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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선천적 외로움(외로움에 대한 단상, 성경에서의 외로움)

by 통합메일 2014.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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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은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고 나아가 추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초기의 초라함은 그 주체가 문득 자각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그 폐해나 위험성이 그리 크지 않지만, 그런 자각에 의해 성장한 외로움의 경우 주체로 하여금 매우 추하게 변모할 수 있는 위험으로 그를 유도할 공산이 크다.


이를테면 그것은 마치 기생충과도 같은 것이다. 숙주를 자살하게 만드는 연가시와 같은 기생충처럼 말이다. 전염성이라는 개념은 이 경우에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기도 하는데, 이것은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잠복기가 매우 유동적인 것이 특징이다. 태초의 인간의 경우에는 이러한 외로움이 없을 것이라고 짐작이 가능하지만, 역사적으로는 태초의 인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외로움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주장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은 성경을 보면 역시 마찬가지로 짐작이 가능하다.


성경에서 다루어지는 최초의 외로움은 신이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 하와를 만드는 상황에서 발견된다. 신은 최초의 외로움은 시간이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 하와를 만드는 상황에서 발견된다. 신은 최초의 인간으로서의 아담을 창조한다. 하지만 그렇게 창조된 아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배필로서 여자인 하와를 창조한다.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사실 성경만 놓고 본다면 그 상황에서 아담이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하와를 창조한 이유로서 서술되는 것이라고는 그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선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는 발언의 근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감정적인 이유일지도 모르고, 번식을 위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노동력을 얻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태초의 아담에게 신은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풍요롭게 갖추어져 있는 에덴동산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태초의 하와가 원래는 출산을 할 수 없는, 정확히 말하면 출산이 필요없는 몸이었음을 기억한다면 그 창조의 목적이 종족번식을 위함이 아니었던 것도 자명해진다. 그녀가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지게된 것은 뱀의 꾐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서부터였기 때문이다.


<창세기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라 하시고>





그렇다면 신이 말한대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은 좋지 않다."는 주장의 이유로부터, 하와를 만든 까닭이 적어도 노동력 확보, 종족 번식, 출산 같은 것은 아님이 확실해진다 하겠다.


그렇다면 신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 이유는 아마도 외로움과 같은 감정적 문제였꺼나 아니면 그냥 신기 보기에 좋지 않았떤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나는 크리스찬이지만 성격을 진정한 인간의 역사로 본다기 보다는 그것이 작성될 당시의 사람들의 인간관이나 세계꽌 같은 것을 엿볼 수 있는 장치로 간주하고 있는바 그저 당시의 사람들 역시도 인간의 본질적 감정은 사랑이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외로움 역시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라고 짐작하는 정도에서 족하고자 한다.


하지만 진정 외로움이 선천적인 본성일까. 어쩌면 그것은 일종의 후천적인 질병과 같은 것으로 간주될 여지는 없는 것일까?


우리가 사랑이나 진정한 우정 따위를 경험하기 이전에 우리는 진정한 외로움을 몰랐던 것이, 몰라도 됐던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지금의 혹은 언젠가의 우리가 경험하고 경험하게 될 외로움이라는 것은 누군가와 진정 좋은 감정을 가지고 좋은 시간을 보냈던 일에 대한 대가가 아닐까.


그리하여 외로움의 본성이라는 것은 다시금 그런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공유하고 싶다는 억압된 의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런 의지가 실현되면 그에 따라 결국 또 그렇게 또 다시 외로움이 번식을, 전염을 해나가는 것이다. 사랑의 기억을 가지고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 하지만 앞서 말했듯 때로 그런 감정은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게 만드는 것이고, 나아가 추한 결과를 야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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