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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생각

두 개의 상식 - 상식이란 이름의 폭력에 대하여

by 통합메일 2014.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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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2년에 작성된 글이라 최근의 생각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고인이 된 대통령의 유명한 어록 중 하나였던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는 문구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지난 총선 때 유난했다가 잠시 사그라드는 듯 하더니 대선이 가까워져 옴으로써 다시 그 기세를 회복하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무슨 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외쳤는지를 나는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고개를 드는 ‘상식’의 퍼레이드에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 역시 어찌할 수가 없는 듯하다. 그것은 아마도 그것이 잉태하고 있는 폭력의 본능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상식’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 일반적 견문과 함께 이해력, 판단력, 사리분별 따위가 포함된다.] 이 의미를 나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1.다수의 일반인이 공유하고 있는바 그로부터 그것을 숙지할 당위성이 도출되는 지식.
2.절대적 진리가 포함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다수에 의해 공유된다는 사실이 상대적으로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식.

이러한 해석에 기초하여 나는 노 전 대통령이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주장할 때 가장 크게 염두에 둔 것이 바로 다수에 의한 소수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라고 이해할 수 있고, 그러한 그의 의지와 사고에 자유민주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지금의 현실에서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다시 외치는 이들 역시도 위와 같은 고인의 숭고한 뜻을 자신의 근본 의지로 삼아 이어받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내가 의도하는 바는 그러한 순수의지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부작용을 분리하여 후자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두 개의 상식’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내 이야기의 논지는 매우 친숙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 순수 절대적 진리성을 담보할 수 없는 상식이란 이름의 외침들이 자칫 엇비슷한 수준의 진리성을 공유하는 다른 주장을 묵살함으로써 밀이 자유론에서 가장 경계한 다수의 횡포를 조장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박은 밀이 같은 논지에서 사회에서 발생하는 이견들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유용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증명하는 것에 의해 뒷받침된다, 또한 그것은 개인은 자신에 대하여 무한한 자유를 향유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그의 자유가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 트위터에서 읽은 어떤 글을 보니 동성애가 상식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옳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다수가 공유하는 상식이라는 이름에 기대어 소수를 억압하는 행위의 전형이며 다수의 횡포에 대한 밀의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부작용의 원인은 상식의 지위를 획득하는데 요구되는 자격기준이 지나치게 너그럽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애당초 그 기준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아 뚜렷한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상식’이라는 개념은 사실 보수의 개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시 말해 사회전체가 아니라 기성세대나 기성의 권력이 공유하는 지식을 상식이라 일컬으며, 그 상식이라는 것은 그러한 기성세대의 권위를 위협하는 새로운 세력을 견제하고 길들이는 훌륭한 사회화(?)의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런 현상이 쉽게 목격되는데 기성교사들은 그러한 상식을 가지고 신입교사들을 통제하고 결국 그렇게 보수화된 교사들은 마찬가지의 같은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상식의 틀에 맞출 것을 요구한다. 