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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박민규의 《근처》 독후감

by 통합메일 2014.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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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세트

저자
박민규 지음
출판사
창비 | 2010-11-1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책소개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박민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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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의 《근처》 독후감

목차

1.소개

2.줄거리

3.구성과 문체

4.근처

(1)객관주의와 삶의 확신에 대한 반기

(2)염세주의

(3)삶에의 의지

5.맺는말: 우리의 삶이란


1.소개

이 글은 2009년 황순원 문학상을 수상한 박민규 작가의 《근처》를 읽고 작성한 독후감이다. 이 작품은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과, 박민규 작가의 단편소설집 『더블』에 수록되어 있다.

작가 박민규는 1968년 울산에서 태어났으며,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장편소설 《지구영웅전설》로 2003년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곧이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제8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 일약 주목받는 작가가 된다. 《카스테라》로 2005년 제23회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했으며, 장편소설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핑퐁]]》이 있다. 2007년 〈누런 강 배 한 척〉으로 제8회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10년 〈아침의 문〉으로 제34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2.줄거리

주인공 정호연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었다. 아버지는 그를 숙부(작은 아버지)네에 맡기고 일본으로 떠난 뒤 연락이 두절되었다. 숙부네 집은 청산도였다. 청산도는 전라남도 완도군에 속한 섬이며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와 KBS 드라마 《봄의 왈츠》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숙부네 집은 청산도 청산리에서도 모북리였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호기, 동구, 도형, 순임이라는 네 명의 친구를 사귀게 된다. 하지만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주인공은 도시에 있는 학교로 진학을 했고, 그와 친구들은 초등학교 운동장에 타임캡슐을 묻게 된다. 유복한 숙부의 지원으로 주인공은 친구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대학까지 나와서 서울에 있는 회사에 들어가 기획 업무를 맡으며 살아간다. 규칙적으로 참 바쁘게 산 나머지 결혼도 하지 못했다. 그런 삶의 어느 시점에, 마흔둘이라는 나이에 그는 간암 선고를 받았다. 말기암이었다. 순식간에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이 되었다. 수술은 소용이 없을 것이고, 항암치료를 할 것인지 아니면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지의 선택지 중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회사에 사표를 제출한 그는 청산도로 돌아왔다. 그 동안의 삶이 일단락된 마당에 돌아갈 곳을 생각하니 그곳밖에는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그리고 우연히 다시 친구들과 만나게 된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요양을 하며 살았다. 말이 요양이지 죽음이 찾아올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나날이었다. 어느 날 그는 어린 시절에 묻어놓은 타임캡슐이 떠올라서 이제는 폐교가 되어버린 학교의 운동장을 찾았다. 그는 땅을 파서 타임캡슐을 캐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묻어놓은 것을 마흔두 살의 나이에 다시 찾았으니 정확히 30년 만이었다. 그 속에는 아직 어렸던 그와 친구들이 소중히 간직했던 보물들이 들어있었다. 호연은 나침반을 묻었다. 플루타아크 영웅전과 나침반 중에서 고민하던 그는 결국 나침반을 묻기로 결정했었다. 친구 호기는 매미의 허물을 묻었다. 동구는 동전을, 순임을 꽃을 묻었고, 말이 어눌한 도형은 순임이와 결혼할 것이라는 다짐을 적은 엽서를 묻었다. 잠시, 주인공의 인격에 어린 시절의 자아와 현재의 자아가 겹쳤다.

