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중의 『고민하는 힘』 독후감
1.소개 2.구성 3.고민하는 힘 0)서장: 지금을 살아간다는 고민 1)나는 누구인가? 2)돈이 세계의 전부인가? 3)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4)청춘은 아름다운가? 5)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6)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7)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8)왜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9)늙어서 최강이 되라 4.총평 |
1.소개
이 책은 1950년 일본 규슈에서 태어난 재일 한국인 강상중의 책이다.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자신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경험해야만 했던 방황과 고민들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을 했다. 『재일 강상중』, 『도쿄 산책자』, 『청춘을 읽는다』, 『살아야 하는 이유』, 『고민하는 힘』 등의 저서가 있다. 내가 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어느 시사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그의 책을 소개하면서 준비하는 그와의 짤막한 인터뷰를 듣게 되면서이다. 이미 그는 여러 가지 저서를 통하여 우리나라에도 제법 넓은 인지도를 쌓은 상태였지만 무식한 나로서는 처음 접하는 이름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기대 없이 그냥 듣게 되었는데 곧이어 일본 사회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갈등이나 병폐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지적을 만날 수 있었다.
2.구성
그에 대해 좀 더 알아가기 위해서 내가 처음으로 선택한 책은 바로 『고민하는 힘』이다. 이 책은 9개의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1.나는 누구인가, 2.돈이 세계의 전부인가, 3.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4,청춘은 아름다운가, 5.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6.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7.변하는 않는 사랑이 있을까? 8.왜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9.늙어서 ‘최강’이 되라라는 것이 목차의 제목이다. 목차 제목으로 어느 정도가 유추가 가능하듯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이 사회가 이전의 사회에 대하여 갖게 되는 차이점, 그 차이점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구조적 병폐, 그러한 구조적 병폐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필연적 시련, 그러한 시련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일본의 대표적 문학가 나쓰메 소세키와 영국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를 반복적으로 언급하면서 그들의 생각과 생애를 예로 들면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 혹은 걸어 나가야 할 길을 찾아나가려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이 다소 옴니버스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는바 본 독후감은 챕터별로 나오는 작가의 생각을 정리하고 그에 대한 나의 평을 적어 나가는 형식을 취한 뒤에 총평을 적는 방식을 취하고자 한다.
3.고민하는 힘
0)서장: 지금을 살아간다는 고민
이 챕터에서 작가는 앞으로 계속해서 이 책을 관통하게 될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세계에 대한 규정이다. 즉,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이전의 세대와는 달리 불확정 혹은 미정을 특징으로 하는 세대로서 ‘자유’로 상징되는 시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롭기 때문에 그 세계는 끊임없이 그리고 정신없이 변해 나가는 대상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상당히 모순적이게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런 세계 속에서 언제나 불변하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서 헤매는 존재로 남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방황을 경험하고,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챕터에서 작가는 처음으로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에 대한 언급을 시작한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사회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또 활동했지만 어떤 특정한 시각에서 바라볼 때 두 사람은 매우 비슷한 생각과 고민을 공유했다고 간주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게 작가의 주장이다. 그것은 시대가 그들에게 부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생각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대를 살아간 여타의 사람들과는 다소 상이하고자 했던 생각이었다. 즉 두 사람이 공유하는 생각은 ‘스스로 그 흐름에 올라타지만 그 흐름에 휘말리지 않고 시대를 꿰뚫어 보겠어.’라는 것이다.1)
작가는 이들이 살았던 19세기 말~20세기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세기 말~21세기와 매우 비슷하다는 주장을 한다. 세계대전 직전의 세계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한계에 봉착하고 인간의 소외가 극도에 달함으로써 결국 그것이 전쟁의 씨앗이 되어가고 있던 시대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지금과 매우 닮은 시대 속에서 나름대로의 지독한 고민을 통해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준 두 인물의 지혜를 돌아보는 것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분석은 어쩌면 이런저런 요소들을 망설임 없이 거세해 버리고 과거와 현대를 동위대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모순을 함유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찬찬히 읽어가는 동안 또 한편으로는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분명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가 살았던 그 시대가 세계대전을 잉태할 정도로 심각한 인간소외를 경험하고 바야흐로 ‘개인’의 시대가 태동하다가 사산된 시대라고 한다면, 지금은 그러한 개인의 시대가 아주 활짝 열린 시대인 만큼 두 시대는 어느 정도의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고 우리는 선배에게 배운다는 생각으로 그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간 현자들의 생각을 엿볼 필요를 외면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나는 누구인가?
