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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생각

허지웅의 변호인 영화평론 논란으로 보는 깨시민론과 tulipmania에 대한 반박

by 통합메일 2014.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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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시민과 관련된 허지웅의 글들 http://ozzyz.tumblr.com/post/64868330224


변호인에 대한 평론(허지웅) http://ozzyz.tumblr.com/post/70678554436


평론으로 인한 논란에 대한 입장 정리(허지웅) http://ozzyz.tumblr.com/post/72075100426




<딴지일보 tulipmania`s 300>


무현은 왜 볼드모트가 되었는가 http://www.ddanzi.com/yibumsuk/textyle/1862579


영화 '변호인', '안녕들 하십니까'에 답하다  http://www.ddanzi.com/yibumsuk/1817247






나는 영화 <변호인>을 보지 않았다.

다만 그 영화에 관하여 풍문으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원하든 원치 않든 그 대강의 스토리는 알고 있는 인간이 되었다.




사회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주장을 펼치는데, 내가 따라가는 인물들은 진중권, 허지웅, 박권일, 한윤형 같은 인물들이다. 일단 그들의 아름다운 논리력에 감탄한다. 그리고 그들이 최소한 공히 준수하는 객관에의 지향에 동의한다. 나는 가끔 빡치면 위에 언급한 이들보다 한참 더 극단적으로 칸트주의자가 되는 인물이다. 오직 진리에의 합치 여부에서만 미쳐서 목적으로서의 인간으로서의 정식을 이따금 망각해버리는 인간이기도 하다. 미리 고지하자면, 내가 방금 언급한 칸트주의에 대한 기초적 이해나 짐작이 없이 이 글을 읽으면 제대로 이해가 힘드실 수도 있으니 그냥 돌아가시길 권한다.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논리의 영역에서조차 진리가 나발이고 어떻게 되든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소리를 해대는 저급한 공리주의자와 나는 말을 섞을 생각이 없다. 쩝, 뭐 물론 현실 세계에서는 그냥저냥 타협하고 사는 편이다. 먹고는 살아야하지 않겠나.


이 글에서는 허지웅의 영화 <변호인> 평론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적고, 그에 대해 비판하는 tulipmania의 글을 비판하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 허지웅은 내가 추종하는 인물들에 포함된다. 뭐 그렇다고 내가 그들이 하는 말에 무조건적으로 찬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나는 진중권의 일베 멸시론에 대해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었고, 그나마 나중에 힘겹게 그 이론을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받아들였을 따름이었다. 반면, 이번 영화 변호인에 대한 허지웅의 평론에 대하여 비록 나는 영화를 보지 못하였으나, 해당 평론을 통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얻는 동시에 내가 이 영화에 대해서 영화 밖에서 목격한 부분들에 대하여 공감을 할 수가 있었다. 사실 이 평론은 뭐 '평론'이라고 하기엔 매우 단순하고 짧다.


스토리와 서사적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배우 송강호에 대한 칭찬으로 이어지고, 그러한 영화 내부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영화 자체에 대한 집중을 방해하는 영화 외부적 요소들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글이 끝난다.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바로 그 마지막 부분이다.


<변호인>은 잘 만들어진 상업영화다. 특히 그간 한 편의 영화가 갖추어야할 최소한의 완성도는 물론 아무런 전략과 비전도 없이 낭만과 분노만을 추동하며 과거를 소환했던 영화들의 전사, 이를테면 <26년>같은 경우를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사실 <변호인>을 감상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단점은 영화 외부로부터 발견된다. <변호인>의 단점은 세상에 일베가 있다는 것이다. <변호인>의 단점은 세상에 여전히 비뚤어진 정의감만으로 모든 걸 재단하며 민폐를 끼치는 열성 노무현 팬덤이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공모자이자 공생관계인 저들은 <변호인>과 관련해서 역시 아무런 의미없는 소음만을 양산하며 논쟁의 가치가 없는 논쟁의 장을 세워 진영의 외벽을 쌓는데 골몰할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는 건 피곤한 노릇이다. 그 난잡한 판에 억지로 소환되는 건 더욱 끔찍한 일이다. 이 재미있는 영화가 재미를 찾는 관객들과 불필요한 소음없이 만나고 헤어지길 기대한다. 허지웅 (주간경향)

변호인에 대한 평론(허지웅) http://ozzyz.tumblr.com/post/70678554436


사실 그가 영화 내부적인 이야기들에서 이야기를 끝냈다면 지금과 같은 논란이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선 그렇게 언급된 부분들에 대해서는 사회 전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서사적 부분에 대해서는 학적 토론으로 대강의 해소가 가능하고, 송강호라는 배우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그냥 개인적 취향으로 치부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등장하는 영화 외적 요소에 대해서는 그것이 사회/정치적으로 관계되는 도덕 혹은 신념 혹은 역사적 맥락을 폭넓게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유에서 손쉽게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두 단락의 글이지만 이 문장들은 참으로 여러가지 주장들을 반박하는 것이며, 동시에 여러가지 주체들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의 시각에서 그렇게 여겨지는 부분들을 조목조목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변호인>은 잘 만들어진 상업영화다." - 내가 보기에 이 문장은 '상업영화'에 방점이 찍힌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이 문장을 통하여 일부의 관객들에게 "너는 혹시 지금 이 영화가 상업영화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사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굳이 '영화'라는 편리하고 일상적인 용어 대신 '상업 영화'라는 단어를 썼을까? 그것은 이 영화의 목적이 정치적 혹은 도덕적 혹은 학술적인 것이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적인 것임을 상기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런 전제 하에, 사람들은 어쩌다 이 영화가 상업영화임을 잊게 되었을까? 내 생각에 그것은 그들이 영화에 대해 지나치게 과잉된 감정을 이입시키고,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 이상의 해석을 부여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흔히 말하는, 이를테면 꿈보다 해몽이라는 경우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엄연히 상업영화임을 표방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영화에 일종의 성스러움까지 부여했다. 이미 그러한 성스러움이 기부여된 인물을 모티브로 했다는 사실은 기존의 성스러움을 이 영화에 전염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지 않나 짐작해본다.