얼마 뒤에 그는 호기의 식당에서 친구들 모두와 함께 술을 마셨다. 오랜만에 왁자지껄 회포를 풀었다. 식당주인인 호기와 동기는 술에 취해 골아 떨어졌고, 도형은 대리운전을 불러 혼자 돌아갔다. 순임과 도형은 가는 방향이 같을 텐데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하는 수없이 주인공 호연은 순임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바래다준다. 그리고 며칠간 그저 그런 날들을 보냈다. 검사를 받으러 서울을 다녀오고, 호기의 식당에 들어서 밥을 먹고 잡담을 나누고, 책을 읽고 사색을 하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삶에 순임이 삽입되기 시작한다. 무작정 한 번 찾아왔다던 그녀는 이후로도 자주 찾아오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마치 연인사이처럼 지내기 시작했다. 호연은 잠시 가정을 이룬 듯한 느낌을 경험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눈을 조심했지만 두 사람의 만남들은 곧 다른 친구들의 귀에 들어갔고, 호기·동구·도형은 그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렇게 또 남자들끼리 모인 술자리에서 주인공 호연은 도형으로부터 타임캡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도형은 자신도 학교 운동장에 묻혀있던 타임캡슐을 파냈다고 말했다. 도형이 파냈다가 다시 묻은 타임캡슐을 자신이 다시 파낸 것인 모양이라고 호연은 생각했지만 도형은 그것을 다시 묻지는 않았다고 했다. 호연은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파낸 타임캡슐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어서 도형은 자신이 타임캡슐 속에서 발견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호연이 타임캡슐에 묻어 놓은 것은 군용 나침반이 아니라 플루타아크 영웅전이었다. 그 말을 들은 호연은 집에 오자마자 자신이 발견한 타임캡슐을 확인했다. 자신이 타임캡슐에 넣은 것은 분명히 나침반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도형이 묻은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호연은 혼란에 빠졌고, 며칠 동안 심하게 앓았다.

그가 앓아누운 사이에 순임이 그를 찾아왔다. 그녀의 전화에 그가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동침했다. 이불 속에서 순임은 타임캡슐 이야기를 했다. 호연이 찾아낸 타임캡슐 속에 들어있는 어린 순임의 보물은 ‘꽃’이었지만, 순임은 자신이 타임캡슐에 넣은 것은 호연을 짝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편지였다고 말했다. 도형의 말과 마찬가지로 호연 자신의 경험과 괴리를 일으키는 말이었지만 한 번의 경악을 겪은 후였기에 호연은 전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걸 목적으로 접근한 건가 싶어 할만도 하건만 그는 덤덤하게 대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마루에 앉아있었다. 그는 펼친 책 속에서 일전에 순임이 찍어준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속에서 자신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있었던 곳과 자신이 가야할 곳에 대해 자문했다. 그리고 그 곳은 아마도 이 ‘근처’일 것이라고 대답했다.



3.구성과 문체

이 작품은 타임캡슐을 묻은 때로부터 30년이 흐른 마흔두 살의 화자의 시점에서 고향에 내려온 며칠 동안의 일상을 그리면서 틈틈이 그 간에 일어난 일들과 그의 삶이 이렇게 전개된 사연에 대하여 돌이켜보고 설명하고 있다.

문체를 보면 과연 박민규의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탁월한 비유와 언어의 유희가 곳곳에서 쉴 틈 없이 이루어진다. 단절된 시간을 해안선에 비유하고, 금속상자의 녹을 시간에 비유하며, 달빛을 밥값으로 비유하고, 끓인 물은 삶에 비유하고, 아버지가 자신을 버린 것을 인수인계에 비유하고, 지난 세월을 에버랜드에 비유하고, 고통을 숲에 비유하고, 하는 등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비유와 언어의 유희가 향연을 벌이고 있다는 인상이다.

다만 작품의 스토리가 처음부터 시한부 인생을 일찌감치 밝히면서 시작을 하고 있는 만큼 그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할 때 유머의 요소는 비교적 박하게 사용된 것 같다. 유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말을 더듬는 도형을 묘사하는 부분이 가장 대표적인 것 같다.



