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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

수상한 그녀 영화감상문

by 통합메일 2014.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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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그녀 영화감상문

1.소개

2.줄거리

3.다시 태어나도

4.윤회와의 차이점

5.니체의 영원회귀 사상

6.영화의 한계

7.맺는말




1.소개

이 영화의 감독은 황동혁이다. <도가니>, <마이파더>, <기적의 도로>를 연출한 감독이기도 하다. 주로 등장하는 배우들은 심은경, 나문희, 박인환, 성동일, 이진욱, 김현숙, 황정민, 김슬기, 진영이다. 2014.01.22.에 개봉한 이 영화는 <써니>, <광해>의 흥행으로 인기를 얻은 배우 심은경의 출연과 그 독특한 설정으로 인해서 개봉 전부터 세간의 관심과 기대를 얻었다. 대중성을 챙기다 보니 필연적으로 고루하고 진부해지는 장면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소외받고 있는 노인들에 대하여 대중들이 한 번쯤 진중하게 생각해 보고, 반성을 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영화였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러한 반성이 이 사회에 어느 정도의 변화를 가져올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2.줄거리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오말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할머니다. 일찌감치 남편과 사별하고 홀몸으로 외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그는 교수 아들을 둔 어머니가 되었다. 며느리도 봤고, 손자 손녀도 두었다. 제법 남부럽지 않은 노년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건만, 전형적인 고부갈등을 비롯하여, 지난 날의 회한들이 점점 그 노년을 잠식해 들어가는 측면이 있었다. 그런 상황으로 그녀의 주위가 어둡게 물들어 가던 어느 날 결국 며느리가 쓰러지고 만다.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선사하는 스트레스. 며느리의 요양을 위해서, 시어머니인 오말순을 요양원으로 보내는 문제를 두고 가족들은 심각하게 회의를 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이야기들은 그녀에게 큰 서러움과 상처로 다가왔다.

그렇게 급속도로 지쳐가던 어느 날, 쇼윈도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오드리 햇번의 사진을 보고 멈춰선 그녀는 ‘청춘 사진관’이라는 이름의 사진관에 들어가 사진을 찍게 된다. 그런데 이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50년은 젊어 보이게 해드릴께요.”라는 사진사의 대사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는지, 사진관을 나온 그녀는 정말 50년 전의 청춘의 모습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놀란 그녀는 감히 가족들에게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나신을 내쫓으려 했던 서운한 가족들에게 복수도 할 겸 아예 가출을 해버리기로 결심을 한다. 그리고 자신을 좋아하는 영감의 집에 하숙으로 들어가 살면서, 자신의 손자와 함께 밴드활동을 하기도 한다. 또 그 와중에 방송국PD와 인연이 닿아서 묘한 로맨스를 연출하기도 한다.

육체만 젊어진 그녀였기에 주인집 영감에게 정체가 들통나는 등 여러 가지 헤프닝이 연발했지만 정말로 즐겁게 살아갔다.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삶의 재미는 관객으로 하여감 그런 개연성의 문제를 망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에 영화는 또 하나의 장치를 보여준다. 바로 다시 노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장치였다. 상처가 나거나 헌혈을 해서 몸속의 피를 잃어버리면 그만큼 다시 노인의 몸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장치가 가동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그녀의 손자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수혈이 필요한 상황에 처했을 때이다. 영화적 설정답게 손자는 RH- 혈액형을 가지고 있었고 그와 동일한 혈액형을 가지고 있는 것은 가족 중에서도 할머니가 유일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듯이 그녀는 헌혈을 하게 될 경우 다시 노인의 몸으로 돌아가게 된다. 젊은 몸이 되어 이루고 또 누리고 있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또다시 초라한 삶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선뜻 손자에게 자신의 피를 주고자 하지만 박영감이나, 그녀의 아들이 그녀를 만류한다. 노인의 몸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그녀를 만류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한 만류에지지 않고 결국 자신의 피를 손자에게 주고 다시 노인의 몸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3.다시 태어나도