특히 그간 한 편의 영화가 갖추어야할 최소한의 완성도는 물론 아무런 전략과 비전도 없이 낭만과 분노만을 추동하며 과거를 소환했던 영화들의 전사, 이를테면 <26년>같은 경우를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 이 문장에서는 영화 <26년>을 비판하고 있다. 영화 <26년>은 만화가 강풀의 동명 웹툰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인데, 대강의 줄거리는 광주민주화운동을 군대를 동원하여 잔인하게 폭력진압하고 무수히 많은 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하여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후손들이 26년 만에 그에게 복수를 감행한다는 내용이었다. 원작 웹툰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뜻있는 시민들의 자발적 제작두레(제작비 기부)를 통해 제작비가 모아져 영화가 제작되었다. 실로 엄청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완성이 되었으나 그 의의와는 별개로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실망스러웠던 것 같다. 당시 허지웅은 이 영화에 대해 매우 신랄한 비판을 감행한 바 있다. http://ozzyz.egloos.com/4760275  이 평론에 대해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단락을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26년>은 아예 전과 후의 컷이 제대로 붙지 않는 수준 이하의 만듦새를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중반 이후에는 ‘일단 개봉하고 보자’는 의지 밖에 읽을 수 없는 최악의 결과물을 드러낸다. 영화 외부의 성립된 조건으로부터 공분, 즉 추진력을 얻어 부족한 영화의 함량을 무마하고자 하는 것이다. <26년>은 본연의 떨어지는 함량을 전두환을 향한 분노와 정권 교체를 위한 대의로부터 수혈받고 있다. 이때 이 영화의 완성도를 논하는 지적은 곧바로 “그럼 너는 광주를 부정하고 전두환을 옹호하느냐” “정권교체에 반대하느냐”는 모멸에 가까운 질문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이 또한 “반드시 대선 전에 개봉해야 한다”는 제작사의 전략이 의도한 그대로일 것이다.

출처:26년, 대중영화의 질적 퇴행



또한 이 글에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이후에 이 논란의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하나의 맥락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현실의 정치에 영향을 끼치고자 만들어진, 정치영화의 조건이란 무엇인가. 좋은 정치영화의 조건은 다름 아니라 좋은 영화의 조건과 같다. 선과 악을 단순화시킴으로써 이야기의 고민을 축소시켜선 안된다. 현실정치에 영향을 끼치겠다는 목적의식에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침해당해선 안된다. 기본적인 만듦새를 성취해야 비평이 가능하다. 켄 로치의 좌파의 영화든, 이스트우드의 우파의 영화든, 리펜슈탈의 선동의 영화든, 나는 그저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고 싶다. 외부의 결기가 영화의 당위나 핑계가 되어선 곤란하다.



이것은 평론에 대한, 그리고 그로 인하여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그의 기본입장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따라서 허지웅이라는 인물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도구가 될 수 있는 문장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일단 이 문장을 통해서 나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기본입장이라는 것이, 영화 외적인 요소가 영화 내적인 요소, 즉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에 어떤 영향을 미치거나 혹은 그리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으로 정리해두고자 한다. 영화 26년은 실로 다분히 정치적인 영화였고, 그 정치적 사안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심각하게 갈릴 수 있는 영화였다. 그리고 그러한 호불호는 이 영화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감히 짐작하기로서는 허지웅이라는 인물이 목격한 불편함은 여기에서 착안한 것이 아닐까 한다. 엄연히 영화의 질을 잣대짓는 기준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거나 표방하는 정치적/도덕적 선의라는 것이 영화의 평가에 영향을 미칠 때 많은 것들이 예외라는 이름의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되는 경우를 미리 봤던 것이라고 짐작한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 맥락에서 이 이야기를 설명해내는 것이 이 정도로 번거롭게 다가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정도로 하고 일단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겠다.


또한 영화 <변호인>에 대한 평론에서 허지웅은 두 개의 주체를 공히 비판한다. 사실 이 논란에서 사람들이 가장 욕하는 부분이 이 부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허지웅이 이야기하는 '깨시민'이라는 개념이 개입되는 지점이며, 그 '깨시민'으로 지칭되는 주체들이 '양비론'이라고 되받아 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실 <변호인>을 감상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단점은 영화 외부로부터 발견된다. <변호인>의 단점은 세상에 일베가 있다는 것이다. <변호인>의 단점은 세상에 여전히 비뚤어진 정의감만으로 모든 걸 재단하며 민폐를 끼치는 열성 노무현 팬덤이 있다는 것이다. 

첫번째로 허지웅은 일베를 비판하고 있고, 두번째로는 노무현 팬덤을 비판하고 있다.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다 보니 일베에 대해서는 딱히 어떤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노무현 팬덤에 대해서만 악의적 수사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그를 비판하는 글도 본 적이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뭐 일베라는 집단은 워낙 욕을 많이 들어먹는 집단이니 굳이 그런 묘사가 필요없으리라 생각했고, 반면에 노무현 팬덤에 대해서는 생소한 이들도 있을테니 그 의미를 규정하기 위하여 위와 같은 수사를 사용했으리라고 애써 추측하는 것도 꼭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사람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둘 중에 비판의 초점이 어느 쪽에 맞춰져 있는지를 굳이 골라야 한다면 '노무현 팬덤'에 맞춰져 있는 것이라는 주장 역시도 일견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평소 깨시민으로 통칭되는 노무현 팬덤에 대한 허지웅의 입장을 고려할 때 더욱 그 개연성이 명확해진다.

