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에 해당되는 글 28건

  1.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독후감
  2. 팟캐스트 공든 주식이 무너지랴에서 추천한 주식 관련 책(도서)
  3. 신경숙의 '외딴방'에 대한 자전적 독후감-우리의 삶 언젠가 그 외딴방에서 만나리-
  4. 제12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요약(윤고은-해마 날다)
  5.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다
  6. 한강 창비 장편 연재소설 - [소년이 온다]
  7. 천명관 창비 장편 연재소설 - [길의 노래]
  8. 박민규 창비 연재소설 - [피터, 폴 & 메리]
  9. 박민규의 《근처》 독후감
  10. 역대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 목록 (문학사상사)
  11. 2014년 이상문학상 대상 - 편혜영 <몬순>
  12. [이 주의 무료책]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꿈을 꾸어라
  13. [이 주의 무료책]두려움 없이 사는 법(무료 이북)
  14. [이 주의 무료책]여왕의 시대 - 유럽편
  15. 인터파크 무료 eBook -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
  16. 강상중의 『고민하는 힘』 독후감
  17. 천명관의 『고래』 독후감 – 존재의 과잉에 대한 반성과 진정한 실존
  18. 문장연습-미안해요
  19.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 독후감 (1)
  20. 알랭 드 보통의 불안 독후감상문
  21. 7년의 밤 독후감
  22.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독후감
  23. 무중력 증후군 독후감
  24.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고
  25. 박민규의 「핑퐁」을 읽고
  26.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27.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고
  28. 『엄마를 부탁해』(신경숙)에 비친 우리들의 어머니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독후감

 

 

독후감의 소재로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미 한 번 읽어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알량하지만, 수두룩하게 열거된 책들 중에서 마지막 마침표를 만나본 책의 제목이라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책을 읽어보고, 그 책에 대해 누군가에게 이야기해 본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볼드(Bold)효과 같은 게 있었던 기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복기 정도나 하려고 책을 펼쳐 든 순간 나는 나의 판단이 어딘가 상당히 잘못되었다는 점을 즉각적으로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읽었던 책인데. 그때의 독서와 지금의 독서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적 격차는 나로 하여금,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같은 책을 완전히 다른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두 번째 읽는 것이니 수월하게 읽히기라도 하겠지. 그런 생각으로 애써 황망함을 타일렀지만, 오히려 처음 읽을 때보다 더욱 힘겹게 더듬더듬 읽어 나가는 스스로의 일관성을 목도하면서 어쩔 수 없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의 내용에 앞서, 독서라는 행위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말이다.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그 많은 생각들을 추슬러 얻은 어렴풋한 결론은, 시간의 격차로부터 유래하는, 나의 내면의 그 무엇이 포함하는 단절이 바로 이 생경함의 원인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그곳에 가만히 있었건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같은 풍경을 동일하게 볼 수 없는 필연적인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좀 더 차분하게, 하지만 오히려 더 절실하게 바라보게 되는.

 

이 책은 『지구영웅전설』(2003), 『카스테라』(2005), 『핑퐁』(2006),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2009), 『더블』(2010)의 작가 박민규의 첫 소설이자, 첫 장편소설로서,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한 남성이 겪게 되는 이야기들을 ‘삼미슈퍼스타즈’라는, 지금은 사라져버린 야구팀을 화두로 하여 이야기 해나가고 있다.

 

야구에 대해 문외한인지라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야구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내가 이야기를 통해 파악한 바로는, 이 팀은 무척 ‘평범한 야구를 했던 팀’이었다. 오히려 이상했던 것은 이 팀이 아니라,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하고, ‘혹독한’ 기준을 스스로와 동료에게 강요했던 사람들로 채워진 이 세상이었다.

 

작가, 혹은 주인공 화자의 마음은 이 평범함과, 프로라는 명사로 대변되는 완벽함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성장한다. 집안의 기대를 받으며 중학교에 입학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나가 교복을 맞춰준다. 고급 엘리트 학생복지를 쓴 교복이었다. 반드시 엘리트가 되어야 한다. 초라한 횟집이 송구스러워 할만큼 진지한 말투로 아버지는 소년에게 꾹꾹 눌러 쓴 대사를 건넨다. 돌아보면 그것은 결국 아닌 프로가 되라는 말에 다름 아니었고 거짓말처럼 약속이라도 한 듯이 대한민국에 프로야구가 출범하게 되면서 바야흐로

 

프로의 시대가 열렸다.

 

자연스럽게, 지역 사람들과 함께, 교우들과 함께, 소년은 연고팀 삼미슈퍼스타즈를 응원하게 된다. 첫 경기를 앞두고 사람들 사이의 화제는 언제나 삼미슈퍼스타즈의 우승 일변도였고, 소년들은 야구장으로 뛰어가 손에 쥐어든 오천원을 내고 삼미슈퍼스타즈의 어린이 팬클럽 회원 자격을 얻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이 본능적으로 추구했던 프로에의 의지였을 것이고, 나아가면 생존에의, 삶에의 의지였을 것이다. 시대는 아무 말 않으면서도, 프로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아주 정확하게 가르쳐주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삼미슈퍼스타즈의 이야기로 저녁 밤 하늘 아래를 채우고, 어린이 팬클럽 회원이 되면서 그들은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본디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은 것. 프로의 세계는 5천 원짜리 어린이 팬클럽 회원권 따위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삼미는 전혀 프로답지 않은 모습을 이어 나갔다. 83년도에 깜짝 연승 행진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다시 그들을 기대에 차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시였을 뿐, 그들은 다시 본래의 모습, 누구보다도 평범한 야구를 하는 그들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실망했고, 다시는 헤어나올 수 없는 좌절과 패배감에 빠져들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언뜻, 태어나서 처음으로

산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구나, 라는 생각을, 나는, 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버지로부터 일장 연설을 들으면서 소년이 했던 생각은 몇 번의 좌절과 극복만 가지고 졸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 따라잡기엔, 세상은 슈퍼맨처럼 빠른 속도로 프로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지막지한 속도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 것도 없는 듯 보였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급류에 몸을 맡긴 채 저 멀리서 전설처럼 빛나고 있는 크립톤 행성, 즉 진정한 프로를 향해 달려나가는 것 뿐이었다.

 

세상을 휩쓴 프로의 바람은, 평범한 것의 기준을 바꿔 놓았고, 부러운 것과 부끄러운 것의 기준을 바꿔 놓았다.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을 깨달은 소년은 프로가 되기 위해, 자신의 소속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계급을 바꾸기 위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길을 선택하고 마침내 아버지가 그토록 바라던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그는 결국 진정한 프로는 될 수 없는 팔자였는지, 그만 운 나쁘게도 세상의 부조리를 목격해 버린다. 합리와 비합리가 제자리를 잃고 부유하는 세상의 정물을 목도하면서 그는 조금 어지러웠을 것이다. 속된 말로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를 기분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문득 만난 첫사랑. 누군가가 가장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은, 그 누군가로부터 가장 아름답게 인식될 때일 것이다. 그렇게 인식되는 그 누군가를 그는 만났다. 하지만 프로의 세상과 싸우다 지쳐버린 그녀는 결국 프로의 세계에 순응하고 그의 곁을 떠나갔다. 끝까지 삼미 슈퍼스타즈를 향한 믿음을 견지하던 친구 역시도 그의 곁을 떠났고, 동시에 그의 청춘이 지나가버렸다. 지금까지의 삶은 그래도 안간힘을 써서 버텨왔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쏜살같은 속도로 그는 프로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어느새 중년이 된다.

 

가뜩이나 끝이 보이지 않는 프로의 세계였다. 프로의 세계에서 인간이 견지해야 할 노력에는 끝이 없었고, 짊어져야 할 책임에도 끝이 없었으며, 겪어야할 고난과 시련에도 끝이 없었다. 제정신을 가지고는 좀처럼 살아가기가 힘든 세상. 비틀거리는 사람들로 거리는 때로 붐볐다. 그런 상황에서도 프로의 세계는 자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태도로 그들의 턱 밑에 IMF라는 선물을 들이댄다. 이를테면,

 

“이거 왜 이래 다 아는 사람끼리”

 

라는 기분으로.

 

한 대, 두 대, 세 대. 거기까지였다.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이라는, 프로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들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건만, 어엿한 중년으로 늙어버린 소년은 결국 진정한 프로가 되지 못한 패배자로 전락해 버렸다. 실직, 아내와의 이혼, 재취업의 희망은 요원하고. 지금까지의 좌절은 맛보기에 불과했다는 듯 깊고 깊은 수렁의 모습을 한 좌절이 몰려왔다.

 

그리고 그 좌절의 끝에서 그는 다시 삼미 슈퍼스타즈를 만나게 된다. 지나친 작위성은 작가에 대한 실망을 불러일으킬만 한 것이었지만, 그것이야 어찌됐든 간에 그를 향해 돌아온 옛 벗과 함께 그는 삼미슈퍼스타즈의 옛 정신을 부활시키는 일상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이 세상을 다시 재구성하는 수준의 일이었다. 노아가 방주에 담을 만물의 종(種)을 찾듯이, 그들은 삼미슈퍼스타즈의 정신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관점의 전환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의 일상을 통해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모종의 자기계발서적들을 떠올리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관점의 전화이 지향하는 바는 우리가 흔히 접해왔던 것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자기계발서들이 진정한 프로가 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계발과, 인내를 강조했다면, 삼미슈퍼스타즈의 야구가 추구하는 곳에는

 

‘쉼’이 있었다.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일하는 삶. 당연한 듯 보이지만, 문득 주위를 둘러보면 그 누구도 당연하게 영위하고 있지 못한 그런 삶이 바로 삼미슈퍼스타즈의 야구가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설득의 변화구라는 생각이다.

 

‘시간은 원래 넘쳐 흐르는 것,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다. 알고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이쯤에서 나는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내가 느꼈던 감정과 조우할 수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온천수 같은 것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씻어내는 기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그런 이유로 잠시나마 매우 상기됐던 것 같고, 또 그래서 머지않아 이내 식어버렸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책을 덮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가 무섭게,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한 채였고, 별로 크지도 않은 내 두 발을 둘 곳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불안

 

프로의 세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생존, 행복, 사랑, 생활, 생식. 인간이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한데 엉켜 뭐라 추스릴 수 없는 거대한 감정으로 방향성도 없이 우리의 삶에 드리워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거기에 추가되는 과욕, 허영, 질투, 시기 등의 감정이 바야흐로 프로의 시대를 탄생시키게 되는 것일 테다.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으로도 정복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마도 정성어릴 어느 작가의 메시지로도 쉽게 극복될 수 없는.

 

그래서 나는,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로부터 적잖이 떨어져 있는 나는 또다시 그의 조언에 설레길 주저하고 있다. 감언이설, 빛 좋은 개살구는 아닐까. 그의 설득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진정한 프로가 되기 위해 정진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현명한 선택은 못하더라도 바보 같은 선택은 피하는 것이 나의 최선은 아닐까. 그때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홈런을 쳤다.

 

그런데 홈런의 주인공을 환호하기는커녕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듯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성의 없이 베이스를 돌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내가 있었다.

 

‘마치 재구성된 지구의 대륙처럼

그 봄의 홈그라운드는 텅 비어 있었다. 이제 그곳에서 무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두근두근했다.‘

 

그래, 두근두근했다. 어이없게도. 다 식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가슴이 미약하게나마 뛰고 있었다. 어찌 보면 바보 같은 야구이건만, 초라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 심장을 가진 존재로서, 미래를 가리키며 불투명한 저것이 싫다고, 두렵다고 외치는 일은 초라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삶이란, 미래란 원래부터 불투명한 것이고, 그래서 심장이 뛰는 존재로서의 우리가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투명하게 미리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무얼 해도 좋을 것만 같은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가 가진 본질인 것이다. 그 누군가가, 혹은 우리 스스로가 짜놓은 프로의 세계에서, 촘촘한 일상의 올에 가려 우리가 잊고 있던 것은 바로 그런 게 아니었을까.

 

공을 던지고, 때로는 배트를 들고, 지치면 편히 쉬리라. 그리고 또다시 좌절에 빠질 땐,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뛰지 않는 심장이 의심될 땐, 이따금 삼미 슈퍼스타즈를 기억하리라. 울고 웃으며, 또 때론 쉬며, 그렇게 평범하게.

 

-끝-








팟캐스트 공든 주식이 무너지랴에서 추천한 주식 관련 책(도서)


SBS 이승훈 PD가 만든 팟캐스트 '공든 주식이 무너지랴'에서는 매 회마다 유익한 주식관련 책들을 추천하고 있다.




-알렉산더 엘더-주식투자 기법
-알렉산더 엘더-심리투자법칙 327.856 ㅇ332ㅅ정


-알렉산더 엘더-나의 트레이딩 룸으로 오라 327.856 ㅇ332




-펫도시-경제적 해자 327.85 ㄷ73ㄱ전





-(일본 주식시장의 신) 고레카와 긴조 327.855 ㄱ337ㄱ강










외딴방

저자
신경숙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1999-12-0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열여섯에서 스무 살까지, 그 시간의 빈터![외딴방]의 문학적 의...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신경숙의 『외딴방』 독후감

-우리의 삶 언젠가 그 외딴방에서 만나리-



4월에는 고추밭을 만든다. 팽팽하게 잡은 줄을 밟으며 비료 배낭을 맨 채로 주억주억 비료를 뿌려나가다 보면 어디선가 불어와 그만 황망스럽게도 그 하얀 분말을 휘저어놓는 바람이 있었다. 5월에는 고추를 심는다. 분업의 묘미가 펼쳐진다. 구멍을 뚫고, 모종을 심고, 물을 주고, 흙을 덮고, 쇠파이프로 고춧대를 박는다. 다시 5월에는 모내기를 한다. 논둑 경사에 늘어놓은 모판을 이앙기에 옮겨 싣는다.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지는 이앙기를 보며 올해는 뜯모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거듭한다. 잔뜩 굽은 외할머니의 등을 눈으로 훔친다. 뜯모하지 말자는 말을 언제, 어떻게 꺼내야 할까. 역정 없이 그녀에게 그 말을 건넬 수 있을까. 그 심정을 읽었는지 웬일로 그녀는 뜯모 없이 하루를 끝낸다. 나는 기분이 좋다. 운수 좋은 한 해가 될 것 같았다. 벌써 절반이나 흘러버렸지만. 일을 마치고 마당에 둘러앉아 솥뚜껑 위에 고기를 구워먹는다. 사위가 저물고, 자손들은 모두 일을 놓았건만 그녀의 팔 다리는 쉴 줄을 모른다. 그제야 마음속에 듬성듬성한 논의 땜빵들이 떠오른다. 자손들이 떠나고 홀로 모를 허리에 차고 잔뜩 굽은 등을 한층 더 굽혀 그 여백을 메워나갈 그녀가 예상된다. 솥뚜껑 밑에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외면이 타들어 간다. 고기를 씹느라 다 같이 입을 모아 다물던 잠깐의 정적에서 집 앞 또랑의 비린내가 난 것 같다.


6월에는 책을 찾는다. 도서관에 갈까 하다 문득 집의 책꽂이로 생각을 돌렸다. 언젠가 집에서 그 책을 본 기억이 났다. 즐겨 읽지는 않아도 책을 즐겨 사는 동생 덕에 언제부턴가 집에는 책이 부쩍 늘었다. 한참을 헤매다 결국 어머니의 방에서 그 책을 찾아냈다.

“그 책은 갑자기 왜?”

거실에서 건성으로 물어오는 동생에게 대충 에둘러 대답을 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몇 개 날아왔다. 감히 인연이라고는 못해도 작지 않은 인상으로는 남아있는 작가였다. 그녀의 글 중에는 큰 감명으로 남은 것이 있었고, 우연히 방문한 교수님 연구실에서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그녀의 책을 본 기억도 있다.


마음잡고 소설책을 펼쳐 든 것이 얼마만인가. 읽으려고는 하는데 책 읽는 자세가 어떤 것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몸도 머리도 모두 잊은 모양이었다. 책상에 앉으면 허리가 아프고, 침대에 누우면 잠이 몰려왔다. 그래도 일전에 읽었던 다른 작품과 겹치는 설정이 많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전의 그녀는 엄마를 부탁해, 라고 말했고, 그 알록달록했던 목소리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전해졌다. 작가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와 『외딴방』은 그 자전적 성격에 있어서 닮았다. 기억인지 허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내미는 문장의 손을 마지못해 잡은 독자들은 어느새 그런 문제 따위야 어찌되든 상관없이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이 책에서 내가 처음으로 부여잡은 키워드는 ‘죄’ 혹은 ‘용서’와 같은 것들이었다. 외면과 직면의 갈림길에서 갈등하는 화자의 마음속에는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동전의 이면에는 용서를 향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그녀로 하여금 이 소설을 쓰게 만든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글을 읽어 나갈수록 모호해지는 것은, 속죄와 용서의 대상이었다. 작중 현재의 화자가 보여주는 끊임없는 혼란과 방황은 어느새 독자로 하여금 이 소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길을 잃어버린 곳에서 다시 만난 단서가 있었다. 이 책의 서사를 대표하는 구체성. 골목, 혹은 외딴방. 책의 어느 귀퉁이에서 나는 “골목”,하고 발음했다가 이내 다시 “시절”로 바꿔 읊조려 보았다. 그 변주가 마음에 들어 마음 속 작은 전율을 숨기며 엷게 미소 지어보는 밤이 있었다. 작가는, 혹은 작가가 다이빙한 화자는 그 골목에 있었다. 그 시절에 있었다.


작가는 1963년생이다. 내 어머니는 그보다 3년 앞선 1960년생이다. 작중에서 열여섯의 화자보다 세 살 많던 열아홉의 외사촌이 바로 내 어머니와 동갑이었을 것이다. ‘시절’을 붙잡으매 자연히 나는 이 이야기를 내 어머니 세대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신문이나 현대사 책이나 다큐멘터리에서 읽고 들을 수 있는 것과는 또 다른 그 시절의 이야기로 말이다.


작가의 책들 중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의 공통점은 자전적이라는 것,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족이라는 존재들을 품고 그들과 함께 살아온 시절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인 것 같다. 아마도 그녀에게는 오빠가 셋. 큰 오빠, 작은 오빠, 셋째 오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태어나고 여동생이 하나 태어 난 후, 마지막으로 막내아들이 태어났지 않을까 한다. 그렇게 육남매 중 넷째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부단히도 녹여낸 그녀의 글 속에서 나는 편안하고 안락하다. 무슨 사건이 일어나든, 어떤 역경이 닥치든 부모 형제라는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마치 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점에서 그녀의 글을 읽을 때면 때로 어머니 배에 귀를 붙였을 때 들리던 물 흐르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도 같다.





오십 오년여전 내 어머니 태어난다. 그 해가 1960년이리라는 확신은 없다. 그 해가 아니리라고 생각하는 게 더 합리적일 것이다. 혹 죽어버릴까봐 아니면 혹 너무 바빠서 출생신고를 천천히 하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실제로 내 아버지는 출생신고를 이 년이나 늦게 하지 않았던가. 어머니의 부모는 충청도 시골의 농군이었다. 갓난 어머니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당신의 부모가 땅 파먹는 농부라는 사실을, 오십 여년이 흘러 지독하게 허리가 굽어 하염없이 땅에 붙어가게 되리라는 것을. 하지만 그녀의 아래로 큰삼촌이, 이모가, 작은 삼촌이 큼직큼직한 터울을 두고 태어나게 되고, 어린 동생들을 업어 보살피거나, 소 풀 뜯기는 일로 유년시절을 보내는 동안 이미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으리라. 당신의 부모가 가난한 농사꾼이라는 사실을.


사실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하거나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이 소설에 나오는 집과 엇비슷했을 것이다. 딸들은 몰라도 아들들은 어떻게든 뒷바라지를 해서 도시에 있는 대학에 보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중 화자의 어머니와 나의 외할머니의 성격 차이는 작가와 내 어머니의 삶에 적지 않은 차이를 만든 것 같다. 화자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농사일을 시키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 귀하게 키워 공부시키고 싶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 몰라도, 나의 외할머니는 자식들을 철저히 농사에 동원했다. 공부는 핑계가 될 수 없었다. 학교가 끝나면 소 풀을 뜯겨야 한다. 가장 싫은 건 돌이다. 뒷산 밭에는 돌이 자란다. 한 해 열심히 던져내도, 이듬해 봄에 다시 밭을 갈면 누가 돌을 갖다 부은 것 마냥 새로운 돌이 수북이 돋아나 있었다. 꿀꺽, 힘들게 삼키는 불평과 불만. 하지만 중학생이 된 내 어머니 뒷산 밭의 돌은 애교에 불과했다는 것 깨닫게 된다. 새로 사들인 언덕 너머 밭은 흙보다 돌이 더 많은 것 같다. 이쯤 되면 우직한 어머니의 입에서도 불평과 불만이 새어나온다. 하지만 나의 외할머니 아랑곳 않고 돌을 주워낸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몇 십 년 뒤에 손가락이 돌아가 걷잡을 수 없이 뒤틀릴 줄도 모르고.


다른 성품의 어머니를 두었다는 사실이, 넷째가 아니라 첫째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화자와 나의 어머니로 하여금 다른 모습의 유년시절을 살아가게 만든다. 그나마 두 사람의 삶의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학창시절에 들어가서부터다. 중학교를 졸업한 화자는 큰 오빠를 따라 서울로 가서 공장에 들어가고, 산업체특별학급에 입학한다. 그렇게 그녀는 외딴방에 들어간다. 내 어머니는 아직 외딴방을 만나지 못했다. 열일곱의 어머니, 고등학교에 들어간다.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농사일과 어린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하다. 학교는 언제나 멀었다. 그나마 가깝던 초등학교도 편도로 한 시간이 걸렸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부터는 10Km 정도 떨어진 읍내까지 나가야 했다. 교복을 입은 내 어머니, 삼십분을 걸어 나와 버스를 탄다. 그래도 버스가 있어 다행인데,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야간자율학습이 문제였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학교를 나서면 집으로 가는 버스는 이미 끊겨버렸다. 하는 수 없이 방향이 같은 친구들과 함께 길을 잡는다. 가로등도 없는 어두컴컴한 밤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소녀들이 있다. 산허리 사이로 굽은 길을 돌아 마을이 하나 나올 때마다 친구들이 하나 둘 떠나간다. 하필이면 어머니의 집이 가장 마지막이다. 혼자가 되어 한 시간은 더 걸어야한다. 혼자가 되어 만나는 마을 앞의 다리. 언젠가 누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밤이 되면 그 다리 밑에서 모래귀신이 모래를 뿌린다고. 다리를 건너갈 때는 등골이 잔뜩 오싹해진다. 그렇게 세 시간을 걸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게 어머니의 학창시절이었다. 하지만 화자의 학창시절 역시 내 어머니 못지않았다. 아니 오히려 화자의 그것이 내 어머니의 것보다 더 괴로웠으리라는 생각이다. 그래도 부모 곁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까. 화자는 부모의 곁을 떠나 이역만리 타지에서 살림을 하고, 공장에 다니면서 밤에는 학교에 갔다. 그곳이 서울이라 교통편이 좋았다는 점을 빼면 그 삶이 내 어머니의 것보다 좋았으리라고는 차마 말 할 수 없을 것 같다.


고교졸업을 앞 둔 어머니, 시도 때도 없이 초조하다. 가난한 시골 여학생들은 대부분 대학진학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가난해서, 혹은 성적이 나빠서, 혹은 생각이 없어서. 매난국죽 사군자의 이름을 따서 나눈 네 개 학급을 통틀어도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몇 없다. 하지만 열아홉의 내 어머니, 대학에 가고 싶다. 밭에서 돌을 주워내는 일에 대한 불만처럼, 어머니의 마음속에 대학진학의 욕망이 꿈틀거린다. 꿈틀거리다 스멀스멀 입 밖으로 나온다. 밭 매는 외할머니 곁에서 슬쩍, 외할아버지 밥상에 저녁을 차리면서 슬쩍. 그런 어머니의 소망을 외할머니는 단칼에 잘라버린다.

“지금 니 동생들이 저렇게 어리고 집 안 사정이 영 그렇게 못하는 걸 뻔히 알 것인디 너 워째 그런 말을 하냐. 그런 생각 일찌감치 포기햐!”

속상한 어머니, 우직한 성품을 소리 죽여 울다 잠드는 데 써버린다. 선잠 든 어머니, 잠결에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에게 하는 말을 듣는다.

“살림이 어려워도 어찌 영미는 공부를 해고 싶어 하니께 대학에 보내줍시다.”

곧바로 또다시 외할머니의 호통이 돌아온다.

“아이고 영미 아버지 암만 마음이 좋고 생각이 없어도 어찌 그럽니까. 무슨 돈이 있어 핵교에 보낼 것이며, 쟈 없이 집안일을 어찌 감당할 것이며, 거기다 호연이도 몇 년 있으면 이제 고등핵교 가야 할 것인디.”

외할머니의 호통에 어머니는 그만 움찔하여 깨어있는 사실을 들킨 뻔 한다. 말라버린 줄만 알았던 눈물이 다시 흐른다. 그렇게 말해주는 외할아버지가 고맙고, 또 그만큼 외할머니가 원망스럽다. 어머니, 며칠 뒤 다시 용기를 낸다. 아궁이 앞에서 불을 지피는 할머니에게 다시 대학 얘길 꺼낸다. 화가 난 외할머니, 부지깽이를 들고 뛰쳐나온다. 성화에 놀란 어머니 도망을 친다. 외할머니가 던진 부지깽이가 하필이면 원망스럽게도 어머니의 뒤통수에 명중한다. 그 뒤로 어머니, 다시는 대학에 가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어머니는 무엇이 되고 싶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시와 서예를 좋아했으니 국문과에라도 가려했던 것일까. 신앙이 깊어 마을 교회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즐겨했으니 신학대학에 가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저 ‘대학’이라는 곳에 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곳에서 무슨 일을 겪고 또 무엇을 배우게 되더라도 대학에 가야만 당신의 인생이 숙명의 유수에 휘말려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슴푸레하게나마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어머니, 도시로 나가 공장에 들어간다. 공단에 있는 LG산전에서 기숙사에 지내며 누전차단기 따위의 품질검사를 맡는다.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고, 일은 어렵지 않았고, 즐거웠다, 고 기억되는 시절이었나 보다. 비록 대학에 가지는 못했지만 어머니의 공순이 생활은, 화자의 그것보다는 훨씬 더 유복했던 모양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을 신봉했기에 노조와 사주 측의 싸움에 끼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일도 없었던 모양이고, 민주화운동의 열기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나날들이었던 모양이다. 생각하기로는, 무엇보다 농사일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가장 행복하지 않았을까. 어머니의 시절 속에서도 그 해 여름 광주에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텐데도 말이다. 서울보다 가까운 청주였을 테지만, 되레 소식은 더 늦었고, 간신히 소식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잔뜩 희미해져 있었다.


어머니가 3년의 공장생활을 청산하게 된 계기는 큰삼촌이었다. 큰삼촌이 청주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면서 큰삼촌과 함께 방을 얻어 살게 된 것이었다. 내 나름대로는 그것을 내 어머니의 외딴방이라고 부르고 싶다. 삶이 시절과 함께 숙명의 유수에 대책 없이 휩쓸려가는 것을 손 놓고 바라봐야 이들의 안식처. 혹은 디딤돌. 공장 기숙사에서 나온 어머니는 큰삼촌 뒷바라지를 하면서 출판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이름 들녘. 전집 팜플렛을 든 어머니, 도시를 활보한다.

“힘들긴 했어도 공장 일보다는 성취감이 있었어. 공장일은 단순하고 쉬웠지만 영 성취감이 없었거든.”

저녁 식탁에 앉아 고교졸업 이후의 삶에 대해 묻는 나의 질문에 대답하던 어머니는 그렇게 회고했다. 그렇게 어머니가 성취감 있는 일을 만났을 때 쯤, 화자는 희재 언니의 죽음을 경험했던 것은 아닐까.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거창하게 부르기엔 비겁하고, 온전한 나의 책임으로 짊어지기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경험. 언제, 어떤 모양으로, 어떤 계기로 용서와 속죄를 받아야 할지 결코 알 수 없어 헤어날 수 없는 미로의 문양을 삶에 오롯이 새긴 채 화자는 살아간다.


아마도 5공 시절. 작중 화자의 노트를 펼쳐본 여자가 영부인이었던 시절의 어머니는 그런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독재자가 떠나고 또 다른 독재자가 독재를 하는 세상에서, 그래도 하루가 다르게 눈부시게 세상이 발전해 나가던 80년대의 한복판에서, 큰삼촌은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공부를 썩 잘했던 큰삼촌은 서울에 있는 사립 대학교에 들어갔다. “등록금 돈다발을 들고 뒤도 안 돌아보고 집을 나가더라.”고 회상했던 것은 아마도 이모였던 것 같다. 무엇이 그렇게 분했을까. 서울을 목격한 큰삼촌은 서울의 그 무엇을 보고, 그와는 너무 동떨어진 집과 가족들에 대해 답답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경제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사상적으로든.


큰삼촌을 졸업시킨 어머니, 이제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공무원을 원했다. 안정적인 수입을 가진 남편을 두고 싶어 했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던 아버지가 어머니의 남편이 되었다. 두 사람은 고졸이라는 점에서 닮았고, 어떻게 해서든 대학에 가야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 때 나 좋다고 죽자 살자 따라다니던 남자가 있었는데 그 남자 말고 니네 아빠 같이 재미없는 남자랑 결혼한 게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지.”

어머니는 도시 생활을 접고 다시 시골로 내려온다. 외딴방을 떠나 신혼집으로 들어간다. 결혼이라는 사건을 통해 어머니의 외딴방은 영원히 문이 닫힌다. 그토록 공무원 남편을 원했던 것은 외딴방에서 벗어나 숙명의 유수에서 헤엄쳐 나올 가장 확실하고도 현실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아니었을까. 그곳에서, 그 골목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 무슨 일을 겪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묻지도 않는다. 물어봐도 어머니는 딱히 할 말이 없어 보였다. 감추려는 게 아니라 설명해낼 수 없는 무엇인가로 채워진 시절인 듯했다. 외딴방이라는 것은 그런 시절들로 똘똘 뭉친 공간이 아닐까. 힘들고 괴로워 그것을 품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어 무의식적으로 잊으려 하다 보니 시간이 흘러 다시 꺼내보려 손을 집어넣어도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화자도 그런 어려움을 고백한다.


결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작은 월세방에서 내가 태어난다. 몇 년 뒤, 동생에 태어난다. 아버지의 잦은 전근 때문에 우리는 이사를 자주 다녔다. 내 나이 일곱 살, 우리 집이 생겼다. 월세방을 전전하던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가 생겼다. 정원이 딸린 주택이었다. 정원에 있는 감나무가 나는 참 마음에 들었다. 잘 찢어져 그렇게 위험한 나무인 줄도 모르고 나는 툭하면 그 나무에 올랐다. 그 나무 위에서 책도 읽고 밥도 먹었다. 어디서인지는 몰라도 분명 책에서 본 모양이다. 학교가 가까운 집이었다. 걸어서 2분이면 닿는 초등학교에 들어간 나, 100점 맞은 받아쓰기를 들고, 때로는 학업상장을 들고 초록색 대문으로 뛰어 들어간다.


3년 뒤, 아버지의 전근으로 우리 가족은 청주로 이사한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청주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방송통신대를 병행했고, 도시로 나온 어머니는 다시 일을 시작한다. 집에는 어린 동생과 내가 남는다. 나는 이것을 나와 동생의 외딴방이라고 하고 싶다. 초등학교 3학년의 나, 조숙하고 씩씩하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잘 자라야 한다고 늘 다짐한다. 이제 갓 유치원을 졸업한 여동생은 언제나 엄마를 찾는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가 맞아주는 집을 늘 그리워한다. 하지만 이제 한참을 걸어서 돌아온 집에는 엄마 대신 상보가 씌워진 밥상과 그 주변을 맴도는 바퀴벌레들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동생은 자주 울었다. 아직 어린 나, 이상한 변덕이 생긴다. 때로 동생을 잘 챙기다가도 그녀가 한없이 귀찮아진다. 오빠가 되어 동생을 잘 돌봐야 한다는 말에 수긍하면서도 때로는 그 모든 게 지긋지긋하게 느껴진다. 작중에서의 큰 오빠도 그런 생각이었을까. 돈을 벌면서 공부를 하고 동생들 뒷바라지까지 해야 하는 그라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 뒤돌아보면 나의 경우는 철이 없었다. 그 시절의 그 집을 외딴방으로 부르자니 어쩐지 조금은 부끄럽다.


초등학교 4학년, 아버지는 일본으로 장기 연수를 가고, 어머니는 야간대학에 들어간다. 부모님 없이 지내는 일에 이골이 난 나도 조금은 걱정이 되는데, 동생의 얼굴은 아예 사색이 되어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심심함이었다. 바퀴벌레 득실대는 집에서 나와 동생은 끊임없이 장난을 연구했다. 조금만 뛰어 놀면 아래층 아주머니가 득달 같이 뛰어올라와 초인종을 눌러댔다. 불장난과 물장난. 아파트 뒤뜰을 태워먹기도 했고, 방안을 물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시간이 가지 않는 게 가장 힘겨웠다. 부모님이 돌아올 시간이 어서 왔으면 했다. 집을 어지럽혔다고 혼이 나더라도 부모님이 돌아와야 했다.


어느 날엔가는 밤이 깊어도 어머니가 돌아오질 않는다. 열한 살의 나, 불안해하는 동생을 간신히 달래 재우고 옆방으로 간다. 곰팡이 냄새 나는 벽과 옷장의 틈을 찾아 몸을 끼운다.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는다. 온갖 나쁜 상상들이 찾아온다. 젖어오는 눈알이 얼얼해지도록 얼굴을 무릎에 힘주어 붙이다 잠이 든다. 현관문 소리에 잠이 깬다. 움직이려 하지만 몸이 굳어 자세가 풀리지 않는다. 내 이름을 부르며 좁은 집을 헤매던 엄마가 방문을 연다. 서러운 나, 말이 아니라 동물의 울음소리와 같은 것으로 인기척을 낸다. 그제야 나를 찾아 미안한 웃음으로 달려드는 어머니의 얼굴에 나는 왈칵 울음이 터진다. 그 날도 그렇게 그 힘겹고 지루한 외딴방의 문이 닫힌다.


화자의 말처럼,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외딴방이 그곳에 있었다. 제 아무리 사정이 나았다 한들,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것 같은 외딴방과 같은 시공을 한 번쯤은 겪어볼만한 것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비전, 희망, 도전, 청춘, 실존, 의지와 같은 단어들이 작가의 고백 앞에서 힘을 잃고 털썩 무릎을 꿇는 광경을 목격한 기분이다. 긍정이 아닌, 속죄와 정리의 심정으로 임하려하면 어김없이 직면하는 물음. 시대인가 주체인가.


2014년 6월 4일의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외갓집에 갔었다. 모내기를 마치고 고기를 사기 위해 읍내에 갔는데, 온통 붉은 현수막 천지다. 그러고 보니 지난 대통령 선거 때도 비슷한 풍경이었던 기억이다. 아마도 옆 마을이 故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는 옥천일 것이다. 40여 년 전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그녀가 피살됐을 때, 몇 년 뒤 그녀의 남편이 역시 피살됐을 때 작중의 화자는 울었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내 어머니도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런 경험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시대상을 작가는 외딴방 속에 포함시켰다. 그 역시 속죄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긍부정의 경계에서 괜한 발로 죄 없는 운동장의 흙을 파게 만드는 일이 되는 것일까.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 없이 많은 말을 외치지만 무엇 하나 바뀌는 것이 없어 그들이 외친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되는 시절인 것 같다. 어쩌면 화자와 내 어머니와 나의 외딴방은, 나아가 이 세상의 외딴방은 아직 끝나지 않고 영원히 끝나지 않아 결국 다시 언젠가 그 어느 지점에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의 외딴방은 그런 것이었다고 고백하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20대가 된 나, 바란다. 그때 그 어느 날 만나서 듣게 되고 마주하게 되는 당신의 외딴방이 조금이라도 덜 아팠기를. 그 속죄에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끝-










해마, 날다 - 2011년 제12회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

저자
윤고은 지음
출판사
문학의숲 | 2011-08-2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제12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 윤고은의 [해마, 날다]. 개연성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1.윤고은-해마 날다

그녀 답게 탁월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가상의 직업. 취업, 외로움. 거기에 익숙해진 인간들


2.윤고은-Q

돈이 없어서 재개발 도시를 전전하는 작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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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떠오른 이름 경은. 잊고 있던 캠퍼스 시절, 지독했던 가난의 과거.


4.김서령-어디로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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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김숨-막차

며느리의 임종을 지키러 가는 길. 가난. 아들에게 제대로 지원을 해주지 못했으니 며느리에게서 대접을 받지 못했다.