오늘날 이따금 사회적인 문제를 지적한 화두로 떠오르는 말 중에 자기중심주의라는 것이 있다. 이러한 자기중심주의는 자기, 즉 개인을 모든 것에 중심에 두고 사고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오직 그 개인만을 사고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개인이라는 것이 등장한 시점은 언제일까? 작가는 그 시점을 중세의 문이 닫히고 근대의 문이 열린 시기라고 말하고 있다. 천년의 암흑시대가 종결되고 사람들은 삶을 폭넓게 지배하고 있는 종교로부터 해방되었다. 하지만 그 해방과 동시에 인간은 딛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심정이 되었다. 그 때 등장한 것이 르네 데카르트였고 그는 코기토 에르고 숨이라는 명제를 통하여 인간의 자기 존재를 증명해 낸다.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그 유명한 말이 바로 그것이다.
데카르트를 통하여 인간은 비로소 신을 거치지 않고서도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가 파생되게 되는 데 그것은 바로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신이라는 보행기를 박탈당한 인간은 아주 서투른 솜씨로 걸음마를 시도하는 어린아이와 다름없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서툰 아이는 겨우 간신히 자신의 존재만을 인정할 수 있을 뿐 감히 타인의 존재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리고 더욱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고히 하고 거기에 집착하면 할수록 자신과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벽이라는 것은 더욱더 공고해지는 것이다.
작가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는 과거 처음으로 인간이 개인의 자아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준의 자타인식을 보여주고 있고, 어찌 보면 더욱더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있다. 내가 볼 때도 확실히 현대인들은 자신과 타인을 서로 소외시키는 행위들의 반복 끝에 점점 더 외로워져 있다. 그러한 외로움을 대놓고 드러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에 그러한 소외와 외로움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발견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결국 인간은 타자의 진정한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집착하는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 속에 놓여있다.
작가는 자신 역시도 유년시절 즈음에 그런 위기를 경험한 바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다는 절망감은 그로 하여금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대상화해서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런 경험에 비추어 그는 말한다. 자아는 타자와의 상호인정에 의한 산물이라고, 중요한 것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타자에 대해 던질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즉 진지하게 고민하고 진지하게 타자와 마주하는 행위 속에 현대인이 직면한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거라고 작가는 믿고 있다.
2)돈이 세계의 전부인가?
이 챕터에서 우리는 작가가 자본주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확인할 수 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우리는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말은 곧 돈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고, 어떤 측면에서는 전부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 인식을 전제하는 작가는 자본주의의 태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본주의는 본래 청빈사상에서 출발했다는 것으로, 그런 맥락에서 따져볼 때 오늘날처럼 막무가내로 자본에 집착하는 자본주의는 본래적 의미의 자본주의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나쓰메 소세키가 그의 작품에서 돈 많은 이들에 대해서 상당히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라든지,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의 기원이 인색함의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금욕적인 에토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보여준 것2)으로도 엿볼 수 있는 일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막스 베버가 말한 자본주의의 개념에서 보면 이렇게 돈을 만들어 내기 위한 자본주의는 물건이나 서비스의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주의에서 일탈한 금융 기생적 자본주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막스 베버는 그것을 근대 자본주의의 ’정통‘이라고 간주하지 않았다.’3)
결론을 보자면 작가는 돈에 대한 해석을 유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돈이 최고라고 말한다든지, 검약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박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사치를 부린 삶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나쓰메 소세키처럼 가능한 범위 내에서 돈을 벌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돈을 사용하고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윤리에 대해 고민하면서 자본의 논리 위를 걸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 너무 평범할까요?’