깨시민과 관련된 허지웅의 글들 http://ozzyz.tumblr.com/post/64868330224

<깨시민>이라는 단어는 '깨어 있는 시민'이라는 문장의 축약어로서, 경우에 따라서 스스로를 깨어 있는 시민 집단으로 자부하는 친노 민주당 지지자들에 대한 조롱의 의미를 자주 사용된다. 평론에서 사용된 적이 없는 이 단어를 굳이 이 지점에서 꺼내드는 이유는 이 단어가 소비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친노 팬덤에 대한 허지웅의 감정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감히 밝히는 바 나 역시 이런 깨시민들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 중에 하나이다. 물론 작금에 와서는 그들에 대한 비판이 결국 또다른 제2의 깨시민으로 비춰지는 인상도 간혹 받음에 따라서 스스로 자중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들이 펼치는 '깨어 있음에 대한 자부의 논리'가 가지고 있는 '배타성'을 생각하면 그들에 대한 조롱을 목격하고 그 조롱에 동참할 때 느끼는 통쾌함을 차마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그것이 조롱의 이유가 되는 이유는 흡사 그들이 '자기들만' 깨어있다고 생각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제 막 정치적 각성을 갖게 된 이들의 필연적 무지라면 그냥 아마추어리즘으로 치부될 대상이 될 것이고, 지독하게 정치에 찌든 인간들의 불치의 환부라면 세상이 내포한 부조리를 보는 시선과 비슷할 것이다. 하여간 어떤 이유에서건 그들이 보여주는 '자기들만'의 정서는 그들로 하여금 그 '자기들만'에 포함되지 않는 이들에 대하여 그 배타성을 실질적으로 행사하게 만드는 결과를 야기한다. 

나아가 그러한 배타성은 곧 스스로를 절대선으로 규정하고 자기 바깥의 어딘가에 절대 악을 상정하게 되는데, 세상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불완전 절차적 정의상 그런 식의 극단적인 상정은 머지않아 필연적으로 모순에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다. 처음의 얘기 대로라면 우리편은 무조건 선해야 하고, 상대방은 무조건 악해야 하는 것인데, 살다보니 우리편은 생각보다 착하지 않고, 상대방은 생각보다 악하지 않은 상황을 심심찮게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본디 그러니 어쩔 수가 없다. 그런 상황을 자주 접하게 되면 그들은 모종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현실세계로 돌아오든지 아니면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극단적 절대선악의 세계에 머무르든지. 현실세계로 돌아오면 다행인데, 절대선악의 세계에 머무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한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은 첫번째로 그러한 인식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만들고, 둘째 나아가 그런 이유에서 정치적으로 좋지 못한 전략을 채택하게 만든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정치적 각성을 경험하여 절대 선의 쪽에 서있는 자신들이 정권을 잡으면 응당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대체 왜 자신들이 집권하지 못하는지, 어떻게 박근혜를 지지하는 인간들이 이 나라의 절반이나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나아가 그 절반이나 되는 사람들의 존재를 망각하기에 이른다. 그런 현실을 망각하고 토해내는 전략들이 질 좋은 것일리가 없다. 나라의 절반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데, 그것을 부정하고 까먹다 보니 현실성 없는 주장과 전략들이 양산된다. 그들의 주장과 전략에서 나머지 절반의 사람들은 별로 고려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그 나머지 절반의 사람들이 미우나 고우나 같이 부비며 살아야 되는 사회적 협력의 대상들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한 배제와 현실인식 부족의 측면에서 나는 일베와 노무현 팬덤을 동등 비교하는 일이 그리 부당하다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야권 정신승리소라고 할 수 있는 사이트들에서도 이따금 보면 "여기나 일베나 다를 게 없다."는 식의 댓글들을 가뭄에 콩나듯이나마 발견할 때가 있을 것이다. 평소에는 모르고 살거나 참으며 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두 주체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순간이 도래하는 모양이다. 물론 그런 지적에 대해서도 그냥 프락치나 분란종자들의 소행이라도 치부해버린다면 나는 그것이야말로 깨시민이 깨시민일 수밖에 없는 진정한 이유를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장황하게 적었지만, 결국 깨시민이라는 단어가 조롱의 용도로 소비되는 이유는 그 단어가 의미는 주체가 가지고 있는 배타성, 그리고 그로 인한 현실성의 결여가 핵심이 아닌가 한다. 사실 이전에는 친노 혹은 노빠라는 용어가 먼저 사용되었지만, 어느 개인에 대한 선호가 그의 정치적 입장이나 전략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도 아니고, 깨시민이라는 범주가 노빠의 범주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새롭게 조어된 것이 <깨시민>이라는 단어가 아닌가 한다. 사실 이 문장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전 어록에서 인용되었다는 점이, 그 선의를 고려할 때 그 문장이 축약되어 이런 방식으로 아이러니하게 사용된다는 점이 나로서도 조금은 불편하긴 하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에 대해 큰 틀에서는 동의를 한다 하더라도, 그 "깨어있는"이라는 동사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아직까지 해석의 여지가 남아있는 것이 깨시민 논란의 핵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대체 "깨어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깨시민과 관련한 이야기에서 마지막 질문을 택한다면 그게 좋을 것 같다.

평론으로 인한 논란에 대한 입장 정리(허지웅) http://ozzyz.tumblr.com/post/72075100426

이러한 깨시민/노무현 팬덤에 대하여 허지웅은 대선 패배도 그러한 깨시민들의 책임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변호인 평론에서 굳이 마지막에 일베와 비교한 것은 논리의 커다란 흐름상 어색한 면이 있어서 내가 봐도 좀 무리수인 것도 같다. 하지만 힘겹게나마 이해를 시도한다면 위와 같은 맥락을 고려함이 바람직할 것이다. 논란이 가열되자 허지웅은 자신의 텀블로 블로그에 논란에 대한 입장을 적어두었다. 허지웅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자 한다. 아마도 글의 말미에서는 허지웅의 글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아쉬움을 토로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부터는 내가 즐겨보는 딴지일보에서 허지웅의 이번 논란에 대해 비판한 tulipmania의 글에 대해 비판하고자 한다. (http://www.ddanzi.com/yibumsuk/textyle/1862579)

물론 나는 이 글에 대해서 공감하는 면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이런 부분이다.