텅빈 버스. 잃어버린 남편


6.손홍규-마르꼐스주의자의 사전

사전을 먹는 남자. 그 모든 있을 수 없는 더러운 단어들이 사전 속에 있었던.

좌절

쓸려갈 수도 없던 삶

투쟁에 속하지 못한 남자의 죄책감


7.윤성희-눈사람

금고업자.가난.도둑질.유령.후회


8.정미경-파견근무

고향으로 파견된 판사. 도박중독.쌰바쌰바.저들끼리 붙어먹는 바닥.

누명을 쓴 남자. 딸아이의 증언.

가정불화, 권태, 탈출구, 타협


9.전아리-플러스마이너스

소년과 소녀. 소녀의 삶을 철저히 유린하는 소년.

바보 같이 늘 당하는 소녀.

똥 먹었네.

살인자, 악마,죄책감,양심

끝끝내 양심을 외면하는 소년


10.한지수-열대야에서 온 무지개

태국신부. 남편의 첫사랑. 자신의 첫사랑

국내산과 한우. 다문화 정책의 모순. 과연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해"

"한우를 낳고 싶어요."


11.성석제-론도

자동차 사고. 보험. 할증. 카센터.

"돌고도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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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의 책장에 꽂혀있던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다. 이 아이는 책은 좋아한답시고 좋은 책들은 참 잘 사들이는데(그만큼 쓰레기 같은 책들도 적잖이 사들인다.) 도무지 읽질 않는 모양이다. 하여간 나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드디어 읽었다.


정확히 말해서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집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어느 중산층 집안이 있다. 그 집의 가장이던 아버지는 어찌된 일인지 빚을 잔뜩 지게 되었다. 장남인 그레고르는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서 채권자인 옷감회사 사장에게 고용되어 여기저기 여행을 하듯 떠돌아야 하는 영업사원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 나날은 실로 고달픈 것이었다. 피곤에 찌들어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잠에서 깬 그레고르는 자신이 해충이 되어버린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실로 기괴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의외로 그는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자신이 왜 해충이 된 것인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보다, 그가 정작 걱정하는 것은 출근에 늦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해충이 되었다는 사실보다는 자신이 늦잠을 자서 지각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벌레가 된 몸으로라도 출근을 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가족들이 목격하면 그들이 충격을 받게 될 것을 걱정하여 혼자만의 힘으로 그 상황을 타개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한 시간 두 시간 그의 출근은 늦어졌다. 출근하지 않은 그 때문에 회사의 지배인이 집을 방문했다. 지배인의 등장에 가족들은 발발 동동 구르며 어찌할 줄을 몰라한다.


잠긴 방문 앞에서 가족들과 지배인은 어서 나오라고 그를 타이른다. 지루한 줄다리기 끝에 드디어 그가 문을 열었다. 물론 손이 아니라 주둥이 같은 것을 이용해서였다. 벌레가 되었지만 아직 인간이라는 자각이 남아 있어서 벌레의 다리로 직립을 했다. 열린 문 너머로 다리를 후들거리며 서있는 벌레 그레고르를 바라본 가족들과 지배인은 경악했다. 지배인은 정신 없이 도망쳤다. 가족들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둘러 문을 닫아버렸다. 벌레가 된 그를 위하는 것은 여동생 그레테였다. 그녀는 오빠를 위해서 먹을 것을 갖다 바쳤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인간들이 먹는 음식에는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벌레들이 좋아하는,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음식에 식욕을 느꼈다. 얼마간 그는 그런 음식들을 탐닉했다.





집안의 주 수입원이었던 그레고르가 해고되면서 가세는 기우는 듯 했다. 하지만 그의 빈자리에 가족들은 알아서 살 길을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그리고 여동생은 그녀대로 일을 찾았다. 그리고 하숙인도 들였다. 변한 것은 오직 그 뿐이었다. 그는 벌레로 변신해버렸지만, 이 이야기를 가장 잔인하게 만드는 것은 아들이 벌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별 무리없이 돌아가는 그 가족들의 모습이었다. 대체 그들에게 아들이란, 오빠란 어떤 존재였을까? 그저 돈을 벌어오는 존재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렇게 그레고르가 결여된 일상이 이어지자 가족들은 점차 그를 잊어가기 시작했다. 그레고르 본인 조차도 그런 일상에 익숙해져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완전히 집에 기생하는 어엿한 벌레로 자리잡게 되었다. 처음에 가족들은 그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방의 가구를 꺼내주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거꾸로 각종 잡동사니를 그 방에 쳐넣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그에게 해주는 것은 먹이를 주는 것과, 저녁 식사 즈음에 가족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도록 그의 방문을 열어주는 일이었다. 그레고르는 천천히 죽어갔다. 어찌된 일인지 그는 더이상 먹질 않았다. 그가 있어야할 행복이 먼발치에 있었건만, 그는 감히 자신의 방문턱을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사건이 일어났다. 하숙생들의 식사자리에서 여동생 그레테가 멋지게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을 때, 그레고르는 그 아름다운 소리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방 바깥으로 나와버렸다. 마찬가지로 연주에 심취했던 사람들은 그레고르가 바로 코앞까지 접근했을 때에야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경악했다. 가족들은 놀라서 그를 위협했다. 그레고르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천천히 그 어두운 방으로 돌아갔다. 그것이 그레고르가 한 마지막 일이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레고르는 숨을 거둔다. 가족들에게는, 늙은 파출부에게는 그것은 그저 골치 아픈 벌레가 죽은 것에 불과했다. 가족들은 슬퍼하는 대신 홀가분한 마음을 나누었다. 벌레 문제로 따져묻는 하숙생들을 쿨하게 내친 그들은 각자의 고용주에게 제출할 결근계를 작성하고는 나들이를 떠난다.


씁쓸하다는 말로 이 이야기가 주는 감상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약 100년 전에 쓰여진 것이었다. 나에게는 이 이야기가 자본주의의 병폐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대놓고 침범하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으로 읽혔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자본주의의 폭풍 속을 힘겹게 걸어가는 현대인들에게 이 이야기는 여전히 유의미하게 다가온다. 적지 않은 시간 뒤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대체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변명하자면 그것은 남은 자들이 외면할 수 없는 삶에의 의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이 도덕적 죄의식을 면제받기엔, 그렇게 도태되는 그레고르 같은 인물들이 가지는 삶의 의지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는가. 슬픈 일이다. 이 이야기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은 대체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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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창비 장편 연재소설 - [소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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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 창비 장편 연재소설 - [길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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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시골의 고시원에 살 때 창비 블로그에 그가 연재를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반가웠더랬다. 그의 새로운 소설을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매우 반가워 했드랬다. 그냥 반가워만 했드랬다. 어찌된 일인지 나는 결국 그의 연재 소설을 읽지 못했다. 귀차니즘? 책에 대한 거부? 어린 시절엔 남들 다 들어봤다던 문학소년 소리도 몇 번인가 들어봤는데. 그래서 나는 부지불식간에 내가 책과 매우 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이제는 정말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고, 인트로만 읽어봤던 기억으로 작가는 이 작품을 <부기 나이트>라는 영화를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 문장을 읽은 나는 영화 <부기 나이트>를 찾아봤지만 당시에는 당장 찾을 수가 없었다. 1997년에 나온 영화였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나는 그 영화를 발견했고, 쟁여두었다. 한참을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오늘 드디어 밀린 숙제를 하듯이, 이미 졸업해버린 학년의 연습문제를 풀어보듯이 그 영화를 봤다. 그리고 작가가 그랬듯이, 독자로서의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이 소설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제라도 다시 생각이 나서 이렇게 챙겨둔다. 현재는 145회인가에서 연재가 중단된 상태다. 2014년 3월 3일부터 다시 연재를 할 것이라고 작년 여름인가에 작가는 말을 했었다. 그런 일이 가능하구나, 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단편 하나도 몰아서 쓰지 않으면 호흡이 뚝뚝 끊겨버리는데, 장편을 그렇게 쓸 수 있는 것이구나, 라고 나는 생각했다.











더블 세트

저자
박민규 지음
출판사
창비 | 2010-11-1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책소개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박민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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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의 《근처》 독후감

목차

1.소개

2.줄거리

3.구성과 문체

4.근처

(1)객관주의와 삶의 확신에 대한 반기

(2)염세주의

(3)삶에의 의지

5.맺는말: 우리의 삶이란


1.소개

이 글은 2009년 황순원 문학상을 수상한 박민규 작가의 《근처》를 읽고 작성한 독후감이다. 이 작품은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과, 박민규 작가의 단편소설집 『더블』에 수록되어 있다.

작가 박민규는 1968년 울산에서 태어났으며,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장편소설 《지구영웅전설》로 2003년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곧이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제8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 일약 주목받는 작가가 된다. 《카스테라》로 2005년 제23회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했으며, 장편소설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핑퐁]]》이 있다. 2007년 〈누런 강 배 한 척〉으로 제8회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10년 〈아침의 문〉으로 제34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2.줄거리

주인공 정호연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었다. 아버지는 그를 숙부(작은 아버지)네에 맡기고 일본으로 떠난 뒤 연락이 두절되었다. 숙부네 집은 청산도였다. 청산도는 전라남도 완도군에 속한 섬이며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와 KBS 드라마 《봄의 왈츠》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숙부네 집은 청산도 청산리에서도 모북리였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호기, 동구, 도형, 순임이라는 네 명의 친구를 사귀게 된다. 하지만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주인공은 도시에 있는 학교로 진학을 했고, 그와 친구들은 초등학교 운동장에 타임캡슐을 묻게 된다. 유복한 숙부의 지원으로 주인공은 친구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대학까지 나와서 서울에 있는 회사에 들어가 기획 업무를 맡으며 살아간다. 규칙적으로 참 바쁘게 산 나머지 결혼도 하지 못했다. 그런 삶의 어느 시점에, 마흔둘이라는 나이에 그는 간암 선고를 받았다. 말기암이었다. 순식간에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이 되었다. 수술은 소용이 없을 것이고, 항암치료를 할 것인지 아니면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지의 선택지 중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회사에 사표를 제출한 그는 청산도로 돌아왔다. 그 동안의 삶이 일단락된 마당에 돌아갈 곳을 생각하니 그곳밖에는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그리고 우연히 다시 친구들과 만나게 된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요양을 하며 살았다. 말이 요양이지 죽음이 찾아올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나날이었다. 어느 날 그는 어린 시절에 묻어놓은 타임캡슐이 떠올라서 이제는 폐교가 되어버린 학교의 운동장을 찾았다. 그는 땅을 파서 타임캡슐을 캐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묻어놓은 것을 마흔두 살의 나이에 다시 찾았으니 정확히 30년 만이었다. 그 속에는 아직 어렸던 그와 친구들이 소중히 간직했던 보물들이 들어있었다. 호연은 나침반을 묻었다. 플루타아크 영웅전과 나침반 중에서 고민하던 그는 결국 나침반을 묻기로 결정했었다. 친구 호기는 매미의 허물을 묻었다. 동구는 동전을, 순임을 꽃을 묻었고, 말이 어눌한 도형은 순임이와 결혼할 것이라는 다짐을 적은 엽서를 묻었다. 잠시, 주인공의 인격에 어린 시절의 자아와 현재의 자아가 겹쳤다.

얼마 뒤에 그는 호기의 식당에서 친구들 모두와 함께 술을 마셨다. 오랜만에 왁자지껄 회포를 풀었다. 식당주인인 호기와 동기는 술에 취해 골아 떨어졌고, 도형은 대리운전을 불러 혼자 돌아갔다. 순임과 도형은 가는 방향이 같을 텐데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하는 수없이 주인공 호연은 순임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바래다준다. 그리고 며칠간 그저 그런 날들을 보냈다. 검사를 받으러 서울을 다녀오고, 호기의 식당에 들어서 밥을 먹고 잡담을 나누고, 책을 읽고 사색을 하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삶에 순임이 삽입되기 시작한다. 무작정 한 번 찾아왔다던 그녀는 이후로도 자주 찾아오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마치 연인사이처럼 지내기 시작했다. 호연은 잠시 가정을 이룬 듯한 느낌을 경험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눈을 조심했지만 두 사람의 만남들은 곧 다른 친구들의 귀에 들어갔고, 호기·동구·도형은 그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렇게 또 남자들끼리 모인 술자리에서 주인공 호연은 도형으로부터 타임캡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도형은 자신도 학교 운동장에 묻혀있던 타임캡슐을 파냈다고 말했다. 도형이 파냈다가 다시 묻은 타임캡슐을 자신이 다시 파낸 것인 모양이라고 호연은 생각했지만 도형은 그것을 다시 묻지는 않았다고 했다. 호연은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파낸 타임캡슐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어서 도형은 자신이 타임캡슐 속에서 발견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호연이 타임캡슐에 묻어 놓은 것은 군용 나침반이 아니라 플루타아크 영웅전이었다. 그 말을 들은 호연은 집에 오자마자 자신이 발견한 타임캡슐을 확인했다. 자신이 타임캡슐에 넣은 것은 분명히 나침반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도형이 묻은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호연은 혼란에 빠졌고, 며칠 동안 심하게 앓았다.

그가 앓아누운 사이에 순임이 그를 찾아왔다. 그녀의 전화에 그가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동침했다. 이불 속에서 순임은 타임캡슐 이야기를 했다. 호연이 찾아낸 타임캡슐 속에 들어있는 어린 순임의 보물은 ‘꽃’이었지만, 순임은 자신이 타임캡슐에 넣은 것은 호연을 짝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편지였다고 말했다. 도형의 말과 마찬가지로 호연 자신의 경험과 괴리를 일으키는 말이었지만 한 번의 경악을 겪은 후였기에 호연은 전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걸 목적으로 접근한 건가 싶어 할만도 하건만 그는 덤덤하게 대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마루에 앉아있었다. 그는 펼친 책 속에서 일전에 순임이 찍어준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속에서 자신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있었던 곳과 자신이 가야할 곳에 대해 자문했다. 그리고 그 곳은 아마도 이 ‘근처’일 것이라고 대답했다.



3.구성과 문체

이 작품은 타임캡슐을 묻은 때로부터 30년이 흐른 마흔두 살의 화자의 시점에서 고향에 내려온 며칠 동안의 일상을 그리면서 틈틈이 그 간에 일어난 일들과 그의 삶이 이렇게 전개된 사연에 대하여 돌이켜보고 설명하고 있다.

문체를 보면 과연 박민규의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탁월한 비유와 언어의 유희가 곳곳에서 쉴 틈 없이 이루어진다. 단절된 시간을 해안선에 비유하고, 금속상자의 녹을 시간에 비유하며, 달빛을 밥값으로 비유하고, 끓인 물은 삶에 비유하고, 아버지가 자신을 버린 것을 인수인계에 비유하고, 지난 세월을 에버랜드에 비유하고, 고통을 숲에 비유하고, 하는 등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비유와 언어의 유희가 향연을 벌이고 있다는 인상이다.

다만 작품의 스토리가 처음부터 시한부 인생을 일찌감치 밝히면서 시작을 하고 있는 만큼 그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할 때 유머의 요소는 비교적 박하게 사용된 것 같다. 유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말을 더듬는 도형을 묘사하는 부분이 가장 대표적인 것 같다.



4.근처

(1)객관주의와 삶의 확신에 대한 반기

나는 이 소설을 작가의 단편소설집 『더블』에 수록된 첫 작품으로 만났다. 책의 첫머리에 수록된 소설이어서 가벼울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그 분위기가 무겁고, 거기에 함의된 의미도 범상치 않아서 두세 번을 읽고 나서야 이 소설이 말하고 있는 바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가 있었다.

흔히 서른이라는 나이를 마주하게 되면, 그리고 삼십대라는 나이를 공유하는 사이가 되노라면, “서른이 되면 삶이 제법 또렷하고 분명해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삶은 여전히 흐릿하더라.”라는 말에 공감을 할 수 있게 될 가능성이 커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모종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끝 어딘가에는 우리가 도달하게 될 종착지가 있지 않을까 하고 자연스럽게 짐작해 보는 것이다. 그것은 행복에 대한 희구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존재의 불안에 대한 촘촘한 자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언급되는 ‘근처’라는 상징은 현대인이 살아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상정하게 되는 모종의 목적지에 대한 관념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걸 이룬다면 삶은 확연히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거짓말처럼 삶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생의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고백을 하지만, 우스꽝스럽게도 또 거짓말처럼 우리는 그러한 고백을 망각한 채로 다시 어떤 목표와 목적지를 향해서 달려간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이 그러한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하고 안도감을 느끼다가 머지않아 다시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그러한 망각과 달성과 상실 사이에 존재하는 암묵적 서사를 다루고 있다.


나 많이 늙었지? 문득 얼굴을 숙인 순임이 물었다. 글쎄, 하고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나이 든 소녀를 위한 마땅한 표현이 나는 떠오르지 않았다. 늙었다, 와는 다른, 그러나 늙었다 근처의 그 어떤.

이념형(이데아/이상형)을 완전히 충족하는 인간은 없다. 모든 인간은 결국 자신의 근처를 배회하는 존재일 뿐이다.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든,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인간은 그 어느 지점에도 정확하게 도달할 수가 없다. 그저 그 존재의 근처를 맴돌 뿐이다. 마치 천로역정과도 같이 말이다. 그렇게 헤매다가 사는 삶을 허무하다고 할 것인지 아니면 혹 다르게 표현할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다. 그저 인간의 삶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것은 우리에게 묵직한 무게로 다가온다.




(2)염세주의

온몸을 파닥이던 붕어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그 몸부림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다. 고통과 진통, 투약과 불면... 스스로의 혈관을 찾아 링거를 꽂는 일상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살아 있는 내 모습을 기억하고 싶다. 바람이 분다. 나는 지금 숨을 쉬고 있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을 만큼 담담한 모습이겠지만, 더없이 풍만한 감정으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다.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마음으로 연두와 초록, 노랑의 저 색채를 음미하고 기억하려 한다. 모든 물감을 섞으면 검정이 되듯 소소한 삶의 순간들도 결국 죽음으로 물들게 될 것이다. 물이 흐른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폭이 넓고 깊은 삶이 흐르고 있다. 나는 기쁘고, 기쁘지도 않다. 나는 슬픈데 슬픈 것만도 아니다. 나는 화가 나지만 어째서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프지만 아프지 않은 부분도 있다. 나는 즐겁고, 실은 즐거울 하등의 이유가 없다. 모르겠다. 느끼는 모든 감정을 추스르고 섞으면 결국 체념이 된다. 그것은 캄캄하고, 끝없이 깊고, 풍부하다. 인간이 이를 곳은

 

결국 체념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주된 정서를 이루는 것은 ‘체념’이다. 항암치료와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 중에서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어떠한 감정을 느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의 ‘체념’이라는 것은 사실 하나의 종착점에 이르렀을 때 느끼게 되는 감정들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최종 목표를 달성했을 때 엄청난 성취감과 희열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더 이상의 아무런 희망도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는 절망과 체념을 느끼게 된다. 목표 달성과 극단적 절망은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종착지’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지점에서 이 두 개념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서로를 닮아있다.

이것은 하나의 변증법적 발상을 암시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생이 그저 삶의 근처를 방황하는 것에 불과했다는 점을 이미 어슴푸레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죽음이라는 것을 앞에 둔 이상 자신이 이제 곧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생각에 지배된 것이고, 이제 ‘근처’를 방황하는 삶도 거의 다 끝났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는 혼자다. 혼자인 것이다. 찾아 나설 아내도 없다. 설사 네 명의 자식이 있다 해도 나는 혼자일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문득 혼자서, 혼자를 위로하는 순간이다. 삶도 죽음도 간단하고 식상하다. 이 삶이 아무것도 아니란 걸,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니란 걸, 이 세계가 누구의 것도 아니란 걸, 나는 그저 떠돌며 시간을 보냈을 뿐이란 사실을 나는 혼자 느끼고 또 느낀다. 나는 무엇인가? 이쪽은 삶, 이쪽은 죽음... 나는 비로소 흔들림을 멈춘 나침반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평생을

 

<나>의 근처를 배회한 인간일 뿐이다.


이 구절을 읽고 드는 생각은 <나>라는 것의 본질이 흡사 <죽음>이나 <절대적인 외로움>과 같은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행복과 괴로움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대개 행복이라는 것은 그것을 새삼스럽게 지각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로서의 간사함인 것이고, 고통과 증오와 괴로움과 자괴감이나 회의 따위를 곱씹으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고통에 몸부림친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절대적인 고통이 될 수 없다. 어디까지나 그런 경험들은 이 삶이라는 한계 속에서 갇힌 채로 일어나는 일에 불과하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귀결의 근처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존재나 삶의 본질을 죽음이나 절대적 외로움이라고 전제할 때 인간의 삶 혹은 존재라는 것은 그저 근처를 맴도는 일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죽음과 고통을 인간의 존재 및 삶의 본질이라고 간주하게 될 때 인간은 필연적으로 염세주의에 빠지게 되리라는 생각이다. 염세주의란 인간의 삶은 고통뿐이며 따라서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철학적 사유를 나타내는 말이다. 지난날의 삶을 그저 ‘근처를 배회한 세월’로 정의내리고, 죽음이야 말로 삶의 진정한 귀결이며 본질이라고 이해해야만 하는 인간에게 지난날의 인생이라는 것은 그저 죽음을 위해서 존재한 시간에 지나지 않는 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이 필연적으로 염세주의로 연결되는 생각을 나는 힘겹게 밀어낸다. 물론 이 작품의 스토리상 작품 내에서도 숱하게 염세의 충동이 튀어나오곤 한다. 하지만 그런 염세의 충격은 또 금방 다른 경험이나 자극에 의해 가리워지게 된다. 잊혀진다. 인간의 삶이 그러하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괴로운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자신이 자신의 죽음을 어김없이 숱하게 망각한다는 사실이 아닐까 한다.


(3)삶에의 의지

순간 가정을 잠시 이룬 듯했던 그 느낌의 정체는 무엇일까? 순간이지만, 순간인데도 순간이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그 기분이 나는 싫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그는 염세주의에 빠져서 죽음을 인간의 본질로 인식한다. 한평생 죽음의 근처를 맴돌다 이제 곧 죽음 그 자체에 도달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체념에도 불구하고 결국 살아있다는 감각에 기꺼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그는 말하고 있는 듯, 혹은 발견한 듯하다.

이러한 경험은 비단 그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나를 비롯하여 이 세계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한없는 절망과 체념으로 인해 염세주의에 빠졌다가 어떤 계기를 통하여 거짓말처럼 그런 절망으로부터 탈출하여 다시 빛나는 세상을 재발견하게 되는 그런 멋쩍은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에 내재된 이치 때문이고, 이 세상의 이치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본질이라는 것은, 그리고 진리라는 것은 그렇게 또 얄밉게 우리의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로 그는 염세주의를 택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계기로 다시 삶의 즐거움을 재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타임캡슐을 파냄으로써 그는 자신이 죽음 혹은 자신의 존재의 본질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고 그것을 확인하는 행위는 그가 세상을 정리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 죽음은 목전에 다다른 것 같지만, 우리는 현재를 삶의 끝이라고 생각하고 드디어 본질에 도달했다고 숱하게 착각하지만 결국에는 그것 역시도 어김없는 ‘근처’에 불과할 따름이다. 세상은 그리고 삶은 어김없이 계속 이어진다.


개켜둔 걸레처럼 말없이, 꼼짝 않고 마당을 지켜본다.

 

아무 일 없는 순간이

아무런 일 없는 공간 위에 머물러 있다.

 

언뜻, 그렇다. 나도 언뜻 이곳에 물렀지 않았던가. 지긋이 책을 집어들면서도 마치 죽은 이처럼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빗줄기가 그리는 크고 작은 동심원이 무수한 연잎이 되어 어디론가 흘러간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아니다. 아우렐리우스는 또 뭐라고 얘길 했을까. 책을 펼치자 한 장의 사진이 깃들어 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낯선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오오래 그 남자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는 어디 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어디로 가는 걸까. 아마도 이

 

근처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처’라는 것이 양면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우리가 생의 의미나 본질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에는 결코 그것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비관적으로 암시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지속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근처라는 것은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며, 그러한 사실 자체로부터 아직 가야할 길이 더 남아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게 남아있는 길은 인간에게 하나의 희망과 여지를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 근처라는 것은 인간에게 좌절로 다가오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희망의 여지를 부여하는 상징의 하나라는 점에서 인간의 존재와 그 삶의 본질의 한 단면을 훌륭히 그려내고 있는 매개체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한 지속성과 여지라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 이상 염세주의 따위에 머물지 못하게 한다. 본디 염세주의라는 것은 빛나는 미래를 그리는 세계관에 대한 반발로부터 잉태된 것이지만 그렇게 태어난 염세주의 역시도 그저 기존의 생각을 뒤집어서 삶을 고통과 죽음이라는 하나의 고정된 것으로 규정한 것일 뿐, 삶이라는 것을 그 어떤 특정한 것에 한정짓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기존의 세계관과 동일한 한계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죽음이라는 벽을 마주한 인간이 스스로에게 체념의 감정을 주입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온전히 그러한 체념의 감정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가능성이다. 인간은 결국 ‘근처를 배회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체념에도 완전히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 갖는 본질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그토록 잔인하고 또 그 잔인함만큼 또 눈부시다.


5.맺는말: 우리의 삶이란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하는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그는 사진 속에서 무표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부모와 대조적이다. 이것은 삶의 의지라고 읽어야 할 게 아닌가 한다. 즉 다시 말해 그것은 실존을 향한 마음의 힘이다. 그가 그저 스스로를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간주했다면 그는 자신의 본질에 각인된 본질로서의 부모를 탓하며 그 부모를 따라 무표정한 인간으로 삶을 살다가 그러한 삶을 정리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표정한 부모로부터 삶을 물려받은 존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웃어보이고자 한다. 존재가 가진 사실적 영역에 침식되지 않는 인간 내면의 또 다른 본질을 우리는 실존이라고 한다. 그것에 개입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의지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세상의 이치를 ‘근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근처를 배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주는 것이다.

새삼 삶이라는 것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나는 지금 어느 곳의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을 가늠해보기 위해서는 내가 하염없이 씹고 있는 절망을 확인해야 한다. 그것을 확인했을 때 나는 내가 그러한 절망과 고통을 하나의 종착점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보다 더 나빠질 수도 혹은 더 좋아질 희망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자신이 ‘근처를 배회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인간의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사실 나 역시 어김없이 ‘근처를 배회하는’ 또 하나의 인간이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배회할 또 하나의 인간일 따름이다.


나는 이 소설을 그렇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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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상(李箱文學賞)은 대한민국의 문학상이다. 요절한 소설가 이상을 기려 출판사 문학사상사에서 1977년 제정하여 1년에 한 번 시상한다. 중편 및 단편 소설에 관해서는 대체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으로 여겨지며, 해마다 펴내는 수상작품집은 서점가의 베스트셀러에 오르곤 한다.

심사대상은 전년도의 1월부터 12월까지 문예지를 비롯한 각 잡지에 발표된 중편 및 단편의 순수문학 소설이며, 수상작품집은 1월에 발매한다. 작품집의 제목은 《****년 제**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대상 수상작 제목]》의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최종 심사에 오른 소설들이 함께 수록된다. 대상 수상작의 경우 시상 규정에 따라 저작권이 문학사상사에 귀속되기 때문에(단, 2차 저작권은 작가에게), 수상에 대한 수락 의사를 본인에게 확인하게 되어 있다.









역대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 목록 (문학사상사)

수상연도작가작품
제1회1977년김승옥서울의 달빛 0장
제2회1978년이청준〈잔인한 도시〉
제3회1979년오정희〈저녁의 게임〉
제4회1980년유재용〈관계〉
제5회1981년박완서〈엄마의 말뚝〉
제6회1982년최인호〈깊고 푸른 밤〉
제7회1983년서영은〈먼 그대〉
제8회1984년이균영〈어두운 기억의 저편〉
제9회1985년이제하〈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제10회1986년최일남〈흐르는 북〉
제11회1987년이문열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제12회1988년임철우〈붉은 방〉
한승원〈해변의 길손〉
제13회1989년김채원〈겨울의 환幻〉
제14회1990년김원일〈마음의 감옥〉
제15회1991년조성기〈우리 시대의 소설가〉
제16회1992년양귀자〈숨은 꽃〉
제17회1993년최수철〈얼음의 도가니〉
제18회1994년최윤〈하나코는 없다〉
제19회1995년윤후명〈하얀 배〉
제20회1996년윤대녕〈천지간〉
제21회1997년김지원〈사랑의 예감〉
제22회1998년은희경〈아내의 상자〉
제23회1999년박상우〈내 마음의 옥탑방〉
제24회2000년이인화〈시인의 별〉
제25회2001년신경숙〈부석사〉
제26회2002년권지예〈뱀장어 스튜〉
제27회2003년김인숙[1]〈바다와 나비〉
제28회2004년김훈[2]〈화장〉
제29회2005년한강[3]〈몽고반점〉
제30회2006년정미경[4]〈밤이여, 나뉘어라〉
제31회2007년전경린[5]〈천사는 여기 머문다〉
제32회2008년권여선[6]〈사랑을 믿다〉
제33회2009년김연수[7]〈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제34회2010년박민규[8]〈아침의 문〉
제35회2011년공지영[9]〈맨발로 글목을 돌다〉
제36회2012년김영하[10]〈옥수수와 나〉
제37회2013년김애란[11]〈침묵의 미래〉
제38회2014년편혜영[12]〈몬순〉



(출처: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이상문학상



처음으로 이상문학상을 접했던 것이 언제인지 제대로 기억은 안 나지만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도 같고, 아니면 대학교 1학년 때인 것도 같다. 기억하건대 내가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구입했던 이상문학상 작품집은 권지예의 <뱀장어 스튜>가 대상을 수상한 2002년의 제26회 작품집이었다. 대상작도 대상작이지만 그러한 대상작의 뒤로 이어지는 우수상 작품들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러한 작품들을 제치고 대상의 영예를 얻는 작품이라는 대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일까? 하지만 나는 그런 아름다움을 통찰할 눈이 없으니 더욱더 열심히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실로 이상문학상 대상은 때로는 쉽게 동의가 가능했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어 납득할 수 없는 대상이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벌써 12년이 흘렀다. 꼬박꼬박, 나는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이들의 글을 읽어왔고, 동시에 꿈을 꾸었다. 언젠가는 나도 저 상을 받을 수 있을까. 받고 싶다고 생각을 했다. 올해는 전부터 주목하던 편혜영 작가가 대상을 수상했다. 박민규, 김애란, 편혜영. 내 시야에 들었던 세 명의 작가가 모두 이상 문학상을 수상했다. 다음 작가는 누구일까. 김중혁? 천명관은 단편 보다는 장편에 주력하는 것 같아서 잘 모르겠다. 하아. 이 상문학상 그 명예에 조용히 전율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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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김해경)


이상문학상(李箱文學賞)은 대한민국의 문학상이다. 요절한 소설가 이상을 기려 출판사 문학사상사에서 1977년 제정하여 1년에 한 번 시상한다. 중편 및 단편 소설에 관해서는 대체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으로 여겨지며, 해마다 펴내는 수상작품집은 서점가의 베스트셀러에 오르곤 한다.

심사대상은 전년도의 1월부터 12월까지 문예지를 비롯한 각 잡지에 발표된 중편 및 단편의 순수문학 소설이며, 수상작품집은 1월에 발매한다. 작품집의 제목은 《****년 제**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대상 수상작 제목]》의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최종 심사에 오른 소설들이 함께 수록된다. 대상 수상작의 경우 시상 규정에 따라 저작권이 문학사상사에 귀속되기 때문에(단, 2차 저작권은 작가에게), 수상에 대한 수락 의사를 본인에게 확인하게 되어 있다.

(출처: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이상문학상








편혜영(1972년~)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이슬털기〉가 당선되면서 데뷔했다. 2007년 단편소설 〈사육장 쪽으로〉로 제40회 한국일보문학상을, 2009년 단편소설 〈토끼의 묘〉로 제10회 이효석문학상을, 2012년 소설집 〈저녁의 구애〉로 제42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출처: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편혜영



그녀의 글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문학상작품집에서였던 것 같다. 그 책에서 나는 그녀의 작품을 만났는데 그것은 아마도 <통조림 공장>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여성작가답지 않은 재치 섞인 문체도 문체지만 독특한 그녀만의 우중충하고 암울하며 참담한 분위기에 저절로 마음이 끌려 그녀의 작품을 찾아 읽었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는 참담과 비참이 언제나 등장한다. 때로 그것은 가만히 보고 있기 지긋지긋할 정도의 우울이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그런 참담과 우울이, 실제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담과 우울을 경험하는 현대인들에게 하나의 위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실제로 나는 그것을 경험해 봤다는 생각이다. 이 이유는 무엇일까? 최소한 이 세상이 그녀의 글 속에서 탄생하여 운동하는 그 비참하고 사방이 캄캄한 세상보다는 덜 우울하고 비참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의 글을 읽는 동안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런 절망적인 세계 속에서도 끊임없이 희망을 찾고자 하는 그녀의 서사적 본능을 감지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관련글> http://mskjh.tistory.com/509 역대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 목록 (문학사상사)










[이 주의 무료책]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꿈을 꾸어라

저자 김선재

출판사 황소북스

꿈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죽기 직전에 못 먹은 밥이 생각나겠는가 아니면 못 이룬 꿈이 생각나겠는가? 당신 꿈의 크기가 바로 당신 인생의 크기이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이에게 전하는 49가지 감동 메시지 이 책은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 마침내 꿈을 이룬 사람들의 감동적인 인생 이야기를 담았다. 장애를 극복하고 수영선수에서 세계적인 가수로 재탄생한 레나 마리아부터 무일푼으로 시작해 1시간에 8억 원의 강연료를 받는 브라이언 트레이시, '조 지라드 250명의 법칙'으로 자동차 판매왕에 오른 조 지라드, 힐튼 호텔 창업자 콘래드 힐튼,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도전했던 조지 말로리, 보험 외판원에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톰 클랜시, 상상훈련으로 골프 황제가 된 니클라우스, 41세에 등단해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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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의 무료책]두려움 없이 사는 법

저자 브렌다 쇼샤나(Brenda Shoshanna), 이채린

출판사 예문

세계적인 치유심리학자 브렌다 쇼샤나의 힐링에세이내 인생의 불안을 떠나보내는 9가지 방법조그만 일에도 쉽게 화를 내는가? 일이 잘 안 풀리면 상대방 탓을 하거나, 조상 탓을 하게 되는가? 당신의 삶이 너무 형편없게 느껴져 끊임없이 불평하고 있지는 않은가…우리는 우리 일상의 대부분의 시간을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미 벌어져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일과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에 대해 걱정을 하며 보내고 있다. 우리의 삶이 걱정과 두려움에 지배당하기 시작하면 두려움의 범위는 순식간에 넓어져버리고 만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불러들인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이 인지하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love)과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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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의 무료책]여왕의 시대 - 유럽편

저자 바이하이진, 김문주

출판사 미래의창

여성이 리더십을 발휘하던 시대에,세계는 무엇이 달라졌고, 어떻게 진보를 이루었는가?책 소개요부의 대명사 클레오파트라, 권력의 화신인 측천무후와 예카테리나,남자를 능가하는 용기와 지혜를 지녔던 엘리자베스 1세와 이사벨 1세,그리고 서태후와 엘리자베스 2세에 이르기까지남성 못지않은 담력과 의지, 탁월한 지혜와 과감한 결단력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12명의 여왕들. 오늘날까지 끊임없는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떻게 권력을 쟁취하였는가? 그리고 그들의 치세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열두 여왕의 이야기를 통해 보다 입체적이고 흥미로운 세계사를 만나 보자.ㆍ탁월한 지혜, 비상한 두뇌로 남성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다.ㆍ비범한 담력, 과감한 결단력과 행동력으로 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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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의 『고민하는 힘』 독후감


1.소개

2.구성

3.고민하는 힘

  0)서장: 지금을 살아간다는 고민

  1)나는 누구인가?

  2)돈이 세계의 전부인가?

  3)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4)청춘은 아름다운가?

  5)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6)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7)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8)왜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9)늙어서 최강이 되라

4.총평

1.소개

이 책은 1950년 일본 규슈에서 태어난 재일 한국인 강상중의 책이다.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자신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경험해야만 했던 방황과 고민들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을 했다. 『재일 강상중』, 『도쿄 산책자』, 『청춘을 읽는다』, 『살아야 하는 이유』, 『고민하는 힘』 등의 저서가 있다. 내가 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어느 시사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그의 책을 소개하면서 준비하는 그와의 짤막한 인터뷰를 듣게 되면서이다. 이미 그는 여러 가지 저서를 통하여 우리나라에도 제법 넓은 인지도를 쌓은 상태였지만 무식한 나로서는 처음 접하는 이름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기대 없이 그냥 듣게 되었는데 곧이어 일본 사회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갈등이나 병폐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지적을 만날 수 있었다.


