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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기록

똥과 함께, 똥을 향하여, 똥을 위하여

by 통합메일 2012.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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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음모론

이른바 똥의 누명이라는 키워드에 착안하여 똥이라는 존재나 관념에 대하여 지나침 혐오의 감정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는 발상. 그 경로는 행동주의적으로든 사회문화적으로든 다양할 것이나 선천적이지 않고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반응이라는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여타의 동물이나 유아기의 인간이 똥에 대한 적극적 거부반응을 가지지 않는다고 할 떄 그러한 반응은 후천적인 것이라고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지인 중에는 영아시절 부모가 한 눈을 판 사이에 자신의 똥을 식변했다는 이가 존재함.) 다만 여기서 역시 문제가 되는 것은 똥에 그렇게 적극적 혐오의 감정이 부여된 이유나 의도라고 할 것인데 똥오줌의 역사(Monestier, Martin / 문학동네 / 2005 )라는 책을 보면 근현대의 유럽까지만 해도 인분에 대해서 그렇게 깔끔을 떤 것은 아니고, 오랜 세월 농경에 전적으로 의존한 아시아 역시도 인분을 더럽다기 보다는 거름 혹은 위험한 독물이라는 이미지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했다. 때문에 이러한 관념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은 꽤 최근의 일이 아닌가 한다. 일단 의심해 볼 수 있는 것은 위생관념의 발달로 인하여 인분의 비위생성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고, 이것이 가능성이 가장 높고 이렇게 되면 음모라고 하기는 힘들다. 음모론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또 다른 경우인데 똥에 대립되는 이미지를 인간이 향유하기 되고 그것에 더욱더 높은 가치를 부여해 나가는 과정에서 똥이라는 관념을 무시, 폄하, 혐오함으로써 그 상반되는 이미지를 더욱 더 강조하려는 의식무의식의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기존에 인간이 똥에 대해 가지는 혐오의 수치가 10이고 그에 상반되는 이미지의(이를테면 향수 같은 것)의 선호 수치가 +50이라면 혐오를 50으로 늘림으로써 그에 반대되는 선호를 +90정도까지로 향상시키는 것이다. 물론 실제적으로 인체가 경험하는 감각에는 변화가 없다. 똥은 여전히 우리에게 똥의 색깔과 모양을 가진 채로 똥냄새를 풍기며 다가온다. 나아가 향수를 비롯한 선호의 대상 역시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우리에게 늘 일정한 정도의 선호만을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에 상반되는 대상에 주어지는 혐오의 정도가 변함에 따라서 그 선호 역시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다. 즉 혐오의 강도를 조절함으로써 똥은 더욱더 혐오스러운 것이 되고 그에 반대되는 이미지에 대한 선호는 더욱 간절해지며 이것은 자동으로 끊임없는 순환을 시작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특정 가치들을 강조하거나 거기에 집착하기 위한 수단으로 똥에 대한 혐오가 사용되었다는 애끼고 이런 과정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루어지면 그로 인해 똥은 모종의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음모론의 성격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폐기된 졸작 <똥의 누명>(20117)을 구상할 때도 이런 생각을 비스무리하게는 했다. 그런데 글이 영 시원하기 나오질 않아서 정말 이상한 글이 되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떄는 발상도 지금보다 더 어렴풋했고, 똥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음모론을 구성해 내고 <똥의 누명>이라는 제목을 만들어낸 스스로가 너무 대견해서 구체적인 밑천도 없이 그냥 생각나는 다른 것들과 엮어서 종이 안에 때려넣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글은 진짜 내가 봐도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현실세계와의 매개를 수행할 상징이 전혀 없고, 그냥 뭔가 있어보이긴 하는글이 됐따. 사실 답은 간단한 것이었는데 그땐 그걸 몰랐다. 201112월 즈음 알랭 보통의 불안쳇쳇거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었는데 그 과정에서 확실해진 것 같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시리즈를 읽으면서 그 영향도 좀 받았다. 내가 똥의 누명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인류에게 찾아와 인류가 자행하는 가치의 전도와 가치의 혼탁현상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좋아하고 혐오하는 것들을 볼 때 우리는 그것들을 제대로 좋아하고 혐오하고 있는가? 가난이나 장애 등을 떠올릴 때 수반되는 감정들은 과연 정말로 순수하게 자연스러운 것인가? 혹시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에 대해서 제대로적절하게 혐오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좋아하고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똥의 누명은 그런 사유로 진입하는 티켓 같은 것이다.