어떤 접근이 영화를 더 즐겁고 가치 있게 할까요? 두 접근 모두 틀린 접근은 아닐 겁니다. 때때로 시대상을 이해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작품들이 있고, 시대상을 반영하면 작품의 해석의 폭이 넓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 과도한 시대적 접근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하고, 작품의 엉뚱한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영화는 영화로 봐야 한다는 허지웅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나는 튤립매니아의 이런 주장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말에는 공감하기가 힘들다.

허지웅 씨는 영화 변호인을 감상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영화 외적요인이라고 말합니다. 일베의 평점테러, 변호인 티켓테러 의혹 등 영화 외적 요인이 오히려 영화를 관람하는데 어려움을 주었던 것을 비추어 볼 때 외적 요인이 영화 관람에 영향을 미쳤을 수는 있다고 봅니다. 반면 열성 노무현 팬덤을 '삐뚤어진 정의감만으로 모든 걸 재단하며 민폐를 끼치는', '(일베와) 공모자이자 공생관계'라고 묘사한 점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이에 대해 허지웅 씨는 '썰전'에서 이렇게 해명합니다.

그는 일베의 각종 테러행위에 대한 비판에는 공감하면서, 그에 맞서는 노무현 팬덤에 대한 비판에는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허지웅이 썰전에서 "해명"을 했다고 적고 있는데 위에 링크한 허지웅의 입장 표명에도 적혀있듯이 그는 이 논란과 관련된 자신의 발언들을 '해명'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뭐 보는 사람에 따라 그것이 해명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면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하여간 바로 이 부분이 일단의 갈등을 일으키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생각을 하다 보니 '인식론'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세상에는 '노무현 팬덤', 아니면 뭐 노빠니 친노니 아무튼 그렇게 지칭되는 부류가 있는데 이 존재들이 각 사람들에 대해 엄청나게 다양하게 인식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세상은 하나이되 그 세상은 동시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수만큼 존재한다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노무현 팬덤에 대한 두 사람의 인식이 이렇게 상이한 것을 보면서 나는 적잖이 당황스럽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극명할 정도로 다른 인식을 갖게된 것일까? 나로서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다만 그저 내 나름대로 추측하여 그 퍼즐을 맞춰볼 따름이다.

허지웅 씨의 해명은 납득이 잘 가지 않습니다. 허지웅 씨의 변호인 리뷰가 있기 전 어떤 소모적인 논쟁이 있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이동진 씨의 리뷰에서 논쟁이 된 것은 친노냐 일베냐 문제가 아니라 사회상이 포함되느냐 포함되지 않느냐의 감상평 논쟁정도였고, 일베의 평점테러에도 '비뚤어진 정의감만으로 모든 걸 재단하며 민폐를 끼치는 열성 노무현 팬덤'은 그다지 활약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허지웅 씨가 무엇을 근거로 영화를 핑계 삼아 '노무현 팬덤'을 폄하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극렬한 노무현 팬덤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제에 보였던 흔히들 부르는 노빠들의 극심한 행동이 대표적 사례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논쟁에서의 허지웅 씨의 해석은 순서를 뒤바꾸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노빠들이 격렬한 반응을 보인 것은 영화를 보며 노무현을 떠올리고 추억한 많은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허지웅 씨의 소모적이고 쓸데없는 폄하를 통해 논쟁을 부추기는 리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런 의미없는 소음만을 양산하며 논쟁의 가치가 없는 논쟁의 장을 세워 진영의 외벽을 쌓는' 행위를 통해 감상을 방해할 것을 비판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소모적인 논쟁으로 변호인의 감상을 방해한 것은 허지웅 씨 본인의 글이었습니다.


나는 이 논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이 속담을 떠올렸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나는 과거에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http://mskjh.tistory.com/431)  나는 그 글의 시작에서 이렇게 적었다.


천안함 프로젝트를 봤다. 그럭저럭 재미가 있었다.

네이버 평점은 위와 같이 형편이 없다.

일베분들께서 오셔서 저렇게 만든 게 아닌가 하고 추측을 해본다.

평점 조작이라니.... 하는 쪽이나 맞서 대응하는 쪽이나 유치하기는 마찬가지.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입장에 대해서 우리 깨시민 여러분들은 흔히 어디서 주워들은 <양비론>이라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며 정해진 초식대로 공격해 들어오시지만, 여러 글에서 누누히 밝혔듯 나는 <양비론>을 털끝만치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둘 다 나쁜 것을 비판하는 것을 나쁘다고 하면 결국 그 비판의 끝에는 '흑백논리로의 귀결' 밖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흑백논리라니.. 인터넷 상에 수두룩하게 널린 야권 정신승리소들에서 이루어지는 논의의 꼬라지들을 보면 놀라운 일도 아니긴 하다. 경험상, <양비론> 운운하면서 비판해 들어오는 인간들은 <정치적 회의주의>라는 보다 더 적절한 개념의 있는 줄도 모르고 우연히 주운 <양비론>이라는 단어를 그것으로 오인하여 휘두르고 다닌다. 나는 양비론을 주장하고 있으나, 정치적 회의주의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에 있어서 일베와 노무현 팬덤은 '극성'을 부린다는 점에 있어서 매우 닮았다. 노무현 팬덤이 영화를 노무현의 삶으로 읽고 그것을 칭송하면 일베는 그것을 노무현의 삶으로 읽고 폄훼할 것이요, 일베가 평점 테러를 하면 노무현 팬덤은 평점 방어를 할 것이다. 교실에서 저들끼리 화기애애호호하게 노는 아이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의 놀이에 극성이 묻어 결국 심술궂은 아이들의 테러대상이 된다. 나쁜놈은 그 심술궂은 놈들이다. 따라서 교사의 입장에서는 그 나쁜 놈들을 혼내줘야 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아이들이 그 화기애애하게 노는 아이들에게 테러를 한다. 또 혼내준다. 하지만 또 그런다. 그럼 이제 교사는 혹시 이 화기애애한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된다.