이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를 에너지원으로 하는 시대의 지속적 흐름일 것 같은데 그것은 기성의 상식을 완벽히 붕괴시키지는 못했지만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러한 기존의 상식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게 함으로써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관념을 재정립시켰다는 것만으로도 그 의의가 있으리라 본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아닌 소피스트적 전통에 근거한 포스트모더니즘은 태생적으로 상대주의의 역설을 초래하게 되어있었고 그 결과 민주주의의 다원주의가 허용하는 상대성의 범위를 넘어서는 경우가 빈번해지는 현대사회를 그려내는데 크게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상식이라는 것이 가지는 절대적 진리성을 철저히 부정하고 뭇 의견들이 모두 동등한 수준의 상대성을 지니게 됨에 따라 나타나게 되는 현상은 다원주의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개인의 자유를 제외한 모든 영역에서의 무제한적 의견 피력이 허용되어야 하고, 심지어는 그러한 개인이 소유한 자유의 영역마저 의심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는 상대주의의 폐해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동성애를 억압하는 상식의 절대적 진리성을 부정함으로써 그것을 반박할 수 있게 됨과 동시에 동성애자들이 주장하는 권리의 절대성 역시 부정됨으로써 그에 대한 반박 역시 전적으로 부정하지 못하게 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역설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질서의 상황에서라면 결국 어쩔 수 없이 또 자연스럽게 상식의 부활이 요청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에 관해 유의미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롤즈가 1993년에 발표한 『정치적 자유주의(Political liberalism)』이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합당한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신념들을 심각하게 분열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 간에 정의롭고 안정된 사회를 상당 기간 유지시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전략은 상이한 신념을 가진 이들이 공정한 협력을 위해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으로서의 정치적인 영역을 만드는 것이다. ( 때문에 나는 그의 논지가 본문의 주장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이 제한된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론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합당한 다원주의의 사실로서의 자유주의 민주사회’의 개념이다. “개인이나 집단별 이익의 무한한 추구를 인정하는 다원주의는 민주사회의 질서를 혼란시키는 하나의 원인이 되어왔다.” “그래서 롤즈는 민주사회를 여러 가지 입장이 난립하는 다원주의의 사실(the fact of pluralism)이 아니라 합당하면서도 상이한 신념들이 공존하는 합당한 다원주의의 사실(the fact of reasonable pluralism)으로 규정한다.”(『자유주의에 대한 짧은 에세이들』, 김만권, 2001, 동명사) 다시 말해 다원주의라고 하여 아무 의견이나 다 수용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합당성을 가진 의견만이 수용 가능한 것이 바로 민주사회라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이 문장을 통하여 노 대통령이 언급한 비슷한 뉘앙스를 체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난립하는 의견들 사이에서 기준과 중심을 잡고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개념으로서의 상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 기준이 어떻게 도출되느냐가 문제가 된다. 따라서 문제의 ‘합당성’의 원천을 보면 그것은 인간에 대하여 롤즈가 상정하는 두 가지 능력 중 정의감의 능력으로부터 가능한 것이다.(또 하나의 능력은 선관의 능력이며 이는 인간이 합리성을 추구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정의감이라는 것은 욕망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공적으로 누구나 지지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에 근거해서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자발적 의지다.” (같은 책 p.229) 

롤즈의 이론이 칸트의 계보를 잇는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 문장으로부터 자연스레 보편성의 정식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보다 수월한 이해가 가능할 것 같다. 앞서 예로 든 동성애의 문제를 생각하면 사랑이 인간의 권리이고 동성애가 그러한 사랑에 포함되며 동시에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내가 나의 권리를 존중받기를 욕구하는 이상, 아무리 내가 동성애를 혐오하고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경향성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존중하는 것이 보편정식에 의해 올바른 행위가 되며 동시에 인간성의 정식에 의해서도 옳은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건전한 상식의 개념을 고찰해 본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율적으로 입법한 법칙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지 단순히 절대다수가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한 법칙은 그것이 적용되는 모두가 동의하거나 동의할만한 것이 되는 게 타당할 것이다.