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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철학

내 편을 들어주는 남친을 선호하는 여성들을 이해해보기

by 통합메일 2012.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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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편 들어주는 남친을 선호하는 여성들을 이해해보기


얼마 전 한국경제 신문의 기사 중에 눈길을 끄는 제목이 있어 클릭을 했다. 기사의 제목은 ‘남친이 멋있어 보일 때는?’ 뭐 이런 뉘앙스였다. (해당 기사는 지금 다시 찾아보려 하니 신문사 홈페이지에서 삭제되어 있어서 다시 볼 수가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대한민국의 많은 남성들이 웹서핑 도중에 포털 사이트 메인에 뜬 그 기사의 제목을 눌렀으리라 생각한다. 이성이 선호하는 남성상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 하는 것은 대다수의 남성들에게 어찌할 수 없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남성상들이 나열됐는데, 그 치열한 접전 속에서 당당하게 1위를 차지한 것은 바로 ‘내 편 들어주는 남친’이었다. 즉 여성이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에 있어서 사건 자체에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남자친구가 일단은 자신의 편을 들어주기를 많은 여성들이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기사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새삼) 확인하면서 나는 조금은 씁쓸하거나 혹은 불편한 감정에 빠졌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옳고 그름의 정의를 무시하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정의가 존재한다는 전제에 동의하고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언제나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해서 정직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때문에 만약 어떤 갈등적인 상황에 있어서 그러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턱대고 여자친구의 입장을 옹호하기 보다는 사건의 사실관계를 파악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적인 도덕적/법적 잣대에 대입하여 그 옳고 그름을 가리려 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 보여주고 있는 많은 여성들의 마음속에는 남자친구가 그렇게 하기 보다는 ‘일단은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을 바라는 심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곳에 있는 불일치가 내가 느끼는 불편함의 원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통해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많은 여성들을 정의의 신념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비난하기보다는 나름의 탐구를 통하여 그녀들의 마음을 이해해보고 윤리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상당수의 여성들이 그러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심리에 나름의 정당성이 있을만한 개연성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정성에 대한 법적, 도덕적 관념은 서구문화의 남성 중심적이고 규범윤리에 치우친 관념에 근거한다는 비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선은 여성들이 그러한 욕구를 가지게 된 원인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나는 그 원인이 여성주의 진영에서 심심찮게 제기하는 역사 속에서 억압된 여성들의 지위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우선 생각한다. 즉 인류의 역사 속에서 물리적 약자라는 이유로 억압된 여성들의 지위는 어떤 갈등적인 상황에서 그녀들로 하여금 억울한 경험을 하도록 만들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문명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공정성을 강조하는 법적, 도덕적 관념이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할 위험을 과거에 비해서 다소 제거해 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러한 위험은 상존하며 여성들로 하여금 억울하고 불공평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경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과거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현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차별이 여성들에게 주어졌던바 그러한 경험들이 여성들로 하여금 어떤 불공평한 처우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갖게끔 만들었기 때문에 여성이라는 성적 위치 자체에 그러한 공포의 씨앗이 아주 깊숙이 심어졌을 것이라는 가정을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성장 과정에서 배우는 역사 속에서 자신과 동일한 성을 가진 이들이 겪은 차별적이고 억울한 일들을 대리경험하고 또한 자신의 삶 속에서 직접적으로 그런 차별과 불공평함을 경험함으로써 여성들은 아무리 이 사회가 공정성을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불공평한 상황이 가능하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자신을 믿어줄 수 있는 남성을 선호할 수밖에 없게 됐다는 말이다.