커다란 맥락에서 나는 작가의 의견에 동의한다. 자본주의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면서 그것이 이루어낸 넘치는 재화를 상당히 죄스러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소비하면서 살아가는 한 명의 소시민으로서 대놓고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일은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를 벗어날 수 없는 걸 뻔히 아는데도 그것이 싫다고 어리광을 부리는 일로 그려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직업이라는 것을 선택할 때 자아실현 보다는 돈이라는 요소를 더욱 중요하게 바라보고 있고, 직업에 임하여 그것으로 삶을 구성하고 살아감에 있어서도 너무 돈만을 바라보게 되는 현상은 씁쓸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자본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과 경계하는 태도를 한 번쯤 더 지적해줬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3)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챕터에서 작가는 피상적인 앎으로 채워져 가는 세계를 지적하고 있다. 작가의 서술이 다소 난해한 관계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대략적인 분위기만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어 세심하게 주제를 읽는 노력이 요구되었다. 여하튼 작가가 보기에 모든 그러한 피상적인 앎의 원흉은 근대의 서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오캄의 면도날에 의하여 신앙과 철학의 연결이 단절됨으로써 사람들은 각종 미신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른바 계몽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고, 이제는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과학의 발달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칸트가 활동하던 때만 하더라도 과학이라는 것은 여타의 학문 특히 철학과 제법 사이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발달해 나갔다. 모두 알다시피 칸트의 경우에는 눈부시게 발전하는 자연과학과 머리 위에 별처럼 빛나는 도덕철학 모두에게 경외심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물론 그 둘 중에서 굳이 선택하라면 도덕철학 쪽을 선택했겠지만) 그러나 근대가 지나고 현대로 접어들수록 그러한 사이좋은 관계는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오늘날 도덕철학이라는 것은 감히 과학의 위상을 넘볼 수도 없는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고, 모두가 이다음에는 또 어떤 눈부신 발명품이 나올 지만을 기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서 지식이라는 것은 매우 변질되어 버렸다. 흔히 사람들은 지식에 대해서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무엇이 있다거나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을 아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경험이라고 작가는 지적한다. 인터넷의 발달로 사람들은 궁금한 게 생기면 무엇이든 검색해서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생각하듯 그러한 앎은 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앎이라고 할 수 없다. 작가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앎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우리의 어머니 세대가 그랬듯이 자연과 함께 하면서 그것을 경험하고 그 경험 속에서 우러나오는 흔히 ‘지혜’라고 불릴 수 있을만한 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지식의 반열에 들 수 있는 것이다.