2.구성

그에 대해 좀 더 알아가기 위해서 내가 처음으로 선택한 책은 바로 『고민하는 힘』이다. 이 책은 9개의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1.나는 누구인가, 2.돈이 세계의 전부인가, 3.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4,청춘은 아름다운가, 5.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6.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7.변하는 않는 사랑이 있을까? 8.왜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9.늙어서 ‘최강’이 되라라는 것이 목차의 제목이다. 목차 제목으로 어느 정도가 유추가 가능하듯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이 사회가 이전의 사회에 대하여 갖게 되는 차이점, 그 차이점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구조적 병폐, 그러한 구조적 병폐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필연적 시련, 그러한 시련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일본의 대표적 문학가 나쓰메 소세키와 영국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를 반복적으로 언급하면서 그들의 생각과 생애를 예로 들면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 혹은 걸어 나가야 할 길을 찾아나가려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이 다소 옴니버스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는바 본 독후감은 챕터별로 나오는 작가의 생각을 정리하고 그에 대한 나의 평을 적어 나가는 형식을 취한 뒤에 총평을 적는 방식을 취하고자 한다.


3.고민하는 힘

0)서장: 지금을 살아간다는 고민

이 챕터에서 작가는 앞으로 계속해서 이 책을 관통하게 될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세계에 대한 규정이다. 즉,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이전의 세대와는 달리 불확정 혹은 미정을 특징으로 하는 세대로서 ‘자유’로 상징되는 시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롭기 때문에 그 세계는 끊임없이 그리고 정신없이 변해 나가는 대상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상당히 모순적이게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런 세계 속에서 언제나 불변하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서 헤매는 존재로 남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방황을 경험하고,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챕터에서 작가는 처음으로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에 대한 언급을 시작한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사회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또 활동했지만 어떤 특정한 시각에서 바라볼 때 두 사람은 매우 비슷한 생각과 고민을 공유했다고 간주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게 작가의 주장이다. 그것은 시대가 그들에게 부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생각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대를 살아간 여타의 사람들과는 다소 상이하고자 했던 생각이었다. 즉 두 사람이 공유하는 생각은 ‘스스로 그 흐름에 올라타지만 그 흐름에 휘말리지 않고 시대를 꿰뚫어 보겠어.’라는 것이다.1)

작가는 이들이 살았던 19세기 말~20세기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세기 말~21세기와 매우 비슷하다는 주장을 한다. 세계대전 직전의 세계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한계에 봉착하고 인간의 소외가 극도에 달함으로써 결국 그것이 전쟁의 씨앗이 되어가고 있던 시대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지금과 매우 닮은 시대 속에서 나름대로의 지독한 고민을 통해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준 두 인물의 지혜를 돌아보는 것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분석은 어쩌면 이런저런 요소들을 망설임 없이 거세해 버리고 과거와 현대를 동위대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모순을 함유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찬찬히 읽어가는 동안 또 한편으로는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분명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가 살았던 그 시대가 세계대전을 잉태할 정도로 심각한 인간소외를 경험하고 바야흐로 ‘개인’의 시대가 태동하다가 사산된 시대라고 한다면, 지금은 그러한 개인의 시대가 아주 활짝 열린 시대인 만큼 두 시대는 어느 정도의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고 우리는 선배에게 배운다는 생각으로 그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간 현자들의 생각을 엿볼 필요를 외면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나는 누구인가?

오늘날 이따금 사회적인 문제를 지적한 화두로 떠오르는 말 중에 자기중심주의라는 것이 있다. 이러한 자기중심주의는 자기, 즉 개인을 모든 것에 중심에 두고 사고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오직 그 개인만을 사고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개인이라는 것이 등장한 시점은 언제일까? 작가는 그 시점을 중세의 문이 닫히고 근대의 문이 열린 시기라고 말하고 있다. 천년의 암흑시대가 종결되고 사람들은 삶을 폭넓게 지배하고 있는 종교로부터 해방되었다. 하지만 그 해방과 동시에 인간은 딛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심정이 되었다. 그 때 등장한 것이 르네 데카르트였고 그는 코기토 에르고 숨이라는 명제를 통하여 인간의 자기 존재를 증명해 낸다.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그 유명한 말이 바로 그것이다.

데카르트를 통하여 인간은 비로소 신을 거치지 않고서도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가 파생되게 되는 데 그것은 바로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신이라는 보행기를 박탈당한 인간은 아주 서투른 솜씨로 걸음마를 시도하는 어린아이와 다름없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서툰 아이는 겨우 간신히 자신의 존재만을 인정할 수 있을 뿐 감히 타인의 존재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리고 더욱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고히 하고 거기에 집착하면 할수록 자신과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벽이라는 것은 더욱더 공고해지는 것이다.

작가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는 과거 처음으로 인간이 개인의 자아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준의 자타인식을 보여주고 있고, 어찌 보면 더욱더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있다. 내가 볼 때도 확실히 현대인들은 자신과 타인을 서로 소외시키는 행위들의 반복 끝에 점점 더 외로워져 있다. 그러한 외로움을 대놓고 드러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에 그러한 소외와 외로움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발견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결국 인간은 타자의 진정한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집착하는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 속에 놓여있다.

작가는 자신 역시도 유년시절 즈음에 그런 위기를 경험한 바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다는 절망감은 그로 하여금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대상화해서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런 경험에 비추어 그는 말한다. 자아는 타자와의 상호인정에 의한 산물이라고, 중요한 것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타자에 대해 던질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즉 진지하게 고민하고 진지하게 타자와 마주하는 행위 속에 현대인이 직면한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거라고 작가는 믿고 있다.


2)돈이 세계의 전부인가?

이 챕터에서 우리는 작가가 자본주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확인할 수 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우리는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말은 곧 돈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고, 어떤 측면에서는 전부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 인식을 전제하는 작가는 자본주의의 태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본주의는 본래 청빈사상에서 출발했다는 것으로, 그런 맥락에서 따져볼 때 오늘날처럼 막무가내로 자본에 집착하는 자본주의는 본래적 의미의 자본주의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나쓰메 소세키가 그의 작품에서 돈 많은 이들에 대해서 상당히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라든지,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의 기원이 인색함의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금욕적인 에토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보여준 것2)으로도 엿볼 수 있는 일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막스 베버가 말한 자본주의의 개념에서 보면 이렇게 돈을 만들어 내기 위한 자본주의는 물건이나 서비스의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주의에서 일탈한 금융 기생적 자본주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막스 베버는 그것을 근대 자본주의의 ’정통‘이라고 간주하지 않았다.’3)

결론을 보자면 작가는 돈에 대한 해석을 유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돈이 최고라고 말한다든지, 검약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박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사치를 부린 삶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나쓰메 소세키처럼 가능한 범위 내에서 돈을 벌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돈을 사용하고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윤리에 대해 고민하면서 자본의 논리 위를 걸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 너무 평범할까요?’

커다란 맥락에서 나는 작가의 의견에 동의한다. 자본주의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면서 그것이 이루어낸 넘치는 재화를 상당히 죄스러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소비하면서 살아가는 한 명의 소시민으로서 대놓고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일은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를 벗어날 수 없는 걸 뻔히 아는데도 그것이 싫다고 어리광을 부리는 일로 그려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직업이라는 것을 선택할 때 자아실현 보다는 돈이라는 요소를 더욱 중요하게 바라보고 있고, 직업에 임하여 그것으로 삶을 구성하고 살아감에 있어서도 너무 돈만을 바라보게 되는 현상은 씁쓸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자본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과 경계하는 태도를 한 번쯤 더 지적해줬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3)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챕터에서 작가는 피상적인 앎으로 채워져 가는 세계를 지적하고 있다. 작가의 서술이 다소 난해한 관계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대략적인 분위기만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어 세심하게 주제를 읽는 노력이 요구되었다. 여하튼 작가가 보기에 모든 그러한 피상적인 앎의 원흉은 근대의 서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오캄의 면도날에 의하여 신앙과 철학의 연결이 단절됨으로써 사람들은 각종 미신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른바 계몽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고, 이제는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과학의 발달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칸트가 활동하던 때만 하더라도 과학이라는 것은 여타의 학문 특히 철학과 제법 사이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발달해 나갔다. 모두 알다시피 칸트의 경우에는 눈부시게 발전하는 자연과학과 머리 위에 별처럼 빛나는 도덕철학 모두에게 경외심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물론 그 둘 중에서 굳이 선택하라면 도덕철학 쪽을 선택했겠지만) 그러나 근대가 지나고 현대로 접어들수록 그러한 사이좋은 관계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오늘날 도덕철학이라는 것은 감히 과학의 위상을 넘볼 수도 없는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고, 모두가 이다음에는 또 어떤 눈부신 발명품이 나올 지만을 기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서 지식이라는 것은 매우 변질되어 버렸다. 흔히 사람들은 지식에 대해서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무엇이 있다거나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을 아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경험이라고 작가는 지적한다. 인터넷의 발달로 사람들은 궁금한 게 생기면 무엇이든 검색해서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생각하듯 그러한 앎은 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앎이라고 할 수 없다. 작가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앎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우리의 어머니 세대가 그랬듯이 자연과 함께 하면서 그것을 경험하고 그 경험 속에서 우러나오는 흔히 ‘지혜’라고 불릴 수 있을만한 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지식의 반열에 들 수 있는 것이다.


4)청춘은 아름다운가?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청춘’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사용되고 있는데,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일본 사회에서는 이제 과거와는 달리 ‘청춘’이라는 단어를 심심찮게 쓰는 사람은 거의 없는 모양이다. 하여간 그렇게 운을 떼면서 작가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청춘들이 매우 삭막한 상태에 놓여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즉, 한창 청춘의 한가운데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이 자기 자신을 인식함에 있어서 무엇에 쫓기기라도 하듯이 스스로의 나이를 매우 많게 생각하고, 또 한편으로 자신이 또래들에 비해 많이 늦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청춘은 바로 탈색된 청춘이다. 청춘이라는 것은 본디 진한 색감으로 풍부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해 위에 언급된 젊은이들은 자신의 청춘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청춘이란 무엇인가? 작가에 따르면 그것은 나이로 구분되어질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청춘이 규정되어질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바로 ‘고민’의 유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부조리와 불확실함을 마주함에 있어서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는지가 바로 청춘의 유무를 결정해 줄 수 있는 거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즉, 나이가 몇 살이든지 간에 여전히 고민하고 있으며, 삶에서 마주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적당히 회피하지 않을 용기를 간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청춘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청춘을 제대로 살아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하여 작가는 그렇지 못한다면 그렇게 탈색된 청춘을 보내버린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해결하지 못한 갈등의 부메랑을 마주하는 부작용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확실히 주위를 돌아보면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그 청춘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 스스로로 돌이켜 보면 우리의 앞 세대가 살아낸 것만큼 청춘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불황이 거듭되니까 우리나라의 경제도 어려워지는 것이고, 덩달아 정치와 경제를 담당하는 이들이 옳지 못한 방법으로 나라를 이끌어 나가매 양극화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절대 다수의 젊은이들은 불황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지 못해 청춘을 도외시하고 그저 먹고 살 궁리에 매진할 수밖에 없으며, 덩달아 그들의 부모와 주변 사람들은 그런 현상을 부추기고 또 강요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 현실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가 말한 대로 청춘에 대한 지금 이 시대의 나태함은 언젠가 반드시 커다란 부작용으로 돌아오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다.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아파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그래봐야 한다. 나중에 대학가서 하라든지, 직장에 가서 하라든지 하는 말은 거짓이다. 수많은 청춘들이 싸우다 지쳐서 그만 그러한 말들에 굴복하고 책상 앞으로 독서실로 도서관으로 들어간다.


5)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 챕터는 종교에 관한 것이다. 우선 작가는 근대 이전의 종교에 대해 설명한다. 그 당시의 종교라는 것은 제도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처럼 종교의 자유에 의거하여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서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규모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제도에 가까운 전통에 의거하여 타의에 의하여 자신의 종교가 결정되는 시대였고, 그렇게 결정된 종교에 포함된 교리와 사상에 의하여 자신의 신념과 철학 역시도 결정되는 시대가 바로 근대 이전의 시대였다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이러한 시대에서 사람들은 고민의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했다. 하기는 했겠지만 지금처럼 무한한 미정의 공간을 마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민의 여지라는 것은 상당히 적었고, 또 한편으로 구체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적어도 그들은 추상적인 고민의 필요성이 부여하는 불안으로 인해 불행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행복했을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알랭 드 보통이 쓴 『불안』이라는 책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근대 이전의 사람들에게 ‘미개’의 이미지를 뒤집어씌우고 그들은 덜떨어지고 덜 진보한 불쌍한 이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오히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웠던 사람들이라는 것이 두 책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이라고 보여진다.

분명 그러했기 때문에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된 직후는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천 년 동안 자신의 얽매고 있던 족쇄가 사라지자 매우 불안해 했다. 그것은 족쇄인 동시에 그들은 지탱하고 있던 대들보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종교를 대신할 것은 무엇이든 수용했고, 각종 미신과 속임수들에 취해서 살아갔다. 이것은 인간에게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과분한 것이고 또 위험하고 괴로운 것인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1920년대 이후 독일이 개인주의로부터 급속도로 극단적 파시즘(전체주의)으로 이행한 것을 ’자유‘라는 관념으로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유를 동경한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다. 자유로부터 도망쳐 ’절대적인 것‘에 속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4)

현재 오늘날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산산조각 난 사회 속에서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며 살아가는 인간들은 무엇을 믿어야 좋은지 좀처럼 알 수 없는 상태에 빠져있다.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자유롭게 다양한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만큼 그 종교가 유일무이한 진리라는 확신에 이르는 일은 중세 때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인간은 종교 대신 자기 자신에 탐닉하기도 한다. 스스로가 종교가 되는 일에 빠지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앞서 다룬 자아에 집착함으로써 타인으로부터 고립되는 상황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작가가 내리는 처방은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가 했던 것처럼 자신의 지성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 확신을 얻을 때까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합리주의적 혹은 계몽주의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6)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이 챕터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직업관을 보여주고 있다. 직업이라는 것 무엇인가. 사람들은 왜 일을 하는가? 보통은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겠지만 작가는 그 이상의 무엇이 직업에 포함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자아실현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되는 자아실현이라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재능을 실현한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자아라는 것은 언제나 ‘타자’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관계에 있어 이보다 더 기본적인 전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있다는 것은 곧 타자가 있음을 의미한다. 타자가 없는 나는 있을 수 없다. 타자가 없다면 굳이 나라는 존재를 특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의 나라는 것은 ‘나’라기 보다는 차라리 세계 그 자체라고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직업이라는 것은 이처럼 ‘타자’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타자’로 이루어진 사회 때문에 중요하다. 자신의 능력을 통하여 사회에 이바지함으로써 그 안에서 어떤 존재가치를 확인하고 또 타자에 의해서 그것을 인정받고 한편으로는 긍정을 받을 때 인간은 보람을 느낀다. 그것이 바로 돈을 떠나서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상호인정을 ‘배려’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는 타자로부터 배려를 받고, 그와 동시에 타자를 배려하기 위함이라고, 그리고 그럼으로써 종국에는 온전한 자기를 발견하고 자신을 완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역시 자기라는 것은 언제나 타자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는 오늘날 우리사회에 존재하는 직종 중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서비스업에 대한 생각을 보여준다. 서비스업이라는 것은 이전의 시대에서 발견되는 직업들과는 상당히 큰 차이점을 갖는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의 직업들이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 중에서 ‘재능’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부분을 발휘하여 제공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서비스업은 그 개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을 발휘해야만 하는 분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표적인 착취의 대상이 된다는 점은 쉽게 예상이 가능하다. 그리고 모든 능력을 다 발휘해야만 하는 만큼 심신의 소모도 극심하다. 이러한 서비스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현대 사회는 그만큼 지치고 소모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작가는 거기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즉 생각의 전환을 시도한다고 할 때, ‘막스 베버가 말한 것처럼 전문화/세분화가 진행된 사회에서 직업을 가진 사람은 단면적인 사람이 되기 쉽지만 현대의 서비스업은 반대로 전인격성을 되찾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냐.’5)는 것이다.


7)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진정한 사랑은 존재할까? 예나 지금이나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 생활의 주변에서 언제나 빠지지 않는 화젯거리다. 인간은 어릴 때는 부모와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이가 듦에 따라서 타인과의 사랑을 경험하고 갈등하고 아파하며 행복해 하는 존재인 만큼 살아가면서 거의 항상 사랑을 염두에 두고 산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공통된 의견을 갖고 있지 못하며 심지어는 그 개인에 있어서 조차도 진정한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 작가는 과거의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배우자를 받아들여야만 했던 만큼 좋든 싫든 호불호를 경험할 수밖에 없으니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아닌지를 지금보다는 쉽게 알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럼 지금은 어떤가? 지금은 바야흐로 사랑에 대한 자유가 주어진 시대이다. 작가이게 있어서 자유라는 것은 미정의 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인 동시에 매우 위험천만한 대상이다. 그러한 자유가 부여된 인간은 오히려 사랑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아이러니에 직면하게 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오히려 부자유스럽기 때문에 제대로 잘 볼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하니, 사랑도 그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오늘날의 사람들은 사랑이나 연인이 찾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하여 행복해지고 싶어서라고 대답하고는 하는데 작가는 이것에 큰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선택한 사랑이라는 것은 자신의 행복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사랑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청춘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이들이 직면해야만 하는 부작용과도 통하는 맥락이다.

사람들은 흔히 연애할 때의 뜨거운 사랑이 결혼 후에 식어가는 것을 목격하면서 안타까워하고 자신은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그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이러한 생각이 유행하는 현상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나 역시 그러한 작가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다. ‘계속해서 상대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갖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많은 사람들은 애정의 온도가 떨어졌을 때 쓸쓸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모습이 바뀐 것일 뿐이지,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모습을 바꾸든지 간에 그러한 외양에 구애받지 않고 그 본질을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을 키울 필요가 있다. 그러한 안목을 얻게 된다면 결혼 후 식어버린 사랑에 안타까워할 필요도, 결혼 후에도 애써 열렬한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쓸 필요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끊임없이 확인해 나가는 일이다. 얼핏 이런 확인이 열렬한 행위로 이어진다고 생각될 수 있겠지만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은은하게 이루어질 때 더욱더 그 진실성이 빛을 발하리라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챕터를 마무리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랑은 그때그때 상대의 물음에 응답하려는 의지다. 사랑의 모습은 변한다. 행복해지는 것이 사랑의 목적이 아니다. 사랑이 식을 것을 처음부터 겁낼 필요는 없다.’


8)왜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자. TV를 켜면 며칠에 한 번씩 누군가가 자살했다는 소식, 누군가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결코 반가울 수 없는 소식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에 생명경시 풍조가 얼마나 만연해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런 현상들을 목도함에 있어서 삶과, 살 속에 존재하는 사건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문명의 발달은 우리에게 자유를 선사했지만 그렇게 자유 속에 놓진 인간은 하염없는 불확실성에 의하여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결국에는 자신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바 그 자체를 경멸하고 경시하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전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비교적 행복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삶을 영위할 때에는 유기적인 윤회와 같은 것 고에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을 거의 다 배우고 인생에 만족하며 죽을 수가 있다. 그러나 끝이 없는 발전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은 그때에만 가치가 있는 일시적인 것밖에 배울 수 없고 결국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죽게 된다. 따라서 확실한 것을 얻지 못한 죽음은 의미가 없는 사건에 불과하고 무의미한 죽음밖에 얻을 수 없는 삶 또한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6)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 역시 앞서 제시한 모든 주제들과 연결되어 있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인간은 관계를 찾고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며, 자신에 매몰되지 말고 타자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러한 인정은 곧 배려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와 같은 모든 노력에는 ‘고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모든 것의 시작은 고민이다. 그것이 바로 자유로 인하여 불확실해진 이 세계에서 삶의 의미를 찾음으로써 자신과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배려하며 그것을 지켜나갈 수 있는 길인 것이다.


9)늙어서 최강이 되라

문명과 의학이 발달했다. 그에 따라 인간의 수명은 급격히 늘어나고 있고, 인구 역시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반면에 늘어난 노인에 비하여 젊은이들의 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낮은 출산율 때문이다. 때문에 젊은이가 부양해야 하는 노인의 수가 늘어나고 결과적으로 사회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침체에 빠지게 되리라는 전망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요즘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가의 문제의식은 조금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그는 인구분포의 기형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오늘날의 노인이 과거의 노인들에 비하여 원숙하지 못하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과거의 노인은 ‘장로’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듯이 삶을 통해 축적한 지혜를 가지고 그 사회를 지탱하는 존재라고 생각되는 대상이었는데 반하여 오늘날의 노인은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은 무책임함으로 그 사회에 존재하고, 그것은 교란하는 역할을 배분받은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노인들은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그 이유를 작가는 오늘날은 과거와 달리 사람들이 진지하게 죽어나가는 사회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죽음이라는 것은 모두가 두려워하고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지만 작가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것처럼 인간을 원숙하게 만들어 주고 또 한편으로 죽음에 초연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어찌 보면 타인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과거와 같은 피라미드 인구 분포에서는 죽음이라는 것이 매우 드문드문 일어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진지하게 마주봐야 했지만, 오늘날에는 팽창한 노인층에서 오늘 내일 심심찮게 죽어가기 때문에 그것을 진지하게 바라볼 겨를이 없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우리는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노인들은 원숙한 지혜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삶과도 맞닿아 있다. 죽음 언제나 삶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마주할 때 인간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숙고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고민하는 힘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직면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임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이다.


4.총평

여러 장의 챕터를 통하여 작가는 사회 전반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고 또 고민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 다양한 내용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사실 단 하나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된 키워드는 자유, 불확실성, 불안, 의미의 상실, 고독, 소외, 타자와 개인과 같은 현대에 들어서 앞 다투어 제기되고 있는 사회 철학적 담론에 포함되는 것들이다. 이것들을 연결해보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과거 선배 세대가 살았던 시대와는 달리 중세와의 단절을 통해 그리고 계몽과 합리주의에 의하여 자유가 부여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자유라는 것은 단순히 반가운 존재라고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일면 위험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것은 불확실성을 함께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인간은 지금껏 자신이 붙들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잃고 방황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워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돈에 집착하며, 피상적인 지식을 진정한 지혜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으며, 아직 피지도 않은 꽃의 나이에 자신의 청춘은 이미 떠난지 오래라고 체념하고, 비합리적 신념의 의지하며, 직업의 의미를 망각하고, 환상적인 사랑에 얽매이다가 결국에는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생명을 경시하거나, 불우한 노년기를 보내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고 그러한 문제의식을 구체화 한 것이 목차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한 위기 속에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은 고민하는 일이다. 자유에 대응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끊임없이 고민하는 일이고 여기에 사용되는 가장 중요한 우리의 능력이라고 한다면 바로 ‘지성’이다. 계몽의 시대에 접어든 인간은 두 번 다시 비합리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합리성을 대표하는 인간의 이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지성을 가지고 우리는 개인을 발견한다. 개인을 발견한다는 것은 곧 타자를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인은 타자를 전제로 할 때만 그 존재의 의의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 이후에 우리는 관계의 소중함을 발견할 수 있고, 타자를 인정하고 타자로부터 인정받는 경험을 통하여 배려의 의미를 깨닫고, 우리가 사회에서 일함으로써 그 존재가치를 확인해야만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비합리적 신념이 사라진 대신 우리는 우리의 지성을 가지고 개인과 타인을 확인함으로써 그 대신 붙들고 의지해야 할 그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그것이 배려적 관계가 아닌가 하고 짐작해 본다. 흔히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데 그것은 곧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재확인 하는 명제일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그러한 배려적 관계를 확인하고 구축한다는 것은 곧 인간이 자신의 본질에 한발자국 더 다가간다는 말이 되고, 동시에 자신을 완성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런 과정에는 당연히 고민의 과정이 요구된다. 그런 깨달음을 통해서 인간은 타자 앞의 나를 발견하고, 진정한 자본주의의 미덕을 체험하며, 피상적 지식이 아닌 삶의 경험을 통해 체득할 수 있는 진정한 지혜를 습득해 나가고, 자신의 청춘이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에 빠지고, 비합리적 신념 대신 자신의 지성을 소중히 여기게 될 것이며,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라 자아의 실현과 사회 속에서 실현되는 배려를 위하여 직업에 임하게 될 것이며, 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환상 대신 진정한 사랑을 통찰하는 안목을 갖게 될 것이고, 그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와 동시에 죽음의 의미를 통찰하는 능력을 통해 타인의 죽음과 나의 삶을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원숙한 지혜를 가진 ‘장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라고 생각한다.


-끝-


1) 21페이지

2) 54페이지

3) 58페이지

4) 101페이지

5) 122페이지

6) 146페이지









천명관의 『고래』 독후감 – 존재의 과잉에 대한 반성과 진정한 실존

1.소개

2.구성 및 줄거리

3.해학과 자유분방함

4.고래와 삶(실존에의 의지에 대한 반성)

5.맺는말

1.소개

이 문서는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천명관 작가의 장편소설인 『고래』를 읽고 작성한 독후감이다. 필자가 ‘천명관’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아마도 트위터에서였고, 그가 최근에 출간한 장편소설인 『나의 삼촌 브루스 리』라는 소설이 존재한다는 것을 건너건너 알게 되었던 것이 계기가 아니었나한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동생의 책꽂이에서 천명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고래』가 꽂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부리나케 읽어 내려갔다. 천명관은 기존의 문학적 전통이나 유행에 빚을 지지 않은 작가라는 수사가 따르는 인물이다. 그만큼 독창적인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러한 작가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불리는 만큼 본 소설은 처음 책장을 넘기기 시작할 때부터, 책을 읽어가는 내내, 그리고 책장을 덮고, 그 느낌을 기록하기 위해 백지를 마주하는 시점까지도 기묘한 인상으로 남아있음을 나는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2.구성 및 줄거리

소설이라는 것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좋은 소설일수록 서두에서의 몰입이 힘겨워 쉽사리 책에 집중하기가 힘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려 하는 작가의 심술 때문에 그럴 것이고, 소름끼칠 정도로 세심한 묘사에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그것은 작가가 만들어 놓은 그 소설의 세계에 들어가는 문이 튼튼하고 두껍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한다.

이 작품이 바로 그렇다. 물론 그것만 가지고 책의 초두에서부터 ‘그래 몰입이 힘든 것을 보니 이 책은 분명 좋은 책임에 틀림없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이 책의 서두는 몰입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이 소설과 견줄 만큼 어려웠던 책은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개인적 취향에 기인하는 경험이겠으나, 아직까지도 이 소설을 떠올리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책의 초두에 징그럽게 묘사되는 ‘개망초’라는 이름의 식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만큼 개인적으로는 분명히 몰입이 어려웠다.

그렇게 힘든 몰입으로 내가 처음 접하게 되는 인물은 바로 ‘춘희’다. 처음으로 등장한 인물에 나는 당연히 앞으로의 이야기가 그녀를 중심으로 전개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마 나를 비롯한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러한 예상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접한 이야기들의 영향일 테고, 우리가 흔히, 그리고 무심코 치부하는 삶의 흐르는 모습을 이 책에 대입했을 때 피할 수 없는 결과일 것이다.

그녀는 분명히 이야기의 주인공이 맞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녀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책 초두에서 그녀의 등장은 그저 우리가 꽤 많은 책장을 넘기고 난 후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야기는 그녀의 어머니 금복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조금 더 올라가서 장차 이 소설의 이야기가 신나게 전개될 ‘평대’라는 지역에서 국밥집을 하던 노파의 유년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소설의 서평에 자주 거론되는 ‘3대를 망라하는 이야기’라는 구절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를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국밥집 노파에서 시작하여 금복에게로 이어져 마지막으로 춘희에게까지 향하는 대서사를 이해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선 국밥집 노파는 지독한 박색이다. 엄청나게 못 생겼다는 말이다. 그런 몰골을 가진 그녀는 어느 부잣집에서 식모 노릇을 하며 살아갔는데, 그 집에는 칠푼인지 팔푼인지 모를 아들이 있었다. 부잣집이었지만 모자란 아들을 대놓고 기르기엔 체면이 없었는지 그 집에서는 그런 아들을 숨겨두고 키웠는데 그런 아들을 보살피는 것이 바로 그 노파의 일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 노파가 아직 ‘노파’라고 칭하기에는 지나치게 젊은 시절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 아들에게는 기이한 사연이 있었으니 바로 머리가 모자란 만큼 성기의 크기가 무척이나 크다는 것이다. 그런 물건에 홀린 노파는 결국 그 모자란 아들을 꾀어 성관계를 맺게 되고 그런 일을 거듭하게 된다. 그러다 결국 들통이 나서 몰매를 맞고 쫓겨나게 되는데, 그런 봉변까지 당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칠푼이 아들에 대한 미련이 남았던 것인지 늦은 밤 몰래 아들을 납치해서 달아난다. 그리고 어느 개울가에서 그와 마지막 관계를 맺고 그를 물에 빠뜨려 죽여 버린다. 이후 사방을 떠돌던 그녀는 딸을 낳았고 다시 어느 집 식모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의 괴팍한 성미 때문인지 아니면 지난 날 죽여 버린 칠푼이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홧김에 딸의 눈을 불쏘시개로 찔러 실명시킨다. 그리고 돈을 모아 평대에 주막을 차린 노파 모녀. 박색의 노파였지만 주막을 운영하는 그녀를 넘보는 남자는 많았다. 그 중 한 사내에게 노파는 진득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 사내는 그녀에게서 만족하지 못하고 그녀의 외눈박이 딸을 넘봤다. 딸에게 남자를 빼앗겼다는 사실에 분노한 노파는 딸과 통정하고 있는 사내를 찔러 죽이고, 딸은 양봉장수에서 팔아 넘겼다. 벌꿀 두 통에. 이후 노파는 지독하게 돈을 모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제 진정 노파가 ‘노파’라는 이름으로 밖에 불릴 수 없게 된 때가 됐다. 그런 어느 날 벌꿀장수에게 팔아넘긴 딸이 돌아왔다. 벌꿀의 독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은 백발이었다. 돌아온 그녀는 노파를 윽박지르며 모아둔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노파는 지독했다. 딸은 자신의 어머니는 죽였지만 결국 노파가 숨겨놓은 돈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제는 금복이라는 여인의 인생으로 넘어간다. 사실 노파와 금복은 핏줄 같은 것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대체 두 인물이 어떻게 연결될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결국 나중에는 연결이 된다. 산골짜기 마을에서 태어나 일찍이 어머니를 잃은 금복.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끔찍이 사랑했으나 그녀에 대한 욕구를 느끼는 자신을 부정하기 힘겨운 나머지 하루하루 술에 찌들어 살아갔다. 그런 상황에서 금복은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고 어느 날 마을을 찾은 생선장수와 함께 집을 떠났다. 자신의 딸이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의 아버지는 그날 밤 마을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 생선장수와 함께 마을을 떠난 그녀는 항구 도시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고래라는 존재를 만나게 되었다. 크고 웅장함을 상징하는 그 존재는 그녀로 하여금 그러한 커다랗고 장엄한 것에 대한 집착 내지는 목적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갖도록 만들었다. 타지에 나온 그녀는 별 수 없이 생선장수와 함께 살게 되었고, 지혜를 짜내어 생선을 말리는 사업을 벌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하루하루 돈 버는 재미에 살아가던 그녀에게 ‘걱정’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남자가 나타난다. 금복과 같이 젊고 싱그러운 여자에게 늙은 생선장수는 지나치게 소박했던 것이다. 힘이 장사인 걱정은 처음으로 금복을 담을만한 큰 그릇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살게 되었고, 금복의 지혜로 걱정의 임금도 대폭 상승되면서 두 사람은 그야말로 행복은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걱정이 부두 공사 현장에서 사고로 큰 부상을 입게 되면서 자신의 몸을 추스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금복은 항구에서 생선을 손질하는 일을 해야 했고, 방구석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게 된 걱정은 그렇게 고생하는 금복을 의심하며 매질까지 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칼자국이라는 사내가 등장했다. 그는 그 도시에서 커다란 극장을 가지고 있는 사내였으며, 그 지역의 경제권을 쥐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금복에게 알 수 없는 매력을 느낀 그는 그녀에게 갖은 호의를 베풀지만 금복은 그에게서 풍기는 기분 나쁜 힘을 감지하고는 그를 멀리한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영화라는 것은 그녀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결국 점차 그에게 의지하게 되어갔으며 나중에는 걱정을 보살펴준다는 조건하에 칼자국이라는 사내의 집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비록 지조를 버리는 행위라고는 하나 자신의 남편을 좋은 환경에서 보살필 수 있게 되었고, 또 이런저런 고생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제법 무탈하게 지내게 되었다. 물론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걱정이 사리분별을 하지 못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칼자국의 집에서 지내던 어느 날 걱정은 문득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는 엉망진창이 된 자신의 몸을 발견했고, 이름 모를 남자와 함께 자고 있는 금복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내 곧 모든 것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그러한 현실을 견딜 수 없게 된 그는 태풍이 휘몰아치는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항구에서 바다로 몸을 던졌다. 그런 상황을 칼자국은 몰래 뒤에서 지켜봤다. 그리고 또 그러한 칼자국을 금복을 뒤늦게 목격하게 된다. 금복은 앞뒤 정황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칼자국이 걱정을 바다로 밀어 죽인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작살로 칼자국을 찔러 죽였다. 이후로 그녀는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폐인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 물론 누구의 아이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쌍둥이 자매가 운영하는 주막에 이르게 되었고 그곳에서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바로 춘희다. 어릴 적 서커스단에서 생활하다 늙은이가 되어 주막을 경영하게 된 쌍둥이 자매는 금복을 따사로이 맞아주었다. 자신이 낳은 아이지만 금복은 춘희에게서 모성애를 느낄 수가 없었다. 걱정을 닮은 춘희의 생김새와 행동거지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쌍둥이 자매의 주막에서 신세를 지던 금복은 평대로 와서 낡은 주막을 개조해 다방을 차리게 되었다. 개발붐이 일고 있던 평대였기에 다방은 장사가 아주 잘 됐다. 그렇게 순조롭게 다방을 경영해 나가던 그녀였지만 그 정도로는 성미에 차지 않았다. 지난 날 바다에서 봤던 고래처럼 어떤 웅장하고 거대한 것에 대한 희구가 여전히 그녀의 마음 속 어딘가에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태풍이 심하게 휘몰아치던 그 날에 금복이 다방 2층의 집에서 자고 있을 때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진 지붕 속에는 엄청난 돈이 나왔다. 사실은 금복이 빌려서 개조한 그 주막은 아주 오래전 박색의 노파가 운영하던 주막이었던 것이고, 딸에게 죽음을 당하면서 까지도 굳게 입을 다물어 지킨 돈이 바로 그 주막의 지붕 속에 들어있던 것이다. 그런 내막을 알리 없는 금복은 말 그대로 돈벼락을 맞은 상황에서 이내 곧 정신을 차리고는 그 돈을 투자할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지붕에서 나온 돈 중에는 땅문서도 섞여있었는데 그곳은 평대 근처의 습지에 대한 소유권을 담은 문서였다. 금복은 ‘문’이라는 사내를 고용해서 그곳을 답사했다. 그리고는 그곳에 벽돌공장을 세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고 또 많은 돈이 들어갔다. 원체 습지였던 곳에 공장을 세우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흙과 자갈을 부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금복은 해냈고, 벽돌공장을 세웠으며, 쌍둥이 자매도 불러들여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춘희라는 존재는 그녀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상태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야망만이 존재했던 것이다. ‘문’의 열정으로 최상의 품질을 가진 벽돌이 생산되기 시작했고, 이내 곧 벽돌은 전국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금복은 다시 큰 돈을 벌었다. 그리고 또 다시 금복은 그 돈을 어디에 쓸지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새롭게 투자하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극장을 짓는 일이었다. 처음으로 칼자국의 손에 이끌려 구경하게 된 극장의 마력과 고래로부터 받았던 인상이 합쳐진 그것은 고래의 형상을 가진 극장이었다. 물론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들었다. 자연히 벽돌공장에 대한 일은 그녀의 뇌리에서 점차 희미해져갔다. 벽돌도, 춘희도, 벽돌에 혼을 담던 ‘문’도.

