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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미덕의 가면을 쓰고 웃는 국가

by 통합메일 2013.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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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덕의 가면을 쓰고 웃는 국가


‘훈훈하다’라는 말은 요즘 들어 새롭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겠으나, 최근의 세태를 보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종의 훈훈함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훈훈함의 대상이 되는 행위들은 누군가를 돕거나 나누는 종류의 것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재화의 유한성을 필연적 특성으로 내재하는 사회에 있어서 그러한 것들은 분명 보는 이들로 하여금 훈훈함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미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듯이 그런 것들은 분명 사회를 보다 더 ‘살만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따금 그러한 훈훈함에 대한 갈구가 지나쳐 도를 넘을 때가 있다. 특히 예로부터 노인공경이라든지 나누는 삶을 추구함으로써 합리성 보다는 공감과 동정심으로써의 행위 윤리와 밀접한 생활을 영위해 온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그런 도를 넘어서는 혹은 핀트를 어긋나는 행위를 할 위험성은 더욱 많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 때가 종종 없지 않아 있다. 그리고 그런 행위들이 사실은 국가가 해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미덕에 해당하는 행위가 됨에 따라서 국가의 방기와 태만이 수월하게 은폐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그것은 더욱 큰 위험과 해악을 잉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해마다 무슨 일인가 터졌을 때마다 심심찮게 이루어지는 성금모금의 행렬을 바라볼 때마다 그런 불편함을 느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금을 모으는 일에 익숙해진 것은 언제부터일까. 아무래도 가장 커다란 계기가 된 것은 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금모으기 운동일 것이고, 그것을 위시하여 이루어진 각종 재난관련 모금 역시도 우리국민들이 그러한 ‘미덕’에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데 상당히 기여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의 기억을 회상해보면 나는 중학생이었고, ‘세계 제일의’, ‘세계에서 유일한’이라는 말에 상기되고 그것에 끊임없이 도취되어 가는 사회를 목격했던 것 같다. 나 역시 어렸고 매우 흥분했었다. 나를 괴롭히던 날라리 짝꿍이 작문시간에 쓴 문장 안에는 명예퇴직 당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들어있었다. ‘힘겹다’는 말이 온 사회에 유행가처럼 울려 퍼지고,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아직도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 괜히 감사하면서도 원망스럽던 시절을 이 나라의 국민들은 그런 미덕에 대한 자기도취를 통해 이겨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때문에 애써 그 위기를 이겨낸 우리나라 사람들의 긍지와 기량 등을 폄훼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꼭 짚고 싶은 것은 마약과도 같은 자기도취의 부작용 같은 것들이다.

사실 오늘 이런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인터넷에서 이런 사연을 읽었기 때문이다. 사연을 올린 사람은 서울에 가기 위해서 기차에 탔는데 자기 자리에 어떤 할아버지가 앉아계셨다고 했다. 서울까지는 4시간 가량이 걸리는데 그는 차마 그 할아버지에게 그 자리는 내 자리니 나오시라는 말을 하지 못하겠다고 글을 올렸던 것이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댓글로 갑론을박을 벌였다. 다행히 승무원을 부른다거나 비켜달라고 말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지만,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상황에서 훈훈함을 느낀다거나, 노인에게 비켜달라고 하라니 세상 참 팍팍하게 느껴진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여기서 아직까지도 미덕에 중독된 우리 사회의 정서를 보았다.

물론 내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또 존재하면 좋을만한 봉사와 나눔의 미덕들을 싸잡아서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엄격하게 국가의 손길이 미칠 수 없는 부분들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예를 가지고 설명하자면, 외환위기나 각종 재난을 맞이하여 내는 성금들을 보자. 외환위기의 경우 국가가 외환관리에 실패함으로써 은행과 기업들이 줄도산하게 되고 국가경계가 총체적 부실에 빠지면서 경험해야만 했던 것1)인데, 그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많은 국민들은 금을 기부했다. 그런데 이 ‘금’이라는 매체가 아주 재미있다. 왜 하필이면 돈이 아니고 ‘금’이었을까? 국가의 입장에서는 금보다는 돈으로 걷어야만 치솟는 물가를 잡기도 편하고, 그것을 어디에든 쓰기도 좋다. 금은 그것을 되팔거나 혹은 녹여서 다른 형태로 만들어야 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화폐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이유는 국민들이 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 때문이다. 많은 국민들이 금붙이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단순한 귀금속의 가치를 넘어서 모종의 소중한 추억과 함께 결부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매스컴을 보니 하나 둘 그런 소중한 금들을 아낌없이 국가에 헌납하고 있다. 사회 전체가 그러한 분위기에 빨려 들어갈 때 그 안에는 어떤 종교적인 색채가 일게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새로운 국가주의 같은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를 통해서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민족주의의 정서를 새롭게 맞이하게 된 위기를 촉매로 해서 새롭게 부활시켰다는 인상이다. 그리하여 어른들은 금을 헌납하고, 아이들은 가방에 태극기를 붙이고 다녔던 게 나의 중학생 시절의 커다란 기억이다.