4)청춘은 아름다운가?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청춘’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사용되고 있는데,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일본 사회에서는 이제 과거와는 달리 ‘청춘’이라는 단어를 심심찮게 쓰는 사람은 거의 없는 모양이다. 하여간 그렇게 운을 떼면서 작가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청춘들이 매우 삭막한 상태에 놓여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즉, 한창 청춘의 한가운데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이 자기 자신을 인식함에 있어서 무엇에 쫓기기라도 하듯이 스스로의 나이를 매우 많게 생각하고, 또 한편으로 자신이 또래들에 비해 많이 늦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청춘은 바로 탈색된 청춘이다. 청춘이라는 것은 본디 진한 색감으로 풍부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해 위에 언급된 젊은이들은 자신의 청춘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청춘이란 무엇인가? 작가에 따르면 그것은 나이로 구분되어질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청춘이 규정되어질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바로 ‘고민’의 유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부조리와 불확실함을 마주함에 있어서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는지가 바로 청춘의 유무를 결정해 줄 수 있는 거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즉, 나이가 몇 살이든지 간에 여전히 고민하고 있으며, 삶에서 마주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적당히 회피하지 않을 용기를 간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청춘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청춘을 제대로 살아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하여 작가는 그렇지 못한다면 그렇게 탈색된 청춘을 보내버린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해결하지 못한 갈등의 부메랑을 마주하는 부작용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확실히 주위를 돌아보면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그 청춘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 스스로로 돌이켜 보면 우리의 앞 세대가 살아낸 것만큼 청춘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불황이 거듭되니까 우리나라의 경제도 어려워지는 것이고, 덩달아 정치와 경제를 담당하는 이들이 옳지 못한 방법으로 나라를 이끌어 나가매 양극화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절대 다수의 젊은이들은 불황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지 못해 청춘을 도외시하고 그저 먹고 살 궁리에 매진할 수밖에 없으며, 덩달아 그들의 부모와 주변 사람들은 그런 현상을 부추기고 또 강요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 현실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가 말한 대로 청춘에 대한 지금 이 시대의 나태함은 언젠가 반드시 커다란 부작용으로 돌아오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다.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아파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그래봐야 한다. 나중에 대학가서 하라든지, 직장에 가서 하라든지 하는 말은 거짓이다. 수많은 청춘들이 싸우다 지쳐서 그만 그러한 말들에 굴복하고 책상 앞으로 독서실로 도서관으로 들어간다.
5)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 챕터는 종교에 관한 것이다. 우선 작가는 근대 이전의 종교에 대해 설명한다. 그 당시의 종교라는 것은 제도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처럼 종교의 자유에 의거하여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서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규모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제도에 가까운 전통에 의거하여 타의에 의하여 자신의 종교가 결정되는 시대였고, 그렇게 결정된 종교에 포함된 교리와 사상에 의하여 자신의 신념과 철학 역시도 결정되는 시대가 바로 근대 이전의 시대였다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이러한 시대에서 사람들은 고민의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했다. 하기는 했겠지만 지금처럼 무한한 미정의 공간을 마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민의 여지라는 것은 상당히 적었고, 또 한편으로 구체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적어도 그들은 추상적인 고민의 필요성이 부여하는 불안으로 인해 불행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행복했을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알랭 드 보통이 쓴 『불안』이라는 책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근대 이전의 사람들에게 ‘미개’의 이미지를 뒤집어씌우고 그들은 덜떨어지고 덜 진보한 불쌍한 이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오히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웠던 사람들이라는 것이 두 책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이라고 보여진다.
분명 그러했기 때문에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된 직후는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천 년 동안 자신의 얽매고 있던 족쇄가 사라지자 매우 불안해 했다. 그것은 족쇄인 동시에 그들은 지탱하고 있던 대들보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종교를 대신할 것은 무엇이든 수용했고, 각종 미신과 속임수들에 취해서 살아갔다. 이것은 인간에게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과분한 것이고 또 위험하고 괴로운 것인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1920년대 이후 독일이 개인주의로부터 급속도로 극단적 파시즘(전체주의)으로 이행한 것을 ’자유‘라는 관념으로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유를 동경한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다. 자유로부터 도망쳐 ’절대적인 것‘에 속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4)