아마도 그 교사가 화기애애한 아이들을 관찰한다면 내가 위에서 언급한 배타성이라든지, 유난, 극성과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교사로서는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좀 더 성숙한 아이들을 기대했는데 결국 애들은 다 애들일 뿐이라는 회의가 든다. 그래서 어쩌다 심술궂은 놈들을 혼내킬 때 덩달아 화기애애한 애들도 주의를 주면 화기애애한 애들은 자신들은 아무 죄가 없는 데 왜 자기들한테 뭐라고 그러느냐고 버럭 화를 낸다. 회의는 더욱 깊어져 갈 것이다. 유치할 뿐이다.

이제 이 화기애애한 아이들을 바라보며 사람에 따라 이 아이들을 다르게 인식될 수 있으리라는 게 나의 주장에 대한 올바른 대입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얼핏 그냥 아무 죄 없는 착한 아이들이겠지만, 심술궂은 아이든 화기애애한 아이든 모두 자기 학급의 학생으로 바라봐야 하는 입장에서는 그들 역시 심술궂은 학생들 못지 않게 골치 아픈 존재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일베와 노무현 팬덤은 각자의 정치적 방식으로 영화를 소비한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한쪽은 노무현을 폄훼하기 위해서 소비하고, 한쪽은 노무현을 칭송하기 위해서 소비한다. 그 상반되는 소비의 방향에서 어찌 소음이 발생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렇게 영화 밖에서의 소비 흐름이 가열되다보면 자연히 영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섬세한 결은 잊혀지기 쉽다. 그건 우리가 공히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바라고 생각한다. 튤립매니아는 정말로 이 상황에서 아무런 소모적 논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일까? 요즘은 과거와 달리 한 곳에 모여 치열하게 싸우는 대신 자기들만의 둥지에 모여서 상대방을 헐뜯는 것이 이 양 쪽 진영의 트렌드인데 혹시 이렇게 자기들끼리 모여서 욕과 푸념을 늘어놓는 것을 '소모적 논쟁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일베와 노무현 팬덤은 영화의 바깥에서 자기들만의 둥지에 모여 앉아 수없이 빨고 깐다. 때로는 영화 평점 게시판에서 서로를 욕하고, 댓글에 대해 추천과 반대 아이콘을 누르며 싸운다. 이것을 소모적 논쟁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일까? 나는 이것을 소모적 논쟁을 보며, 그러한 소모적 논쟁을 성립하게 만드는 데 공히 막중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을 공모자라고 지칭하는 것이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나아가 오히려 소모적 논쟁을 유발시킨 것이 허지웅의 글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그의 발언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메타적 분석을 통해 접근할 일이다. 허지웅은 A와 B의 소모적 논쟁에 대해 그것을 지적하는 자신의 비판문C을 적었지면, 튤립매니아의 발언은 애당초 A와 B의 소모적 논쟁이 없었으니 이 모든 소모적 논쟁을 촉발시킨 것은 허지웅의 C라는 주장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위에서 적은 것처럼 엄연히 소모적 논쟁이 존재함에도 이 상황을 그렇게 분석하는 것은 그런 소모적 논쟁에 지나치게 적응을 해버려서 그것이 이제는 더이상 소모적 논쟁으로 인식되지 않는 경지에 이른 나머지 A와 B를 비판하기 위한 주장 C를 제기하기 위해 그와 똑같은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는 닫힌사고를 해버린 것으로 보인다.


구성애 씨는 청소년들이 연예인들을 쫓아다니는 행위가 긍정적으로 보면 성적 에너지의 건전한 발산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새누리당을 지지하든, 민주당을 지지하든,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든 시민들이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을 지지하고 표현을 통해 정치와 사회에 참여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바람직한 행위입니다. 시민들이 때때로 지지를 넘어선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이분법적이고 폐쇄적인 정치적 지지를 호소하기도 하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이는 어른들의 희망을 찾는 다른 표현 방법일 것입니다.

어버이연합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때때로 공감하기 어려운 주장을 하시지만, 이 또한 사회공동체 일원으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이 조롱하고 비하하고 폄하하는 것보다 정치적 타협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일지라도 이를 폄하하고 차단시키면 대화는 단절됩니다. 상대방이 헤게모니(주도권)를 쥔 권력가가 아니라면, 우리는 누구에게나 '똘레랑스'(관용)를 베풀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주장을 보자면, 튤립 매니아는 청소년들이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행위가 가지는 긍정적인 효과와, 정치적 시민이 정치인과 정당을 지지하는 행위의 긍정적 효과를 병치시키면서 그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나아가 첫 단락의 말미에서 주장을 확대시키면서, 단순한 지지를 넘어선 <종교적 신념>의 폐해를 인정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이해해볼만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겠다. 이 주장들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청소년들이 연예인에 열광하는 행위가 에너지의 건전한 발산 방법이듯, 시민이 정치인과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민주사회에서의 가장(?) 바람직한 방법인지는 몰라도 바람직한 방법들 중에 하나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인지는 모르겠다고 한 것은 때로 정치적 영역에서는 정당을 지지하는 객관식으로서의 민주주의 외에, 주관식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당도 자신의 주장과 이익을 제대로 대변해주지 않을 때 그냥 가장 비슷한 정당을 지지하는 것만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당사자에게는 무척 잔인한 일이 될 것이기 떄문이다.

둘째, 그러나 그러한 주장을 확대시켜 종교적 신념 수준의 정치적 열정마저 정당화 시키려는 시도는 매우 위험해 보인다. 


