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화제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어디선가 주워 듣기로 11월은 연예계에 꼭 한 번 피바람이 부는 달이라고 하던데요.
이번 사건을 보면 과연 그 말이 맞긴 맞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며칠 전 언론들은 일제히 토니안, 이수근, 탁재훈이 세 명의 연예인들이 불법도박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신나게 물어 뜯는 겁니다>
이에 대하여 제가 접할 수 있었는 반응은 두 가지 였는데요.
1.하나는 상당히 형식적이고 반사적인 반응으로 여겨지는 반응들, 즉 언론이 읽어주는 대중들의 반응으로서 이들 연예인들에 대한 분노와 실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그리고 또 하나는 근 몇 년의 트렌드에 맞게 이러한 보도를 정치권의 이슈를 덮기 위한 물타기 보도로 읽는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이런 분들의 경우에는 이슈가 되고 있는 연예인들에 대해 분노하는 대신 그것을 통해 덮으려고 추측되는 모종의 세력에 대한 분노를 더욱 증폭시키려 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이슈와 관련하여 저는 일전에 <연예인은 공인인가? 그들에 대한 엄격한 도덕적 기준은 온당한가?>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http://mskjh.tistory.com/209) 작성한지 꽤 오래돼서 당시에 어떤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작성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만 아무래도 신정환 사건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요. 그 글에서 저는 연예인은 전파라는 공공재를 사용하여 자신의 부와 권위를 추구해 온 존재들이라는 점을 근거로 하여 그들을 모종의 사회적 의무가 추가로 부여되는 '공인'으로 규정했고, 그런 논리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지는 모종의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정당화하고자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글은 그렇게 썼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감정들은 한 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뭐랄까.
이 문제는 단순히 그들에게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적용하는 것들 정당화 하는 일만 가지고 깔끔하게 재단하고 마무리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그것을 바라보는 저의 마음 속에는 늘 어떤 불편함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사회와 대중에 대한 불편함이 아닌가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사회와 대중이 가지고 있는 사회, 법, 도덕적 기준에 대한 불편함입니다.
그 불편함의 줄기를 더듬어 올라가면 그 끝에는 불공정함이라는 관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저는 요즘의 세태를 보면서 그 속에서 불공정함을 보고 있는 모양입니다.
문제의식은 이렇습니다.
연예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대중들이 보이는 반응을 고려하면 그들이 얼마간 시간이 흘러 다시 방송에 복귀했을 떄 대중들이 얼마나 쉽게 그들을 다시 받아주는 지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쉽게 말하면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쉽게 다시 받아줄 것 같았으면 애당초 그들에 대하여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리고 해야 했고,
처음부터 그들에게 호된 비난을 퍼부었다면 훗날 두고두고 그들이 그런 죄의 이름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도와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비판은 정치권에도 공히 적용됩니다.
뇌물수수나 선거법 위반으로 낙선하거나 직을 상실한 인물들이 상당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몇 년 뒤에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재기하는 인물들도 상당합니다.
그들 역시도 범죄 행위를 저질렀을 때는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어김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 봅니다.
-정이 많아 쉽게 끓고 쉽게 식는 대중의 근성
-우리 편이라는 인식 혹은 인물에 대한 호감에서 비롯되는 도덕적 용인
뭐 그런게 아닐까요.