현재 오늘날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산산조각 난 사회 속에서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며 살아가는 인간들은 무엇을 믿어야 좋은지 좀처럼 알 수 없는 상태에 빠져있다.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자유롭게 다양한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만큼 그 종교가 유일무이한 진리라는 확신에 이르는 일은 중세 때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인간은 종교 대신 자기 자신에 탐닉하기도 한다. 스스로가 종교가 되는 일에 빠지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앞서 다룬 자아에 집착함으로써 타인으로부터 고립되는 상황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작가가 내리는 처방은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가 했던 것처럼 자신의 지성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 확신을 얻을 때까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합리주의적 혹은 계몽주의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6)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이 챕터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직업관을 보여주고 있다. 직업이라는 것 무엇인가. 사람들은 왜 일을 하는가? 보통은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겠지만 작가는 그 이상의 무엇이 직업에 포함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자아실현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되는 자아실현이라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재능을 실현한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자아라는 것은 언제나 ‘타자’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관계에 있어 이보다 더 기본적인 전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있다는 것은 곧 타자가 있음을 의미한다. 타자가 없는 나는 있을 수 없다. 타자가 없다면 굳이 나라는 존재를 특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의 나라는 것은 ‘나’라기 보다는 차라리 세계 그 자체라고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직업이라는 것은 이처럼 ‘타자’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타자’로 이루어진 사회 때문에 중요하다. 자신의 능력을 통하여 사회에 이바지함으로써 그 안에서 어떤 존재가치를 확인하고 또 타자에 의해서 그것을 인정받고 한편으로는 긍정을 받을 때 인간은 보람을 느낀다. 그것이 바로 돈을 떠나서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상호인정을 ‘배려’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는 타자로부터 배려를 받고, 그와 동시에 타자를 배려하기 위함이라고, 그리고 그럼으로써 종국에는 온전한 자기를 발견하고 자신을 완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역시 자기라는 것은 언제나 타자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는 오늘날 우리사회에 존재하는 직종 중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서비스업에 대한 생각을 보여준다. 서비스업이라는 것은 이전의 시대에서 발견되는 직업들과는 상당히 큰 차이점을 갖는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의 직업들이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 중에서 ‘재능’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부분을 발휘하여 제공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서비스업은 그 개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을 발휘해야만 하는 분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표적인 착취의 대상이 된다는 점은 쉽게 예상이 가능하다. 그리고 모든 능력을 다 발휘해야만 하는 만큼 심신의 소모도 극심하다. 이러한 서비스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현대 사회는 그만큼 지치고 소모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작가는 거기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즉 생각의 전환을 시도한다고 할 때, ‘막스 베버가 말한 것처럼 전문화/세분화가 진행된 사회에서 직업을 가진 사람은 단면적인 사람이 되기 쉽지만 현대의 서비스업은 반대로 전인격성을 되찾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냐.’5)는 것이다.
7)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진정한 사랑은 존재할까? 예나 지금이나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 생활의 주변에서 언제나 빠지지 않는 화젯거리다. 인간은 어릴 때는 부모와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이가 듦에 따라서 타인과의 사랑을 경험하고 갈등하고 아파하며 행복해 하는 존재인 만큼 살아가면서 거의 항상 사랑을 염두에 두고 산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공통된 의견을 갖고 있지 못하며 심지어는 그 개인에 있어서 조차도 진정한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 작가는 과거의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배우자를 받아들여야만 했던 만큼 좋든 싫든 호불호를 경험할 수밖에 없으니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아닌지를 지금보다는 쉽게 알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럼 지금은 어떤가? 지금은 바야흐로 사랑에 대한 자유가 주어진 시대이다. 작가이게 있어서 자유라는 것은 미정의 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인 동시에 매우 위험천만한 대상이다. 그러한 자유가 부여된 인간은 오히려 사랑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아이러니에 직면하게 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오히려 부자유스럽기 때문에 제대로 잘 볼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하니, 사랑도 그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오늘날의 사람들은 사랑이나 연인이 찾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하여 행복해지고 싶어서라고 대답하고는 하는데 작가는 이것에 큰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선택한 사랑이라는 것은 자신의 행복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사랑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청춘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이들이 직면해야만 하는 부작용과도 통하는 맥락이다.