그와 동시에 그녀에게는 특이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점차 남성처럼 변해가기 시작했다. 남자 옷을 입었고, 남자처럼 말하고 행동했으며, 심지어는 계집질까지 했다. 더욱더 신기한 것은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그녀의 변화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도 그녀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오직 평대에 들어서는 거대한 극장, 그 웅장한 고래의 형상에 취해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춘희는 철저히 소외됐다. 천부적으로 동물적인 감각을 타고난 그녀의 유일한 친구는 쌍둥이 자매가 데려온 코끼리 ‘점보’와 ‘문’ 뿐이었다. 의붓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문’은 벽돌공장에서 그녀를 돌봤다. 딱히 그녀를 돌봐줄 사람이 없던 것이다. 때로는 평대에서 코끼리 점보와 함께 놀기도 했다. 인간과 동물 사이였지만 그녀는 점보와의 소통이 가능했다. 하지만 어느 날 교통사고로 인해서 점보는 죽고 말았다. 벽돌을 굽던 ‘문’ 역시 죽고 말았다. 그녀는 결국 철저히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어느 날 평대의 극장에서는 커다란 화재가 발생한다. 그 화재로 금복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평대는 유령도시가 되었고, 춘희는 방화 혐의로 잡혀 들어갔다. 감옥 안에서 그녀는 우람한 체구와 괴력 때문에 죄수 결투에 끌려 나가게 되었다. 그녀를 이용해서 돈을 벌어보려던 간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폭력을 원치 않던 그녀는 결투를 위해 배운 기술을 바로 그 간수에게 사용해버렸다. 결국 그녀는 독방에 수감되고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간수는 철가면을 쓰고 철저히 그녀를 유린했다. 하지만 감옥의 시계도 흐르고 흘러 결국 그녀는 다시 평대로 돌아왔고, 다시 벽돌공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벽돌을 만들었다. 벽돌을 만들면 사라진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릴 적에 알고 지낸 사내를 만나게 된다. 춘희는 그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 가족을 부담스러워한 사내는 춘희를 떠났다. 다시 춘희는 혼자가 되고 벽돌을 만들었다. 홀로 아이를 낳았다. 모성애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법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현실에서 결국 아이는 그녀의 품에서 죽고 말았다. 남자는 그녀에게 돌아오던 길에 그만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다. 그녀는 다시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해서 벽돌을 만드는 일 뿐이었다.

먼 훗날 유명한 건축가에 의하여 평대의 벽돌공장 지대가 발견되었다. 그곳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벽돌이 쌓여있었다. 아주 좋은 품질의 벽돌이었다.


3.해학과 자유분방함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라는 팟캐스트의 첫 번째 소재가 바로 천명관 작가의 『고래』였다.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그 팟캐스트를 들었고 그들이 전하는 극찬에 설렜다. 엄청난 해학과 유머, 그리고 기존의 문학에 빚지지 않은 집필양식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하는 기대에서 유래하는 설렘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러한 평가들을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다양한 인물들을 소개할 때마다 그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독자가 그 인물에 대한 확고한 이미지를 그릴 수 있도록 섬세하고 재미난 표현들을 사용한다. 그리고 각종 사건마다 그가 붙이는 사족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것은 XX의 법칙이었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한없이 가벼워지는 일 없이, 어느 순간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가만히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독자는 전혀 다른 책을 읽고 있는 것처럼 참혹하게 뒤집어진 이야기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게 되는 것이다.


4.파이널 판타지

이 소설의 가장 커다란 재미는 무엇일까? 제일의 주인공을 꼽는다면 누가 될까? 누군가가 나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바로 금복이 주인공이며, 금복이 자수성가해 나아가는 과정이 바로 이 책의 가장 흥미진진한 재미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따금 그 유명한 게임인 ‘파이널 판타지’를 떠올렸다. 실로 이 책과 그 게임은 많이 닮았다. 맨손으로 고향을 떠난 그녀가 항구도시로 와서 생선을 말려 큰돈을 벌고 또 다시 왕창 망해버린 뒤 다시 다방을 차리고, 돈벼락을 맞고, 벽돌공장을 차려 마침내 고래 형상의 극장을 짓게 되는 그 과정은 마치 롤플레잉 게임에서 주인공이 하나하나의 임무를 완성해 나가면서, 그리하여 촘촘한 거미줄을 완성하며 결말을 향해 다가감으로써 우리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이 소설의 뼈대와 같은 존재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것이 천명관이라는 작가가 가지는 여러 장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실로 그는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입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소설의 지면에서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가장 대표적일 것 같고, 그와 함께 우리가 흔히 ‘이야기’라는 것을 떠올릴 때 그 개념을 이루는 주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재미거리’를 만들어져 ‘이야기답게’ 구성해낼 수 있는 ‘이야기꾼의’ 재능을 장점으로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금복의 성공가도는 얼핏 보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설이기에 용인될 수 있는 것이고 또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사실 독자들이 가장 편하게 즐겨 읽을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또 가장 갈구하는 것이기도 한 그런 것인 것이다.



4.고래와 삶(실존에의 의지에 대한 반성)

이 책에 대해서는 많은 평론가들이 다양한 평을 내린 바 있다. 그러한 평들에 대하여 이해하기도 하고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며, 공감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공감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내 나름대로는 이 책이 던지고 있는 혹은 품고 있는 중심적 메시지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추려 갈무리 해보는 것이라 하겠다.

책의 제목은 출판사의 영향력이 작용하기도 하지만 문학의 영역에서는 아무래도 작가의 결정이 지배적이지 않나 생각된다. 왜냐하면 책이라는 것을 작가가 만들어낸 일종의 완성된 하나의 세계로 간주할 때 그것에 붙여진 제목이라는 것 역시도 이미 창작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소설이 가진 제목이라는 것은 여타 장르의 책들이 가지고 있는 제목에 비해 그것의 상징성이라거나 혹은 무게감이라고 할 만한 것의 정도가 유난히 중요하고 무겁게 마련일 것이다. 때문에 자연히 소설을 감상함에 있어서는 그것에 붙여진 제목을 힌트로 주제를 추적해 들어가는 것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것이다.

이 책의 제목으로 사용된 ‘고래’라는 소재는 이 책을 집어든 독자로 하여금 대체 이 책에서 ‘고래’라는 존재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기대를 갖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줄거리에서 언급했지만 이 책에서 고래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주인공인 금복이 생선장수와 함께 고향을 떠나 항구마을로 왔을 때였다. 그곳의 모래사장에서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그 거대한 생물체를 봤다. 그것은 이제까지 그녀가 봤던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생물체였다. 그리고 그 웅장함에 그녀는 매료되었고, 그 웅장함이 그녀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삶이라는 것은 그것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그 웅장함을 잊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매료 혹은 집착은 그녀로 하여금 고래의 형상을 한 극장을 짓도록 만든다. 물론 그 모양을 따라 굉장히 웅장한 규모로 지어지게 된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작가는 이러한 금복의 집착을 통해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유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욕구나 야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인생 또는 삶과 어떻게 연결시키고 그것들을 삶의 내부에서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시키며 어떤 위상을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었다. 금복의 경우에는 삶은 있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웅장함과 연결되고 결부될 때만이 비로소 그 존재의 의미를 찾고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얼핏 보면 어리석은삶의 방식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이겠지만, 매슬로우가 주장처럼 욕구위계의 최상단에 위치하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인간이 태생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상정해 볼 때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그러한 자아의 실현을 전제로 해서만이 모종의 의미를 갖게 된다는 주장이 일견 설득력을 얻는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해 이루어진 평론들 중에서 ‘실존주의’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것들이 심심찮게 보이는 까닭도 바로 위와 같은 맥락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로서의 삶에 만족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그로부터 더 나아가서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고 실존으로서의 삶을 완성시키는 단계를 희구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금복이라는 캐릭터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리라는 생각인 것이다.


한편, 이러한 금복의 삶은 그와 대비되는 유형의 삶이 제시됨으로써 더욱 더 극명한 존재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앞서 내가 서술한 바와는 달리 금복의 삶은 분명히 바람직하지 않은 삶의 방식으로 규정되게 되는 듯하다.

그렇게 정반대로 대비되는 삶이란 다름 아닌 그녀가 낳은 딸자식인 ‘춘희’의 것이었다. 지극히 순수 지선한 춘희라는 존재에게 있어 웅장함을 향한 야망이나 자아실현을 통한 실존과 같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을 테다.

실로 그녀의 삶은 다분히 원시적이었다. 아니 오히려 ‘태초적’이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급속도의 발전을 통해 거침없이 번화해가고, 금복의 야망으로 인하여 탐욕과 야망의 절정을 치닫는 도시 ‘평대’에서 비정상적이고 기형적으로 유일하게 ‘태초’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던 존재가 바로 춘희였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리 무모한 진술은 아닐 것 같다.

작가는 춘희를 통해 금복을 통해서 보여줬던 것과는 상이한 모습의 삶에 대한 태도를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그것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춘희라는 인물을 드러내 보일 때마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제시됐던 것 같다. 이를테면 춘희가 교도소에 있을 때 알게 된 ‘청산가리’라는 여자로부터 들은 “산다는 것은 먼지를 닦아내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먼지가 쌓이는 것이다.”라는 말이라든지, 코끼리 점보에게서 들은 “죽음보다 못한 삶은 없다.”라는 말이라든지 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대사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삶에 대한 태도는 존재 그 자체의 소중함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직시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결국 내가 보기엔 금복과 춘희가 보여주는 이와 같은 인생관의 구도를 통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라는 것은 ‘실존’이라는 것, 혹은 ‘자아의 실현’이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존재가 과잉됨으로써 초래되는 결과가 아니겠는가 하는 반성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존엄성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단순한 피조물 혹은 생명체로서의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향해 도약하는 것을 곧 실존에의 의지라고 간주하는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에 부여된 여러 가지 특수한 요소들의 필연적 결과일 수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사고에 불과한 것이고 나아가 결국 스스로를 인간이라는 테두리 안에 철저하게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음으로써 그것이 애초에 의도한 실존이라는 방향보다는 오히려 거꾸로 그 자아를 존재에서 철저히 가둬버리게 되는 역효과를 초래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의식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고래라는 것에 매료되어 그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초월하는 일이라기보다는 결국 인간이라면 당연히 고래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는 존재인바 그것은 지극히 종 특수적인 일이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편 금복의 딸인 춘희를 삶은 어떤가. 일단 그녀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존재다. 정확히 말하면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누구도 해치려 하지 않는 존재다. 인간은 모두 이러한 존재로 태어난다. 하지만 이내 곧 그러한 성질을 상실한다는 점에서 일생을 통해 그러한 삶의 방식을 고수한 춘희는 매우 이례적인 존재가 된다. 유년시절부터 주입된 우리의 도덕적 관념에 기대자면 이러한 인물에 대해서는 그저 ‘착하다’라는 수식어로 간단히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앞서 언급한 맥락과 결부하여 생각해 보자면 이것은 참으로 ‘비인간적인’ 혹은 ‘인간성을 초월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의 방식이다.

즉, 인간이 부여받은 생리적 조건과 환경적 조건을 고려할 때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의 것을 빼앗고, 타인을 미워하고, 더 커다랗고 아름답고 웅장한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춘희라는 인물이 살아낸 삶이라는 것은 이 작품에서 특유의 대비를 통하여 그 의의가 새롭게 부각될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그녀가 타고난 강인한 육체 덕분이기도 했다. 천부적으로 튼튼한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타인을 경계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튼튼한 육체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지독하게 괴롭힌 것이 있었으니 바로 ‘외로움’이라는 것이었다. 단단한 그녀의 피부도 외로움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평대에서 일어난 대화재로 사랑하던 모든 사람을 잃게 된 그녀가 원했던 것은 그저 그 사람들이 다시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는 일이었다. 이것은 진정한 실존이라는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작가가 암시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존재의 과잉으로 인해 야망에 지배당한 금복의 경우에는 오히려 외로움이 침범할 만한 빈틈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배신하고 그녀를 떠나가는 동안 그녀는 그러한 일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야망의 달성을 코앞에 둔 인간의 시야는 오직 자신의 존재로만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의 과잉으로 인해 인간은 외로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외로움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직 인간적인 채로 있다는, 그리고 진정한 실존에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지도 모른다.


5.맺는말

최근 듣기 시작한 팟캐스트가 하나 있다. <이동진의 빨간책방>이라는 팟캐스트인데 이 프로그램의 첫 소재로 채택된 것이 바로 천명관의 『고래』였다. 널리 알려진 『B1/F1』을 쓴 작가 김중혁과 함께 진행된 독서 대담에서 이 책을 묘사함에 있어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수사는 역시 ‘웅장함’이 아닐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실로 이 소설은 웅장하다. 물에 떨어뜨린 잉크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힘을 가지고 있고 그 속에서 아주 작고 반짝반짝 빛나지만 쉽게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핵심 알맹이로 품고 있는 그런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것은 작가가 우리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었을 테고, 그 책 속에 지어진 세상 속에서 작가가 목격한 모종의 진리였을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고 작가의 시선에 공감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겠으나 그러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다.’라고 말 할 수 있을 만큼 촘촘하게 혹은 성겁게 짜인 거미줄 같은 이 소설을 탐험해 나가매 그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는 생각이다.

굳이 줄이자면 그것은 매우 달콤한 꿈을 꾸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꿈과 작별해 나가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끝-



문장연습-미안해요







문장연습-미안해요


“미안해요.”

“아니 괜찮아. 어쩔 수 없이 속이 쓰리기는 하지만 또한 어쩔 수 없이 이런 전개를 예상하기도 했어. 예나 지금이나 나는 마음 놓고 온 힘을 다해 상심할 수는 없는 종류의 인간이니까 말이야.”

“예상했던가요? 이런 결말을?”

“그랬던 것 같아. 어쩌면 모든 게 다 끝나버린 마당에 와서 애써 자기를 달래 보기 위한 방어기제의 작동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어렴풋하게나마 이런 스토리를 직감했고, 나아가 어느 정도는 그것을 원하기까지도 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게 중요하지. 구체적으로 예상했더라도 결국에는 바꿀 수 없는 일이라는 것과, 어쩌면 이런 비극을 내가,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세계의 이성이 원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 말이야.”

“위로가 되네요. 하지만 여전히 저는 미안한 걸요.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저는 이미 저의 마음과 당신의 마음을 너무 진하게 다 읽어버렸어요. 어째서 이렇게 부조리할까. 어째서 나는 이것들을 모두 다 알아버리게 된 걸까. 알아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아요.”

“그게 바로 내가 너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지. 자의든 타의든 당신의 존재에는 그런 성질이 뿌리박혀 있는 거야.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걸 할 수 있는 소질을 너는 가졌지. 그에 비하면 나 역시도 범인에 불과해. 어쩌면 내 역할은 당신의 그 가능성을 눈 뜨게 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바 있어. 일단 나에게는 그것으로 된 거야. 일단 각성을 했다면 그것으로 세상에는 축복이라고 생각하니까.”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건가요? 당신의 역할만 완수된다면 자신의 존재는 어떻게 할 건가요. 나를 미워하거나 그래야 하는 것 아녜요? 슬프지 않나요? 이런 당신을 볼 때면 그 마음이 의심스럽기까지 해요. 지금의 저는 그렇지 않겠지만 세상의 눈은 분명히 그럴 거라고요.”

“그런 수준은 이미 지나왔다고 생각을 해. 무엇보다 내 안에 숨 쉬고 있는 사랑의 기억들이 나에게 그런 수준의 사랑을 허용하지 않지. 나는 사랑이 의지의 문제임을 아는 인간이라니깐. 어때 너 정도라면 무슨 얘긴지 이해할 텐데. 이건 사랑의 원래 모습에 대한 이야기라고. 나의 존재는 슬퍼할 수도, 원통해 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것은 별개의 문제야. 물론 이따금 의지가 약해질 수도 있고 그리하여 너를 놓아버릴 수도 있어. 그것은 정말 가장 슬픈 일이지만 그것마저도 사실은 괜찮은 거야. 어쨌든 나와 세상과 신이 가지는 기억은 영원히 존재할 테니까. 그래 영원히 말이지. 그게 중요해.”

“그렇다면 당신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뭐죠?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는 건가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실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 아닌가요?”

“글쎄 딱 부러지게 부정할 수는 없어. 내가 이렇게 너를 향한 의지를 가진 이상, 그리고 그 의지의 특성상 답장을 기다리는 심정과도 같이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를 바라고 원하고 기대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아니 사실은 무엇보다 간절히 바라고 있고, 당신의 마음이 나의 방위를 향할 리 없음을 확인할 때마다 나는 남몰래 잘 익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걸. 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진정한 바람은 당신의 의지가 당신의 참뜻에 일치하는 일이야. 자신의 감정에 극단적으로 솔직하고 충실해지는 일. 내가 무엇을 바라든 오직 당신의 뜻대로 해야 하지. 그것이 나로 인한 당신의 의무이고, 그렇게 당신은 나에게 있어 신이 됩니다. 짐이 너무 무거울 수도 있어. 그 의무는 아가 당신의 의지가 향하는 상대방에게도 같은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니까 말이야. 결국에는 나의 이 심정을 똑같이 경험하는 날이 당신에게 올지도 모르는 일이야. 누군가는 또 신이 되겠지. 아니면 모두 함께 완전한 인간의 지위로 추락하거나……. 뭐 그렇게 둘 중 하나일 것 같구나.”

“그건 너무 가혹한 걸요.”

“가혹하든 행복하든 어차피 한 번의 생이고, 한 번의 인연이야. 진지하든 유흥으로 삼든 고문이든 위로든 인간의 관계에서 달라질 것은 별로 없어. 그러니 우리는 무척 다양한 선택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거의 아무런 선택을 하지 못하는 거지. 그것이 길이라면 가야해. 물론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얘기겠지만.”



사실은 가만히 ‘헤’ 하고 웃었을 것을.









밤은 노래한다

저자
김연수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08-10-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청춘들의 가슴 아픈 노래! 역사와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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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 독후감

1.소개

2.구성

3.줄거리

4.민생단 사건

5.민족과 이념

1)실존주의로의 피신

2)실종과 죽음의 모티브(현실 직시)

3)해방으로의 방법론

4)유토피아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인간

6.기타총평

1.소개

이 책은 김연수 작가의 손에 의해 2008년에 세상에 나온 작품이다. 작가 김연수는 1970년생으로 작가세계문학상, 동서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7번 국도』, 『굳빠이 이상』,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대책 없이 해피엔딩』, 『7번 국도』, 『원더보이』 등이 있다.

이 책 『밤은 노래한다』는 1930년 대 일제강점기 당시 간도 지방에서 우리 민족이 겪어야만 했던 시련을 극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민생단 사건’을 주요한 소재로 하여 그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매우 섬세한 구성과 아름다운 문체로 그려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해보니 이 책은 내가 처음으로 접하는 김연수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그 이전까지 읽은 그의 글이라고는 문학상집에 들어있는 단편들과, 그의 단편집인 『세계의 끝 여자친구』 뿐이었다. 때문에 지금까지의 나는 그의 단편만을 보고 그를 정의내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장편을 처음 접하는 입장에서 알 수 없는 흥분마저 느껴졌다. 그것은 그 이전까지 세간에서 말하는 ‘김연수의 글에서 느낄 수 있는 성스러움’을 나는 좀처럼 느낄 수 없었고 때문에 당연히 그에 대해 동의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슬며시 눈치를 보며 ‘글쎄 나는 그 작가의 글은 나랑은 안 맞는 모양이다.’라고 에두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작가 김연수를 확실히 다시 봤다고 자신할 수 있고, 또 흔히 말하는 ‘작가 김연수의 성스러움’을 체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이 책은 나에게 적지 않은 감동과 전율과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2.구성

우리가 읽는 소설들을 보면 이따금 자유롭게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넘나들면서 사건을 아주 흥미롭게 풀어나가는 작품들이 있는데 이 소설도 바로 그러한 유형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경우에는 자유로운 경지를 초월해서 다소 정신없다고 할 정도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서사적 전개’라는 관념으로부터 철저히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즉 미래로 흘러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과거를 진술하는 챕터가 등장하거나 혹은 한 챕터의 흐름 안에서 주인공의 심리변화에 따라서 번쩍이듯 과거로 돌아가는 장면들이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그 때문에 조금만 방심하면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지만 일단 작가의 이런 글쓰기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나의 정신세계나 독서 역시도 그 작품을 닮아서 한껏 자유를 만끽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 소설에서 내가 인상 깊었던 요소는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라고 할 수 있는 흔적들이다. 보통의 작가들의 경우에는 이야기의 전개가 산만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중심이 되는 등장인물들을 최소한으로 압축시켜 놓고 마치 세상에 그들만이 존재하고,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인 것처럼 풀어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에서 작가는 잠깐 스쳐지나가는 길 안내원 한 명에게까지도 모두 이름을 붙여주는 정성을 들였다. 이런 섬세한 신경은 역시 전개를 산만하게 하는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작품의 스케일이 대폭 넓어지고, 이야기의 현실감이 증강된다는 감정을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3.줄거리

이야기는 1928년 만주에서 시작된다. 당시 만주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 많은 조선인들이 건너가서 척박한 땅을 개발하고 여기저기에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그 중 용정이라는 도시에는 4명의 중학생들이 있었으니 그들의 이름은 안세훈, 박도만, 최도식, 이정희다. 이들은 평우동맹이라는 공산주의 학습 동아리에서 만나 알게 됐는데 박도만과 최도식은 모두 함께 이정희를 짝사랑했다. 하지만 이정희는 그 어떤 남자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여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경찰에 의해서 이정희와 안세훈이 체포되는데 문제는 검거 당시 두 사람이 함께 있었고 그래서 그 당시 두 사람이 정사를 나누고 있었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거였다. 그 소문에 박도만과 최도식은 크게 흔들렸고, 안세훈과 이정희가 훈방조치된 이후에도 네 사람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아 결국 평우동맹은 해체됐다. 이정희는 아버지에 의해서 서울로 보내졌고, 안세훈은 농민혁명을 위해서 시골로 흘러들어갔으며, 최도식과 박도만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최도식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검거되어 구속된다. 최도식은 지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입을 열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았고 동시에 상대적으로 적은 형량을 치르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런데 형을 적게 살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동료들을 팔아넘긴 게 아니냐는 거였다. 최도식은 정말 억울했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믿고 있는 상황 속에서 점차 정말 자신이 동료들을 팔아넘긴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그렇게 믿어버렸다. 결국 그는 자신의 적이었던 일본 총영사관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신세로 전락했고, 박도만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별동대의 대장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친다.

주인공인 김해연은 1932년 봄에 만주로 왔다. 경남 통영 출생인 그는 서울 고등공업학교 측량과를 졸업한 엘리트였고, 그런 이유로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만주 철도 회사에 취직해서 측량기사로 일하게 되었다. 조선인이었지만 경술국치에 태어난 그는 나라를 잃은 설움에 대해서 그다지 큰 감흥이 없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나라는 이미 조선인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뺴앗긴 조국을 되찾는 것보다는 자신의 출세가 더 중요하게 다가왔다.

용정으로 발령받은 그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가 박길룡이라는 사내를 소개받는다. 그는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중국공산당원이었는데, 김해연의 사상을 떠보기 위해서 민생단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김해연은 그 제의를 거절했고 박길룡은 그를 포섭하기 위해서 김해연과 이정희의 만남을 조작한다. 김해연은 그것이 철저한 우연이라고 철썩 같이 믿은 채로 이정희와 만났다. 서울 이화여전 피아노과를 졸업한 이정희는 그곳에서 박길룡에 의해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이정희는 진심 반 거짓 반으로 김해연에게 접근했고 김해연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어느새 이정희도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김해연은 고민 끝에 그녀에게 청혼했고 그녀는 반지를 받아들였다. 만주에서 일하던 김해연은 만철 직원들을 경호하는 경호중대장 나카지마 타츠키와 제법 친분이 있었다. 시시한 인간은 모두 경멸하는 나카지마였지만 김해연은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김해연의 소개로 이정희를 알게 되는데 사실 그는 그 이전부터 이정희를 알고 있었다. 박길룡은 김해연을 작업하기 이전에 나카지마에게 이정희를 접근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이정희나 나카지마나 모두 모른체하고 아무렇지 않게 관계를 이어나갔다. 그즈음 일본 총영사관에 들어간 최도식은 전향한 척 하면서 중국공산당에게 일본군의 정보를 빼돌리고 있었다. 이정희 역시 그런 목적으로 나카지마에게 접근했지만 정작 정보를 빼돌리지는 못했다. 이정희는 나카지마로부터 일본군 토벌대가 대성촌이라는 곳을 토벌할 것이라는 정보를 획득해서 박길룡에게 보고하지만 박길룡은 그곳에 사는 안세훈을 죽도록 내버려두기 위해서 그 정보를 대성촌에 전달하지 않았고 결국 안세훈은 토벌대에 의해서 목숨을 잃는다.

어느 날 아침 회사에 출근한 김해연은 어떤 아이로부터 편지 한 통을 전해 받는다. 어떤 남자가 전해주라고 했다는데 그 편지의 주인공은 이정희였다.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힌 그는 이정희에게 가보고자 길을 나서는데 나서자마자 일본 형사에게 붙잡혔고 조사를 받았다. 일본 형사가 말하기를 이정희는 목을 매달아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김해연에게 사실 이정희는 안나 리라는 이름의 공산당 조직원이고 계획적으로 그에게 접근했던 것이라고, 그녀가 진짜 사랑했던 사람은 박타이라는 남자라고 말해줬다. 그는 이정희가 자신을 수단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김해연은 박타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야 용정에 처음 왔을 때 소개받았던 박길룡을 떠올릴 수 있었다.

실없는 조사를 받고 풀려난 김해연은 실연의 상처를 다스릴 수 없어서 대련의 아편굴을 전전했다. 아편에 의지하지 않고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없었다. 한참을 방황하던 김해연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용정으로 돌아왔다. 나는 나카지마가 정희와 정분을 나눴다는 이유로 일단 나카지마부터 찾아갔다. 김해연을 보고도 나카지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반응을 보였다. 자신을 죽이라며 총을 내미는 나카지마를 김해연은 차마 죽이지 못했다. 나카지마는 이정희가 자살을 할 리 없다고 말했다. 김해연은 최도식을 찾아가 정희가 목 멘 나무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최도식은 그에게 이정희의 편지를 돌려줬다. 김해연은 이정희를 따라 죽으려고 그녀가 목을 맸다는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을 시도하지만 가지가 부러져 죽지 못한다.

겨울이 찾아왔고 죽음에도 실패한 그는 팔가자라는 마을로 흘러들었다. 연인을 잃은 슬픔은 그에게 실어증을 가져다주었다. 그곳에 있는 사진관에서 일하며 그는 겨울을 보냈다. 속을 알 수 없는 그를 그곳 주민들은 못 미더워 하는 눈치였지만 봄이 오면서, 그리고 길송이라는 사진관 직원과 대거리를 한 판 하면서 속을 털어놓게 되자 모두 그에게 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또 다시 누군가를 잃는 게 두려워 그조차도 선뜻 반갑지 않았다.

하숙집에는 여옥이라는 심부름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야학에서 공산주의 혁명에 눈을 떴고 야학 교사와 사랑에 빠졌다. 교사는 그녀에게 바다를 보여주겠노라 약속했지만 대성촌 토벌 때 안세훈 처럼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면서 그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됐다. 연인을 잃은 그녀는 복수를 위해 공산당의 연락원 일을 도맡아 했다. 발이 빠르고 부지런한 그녀였다.

그 마을에서 생활하면서 김해연은 자신이 빛이기도 하고 어둠이기도 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로 인해 정희를 이해하면서 조금씩이나마 정희를 잃은 상처를 극복해 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사진관에서 일하는 길송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여옥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던 김해연은 결국 어느 밤 여옥과 사랑을 나눈다. 여옥도 그를 사랑하게 됐다. 김해연은 여옥과 함께 서울로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떠나기 전 온 마을 사람과 함께 여옥의 언니 결혼식을 방문했다가 일본군 토벌대의 습격을 받아 여옥은 한 쪽 다리를 잃었고, 김해연은 지긋지긋한 무력감 때문에 다시금 절망에 빠졌다. 김해연은 중국 공산당 동세영의 추천으로 정치 학습을 받게 되었고, 조선인 소비에트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여옥은 한 쪽 자리를 잘라내는 수술을 하고, 공산당 재봉대에서 일하게 되었다.

김해연은 정치 학습을 받았다. 머리로는 그 이론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온전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여옥이 그리웠다. 공산당 별동대의 박도만이 여옥에게 그의 편지를 전달해주었다.

그리고 그즈음 해서 민생단 사건이 터지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에서는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의 연합인 민생단이 일본의 세력을 힘입어 만주에 조선인 자치구를 만들려는 움직임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거듭되는 토벌대의 습격을 중국공산당 내부에 민생단의 첩자가 숨어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하부 조직의 구성을 빈농이나 중국인으로 하라는 방침을 내리고, 민생단과 조선인 민족주의자와 파쟁분자들을 척결하는 운동을 벌였다.

날마다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민생단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어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따금 도망치는 조선인들은 그들이 진짜 민생단이라는 혐의를 굳건히 만들어줬다. 급기야는 박도만과 김해연마저 민생단으로 몰려 처형될 위기에 처했다. 처형만 기다리며 감금되어 있던 차에 여옥이 찾아왔다. 그리고 처형의 직전이라는 위기의 순간에 박길룡이 나타났고, 김해연이 속해있던 조선인 소비에트 공동체의 간부에게 역으로 혐의를 씌워 처형함으로써 박도만과 김해연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박길룡은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이 조선인들에게 누명을 씌워 죽여버리는 행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때 때마침 일본군 토벌대가 쳐들어와서 유격구의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쳤다. 박길룡 덕분에 목숨을 구한 박도만이었지만 그는 박길룡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민족주의자인 박길룡과는 달리 박도만은 조선이 혁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단 민족은 잠시 접어두고 중국 혁명에서 성공해서 그 혁명의 영향력을 조선으로까지 확대하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산으로 피신한 후에 박도만은 박길룡을 직위해제시킨다는 당의 문건을 들이대며 사람들에게 박길룡을 체포할 것을 제안했지만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었다. 이미 사람들은 조선인에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씌워 마구잡이로 죽여버리는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 상태였던 것이다. 결국 박도만은 박길룡에 의해 민생단이라는 누명을 쓰고 살해당했다.

토벌대의 포위를 뚫기 위해서 김해연은 혼자 몰래 산을 빠져나가 용정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김해연은 일 년 전 자신에게 편지를 갖다 주었던 아이를 우연히 목격하고는 그 아이에게 그 편지를 누가 준 것인지를 캐물었다. 아이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지만 최도식의 인상 착의를 묘사했을 때 아이의 표정은 확연히 달라졌다.

김해연은 나카지마를 납치해서 일행들이 있는 산까지 끌고 와서는 토벌대의 포위를 풀고 다함께 도망쳤다. 그들은 천리봉 너머에 있다는 조선인들의 마을로 갔다.

몇 년이 지나 1941년 8월 김해연은 용정으로 돌아와 최도식을 찾아갔다. 그는 최도식에게 정말 이정희가 자살한 것인지 당신과 박길룡이 죽인 것은 아닌지 물었다. 이정희는 김해연에게 누명을 씌우는 일을 거부하다가 죽었던 것이고, 진짜 첩보원은 총영사관에 근무하던 최도식이었다. 이정희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그녀의 마지막 소원은 김해연에게 그 편지를 전달해 달라는 것이었다. 김해연은 최도식을 죽이려 하다가 그의 아이들을 보고는 그만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이정희와 함께 머물던 영국더기에 올라 옛날의 추억에 잠겼다.


4.민생단 사건

‘민생단 사건’은 이 소설의 중요한 소재다. 작품의 초반부에는 순정 소설 같은 분위기로 나아가지만 어느새 중반부에 이르면 역사적으로 큰 아픔을 간직한 사건의 한복판에서 대부분의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했다.

만주사변 이후 조선인의 자치를 주장하며 일본의 만주 침략을 옹호하는 민생단이 간도 지역에 설립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간도의 중국공산당과 항일유격부대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조선인 당원과 부대원들이 일제에 협력한 민생단 단원으로 의심받기 시작했다. 결국 1932년 11월부터 1936년 2월까지 ‘반(反)민생단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진행되었다. 1983년 중국공산당 연변주위 조직부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모두 497명이 체포되어 367명이 살해되었다. 하지만 이는 확인된 인원에 국한된 것으로 실제 피해자의 규모는 훨씬 많아 1천여명이 체포되었고, 500명 이상이 살해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민생단 사건이 진행된 1933년 9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조선인이 대부분이었던 옌지[延吉]ㆍ왕칭[汪清]ㆍ훈춘[琿春] 등 3개 현(縣)의 공산당원 숫자가 1,299명에서 181명으로 86.1%나 감소되었다는 통계도 있다. 일본군의 군사 토벌로 희생된 인원을 감안하더라도 이 사건으로 빚어진 피해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일제의 군사 토벌로 죽은 사람보다 민생단 사건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조선인 항일운동가가 피해를 당하면서 간도 지역의 항일 운동 자체가 크게 위축되었다. 특히 항일운동의 경험이 풍부한 간부들 가운데 상당수가 체포ㆍ살해되거나 위험한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쳐 버리면서 항일 조직 자체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까지 놓이게 되었다. 또한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민생단 단원이라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처형되는 모습을 보면서 항일운동에 가담한 조선인의 사기도 크게 떨어져서 포기하고 도피하거나 일본에 귀순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 결과 1931년과 1934년 사이에 간도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한 인원이 80% 이상 줄었다는 통계도 있을 정도로, 조선 이주민이 대다수를 차지했던 간도 지역 항일 운동은 큰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간도뿐 아니라 만주 전역에서 조선인에 대한 경계와 배척이 확대되어 항일 연합전선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만주사변 이후 만주 지역에서는 여러 민족과 계층이 힘을 합해 항일의용군, 국민구국군, 민중자위군, 항일연합군 등을 조직하여 대일 항전을 벌였다. 중국인 사회에서 조선인에 대한 불신과 경계가 커지는 상황에서도 이청천(李靑天)이 이끄는 한국독립군과 양세봉(梁世奉)의 조선혁명군은 북만주와 남만주에서 구국군 등과 공동으로 대일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민생단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선인에 대한 불신과 배척은 더욱 커졌고, 중국공산당 내부에서도 중국인 간부들이 조선인 항일운동가 대부분을 민생단으로 몰아 탄압하면서 민족 갈등이 확대되었다.

이는 조선인이 95%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간도 지역의 중국공산당과 항일유격부대의 약화를 가져와 결국 1936년 초에는 만주 지역에서 가장 세력을 떨치던 간도의 항일유격구를 포기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 항일운동 세력의 구성 등에도 변화를 가져와 해방 이후의 역사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5.민족과 이념

1)실존주의로의 피신

작품의 초반에서 주인공 김해연은 나카지마와 니시무라의 사상에 은연중에 공명을 느꼈다. 그 두 일본인은 모두 국가와 민족에 의해 규정되는 자아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결단을 내리는 자아였다. 다시 말해 국가와 민족 보다는 인간의 조건에 매료된 자들이었다. 물론 그들의 그런 사상은 결과적으로 일본제국의 야망에 보탬이 되는 것이었지만 일단 그들의 동기는 조국이 아닌 그들로부터 주체적으로 나왔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영향을 받는 주인공 김해연은 경술국치에 태어난 조선인으로서 조국의 독립보다는 자신의 취업을 더 우선시 하는, 일종의 기회주의자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런 그의 행위 이면에는 모종의 실존주의가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다시 말해서 민족이나 조국과 같은 것들을 자신의 존재를 구속하는 족쇄로 규정하고는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서 자신의 진정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 그를 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하이데거를 떠올렸다. 위대한 독일의 철학자이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나치에 부역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인류의 실존을 꿈꿨던 그는 인간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은 ‘사유’이며 이러한 사유는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보다는 전쟁이나 국난이 일어나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현실에서 더욱 더 잘 발달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유는 좀 다를 수 있겠으나 나는 김해연이 민족의 독립을 외면하고 그 양심적 피신처로 실존주의를 택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2)실종과 죽음의 모티브(현실 직시)

하지만 세상은 그를 그렇게 안전한 곳에 안주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비록 조국의 독립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결국에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카지마가 김해연에게 말한 ‘사랑을 하라’는 말의 의미는 어쩌면 사랑을 하는 사람을 곧 지킬 것이 있다는 사람이고 또 잃은 것이 있다는 사람인 바 결국에는 무엇엔가 목숨을 바치고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는 운명의 굴레 속으로 뛰어든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나카지마의 말에 자극 받은 탓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김해연은 이정희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정희가 죽게 됨으로써 그는 그 굴레 속으로 뛰어들게 혹은 던져지게 되었다. 사랑하는 것, 지켜야 하는 것을 상실함으로써 그는 상심한다. 아편에도 취해보고, 벙어리 행세도 해보지만 한 번 사랑에 맛을 들인 인간은 결국 다시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이정희의 아픔을 극복한 김해연은 여옥과 사랑에 빠졌다. 사랑에 빠진 그는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는 것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을 직감하고는 여옥과 서울로 도망가기로 결심하지만 운명은 그들을 놓치지 않았다. 죽진 않았지만 여옥은 다리를 잃었고, 김해연을 이웃으로 받아준 팔가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토벌대에 의해서 살해당했다. 결국 김해연은 다시 그 운명의 굴레로 들어가게 되었고, 완전히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3)해방으로의 방법론

당시의 만주는 북진하는 일제에 맞서서 다양한 세력들이 활동하고 또 연합하는 공간이었다. 때문에 각 세력에 따라서 내세우는 투쟁의 방법론이 제각기 달랐다.