4.근처

(1)객관주의와 삶의 확신에 대한 반기

나는 이 소설을 작가의 단편소설집 『더블』에 수록된 첫 작품으로 만났다. 책의 첫머리에 수록된 소설이어서 가벼울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그 분위기가 무겁고, 거기에 함의된 의미도 범상치 않아서 두세 번을 읽고 나서야 이 소설이 말하고 있는 바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가 있었다.

흔히 서른이라는 나이를 마주하게 되면, 그리고 삼십대라는 나이를 공유하는 사이가 되노라면, “서른이 되면 삶이 제법 또렷하고 분명해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삶은 여전히 흐릿하더라.”라는 말에 공감을 할 수 있게 될 가능성이 커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모종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끝 어딘가에는 우리가 도달하게 될 종착지가 있지 않을까 하고 자연스럽게 짐작해 보는 것이다. 그것은 행복에 대한 희구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존재의 불안에 대한 촘촘한 자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언급되는 ‘근처’라는 상징은 현대인이 살아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상정하게 되는 모종의 목적지에 대한 관념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걸 이룬다면 삶은 확연히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거짓말처럼 삶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생의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고백을 하지만, 우스꽝스럽게도 또 거짓말처럼 우리는 그러한 고백을 망각한 채로 다시 어떤 목표와 목적지를 향해서 달려간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이 그러한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하고 안도감을 느끼다가 머지않아 다시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그러한 망각과 달성과 상실 사이에 존재하는 암묵적 서사를 다루고 있다.


나 많이 늙었지? 문득 얼굴을 숙인 순임이 물었다. 글쎄, 하고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나이 든 소녀를 위한 마땅한 표현이 나는 떠오르지 않았다. 늙었다, 와는 다른, 그러나 늙었다 근처의 그 어떤.

이념형(이데아/이상형)을 완전히 충족하는 인간은 없다. 모든 인간은 결국 자신의 근처를 배회하는 존재일 뿐이다.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든,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인간은 그 어느 지점에도 정확하게 도달할 수가 없다. 그저 그 존재의 근처를 맴돌 뿐이다. 마치 천로역정과도 같이 말이다. 그렇게 헤매다가 사는 삶을 허무하다고 할 것인지 아니면 혹 다르게 표현할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다. 그저 인간의 삶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것은 우리에게 묵직한 무게로 다가온다.




(2)염세주의

온몸을 파닥이던 붕어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그 몸부림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다. 고통과 진통, 투약과 불면... 스스로의 혈관을 찾아 링거를 꽂는 일상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살아 있는 내 모습을 기억하고 싶다. 바람이 분다. 나는 지금 숨을 쉬고 있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을 만큼 담담한 모습이겠지만, 더없이 풍만한 감정으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다.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마음으로 연두와 초록, 노랑의 저 색채를 음미하고 기억하려 한다. 모든 물감을 섞으면 검정이 되듯 소소한 삶의 순간들도 결국 죽음으로 물들게 될 것이다. 물이 흐른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폭이 넓고 깊은 삶이 흐르고 있다. 나는 기쁘고, 기쁘지도 않다. 나는 슬픈데 슬픈 것만도 아니다. 나는 화가 나지만 어째서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프지만 아프지 않은 부분도 있다. 나는 즐겁고, 실은 즐거울 하등의 이유가 없다. 모르겠다. 느끼는 모든 감정을 추스르고 섞으면 결국 체념이 된다. 그것은 캄캄하고, 끝없이 깊고, 풍부하다. 인간이 이를 곳은

 

결국 체념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주된 정서를 이루는 것은 ‘체념’이다. 항암치료와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 중에서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어떠한 감정을 느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의 ‘체념’이라는 것은 사실 하나의 종착점에 이르렀을 때 느끼게 되는 감정들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최종 목표를 달성했을 때 엄청난 성취감과 희열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더 이상의 아무런 희망도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는 절망과 체념을 느끼게 된다. 목표 달성과 극단적 절망은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종착지’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지점에서 이 두 개념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서로를 닮아있다.