이 영화는 쉴 새 없는 코믹한 요소들을 가지고 관객들에게 다가감으로써 그것이 끌어안고 있는 메시지를 교묘하게 녹여냄으로써 관객들이 그런 메시지를 좀처럼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별반의 인식 없이 수용하게 되는 효과를 보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메시지인가? 이 영화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화두라면 그것은 “다시 태어난다면”, 혹은 “다시 태어나도”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비록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사건은 아니지만, 50년이라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주체에게 있어서 그 50년이라는 시간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되돌려진 것은 그녀의 육체일 뿐, 그녀의 정신이나 사회적 상황 등은 여전히 그대로라는 점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그렇게 때문에 그것은 우리에게 더욱 더 의미심장한 하나의 사례로 다가오는 것 같다. 그리고 나아가 그런 사례를 확장시켜서 그리고 보편화시켜서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기회가 주어진다, 우리 모두에게 우리 각자의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과연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필연적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관객 앞에서 상영될 때 갖게 되는 본질적인 의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4.윤회와의 차이점

이러한 장치가 만들어 내는 구도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윤회’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한 개념을 근본적 사상의 하나로 채택하고 있는 대표적인 종교가 불교라 할 것인데, 내가 보기에는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윤회적 발상은 불교적 의미에서의 윤회와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경우에는 주체가 자신의 정체성과 관계들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로 기존의 자신의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직면하게 되는 선택을 요구하는 상황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윤회의 경우에는 삼계육도로 표상되는 서로 다른 세계를 상정한 상태에서, 주체가 다음 생에서는 지금과 같은 세계에서 태어나거나, 혹은 다른 세계에서 태어나고, 설사 같은 세계에서 태어난다 하더라도, 전생에서의 기억은 유지할 수 없으며, 그 세계에서도 역시 이전 생과 동일한 종(이를테면 인간)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이 영화에 투영된 세계관을 윤회적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적잖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만약 적어도 관객은 그녀의 전생과 현생과 내생을 모두 다 알고 있지만, 정작 그녀는 그러한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그냥 그 새로운 삶을 나름의 방식으로 새롭게 또 새롭게 살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 이 영화라면 윤회적 세계관을 통하여 분석하는 것이 타당할 수도 있겠으나, 이 영화의 경우에는 전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이 영화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선택을 마주함에 있어 주체로서의 인간이 갖게 되는 의지를 다루는 생철학의 문제이다.


5.니체의 영원회귀 사상

그리고 그러한 생철학 중에서도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근현대의 철학자 니체가 주장한 영원회귀의 사상이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 사상은 초월적 신의 죽음 뒤에 그 자리를 대신해 새롭게 나타나는 세계관으로서, 인간의 자연적 삶을 초월적 세계 혹은 초월적 존재가 부여하는 궁극의 목적으로부터 해방시켜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려는 것이다. 모든 사라진 순간은 되돌아온다. 그렇다면 삶의 목적은 어떠한 초월적인 것도 아닌 이 현생에서 다시 한 번 살고 싶을 정도로 사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에게 부여되는 가장 중요한 물음은 ‘지금 내가 행하는 것을 무수히 또 행하려 하는가?’이다. 이처럼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인간의 삶에 대한 최고의 긍정을 함축하며, 그러한 긍정을 통해 서구의 수동적 허무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성격을 지닌다.1) 이와 관련한 니체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가며,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시들어가며,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부러지며, 모든 것은 다시 이어진다. 똑같은 존재의 집이 영원히 지어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며, 모든 것은 다시 만나 인사를 나눈다. 존재의 바퀴는 이렇듯 영원히 자신에게 신실하다. 매 순간 존재는 시작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이 굴러간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영원이라는 오솔길은 굽어있다. 그대는 생성의 거대한 해라는 괴물의 존재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이 괴물은 모래시계처럼 늘 되돌려져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다시 출발하여 내달리기 위해.