<출처: 허지웅 블로그>

http://ozzyz.tumblr.com/post/72075100426

나는 위와 같은 반응이 종교적 열정의 귀결이라고 본다. 나는 흔히 이런 반응을 보이는 분들을 <정치에 미친놈>이라는 나만의 단어로 표현하곤 하는데 앞서 말했듯이 정치적 서사에 지나치게 감정이입한 분들이고, 자신의 지지하는 정치인과 정당에 대해 종교적 신념 수준의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이런 반응들은 극소수이리라 '믿는다.' 인터넷에 널린 야권 정신승리소들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허지웅의 글을 읽고 비판이 아닌 비난 일색으로 점철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반응들이 극소수이리라 '힘겹게' 믿는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튤립매니아의 주장은 그런 극소수인 이런 주장들으 어떤 식으로든지 정당화하려는 것 같아서 불편하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이러한 반응들이  어른들의 희망을 찾는 다른 표현 방법이라는 것일까? 꼭 그런 식으로 희망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내가 지나치게 극단적인 사례를 가지고 그의 주장을 비판한다고 생각하실 분들이 많을 줄로 안다. 그렇다면 그냥 일반론을 가지고 얘기해보자. 일반론적 명제를 만들어 본다면 정치에 대하여 종교적 신념을 갖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라는 질문이 성립할 수 있을 것이고 이게 대한 대답이 각자의 입장을 결정하리라 본다. 이에 대하여 나는 <정의론>으로 그 유명한 J. Rawls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근거로 들어 논의를 전개하겠다. 일단 이야기는 이 사회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매우 다양한 개인들이 모여 사는 다원주의 사회이다. 그런 이유로 그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 양립불가능한 각종 종교적/도덕적 신념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또 그런 차이로 인하여 불화가 일어날 수 있고, 사회적 협력이 저해될 수 있다. 그런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 설정하게 되는 것이 정치적 영역이고, 이러한 정치적 영역은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양립불가능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최소한도로 합의하게 됨으로써 사회적 협력을 극대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영역이다. 다시 말해서 이를테면 서로 각기 다른 종교적 혹은 뭐 그런 신념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신념들은 매우 강력한 것이어서 그 사람의 삶에 폭넓게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그러다보면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 비극적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 정치적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쯤 얘기했으면 대강 감이 올 것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종교적 신념에서의 충돌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정치적 영역인데, 거기에서 또다시 종교적 신념을 갖는다고? 그렇게 된다면 정치적 영역을 만든 애당초의 의의가 모조리 훼손되는 결과가 초래된다. 종교적 신념은 양립을 불허한다. 지금에서야 크리스마스 때 성당과 절이 교류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외형적인 것일뿐이고, 큰 틀에서는 통한다 할지라도 그 구체화된 교리에서는 엄연히 배타성이 현존하고 있다. 또 다시 배타성이 등장한다. 정치적 영역에서 이러한 배타성을 특징으로 하는 신념을 채택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일까?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다. 위에서도 말했듯 미우나 고우나 상대방은 이 사회에서 함께 부비부비하며 공생해야 할 사회적 협력 동반자들이다. 직접적 교류가 없다고 해서 쉽게 생각할만한 존재들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튤립매니아가 정당화하고자 하는 종교적 신념은 그러한 배타성의 위험성을 너무나도 쉽게 간과해 버리고, '어른들의 희망을 찾는 다른 표현 방법'이라는 수사로 미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나는' 읽었다. 따라서 나는 튤립매니아와는 반대로 생각한다. 정치적 영역은 사회에 다양하게 존재하는 양립불가능한 신념으로 인한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 최소한도로 설정되어야 한다. 다만 건전한 시민의식을 통한 민주주의의 온전한 작동을 위해 그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최대한으로 운영되어야 바람직할 것이다.


셋째, 어버이연합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때때로 공감하기 어려운 주장을 하시지만, 이 또한 사회공동체 일원으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이 조롱하고 비하하고 폄하하는 것보다 정치적 타협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일지라도 이를 폄하하고 차단시키면 대화는 단절됩니다. 상대방이 헤게모니(주도권)를 쥔 권력가가 아니라면, 우리는 누구에게나 '똘레랑스'(관용)를 베풀 수 있습니다.

이것은 편의상 위에 적은 두번째 단락을 다시 옮긴 것이다. 나는 이 문장에 격하게 공감한다. 다만 그런 이유로 나는 튤립매니아가 이 주장으로 비판하는 대상이 누군지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허지웅이 노무현 팬덤에게 하는 말 같지 않은가?  서로 다른 정치적 주장을 하는 사회공동체의 일원을 조롱하고 비하하고 폄하하는 것이 누구란 말인가? 나는 일베와 노무현 팬덤 이외에는 딱히 생각이 나질 않는다. 혹시라도 이 주장이 허지웅을 향한 것일까? 내 머릿 속의 구도에서는 허지웅은 일베와 노무현 팬덤의 한 층 위에서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튤립매니아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어버이 연합을 언급한 것으로 봐서는 이 문단은 엄연히 노무현 팬덤을 향한 것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이전의 문장까지만 해도 종교적 수준의 정치적 신념의 정당화하다가 갑자기 다른 주장이 등장해서 당황스럽긴 하지만, 나는 문맥의 흐름을 볼 때 튤림매니아가 이 지점에서 모종의 중재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위에서는 노무현 팬덤을 고깝게 보는 이들에 대한 중재이며, 아래 문단은 노무현 팬덤에 대한 중재이다. 위의 문단은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있으나, 아래의 문단은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무현 팬덤이 과연 이 또한 사회공동체 일원으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이 조롱하고 비하하고 폄하하는 것보다 정치적 타협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임을 알고 있을까? 나는 그에 대해 회의적이다. 나는 그들이 잘 모른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천년이고 만년이고 새누리당의 지배를 받으며 언제나처럼 그렇게 인터넷 정신승리소를 방문할 것이다. 물론 나의 비관적 예측일 뿐 나의 소망은 그와는 정반대다. 하지만 그런 비관적 예측을 무시할만큼 현실이 밝아보이지는 않는다. 그걸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끊임없이 자신들의 둥지에 모여서 서로를 욕하기에 바쁠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보면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악당 '볼드모트'가 등장합니다. 해리포터의 마법사들은 볼드모트가 두려워 그의 이름을 부를 수조차 없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화와 역사적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이 영화화 됐습니다. 하지만 평론가들 사이에 '노무현'이란 이름은 '볼드모트'가 되어있고, '안녕들 하십니까'의 현시대상을 영화에 대입하면 소모적인 논쟁으로 치부되고, 영화 관람에 반대가 되는 삐뚤어진 정의감이 됩니다. 하지만 제가 본 '변호인'은 '설국열차'만큼이나 정치적이고, '관상'만큼이나 역사적인 영화였습니다. 적어도 이 영화만큼은 시대적 상황과 함께 보고 듣고 느낀다면 더욱더 즐겁게 관람하실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제 슬슬 까기도 지쳐가는데, 나는 <설국열차>도 아직 안 봤고, <관상>은 봤기 때문에 이 단락에서는 '관상만큼이나 역사적인'이라는 문장이 가장 눈에 거슬렸다. 영화 <관상>의 역사성이라는 문구를 읊자니 약간 조소가 배어 나오는 것을 피할 길이 없는데, 과거 딴지일보 한동원의 적정관람료라는 코너에서 다룬 관상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http://www.ddanzi.com/ddanziNews/1493369) 영화를 본 나는 무척 재미있게 봤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평에 격하게 공감했다. 그런 맥락에서 튤립매니아의 '역사적 영화 <관상>론'에 반박하자면, 이 영화의 뼈대가 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기 보다는 '관상'이라는 흥미유발적 소재다. 물론 시대극인만큼 역사적 배경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내가 감독이라면 이 영화에서 충돌되는 두 요소 사이에 하나를 포기하라면 응당 역사적 부분이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는 역사적 고증의 철저함 보다는 관상이라는 소재의 부각에 더욱 힘이 실렸다. 성리학을 추종하는 나라에서 관상쟁이에게 왕이 찾아가서 일대국사를 의논하고, 붕어하면서 교지를 내려 후왕의 일을 맡겼다는 대목을 보면 내 말을 감히 부정할 수 있는는가? 이게 관상이라는 소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역사를 왜곡한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관상>이라는 영화가 역사적인 영화라는 표현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머지 뭐 <변호인>은 안 봤으니 말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어우 힘들어 죽겠다. 안 본 상태에서 적길 천만다행이다.)