 

2.존재와 차원

음모적 접근은 일 년이 넘게 붙들고 있던 것인 반면 이 두 번째 방식의 사고는 비교적 최근 요 며칠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 맥락까지도 생생한데, 변비로 고생하며 그 날도 쾌변에 실패한 어느 날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는 시늉을 하)다가 1130분에 기숙사로 돌아가던 나는 어김없이 팽팽하게 부푼 배를 이따금 쓰다듬으며 어둔 밤의 가로등 길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사흘째였다. 스트레스 때문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어떻게든 무거운 마음을 합리화시키려 애썼다. 그러다 문득 아니 그럼 대체 그 며칠 동안 내가 먹은 음식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운동도 안하고 하는 일이라고는 먹고 자고 싸는 것뿐인데 똥 만드는 기계가 똥도 못 만들면 대체 그 존재는 어떻게 정당화 된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자신의 존재의미에 대해 한참 신나게 회의놀이를 하고 있는데 똥이 사라졌다는 데 사고의 흐름이 쏠렸다. 그러면서 혹시 정말로 내 몸 속의 변이 어디론가 다른 차원으로 순간이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스스로의 정신상태가 너무 위험해지는 것 같아서 황급히 멘탈을 추슬렀다. 대신 똥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생각이 이어졌는데 그 생각이라는 것인즉 똥이라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단순히 인체활동의 찌꺼기가 아니라 우리가 섭취한 음식의 변형태라고 할 수 있는바 우리의 몸이 활동의 주체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어떤 물질을 다른 형태로 변형하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들어갈 때의 음식물과 나올 때의 똥이 가지는 인식적 가치의 어마어마한 차이를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얼마간의 비약을 거쳐 차원의 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똥의 누명>을 쓸 때는 인간의 탄생과 똥의 탄생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무리수를 두었는데 아무래도 능력 밖의 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출산의 측면에서 인체가 하나의 문이 된다는 것은 워낙 일반적인 관념이기도 한데다가 보통의 남성들에게는 경험불가능한 일이라서 애로사항이 활짝 활짝 만개하여 중도에 포기한 바 있었다. (그리고 가만 보면 박민규의 아침의 문표절이다. 아무튼 이 접근은 똥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차원의 문과 같은 성질을 갖는다는 것을 파악하는 일이 핵심이라고 하겠는데, 나아가 그런 사고를 확장하여 자연 속의 독립된 주체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하는 부속품 같은 지위를 인간에게 부여하고, 그러한 인간을 포함하는 자연 역시도 모종의 문으로 바라봄으로써 하나의 세계관이 어렴풋하게나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인데 범신론 냄새가 코를 찔러서 창피하기 이를 데 없긴 하지만 하여튼 이 시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문인 동시에 그 문을 통해서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는 존재인 동시에 또 문인 동시에........인 이 세계를 정의하는 문제이다. 일단 떠오르는 것은 불가(佛家)의 세계관인데, ‘아 그래서 <똥의 누명> 배경이 절이었나? ’하는 생각을 스스로가 썼으면서도 심지어 감탄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니면 뭐 물아일체인가.

이 접근에 관련해서는 여기까지다 무리수도 많고해서 단단해지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이다. 아니면 영영 완성을 못할지도 모른다. 그냥 음모론으로 충분한가 마 그래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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