극중에서 이러한 측면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주인공인 오두리(오말순)의 손자가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게 되는 장면에서이다. 다분히 진부하고 작위적이기는 하지만 영화는 극적 설정을 통해 하나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그녀의 손자는 Rh-라는 매우 희귀한 혈액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수혈이 필요한 상황에서 그에게 피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의 할머니인 그녀 뿐이고, 만일 손자에게 헌혈을 하게 되면 그녀는 50년이나 젊어진 자신의 육체를 포기하고 다시 늙은 육체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손자에게 피를 주기를 거부한다면 그녀는 계속해서 젊은 육체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한다면 자신의 손자가 위험에 처할 수는 있겠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한 번 더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계속 영위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영화의 본질적인 부분을 이루며,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에게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만약 당신이라면 저와 같은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 상황에서 그녀의 정체를 아는 두 사람이 그녀의 선택을 만류한다. 박영감의 경우에는 “쭈글쭈글한 늙은 몸이 뭐가 좋다고 돌아오느냐”고 말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아들의 대사가 매우 인상적이다. “제 아들은 제가 책임지고 살릴게요. 가세요. 그냥 가세요. 제발. 제발 가셔서, 남이 버린 시래기 주워 먹지 말고, 그 비린내 나는 생선장사 하지 말고, 자식 때문에.. 자식 때문에 아귀처럼 살지 말고, 명 짧은 남편 만나지 말고, 나처럼.. 나처럼 못난 아들도 낳지 마세요. 그러니 제발.. 제발 가세요..엄마.”

그리고 그런 아들의 만류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 난 다시 태어나도 하나도 다름 없이 똑같이 살란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도 다름없이 똑같이 살을란다. 그래야 내가 니 엄마고, 니가 내 자식일테니까.”

이러한 대사에서 나의 마음을 가장 자극한 것은 바로 ‘하나도 다름 없이’라는 대목이었다. 객관성의 눈으로, 세간의 눈으로 바라볼 때 결코 행복하고 편안한 삶이 아니었을 그러한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몇 번이나 그러한 삶을 살아내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의지는 진정한 주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만 가능한 것이고, 진실로 자신의 삶을 긍정함으로써 삶이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부여하고 강요하게 되는 허무주의를 극복해낸 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에 그것은 그녀라는 캐릭터가 삶에 대한 하나의 통찰을 이루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즉, 아무리 새로운 삶을 살아낸다고 하더라도 결국 돌아올 것은 돌아오게 마련이다. 50년이나 젊어진 생이라 하더라도 그저 미루어졌을 뿐 노년과 죽음이라는 것은 저 멀리에서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 선택이겠는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뭇 인간들에게 있어 어지간히 괜찮은 스스로의 생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불평만을 반복하며 좀 더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질투하는 나날을 보내는 경우에 있어 이와 같은 딜레마 상황에서의 결단은 적지 않은 시사를 주는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이고 어떻든 간에 그것은 나 자신의 인생이다. 그것을 부정하거나 긍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자신 뿐이라는 깨달음,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을 통해서 스스로의 생을 무한히 긍정하게 될 때 우리는 그러한 자신의 삶이 몇 번이든 반복되기를 희구할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 삶에서 만나온 무수한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6.영화의 한계

하지만 본 영화가 가진 그러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즉, 시나리오상 노인의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채택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50년 전 육체로의 회귀라는 장치를 핵심적인 모티브로 사용함으로써 관객들이 접하기로써는 노인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서사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고, 그런 결과로 결국 이 영화에서는 노인의 자아를 채택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서 더욱더 노인이라는 개념이 소외되고 있는 효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으로 나는 관찰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대중성’이라는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상업영화로서의 한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중년층과 청년층, 혹은 나아가 노년층까지 포섭하려 했던 시나리오의 의지가 간과했던 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엔딩 크레딧을 보고 진하게 남는 어머니와 자식 간의 대화를 곱씹다가 어느 순간에는 결국 무엇인가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을 바로 그러한 이유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영화를 다시 복기해보자, 분명 이 영화의 발단 단계에서 주인공인 오말순이 노년의 일상을 살아가면서 직면하게 되는 회의와 권태를 유발시키는 것은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가족들로부터의 소외였다. 여전히 그는 자신의 자손들을 사랑하는 인물이지만, 그녀가 그들을 사랑하는 방식을 그 사랑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은 곱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소통의 부재와 소외가 바로 문제의 본질 중의 하나임은 확실하다 할 것이다.