중국공산당을 상징하는 강정숙의 경우에는 “지주들의 정의도, 농민들의 정의도 모두 존중해야 한다는 말은 대단히 그럴 듯해 보이지만, 그건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자기 잇속을 챙기려는 망명자들이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 대사를 읽으면서 내가 떠올린 것은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그람시였다. 그람시는 당시 이탈리아의 큰 문제는 지주 계급과 농민 계급의 갈등이었다. 그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그람시는 지주들의 이데올로기에 맞서기 위해서는 농민과 지주들의 입장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포용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중국공산당의 입장은 이러한 그람시의 주장에 완전히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지주들을 혁명의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지주들은 일제와 마찬가지로 오직 척결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 중국공산당의 주장을 바라보면서 김해연은 자신이 마음이 도저히 그런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한편으로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의 경우에는 모종의 유토피아를 상정하는데 그 유토피아는 다름 아닌 조선이라는 민족이 모두 함께 행복한 그런 사회다. 해방 이후 민족주의 계열이 중심이 된 현재의 남한 사회가 어쩌면 불완전하게나마 그들이 그린 유토피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때문에 그들의 경우에는 지금 당장은 세력이 약하여 아쉬운 대로 중국 공산당에게 의탁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공산 혁명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유일한 적인 지주가 아닌 일제일 뿐이고, 공산당이라고 민족의 독립에 장애물이 된다면 척결의 대상이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여러 가지 갈등으로 표면화 된다. 우선 박도만의 경우에는 톨스토이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자신이 갈등했음을 고백한다. 이를테면 인류애와 프롤레타리아 혁명 사이에서의 갈등이다. 처음에는 그도 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이 톨스토이에 향해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지만 투쟁에 참전하고 사람을 죽이면서 톨스토이는 가슴 깊이 묻고 공산주의라는 총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현실 직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중국공산당과 민생단의 갈등 역시 이런 맥락이다. 민생단은 간도에서의 조선인 자치를 위해서 일제에 붙었고, 그게 못 마땅했던 중국공산당은 자기 조직 내부의 조선인들을 의심하여 민생단이란 누명을 씌워 죽여버린다.

이야기의 후반분에 나오는 박도만과 박길룡의 최후의 장면은 이러한 갈등이 극도로 치닫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박길룡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전 중국공산당 동료들에게 처형될 위기에 처한 박도만은 비록 죽더라도 동지들에게 죽어서 다행이라고 자신의 떳떳한 죽음을 받아들이며 끝까지 혁명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박길룡에 의해서 그런 중국공산당의 세력이 몰살되고 목숨을 부지하게 되자 그는 오히려 박길룡에 반대한다. 민족보다는 지금 당장의 중국혁명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인 목표는 조선혁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조선인이 아닌 중국공산당의 편을 드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렇다면 우리는 박길룡의 입장이 전적으로 옳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반드시 박도만을 죽여야만 했을까?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 중국공산당과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4)유토피아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인간

일단 소설에서는 그런 화합이 당장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역사적으로 독립 직전에 항일연합투쟁의 성과가 나타나긴 했지만 사실 우리 입장에서는 먼저 만주의 조선인들을 학살한 것은 중국공산당이다. 어쩌면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 방향이 민족주의로 조금이나마 치우치게 된 것은 중국공산당의 민생단 사건의 영향이 컸으리라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박길룡은 사람들을 데리고 유토피아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떠난다. 이것은 실존주의로 도피했던 인간이, 그러니까 현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의 존재를 스스로 규정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던 인간이 결국에는 현실을 마주해서 좌절을 거듭하다가 현실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에는 유토피아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는 모종의 상징적 구도를 전달해주는 것 같다는 인상이다.


6.기타총평

김연수의 이 장편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몇 번이나 다양한 이유 때문에 감탄에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문학적 성스러움’을 알려준 그 수려한 문체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가 이 소설에서 보여준 그의 해박한 상식 때문이었다.

주된 소재가 되는 민생단 사건은 물론이거니와 일단은 등장하는 일본인의 이름이나 표기에서 볼 수 있는 한자적 지식과 중국지방의 지리적 지식, 그리고 북쪽 지방 사람들이 구사하는 방언은 그가 이 소설을 위해 얼마나 연구를 했는지 알 수 있게 해줬다. 심지어는 김해연이 이정희를 잃은 아픔에 찾게 되는 아편에 있어서도 그것을 피우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장면에서는 정말이지 ‘참 별 걸 다 안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티를 하나 잡자면 204페이지에 나오는 민생단 관련 자료는 어딘가에 나오는 자료를 너무 그대로 갖다 붙이고 약간만 수정한 티가 많이 나서 좀 아쉬웠다고 하겠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김연수 식의 유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은 초반부의 로맨스와 중반부의 역사적 사건의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인간사를 이루는 것 같은 형세를 보여주는데 그 초반부에서는 김연수의 수려한 문체를 포함해서 유머 또한 만날 수 있다. 아무래도 아직은 주인공인 김해연이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실존주의라는 진통제에 취해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으리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나는 그러한 장면들을 보면서 몇 년 전에 개봉한 영화 <모던보이>를 떠올렸다. 박해일, 김혜수, 김남길이 주연한 이 영화는 이 소설과 약간 비슷한 모티브를 가지고 있다. 즉 친일파 부호의 아들로서 일제강점의 세상에서도 억울한 줄 모르고, 나라 잃은 설움도 모른 채로 희희낙락 살아가는 박해일에게 계획적으로 공산주의 민족운동가 김혜수가 접근하고 어느 날 김혜수가 사라진다. 그때부터 박해일은 조국을 잃은 현실에 직면하게 되고, 절친했던 일본 검사 김남길은 박해일을 인정사정 없이 고문하기도 한다. 여하튼 모티브도 그렇고, 초반의 유머러스한 부분도 그렇고 이래저래 닮은 점이 많은 두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책을 덮으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너무 많은 생각이라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데카르트의 존재 증명이 의심스러워질 정도로 머리가 복잡했다. 그것은 그만큼 이 책이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가볍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테다. 이 책은 대중성, 역사성, 문학성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내 나름대로 정의를 내려 봤다. 다시 말해서 초반부의 로맨틱한 문장이 대중들의 마음에 어필할 만하고, 민생단 사건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그러한 역사적 사건 속에서 개연성 있는 또 하나의 사건들을 펼쳐나가면서 민족과 인간의 문제를 고찰해낸 작품이라는 것이다. 국사 공부를 하면서 몇 줄의 문장으로만 읽고 지나갔던 민생단 사건을 하나의 서사 속에서 경험하면서,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과 공기와 제도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로 이루어진 지층 위에 돋아난 생명들인지 어렴풋하게나마 더듬어볼 수 있었다. 그들은 그 당시에 공산당원인 동시에 일제의 앞잡이여야만 했던 사람들이었다. 떳떳하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보람 있게 죽어갔던 사람들과는 달리 처절하게 후회하면서 억울하게 죽어가야만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는 경쟁적으로 다루어지는 무수히 많은 독립의 줄기들에 가려져 좀처럼 주목을 받지 못하는 불운의 존재들이었다.


-끝-







알랭 드 보통의 불안 독후감상문

 

이 문서는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고 작성한 독후감이다. 문학서적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이 책은 사회/철학적 내용을 다루고 있다. 현대인이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독특한 종류로서의 불안의 원인과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데 작가의 독특한 시선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있다고 보여지는 책이다.

 

1.소개

2.현대의 초상-불안

3.불안의 생김새

4.불안의 성장과정

5.불안의 극복

6.나의 불안

 

1.소개

알랭 드 보통은 1969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났으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93년에 발표한 처녀작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부터 발표하는 소설마다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뒤이어 <여행의 기술>을 출간하여 평단으로부터의 찬사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다음 작품이 가장 기대되는 작가로 꼽히는 드 보통의 저서들은 현재 20여 개의 언어로 번역 출간되어 세계 각국에서 수십만 부씩 팔리는 베스트셀러이다. 2000년의 역사를 꿰뚫으며 경제적 능력으로 규정되는 사회적 위치에 대한 불안의 문제를 다룬 <불안>은 2004년에 발표한 최신작이다.

우리나라에서 작가로서의 그의 이름은 꽤나 많이 알려져 있다. 그가 쓴 책들도 마찬가지이며 인터넷 서핑을 하다보면 심심찮게 그의 책들을 발견할 수 있기도 하다. 사실 나는 이 책을 문학서적인 줄 알고 구매했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제목이 철학 서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단순했기 때문일까? 아무튼 책을 펼치는 순간 문학을 기대했던 내 눈에 사회ㆍ철학적 내용들이 읽힐 때의 당황스러움을 나는 쉽게 잊지 못한다. 제목처럼 이 책은 ‘불안’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 불안도 좀 독특한 불안에 대한 것이다.

책의 구조는 크게 현대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독특한 불안의 <원인>과 <결과>로 나뉘어져 있다. 현대사회의 사회구조를 심리학적 모티브를 중심으로 고찰하고 있다는 데에 그 독창성이 있을 것 같고, 예술과 철학과 역사의 분야에 있어서도 많은 연관을 시도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현대인의 시각을 교정하고 사고의 전환을 꾀하게 하는 무수한 시도들이 바닷가의 아름다운 모래처럼 빛난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2.현대의 초상-불안

이 책에서 작가가 묘사하는 현대인의 모습은 매우 암울하고 심지어는 불쾌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진보해가는 현대 문명의 이기를 목도하며 살아가고 그 진보의 한 일원으로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갈지도 모르지만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고 또 목격하는 세계의 이면의 것들을 지적한다.

이제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우리는 철저히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게 된다. 작가의 눈에 비친 세계는 눈부신 산업발전의 껍질 밑에서 썩어 들어가고 염증과 고통에 신음하기를 멈추지 않는 현대인들의 군상이다. 그들은 애써 그런 고통을 외며한 채 자신들 위에 군림하는 근대 이후의 이상에 동조하고 있지만 그들의 표정을 한 꺼풀 벗겨버리면 고통스러운 진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현대인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인은 바로 불안이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확실히 우리가 그 어떤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 주장에 동의할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불안에 시달린 것은 비단 현대의 일에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니고 인류는 역사상 언제나 불안에 시달려 왔다는 이유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인류가 겪는 불안이라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작가는 불안의 영역을 다소 한정짓기로 했다. 즉 그냥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바로 ‘지위에 대한 불안’이라는 것으로 말이다. 따라서 불안에 대한 작가의 정의를 대입한다면 현대 사회라는 것은 무수한 인간들이 문명의 이기에도 불구하고 ‘지위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시기로 규정지어진다.


3.불안의 생김새

작가의 이야기 중에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두 개의 주제가 있다. 하나는 불안이 우리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메커니즘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러한 불안이 생겨나서 구체화되고 오늘날 같은 영향을 갖추게 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우선 전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우리가 지위에 대해서 불안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지위를 가지고 싶은데 현실적으로는 갖지 못해서 절망에 빠지거나 설사 그러한 지위를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영원히 고수할 수 없음을 알기에 경험하게 되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작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또 동의할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와 우리 주변인들을 관찰해보면 이는 실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다. 특히 1997년 IMF 사태 이후로 국내 시장의 고용 불안정이 심화되면서 명예퇴직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고, 그로부터 십 여 년이 지난 지금은 그러한 어려움이 세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청년 실업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기성세대는 지위를 유지하지 못할까봐 하루하루를 노심초사하며 살아가고, 새로운 세대는 갈망하는 지위에 도달할 방법의 부재 앞에서 끊임없는 좌절을 경험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매우 독특한 분석을 제시한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로 우리가 그런 지위로 인해 겪는 불만의 원인이 그런 지위에 결부되어 있는 경제적인 요소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작가는 여기서 한 층 더 깊이 들어가서 바로 사랑에 대한 욕구가 그러한 불안의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지위를 추구하는 동기와 관련된 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지위를 추구하는 근본적인 동기는 경제적인 요소가 아니라 사랑으로 대표되는,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얻기 위함이라는 것이며, 나아가 작가는 지위라는 것을 사랑을 얻는 열쇠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생각은 제법 설득력이 있게 다가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인간은 사회적인(정확히는 정치적인) 동물로서 타인과의 관계를 필수적으로 갈망하고 그 관계를 통해서 모종의 인정이나 사랑 같은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특성으로 천성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어떤 지위나 재화를 추구하는 이유의 근원을 추적해 들어간다면 그것은 ‘사랑에 대한 욕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궁극적인 목적으로 규정했던 행복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의 천성과는 무관하게 현대 사회는 갈수록 피폐해져가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정치제도의 발달이 인간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편리하게 만들어주기는 했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오히려 더 멀어졌다. 이런 사회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본성인 사랑의 욕구를 충족하기가 더욱더 어려워진다.

그리고 작가가 말하고 있듯이 이러한 사랑의 결핍은 ‘속물’이라는 유형의 인간을 탄생시킨다. 작가가 말하는 ‘속물’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의 재화나 지위로 그 사람의 가치를 온전히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정서적으로 차별하는 이들을 말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지위를 갈구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물론 그 갈구의 동기가 되는 것은 사랑인데, 이들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들의 그런 가치관과 행동이 또 다른 속물을 만들어 낸다는 데에 있다. 이른바 가치관의 확산이다. 어느 한 명의 속물이 다른 이들의 지위를 그의 가치와 동일시하게 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도 결국에는 그와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과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속물들의 핵심은 다름 아닌 불안이며, 두려움이다.


4.불안의 성장과정

앞서 말했던 대로 작가가 말하는 핵심적인 내용의 두 번째는 오늘 날과 같은 불안이 구체화되어 이 정도의 영향력을 끼치게 된 과정에 대한 작가 나름의 해석이다. 이 책이 갖고 있는 가장 독창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인데, 작가는 과거, 즉 근대 이전의 인간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불안에 시달리지 않고 살아갔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다.(물론 그래서 그의 생각이 독창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상론했듯이 현대인들은 아무리 가난하고 고단하게 살아간다고 해도 계급이라는 것이 존재했던 시대로 돌아가느니 아무렴 그래도 모두가 평등한 자유를 향유하고 있는 현대에 머무르는 것이 낫다는 데에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현대인들의 생각이 건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과거의 인간들은 비록 계급사회를 살아가면서 엄격한 위계질서를 준수해야만 했고 또 고정된 자신의 계급을 가지고 한 평생을 살아가야만 하는 숙명에 처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계급이라는 것이 오히려 그의 처지를 정당화해주고 또 위로해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불안에 시달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명예혁명, 그리고 독립전쟁 등의 역사적 사건을 거치면서 인간은 점차 계급사회를 부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발전시켜오게 되었다.

그 과정의 결과로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과소비가 당연시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인간의 기대가 성장하게 되었다. 과거 계급사회에서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기대라는 것이 그가 속해 있는 계급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었던 반면 이제는 계급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부에 의해서 정해지고 이 부라는 것은 그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확대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대라는 것과 함께 무제한의 확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과소비의 풍조를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필수품’이라는 것의 관념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도 매우 좋은 방법이다. 불과 몇 십 년 전, 아니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겨울철의 패딩 점퍼를 ‘필수품’이라는 개념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2010년인 현재를 둘러보면 30~40만원에 이르는 유명 브랜드의 패딩 점퍼는 대한민국 중고등학생들의 필수품으로 자리잡아버렸다.

또한 그러한 과정의 결과로서 평등의 관념이 생산되고 보편화되었다. 이것은 과거와는 달리 계급 간의 이동이 가능해지고 나아가 계급이라는 관념이 철폐될 수 있다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러한 평등의 관념이라는 것은 사실 계급과 소유를 정당화하기 위한 형식적 평등에 불과한 것이라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정치와 경제가 부정부패를 통해서 밀접하게 유착되어 있는 모습이라든지, 대기업들의 부정 세습들을 보면 과연 우리 사회가 진정한 평등을 이룩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좀처럼 쉽게 평등에 대한 관념을 버리지 못한다. 심심찮게 사람들은 ‘저 사람도 나와 똑같은 사람인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기 위한 잘못된 위로라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오히려 이러한 잘못된 관념은 인간의 자아를 파먹는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경제적, 사회적 성공은 그 사람의 노력의 결과이고, 반대로 실패는 그 사람의 게으름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관념이 재생산되는 것이다. 이는 모두다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 평등하게 살아간다는 관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과거에는 인간이 불평등하게 되는 이유는 그 사람의 천부적 계급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 사람의 지위는 오로지 그 사람의 노력 여하로 책임이 돌려지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불평할 곳이 없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부에는 도덕적 의미가 깃들게 된다. 그리고 나아가 지위가 갖는 무게는 더욱 더 커지게 된다. 과거에는 그 사람의 지위라는 것이 그저 그 사람이 우연히 좋은 집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지위가 그 사람의 인성까지 판가름하는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앞서 말한 속물들의 가치관이 전체 사회의 공식적인 가치관으로 자리 잡아 버린 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5.불안의 극복

이렇게 현대인의 겪고 있는 불안의 모습과 그 원인에 대해서 고찰한 작가는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말을 꺼낸다.

첫 번째는 철학이다. 이것은 자기주체의식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들이 저렇게 속물들의 가치관을 공식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된 것은 사실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는 권리를 타인이나 사회에 위임했기 때문이다. 이는 매우 수동적인 방식이다. 물론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인바 사회에 형성되어 있는 규범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규범과 가치관은 온전히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기인 것이다.

두 번째는 예술이다. 이것은 속물근성을 전복시키는 데 아주 효과적인 수단이다. 속물근성에 의해 지배당한 사회는 언제나 성공한 이에게만 갈채를 보낸다. 그 과정 따위는 깡그리 무시되어 버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하지 못하면 관심의 대상도 되어보지 못하고 잊혀지는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의 근본적인 가치관을 공략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그것은 실패자와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희극을 통하여 속물근성에 지배당한 이들과 사회를 비웃고 동시에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세 번째는 정치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간파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를 변화시키는 것 길이 바로 정치에 있다.

네 번째는 기독교다. 기독교는 이분법적 사고관을 가지고 근대의 목적합리성을 낳는데 기여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세속적 가치의 중요성을 재확인할 수 있는 그 저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유한성을 노정하게 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기대와 욕망을 절제할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현세에서 이루지 못한 행복에 대하여 신을 요청하는 기독교적 희망에 기대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은 보헤미안의 정신이다. 보헤미안은 탈 부르주아의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반항의 정신이다. 하지만 단순한 반항이 아니다. 단순한 반항에 그친다면 그것은 니체가 말하는 노예도덕에 지나지 않는 것일 게다. 따라서 그것은 자기긍정을 실현한 사람들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6.나의 불안

내 최초의 장래 희망은 로봇이었다. 로봇 만화에 열광하는 평범한 소년이었던 5살 무렵이 최초의 기억이다. 마음대로 변신을 하고 악당들을 물리치는 로봇이 나의 눈에는 가장 멋져보였던 모양이다. 어느 정도 철이 든 이후에 지금까지 나의 장래 희망으로 규정되어 지는 것은 ‘교사’와 ‘소설가’다. 좀 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희망한 적도 있었지만 스스로의 특이나 본성을 확인하면 할수록 저 직업들이라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굳어져 갔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느끼는 것은 역시 저와 같은 나의 장래희망 역시 그 이면에 작용하고 있는 동기는 사랑에 대한 갈망이라는 것이다. 그 지위를 얻음으로 인해서 나는 사람들의 사랑을 얻고 싶어 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러한 지위에 대한 욕구는 누군가를 사랑해서 그 사람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강해질수록 덩달아서 강해졌다. 살아오면서 연애를 하고 또 짝사랑을 함에 있어서 나는 종종 나의 직업에 대한 욕구를 다졌다. ‘내가 그 직업을 갖게 된다면 그녀를 가질 수 있겠지.’라는 생각에 기인한 욕구였을 것이다.

이는 나이와도 비례했다. 어릴 적에는 그저 직업은 나의 만족의 대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내가 희망하는 나의 지위는 점점 나의 사랑과 결부되어 가기 시작한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미약하나마 내 안에는 학문에 대한 비세속적 가치에 대한 열망의 불씨가 남아있다고 믿는다. 교사가 되고 싶은 것은 어쩌면 누군가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만족, 즉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속적으로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나의 마음 때문이고, 소설가가 되고 싶은 것도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 명성을 얻어서 사람들의 사랑과 인기를 얻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확인하고 싶은 나의 마음 때문이라고 믿는 것이다.

박민규 작가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으며 느꼈던 것처럼 사실 이 인생은 나의 인생이다. 그 누가 하찮다고 말한다고 해서 정말로 하찮아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비록 타인의 사랑을 갈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났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유를 가진 존재로 태어나기도 했다.

불안, 완전히 없앨 수도, 또 살아가기 위해서는 완전히 없어도 안 될 것이다. 인간의 욕구나 열등감을 삻의 원동력으로 간주한 정약용이나 아들러처럼 말이다. 다만 그저 그것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어 그 불안조차도 내 영혼이 살아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나의 진정한 실존이라 믿는다.


-끝-

7년의 밤 독후감







7년의 밤 독후감


1.소개

2.줄거리

3.구성

4.캐릭터

  1)현수

  2)승환

  3)서원

  4)은주

  5)영제

5.생생한 묘사

6.스릴러

7.문장

1.소개

이 책은 2011년 4월 출간된 정유정 작가의 장편 스릴러 소설이다. 문학서적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되는 시대에, 이 책은 김애란 작가의 <두근두근 내 인생>과 함께 베스트셀러 10~20위 권에 꽤 오랫동안 머물렀던 책으로 내게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 일단 나에게는 ‘문학작품’이라는 이유로 반가웠고, 좋은 어감을 가진 그녀의 이름에 근거 없는 기대감이 일었으며, 내 취향에 부합하는 표지에 마음이 좋았다. 물론 스릴러 소설이라는 점에서 나의 기대가 무너지기는 했으나, 글을 읽어가면서 나는 작가가 가진 역량에 몇 번이나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에 읽은 스릴러 소설이 넬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과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픽처>인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생각난 것을 전자다. 특정 폐쇄된 지역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매우 닮은 동시에 그것보다 더욱 뛰어난 작품성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2.줄거리

최현수는 어릴 적 주정뱅이 아버지를 저주하다가 진짜 아버지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모종의 죄책감을 가지고 성장한 전직 야구선수다. 유망주였지만 불운의 부상으로 인하여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은주는 술과 몸을 파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밑으로 여동생과 남동생을 두었다. 가난이 지긋지긋했고, 어머니가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그녀는 학업을 마치자마자 멀리 광주로 취직을 했다. 하지만 정에 이끌려 잠시 찾아간 서울에서 그녀는 자신이 버린 가족들에 의해 발목을 잡힌다. 정에 이끌려버린 자신을 원망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여동생의 학비를 댔고, 곧이어 찾아들어온 어머니와 남동생의 생계도 책임져야 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그녀는 가족을 지켜냈다. 여동생 영주는 교사가 되었고 은주는 동생 대신 나간 소개팅에서 현수를 만나 결혼한다.

부상으로 야구를 그만둔 현수는 경비보안업체에 취직했다. 만족할 수는 없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힘들게 살아온 은주는 ‘중산층’의 반열에 들기 위해서 더욱더 억척이었고 현수는 그런 그녀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은주는 수도권의 중형 아파트를 계약했고 거기에 걸린 대출금을 갚기 위해 그들은 지방의 근무지를 선택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아들 최서원이 있었다.

현수가 전근 간 곳은 세령댐이었다. 그들 가족은 그곳의 사택에 살게 되었다. 현수는 세령댐의 보안팀장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오승환과 오영제를 만난다. 승환은 세령댐에서 근무하는 보안직원이다. 다시 말해 현수의 부하직원이 될 것이었다.

세령댐으로 이사 가기 며칠 전 은주는 현수에게 미리 그곳에 다녀오라고 한다. 미리 가서 집을 둘러보고 승환과 생활방식도 협의하라는 얘기였는데 현수는 아내의 의도를 자신에게 동기들과 술 마실 기회를 주겠다는 것으로 해석하고는 만취 상태가 되어 차를 끌고 세령댐으로 가게 된다. 그는 술만 마시면 차를 운전하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아내의 채근에 술을 마시던 도중에 일어나 어찌어찌 댐에 도착하기는 했으나 댐에는 짙게 안개가 깔려있었고, 그는 과속을 했다. 그리하여 마침 튀어나온 여자아이를 치어 죽이고 만다.

아이의 이름은 오세령. 지역 유지이자 치과의사인 오영제의 외동딸이다. 난폭하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오영제는 자신의 아내와 딸을 습관적으로 폭행했다. 그런 그를 못 견딘 아내 하영은 딸을 버리고 도망쳐서 오영제와의 이혼 소송에서 승리했고, 그 일로 오영제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세령은 그런 오영제의 폭행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던 것인데 도망치던 와중에 현수의 차에 치이게 된 것이다. 음주운전 사실이 들통 날 것을 두려워한 현수는 아이를 병원으로 옮기는 대신 입을 틀어막아 완전히 숨을 끊어버린다. 그리고 죽은 아이를 호수에 던져버리고 일산으로 돌아온다. 그 때 승환은 취미인 스쿠버 다이빙을 하면서 소설에 필요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한 밤 중의 어두컴컴한 물속에 들어가 수장된 도시를 탐험하고 물 밖으로 돌아오던 그는 현수가 던져버린 세령의 시신이 자신의 머리 위에서부터 천천히 가라앉는 것을 목격한다. 대신 그는 범인이 누구인지까지 확인하지는 못한다. 처음에 그는 세령을 죽인 것이 그녀의 아버지인 오영제일 거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만취 상태로 고속도로를 달려 일산으로 돌아온 현수는 아침에 차 안에서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뼈저리게 반성한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그는 최대한 은밀히 차를 고쳤고, 며칠 뒤 그의 가족은 예정대로 세령댐으로 이사를 간다. 술에 취해 여자아이를 치어죽인 곳으로 돌아온 현수의 심경은 물론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집 장만의 꿈에 잔뜩 부풀어 있는 은주는 그런 남편의 변화를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더욱더 남편을 옭아맬 뿐이었다.

자신을 피해 창문으로 도망친 딸이 돌아오지 않고 사라지자 영제는 다양한 가설을 세워서 그 흔적을 추적한다. 그러다 결국 자신의 딸이 세령호수에 가라앉아 있을 거라는 추론에 이르렀고 결과적으로 그 추론은 맞아떨어졌다. 오영제는 매우 영악한 인간이었다. 그는 먼저 승환을 의심한다. 일전에 자신으로부터 도망친 세령을 발견한 승환이 아이를 진료소로 데려갔고 그 일로 영제에게 승환은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승환이 다이빙에 능하다는 사실까지 알아내는 등 그 뒷조사도 철저히 했지만 생각할수록 승환은 범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던 중에 그는 새로 이사 온 현수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실로 놀라운 추리력이었다.

영제가 호수에서 세령의 옷 조각을 발견하고 신고를 함으로써 수중 수색이 시작됐고 마침내 세령의 시신을 건져 올린다. 세령의 시신과 그 장례식을 본 현수는 몽유병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과거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세령을 죽인 죄책감이 뒤섞인 병이었다. 밤마다 술에 취해 잠을 청하면 어느새 깨어 일어나 누군가의 신발을 들고 밖으로 나가 세령호에 그것을 버리고 오는 기괴한 증상에 시달렸다. 그것은 과거 자신이 살던 동네에 있던 우물에 아버지의 신발을 버렸던 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제는 그런 현수의 뒤를 쫓았고 그에게 딸의 복수를 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승환은 어렴풋하게 그런 영수의 계략을 눈치 채기 시작했다.

영제는 자신이 고용한 서포터즈를 이용해서 현수의 가족과 승환을 습격한다. 은주와 승환과 서원을 마취약으로 잠재우고 감금한 뒤에 홀로 댐 경비실을 지키는 현수를 영제가 덮친다. 영제는 현수를 댐관리동 중앙통제실에 묶어두고는 호수 한 가운데에 묶여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현수는 재치를 발휘해서 영제를 제압하고 아들 서원을 구하기 위해, 호수의 물을 빼기 위해 댐 수문으로 달려간다. 같은 시각, 승환은 마취약에서 깨어나 감금에서 탈출하여 호수에 뛰어들어 서원을 구해낸 뒤 현수에게 달려간다. 영제는 기절 상태에서 깨어나 고지대의 휴게소로 도망치던 중에 은주와 마주친다. 다혈질인 은주는 영제에게 달려들었고 영제는 홧김에 그녀를 때려죽인다. 경찰이 도착했고, 현수는 모든 혐의를 다 뒤집어쓰고 체포됐다.

그리고 7년이 지났다. 서원은 19살이 되었다. 그 날 이후 서원은 끊임없이 그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그 모든 것이 아버지가 저지른 죄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일말의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아버지의 소식을 외면했다. 무엇보다 감옥 안의 아버지는 자신을 만나지 않으려 했다.

아버지의 친척들은 자신을 외면했다. 각자 의무적으로 서원을 3개월씩 맡아준 다음 이사를 가는 방식으로 서원을 버렸다. 유일하게 승환만이 서원을 외면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가는 곳마다 알 수 없는 손길이 철저히 그들을 따라다녔다.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낙인은 떨어지지 않았고, 서원과 승환은 끊임없이 도망다녀야 했다. 결국 서원은 학교를 그만두고 남해안의 등대마을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평화도 잠시. 다이빙을 하러 온 젊은이들이 객기에 그만 사고를 당했고, 서원과 승환은 그들을 구조했다. 부잣집 자식들인데다가 서원의 이력에 냄새를 맡은 언론은 그 사실을 제법 크게 실었고, 서원의 존재는 새삼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손길도 다시 서원을 쫓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저씨가 사라졌다. 서원은 불안에 휩싸였다. 대신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소포들이 속속 배달되기 시작했다. 아저씨의 소설이었다. 서원은 그 소설을 읽으면서 7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승환이 영제의 전 처인 하영과 주고받은 편지도 있어서 오영제의 과거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 일이 일어난 이후 승환은 틈틈이 그 사건을 재구성하고 정리해 나갔던 것이다. 편지의 마지막에서 하영은 승환과 서원에게 오영제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니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도착한 전보를 통해서 서원은 아버지가 어제 사형에 처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들을 모두 읽은 서원은 그 위험한 순간이 찾아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 덫으로 뛰어들기로 했고 예상대로 오영제와 그 부하들은 서원을 낚아챘다. 하영의 말대로 오영제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현수의 사형이 집행되는 때에 맞춰 승환과 서원마저 깨끗하게 처리해버리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감옥 안의 현수는 냉정함을 되찾고 그러한 오영제의 속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현수는 승환을 통해서 앞으로의 일을 준비할 것과 서원을 잘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 준비대로 승환과 서원은 합을 맞추어 오영제 일당은 제압하고 그를 경찰에 넘겼다. 마지막으로 교도소에 가서 현수의 시신을 인도받아 화장하고 그 유골을 바다에 뿌리면서 부자는 마침내 다시 만났고 거기서 소설은 끝난다.


3.구성

이야기는 등대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때는 세령댐에서의 사건이 일어난 지 7년이 지난 후였다. 최서원은 어느새 19살이 되어 있었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모습을 보면서 나라면 어떤 방식으로 7년 전의 이야기를 꺼낼까 생각을 해봤다. 아저씨(승환)가 쓴 소설은 현재와 7년 전을 넘나들게 해주는 유용한 장치다. 이를 통해 작가는 자연스럽게 과거 얘기를 꺼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7년 후의 현실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 소설의 알맹이는 바로 그 소설 속에 담긴 내용이겠지만 소설 내부에서 ‘현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로부터 7년이 지난 때인 것이다. 그리하여 정리하면 이 소설은 7년 전의 이야기로 인해 만들어진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소설을 통해서 그 7년 전으로 돌아가고 결국 그 때의 사건이 완전히 끝나지 않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깨달은 주인공들이 그 일을 완전히 매듭짓기 위해서 현실로 돌아와 마무리를 짓는 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4.캐릭터

이 소설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인물들의 캐릭터가 제법 극단적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캐릭터는 이야기를 보다 더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하지만 그 극단성이 심해질수록 이야기는 개연성을 잃을 것이다. 결국 이야기를 만드는 데 신경 써야 할 것은 얼마나 아름답게 개연성을 위반하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1)현수

전직 운동선수였던 그는 순박한 인간형을 충실히 대변해주고 있다. 무식할 정도로 자신의 아들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또 아내의 바가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한다. 영악한 오영제의 계략을 어렴풋이 눈치 채면서도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선수를 빼앗기고 만다. 하지만 그런 그의 우직함이 바로 독자로 하여금 철저히 그의 편에서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한다. 실제로 나는 이 글을 읽어가면서 분명히 철저한 살인자인 현수를 어쩔 수 없이 동정하고, 그의 범죄 사실이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무슨 이유일까? 아무래도 그것은 너나 할 것 없이 앞 다투어 영악해져 가고 있는 이 시대에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혹은 세상에게 바라고 있는 인간상이 바로 그런 그의 이미지이기 때문이 아닐까.


2)승환

이야기에는 언제나 감초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 보통 그런 인물들은 주인공의 친구의 역할을 맡는다. 이런 캐릭터는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동기를 부여하거나 발생시키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이야기에 유머러스한 요소를 챙겨주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는 서원이 ‘아저씨’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승환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우연히 현수네 가족과 인연이 닿은 승환은 7년 전 그 날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서원을 맡아 보살폈다. 글을 읽는 내내 이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읽어나가도 승환이 그 정도로 현수와 서원에게 헌신할 동기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승환은 사건의 윤곽을 어느 정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이야기의 끝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미리 손을 쓰지 않은 자신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을 서원에 대한 헌신으로 속죄하고자 했던 것이다.


3)서원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물론 7년 전의 사건 때는 12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건의 전개에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하지만 현수와 오영제의 결투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분명하다. 오영제가 서원을 인질로 잡고 현수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서원은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불편함을 느꼈던 캐릭터다. 여성작가가 그린 남자아이의 자아이기 때문일까. 나는 7년 전 이 12살짜리 소년의 자아가 너무 현실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하자면 아무리 어린아이라고는 하지만 남자애인데 너무 어린아이 티나게 그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고, 고양이에 대한 근거 없는 호감도 좀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물론 극적인 설정이겠지만 ‘나라면 대한민국의 12세 소년을 이렇게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2세 서원과 19세 서원의 자아가 보여주는 차이 역시도 나의 불편함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두 자아는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판이하게 다르다.

또한 아버지에 대해 서원이 가지고 있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초반에 작가가 부각하고 있는 것은 7년 전 그 날 밤의 스케치와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 되는 꿈을 꾸는 서원의 내면 심리였는데,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가면서 작가는 서원이 아버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을 제대로 이어서 표현하지 못하다가, 작품의 말미에 가서 자식이 아버지의 유골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뒤늦게 허겁지겁 챙겨 넣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4)은주

이 책을 읽다보면 완전한 악역인 오영제 못지않게 밉상으로 그려지는 것이 바로 현수의 아내이자 서원의 어머니인 은주다. 비록 철없는 실수이긴 했지만 사고를 쳐서 그것을 책임지겠다고 비장한 각오를 한 남편에게 계속 바가지만 긁어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독자들은 아마도 답답함 비슷한 것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한쪽에서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데 그녀는 알뜰살뜰한 꽁순이의 역할에만 충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남편을 지나치게 낭떠러지로 몰아세운다는 느낌마저 준다. 그녀의 캐릭터를 알아갈수록 아마도 대다수의 남자들은 앞으로 닥쳐올 혹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생활에 대한 답답함에 크게 공감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심지어 나는 화가 나기까지 했다. 그녀가 바라보는 남편이라는 존재는 이따금 불필요하고 무능력하고 그저 한심하기만 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녀의 성격 역시 작가가 생각해낸 것이라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그리 지나친 감정이입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그녀의 캐릭터에 분노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작가가 그녀의 캐릭터를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는 것이고, 그러한 그녀의 캐릭터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라는 점과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개연성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현실을 살아가면서 가장 용감한 것은 현수나 승환이 아니라 바로 은주 같은 주부들이다. 아내와 엄마와 주부의 역할을 동시에 맡아 수행해내는 그녀들이 있기에 세상은 돌아간다. 우리가 그녀를 그렇게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이 소설에서 그려지고 있는 상황이 일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초일상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5)영제

악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사실 사건의 구도만 보자면 그는 피해자다. 그는 현수가 치로 치어죽인 아이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조그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자식의 복수를 위해 혈혈단신으로 적에게 뛰어드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보매 그 모습이 보통 악역은 아니었음을 상기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그러한 영제를 철저한 악역으로 만들어 낸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때문에 이야기를 읽다보면 조금 톱니바퀴가 어긋난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상쇄시켜버리는 것은 바로 오영제의 잔인한 심성이다. 처자식에게 휘두른 가정폭력과 고양이, 현수에게 가한 폭력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 낭자한 혈흔을 상상하며 그에 대한 증오심을 키울 수 있고 마침내 우리들의 머릿속에는 철저하게 선과 악의 이분법의 구도가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우리가 마냥 그를 증오하게 내버려 두지는 않는다. 작가는 영제의 아내인 하영이 승환에게 보내온 오영제의 과거사를 우리에게 들려주면서 독자들이 그를 이해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이것이 작가의 참으로 섬세한 면이 아닌가 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무엇이 그를 그렇게 잔인하게 만들었는지, 무엇이 그를 그렇게 외톨이로 만들었는지 이해하는 동시에 모종의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어쩌면 “우리 편은 생각보다 선하지 않고, 적은 생각만큼 악하지 않다.”는 진리도 깨우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5.생생한 묘사

이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영화를 염두에 두고 쓰인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다. 안 그래도 영화화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도 같다.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이 소설이 어떤 상황에 대한 묘사를 무척이나 실감하게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스쿠버 다이빙이 관련되는 장면들이다. 약 세 번 정도의 장면이 있었는데, 초반에 서원과 승환이 젊은 다이버들을 구조하기 위해서 바다에 들어가는 장면, 초중반에 승환이 작품 취재를 위해 세령댐에 몰래 잠수하는 장면,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사형 소식을 들은 서원이 홀로 바다에 잠수하는 장면이다. 작가의 말을 통해서 작가가 스쿠버 다이빙과 관련하여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정성도 정성이지만 글을 읽어보면 마치 자신이 직접 다이빙을 했던 것처럼 생생하게 그리고 꼼곰하게 그리고 있다.

