년을 도와주고 지도해주던 외국인 쎄끄라텡과 그의 세 아들은 사실 외국인이 아니라 외계인이었으며, 지구라는 행성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installuninstall을 관장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파격적인 것은 인류의 멸망과 생존을 결정하는 도구는

탁구였다.

결국 대체 왜 책의 제목이 핑퐁이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게 되는 장면이다. 이것 역시 박민규라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 아닌가 생각한다.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스토리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피하기로 하고, 함의를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앞서 말했듯 두 소년은 세계에서 가장 진지한 태도로 가장 힘겨운 역경을 이겨냈다. 결국 그들은 생존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순순히 그들이 생존으로 이 어두움 터널을 빠져나가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탁구를 통해 인류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꽤나 무거운 짐을, 그리고 너무나도 달콤한 유혹과 함께 하면서 결국 그들이 깨달은 것은

인류는 생존해 온 게 아니라 잔존해 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철저하게 인류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라고 생각한다. 결국 탈중심화이고 어떤 보편에의 부정이다.

다시 정리해보자면 이야기의 처음부터 작가는 꾸준하게 그 무엇인가를 극복하고 그 껍질을 깨부수고 좀 더 위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개인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서 친구로 넘어갔다가 교실 그리고 인류 전체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것은 인류가 하나로 뭉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인류에게 철저하게 외면받고 배제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작가는 그런 인류조차도 우주의 다른 존재들로부터 외면받고 배제되고 있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이런 이야기 혹은 그런 인류 그리고 하물며 하나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무게를 다시 측정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해서 결국 쟁취한 생존이건만 작가는 우리로 하여금 인류라는 시각을 버리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철저하게 인류의 시각에서 탈출하는 것. 그렇게 생각할 때, 물론 인류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공룡 멸망 이후 빙하기나 역사적인 어려움을 딛고 지금까지 문화와 문명을 꽃피우고 존재하고 있는 인류는 분명히 생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류가 아닌 다른 경지에서 본다면, 즉 인류를 배제시키는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결국 인류도 개성이나 주체성을 상실한 채 잔존해 온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두 소년을 배제시키던 인류가, 그래서 그 두 소년에게 있어서는 불가항력의 주체로 인식되던 인류 역시도 결국 그렇게 무력하고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6.총평

박민규의 책을 읽을 때 마다 이상하게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들 중 일부가 종종 떠오르곤 한다. 이를테면 <태엽감는 새>라든지 <해변의 카프카>라든지 <세계의 끝,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같은 판타지적 요소가 다분히 가미된 그러한 책들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약간이나마 닮은 면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인류를 생각한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소년을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그 소년에게 인류를 맡긴다는 점에서 특히나 <해변의 카프카>를 많이 닮았다.

인간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어릴 때 보았던 도덕 교과서가 생각난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인간은 생각할 수 있지만 동물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나는 그것을 나에게 강요해야했다. 이 땅 위에서 생각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라고. 사실 그것은 인류가 지금까지 생존해 온 것이라는 그러한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고이지 않겠는가? , 다시 말해서 인류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오만이 아닐까? 미지의 세계, 즉 아직 가보지 못했고 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우주를 외면한 채 마음 놓고 그런 오만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런 오만에 기대어 또 수많은 인류들이 다른 수많은 인류를 그렇게 배제하고, 겁탈하고, 유린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실로 사회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학문이 발달하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권이라든지 혹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 도덕적 능력으로부터 비롯되는 어떤 권리들을 상정하면서 인간들을 평등한 잣대 위에 하나둘 천천히 올려놓고는 있지만 그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 인류의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를 보면서 대체 그런 눈에 보이지도 않고 아무런 힘도 없는 권리라는 것, 국경을 한발자국만 벗어나면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그런 것을, 아니 심지어 자신의 국가 안에서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그런 권리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지. 동등한 권리로 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대우하려는 그런 시도는 허울 좋은 관계만을 양산해내고 동시에 수 많은 배제된 인간을 만들어 내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인류가 많은 반성을 해야 하지 않을지. , 자기 자신 역시도 배제될 수 있늦 존재임을 깨닫고, 지금까지 생존이 아니라 잔존해왔음을 깨닫고, 당장 내일이라도 핼리 혜성이 날아와 자신을 멸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겸손한 마음으로 언제나 잊지 않는다면, 그렇게 배제되는 인간은 사라지지 않을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생각하고 당장 내일이면 멸망할 존재라는 것을 언제나 잊지 않는 인간은 누군가를 배제시키지도 혹은 누군가에 의해서 배제되지도 않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슬프지만 그래도..

잔존해온 인간으로서..

행복하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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