물론 영화는 영원회귀의 사상을 가져와서 그러한 의지를 가진 영혼의 소유자를 바로 오두리(오말순)으로 그려냄으로써 그녀가 그러한 소외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고통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소하고 극복해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의 이러한 노력은 부족하고 또 나아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측면이 있다는 생각에 천착하게 되었다.

첫째로, 다시 태어나도 똑같은 생을 살아냄으로써 똑같은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 손녀를 만나겠다는 그녀의 의지는 분명 그녀의 영혼을 구원할 것이며, 그러한 장면을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모종의 메시지를 얻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개인적인 해탈과 같은 것이 그 문제를 공유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문제의 해결과 더 나아가 모종의 구원과 같은 것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경험적으로 그와 같은 훈훈한 경험의 이후에도 여전히 문제들이 상존해 나가는 것을 숱하게 발견하고 또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깨달음은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물론 필요한 것이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러한 관계에 대한 고찰이고 관계에 대한 조율 혹은 수정이라 할 것인데, 이 영화에서는 며느리나 손녀나 아들과 같은 인물들의 관계 호전에 대한 노력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관계라는 것이 상호성을 본질로 한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영화가 보여주는 이와 같은 구도는 관계의 그러한 본질을 제대로 구현해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 이 영화에서는 노인이라는 존재를 끝까지 ‘베푸는 존재’로만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물론 훈훈한 장면이기는 하지만, 과연 그들 세대보다 훨씬 더 평화롭고 안락한 일상을 영위하는 우리가 우리의 노년 세대에게 그러한 헌신을 아직까지도 요구할 자격이 있는가?, 그것은 지나치게 잔인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가창력이라는 재능을 가진 오말순은 50년 전의 아름다운 육체로 돌아가서 가요 오디션에서 승승장구함으로써 스스로의 개성을 발휘하고 자아실현을 해나가지만 기실 그것은 노년으로서의 그녀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청춘으로서의 그녀가 행하는 일들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발상적 측면에 있어서 이 시대의 노년들이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만들만한 그 어떤 아이디어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노인들의 삶이라는 것은 좋은 날에 노인들의 카페에 모여 앉아 궁상을 떠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은가. 노년으로서의 오말순 역시도 그 중에 하나였고, 그녀가 그 공간을 벗어나서 좀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결국 50년 전의 육체를 얻어서 다시 청춘으로 돌아감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살펴볼 때 나는 이 영화가 노년 문제에 대한 어떤 해결이나 개선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파악하였고 나아가 그러한 문제들을 더욱더 극명하게 노정시키는 한편 또 한편으로는 악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7.맺는말

제법 신랄한 비판으로 말미를 장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이 영화는 볼만한 영화라는 데에 동의한다. 그래도 나름 신선한 발상이었고, 그러한 원초적 모티브가 진부하고 촌스럽게 변질되지 않도록 이것저것 세심한 정성이 깃들어졌다. 덕분에 관객으로서의 나는 제법 긴장을 풀고 쉼 없이 깔깔대며 웃을 수 있었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도 훌륭했다는 생가이다. 무엇보다 주연 배우인 심은경의 절정 연기는 참 굉장했다는 생각이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의 연기도 매우 안정적이었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태어난다면’, 혹은 ‘다시 젊어질 수 있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 있어서도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다.


-끝-


1) 『김병찬의 전공 도덕윤리 길라잡이1』, 김병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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