한편 내가 묘사적인 부분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은 승환이 댐 경비대에 배치되어 담장의 개구멍을 발견하고 열쇠를 복사하는 등 잠수할 준비를 하는 과정을 그린 부분이다. 어떻게 개구멍을 발견했는지, 열쇠를 복사하긴 하는데 어떻게 했으며 왜 그렇게 해야만 했는지, 근무시간이 그런 열쇠복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잠수를 하기 위해 낚싯줄에 형광물질을 바르는 장면, 랜턴을 끄는 장면, 자물쇠 쇠사슬을 바깥에서 열고 안에서 걸어 잠그는 장면, 물속에 잠든 수중도시의 묘사 같은 것들이다. 마치 작가가 직접 그 생활을 했을 것처럼 세세한 부분에 신경을 쓰고 있어서 그것에서 모종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자신이 세령댐 마을의 이장이었다고 말하는데 그 말처럼 나는 이 글을 읽으며 그녀가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에 대해 갖는 애착의 크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책의 표지 바로 뒤에 있는 세령댐 마을 지도를 볼 필요가 있다. 보통의 스릴러 서적에는 이런 지도가 붙어있는 모양인데 나는 깜빡하고 그냥 지나갔다. 덕분에 수첩에 내 머릿속에 그려진 마을의 지도를 대강 그려가며 읽었다. 물론 그 역시도 하나의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그래도 작가의 머릿속에 있는 마을을 내 머릿속에 새로 이주시킨다는 것이 그리 썩 쉬운 작업은 아니었기 때문에 만약에 내가 다시 이 책을 처음으로 읽게 된다면 반드시 그 지도를 참고할 것 같다. 나는 책의 중후반에 가서 뒤늦게 지도를 생각해냈다.


6.스릴러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는 마치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만든다. 위에 언급한 ‘묘사’의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스릴러적 요소가 정말 훌륭하다. 보통 스릴러 소설들은 ‘글’이라는 표현방식이 갖는 한계 때문에 동적인 움직임보다는 사건의 실마리가 어떻게 풀려나가는가 하는 부분에 심혈을 기울여서 독자들에게 어필해왔다는 생각이다. 이 소설도 그런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소설의 경우에는 오세령을 죽인 범인이 바로 최현수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밝혀놓고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에 진짜 범인을 찾아나가는 다른 소설들과는 약간의 차별성을 갖는다. 대신 이 소설이 내세우고 있는 것은 악역이 되는 오영제가 어떤 방식으로 현수에게 복수를 감행하느냐 하는 것과 7년 전의 사건이 현재의 시점에 어떤 영향을 끼치며 어떤 모습으로 부활할 것이냐 하는 질문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이러한 시나리오의 요소들뿐만 아니라, 액션의 요소들까지도 훌륭하게 소화해 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더 빛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7년 전 그날 밤, 오영제가 홀로 경비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현수의 팔을 낚아채며 그를 제압하는 장면이었다. 그 이전에 그의 아내 은주 역시도 같은 방법으로 습격을 당했다. 나는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대체 이 작가는 어떻게 이런 장면을 생각해냈나 감탄을 금할 수 없어서 몇 번씩이나 다시 읽었던 장면이다.


7.문장

그렇다고 작가가 오직 스릴러적 구성과 묘사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녀는 마치 자신에게 그런 오해가 주어지는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작품 속에 자신의 문장력을 드러낼 수 있을 부분을 삽입한다. 그것은 은주가 성장해서 현수를 만나 결혼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이 장면들은 작가가 스릴러 구성능력 뿐만 아니라 문장력에서도 무척 탄탄한 매력을 지님을 보여준다.

또한 자신의 딸의 죽음을 암묵적으로 짐작하고 있던 오영제 그 냉혈한이 막상 딸의 시신을 보게 되었을 때 느끼는 심리적 변화를 묘사한 부분 역시도 매우 훌륭했다.

그리고 현수가 세령을 차로 치었을 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내면의 조력자라는 존재 역시도 그녀의 문학적 인간관을 더듬어 볼 수 있게 해주는 요소가 아닐까 생각한다.


-끝-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독후감


1.소개

2.줄거리

  1)뫼비우스의 띠

  2)칼날

  3)우주여행

  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영수의 시점

    (2)영호의 관점

    (3)영희의 관점

  5)육교 위에서

  6)궤도 회전

  7)기계 도시

  8)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9)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10)클라인씨의 병

  11)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12)에필로그

3.구성과 문체

4.현실사회와 이상사회

5.인간소외와 가치전도

6.현실 마주하는 난장이의 자세

7.정의에 대한 생각 차이

8.허수아비 춤, 호밀밭의 파수꾼

9.오늘날의 난장이-청계천, 용산참사, 한진중공업 파업, 희망버스

10.난장이의 아픔에 공감하는 일-내 아버지


1.소개

이 책은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조세희 작가가 각종 문예지에 ‘난장이 연작’이라는 개념으로 연재한 단편 소설들을 묶은 것이다. 단편 소설들의 묶음이지만 그것은 집합이 되어 온전한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고 있다. 처음 책을 읽어 나갈 때는 여느 단편집들처럼 개별적으로 독립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몇 개의 단편을 읽어나가면서 이것이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서 점차 중심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 책은 1970년대의 우리 문학을 대표하고 있는 동시에 그 시대를 대표하고 있기도 하다. 각종 문학상을 휩쓴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역시 가장 유명한 것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단편이겠지만, 연작으로 묶인 다른 단편들을 읽으면서 나는 좀 더 온전히 그 난장이의 세계를 이해해 나갈 수 있었다.

이 독후감에서는 책에 실린 순서대로 각 단편의 줄거리를 살펴보고, 이 책의 구성을 점검한 뒤에, 조세희 작가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과 내가 느낀 점을 이것저것 이야기해볼 것이다.


2.줄거리

1)뫼비우스의 띠

이 단편에서는 두 개의 장면이 교차되어 나온다. 하나는 고교 3학년 마지막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훈시를 하면서 두 개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다. 하나는 굴뚝 청소부에 대한 이야기고, 하나는 뫼비우스의 띠에 대한 이야기다.

또 하나의 장면은 꼽추와 앉은뱅이의 이야기다. 앉은뱅이와 꼽추는 난장이에 마을에 살던 주민이었다. 마을이 재개발 정책에 의해 강제철거 결정이 나자 그들은 거간꾼에게 아파트 입주권을 팔았다. 하지만 얼마 후 입주권의 거래가격이 두 배가 넘게 뛰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들의 입주권을 산 거간꾼을 덮치기로 한다. 그들은 거간꾼의 차를 세우고 그를 죽인 뒤에 어디론가 사라진다.


2)칼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난장이 마을 근처에 사는 중산층 주부 ‘윤신애’다. 아직 상수도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시절이라서 주부인 신애는 깊은 밤에만 나오는 물을 받기 위해 언제나 잠이 부족한 상태다. 남편과 신애는 젊은 시절 사회에 대한 꿈이 있던 영혼이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상과 타협하고 그런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꿈을 잃은 남편은 무기력했고 언제나 신문만 볼 뿐이었다. 신문에 보도되는 내용들은 각종 부패와 고통들이었고, 30년이 지난 지금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녀의 뒷집 가장은 세무서에 다니는 부정부패 공무원이다. 공무원 비리 사건이 터졌지만 그 집은 멀쩡했다. 앞집은 제과회사 선전부 직원이다. 각종 로비가 들어오는 자리라는 것을 그 집 아주머니는 당당히 자랑하고 다녔다. 피곤에 찌든 남편과 짜증을 내는 아이들에 그녀도 조금씩 지쳐간다. 다행히 딸은 세견이 조금이라도 들었는지 수돗가에 나와 있는 그녀의 곁에 앉아 의젓한 말을 꺼낸다. 신애는 낮에 있던 일을 떠올린다. 낮에 그녀는 난장이를 만났다. 난장이는 앞뒷집 아주머니들에게 일을 달라고 사정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난장이를 신뢰하지 않았고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왠지 그 꼴이 보기 싫은 신애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에게 일을 맡기겠노라고 소리쳤다. 난장이는 수도를 고치는 일을 했다. 그는 신애네 수도를 손봐줬다. 다른 집보다는 몇 시간쯤 더 빨리 물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난장이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었고 땀 흘려서 먹고 살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신애는 그런 난장이가 좋았다. “전 아저씨 같은 분이 좋아요. 방금 아저씨와 이웃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 수도수리점 사장이 신애네 집으로 들이닥쳤다. 주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대뜸 난장이를 패기 시작했다. 자신의 일감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꼴을 보던 신애는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가져다 그를 찔렀다. 다행히 칼은 그를 스쳐지나갔고 그는 황급히 도망갔다. 신애는 이 세상은 난장이에게 안전하지 않다고, 그리고 사실 우리 모두가 난장이라고 생각했다.


3)우주여행

주인공은 난장이 마을 근처에 사는 법관의 아들 윤호다. 아버지가 데려온 지섭은 대학생이었으며 윤호의 가정교사다. 지섭은 윤호의 할아버지의 친구의 손자였고 행색이 매우 초라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본군을 죽인 사람이었다. 윤호의 집은 꽤 잘 살았다. 누나는 초라한 지섭을 멸시했다. 하지만 윤호는 지섭을 좋아했다. 지섭은 윤호를 빈민촌 난장이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지섭은 그들을 우주인과 그 가족이라고 소개했다. 난장이네 집 마당에는 ‘재개발 사업 구역 및 고지대 건물 철거 지시’라고 적힌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지섭이 윤호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여 그를 쫓아냈다. 대신 윤호는 고액과외를 시작했다. 그곳에는 온갖 타락한 아이들이 다 모여 있었다. 아이들은 환각제를 마시고, 슬라이드로 포르노를 봤다. 윤호는 거기서 은희를 만났다. 은호는 악마 같은 인규를 따라서 타락의 늪으로 빠져든다. 그런 스스로를 그는 증오했고 또 괴로워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책장에 숨겨놓은 총으로 자살을 하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총을 찾았을 때 은희가 집으로 찾아왔다. 그녀를 밀쳐내는 윤호를 알몸의 은희가 껴안았다.


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난장이 가족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가족의 구성원은 아버지, 어머니, 영수, 영호, 영희다.

(1)영수의 시점

영수의 가족에게 세상에서의 생활은 지옥이고 전쟁이었다. 어느 날 철거계고장이 날아왔다. 동사무소 앞에는 철거에 항의하는 사람들과 입주권을 사려는 거간꾼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여있었다. 영호는 흥분하고 영희는 울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영수는 의외로 담담했다. 옆집에는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였던 명희라는 아이가 있었다. 그녀와 영수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다. 그녀는 영수에게 공장에 들어가 일하지 말고 꼭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영수는 그러겠노라 약속했지만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영희는 산업화의 역사 어딘가에서 비극적으로 죽었다. 나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다치면서 밑의 동생들도 공장에 들어갔다. 수도수리점 사장에게 얻어맞은 아버지는 몸이 망가졌다. 아버지는 서커스 일을 하려고 했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그만둬야 했다. 아버지는 장남인 나를 배에 태우고서는 서커스 일을 하려는 것을 막지 말라고 얘기했다. 아버지는 요즘 지섭이라는 사람이 빌려준 『일만 년 후의 세계』라는 책을 읽었다. 지섭은 이 땅에서 우리가 기대할 것은 없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벽돌공장 굴뚝 위에 올라가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2)영호의 관점

영희와 함께 입주권 시세를 알아보러 갔다가 입주권을 사려는 어느 아주머니를 만났다. 매매계약서의 계약 날짜를 위조하는 수법을 설명하자 그녀는 그건 불법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영호는 오히려 그녀에게 동사무소에 들어가서 왜 불법적인 일을 하느냐고 따져보라고 되물었다.

형과 나는 파업을 시도했는데 다른 노동자들이 배신을 해버려서 제대로 얘기도 못해보고 잘렸다. 공장끼리 연락이 다 돼서 다른 공장에서도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영희가 사라졌고 동네 주정뱅이는 외계인이 데려갔다고 했다. 공장에서 일어나는 노동착취, 근로악조건, 빈부격차,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 인간 소외, 자동화로 인한 해고, 계몽되어선 안 되는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영호와 영희는 공장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영희가 집을 나갔을까. 박식한 형은 세상을 폭력적이라고 규정했다. 보이지 않는 폭력. 영호는 형인 영수를 이상주의자라고 규정했다.

난장이네 가족은 이십오만 원에 입주권을 팔았다. 지섭의 책을 읽은 아버지는 이상한 소리를 한다. 아버지는 달에 가서 천문대 일을 하겠다고 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내게 아버지는 오히려 너는 우주의 법칙을 전혀 모른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배웠는데도 모른다고 말한다.

영희를 찾지 못해 가족들은 집을 떠나지 못한다. 지섭은 감옥에 다녀왔다. 그가 사온 고기로 가족들은 최후의 만찬을 갖는다. 철거인들이 담을 부수고 우리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지섭은 철거 지휘자를 때리고 잡혀갔다.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잠이 나를 눌러왔다. 나는 부서진 문 한 짝을 끌어내 그 위에 엎드렸다. 햇살을 등에 느끼며 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우리 식구와 지섭을 제외하고 세계는 모두 이상했다. 나는 햇살 속에서 꿈을 꾸었다. 영희가 팬지꽃 두 송이를 공장 폐수 속에 던져 넣고 있었다.’


(3)영희의 관점

영희는 입주권을 파는 날 우리의 입주권을 산 사내를 따라가서 신문을 스크랩하는 일을 하고 밤에는 그와 섹스를 했다. 그와 영희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이 달랐다. 그의 금고에서 우리의 입주권 서류를 훔쳐 나왔다. 동사무소에 가서 철거확인원을 썼다. 아버지 이름으로. 동사무소 사무장이 내게 와서는 윤신애 아주머니를 찾아가라고 했다. 구청과 주택공사에 갔다가 그녀에게 갔다.

영희가 집을 나간 사이 난장이 아버지는 벽동공장 굴뚝에 떨어져 죽었다.


5)육교 위에서

신애의 동생은 대학 시절에 운동권이었다. 함께 투쟁을 하던 학생들은 점점 변질돼 갔고 동생과 그의 친구는 고립돼 갔다. 학교신문에 기고하려면 그들의 글을 팽개친 주간교수는 친일파의 자손이었고, 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졸업한 뒤 동생의 친구는 신문사에 들어갔고 신문사 간부로 취임한 주간은 그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쫓기듯 술집에서 새삼 신념을 다짐했지만 결국 그는 주간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신념은 신념이되 살아야 하는 것, 가족과 같은 것들이 그러한 신념을 지킬 수 없는 인질과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6)궤도 회전

대입시험에서 인규의 수험번호를 쓴 것이 걸려 엄청나게 맞았지만 아버지는 결국 윤호를 놔줬다. 이사를 갔다. 은강그룹 회장이 사는 동네였다. 옆집에 사는 경애를 만났다. 그녀는 은강그룹 회장의 손녀딸이다. 윤호는 그녀를 따라서 셀 모임이라는 곳에 간다. 윤호는 이 아이들이 십대 노동자에 대한 토론을 핑계로 유희를 즐긴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실제로 토론이 끝나고 아이들은 은밀한 놀이를 이어갔다. 윤호는 아이들 앞에서 경애를 고문하는 흉내를 내면서 그녀의 죄를 묻는다. 은강 방직 사장의 손녀딸과 난장이의 딸 사이의 간격이 진하게 드러났다. 경애는 조롱이 섞인 문체로 할아버지의 묘비명을 써서 윤호에게 보여줬다. ‘윤호는 대학에 들어가는 대로 경애와 경혼 하겠다고 생각했다.’


7)기계 도시

윤호의 시선이다. 은강이라는 도시가 등장하는데 아무래도 인천을 말하는 것 같다. 아버지를 잃은 난장이의 아들딸이 이곳에서 일한다. 은희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녀가 얻은 것은 일시적 자유였다. 은강공단은 노동자들에게 엄청난 악조건의 공간이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도시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관심이 없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자신들에게 해가 되는 일이 일어날 때만 일시적으로 관심을 가질 뿐이다.

노동자교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빈곤 때문에 일을 시작했고, 인간적 대우를 해주는 직장을 희망했으며, 항상 피로에 시달렸고, 노동조합의 간부들을 회사의 앞잡이라고 생각했고, 열심히 일해도 도저히 잘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근로자가 아니라 사용자를 위해서 일하는 것, 그게 노조다.

난장이의 큰 아들 영수는 새로운 노조를 만들려 했고, 딸은 해고당했다. 하지만 영수는 사용자들의 탄압에 수없는 좌절을 겪어야 했고 결국에는 무너져 내렸다. 난장이의 큰 아들은 좌절하고 윤호에게 은강그룹 회장을 암살 할테니 너희 집에 숨겨달라고 부탁한다.


8)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큰 아들 영수의 관점이다. 난장이 마을을 생각하니 아버지의 죽음이 더 슬프게 다가왔다. 나는 이제 가장이 되었다. 먹이 피라미드에서 우리는 맨 밑의 단계다. ‘삼남매가 똑같이 은강 그룹 계열 회사의 훈련공으로 들어갔다.’ ‘신분에 맞게 우리는 빈민굴에 살았다.’ ‘조립라인 사람들은 나를 또 하나의 보조기계로 보았다. 공장장에게는 노동자 전체가 기계였다.’

영희는 노동운동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나는 회사의 부당대우에 대한 조치를 노조에 요구했다가 뭔가 일이 잘못되어가는 것을 알고는 알아서 공장을 옮겼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최저 생계비를 벌 수 없는 세상이었다. 영수는 또 하나의 난장이 마을을 꿈꾸기 시작했다.


9)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영수는 산업혁명 당시 160여 년 전의 영국, 프랑스와 지금의 은강이 무척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고통이 그려진다.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법률이 있었지만 사용자들을 그런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 마음대로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나는 날마다 사무실 게시판 앞에 가 섰다. 퇴직, 해고, 출근정리 처분자의 명단이 거기 나붙었다. 나는 게시판 앞에 아버지보다 작은 몸이 되어 서 있고는 했다.’

영수는 노동자들을 계몽시키고 싶어 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소리 없이 사람들의 의식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노동자 교회 목사는 영수를 사회조사연구회에 끌어들였다.

영희네 공장의 노조지부장이 실종되고 부지부장이 지부장이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영이였다. 영수는 영희의 소개로 영이와 만나게 되고 그녀를 후방 지원한다.

영이가 지부장이 된 노사희의장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녀가 고분고분하리라 기대했던 사용자들의 예상과 달리 영이는 매우 강경하게 나온다. 일단 습관적으로 노동자 대표를 하대하는 말투를 지적하고, 노동자들을 옷핀으로 찌르는 행위를 고발한다. 사용자들은 공장을 돌리기 위해서는 모든 법을 다 지킬 수는 없다고 말한다. 영이는 같은 근로자라고는 하지만 사용자와 노동자의 임금격차가 너무 크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임금 인상과 부당해고자의 복직을 주장한다. 사용자들은 더 힘든 환경에서도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그 주장을 터무니없다고 일축하지만 영이 지부장은 그건 그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한다. 노사양측은 산업구조나 경제이익의 분배에 대한 관념이 완전히 달랐고 협상은 파결되었다.

‘아버지는 사랑을 갖기 않은 사람을 벌하기 위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그것이 못마땅했었다. 그러나 그 날 밤 나는 나의 생각을 수정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옳았다.

모두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은강에서는 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


10)클라인 씨의 병

은강에 장님이 많다는 것은 자신의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순종하는 노동자들과 그런 고난에 시달리는 이웃의 노동자에 무관심한 일반 주민들을 비꼬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머니는 영수가 조합의 일에 나서는 것이 매우 못마땅하다. 그녀는 아들이 언젠가는 잡혀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들이 그저 묵묵히 공장 일만 하기를 그녀는 바랐다.

‘애꾸눈 노인네 껍질나무 벽에는 지명 피의자 수배 벽보가 붙어 있었다. 내가 아는 죄인들의 이름은 올라와 있지 않았다. 잡범들의 사진 위에 검거 도장이 찍혀 나갔다. 큰 범법자들은 우리와 먼 곳에 있었다.’

영수의 이름이 기업들 간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기업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노동자 교회의 목사였다. 노동자들에게 사회적 의식을 심어주지 때문이었다.

영수는 지섭을 만났다. 행복동 사건 이후 지섭은 여러 고장을 전전하며 가는 곳마다 노조를 만들고는 했다. 지섭을 다시 만난 가족들은 과거의 기억으로 빠져들었다.

작가는 난장이 아버지가 죽기 전 큰 아들 영수를 배에 태우고 나눴던 대화를 들려준다. 작가가, 큰 아들이 꼭꼭 숨겨놨던 이야기다. 아버지는 죽음을 결심한 것을 아들에게 말했다. 약장수를 따라가 앉은뱅이와 꼽추와 함께 일하게 해준다면 죽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영수는 그러시라고 할 수 없었다. 가족 누구도 그런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지섭은 영수를 혼냈다. 네가 할 일은 이론에 매진하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노동자와 사용자가 충돌하는 지점에 서있는 일이라고 했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데 너무 많은 것을 허비해왔다고 그가 말했다.’

노동자의 편을 들어주는 중간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목사와 과학자 중 과학자가 영수에게 클라인 씨의 병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그것을 보고 영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알겠어요. 이 병에서는 안이 곧 밖이고 밖이 곧 안입니다. 안팎이 없기 때문에 내부를 막았다고 할 수 없고, 여기서는 갇힌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벽만 따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죠.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갇혔다는 그 자체가 착각이에요.” 영수는 은강그룹 회장을 죽이기 위해 뛰어나갔다.


11)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은강그룹 손자이자, 경애의 오빠인 경훈의 관점이다. 난장이의 큰 아들 영수는 그룹의 임원을 칼로 찔러 재판을 받았다. 경영자들의 아래 세대들은 윗세대와 다르거나 같았다. 유학의 경험이 그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들면서 자신들의 체제와 행위를 정당화하는데 능숙했다. 언변이 막힘이 없었다.

지섭의 공판일에 경훈은 법정에 갔다. 노동자들이 경영자를 조롱하는 노래를 경훈의 면전에서 불렀다. 기분이 상한 경훈은 난장이가 매우 나쁜 사람이었을 거라고, 그래서 그 영향으로 그 아들이 숙부를 살해했으리라고 생각했다.

사촌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인데도 그를 매우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경훈은 그를 이해할 수 없다.

지섭이 영수의 증인이 되었다. 영수의 상인행위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영수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경훈은 그것이 무척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온 경훈은 노동자들에게 약을 먹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본가들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생각은 정말 죽어도 안 했다. 그는 가시고기의 악몽을 꿨다.

‘사람들의 사랑이 나를 슬프게 했다.

경훈은 내일 아버지 몰래 정신과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12)에필로그

맨 처음 장인 ‘뫼비우스의 띠’에서처럼 두 개의 장면이 나온다.

우리가 처한 사회적 상황의 책임을 우리는 누구에게 돌려야 하는 걸까? 작가는 ‘그들’이라고 뭉뚱그려 답한다.

‘그들 자신에게는 죽을 때까지 져야 할 책임이 하나도 없다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모두 그럴 듯한 알리바이를 갖고 있다.’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사는 나머지 이 사회의 의도를 읽을 수가 없었다.


꼽추와 앉은뱅이는 약장수를 따라갔지만 어느 날 약장수 사장은 두 사람을 버리고 도망갔다. 영수는 감옥에서 죽었다. 꼽추는 고속도로에서 반딧불로 착각한 탱크로리에 치여 죽는다.


수학 교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야기를 끝낸다.

‘그들은 우리의 부분적 실태가 폭로되는 것도 어떤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작은 혹성으로 우주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내가 아직 알 수 없는 것은 떠나는 순간에 무엇을 대하게 될까 하는 것뿐이다. 무엇일까? 공동묘지와 같은 침묵일까? 아닐까? 외치는 것은 언제나 죽은 사람뿐일까? 시간이 되었다. 지구에 살든 혹성에 살든 우리의 정신은 언제나 자유다.’


3.구성과 문체

우선 구성에 대해 논하기 전에 나는 이 책의 제목이 나에게 주는 느낌을 생각해 본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제목은 무척 호기심을 갖게 하는 단어의 조합이 아닐 수 없다. 하나하나씩 놓고 보면 그냥 그런 단어들인데 그것들이 모이면 묘한 느낌을 선사한다. 왜 난장이는 공을 쏘았으며, 왜 공은 하필 난장이에 의해서 쏘아졌단 말인가? 이것은 마치 우화의 제목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우리 문학계에서 이런 느낌으로 제목을 작명하는 것은 어쩌면 이 소설이 원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단편소설집은 난장이 마을을 중심으로 그 주변부에서부터 각종 계층들의 관점을 빌려서 천천히 소개해 들어가다가 난장이 가족들의 이야기로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물론 각각의 챕터가 하나의 단편이기 때문에 작가는 개별적인 단편으로 읽어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능하도록 최소한의 겹치는 줄거리를 단서로 끼워두는 배려를 해두었다.

그리고 각 단편을 읽어 나가면서 다른 단편에서 등장하거나 주인공이었던 인물들의 이름이 언급되거나 혹은 등장하는 방법으로 작가는 각 단편을 그런 고리들로 튼튼히 그리고 꽤나 촘촘하게 엮어 놨다.

작가의 문체라고 할 수 있을지 잘은 모르겠지만 인상적이었던 것은 하나의 대화 도중에 갑자기 다른 장면의 대화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장면의 전환을 취함으로써 그 전환을 매우 날카롭게 만드는 글쓰기였다. 나중에는 제법 익숙해져서 그럭저럭 막힘없이 읽어나갈 수 있었는데 처음에는 적응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나아가 비슷한 개념으로, 하나의 대화에 다른 장면에서의 대화를 오버랩 시키듯이 교차시켜서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방법도 인상적이었다. 이 방법은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에서 노사대표가 회의장에서 나누는 대화와 난장이 가족들이 나누는 대화를 겹쳐서 보여주는 식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대화가 가지고 있는 닮음이 독자들에게는 무척이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4.현실사회와 이상사회

책의 끝에 붙은 해설에 나오는 대로 이 이야기는 대립적 세계관을 전제로 깔고 있다. 비단 부자와 가난한 자의 대립뿐만 아니라 현실과 이상이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각종의 대립들이 이야기의 곳곳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현실사회는 영수가 말하는 것처럼 전쟁이나 지옥과 같은 것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들은 무엇 하나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법과 사회 제도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자랑스럽게 외치고 있지만 그런 선전은 그들에게는 그저 아무 소용  없는 울림일 뿐이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노동의 구조였고, 부가 부를 재생산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병폐에 있었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고 아껴 쓰기만 한다면 잘 살 수 있는 사회라는 절대 깨지지 않는 규칙을 정해놓았지만, 애초에 그들은 그 규칙에 동의한 적도 없고, 그 규칙을 만드는 데 참여한 적도 없으며, 그 규칙은 실제로 그렇지도 않았다. 그것은 실제로는 매우 불공평한 규칙이었다. 그 규칙은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이 처하게 되는 불평등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고려하지 않은 평등이라는 것은 그저 허울에 불과할 뿐임을 모두가 알고 있는 동시에 모두가 그것을 부정했다. 심지어는 그런 규칙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까지도 그것을 부정하거나 애써 모른 채 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이 이야기 속에서 그려지는 현실 사회다. 그런 규칙을 만들어 놓은 사람들은 심지어 그런 규칙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그러면서 가지지 못한 자들이 그런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불법’을 운운했다.

그런 사회는 누군가에게는 닫힌 감옥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쉴 새 없이 일하고 또 일해서 다음 날이 오고 또 와도 변하는 것은 없다. 그저 병들고 망가져가는 몸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닫힌 사회를 만들어 놓은 사람들은 오히려 웃으며 말한다. 어디가 닫혀있느냐고 언제나 열려있는 사회인데 네 생각이 틀렸다고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지지 못한 자들은 방황한다. 죽지만 않게 최소의 물자로 연명하면서 그들은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그런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상사회를 꿈꾸게 된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지섭과 난장이 아버지가 말하는 달나라다. 달나라라고 하지만 실제로 하늘에 떠있는 달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이다. 그들은 현실사회가 지옥이며 전쟁이고 그들에게 고통으로만 다가오는 원인은 그곳에 사랑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이 없는 사람들에게 벌을 주고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그런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사회가 이상사회인 이유는 그것이 절대 도래하지 않거나 혹은 쉽게 도래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둘 중 어떤 것이든 간에 그런 이유로 난장이 아버지는 죽음을 선택했다. 그에게는 그것만이 유일한 선택의 답지였을 것이다.



5.인간소외와 가치전도

이 작품에서 우리가 가장 여실하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은 산업화사회에서 일어나는 인간소외의 현상이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산업사회에서 인간이 노동과, 인간과,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에 주목했다. 이 책에는 그런 산업사회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은강공단에서 일어하는 노동자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열악한 근로조건이다. 소음과, 산업재해와, 환경오염으로부터 노동자들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건강이나 그 생존을 따로 챙겨줘야 할 필요가 없는 그저 기계와 같은 존재였다. 노동에서 인간의 자율성이나 능동성 혹은 창의성은 전혀 요구되지 않았고 그저 인간은 기계를 위해 존재한다. 기계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서 인간의 존재 역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사실은 인간 생활의 윤택함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기계일진대 이제는 반대로 기계로부터 인간의 존재 가치가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노동의 과정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자신이 만든 생산품으로부터도 소외된다. 그들이 만드는 자동차와, 방직된 천들을 그들은 쉽게 소유할 수 없다. 엄청나게 만든 재화가 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그들은 그 재화를 거의 얻을 수 없다. 나아가 결국 그들은 인간으로부터 소외된다. 자본가와 사용자 계층은 그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기계와 같은 존재로 인식한다. 물론 그런 대우가 대놓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인식에 있고, 나아가 스스로가 그러한 인식을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그러한 인식이 자연스러워지는 상황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생계를 위해 살아가면서 점점 그들 서로와도 멀어지게 된다. 삶 자체가 지옥이고 전쟁인 현실에서는 옆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챙겨주거나 그들에게 맘 놓고 기대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자신에게도 소외될 것이다. 스스로의 존재가치가 의문스러워지고, 더 이상 이 세계의 불합리를 골똘히 생각하는 자세로는 살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자본가들과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들어놓은 현실에서 근근이 연명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생각을 멈추고 그들이 시키는 일에 묵묵히 순종하는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노동자가 그런 길을 자의든 타의든 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가치의 전도다. ‘인간적인 것’이라는 가치의 개념은 이제 그 의미가 희미해지거나 상당히 혼탁해졌다. 그 원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사람들은 산업화사회를 살아가면서 빠르게 잊어갔다. 워낙 정신이 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그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죄를 물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체 사회를 놓고 볼 때 분명히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고 죄는 곳곳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널브러져 있었다. 일찍이 인류가 동경했던 사랑이라는 가치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우리가 굳건히 믿고 있는 가치가 산업화라는 짧은 기간 사이에 그렇게 급속도로 하찮은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그 사랑이라는 것은 애초에 그다지 강한 가치가 아니었다고, 그저 인류에게 일시적으로 주어졌던 가치였을 뿐이라고, 인류의 성정은 본래가 악한 것이라고, 사회 진화론에 입각하여 어차피 약한 개체들은 도태되는 것은 옳은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가치가 그토록 위대한 힘을 발휘하고 모두의 마음에 진정한 감동으로 다가왔던 것은 그것이 아름다운 동시에 모두에게 진정으로 받아들여지고 모두가 진정으로 동경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이따금 사람보다 기계가 낫다는 생각과 말을 하곤 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로 그것은 인간의 예측불가능성과 약속을 지키지 않은 성정을 보며 내가 좌절한 바에로 비롯된 행동들이다. 반면에 기계는 언제나 예측이 가능하고, 약간의 안목과 손재주만 있으면 쉽게 다룰 수 있다. 그들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 나는 내가 그런 말을 내뱉으면서도 그 말이 많이 잘못된 것임을, 그리고 결국에는 내가 다시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안다. 그것은 이런저런 이유를 댈 것도 없이 바로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답변만이 가능하지 않을까. 인간은 왜 인간을 사랑하느냐는 답변에는 아무래도 인간의 마음속에는 처음부터 인간을 사랑하도록 본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답변이 가장 효과적이고 납득이 가는 답변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종종 더듬어지는 이 시대의 가치전도의 관념들이 이 이야기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시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작품 속에서 전도되지 않은 가치를 꿋꿋이 일관하고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난장이다. 그는 이야기 속에서 가장 나약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소중한 가치를 놓지 않았다. 어쩌면 놓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마저 놓는다는 정말로 그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포기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그가 사랑이라는 가치마저 놓았다면 이야기를 읽는 우리는 그에게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사실 가장 우리에게 올바른 가치를 전해주는 그 이지만 그의 작품 속의 이름은 ‘김불이(金不伊)’다. 맞는 해석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이름이 사회가 그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철저한 자본의 시대에서 자본을 가지지 못한 그는 어엿한 사람의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오히려 가장 소중한 가치를 갖지 못한 마음이 가난한 자들만이 사람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가치가 철저하게 뒤바뀐 세상에서 그는 살아가고 있던 것이다.


6.현실 마주하는 난장이의 자세

작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의 화두가 있다면 앞서 언급된 현실을 마주하는 등장인물들의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관점을 보여줌으로써 과연 우리라면 저러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우리로 하여금 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지는 것 같다.

이 책에는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일단 난장이 가족이 있고, 최고 부유층인 은강그룹 일족들, 법관의 자식들인 윤호와 은희, 그리고 중산층인 윤신애다. 중산층인 윤신애와 법관의 아랫세대인 윤호의 경우에는 제법 현실 사회의 모순을 잘 파악하고 있다. 물론 그들의 이웃이나 또래들은 아직 철저히 사회의 모순을 즐기며 타락하고 있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힘겹게나마 영혼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런 균형은 그들에게 모종의 회의감과 고통을 준다. 분명히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이웃들을 보면서, 그리고 그 이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맞이해야 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그들은 이중의 회의감과 자괴감을 맞본다. 그것은 무력감에서 기인하는 자기혐오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사회를 바꾸는 토양이 되는 것은 그들의 그런 현실인식과 자괴감과 회의감이 아닐까 한다.

부유층의 경우에는 철저히 현실 세계를 정상적으로 바라본다. 그들의 시선을 보고 있자면 사회학에서 말하는 기능론과 갈등론 중에서 철저히 기능론적 시각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사회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따금 정신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위기에 처하기는 하지만 인류는 무사히 그런 위기를 넘겨 왔다. 자본주의는 인류를 윤택하게 만들기 위한 최고의 발명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질서정연하고 그런 질서를 어지럽히려는 사람들은 바로 악 그 자체다. 열심히 일하고 아껴 쓰면 잘 살 수 있다고 크게 외치는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더 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눈에는 그저 게으른 멍청이들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현실이 그저 천국인 것만은 아니다. 날이 갈수록 그런 질서 파괴자들은 기승을 부리고 잠시라고 정신을 놓고 있다가는 그들에 의해서 체제가 전복될 수 있을 것이다. 이래저래 그들도 지옥 같고,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간다. 물론 그 모양새는 많이 다르지만 말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난장이 가족의 모습이다. 이들은 같은 빈민계층이면서도 비교적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일단은 윗세대와 아랫세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윗세대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경우에는 사회적 폭력에 대해서 묵묵히 참아내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이미 약자의 지위를 점유하고 있는 이상 그것에 굳이 맞섰다가는 오히려 더 큰 봉변을 당하다는 것을 그들은 그들의 경험과 선조들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내색은 하지 않지만 세상이 아직도 계급사회이며 노비제도가 아직 없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어쩌면 순순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식들만은 자신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한다.