마지막으로 튤립매니아는 자기들만의 언어로 자기들만의 소통을 추구하는 평론가들의 세태를 비판하며 글을 맺는다. 관련하여 그는 '김규항'을 언급하고 있는데, 디워 사건 때 그는 진중권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었다. 앞서 나는 내가 동의하고 경외하는 인물들에 진중권도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밝혔으니 내가 어떤 입장을 취할지는 쉽게 예측이 가능할 것이다. 

언제부턴가 평론은 대중과 단절된 그들만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대중들의 취향을 경멸하고 조롱하고 폄하하고 냉소합니다. 또한 글쓰기를 업보로 삼고 있는 '먹물'들이자 '지식인'들인 자신들이 항상 옳다고 자신합니다. 이에 대해서도 김규항 씨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들은 타인의 취향에 폭력적인 게 아니라 제 취향을 경멸하는 재수 없는 인간들에 반발하는 것이다. 동네 양아치들이 싸우다 파출소에 잡혀가도 '선빵'을 가리는 법이다."(같은 책, 153쪽)

 

(프레시안)

나는 때로 먹물을 자처하며, 자처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먹물이 되기를 강력하고 희망하는 인간이다. 나는 먹물이 그 학식에 대한 온당한 대우를 받는 세상이 올바른 세상이라고 생각하며, 뜨뜻미지근한 상대주의적 주장이나 천박하게 왜곡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입김에 먹물에 대한 경멸이 파급되는 양상에 대해 우려를 느끼는 인간이다.

'취향이니 존중합니다.'

인터넷 상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문장이다. 이것은 취향은 존중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표현하고 있는 문장이다. 그리고 이 문장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대중들이 이성적으로나마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고 또 그에 대해 동의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자유주의적으로 조금더 진보하고 있다는 하나의 표증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존경스러운 인접 국가가 일본이다. 우리 민족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심심하면 무시하는 나라가 일본인데, 그 나라의 가장 강력한 저력 중의 하나가 자유주의의 발전이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상과 문화와 풍조가 널리 보편적으로 확립되어 있다. 물론 그렇게 존중되는 개인의 자유에는 개인의 취향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다만 아이러니 하게도 민주주의는 생각보다 그렇게 발달을 하지 못했다. 이것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발전이 서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하나의 증거가 아닌가 한다.

말이 옆으로 샜다. 아마도 튤립매니아는 그렇게 존중이 대상이 되어야 하는 대중의 취향이 먹물들에 의해 제멋대로 재단되는 현상을 자유주의적 미개인의 만행으로 묘사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취향은 존중되어야 하며, 그러한 취향에 대한 폭력은 자유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하지만 그러한 취향이라는 것이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 사회에 모종의 선악의 결과를 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결과에 대한 나름의 예측이 가능한 먹물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예측하면서도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의무 방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 우선 김규항의 말이라는 저 문장부터 한 번 짚고 넘어가겠는데, 동네 양아치들이 싸우다 파출소에 잡혀가도 '선빵'을 가리는 법이라는 문장이 참 인상적이다. 내가 아까 말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일베와 깨시민이 싸우다 파출소에 잡혀가도 선빵을 가리는 법이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그리고 추억도 회상할 겸 지난 디워 때를 생각해 보겠다. 나는 당시에 또 하나의 집단적 광기를 보았다. '애국심 교육'이라는 지난 날의 과오가 그런 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물론 그 사건은 애교에 불과한 것이고, 장차 그 과오가 이 나라에 큰 재앙으로 다가오리라 예상한다.) 이 주장에서는 아무래도 공동체주의자인 왈쩌의 복합평등주의를 근거로 하여 이야기를 진행해야 할 것 같다. 