다음으로는 규범윤리학과 덕윤리 혹은 여성주의(배려윤리) 사이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관념은 공정성을 강조하는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러한 윤리적 사상은 크게 공리주의와 칸트의 의무주의로 나눠볼 수 있겠는데, 이들은 모두 규범윤리학에 속하며 그 특징은 윤리적 주체를 공평무사한 관망자로 상정하여 자신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사사로운 정념이나 사욕에 치우치지 않고 보편적인 정의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이를 윤리적인 인간으로 평가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윤리적 주체의 모습을 받아들이게 될 경우 도덕적 판단자는 여자친구가 처한 갈등적 상황에서 여자친구와 자신이 맺고 있는 특수한 관계는 일단 제쳐두고 이 상황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요소들을 종합하여 매우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규범윤리적 전통 중에서도 칸트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 콜버그라는 도덕교육학자다. 그는 ‘하인즈 딜레마’라는 가상의 상황에서 도덕적 판단자가 이성적으로 어떤 행위를 왜 선택하는가를 기준으로 도덕성의 발달 단계를 나누는 연구로 유명하다. 그 단계에 따르면 가장 높은 단계는 모든 인류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열반의 경지와도 가까운 도덕판단을 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사회 구성원들이 공정하게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판단, 그 다음은 사회의 규칙을 준수하는 판단, 그 다음으로는 타인의 호감을 구해서 그로부터 착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얻어낼 수 있는 판단, 서로의 이익만을 지향하는 판단, 처벌을 피하는 판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단계만 가지고 본다면 여성들이 원하는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남자친구의 경우 그는 여자친구에게 이익이 되거나 혹은 여자친구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 여자친구의 편을 들어주게 되기 때문에 높은 단계에 속했다고 하기는 힘들다. 만약 그게 높은 수준의 도덕적 추론을 하려면 그는 최소한 그 상황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요소를 파악해서 공정한 판단을 내려야만 한다.

이러한 콜버그의 이론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 바로 길리건이다. 규범윤리에 대응하는 ‘덕윤리’ 진영에 속해 있는 이 학자는 남성과 여성의 도덕성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낸다고 주장하면서 ‘돌봄의 윤리학(배려윤리)’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콜버그처럼 남녀의 도덕성을 하나의 단계 위계 속에서 서열 지을 수는 없고, 여성과 남성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도덕적 특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낸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길리건은 여성의 기본적인 도덕적 성향이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 즉 일반적인 인류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을 “돌보고” 그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주려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들의 욕구에 민감하기 때문에 여성은 “그들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어떤 상황을 판단할 때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1)

이러한 시각은 규범윤리의 근본적 전제에 노골적으로 대항하게 된다. 규범윤리는 모든 인류에 대해서 무사공평한 의무를 도덕적 행위자에게 부여한다. 때문에 가족이든 친구든 그러한 관계는 도덕적 판단을 함에 있어서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러한 특수관계를 고려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사욕을 추구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고, 규범윤리적 이론의 연장선에서 그것은 비도덕적인 행위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실제적 현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러한 규범윤리적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규범윤리학이 아무리 우리에게 그러한 공정함에 대한 의무를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의무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다시 말해 그런 윤리론은 현대 사회 속에서 한 구성원으로서의 우리의 윤리적 의무를 설명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동시에 우리가 속해 있는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특수한 관계를 고려하는 윤리적 상황에서는 부적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는 규범윤리가 아니라 덕윤리를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고, 앞서 언급한 길리건의 주장은 그런 덕윤리 진영에 포함된다.

정리하자면 현대 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윤리적 관념은 분명 규범윤리이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타인의 권리와 나의 권리가 충돌 없이 양립하기 위해 인류가 해온 노력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동시에 나의 권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다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 공정성의 관념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수한 관계에서는 이러한 윤리가 동등하게 적용되기 어려운 경우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바 그러한 상황에서는 그에 맞게 특수한 관계를 고려할 수 있는 덕윤리가 요청될 것이며, 이러한 덕윤리(돌봄의 윤리)의 맥락에서, 우리는 ‘내 편을 들어주는 것을 선호하는’ 여성들을 바라봄에 있어서 때에 따라서는 공정성의 이면에 존재하는 특수한 관계를 고려할 수 있는 또 다른 특수한 윤리적 판단기준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끝-



1) 『도덕철학의 기초』, 레이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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