자식들의 경우에는 그런 폭압에 대해서 저항하고 싶어 한다. 철거계고장이 날아왔을 때 부모들은 이상하게 담담했고 영희와 영호는 무척이나 흥분했다. 영수는 그 중간에 있었다. 큰 아들인 영수는 난장이 가족의 윗세대와 아랫세대를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결국 그 가족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윗세대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부모의 바람과는 반대로 결국 그 아랫세대 역시도 부모의 세대와 똑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저항의 노선을 택하게 되었다.


7.정의에 대한 생각 차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이야기 속에서 작가는 이 사회의 이런 불합리한 모순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자본주의라는 것이 애초부터 부자들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고전적 자본주의 경우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을 활발하게 만들어서 풍부해진 재화가 모든 사람들을 풍족하게 만들리라는 계산으로부터 유래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자본주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현실을 그렇지가 못하다. 재화는 풍부하되 그것을 소유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정해져 있는 것이다.

짐작에 불구하지만 나는 작가가 그 근본적인 원인을 사람들 사이에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정의관에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사회정의에 대한 사회계층 사이의 이해 차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전체적인 구도를 본다면 수탈의 주체는 자본가와 사용자들이고 그 대상은 난장이 가족들이지만 가만히 읽다보면 그 누구도 자신이 나쁜 짓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나는 것은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에서 나오는 노사협의회 장면과,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에서 영수의 재판과정을 지켜보는 경훈의 심리묘사다.

이것은 정당화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이론적 정당화가 다원주의 사회의 상대주의적 경향과 맞물리게 되면서 그런 정당화의 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간다. 모두 각자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행위에 임한다. 때문에 그들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그 책임을 물으려 하면 그들은 그에 대한 꽤 그럴듯한 이유와 변명을 내놓는다. 그 앞에서 한 방에 통쾌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그리하여 작품 속에서 지섭은 영수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데 너무 많은 것을 허비해왔다고 그가 말했다.’

이러한 지섭의 생각은 어차피 이론으로 따지게 된다면 그 누구에도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때문에 더 이상 이론에 매진하여 그 누가 잘못한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뿌리라고 생각되는 것일 일단 움켜잡고 뽑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지섭의 말에 선뜻 동의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옳음과 그름을 생각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가 아닐까? 아니면 무엇이 옳은지 앎에도 불구하고 전혀 엉뚱한 답을 고르거나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끊임없이 찾아가고 또 그것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 나가려는 노력을 쉬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또 한편으로 나는 지섭의 말에 공감한다. 그것은 이론에 매진하는 우리의 노력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 속의 상황에서는 더욱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이론에 매진할 수 있다.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까지 난장이의 가족들의 고통을 겪지 않고 잘 견뎌줄 수 있다면 가능할 수도 있는 얘기다.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다. 인간은 삶은 영원하지 않고, 계속되는 악조건과 폭압 아래서 그 생명은 쉽게 꽃을 떨굴 수 있다. 아마 이런 의미에서 지섭은 이론에 매진하는 데 많은 것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현재의 나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이성적인 방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시선에서도 드러나듯이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정의에 대한 생각의 차이이며, 이것은 아무래도 이론 이성의 문제인바 이성적 토의와 연구를 통해서 해결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더 심각한 것은 모든 이 사회를 살아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책임이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러한 책임과 죄가 자신들에게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생각은 ‘궤도 회전’에서 절망감과 죄책감에 눈을 뜬 윤호가 아직 그런 생각에 눈을 뜨지 경애를 보이지 않는 고문 틀에 묶어 고문하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기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보자면 이 이야기를 통해서 작가가 꾀하는 우리의 변화는 우리들 스스로가 난장이인 동시에 또한 이 모든 일의 책임을 나눠 갖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일단 우리 모두가 난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우리가 난장이 가족과 같은 계층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만들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지 정책을 좋지 않고 보고,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냉랭한 태도를 갖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는 ‘중산층’, 혹은 ‘부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자유주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의 맥시민 이론에 따르면 원초적 상황에서 무지의 장막을 치고 최초의 사회적 조건에 대해 합의하는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최소 수혜자 즉 난장이 가족과 같은 처지에 처할 것을 염두에 두고 그런 합의에 임할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누구든지 난장이 가족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런 난장이 가족 같은 사람들이라도 제법 행복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제도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이 처한 사회적 위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합의에 임할 때 자신이 사회적으로 부자라는 사실 혹은 거의 확실히 부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들은 결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의 제한된 재화를 자신들이 아닌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예측불가능성이, 자신들이 난장이 가족과 같은 최하계층, 먹이사슬의 가장 밑바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빈민계층에 대한 복지정책에 합의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대부분의 난장이 가족이라는 자기인식을 해야만 하는 이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소유라는 것은 일종의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지위와 결부되게 됨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애써 중산층 이상의 계층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경향으로부터 저항해야 한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모두 책임을 나눠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나 실제로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이나 마찬가지로 이런 사회적 모순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한다면 그 근거나 정당성이 마땅치 않고 어떻게 해서 묻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모두 각자 나름대로의 변명을 한다. 때문에 언젠가는 이론적으로 그 옳음과 그름이 밝혀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의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이 사회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물론 자유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간다. 민주주의 사회는 개인이 아니라 시민이 그 사회의 주인이 되는 사회다. 시민이란 사회와 동떨어진 개인이 아니라 이웃과 그리고 다른 시민과 함께 어울려 그들 전체의 복지와 권리와 의무를 고민하는 주체를 말하는 것이다.


8.허수아비 춤, 호밀밭의 파수꾼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두 권의 책이 떠올랐다. 우선 첫 번째는 조정래 작가의 『허수아비 춤』이다. 2010년에 나온 책으로서 우리 사회의 경제적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의 비리에 대해서 폭로하고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과 그 책은 묘하게 대비가 되는 데, 조정래의 허수아비 춤이 대기업과 정부가 국가경제를 어떻게 가지고 노는지 그 은밀한 치부를 고발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 책의 경우에는 산업화로 인한 노동착취와 인간소외를 그리는 동시에 그 원인에 대한 고찰을 시도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좀 더 인간의 본질과 존재에 대한 고민이 가미된 것이 『난장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는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작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생각났다. 『난장이 쏘아올린 작은 공』의 전체 모두에서 연상된 것은 아니고 가장 마지막에 있는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라는 단편을 읽을 때 유독 그렇게 생각났다. 처음에는 그 두 개가 어떻게 닳아있는지 명확히 짚어낼 수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난장이 쏘아올린 작은 공』의 그 단편의 경우에는 대기업 총수의 아들인 경훈의 시점에서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시선을 보여주고 있었고, 『호밀밭의 파수꾼』의 경우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점 속물이 되어가는 인간들을 바라보면서 그런 사회의 모순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약한 영혼의 몸부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인간의 영혼이 병들어 있는 치부를 드러내는 점에서 두 작품의 유사성을 느꼈던 것 같다.

그 단편의 마지막 장면에서 경훈은 나약한 스스로를 발견하며 아버지 몰래 정신과를 찾아갈 생각을 한다. 이야기 속에서 전형적인 자본가로 나오는 그이지만 사실 그 내면에는 진정한 사랑을 구별할 줄 아는 마음이 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그는 그런 마음을 부정해야만 한다. 경제학자들이 뭐라고 하던 자신들이 보고 싶은 이론만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이론만을 받아들여 끊임없이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그렇게 해서 마음과 이론의 벽을 치고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바로 잡아먹히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이다. 어쩌면 오히려 그들이 이 이야기 속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물론 샐린저의 홀든 콜필드의 경우에는 조금 다른 선택, 즉 그렇게 자신을 지키며 치열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기 보다는 그런 세상을 등지고 이상적인 세계로 나아가려는 선택을 했지만, 그 기본적인 영혼의 모습에 있어서 두 자아는 무척 닮은 점이 있었던 것 같다.



9.오늘날의 난장이-청계천, 용산참사, 한진중공업 파업, 희망버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느새 이 책을 쓰인 1970년대 보다 훨씬 더 윤택해진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써 모종의 우월감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분명히 나는 중산층의 아들로 태어나서 별다른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자라, 대학교육을 마친 오늘 날의 평범한 청년인 것이다. 나는 난장이인 아버지를 두지도 않았고, 아르바이트가 아닌 이상 생계를 위하여 공장에 취직하려 해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세상은 여전히 난장이들에게 안전하지 않았고, 풍부한 재화는 모든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어찌 보면 나는 난장이였다.

독후감을 쓰면서 나는 최근 이슈가 된 삼성 일가의 법정 분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돈을 가졌지만 이건희 회장은 웃는 모습이 드물다. 변호사와 법조항과 언론의 보도를 통해 전해지고 또 확산되는 형제간의 다툼 사이에서 사랑의 여지는 없다. 난장이 아버지는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까.

한편으로 난장이 가족의 비극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사건도 많이 있다. 쌍용차 파업 사태와, 용산 철거민 참사 사건, 청계천 철거 상인들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나름대로의 이유로 파업을 시도했으나 정부의 물리력을 동원한 진압에 의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물러 나와야 했던 쌍용차,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른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에 의해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기까지 했던 용산참사, 그리고 버려진 운동장으로 강제 이주된 청계천 상인들이 있었다. 무려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건만,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한다는 세월 동안 세상은 별 반 달라진 게 없었다. ‘칼날’에서 신애의 남편이 읽고 있는 신문에 나오는 기사들은 정부와 기업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었고, 지금 현재 발간된 신문의 기사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는 내용일 만큼 세상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조세희 작가의 이 책은 아직까지도 슬픈 호흡을 하며 우리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희망적인 일도, 개선된 점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2011년에서 2012년에 일어난 한진중공업 파업 사건이었다. 경영진의 경영 실패로 인하여 만들어진 기업 손실을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떠넘겼다. 책임이 있는 경영진들은 오히려 성과급을 받았고, 애꿎은 노동자들은 정리 해고가 될 위기에 처했다.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투쟁했다. 물론 습관처럼 탄압이 시작됐다. 회사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보기를 원했다. 어떤 노동자들은 그 타협에 응했고 어떤 노동자들은 응하지 않았다. 물러설 수 없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 누구도 해고되지 않게 해야만 했다. 여성 용접공 김진숙 씨가 85호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자신의 생명을 담보고 고공 농성을 시작했다.

마침 다행인 것은 SNS(Social Network Service)라는 새로운 매체가 우리 사회에서 매우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이들의 투쟁이 사회의 각 구성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힘을 보아서 버스를 대절해서 부산으로 달려갔다. 버스의 숫자는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사람들은 주말이면 습관처럼 버스를 대절해서 부산으로 갔다. 이 버스의 행렬에는 ‘희망버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들은 비폭력적으로 노동자들을,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는 김진숙을 응원했다. 결국 노동자들이 승리했다.

나는 생각한다. 난장이 가족들이 저렇게 승리한 노동자들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면 어땠을까. 세상이 노동자들의 시위를 관심 있게 귀 기울여주고, 노동자들도 이성적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달했다면, 그래서 공장에서 쫓겨나는 일 없이, 기업의 총수를 살해하는 일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한진중공업 파업의 결과를 보면서 나는 그래도 조금은, 삼십년이라는 세월 동안 세상이 약간이나마 나아지긴 했구나 하고 위안을 삼는 것이다.

물론 한편으로는 가슴이 묵직해지는 요소도 있다. 그것은 파업의 과정에서 SNS와 인터넷 매체들을 통해서 그러나는, 국민들 사이에 여전히 분명하게 존재하는 사회정의관의 불일치였다. 물론 파업을 성공했고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났지만 내가 볼 때 그것은 불완전한 승리였다. 그것은 그저 여론이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을 뿐인 것이고, 일시적으로 노동자들과 생각을 같이 했을 뿐인 것이다. 어찌 보면 이것은 또 다른 탄압에 다름없다. 새로운 매체들로 인하여 노동자들의 입장과 주장이 보다 효과적으로 대중에게 전달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대중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 역시도 명확하게 노정되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주기에 충분한 차이였다. 너와 내가 이만큼 다르다는 것이 그렇게 분명하게 노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얻은 승리.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서로의 이해와 사회정의관에 대한 불일치를 좁혀 나가려는 노력이다. 이를 위해서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부단한 이성적 노력이 필요하다. 인류의 철학이 걸어온 역사가 그렇듯 인류는 이성적 존재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10.난장이의 아픔에 공감하는 일-내 아버지

역시 억측일 수 있겠지만 나는 작가가 단순한 대립적 구도로 노동자는 착한 사람이고 기업가는 나쁜 사람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작가가 다소 변증법적인 사고를 통하여 그 두 개의 존재를 하나의 사회의 다른 모양의 피해자로 바라보고 있다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 이사회의 씁쓸한 피해자라는 시선을 건네는 작가라서 나는 더욱더 그 안목에 동의하고 감탄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난장이고, 빈민계층이며 고통과 농밀함 역시 그들이 훨씬 심하다. 작가는 난장이 아버지가 죽기 전 큰 아들 영수를 배에 태우고 나눴던 대화를 들려준다. 작가가, 큰 아들이 꼭꼭 숨겨놨던 이야기다. 아버지는 죽음을 결심한 것을 아들에게 말했다. 약장수를 따라가 앉은뱅이와 꼽추와 함께 일하게 해준다면 죽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영수는 그러시라고 할 수 없었다. 가족 누구도 그런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다. 그걸 알아야지. 찢어질 것처럼 아파.”

이야기를 통틀어 난장이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아픔을 호소하는 유일한 장면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의 대사와 그가 물가의 풀숲에 머리를 박고 주저앉는 장면이 최고로 가슴에 아프게 다가오며 그 고통에 매우 효과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감히 ‘효과적’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조심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장면이 이 이야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이야기를 읽고 또 회상할 때 내 눈 앞에는 어두운 물가에서 난장이가 아들과 가족과 세상 앞에 마지막으로 절망하고 뭍으로 돌아와 그 어둡고 차가운 땅에 주저앉아 머리를 박고 오열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그 생생함은 내 가슴을 저미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 좀 이상한 기분이었다. 살아있는 감정, 나는 며칠 지난 뒤에야 그 이유를 찾아냈다.

이따금 곰곰이 그 감정을 곱씹던 나는 내가 이 이야기를 읽은 후 종종 아버지를 떠올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장남을 앞에 두고 얘기하는 난장이, 엎드려 오열하는 난장이의 모습 위로 아버지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그리고 그 앞에 앉은 영수에는 나의 모습이 겹쳐졌다. 물론 내 아버지는 난장이가 아니다. 약 165센티미터의 신장을 가진 평범한 한국 중년 남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아버지의 유년 시절은 난장이의 그것과 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지금은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믿을 수도 있을 만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유년 시절의 아버지는 무척 가난한 집의 장남이었다. 공부를 너무 잘해서 인문계 고등학교에 꼭 가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이 도무지 받쳐주질 않아서 결국 농업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물론 아버지와 난장이는 완전히 같지는 않다. 이를테면 아버지는 명희와의 약속을 지킨 영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수가 명희와의 약속을 지켰다면 그는 공장에 들어가지 않고 학업을 계속해서 살인 따위는 할 필요 없이 지금의 우리 아버지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닮은 점도 있다. 내 아버지는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제법 민감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그런 사회 앞에서 무력했다. 그것이 난장이와 내 아버지가 닮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몇 번인가 보았던 아버지의 그런 고개 숙임에 나는 나도 모르게 이 이야기 속에서 내 아버지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나는 영수가 되었다.

이렇게 이 이야기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나의 존재 안에 들어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인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진리의 존재가 되었다. 실로 작지 않은 영향력임에 분명하다. 앞으로는 어떤 이야기가 어떤 모양으로 이어지게 될까. 나와 아버지 역시 언제나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을까. 내 자손들은 어떨까. 나 역시 달나라의 천문대 일을 꿈꾸게 될까. 글쎄, 일단은 내 안의 난장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길 우선 바란다.


-끝-







무중력 증후군 독후감

1.소개

2.줄거리

3.구성

4.작가가 바라보는 현대 사회 (현대인의 불안의 원인)

5.현대인(불안의 결과) 무중력자가 되는 것.

6.언론과 이슈

7.중력의 세상에 존재하는 무중력 (현대인이 짊어진 짐에 대하여)

8.마음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작가의 처방.

1.소개

이 책은 1980년 생 윤고은 작가의 작품이며 제13회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했다. 일단은 책의 제목이 무척이나 수상하다. 오쿠타 히데오의 책 제목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이 단어는 우리로 하여금 우선 ‘그런 질병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아마도 작가가 만들어 낸 질병이겠구나.’하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거기에서 부터는 더 이상의 짐작이 힘들다. 이것은 책을 펼쳐서 어느 정도 읽어 나간 뒤에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의 흐름을 주도 하고 있는 하나의 화두는 ‘새로운 달의 등장’이다. 하지만 작가는 독자들이 쉽사리 책의 제목이 되는 ‘무중력 증후군’과 달의 등장을 연결시킬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아이템을 섣불리 보여주지 않는 정성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중반에 가서야 그 정체를 드러내는 무중력 증후군이라는 병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적잖은 상징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온전한 상징에 가까워서 한 번에 말로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고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맛이 우러나는 소재다.

처음에 달의 등장을 최초의 모티브로 삼았을 때는 이외수 작가의 장외인간(이 작품에서는 달이 등장하는 게 아니라 달이 사라지는 것이 최초의 모티브로 작용한다.)을 패러디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읽어 나갈수록 ‘패러디’라는 단어로 치부할 수는 없을 만큼 작가의 사고가 탄탄하고 논리적이며 참신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나아가 글이 주는 분위기나 문체 또한 일품이다. 세상을 서늘하고 메마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묘사들에서는 편혜영 작가가 떠올랐고, 각종 위트나 풍자에서는 박민규 작가가 생각났다. 그렇다고 윤고은이라는 작가가 위에 언급된 작가들의 짬뽕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팔색조라는 의미의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평가라고 해두고 싶다.


2.줄거리

나는 20대 후반의 청년이고, 부동산 회사에서 텔레마케팅 일을 하고 있다. 경기가 불황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이 업종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일은 언제나 팍팍하고 사람들은 모두가 안 쪽 주머니에 사표를 품고 다닌다. 그런 어느 날 새로운 달이 떠올랐다. 이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언론은 모두 함께 입을 모아 새로운 달이 세상에 미칠 영향에 대해 떠들어댔다. 사람들은 그런 언론에 귀를 기울였다. 기실 사람들이 언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슈가 된 것이 달이라는 것만 새로울 뿐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현상이다. 그저 사람들에게는 입을 모아 떠들 이슈가 필요했을 뿐이다.

새로운 달이 떠오름으로 인해 이슈가 된 것은 ‘무중력’이다. 달이 늘어남으로 인해서 지구의 중력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서 무중력자라고 분류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그들의 세력도 시시할 뿐이었지만 규칙적으로 또 다른 달이 떠오르면서 그들의 세력은 점점 확대되어 가고 그 현상에 대한 집착은 세상을 집어삼킬 위세였다. 사람들은 지구의 중력을 아예 끊어버리겠다는 명분으로 지표면을 뚫고 들어갈 기세로 자살을 하거나 달로 이주하게 해달라고 시위를 벌였다. 내 주위 사람들에게도 그런 영향은 마찬가지로 작용했다. 어머니는 달구경을 하고 오겠다며 집을 나갔고, 어항 속의 금붕어가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심플라이프라는 잡지의 기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는 그녀를 퓰리처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녀는 내가 앓고 있는 원인 모를 통증에 대해 관심이 있었고 우리는 함께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받았다. 그녀는 나를 포함한 여섯 명의 종합검진 결과를 토대로 기사를 쓸 생각이었다.

며칠 후 엄마가 돌아왔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멀쩡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내면은 멀쩡하지 않았다. 완전한 무중력자가 되어 돌아온 엄마는 무중력에 열광하는 세상의 흐름을 쫓아서 무중력 미용실을 개업했다. 장사는 호황이었다. 세상은 시끄러웠다. 사실 그 이전에도 세상은 마찬가지로 시끄러웠지만 사람들은 달 때문에 새삼 세상이 새롭게 시끄러워졌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의 책임을 달로 돌리는 것이 유행이 됐다. 순수열혈의 소설가 지망생이던 친구 구보는 맘을 고쳐먹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최근 유행하는 무중력 섹스를 테마로 한 무중력 판타지아를 개발, 판매하는 사업이었다. 장사는 호황이었고 바빠진 구보는 새로운 일상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다니는 부동산 회사에서는 무중력자를 선언한 사람들이 퇴사를 했고, 사장 역시도 무중력의 흐름에 도취되어 달에 투기를 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름하여 달나라 납골당 주식회사였다. 하지만 때마침 사람들은 무중력과 달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며칠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달이 떴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사람들은 그 규칙성에, 그 규칙적인 두려움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결국 무중력을 테마로 한 사업들은 다시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엄마의 무중력 미용실이나, 사장의 달나라 납골당이나, 구보의 무중력 판타지아나.

무중력에 대한 관심이 쇠퇴하면서 세상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았지만 사실 애초부터 세상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집착하고 집중할 이슈가 생겼다가 사라졌을 뿐이었다. 세상이 조용해질 틈도 없이 새로운 기사가 떴다. 퓰리처가 나를 소재로 ‘무중력 증후군’이라는 질병에 대한 기사를 쓴 것이다. 원래는 존재하지도 않는 병이었지만 사람들은 새로운 이슈에 열광했고 너 나 할 것 없이 기사에 나온 증상을 호소했다. 심지어 병원에서도 그 병에 대해서 이골이 난 듯 그 병을 진단하고 약을 처방해주었다. 모두가 입과 손을 모아서 이슈를 만들어내고 그 이슈에 동조했다. 심지어는 그 병의 소재가 된 나조차도 그 기사를 보고선 새롭게 무중력 증후군에 걸렸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사실이 이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슈가 사실이 되는 세상이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증상도 그 병에는 추가됐는데, 살인이나 절도의 충동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확실히 그 병에 걸렸다는 것을 증명이라고 하고 싶어 하는 듯 세상은 갑자기 살인과 절도로 시끄러워졌다.

결국에는 무중력 증후군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과 심지어는 새로운 달이라는 것도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졌다.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 듯 했지만 이내 흐지부지 잊혀 갔다. 사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로 세상에 존재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런 이슈가 세상에 있었다는 것, 그뿐이었다.

퓰리처는 만년필 증후군이라는 병을 새롭게 개발해서 기사화했고, 세상은 다시 만년필 살인으로 시끄러워졌다. 그 시끄러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사람들은 무엇에라도 집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구성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과 관찰자 시점을 넘나들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경험하는 일들이 사건의 주된 요소가 되는 동시에 나는 철저히 사회를 관찰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초반에는 보통 나의 일상적인 문제들이 사회적 문제들과는 별개의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에 나는 온전히 사회를 관찰하는 역할에 그치지만 중후반부로 넘어가게 되면 내가 소재가 된 무중력 증후군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나는 아무도 모르게 세상의 한 중심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나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와 정확히 일치하게 되고,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회의 문제를 진심으로 파악하고 공감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이야기는 주인공인 나의 생활세계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전개된다. 작품에서 보이는 주인공의 생활세계는 가족(아버지, 어머니, 형)과 회사(사장, 조부장, 이 과장, 홍 부장), 친구(구보), 언론(심플라이프 기자 퓰리처), 사회(무중력자)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이들이 세간의 변화에 따라 체험하게 되는 일들로 소설은 움직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여성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남성 화자의 자아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점이다. 여성 작가들 중에는 간혹 무리하게 남성 화자를 채택했다는 느낌을 주는 이들도 있어서 나는 처음엔 이 작가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내심 걱정을 했는데 완독한 결과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 최소한 어디 대놓고 흠잡을만한 구석은 없는 화자였다. 사실 그래도 이 점만으로 이 작가의 필력에 대해서 원 없는 칭찬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4.작가가 바라보는 현대 사회 (현대인의 불안의 원인)

소설은 비록 주인공의 생활세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유로 어쩌면 한 개인의 좁은 시야에 갇힐 수 있다는 위험에 처하지만 사실 작가는 오직 사회적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다. 개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 그것은 철저히 사회적 이야기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 자신이 고대 그리스 철학적 사고에 입각하여1), 사회를 떠난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 집필에 임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선 작가는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내가 일하는 회사에서 목격할 수 있는 모습들은 쳇바퀴 돌 듯 똑같은 일상이며 그 일상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시간에 쫓기고, 상사의 눈치를 보며, 퇴근한 뒤 모여서 상사의 험담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화장실에서 하는 낙서를 통해서만 자신의 속마음을 분출하는 익명성에 의존하는 모습들이다.

이런 사회적 문제들은 우리들의 집까지 따라온다. 현대 사회의 전면에서 고진분투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에 대한 기성세대의 시선은 곱지 못하다. 이것은 주인공인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과 언행에서 잔인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고 친숙하게까지 보이는 장면들이다.

한편 모든 이들이 생존전선에서 싸우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의 친구 구보는 기성세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가는 또 하나의 젊은 세대를 대표한다. 사회적 기준에서는 무능력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적 여유와 경제적 여유가 충족되는 직장을 추구하는 그의 모습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작품에서 묘사된 현대 사회의 모습을 볼 때 나는 작가가 이 사회의 모습을 무척이나 열심히 분석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나는 흔히 일컬어지는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들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이 소설이 공유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5.현대인(불안의 결과) 무중력자가 되는 것.

작가는 현대사회와 그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이는 단지 기술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그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현대인들이 취하는 어느 특정한 방식에 천착한다. 다시 말해 그 현대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지만 그 사회에서 현대인들이 모두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닌바 작가는 가능한 선택들 중에서 한 가지에 집중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작가는 현대인들이 끊임없이 무엇인가 시달리며, 언제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삶에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고 파악하는 듯하다. 회사원들은 실적과 상사의 눈치에 시달리고, 부모는 자식들의 출세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걱정하며, 젊은 가장은 앞가림 못하는 동생과 집안의 생계에 대한 부담을 짊어지고 살고, 청년들은 자신의 꿈과 돈 사이에서 끊임없이 후회하고 고민하고 갈등하고 방황한다.

그런 상황에서 회사원들은 저들끼리 모여 상사의 욕을 하거나 낙서를 하고, 부모들은 닥치는 대로 신앙에 의존하고, 청년들은 타협과 정절 사이에서 헤맨다. 혹은 그런 고민을 잊기 위해서 병적으로 많은 동호회에 가입하기도 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작가는 하나의 변수를 던진다. 그것은 그 무엇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이다. 그런 고통과 심지어는 자신이 그런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는 현실 자체를 잊게 만들어 줄 무엇인가를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이 작가의 근본적인 아이디어가 아닌가 한다.

달이 나타났다는 말에 사람들은 달을 핑계로 일상의 짐을 벗어던지고 힘겨운 일상에서 탈피해 달로 가고자 한다. 사실 그게 달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도망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건물을 쌓아올리는 만큼 인류는 스스로에게 짐이 되었고 그 높은 건물들은 동시에 탈출구이기도 하다.

또한 작품의 후반에 등장하는 ‘무중력 증후군 자가검진표’의 마지막 증상이 현실화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설득력이 약하지만 이 부분은 현대인들이 얼마나 유행에 집착하고,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지는 보여준다.



6.언론과 이슈

이러한 현대인들의 집착에 충실하게 일조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다. 작가는 현대사회에서 언론이 가진 영향력에 대해서 아주 극단적인 사례를 보여주는 듯하다. 물론 그것은 과장되어 있고, 허구에 기대고 있지만 그만큼 언론이 가진 힘과 그 폐해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책의 초입 부분을 읽고 있을 즈음의 나는 아직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언론의 모습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달의 등장이 추가적인 임팩트 없이도 세상에 많은 파동을 낳는 것에 무척 공상적인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그것은 소설의 모습이 무척 작위적이라고 느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가면서 나는 곧 작가가 말하려 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었다.기실 딱히 과학적으로 변한 것은 없는데 사람들은 무한한 변화를 경험한다. 그들은 변화와 뉴스에 중독되어 있다. 핑계거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일탈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살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일탈을 위해 산다. 현대 사회는 너무나 정적이다. 지루하고 뻔해서 미칠 것 같다. 그렇게 달이 나타난 이후의 변화들을 읽으며 나는 점점 이 세계에 몰입되어 갔다.

이 작품에서 언론은 철저히 사람들을 선동하는 매체다. 사건의 진실성이나 논리 따위는 이미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작품 속에서 우리 사회의 언론을 대표하는 ‘퓰리처’의 대사에서 우리는 그런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질문의 답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뉴스가 되느냐 덜 되느냐 그게 중요할 뿐이죠. 그러니까 두 부류로 말했다는 게 중요한 거죠.”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그런 뉴스에 현혹되는 이유는 인간 내면에 시한폭탄처럼 심어진 이분법적 사고관 때문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일단 핵심이 되는 생각은 ‘기사로 만들면 그게 곧 사실이 된다. 그게 이 세상이다’라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매체는 발달의 극을 달렸다. 하지만 SNS 괴담과 같은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런 매체들이 가져오는 정보의 범람과 유언비어의 확산은 폐해로 남는다. 거기에 더하여 그런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심리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그 원인은 과학기술과 집단 이성에 대한 맹신이며 그 근원은 근대로 추적해갈 수 있을 것이다. 하버마스가 비판하는 도구적 합리성을 의심해볼 수도 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결과이며, 교육이 이성의 사용법이 아닌 지식의 나열만을 주입할 결과이기도 하다. 이 경우는 다소 과장됐지만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건강불안증도 미디어의 역할이 한 몫을 차지한다.

알게 모르게 우리가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되는 의학상식들, 이를테면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떠오르게 되는 ‘KBS 생로병사의 비밀’ 같은 프로그램이 전달해주는 정보들은 인간의 생활에 유익한 것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수용하는 이로 하여금 지나친 불안을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그리고 인간의 사회는 그러한 불안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그 집착의 이유는 사실 또 다른 불안이다. 근본적인 불안을 잊기 위해 다른 불안에 집착하는 것이다.

253페이지에 나오는 장면. 병원에서 있지도 않은 병을 공장 식으로, 책임감 없이 진단하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고 풍자의 극이다. 한의원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사람들의 강박관념을 얼마나 교묘하게 이용해 먹는지 그 과정에서 언론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7.중력의 세상에 존재하는 무중력 (현대인이 짊어진 짐에 대하여)

하지만 모든 것을 언론의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어떻게 보면 언론은 인간의 고질적인 집착을 슬쩍 거드는 역할만을 했을 뿐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익을 철저히 챙겼을 따름이다.

근본적인 원인을 파고 들어가면 그것은 질병에 걸린 사회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다. 그 문제란 무엇일까? 이는 작가가 소설 속 중요한 소재인 ‘무중력’에 부여한 상징을 통해서 조심스럽게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중력자가 된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며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달이 뜨고, 그것이 지구의 중력 약화라는 개념으로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앞 다투어 무중력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무중력자로 커밍아웃한 이들이 취하는 행동은 자살을 하거나, 사표를 내거나, 달 이주를 요구하는 집회에 참여하는 등의 행위다. 이들 행위의 공통점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ㆍ도덕적 책임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일종의 ‘짐을 내려놓는 행위’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의미심장한 것은 작가가 이 행위를 하필이면 ‘무중력’과 연관시켜 놨다는 것이다. 짐을 내려놓는 것 그 짐은 마치 중력과 같아서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를 짓누르고 우리는 좀처럼 그것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며 살아간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그 의식하지 못하는 짐을 끊임없이 거부한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며 살아간다. 언제나 사표를 품에 넣고 다니는 행위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 조금만 노력하면 그것은 의식할 수 있는 행위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한다.’는 점이 그 사실을 철저하게 가려버린다. 모두가 다 불안하고 두려움에 빠져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하나의 위안으로 다가오는 것이지만 근본적인 두려움과 문제를 은폐하는 역기능을 초래하기도 한다.

하지만 달이 등장하고 무중력이라는 것이 그 전까지는 철저히 중력이 지배하던 이 땅위에서 구현될 수도 있다는 희망이 번지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그 짐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했지만 그때는 소극적이고 무의식적이었다면 이제는 의식적이고 적극적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두려움이나 불안을 대하는 올바른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사회적 짐을 의식하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행위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행위이다. 오히려 사회는 또 다른 불안에 대한 이슈에 집착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을 따름이다. 이에 편승하는 행위들이 엄마의 무중력 미용실 개업이나 구보의 무중력 판타지아 사업 같은 것들이다. 물론 이런 행위들은 사태의 껍데기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보기 좋게 실패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결국 사회가 걸려 있는 병이라는 것은 무중력 증후군이 아니라 자신의 불안과 고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 알 수 없는 것을 외면하고 부정하기 위해서 또 다른 불안을 만들어 내고 끊임없이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도달 가능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해결 가능한 것이라면 그것이 해결되는 순간 인간은 다시 원래의 문제에 직면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끊임없이 이슈를 요구한다. 언론은 매우 친절하게 여기에 호응한다. 날조된 기사도 상관없다. 사람들에게 이미 그런 조건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끊임없이 스스로를 불안하게 만들어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유행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현상’, 작가는 그것을 인간이 본질적인 자신의 질병을 외면하려 하는 행위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8.마음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작가의 처방.

언급했듯이 작품의 끝을 향해 갈수록 무중력이나 무중력 증후군에 집착했던 사람들은 점차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작가의 묘사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그들이 언제 한 번이라도 제대로 떠난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저 몇 개의 이슈들이 사회를 훑고 지나갔을 뿐이고 사회는 익숙한 듯 그것을 흘려보내고 쉽게 잊어버린다.

작품 내의 이 과장과 홍 과장, 그리고 주인공의 친구인 구보와 엄마는 무중력자를 선언하거나 그것에 의존했다가 나름의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게 되는 인물들이다. 무중력자를 선언하며 사회적 짐을 벗어버린 이들이 겪는 좌절이 의미하는 것은 어차피 우리는 중력을 거스를 수 없듯이 사회적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고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우리에게 필수적이라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진정한 문제는 그런 인간 외부에 어떤 불안을 만들어 그것에 집착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을 작가는 던지고 있는 것도 같다.

구보의 회사에서 개발한 무중력 판타지아 속에서 울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은 무중력을 필요로 하는 것, 즉 현실의 부담과 짐을 벗어버려야 하는 주체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육체적 쾌락에 집착한다. 이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 사회에 유행한 ‘무중력 섹스’와 ‘무중력 판타지아’, 그리고 ‘무중력 미용실’이다. 어쩌면 작품 내에서 무중력자를 자처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해방시켜 진정한 자신의 삶을 찾고자 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방법을 잘못 선택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달이나 무중력 증후군 소동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져 오랜만에 다시 조용해진 세상이 돌아왔다. 하지만 쉴 틈도 없이 퓰리처는 ‘만년필 증후군’이라는 것을 개발한다는 소식을 전하며 작가는 이 사회가 쉽게 그런 이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 전체를 통해 숨어있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아마도 그것이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느끼고, 또 두려워하는 ‘소외감’이 아닐까 한다. 작품의 곳곳에서 주인공인 내가 소외감을 두려워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외감이라는 것은 이슈에 집중하고 유행을 따라감으로써 사회와 일치감을 느끼는 행위를 통해 잠시나마 그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나의 짐작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현대인은 소외감을 느끼지만 그것을 정작 마음이 아닌 몸이나 외부자아를 통해 인식한다. 그 이유는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문명에 비해서 현대인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서 인류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도 미숙한 상태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마음의 문제, 소외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이슈에 집착한다.

그런 이슈와 이슈 사이의 빈 공간에서 잠시나마 세상은 조용해졌지만 주인공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세상은 평온해졌지만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고, 오히려 집착할 이슈가 사라진 이상 더 이상 그 소외감의 책임을 돌릴 대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을 느껴 붕대를 사서 가슴을 동여맨다. 나름의 응급처치를 한 것인데 이 장면은 인간이 마음의 문제를 대함에 있어서 얼마나 미숙한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대인. 인간은 또 다시 달을 찾는다. 집착하고 두려워함으로써 소외감을 잊지 위해, 진짜로 두려운 것을 외면하기 위해. 언제쯤 그 지난한 방황이 마침표를 만나게 될까. 이 질문에 대해 작품의 끝에서 작가는 다소 친절한 모습을 보여준다. 엑스레이 사진 속, 주인공의 가슴 속에 찍힌 달의 모습. 우리가 집착하고, 추구하고, 사랑하며, 열광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 어디에 있는지 작가는 그런 방식으로 가리켜 주고 있었다. 그리고 독자로서의 나는 그것을 하나의 희망으로 받아들이며 책을 덮었다.