(명시, 묵시, 가상적 동의) 칸트에 있어서는 그것이 인간 존재였고, 롤즈의 경우에는 그 영역을 정치적인 것으로 한정시키는바 공정한 사회협력의 구성원으로 특정되는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상식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주장이나 권리를 불합리하게 억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원칙이 지켜짐으로 인해 도출되는 상식이 민주주의 사회의 올바르고 바람직한 전제하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도덕적 측면에서 실천이성을 통한 선의지를 확립하고, 정치적 영역에서 정의감을 고양시키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유가전통을 계승한 우리 선조가 이어 내려온 선비 정신 중의 ‘혈구지도’, ‘추기급인’, ‘충서지도’의 덕목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상식을 세우는 길은 역지사지에 있다는 말이다. (물론 마이큰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p.174에 나오는 것처럼 황금률이라고 할 수 있는 위의 덕목들과 칸트의 보편성의 정식이 완벽히 일치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조선말의 사회 부패와 일제강점 이후의 역사 왜곡에 의해 유교에 대한 국민의 전반적 인식이 고리타분한 것이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21세기의 선비 정신에 대한 재조명의 시도가 꾸준히 이루어지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러한 정신을 포함하는 상식을 통하여 우리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로하며 그들의 입장에서 싸울 수 있다. 빈민, 노동자, 철거민들의 입장에서 국가의 횡포를 논하는 행위들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것은 단지 내가 나중에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같은 도움을 받기 위해서이거나 그것이 나의 이익과 결부되기 때문이 아니라 (아시다시피 좋아서 한 행위가 우연히 의무에 일치하는 합의무적 행위의 경우 칸트는 그런 행위를 도덕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냥 나쁘지는 않은 행위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들이 겪는 고통이 우리가 스스로 입법한 법칙에 근거하고 있는 상식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부분을 교정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하는 것이다. 즉 상식의 실천에 있어서 자신의 욕망과 경향성을 배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부정이 우리에게 해를 끼쳐서라기보다는 법칙과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그것은 반대되어야 한다. 이것을 투표에 적용시키면 조금 더 재밌는데 민주사회의 절대적 권리인 (그리고 동시에 객관식이라는 이유에서 한없이 제한된 권리이기도 한) 투표의 경우 그것을 행하는 이유는 나의 이익보다는 과거 일컬어진 공적이성이나 일반의지 등에 입각해야 하고 그 선택의 기준 역시 마찬가지이며, 투표 독려의 동기부여 역시 개인의 이익이나 특정 정향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이 투표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래 의미이고 단순히 그것이 우리의 상식을 구성하며 그러한 상식에 부합되도록 거의 모든 국민이 투표를 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맞는 일이라는 이유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의 두서없이 장황하기만 한 논의를 조금이나마 추슬러 보면 나는 줄곧 상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어느 시점엔가 의미의 단절이 이루어지면서 이 글에는 엄연히 다른 의미의 두 가지 개념을 가진 상식이 양립하고 있다. (그리고 앞서 밝혔듯 그것은 내가 의도한 바였다.) 하나는 명확한 기준 없이 다수가 공유한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는 상식이며 소피스트적 전통에서의 상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고, 또 하나는 절대다수가 동의하거나 동의할만하여 스스로 입법한 법칙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것에 근거하고 있는 상식이며 이는 소크라테스적 전통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후자의 상식을 도출하기 위해 칸트와 그 전통 위의 롤즈를 세웠는데 이는 일반적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필자의 모자란 지식의 소치인 취향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필연적인 것은 아니고 다른 경로를 통해 얼마든지 다른 개념의 (합당한) 상식이 정립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다만 필자가 부득불 칸트 계열을 사용한 이유를 굳이 든다면 필자의 문제의식을 볼 때 불확실하고 무근거한 상식이 다수가 자행하는 횡포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바 그것을 해결하는 데에는 이성을 통해 보편타당한 법칙으로 기준을 삼는 칸트와 롤즈의 이론이 매우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인 것 같다. 관심법이냐는 조소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만 나는 노 전 대통령이 생각한 상식이 이러한 후자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마음속으로 그에 대한 괜찮은 평가를 내리는 사람으로서 그에 대한 사람들의 그리움과 그의 인간미에 대한 찬사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 오히려 그의 장점은 상식이라는 이름 속에 담을 수 있는 명확하고 커다란 이성의 힘이라고 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여전히 상식의 의미가 혼재되어 다원주의의 사실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그러한 상식의 법칙, 혹은 법칙의 상식을 명확히 하고 그것을 인식하는 한편 무질서하고 다수에 기댄 상식을 적극적으로 지양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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