사람들은 흔히 연애할 때의 뜨거운 사랑이 결혼 후에 식어가는 것을 목격하면서 안타까워하고 자신은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그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이러한 생각이 유행하는 현상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나 역시 그러한 작가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다. ‘계속해서 상대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갖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많은 사람들은 애정의 온도가 떨어졌을 때 쓸쓸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모습이 바뀐 것일 뿐이지,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모습을 바꾸든지 간에 그러한 외양에 구애받지 않고 그 본질을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을 키울 필요가 있다. 그러한 안목을 얻게 된다면 결혼 후 식어버린 사랑에 안타까워할 필요도, 결혼 후에도 애써 열렬한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쓸 필요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끊임없이 확인해 나가는 일이다. 얼핏 이런 확인이 열렬한 행위로 이어진다고 생각될 수 있겠지만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은은하게 이루어질 때 더욱더 그 진실성이 빛을 발하리라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챕터를 마무리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랑은 그때그때 상대의 물음에 응답하려는 의지다. 사랑의 모습은 변한다. 행복해지는 것이 사랑의 목적이 아니다. 사랑이 식을 것을 처음부터 겁낼 필요는 없다.’
8)왜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자. TV를 켜면 며칠에 한 번씩 누군가가 자살했다는 소식, 누군가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결코 반가울 수 없는 소식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에 생명경시 풍조가 얼마나 만연해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런 현상들을 목도함에 있어서 삶과, 살 속에 존재하는 사건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문명의 발달은 우리에게 자유를 선사했지만 그렇게 자유 속에 놓진 인간은 하염없는 불확실성에 의하여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결국에는 자신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바 그 자체를 경멸하고 경시하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전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비교적 행복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삶을 영위할 때에는 유기적인 윤회와 같은 것 고에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을 거의 다 배우고 인생에 만족하며 죽을 수가 있다. 그러나 끝이 없는 발전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은 그때에만 가치가 있는 일시적인 것밖에 배울 수 없고 결국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죽게 된다. 따라서 확실한 것을 얻지 못한 죽음은 의미가 없는 사건에 불과하고 무의미한 죽음밖에 얻을 수 없는 삶 또한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6)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 역시 앞서 제시한 모든 주제들과 연결되어 있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인간은 관계를 찾고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며, 자신에 매몰되지 말고 타자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러한 인정은 곧 배려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와 같은 모든 노력에는 ‘고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모든 것의 시작은 고민이다. 그것이 바로 자유로 인하여 불확실해진 이 세계에서 삶의 의미를 찾음으로써 자신과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배려하며 그것을 지켜나갈 수 있는 길인 것이다.
9)늙어서 최강이 되라
문명과 의학이 발달했다. 그에 따라 인간의 수명은 급격히 늘어나고 있고, 인구 역시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반면에 늘어난 노인에 비하여 젊은이들의 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낮은 출산율 때문이다. 때문에 젊은이가 부양해야 하는 노인의 수가 늘어나고 결과적으로 사회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침체에 빠지게 되리라는 전망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요즘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가의 문제의식은 조금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그는 인구분포의 기형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오늘날의 노인이 과거의 노인들에 비하여 원숙하지 못하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과거의 노인은 ‘장로’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듯이 삶을 통해 축적한 지혜를 가지고 그 사회를 지탱하는 존재라고 생각되는 대상이었는데 반하여 오늘날의 노인은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은 무책임함으로 그 사회에 존재하고, 그것은 교란하는 역할을 배분받은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노인들은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그 이유를 작가는 오늘날은 과거와 달리 사람들이 진지하게 죽어나가는 사회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죽음이라는 것은 모두가 두려워하고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지만 작가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것처럼 인간을 원숙하게 만들어 주고 또 한편으로 죽음에 초연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어찌 보면 타인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과거와 같은 피라미드 인구 분포에서는 죽음이라는 것이 매우 드문드문 일어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진지하게 마주봐야 했지만, 오늘날에는 팽창한 노인층에서 오늘 내일 심심찮게 죽어가기 때문에 그것을 진지하게 바라볼 겨를이 없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우리는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노인들은 원숙한 지혜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삶과도 맞닿아 있다. 죽음 언제나 삶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마주할 때 인간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숙고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고민하는 힘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직면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임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이다.