1) 고대 그리스에서 개인이란 언제나 사회 속에 존재함을 전제한 개인이었고 그런 이유에서 사회를 떠난 개인은 생각될 수 없었다. 이런 사고방식은 로마 시대에 와서 무너지게 된다. 현대에는 이 두 가지 사고가 혼합되어 있다.









두근 두근 내 인생

저자
김애란 지음
출판사
창비 | 2011-06-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두근두근 이 여름, 가슴 벅찬 사랑이 시작된다!청춘의 가슴 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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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 독후감

 

이 문서는 김애란의 장편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2011, 창비)을 읽고 작성한 독후감이다. 한글 2010으로 작성되었으며, 한글맞춤법 검사를 실행했다.

 

1.작가 김애란

2.두근두근 내 인생

(1)구성

(2)줄거리

(3)나이를 먹는다는 것

(4)고통의 철저한 독자성

(5)부모-자식의 관계

(6)삶-누군가에게 슬픔이 된다는 것.

(7)두근두근 내 인생, 두근두근 그 여름

 

1.작가 김애란

<2011년 6월 김애란> 이 책의 마지막에 붙은 <작가의 말>의 끝이다. 이 책은 2011년 6월 작가 김애란에 의해 완성된 그녀의 첫 장편소설이다.

내가 김애란이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 언제인가 하고 생각해본다. 역시 내가 대개의 작가들을 알게 되는 방식대로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이었다. 연수가 기억나지 않아 검색해 보니 2007년 제3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이다. 전경린 작가가 ‘천사는 여기 머문다’라는 글로 대상을 받았고 김애란 작가의 ‘침이 고인다’는 우수상 수상작으로 실렸다.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특이했지 않나 싶다. 이름도, 눈빛도, 외모도, 학력도, 작품의 제목도. 그야말로 스타 작가가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그대로 타고 나지 않았나 싶은 조건. 물론 나는 그것이 그녀가 모두 순전히 타고난 것만은 아님을 안다. 아니 안다기보다는 믿는다. 아니 믿는다기보다는... 모르겠다. (이리 보면 나는 아직도 천부와 노력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춘기 소년이다.)

여튼 중요한 것은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매우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입시학원 강사로 생활하는 초보 사회인인 주인공이 자신에게 신세를 지는 후배를 바라보며 마주하게 되는 갈등, 다양한 투사와 합리화 등의 방어기제의 다양함이 선사하는 그러한 생생함을 나는 그 작품에서 느낄 수 있었다.

다시 그녀의 작품을 만난 것은 이효석 문학상 수상 작품집의 대상 수상작으로 그녀의 소설 ‘칼자국’이 선정되었을 때였다. 그 즈음의 나는 도서관에서 이효석 문학상집들을 연이어서 빌려다 보고 있었는데 편혜영과 박민규 사이에 그녀가 끼어있었다. 그 연이은 세 명의 당선자들을 보면서 나는 퍽이나 잘 어울리는 삼인방이라는 생각을 했고 김애란은 그 3인 중에서 당연히 귀여운 막내 여동생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새롭게 만난 그녀의 소설은 무척 반가웠다. 좀 더 재치 있었고, 삶과 밀접했으며, 생에 대한 농밀한 고찰을 담고 있었다는 생각이며,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라는 것에 대한 그녀의 방향에 좀 더 일관성을 기해주는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다 내가 볼 때 그녀는 분명 누구보다 관계에 집중하는 작가였고 그 중에서도 가족관계, 그 중에서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무척 ‘소중하게’ 그려내는 이였다.

이후 찾아서 본 그녀의 단편집 『달려라 아비』와 『침이 고인다』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의 글에는 분명 그녀가 생각하는 가족, 부모, 관계에 대한 내용이 시각과 후각과 청각과 미각의 경로를 통해 각각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녀가 기억하고 또 꿈꾸며 어쩌면 실제로 맺고 있는 관계로서의 가족은 그녀의 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알면서도 모르는 보편성의 힘을 빌러 공감대를 형성하고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가족과 관계와 그 속의 자신을 발견하도록 만든다. 그런 것 같다. 그녀의 첫 장편을 읽고 쓰는 독후감에 앞서 보는 나는 아무래도 이렇게 그녀를 생각하고, 혹은 그녀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2.두근두근 내 인생

(1)구성

이 책은 주인공 소년이 자신의 삶을, 그리고 그 삶을 가능케 하는 사건인 부모님의 사랑 이야기를 주워듣고 또 상상하여 재구성되어 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초반에는 주인공이 재구성하는 부모님의 이야기와 현실의 주인공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구성으로 나아가다 나중에는 도중에 작중의 주인공이 쓰는 소설이 삭제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온전히 현실의 사건들에 천착하다가 다시 소설을 쓰게끔 만드는 사건이 생겨서 그 소설을 통하여 나름대로의 깊은 여운을 남기며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다. 소설 속에 도 하나의 소설을 만들어내서 그것을 구성의 장치로 훌륭하게 사용해냈으며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도중에 과감히 삭제까지 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신선한 시도였다. 특히 소설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고 할 수 있는 두 개의 또 다른 소설들은 그 장치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도 충분히 아름답고 또 적잖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누군가의 자식으로서, 삶의 과정에서 기억의 영역 바깥에 있는, 그래서 누군가 다른 사람, 주로는 부모의 기억에 의하여 그 존재 여부를 가늠할 수밖에 없는 부모님의 또 다른 삶을 상상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그 자체로 꽤 근사한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본다. 그런 근사함을 이 작가는 수려한 문체로 더욱더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각각의 소설이 작품에서 현실 세계와 맺는 관계의 고리가 다소 헐겁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두 번의 사건이 있는데 하나는 주인공이 부모님의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고는 심경에 변화를 맞이하여 지금가지 썼던 원고를 모두 지워버리는 부분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동갑내기 여자아이가 작가를 동경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녀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 다시 처음부터 작품의 마지막을 이룰 새로운 원고를 써나가게 된다는 부분이다. 물론 제법 개연성을 가지고 있는 내용이고 어쩌면 작가가 어떠한 상징을 주입하려는 시도를 한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가진 개연성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소재가 너무 쉽게 삭제되고 또 너무 쉽게 새로 쓰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첫 번째 소설의 경우에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소년이 적지 않은 시간을 들인 것이고, 그것은 소년의 죽음 뒤에 소년의 삶을 증명해주는 소중한 매개체가 될 것인데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소중한 것을 가볍게 지워버리는 것은, 그리고 지운 뒤에 소녀의 등장까지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은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라고 하겠다. 또한 서로의 꿈을 말하는 장면에서 이서하의 발언으로, 그리고 그녀의 집요한 물고 늘어짐으로 다시 새로운 소설이 쓰인다는 것은 일견 설득력이 있기는 하지만 작품의 중심흐름에서는 벗어났다는 생각, 그래서 그로 인하여 견고함을 상실하게 됐다는 생각이 든다.


(2)줄거리

아버지의 이름은 한대수, 어머니의 이름은 최미라다. 시골의 고등학생이고 동갑이다. 남자는 체육고등학교 학생이고, 여자는 인문계 여고생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방황해야만 하는 청춘에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된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봐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아무리 서둘러도 마음처럼 서둘러지지 않는 것, 그래서 그것은 운명이라 부를만한 것이었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그들은 처가살이로 신혼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공사장에 나갔고, 어머니는 태교와 집안일을 했다. 나는 상상한다. 어머니의 태중에 있는 나를. 그때의 자신이 경험했을 일들을. 경험하고 기억하지 못했을 일들을. 그리고 그때의 부모를 생각한다. 아직 자신이 존재하지 않아서 부모이자 자식이 아닌 온전한 자식으로서의 그들을. 그리고 마침내 내가 태어난다. ‘나’가 태어나는 장면은 뭇 생명들이 그렇듯이 뭔가가 터져 나오는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이제 그들은 누군가의 자식인 동시에 누군가의 부모가 되었다. 그들의 부모가 그러했듯이.

행복한 탄생이 이루어졌지만 불행하게도 세 살 때 주인공은 조로증 진단을 받게 된다. 치료방법이 없다는 병이었다. 화자의 시점인 17세까지 가족들은 병과의 치열한 다툼을 벌이게 된다. 물론 그 싸움의 한가운데에는 주인공인 ‘한아름’이 존재한다. 부모는 여기저기 손을 벌려 돈을 빌리고 그 돈으로 자식의 병원비를 감당하지만 입원치료를 앞두고는 더 이상 돈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소년의 결심으로 이웃돕기 방송에 출연하여 그들은 병원비를 충당할 수 있는 돈을 구할 수 있게 되었고 주인공은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게 된다. 무료한 병원생활에서 주인공 소년은 자신의 방송을 본 시청자들의 반응을 살피게 된다. 좋은 반응, 나쁜 반응, 엉뚱한 반응들이 있었다. 소년의 마음에 깊숙이 박히게 되는 반응은 방송국에 문의해서 알아낸 소년의 메일로 직접 날아든 한통의 편지였다. ‘이서하’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밝힌 그녀는 자신도 불치의 병을 앓고 있다고 말하며 소년에게 접근했다. 소년은 난생 처음 접하는 이성의 존재에 당황하며 자신을 보호하기에 급급했지만 상대방의 집요한 붙임성에 그만 마음의 문을 열고 그녀와 깊은 영혼의 교감을 이루게 되었다. 소년에게 그녀는 이성으로서도, 그리고 소울 메이트로서도 무척이나 큰 의미를 갖는 존재였다. 두 사람은 자기만의 비밀이라든지 사춘기에만 가능할 것 같은 생각들을 주고받으며 더욱더 깊은 관계로 발전해 나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연히 소년은 ‘이서하’라는 인물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36세의 남성 시나리오 작가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작품에 필요한 정보를 얻으려고 소년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어른들은 그 사실을 애써 숨기며 이서하가 중환자실에 들어가서 더 이상연락을 못하게 되었다고 둘러대지만 주인공은 이미 사건의 모든 내막을 알아차린 뒤였다. 그녀에게서는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고, 주인공도 더 이상 답장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이서하의 가면이라고 할 수 있는 그녀의 메일 계정을 향해서 ‘누구세요?’라고 메아리 없는 외침격의 메일을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실연의 아픔은 소년을 게임중독에 빠뜨렸다. 노인의 몸이 되어 거동조차 불편한 소년은 가상의 세계에서 마음껏 뛰어놀면서 또한 마음껏 현실을 부정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게임을 모두 클리어 했을 때 소년의 마음속에 쌓여있는 아픔은 꽃을 피우며 무너져 내렸다. 얼마 뒤 소년은 시력을 잃게 되고 이내 완벽한 어둠 속으로, 한층 더 깊은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완연한 겨울이 되었고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장 씨 할아버지가 다녀갔고, 이서하 본인이라고 추정되는 인물이 다녀갔다. 소년은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이서하의 마지막 편지를 받았으며, 마지막 답장을 보냈다. 이미 이서하라는 인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 사람의 교류는 마지막까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부모와 자식의 차례다. 이서하 때문에 다시 쓰기 시작한 부모에 대한 소설을 소년은 마침내 그의 부모에게 선물한다. 자신이 들었고 또 상상했던 것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부모의 이야기다.


(3)나이를 먹는다는 것

이 책의 프롤로그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여러 번의 역설적인 문장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은 <이것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다.>라는 문장 때문에 드는 느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고 생각하지만 나중에는 이 작품에서 나루고 있는 ‘조로증’이라는 소재 때문임을 알게 된다. 그 병은 이 소설에 일종의 숙명을 부여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이’라는 관념을 객관적인 나이와 주관적인 나이로 구분해서 그것을 좀 더 제대로 관찰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실험도구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위의 저 문장은 얼핏 보기에는 조로증으로 인해 부모보다 늙어버린 소년의 육체적, 객관적 나이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말로 주관적인 나이도 자식이 부모보다 많은 경우가 존재하지 않는가?’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이래저래 쉽게 읽고 던져버릴 수 없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은 시제가 작중 화자의 현재로 돌아온 이후에도 주인공의 병명을 한참 숨긴다. 아무래도 그 역시 하나의 장치로 사용할 생각이었을 텐데, 방송 내레이션을 통해서 ‘조로증’이라는 병명이 처음으로 등장하기 전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통해서 주인공의 병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내가 먹은 나이 속엔 겹겹의 풍부한 주름과 부피가 없었다. 나의 늙은 텅 빈 노화였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오래 산 사람들의 인생이 궁금했다.1)’ 그리고 이 부분은 병을 암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주관적 나이와 객관적 나이의 존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늙어간다. 늙어가고 늙으면 어느새 누군가의 젊음에 의해서 천천히 잔인하게 잊혀지기 시작한다. 나이의 부재가 나이의 존재를 압도하는 것이다. 아니 사실은 가만히 있는 나이의 부재 앞에서 나이의 존재가 수시로 그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런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나이/늙음을 혐오하고 두려워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쉼 없이 나이를 먹어간다. 하지만 똑같이 나이를 먹어도 사실 객관적인 나이와 주관적인 나이가 일치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흔히 말하는 ‘나잇값을 한다.’는 것인데, 누구나 안ㄴ 말이지만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말이기도 하다. 여기에 어떤 가치를 부여해야 할까. 여기에서는 가치판단을 하기 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 그렇게 그런 ‘나이의 불일치’를 하나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직시’라는 게 나을 것 같다. 어차피 누구나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태도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니까 말이다.

작중에서 그러한 불일치의 대명서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장 씨 할아버지’다. 줄거리에서는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그는 90먹은 아버지(큰 장 씨 할아버지) 앞에서는 언제나 어린애가 되고, 주인공 소년과는 좋은 친구 사이가 되는 60살 먹은 할아버지다. 아마 그가 자신의 나잇값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그는 소년과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거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나이의 불일치라는 것이 이 소년과 노인 사이에 기묘한 관계를 형성해주었다. 어느 소설에서든 주인공은 대개 한 명 정도는 좋은 친구를 곁에 두는데 이 소설에서는 이런 방식이다.

물론 모든 것은 소년이 ‘몸이 나이를 먹는 병’에 걸려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몸이 늙는 만큼 소년의 마음도 조금은 나이를 더 먹었다. 그리하여 각각의 나이에 허용되는 오차 범위 내에서 소년은 장 씨 할아버지와 친구가 될 수 있었고, 그 부모와의 세대차이도 극복할 수 있었다. (하긴 원체 나이차이가 적게 나는 부모-자식 간이었다.) 그리하여 작가는 작품의 첫머리에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이라고 적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왜 소년은 그토록 빨리 나이를 먹어야 하는 것일까. 이 점에 대해서는 언젠가는 결국 가치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이래저래 다양한 핑계로 긍정하려고 해봤자 그것은 역시 가혹한 현실에 다름 아니다. 작품에서 기대만큼 조숙하지 못한 소년의 마음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데 그것은 작가의 이러한 염두가 아닌가 싶다. 아무리 조숙해도 애는 애라는 것. 결국 마지막에는 자신의 나이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 장 씨 할아버지 말대로 “나이란 건 말이야. 진짜 한 번 제대로 먹어봐야 느껴볼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객관과 주관의 사이 어딘가에 존재할 우리의 진짜 나이라는 것이 아닐까.


(4)고통의 철저한 독자성

이 작품은 또한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도 성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방송국과의 인터뷰 장면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치료 받으면서 드는 생각에 대한 작가의 질문에 소년은 혼자라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p.96에 소년의 생각이 나온다. ‘세상에 육체적인 고통만큼 독자적인 것도 없다는 거였다. 그것은 누군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누구와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는 말을 잘 믿지 않는 편이다. 적어도 마음이 아프다면 살아있어야 하니까.’

나도 한 번 정도는 이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특성에 대해서 ‘존재와 존재 간의 간격’이라는 내 나름대로의 용어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다른 인간의 감각을 공유할 수 없다는 특질로 인하여 이간이라는 존재들 사이에 존재하게 되는 좁혀지지 않는 간격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들어낸 이 간격이라는 개념은 비단 육체적인 것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시작은 육체적인 것이었으나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정신적인 간격이 더욱더 무서운 것이었다고 하겠다.

작중의 주인공 역시 결국에는 정신적인 고통에 처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가 오직 그것일 수밖에 없음을 직시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 안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누구도 누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인간은 역설적으로 한없이 외로워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신 앞에 선 단독자’와 ‘던져진 현존재’로서의 자기를 인식하는 순간이다. 정신적 동료라고 생각되는 인물의 배신을 통해 겪는 고통이 그런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인간은 진정한 실존으로 첫 번째 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 그 역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역설이 아닌가 한다.


(5)부모-자식의 관계

『달려라 아비』나 『칼자국』에 등장하는 그녀의 아버지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대개 무능한 존재로 그려지고 자신의 소년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여 화자에게는 애증의 대상으로, 심할 때는 희화적이거나 한심한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아버지들은 작가로서의 그녀가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는 무척 중요한 소재라고 생각되며 그래서 나는 그들을 볼 때마다 그녀가 그 아버지들에게 가지고 있을 단순하지 못한 감정들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이 작품에서도 아버지라는 존재는 어김없이 무능하다. 그리고 김애란의 능청스러운 말투는 더욱더 빛이 나는 것 같다. 굳이 말하자면 견고해진 능청이랄까.

그녀가 그리는 어머니 또한 이 작품에서는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보통 무능한 남편 탓에 자식들을 키워내느라 억척스러움을 피해가지 못하는 여장부의 이미지가 강했다. 본 작품에서는 전작들에 비해서 그런 억척스러움이 덜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연애기라든가 신혼초의 두 사람을 보면 예의 그런 어머니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인상이다.

그리하여 김애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녀가 자신의 가족, 특히 자신의 부모에 대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감정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었고, 이번 작품을 마주하면서 그녀가 자신의 그런 감정을 어떤 식으로 발전시켰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예전의 작품들이 이미 존재하는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관찰하는 시도였다면 『두근두근 내 인생』이라는 책에서는 부모-자식의 관계의 보다 근본적인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 관계가 성립하는 과정을 추적하고 또 그것의 의도와 의미를 풍부하게 고민하는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실로 이 작품의 가장 중심적인 의도를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이 부모-자식의 관계 속에 포함된 모든 의미를 밝히려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책에서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대해 한번 쯤 시선을 멈춰놓고 곰곰이 생각에 빠지게 하는 구절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리고 가장 근원적인 문제의식이라고 한다면 바로 p.77 쯤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부모는 왜 아무리 어려도 부모의 얼굴을 가질까? 자식은 왜 아무리 늙어도 자식의 얼굴을 가질까?”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바로 이러한 질문들이 이 작품을 씀에 있어서 작가의 주된 문제의식이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바로 다름 아닌 부모와 자식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이에 대하여 작가는 나름의 대답을 내놓는다.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부모가 됨으로써 한 번 더 자식이 되는 것. 사람들이 자식을 낳는 이유는 그 때문이지 않을까?”

이와 관련해서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삶을 대신 기억해주는 이들과의 관계. 나는 그것을 “서로에게 기억을 빚지고 살아가는 관계”라고 정의한 바 있다. 자식이 어릴 때는 부모가 대신 기억해 주고, 부모가 늙어 치매에 걸리거나,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는 부모가 대신 기억해주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아무래도 효심이 발동했는지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서 제일 웃기는 자식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식’이라는 단어는 ‘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들/딸’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부모에게 언제나 웃음을 드릴 수 있는 자식이 되는 것. 작품의 주인공은 그것을 희망했다. 이런 발상은 나에게 ‘최고의 효도는 절대 철들지 않는 것이다.’라는 명제로 간직되어 있다. 자칫 정말 철없는 생각으로 전락해버릴 것 같은 말이지만 그 이면에는 자식으로서의 우리가 부모에게 갚을 수 있는 은혜라는 것이 얼마나 한정되어 있는가 하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하여 자식이 부모를 가장 기쁘게 하는 순간을 생각해보니 역시 태어나는 순간이지 않은가 싶은 것이고, 최대한 어릴 적의 모습을 간직하는 철부지가 되는 것, 다시 말해 부모 앞에서는 언제나 철저히 자식이 되는 것이 가장 큰 효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고, 지금 새롭게 생각하기로는 손자를 보여드리는 것은 또 어떤가 한다. 자식의 자식은 또 어떻게 다가오는 것일지. 혹 어쩌면 자식을 낳아버린 자식은 다시는 온전한 자식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부모-자식의 관계’에 연관되는 인상 깊은 구절은 다음의 것들이다.

p.31-그 뒤로도 어머니는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긍정과 부정 사이를 오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촉촉하고 어두운 공간 속에서 내 몸은 자꾸 자라났다. 주위에선 쉴 새 없이 쿵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귀가 아닌 온몸으로 들었다. 그러고 지하벙커에서 모스부호의 해독에 열중하는 병사처럼 내 주위를 감싸는 그 떨림의 실체를 파악하려 애썼다. 그리고 그 암호는 다음과 같았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두근두근’

p.36-“얘가 우릴 좋아할까.”

p.45-많이 기다리고 기대하셨을 텐데 초면에 너무 더러워서 송구할 지경이었다.

p.48-‘아버지도 이제 다 컸구나.’ 하는 대견한 생각이 들었다.


(6)삶-누군가에게 슬픔이 된다는 것.

이 책의 표지에는 제목 이외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글씨로 쓰인 글귀가 있다.

‘미안해하지마.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뻐.’

대충 이런 문장인데 이것은 p.50에 아버지가 소년에게 한 말을 말투를 좀 바꿔서 옮겨놓은 것이다. 이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너는 자라서 꼭 누군가의 슬픔이 되렴. 그리고 마음이 아플 땐 반드시 아이처럼 울어라.”

아무래도 지금까지 범주를 나누어 정리한 내용들의 나머지 것들, 좀처럼 어떤 범주로 묶어내기 쉽지 않은 것들을 나는 ‘삶’이라는 이름으로 둘러 묶어야 할 것 같다. 대개의 소설들은 다름 아닌 우리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삶이라는 것은 실로 많은 것을 묶을 수 있는바 이런 애매한 경우에는 참으로 유용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삶 속의 슬픔에 주목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글은 어차피 새드엔딩이 예약된 글이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어쩌면 누군가의 슬픔이 된다는 것. 그리고 때로는 아이와 상관없이 아이처럼 우는 일이라는 것. 작가는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유한한 자가 무한을 꿈꾸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작가는 매우 재미있는 전환을 선보인다.

“완전한 존재가 어떻게 불완전한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지 그건 정말 어려운 일 같거든요. 그래서 기도를 못했어요. 이해하실 수 없을 것 같아서.”

이 부분은 유한-무한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는 듯하다. 보통의 생각이라면 유한자가 무한자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보는데 작가는 바대로다. 모든 것을 가진 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는 오히려 그 때문에 유한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능력의 존재가 오히려 능력의 부존재를 이해하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물론 무한자가 유한자를 이해하는 행위 자체를 하나의 능력으로 치환한다면 쉽게 풀려버리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유한한 인간의 존재이기에 가능한 것이 있다는 결론을 가능하게 하는 이러한 시도는 매우 의미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쩌자고 인간은 그렇게 이해를 바라는 존재로 태어나버리게 된 걸까?”

앞서 말했듯이 철저한 육체의 단절로 인해 인간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간격’을 마주하고 있고, 신에게마저 이해를 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하지만 그토록 인해를 바라는 존재로 태어나버린 인간.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을 것이다. 실존주의에 입각하여 존재를 초월한 독립을 수행하거나, 다른 인간의 이해를 구하는 것. 앞서 나는 ‘존재와 존재 사이의 간격’이라는 것이 비단 육체의 영역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정신적 영역에서 더 잔인하게 노정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육체와는 달리 정신은 ‘공감’이라는 통로를 이용해서 이해를 추구할 수 있다. 물론 완벽한 이해해 도달할 수는 없고, 자칫 잘못하면 가혹한 ‘간격’에 직면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이해를 기대해볼 수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러한 인간의 처지에 주목한 거라고 보인다.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이해되기를 기대하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그에게 슬픔이 되는 것, 그리고 결국 언제고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것. 이 책에 그려진 인간 삶의 커다란 모습이 아닌가.


(7)두근두근 내 인생, 두근두근 그 여름

지금까지 내가 이 소설에서 발견한 이야깃거리들을 나열해 보았다. 나이를 먹는 것, 고통의 독자성, 부모-자식의 관계, 삶 같은 것들이었다. 이 책이 가진 장점 중의 하나는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 같이 진한 생생함을 선사하는 김애란 특유의 실제성이고 그와 함께 위에서 언급한 소재들이 뚝뚝 끊기거나 따로 놀지 않고 잘 섞여서 하나의 글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고 한 나머지 출생 이후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좀 김애란 답지 않게 평이해져버린 느낌도 있다. 특히 후반부는 차라리 신경숙 작가가 썼으면 눈물 콧물이라고 제대로 뺐을 텐데 싶기도 했다. ‘남자아이의 화자는 김애란에게는 영 아닌가? 역시 김애란은 여성 자아가 너무 강해서 여성 화자가 제격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부모가 극단적으로 무능하거나 억척스럽지 않아서 김애란스러움이 덜하다는 생각도 들기도 했지만 저 많은 생각들을 하나의 글 속에서 맛있게 요리해낸 점만큼은 확실하다 생각한다.

결국 정리를 한다면 ‘삶이란 두 사람의 사랑을 시작으로 그들의 자식이 되고, 또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 나이를 먹고 평생 그렇게 부모인 동시에 자식의 얼굴을 하며 살아가다가 누군가를 이해하고 누군가의 슬픔이 되며 어린애처럼 우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겨우겨우 한 문장이 될 수 있는 많은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두근두근 그 여름>이 가장 마지막에 실린 것을 보니 니체의 영원회귀가 생각났다. 나는 커서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말하던 아이. 부모의 마음을 고토록 알고 싶어 하던 자식에 대한 이야기. 끝인 것 같지만 끝은 아니다. ‘생이여 다시 한 번!’이라고 말하겠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어, 귀를 기울이면 어디에선가 변함없이 내 어머니의 두근두근 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린다. 실로 두근두근 내 인생이다.


-끝-


1) p.53








박민규의 핑퐁을 읽고

1.작가론 (작가: 박민규)

박민규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몽고반점>이라는 단편소설이 2005년 제 27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한강이라는 작가가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 200여 페이지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 바로 <갑을고시원 체류기>라는 다소 기이한 제목의 단편소설이었다. 그리고 그 짧은 소설은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박미라는 인간을 궁금해하도록 만들었다. 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 당시에는 일단 독서의 깊이가 깊지도 못하여 대강 줄거리만으로 작가를 평가하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게 던진 궁금함의 무게는 대상을 수상한 이들보다 더 무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날 나는 박민규라는 작가를 다시 만나게 된다. 대학교 1학년 때 들었던 국어와 작문이라는 수업에서 교수님께서 학생들에게 부여한 과제물 중에 그의 지구영웅전설이라는 장편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과제를 선택했고 그렇게 한번 이 작가는 나와 엇갈렸다.

다행한 것은 이후로는 그와 그렇게 엇갈리지도 아니 엇갈릴 수도 없었다는 점이다. 국내 내로라하는 각종 문학상 수상집에 우수상을 포함하여 심지어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고, 하나 둘 그의 장편이 발표되면서 어느새 대한민국 문단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제법 공고해졌다.

그리고 작가 신경숙이 엄마를 부탁해로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했던 2009~2010년도에는 그녀와 함께 나란히 여러 도서 판매몰 등의 투표에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게, 박민규였다.

2.인물론 (못 그리고 모아이)

이 작품의 스토리는, 아니 그 스토리를 이루고 있는 구도는 상당히 간단명료하다. 크게 보자면 단 두 명의 주인공만이 등장할 뿐이다. 그리고 그 두 명의 소년은 그들의 학교생활을 통해 붙여진 별명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을 뿐, 그들의 집안사정이나 가족들의 인물들은 이 이야기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는 상태이다. 험악한 세상에 먼저 던져진 현존재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

이라는 이름의 화자와 모아이라는 이름의 화자의 친구이다. 각각 반자의적으로 붙여진 인물의 별명이었고, 그것은 그들의 모양새나 그들의 신세를 대시 말해주고 있다. ‘이라는 별명은 언제나 머리를 못처럼 두들겨 맞는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고, ‘모아이라는 이름은 저 멀리 아이티섬에 세워진 사람 얼굴 모양의 석상을 닮았다는 계기에서 붙여지게 된 것이었다. 모아이석상 과연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대체 어떻게 이들은 친구가 되어 함께 이 책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왕따이다.

어릴 적 나는 왕따라고 생각되는 것을 당해본 적이 있다. 아무래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가 그런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행한 것은 수도권이 아니라 지방에 있는 학교였기 때문에 그 당시 전국을 휩쓸던 왕따라는 문화가 그렇게 완벽하게 전달되지는 않았다는 것이고, 불행한 것은 신설학교라 선후배 간의 전통 같은 것이 없어서 그런 신종 문화가 창궐할 경우 자율적으로 통제하고 누군가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나 문화 같은 것들이 전무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2년 동안 나의 전쟁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언제나 놓을 수 없는 긴장이 있ᄋᅠᆻ고. 머리 어딘가의 나사가 잔뜩 풀린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항상 등 뒤를 조심해야 했고, 습관적으로 나를 향해 날아오는 손이나 발에 대하여 습관적으로 상대방도 나도 아프지 않은 부위를 그리고 그런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차라리 내가 더 아픈 부위를 갖다 대는 기술을 터득할 수 있었던 그런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깐, 언제나 반항과 굴욕의 아슬아슬한 외줄을 초점 없는 눈동자로 걸어갔던 시절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벌써 십여 년이 흘러. 나는 이 작가의 책에서 다시 그 시절을 만났다.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던, 꿈속에까지 찾아왔던, 잊기 위해 너무나도 노력했던, 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그런 일들 그런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이해하지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아이라는 두 명의 중학생 소년들이다. 그리고 이 두 소년을 친구로 만들어 준 것은 다름 아닌 왕따였다. 두 소년의 특징이 상이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제공되는 그들이 받아들이고 또 살아내야만 하는 왕따도 그에 맞추어 약간 달라졌다. 책에서 표현되고 있듯 그것은 북극에 사는 에스키모와 남극에 사는 펭귄의 심정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공존은 참으로 유일하게 따뜻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치 지구의 심층으로 손을 뻗어 그 가운데에서 서로의 손을 잡은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왕따.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갈취. 그리고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방관하고 고개를 돌리는 세상.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 우주였다.

그래서 모아이는 주인공인 에게 말한다.

“(왕따를 당한다는 것은) 소외가 아니라 배제다.”

우리는 세계가 깜박한 인간들이라는 것이었다.

3.인류

무엇일까 대체. 그가 말하는 소외배제사이는 거리라는 것은 말이다. 전자는 어느 정도는 개인의 존재 자아가 살아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개성은 살아지고 어느덧 사물과 다를바 없는 그런 몰인격적인 존재가 되어 볼품없이 어딘가로 치워져 버린다는 느낌이 강한 듯 하다. 그렇게, 그 두 소년도, 작가도, 독자인 나도 조용히 각자가 배제된 세상을 그려보았던 것 같다.

왕따가 무서운 이유. 왕따를 당하는 사람들을 가장 슬프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 이 글 속에 나오는 치수라든가 종두같이 직접적으로 피해자를 괴롭히는 인간들일까? 물론 그들의 존재가 누군가를 근본적으로 두렵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로 무서운 것은 내가 그렇게 당하고 있을 때 그 순간을 곁눈질로 목격하고 있는 방관자들이다. 단지 몇 걸음 거리에 떨어져 있을 뿐인데, 마치 수족관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 정도로 그들의 일상과 나의 일상은 너무나도 먼 거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점점 그렇게 차곡차곡 그들의 내면 안에 쌓여갈 나의 이미지가, 그것이 정말로 무서운 것이 아닌가.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더 이상 나빠지지도 좋아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나로 하여금 고개를 돌릴 수 없게 만드는 것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은 단지 한 교실의 다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사실 누구에게나 60억의 인구에서 그를 제외한 모두가 그를 방관하고 그를 배제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아직 만나지 못해서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도와줄 상황이 안되거나, 겁이 나거나 등등의 이유 때문에 그렇게 인간은 서로를 소외시키고 또 나아가 배제시키게 된다. 같은 인간이 같은 인간을.

4.핑퐁, 랠리

그렇게 왕따를 통하여 배제된 채 살아가고 있던 우리의 두 소년들. 그들의 일상에 드디어 전환점이 될 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이 등장했으니 바로 탁구이다. 그들이 즐겨 맞던주상복합아파트 건설현장 옆의 공터에서 그들은 낡은 탁구대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흘러 흘러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들은 시내에 있는 탁구 전문점을 찾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그들을 인도해 줄 쎄끄라텡이라는 외국인을 만나게 된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탁구를 가르쳤어. 어느 쪽이든 이 지루한 시합의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아직도 결판이 나지 않았단다. 이 세계는 그래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곳이야.”

그렇듯, 그는 확실히 두 소년에게 탁구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기도 하면서 그들을 도와주는 착한 어른이었지만, 이따금씩은 자신의 나이가 수 억년이며, 인류의 역사상 중요한 위인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과 쳤던 탁구게임의 이야기를 하는 듯 소년들로 하여금 이 아저씨가 확실히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발언을 종종하게 된다.

아무튼 그래도 그의 도움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소년들은 탁구를 배우면서 서로 탁구공을 주고받는 랠리를 통해서 일종의 교감을 계속해 나가게 된다. 마치 그 동안 배제됐던 그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자신의 라켓을 갖는 다는 것은 곧 자신의 의견을 갖게 된다는 것이라는 것을. 적어도 어렴풋하게 나마 그 소년은 느낄 수 있었다.

5.핼리 혜성

이 혜성의 이름을 나는 참 오랜만에 들었다. 아니 혜성이라는 이름 자체를 정말 오랜만에 들었다. 과학만화를 즐겨 읽고 호기심이 많았던 어린 시절에는 차라리 그런 이름을 그런 단어를 접할 기회가 더 많았는지 몰라도 나도 이제는 좀처럼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 그런 어른이 되어 버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이 글에는 이름하여 핼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이 등장하게 된다. 물론 가상의 집단이겠지만, 그 모임에는 일단 모아이가 가입해 있고, 나중에 뒤이어서 도 그곳에 가입하게 된다. 대충 설명하자면, 핼리 혜성이 지구에 정면충돌해서 인류가 멸망하기를 바라는 모임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 인류에게 배제된 사람들이 결국 그런 인류를 부정하고 그것을 지워버리려는 의지였다.

아마도 그들의 살아생전에는 실제로 그 혜성을 만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항상 다음 달에는 행리 혜성이 날아와서 지구를, 인류를 지워줄 것이라고 간절히 믿는 그런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살아가야만 하는 그런 세상이었다.

: “긴장된 삶이구나.”

모아이: “겸손한 삶이지

4.실존

그들의 삶을 바꿔줄 수 있을 것 같던 탁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을 통한 랠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좀처럼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여전했고, 또한 그와 함께 여전히 세상은 인류는 그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렇게 완고한 인류 앞에서 결국 던져진 현존재는 절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왜 우리는 그 자체로 조재할 수 없을까? 왜 우리는 반드시 생존해야만 하는 걸까? 어떤 우연이 우릴 그렇게 고안한 걸까? 인체를 통해 태어나고 길러져야만 인간일까? 반드시 그래야만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영문도 모른 채 남아서 뭘 하려는 걸까? 이렇게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말이야.”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실존을 의심하게 된다. 생에 목적이 있다면 대체 무슨 목적일까. 목적이 없다면 대세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런 질문들을 통해 소년들은 각자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첫 번째는 인간이란 우주에 떠있는 행성들처럼 서로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고 너무나도 보잘 것 없이 작고 미약한 존재들이라는 것. 그리고 수 없이 많은 인류를 수 없이 많이 배제해버리는 인류이지만 그런 인류조차도 우주의 규모에서 따져본다면 역시 배제되고 있는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런 인간들은 마치 9V짜리 건전지 같이 별로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들이지만 그것들이 모여 누군가를 죽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들 다수인척 하는 거야. 이탈하지 않고, 평행으로 병렬로 늘어서는 거지. 그건 길게 오래 생존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야. 전쟁이나 학살은 그 에너지가 직렬로 이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지. <중략> 요는 인간에게 그 배치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이기가 있다는 거야. 인간은 그래서 위험해 고작 마흔 한명이 직렬해도 우리 정도는 감전사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래서 생존해야 해 우리가 죽는다 해서 우릴 죽인 수천볼트의 괴물은 발견되지 않아. 직렬의 전류를 피해가며 모두가 미비하고 모두가 위험한 이 세계에서 그래서 생존해야 해. 자신의 9볼트가 직렬로 이용되지 않게 경계하면서 건강하게 탁구를 치면서 말이야.“

그렇게 그들은 조용히 생존하기로 결정했다.

세상이 아무리 그대를 힘들게 하여도.

실존을 갖고 생존하기로.

설사 실존을 찾지 못하더라도, 생존하기로.

(나는 작가가 두 소년이 자살을 하지 않기로 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5.생존, 잔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