한편 각종 재난 성금은 어떠한가? 가장 대표적인 게 수해나 결식아동이다. 이 역시 말 할 것도 없다. 물론 각종 재난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인해 예상치 못하게 그것을 경험해서 처음 한두번 국민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언제부턴가 무슨 연례행사라도 되듯이 성금을 모으는 행위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국민들로부터 걷는 세금은 대체 어디에 쓰인단 말인가? 국가는 왜 존재한단 말인가? 국가가 국민들에게 모종의 혜택을 공여할 때 그 공여의 대가로 국민은 국가에 복종하고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그러한 혜택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는 반박이 가능할 텐데, 심지어 국가가 그 정도의 필요한 혜택조차 제공하지 않을 때 국민은 대체 어떠한 이유로 그러한 국가를 신임하고 인정해야 하는가? 물론 이 경우에도 국민들이 봉사를 가는 것은 예외적으로 나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태안 기름 유출 사태 때 전국에서 몰려든 봉사의 물결이다. 성금이 아니라, 절대적인 인원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역시도 정상적인 경우였다면 가해자로 지목되고 있는 기업이 인력을 투입해서 해결해야 했다. 다만 사고의 과실인정이나 처리가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그냥 내버려둘 경우 자연파괴와 인근주민들의 생계가 그에 비례하여 악화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긍정하는 경우에 불과하다. 사실 이도 엄연히 따지면 그냥 씁쓸한 경우에 지나지 않을 뿐, 결코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단하고 서로 띄워줄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국가가 나서기 전에 국민이 알아서 나서는 행동들이 관습화되어 갈수록 국가는 더욱더 그러한 미덕의 가면을 쓰고 웃을 것이다.

앞서 얘기한 기차 좌석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고민의 문제가 아니다. 지하철과 같은 선점방식의 좌석이라면 그나마 긍정할 여지가 있어 보이지만 그것도 아니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 자리에 앉아서 갈 권리를 구입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저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이 사회의 정서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일단은 사람들은 상황을 접하기 이전에 미리 모종의 이미지를 상정해 두고 그 상황을 판단하는 성향이 있는 게 문제다. ‘80세 정도 되어 보이는 노인’이라는 문장을 읽고는 사회가 자신에게 부여한 이미지를 우선적으로 떠올리고 그에 근거하여 판단한다. 불편한 신체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순박한 마음씨와 표정을 가지고, 얇은 지갑도 함께일 것이다. 그런 이미지를 선입해버리면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급격히 줄어든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를 가진 사람과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예로부터 익히 들어온 미담들을 상기해 본다면, 정의보다는 미덕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차라리 더 합리적인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런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미덕의 범위를 넘어서서 의무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사회의 시각에서 자신을 점검할 때 만약 그 노인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면 비난의 대상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회적 시각에 대해서 어긋난 이해를 가지고 있음에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이 정도 수준에 이르면 증상은 제법 심각하다. 이미 이야기 속에서 국가의 역할 같은 것은 끼어들 자리가 없다. 오직 ‘미덕’만이 우리들의 머릿속을 엉망진창을 헤집어 놓는다. 이것은 과거로부터 우리사회가 축적해 온 병이다. 요즘 들어서는 그나마 지나친 배려가 독이 되는 상황이 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지하는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덕 제일주의를 추구하는 분위기가 더욱더 팽배한 것이 사실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 국가는 웃는다. 자신의 도움 필요 없이 자기들끼리 나누는 국민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또 언젠가 복종을 요구하면 선뜻 자신의 금과 노동력을 제공할 국민들을 바라보며. 활짝 웃는다.


아름다운 세상이다.


1) 이걸 두고 세간에서는 국민들의 무분별한 소비와 해외여행 등으로 외화가 낭비됐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역시 언어도단이다. 무정부사회도 아니고, 국가가 존재하는 이상 국민들의 그러한 소비로 인하여 외환보유고 관리가 어렵다면 교화나 정책 등을 이용하여 그것을 조정하고 관리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다. 그런 것들 하지 못하는 국가는 존재의 이유가 모자란 하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은 국가의 의무 태만으로 인한 재앙을 국민들의 금으로 때워버린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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