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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생각

"니들이 이만큼 사는 게 다 누구 덕인지나 알아?"에 대한 모범 대답

by 통합메일 2014.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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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발견한 짤방이다.


그 커뮤니티는 여당에 반대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비교적 많은 커뮤니티이다.


이 짤방은 제법 큰 호응을 얻어서 해당 사이트의 일면에 올라가기도 했다.


짤방의 내용인즉슨 식당에서 밥 먹는데 누군가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욕했는데 뒤에 앉아 있던 노인이 역정을 냈다는 것이다.


"니들이 이만큼 사는 게 다 누구 덕인지나 알아?"


그 노인은 그렇게 말했고, 그에 대하여 박정희 욕을 하던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김재규요."


앞서 말했듯 이 짤방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그들은 매우 통쾌해 했다. 더할 나위 없는 정답이라고 말했다.


이만큼 사는 게 누구 덕인지 아느냐고 물어본 노인은 그에 대한 답으로 '박정희'를 생각했을 텐데, 그에 대하여 박정희를 죽인 김재규를 말했으니 과연 허를 찌르는 답변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아마 혹자는 다음과 같은 사자성어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는 이런 상황에 위와 같은 '촌철살인'이라는 사자성어가 남용되는 세태가 그리 바람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토론이나 논쟁의 개념에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수사가 함부로 남용되는 것이 결국에는 사람들의 집단 무의식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가 드는 등 뭐 그런 이유들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의역한다는 차원에서는 또 한편으로 제법 어울리는 말이라는 생각도 든다.



다만, 나는 위의 '김재규요'라는 대답이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짤방에 달리 어느 답변들 처럼 위의 대답은 이 사회의 구성원들을 여전히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모종의 한계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사고방식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인다. 또 누군가는 '노무현'이라고 하기도 했다. 나는 그 역시도 마뜩찮았다. 그런 식의 대답은 결국 상대방과 대거리를 한다는 구도를 그대로 유지시키고 있는 대답이었다.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분노였다. 싸우고 싶어 하는 의지였고, 부수고 싶어하는 의지였다. 조용한 타협 보다는 상대가 얼른 약점투성이의 말을 해서 나의 일갈에 무릎을 꿇길 바라마지 않는 충동이었다.


어떤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김재규'라는 저 답변이 100점짜리 답변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그 짧은 발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정곡을 찌르는 대답이라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식의 대결의 구도에 갖힌 사고방식과 대응방식으로는 이 나라에 깊이 뿌리박힌 가시를 절대 뽑아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나는 어떤 대답을 정답이라고 생각하는가?


"니들이 이만큼 사는 게 다 누구 덕인지나 알아?"


라는 질문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저희가 이만큼이나 살 수 있게 된 건 할아버님 같은 선배님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같은 사람이 아니라요."


나는 진심으로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김재규'라는 대답에 통쾌해 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매우 안타깝다. 나는 위의 이야기가 실화가 아니라고 믿고 싶고, 만일 실화라면 또 하나의 화합의 기회가 그렇게 사라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자의 말대로 그런식으로 박정희에 대한 믿음이 단단히 확립한 노인분들은 절대 그 생각이 바뀌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들의 그런 왜곡된 역사의식이 더 이상 이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게 되는 때는 그저 그들이 천수를 다했을 때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꼭 그렇게 그들과 싸워야 할까? 아니 싸워야 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그들을 찍어 누르고 그 광경을 보면서 통쾌해 해야 할까 그것이 그들 자신의 영혼에 올바른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일이 결국에는 그들의 영혼을 망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망가진 영혼들로 구성될 이 사회 역시도 결코 건강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사회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이 사회구성원으로서의 하나의 연대 의식과 같은 것이다. 서로의 신념이 달라 싸울 수는 있으나 그 싸움이 수위가 정도를 벗어났을 때 양자 모두 상처를 입고 조금씩 골은 깊어져 간다. 애당초 저 노인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소신이 종교적 신념의 수준이었다고 한다면, 그에 대하여 받아친 이와 그 답변에 대해 통쾌해 한 사람들의 정치적 소신 역시 종교적 신념 수준의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노인이 엄연히 이 사회의 협력의 파트너라는 사실을 망각할 수 있겠는가.


텁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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