4.총평
여러 장의 챕터를 통하여 작가는 사회 전반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고 또 고민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 다양한 내용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사실 단 하나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된 키워드는 자유, 불확실성, 불안, 의미의 상실, 고독, 소외, 타자와 개인과 같은 현대에 들어서 앞 다투어 제기되고 있는 사회 철학적 담론에 포함되는 것들이다. 이것들을 연결해보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과거 선배 세대가 살았던 시대와는 달리 중세와의 단절을 통해 그리고 계몽과 합리주의에 의하여 자유가 부여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자유라는 것은 단순히 반가운 존재라고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일면 위험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것은 불확실성을 함께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인간은 지금껏 자신이 붙들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잃고 방황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워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돈에 집착하며, 피상적인 지식을 진정한 지혜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으며, 아직 피지도 않은 꽃의 나이에 자신의 청춘은 이미 떠난지 오래라고 체념하고, 비합리적 신념의 의지하며, 직업의 의미를 망각하고, 환상적인 사랑에 얽매이다가 결국에는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생명을 경시하거나, 불우한 노년기를 보내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고 그러한 문제의식을 구체화 한 것이 목차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한 위기 속에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은 고민하는 일이다. 자유에 대응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끊임없이 고민하는 일이고 여기에 사용되는 가장 중요한 우리의 능력이라고 한다면 바로 ‘지성’이다. 계몽의 시대에 접어든 인간은 두 번 다시 비합리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합리성을 대표하는 인간의 이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지성을 가지고 우리는 개인을 발견한다. 개인을 발견한다는 것은 곧 타자를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인은 타자를 전제로 할 때만 그 존재의 의의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 이후에 우리는 관계의 소중함을 발견할 수 있고, 타자를 인정하고 타자로부터 인정받는 경험을 통하여 배려의 의미를 깨닫고, 우리가 사회에서 일함으로써 그 존재가치를 확인해야만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비합리적 신념이 사라진 대신 우리는 우리의 지성을 가지고 개인과 타인을 확인함으로써 그 대신 붙들고 의지해야 할 그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그것이 배려적 관계가 아닌가 하고 짐작해 본다. 흔히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데 그것은 곧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재확인 하는 명제일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그러한 배려적 관계를 확인하고 구축한다는 것은 곧 인간이 자신의 본질에 한발자국 더 다가간다는 말이 되고, 동시에 자신을 완성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런 과정에는 당연히 고민의 과정이 요구된다. 그런 깨달음을 통해서 인간은 타자 앞의 나를 발견하고, 진정한 자본주의의 미덕을 체험하며, 피상적 지식이 아닌 삶의 경험을 통해 체득할 수 있는 진정한 지혜를 습득해 나가고, 자신의 청춘이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에 빠지고, 비합리적 신념 대신 자신의 지성을 소중히 여기게 될 것이며,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라 자아의 실현과 사회 속에서 실현되는 배려를 위하여 직업에 임하게 될 것이며, 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환상 대신 진정한 사랑을 통찰하는 안목을 갖게 될 것이고, 그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와 동시에 죽음의 의미를 통찰하는 능력을 통해 타인의 죽음과 나의 삶을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원숙한 지혜를 가진 ‘장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라고 생각한다.
-끝-
1) 21페이지
2) 54페이지
3) 58페이지
4) 101페이지
5) 122페이지
6) 146페이지
'책을 읽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주의 무료책]여왕의 시대 - 유럽편 (0) | 2013.12.02 |
---|---|
인터파크 무료 eBook -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 (0) | 2013.12.01 |
천명관의 『고래』 독후감 – 존재의 과잉에 대한 반성과 진정한 실존 (0) | 2013.03.15 |
문장연습-미안해요 (0) | 2012.06.20 |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 독후감 (1) | 2012.05.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