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저장소

그것이 알고싶다.E946.140712.누가 썼는가? 애국가 작사 미스터리

by 통합메일 2014. 7. 13.
반응형

그것이 알고싶다.E946.140712.누가 썼는가? 애국가 작사 미스터리




2014년 7월 12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주제는


애국가


안익태가 작곡했다고 알려진 애국가의 가사를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


아직까지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인데


친일파인명사전에 등재된 좌옹 윤치호의 후손들이


애국가의 작사가가 바로 자신의 조상인 윤치호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



그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는 윤치호의 친필 애국가


그런데 천재치고는 글씨를..


아니 원래 천재는 악필이라 하였던가?





문창극 전 총리후보자께서도 인용을 하셨던 윤치호


이 분은 참 두고두고 까일 것 같다.



윤치호 1865~1945



윤치호

1881년 신사유람단-일본 도진샤에서 수학

1885년 중국 상하이 중서서원에서 수학

1890년 미국 밴더빌트대학에서 수학(한국인 최초 미국 유학생)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석사 학위 졸업



윤치호는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일단 언어적인 재능이 탁월했고



이런저런 식견이 뛰어나고 정치학에도 일가견이 있던 모양



하지만


나라에 대한 자긍심을 지키지 못한 게 흠이었다.


윤치호의 일기 1888년 6월 2일의 내용이 이렇다.



내 나라 자랑할 일은 하나도 없고 다만 흠잡힐 일만 많으매 일변 한심하며 일변 일본이 부러워 못 견디겠도다



지금까지의 여러 정황을 보건대 나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 영국의 지배를 받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마음대로 내 고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일본을 선택할 것이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



1945년 4월 일본제국회의 귀족원에 칙임


칙임이라는 것은 황제의 임명을 말한다.



중추원: 조선총독부 총독 직속 자문기구


(다만 자문의 역할만을 했을 뿐 실질적 권한은 없음)





필적감정가들의 의견은 앞서 제시된 애국가 친필이 윤치호의 것이 맞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증거로 제시되는 것이


당시 발간된, 애국가가 포함된 찬양집을 발간한 인물이 바로 윤치호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대한독립협회 회장까지 역임한 사람.


친일파의 낙인이 찍히긴 했지만 반면에 좋게 볼만한 면도 많다는 게


그를 변호하는 이들의 입장이다.









그 후손들은 자연히 자신의 조상을 옹호하는데



학자들은 다르다.


"일제에 협력해서 친일 연설을 하고 친일기고를 하고 그건 뚜렷하게 나타나는 거죠."












국회의원 안민석은 윤치호와 그 일가족인 친일로 인해 보복받는 것이 두려워 애국가 작사의 공을 내세워 면죄를 받으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다.



또한 애국가의 작사가가 윤치호가 아니라는 증거로 그는 윤치호의 일기장에 애국가에 대한 이야기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반대로 이번에는 도산 안창호의 후손들이 나온다.


오오 안창호라니






안창호의 딸을 보니 정말 기분이 묘했다.






일찍이 우리 정부에서도 애국가 작사가 규명 위원회를 조직 구성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위원장이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로 유명한 그는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독립선언서' 쓴 손으로 친일 책 출간하다니... - 오마이뉴스





안창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승만 정부는 애국가의 작사가가 안창호라는 사실을 은폐





윤치호도 친일파

최남선도 친일파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

물론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도 친일파


그렇다면 우리는 친일파가 작사/작곡한 노래를 애국가로 채택하고 주구장창 불러온 국가!




하지만 윤치호와 안창호 두 사람이 겹치게 되는


평양대성학교 시절을 언급하며


이때 안창호에 의해 애국가의 가사가 만들어지고 또 불려지고


그를 통해 윤치호 역시도 그 가사를 알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해석도 나온다.




안창호는 윤치호를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추대한다.




원래는 같은 뜻을 품고 서로를 존중했던 안창호와 윤치호였는데






고종황제가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고 윤치호가 105인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전향으로 조건으로 석방되면서 윤치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





















윤치호의 경우에는 현실주의적 국제관을 취했다.


이것은 홉스의 철학에 기반하여 국가의 국력이 곧 세계의 질서를 만들어 낸다고 주장하는 입장


때문에 강대국에 의한 약소국의 착취를 당연시하게 되고


강대국의 만행보다는 약소국의 무능을 원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윤치호의 사상이 가지고 있는 함정이다.





하지만 안창호의 경우에는


이상주의적 혹은 정의주의적 국제관을 가지고 있었다.


현실세계에 엄존하는 국력 뿐 아니라, 모종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


올바른 세계의 정세라는 이해를 통하여


강대국이라 하더라도 이유없이 약소국을 유린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로 간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방송의 후반부에는 윤치호의 친필 애국가가 쓰여진 1907년 이전에 이미 등장했던


무궁화노래, 혹은 무궁화가 들에 대한 소개가 이어진다.


1897년 같은 1890년 대의 일이다.



1904년에 발견된 고문서도 등장한다.



동해물과 백두산


남산 위의 소나무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등장한다.










여튼 방송은 윤치호가 애국가를 지었다고 주장하는 1907년 이전에 이미 현재의 애국가와 비슷한 내용의 가사들이 여럿 존재했음을 들어 윤치호 측의 주장이 별로 신빙성이 없다는 쪽으로 가닥은 잡은 것 같다. 나아가 고문서들이 근거가 없다고 하더라도, 앞서 말한 것처럼 대성학교 시절에 안창호가 짓고 그것을 윤치호가 알게 되고 그것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원작사가가 안창호가 아니라 윤치호인 것으로 와전되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니 아직까지 문제는 여전히 열려있는 셈이다.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정부에서는 다시금 애국가작사가진상규명위원회를 조직할 예쩡이라고 하는데 아직까지 조사위원 1명 만이 확정된 상황이라고 한다. 뭐 서두르는 것도 서두르는 것이지만 제발 이번에는 제대로 된 조사위원들을 세워서 저번처럼 친일파가 친일파 후장을 핥는 조사가 되지 않도록 만전에 만전을 기울였으면 하는 생각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