이것은 하나의 변증법적 발상을 암시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생이 그저 삶의 근처를 방황하는 것에 불과했다는 점을 이미 어슴푸레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죽음이라는 것을 앞에 둔 이상 자신이 이제 곧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생각에 지배된 것이고, 이제 ‘근처’를 방황하는 삶도 거의 다 끝났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는 혼자다. 혼자인 것이다. 찾아 나설 아내도 없다. 설사 네 명의 자식이 있다 해도 나는 혼자일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문득 혼자서, 혼자를 위로하는 순간이다. 삶도 죽음도 간단하고 식상하다. 이 삶이 아무것도 아니란 걸,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니란 걸, 이 세계가 누구의 것도 아니란 걸, 나는 그저 떠돌며 시간을 보냈을 뿐이란 사실을 나는 혼자 느끼고 또 느낀다. 나는 무엇인가? 이쪽은 삶, 이쪽은 죽음... 나는 비로소 흔들림을 멈춘 나침반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평생을

 

<나>의 근처를 배회한 인간일 뿐이다.


이 구절을 읽고 드는 생각은 <나>라는 것의 본질이 흡사 <죽음>이나 <절대적인 외로움>과 같은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행복과 괴로움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대개 행복이라는 것은 그것을 새삼스럽게 지각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로서의 간사함인 것이고, 고통과 증오와 괴로움과 자괴감이나 회의 따위를 곱씹으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고통에 몸부림친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절대적인 고통이 될 수 없다. 어디까지나 그런 경험들은 이 삶이라는 한계 속에서 갇힌 채로 일어나는 일에 불과하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귀결의 근처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존재나 삶의 본질을 죽음이나 절대적 외로움이라고 전제할 때 인간의 삶 혹은 존재라는 것은 그저 근처를 맴도는 일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죽음과 고통을 인간의 존재 및 삶의 본질이라고 간주하게 될 때 인간은 필연적으로 염세주의에 빠지게 되리라는 생각이다. 염세주의란 인간의 삶은 고통뿐이며 따라서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철학적 사유를 나타내는 말이다. 지난날의 삶을 그저 ‘근처를 배회한 세월’로 정의내리고, 죽음이야 말로 삶의 진정한 귀결이며 본질이라고 이해해야만 하는 인간에게 지난날의 인생이라는 것은 그저 죽음을 위해서 존재한 시간에 지나지 않는 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이 필연적으로 염세주의로 연결되는 생각을 나는 힘겹게 밀어낸다. 물론 이 작품의 스토리상 작품 내에서도 숱하게 염세의 충동이 튀어나오곤 한다. 하지만 그런 염세의 충격은 또 금방 다른 경험이나 자극에 의해 가리워지게 된다. 잊혀진다. 인간의 삶이 그러하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괴로운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자신이 자신의 죽음을 어김없이 숱하게 망각한다는 사실이 아닐까 한다.


(3)삶에의 의지

순간 가정을 잠시 이룬 듯했던 그 느낌의 정체는 무엇일까? 순간이지만, 순간인데도 순간이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그 기분이 나는 싫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그는 염세주의에 빠져서 죽음을 인간의 본질로 인식한다. 한평생 죽음의 근처를 맴돌다 이제 곧 죽음 그 자체에 도달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체념에도 불구하고 결국 살아있다는 감각에 기꺼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그는 말하고 있는 듯, 혹은 발견한 듯하다.

이러한 경험은 비단 그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나를 비롯하여 이 세계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한없는 절망과 체념으로 인해 염세주의에 빠졌다가 어떤 계기를 통하여 거짓말처럼 그런 절망으로부터 탈출하여 다시 빛나는 세상을 재발견하게 되는 그런 멋쩍은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에 내재된 이치 때문이고, 이 세상의 이치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본질이라는 것은, 그리고 진리라는 것은 그렇게 또 얄밉게 우리의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로 그는 염세주의를 택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계기로 다시 삶의 즐거움을 재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타임캡슐을 파냄으로써 그는 자신이 죽음 혹은 자신의 존재의 본질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고 그것을 확인하는 행위는 그가 세상을 정리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 죽음은 목전에 다다른 것 같지만, 우리는 현재를 삶의 끝이라고 생각하고 드디어 본질에 도달했다고 숱하게 착각하지만 결국에는 그것 역시도 어김없는 ‘근처’에 불과할 따름이다. 세상은 그리고 삶은 어김없이 계속 이어진다.


