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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12

[시쓰기]선물 김정환 결국 마음은 세 시로 갔다. 아쉽지만 몸은 두 시에 두고 올 수 밖에. 약속은 일곱 시다. 아니 약속도 아니다. 감동을 위해 자세한 약속은 생략된다. 겨우 몸이 세 시에 도착했을 때 마음은 열한 시를 넘어갔다. 껍질이 벗겨지듯 잔인하게 분리됐다. 아마도 당신은 내 몸과 마음 사이 어딘가에 놓여있겠지. 약속장소로 가는 차 안에서 몸은 마음을 부른다. 빈몸뚱이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허나 마음은 이미 내일로 달아나 제멋대로 한 달 뒤, 몇 년 뒤를 읽어나가는 중이다. 애타게 불러도 좀처럼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곳에 눌러앉겠다는 전보를 보내오기도 했다 낡은 카페의 평일도 들어가 팔짱을 끼고 창가에 앉았다. 잠이 들 즈음 마침내 당신이 나타났다. 오는 길에 샀다며 노을빛 물든 내 몸.. 2013. 11. 28.
[시쓰기]밭 만드는 날 김정환봄에는 고추밭을 만든다끊어질 듯 이어진 줄을 할머니가 걸어가면나는 그 자국에 발맞추어 비료를 뿌린다성겁게 혹은 촘촘하게 그렇게 땅은 기름지게널뛰는 포말을 보고 있노라면시선을 타고,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도 뿌려진다지워지지 않는 것들, 사실은 절대 잊고 싶지 않은 것들추위도 더위도 세대의 보폭 밑으로 스며들어 지하수가 된다나도 이젠 제법 하는구나 싶어 하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목적을 잃고 산개하는 질소와 인산과 고토와 칼슘할머니의 청춘 즈음에 우두커니 서서 오랜만에 고개를 든다어느새 그곳에는 하늘이 있다. 끝나지 않은 세상이 있다그래서 나는 문득 울고 싶어졌다뿌려야 할 비료가 아직 많이 남아있는 까닭이다 2013. 11. 28.
[시쓰기]수상소감 김정환 쉽게 부패하는 글처럼곧잘 부끄러워지는 인생을꾸역꾸역 살아가는 이유는아마도 그 순간을 적어나가던 당시에는한없이 어여뻐 보이기 때문일까. 눈먼 당신에게피가 말라붙은 심장을상큼한 표정으로 내미는 이유는분명히 당신만이 그 앞에서태연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나에게 상을 주었고,나로부터 상을 받았다. 그럼 그렇지결국,나의 소감은애써 겸손하다. 2013. 11. 27.
[시쓰기]청순한 시집 김정환 문득 시가 말라도서관 서가를 헤맸다죽은 시인의 이름 한 점 붙은앙상한 시집을 집었다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학자들의 책과 함께한 손에 움켜쥐고 다니다가오늘의 외로움이 부화하는 순간에펼쳤다책을그 시집을한 번도 읽힌 적 없어 보이는그 팽팽한 살결을 읽으며어느 시집의 순결로눈 먼 기다림을 달래는 기분은실로 너무 멀다달싹이는 내 입술에서는누군가의 숨결이끊어지지 않는 수평선을수시로 넘나드는 소리가 들렸다먼 곳에서 보내온이 편지들을 다 읽었을 때는당신의 기억도 웃으며 잠들까시를 읽는 것은멀어져가는 이의 숨결을자신의 몸속에조용히 접붙이는 사람들의 일이다. 2013.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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