일단 왈저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는 사회적 가치다. 이것은 별 것 아닌 말같지만 취향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논제를 정면으로 깨부수고 들어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확대하면 어떤 취향도 단순히 개인적인 것일 수 없다. 개인의 취향은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고 사회에 다시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에 사회로부터 독립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취향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치를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적 가치라는 것은 그 해당 영역에 특수한 맥락에 따라서 분배되어야 마땅하다. 무슨 말이냐면 영화판이라는 게 있으면 그곳에서 '좋은 영화'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그 영화판에 맞는 룰이 있고, 그 룰에 따라서 '좋은 영화'라는 평(가치)을 얻어야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만일 그러한 룰을 어기고, 다른 어떤 영역의 가치가 부착되고 개입되어 원래 영역의 가치를 무시하고 다른 그 영역의 가치 때문에 원래의 영역에서 더 많은 가치들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대표적 사례가 돈과 권력이다. 예를 들어 삼성이 경제적 영역에서 물건을 잘 만들어서 시장을 독점한다면 그것은 정의롭다. 그 영역 내부에서 그 영역 내부에 특유한 가치분배방식에 따라 이루어진 정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뇌물 같은 것을 통해서 권력을 끌어들여 그러한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면 부당하다. 반대로 돈을 이용해 권력을 샀다고 해도 부당하다. 그것은 서로 다른 영역의 가치들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고 허지웅은 좋은 영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되는 것이다. 위의 논의에 비춰볼 때 디워 논란의 핵심은 영화를 평가함에 있어서 영화 외적 요소, 즉 '애국심'이라는 게 개입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옳지 못하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목적은 다양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제작자는 돈을 벌고 관객은 재미를 얻으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질 수 있고,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에서 혹은 고인을 기리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영화평론이라는 것은 즉 다시 말해 그 영화의 가치를 말한다는 것은 다른 영화와의 형평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보다 보편적인 기준을 가지고 그러한 평가에 임해야 하는 것인바, 그러한 보편적인 기준이 영화 특유의 가치기준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원래의 가치 기준적 요소들을 무시하고 애국이라는 다른 영역의 가치를 가지고 들어와서 원래 받아야할 가치 이상의 것들을 취득하는 행위가 됨에 따라 그러한 가치의 분배방식은 절대로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의 분배가 곧 어마어마한 사회적 자산의 분배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 문제의 해악은 더욱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가 싫어하는 것은 <디워> 그 자체라기 보다는 그것을 감싸고 도는 인간들의 대응 방식이며, 또 내가 싫어하는 것은 <변호인> 그 자체라기 보다는 그것을 감싸고 도는 인간들의 대응 방식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이러한 영화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역사적 맥락을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래나 저래나 이런 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고, <26년> 같은 영화를 보다보면 전두환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만약 허지웅의 주장이 영화를 봄에 있어서 역사적 맥락의 배제라면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영화를 감상함에 있어서 역사적 맥락에만 집중적으로 과몰입하게 되면 영화 자체의 완성도에 대한 고찰이 필요없어질 정도에 이르게 되는 것을 우려하는 게 아닌가 싶다. 마치 <26년>을 보고서도 정말 훌륭한 영화였다고 상찬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처럼, 영화 외적 요소가 영화 내적 요소를 침식해 들어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고, "이렇게 된 거 어차피 어떻게 만들어도 상관 없을 걸 그랬다."는 어느 제작진의 자조가 흘러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이 예측되는 것이다.

저는 심형래 감독의 '디 워'를 아직까지 좋아합니다. 단순한 이야기 구조도 좋아하지만, 영화 외적으로 심형래 감독의 코미디언에서 감독으로 데뷔하기까지의 삶의 여정, 영화에 쏟은 열정,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까지의 노력도 영화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즐기는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저는 주로 다양한 시각으로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햄릿'이나 '닥터 지바고' 같은 작품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이유는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사람들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되고, 반영되고, 투영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극장에서 함께 보는 것이 가장 즐겁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 기대하고, 영화를 집중해서 보고, 영화를 본 후에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다시 찾아보고...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과 사고들이 소통하고 상호작용이 일어납니다.

 

그 과정에서 대중들과 평론가들이 함께 나아가길 바랍니다.


아 이제 진짜 마지막이다. 영화를 만들기까지의 노력이 영화의 일부라는 주장은 일견 존중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존중 역시 취향에 대한 존중과 같은 존중이다. '좋아한다'라는 단어를 통해 그는 하나의 당위적 명제를 구성한다. 메타윤리학자 헤어에 따르면 위와 같은 명제는 보편성과 규정성을 가짐으로써 다른 모든 사람들도 동일한 조건이라면 마땅이 그래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나는 묻고 싶다. 1.우리가 과연 심형래의 온전한 노력을 알 수 있겠는가? 그게 대한 확대/축소의 왜곡에 따른 정확하지 못한 인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2.다른 많은 영화들도 적지 않은 노력이 들었지 않겠는가? 3.<디워>만큼의 노력이 들었고 더불어 디워 이상의 완성도를 가진 영화가 있다면 당연히 디워보다 더 많은 가치를 획득하는 게 정의롭지 않은가? 4.다 떠나서 영화라는 것은 그 제작에 따른 노력보다는 극장에서 관객들에게 보여지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를테면 가수는 노래로, 작가는 해석이 아닌 그 글 자체로 평가받아야 하는 것처럼.

또한 다양한 시각에 대한 의견도 존중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도덕적 상대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해야 할 것이다. 김규항의 말처럼 취향에 있어서 폭력이 가능해지는 세상이라면 취향이 도덕적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도 자명하다. <상대주의의 오류>라는 게 있다. 상대주의자들의 말처럼 모든 주장을 긍정하다보면 그런 상대주의를 비판하는 주장까지도 긍정하게 되어 수습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의견들이 어떤 당위나 가치판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모든 의견이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단죄를 면할 수는 없다. 앞서 언급한 롤즈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사회는 모든 의견이 수용되는 사실로서의 다원주의가 아니라 오직 정치적/도덕적으로 합당한 의견만이 수용되는 합당한 사실로서의 다원주의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먹물들의 의견이 재수없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것이 자칫 취향에 대한 탄압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합당한 사실로서의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시도로 읽는다면 그 또한 달리 읽힐 여지가 충분하다고 본다. 그럼 의미에서 나 역시

그 과정에서 대중들과 평론가들이 함께 나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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