무엇보다 언론의 책임이 지대하다고 생각됩니다.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그들의 과오를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질타하고 비난하고 물어 뜯는 것은 언론이고, 동시에 그들이 다시 복귀하는 것을 앞장 서서 길을 쓸고 닦아주는 것도 언론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대중들 또한 무턱대고 언론들만 탓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언론을 앞세우고 다시 우리들 앞으로 돌아와서 우리들의 공공재를 가지고 염치없이 다시 부와 권위를 추구해 나가는 그들을 용인하는 것은 결국 대중으로서의 우리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처럼 칸트의 철학이 빛나는 곳도 없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근대 독일 철학자 칸트는 의무주의 윤리학의 대표자입니다. 이 글과 관련하여 칸트의 형벌관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볼까 합니다. 칸트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본능적인 욕구와 욕망을 극복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존엄한 존재이며 그러한 이유로 오직 목적으로만 대우해야 하는 존재라고 규정합니다. 인간은 존엄하고 목적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존엄하게 대우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칸트의 시각에서 위와 같이 법과 도덕을 어긴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을 어떻게 대우하는 것이 옳을까요? 물론 존엄하게 대우하는 게 옳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우하는 게 존엄하게 대우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의 범법행위에 따라서 엄격하게 처벌하는 것입니다. 이상하지요? 존엄하게 대우한다면 좀 더 좋은 환경과 대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칸트에게 있어서 존엄하게 대우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에게 '잘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저지른 행위에 비례하여 그에게 대우해 주는 것입니다. 칸트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이라는 할 수 있는 것은 행위자의 도덕성에 비례하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가 행위한 도덕성에 맞추어 그를 대우해주는 것, 도덕성에 비례하는 행복을 그에게 제공하는 것이 바로 그를 가장 존엄하게 대우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살인을 한 사람이라면 사형에 처하는 게 맞는 거죠. 다만 그 이유가 그가 처지른 행위에 대한 보복의 의미라거나, 혹은 그를 죽임으로써 없는 사회적 안전 같은 사회적 효용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를 이성적이고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칸트의 생각은 작금의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파동을 일으킨다고 봅니다.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그에 합당한 형벌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사회를 상상하면 지금의 우리 사회가 너무나도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정치권에서 일어나는 어이없는 판결이나 징계 같은 것은 물론이고, 대중들 사이에서 거론되는 사회적 기준들도 진영논리에 갇혀 산산조각이 나있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상대편에게는 가혹하고, 내 편에게는 너그러우며, 내편도 상대편도 아닌 사람에게는 그냥저냥 너그럽습니다.
더블어 너무나도 많은 예외가 적용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미끄러운 경사길의 이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회적 기준이라고 하는 것은 미끄러운 경사길에 놓여있는 돌덩어리를 지탱하고 있는 버팀목과 같아서 한 번 예외를 허용하여 뒤로 물러나게 되면 돌덩어리가 움직여 가속도를 얻게 되고, 결국에는 또 다른 예외를 허용하는 일을 반복하여 끝내 그 돌을 지탱할 수 없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사실 이 이론은 안락사나 낙태와 같은 응용윤리에 대한 허용반대를 논증하는 데 주로 쓰이는 이론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그보다 더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이 사회를 게임에 빗대자면 룰에 너무나도 많은 예외가 적용된 나머지 그 게임이 너무나도 재미가 없어졌다는 느낌입니다.
<위장전입의 좋은 예>
하지만 사실 이 글에서 제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엄격한 도덕적/법적 기준으로 적용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지금의 상황에서 기대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요원한 그 무엇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 그 문제를 이야기할 수준에 이르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요즘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앞서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일관성'입니다. 기준을 엄격히 준수하고, 그 수준을 정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중잣대가 사회에 횡행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사회 속에서 스스로가 어떻게 판단될지 좀처럼 가늠할 수가 없어서 바깥 출입을 할 수가 없지 않나 하는 몽상에 사로 잡히곤 합니다. 물론 이중잣대라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옛 속담에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했듯이, 공자꼐서 아버지를 숨겨주는 아들이 효자라고 했듯이 매사에 철저하게 규준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인간은 우리 사회에서 차라리 비인간적이라고 평가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인 이상 그 안에 존재하는 구성원이라면 최소한 공정성을 추구하려는 '경향성'은 가져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른바 '자각'입니다. 이중잣대를 적용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이 이중잣대를 적용하고 있다'라는 사실은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혹자는 그러한 자각이 어떤 차이를 불러오겠냐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러한 자각이 사회변화의 본질이라고 봅니다. 알고 나쁜짓을 하는 것과 모르고 나쁜짓을 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알고 하는 나쁜짓이 더 나쁜짓일 수도 있지만 이 상황에서는 모르고 하는 나쁜짓이라고 그 어떤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고 한다고 해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라면 최소한 알고서 하는 것이 좀 더 개선의 여지가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행위를 반추하게 되는 상황이 올 때 스스로의 과오를 반성하는 것이 좀 더 용이하리라는 생각입니다.
사회전체가 이러한 자각을 통하여 보편타당성에 대한 경향성을 가지게 된다면 바로 그때 기준의 엄격한 적용을 논하는 일과 그러한 기준의 수준을 정하는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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