개켜둔 걸레처럼 말없이, 꼼짝 않고 마당을 지켜본다.

 

아무 일 없는 순간이

아무런 일 없는 공간 위에 머물러 있다.

 

언뜻, 그렇다. 나도 언뜻 이곳에 물렀지 않았던가. 지긋이 책을 집어들면서도 마치 죽은 이처럼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빗줄기가 그리는 크고 작은 동심원이 무수한 연잎이 되어 어디론가 흘러간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아니다. 아우렐리우스는 또 뭐라고 얘길 했을까. 책을 펼치자 한 장의 사진이 깃들어 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낯선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오오래 그 남자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는 어디 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어디로 가는 걸까. 아마도 이

 

근처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처’라는 것이 양면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우리가 생의 의미나 본질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에는 결코 그것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비관적으로 암시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지속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근처라는 것은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며, 그러한 사실 자체로부터 아직 가야할 길이 더 남아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게 남아있는 길은 인간에게 하나의 희망과 여지를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 근처라는 것은 인간에게 좌절로 다가오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희망의 여지를 부여하는 상징의 하나라는 점에서 인간의 존재와 그 삶의 본질의 한 단면을 훌륭히 그려내고 있는 매개체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한 지속성과 여지라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 이상 염세주의 따위에 머물지 못하게 한다. 본디 염세주의라는 것은 빛나는 미래를 그리는 세계관에 대한 반발로부터 잉태된 것이지만 그렇게 태어난 염세주의 역시도 그저 기존의 생각을 뒤집어서 삶을 고통과 죽음이라는 하나의 고정된 것으로 규정한 것일 뿐, 삶이라는 것을 그 어떤 특정한 것에 한정짓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기존의 세계관과 동일한 한계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죽음이라는 벽을 마주한 인간이 스스로에게 체념의 감정을 주입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온전히 그러한 체념의 감정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가능성이다. 인간은 결국 ‘근처를 배회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체념에도 완전히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 갖는 본질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그토록 잔인하고 또 그 잔인함만큼 또 눈부시다.


5.맺는말: 우리의 삶이란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하는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그는 사진 속에서 무표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부모와 대조적이다. 이것은 삶의 의지라고 읽어야 할 게 아닌가 한다. 즉 다시 말해 그것은 실존을 향한 마음의 힘이다. 그가 그저 스스로를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간주했다면 그는 자신의 본질에 각인된 본질로서의 부모를 탓하며 그 부모를 따라 무표정한 인간으로 삶을 살다가 그러한 삶을 정리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표정한 부모로부터 삶을 물려받은 존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웃어보이고자 한다. 존재가 가진 사실적 영역에 침식되지 않는 인간 내면의 또 다른 본질을 우리는 실존이라고 한다. 그것에 개입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의지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세상의 이치를 ‘근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근처를 배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주는 것이다.

새삼 삶이라는 것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나는 지금 어느 곳의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을 가늠해보기 위해서는 내가 하염없이 씹고 있는 절망을 확인해야 한다. 그것을 확인했을 때 나는 내가 그러한 절망과 고통을 하나의 종착점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보다 더 나빠질 수도 혹은 더 좋아질 희망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자신이 ‘근처를 배회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인간의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사실 나 역시 어김없이 ‘근처를 배회하는’ 또 하나의 인간이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배회할 또 하나의 인간일 따름이다.


나는 이 소설을 그렇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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