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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

영화 Father And Daughter를 보고

by 통합메일 2016.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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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Father And Daughter를 보고

(시간과 상상의 경계에 찍히는 발걸음)

 

마음이 텅 비어 숱하게 남자들을 갈아치우는 여자는 오늘도 술집에서 누군가를 만나 밤길을 걷는다. 밤 길, 밤 길.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을 길은 여자의 집 앞에서 끝이 난다. 여느 남자들과는 달리 그녀는 이번에는 라면 먹고 갈래?”를 시전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미래. “내일은 뭐해요?.”라는 말이 그들의 미래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

 

나는 상상을 해본다. 좋아하는 여자를. 그리고 그녀의 집 앞에서 돌아서서 나의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나는 그녀의 방을 알고, 그녀의 방에서부터 나의 집으로 오는 가장 좋은 루트를 알고 있다. 어두컴컴하다가도 때로 가로등 불빛이 짙어지기도 한다.

 

지금의 서술은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다. 동시에 어쩌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거나,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기도 하다. 하여간 문제가 되는 사건 A는 남자가 여자를 데려다주고 그녀의 방 앞에서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방을 향한 루트를 밟아나간다는 점이며, 이것은 마치 왈츠의 스텝을 추는 것과도 같은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있어서 그러한 사건 A를 바라보면 무수히 많은 시선이 돋아난다. 과거에 존재하는 나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그러한 일을 상상해내고 있는 것이고, 방문을 닫고 자신만의 공간으로 들어간 그녀는 시커먼 얼굴을 하고 있는 휴대폰을 힐끗 훔쳐본 뒤, 밤 거리에 찍히는 남자의 스텝이나 뒷모습 따위를 상상해보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실제로 그러한 스텝을 밟아 집으로 들어간 남자의 경우에도 여자가 생각할 자신의 스텝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사람들 모두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내가 상상해낸 이들이라는 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방으로 들어간 여자, 돌아가고 있는 남자, 돌아간 남자 중에서 사건 A에 가장 근접한 인물은 누구일까? 시간 적으로는 역시 지금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남자라고 하는 게 온당해 보이지만, 사실 여기서 말하는 사건 A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기보다는 각자의 마음속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떠오르게 되는 이미지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각각의 시점에서 생각하는 사건 A라는 것은 똑같을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애당초 물리적인 시공간을 가지고 접근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결국 정서적인 거리를 기준으로 생각해보게 되는 일인데, 정서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은 누구인가 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여자를 들여보내고 돌아가는 남자의 발걸음이 포함하며 내뿜고 있는 정서에 가장 깊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공감한다.’라는 행위의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선행 과제일 것이다.

 

내가 보기엔 해당 사건으로부터 얼마나 풍부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가장 문제가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역시 가장 깊게 공감하는 것은 방문을 닫고 들어간 여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여자는 해당 사건이 시작하는 시점까지 해당 사건을 구성하고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며, 이후로는 해당 사건으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남자와 함께 걸어온 길을 떠올리며, 이제는 남자가 혼자서 걸어가야만 하는 길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고, 적절한 정보를 가지고 가장 적당한 거리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가장 풍부한 공감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여기서 대상이 되는 사건이라는 것은 실제로 ㅇ리어난 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 태어난 심상인 것인바, 실제 사건과의 접근성 내지는 경험은 오히려 가상의 사건으로서의 사건 A에 몰입하게 만드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실제로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남자라든지, 그 길을 다 걸어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린 남자의 경우에는 오히려 몰입이 어려운 것이다. 결국 그들의 경우에도 지금 과거의 여기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다를 바 없이 그녀의 시점을 상상함으로써 이 사건에 몰입할 수밖에 없다. , 그렇다면 사건 A를 두고는 상황 속의 남자와, 그러한 상황을 가정하고 있는 나 사이에 별반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며, 그러한 사건을 통하여 지금 여기의 나와, 여자, 집으로 돌아간 남자가 하나로 맺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놓치고 있는 게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성이 가정하고 있는 상황 속에 존재하는 남성이다.

 

2016210일의 나는 미처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상황을 영화를 보며 만들어 냈다. 그 상황 속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으며, 여기서 문제가 되는 상황 A는 사실 여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 내가 주목하고 있는 그 상황의 감정적 특성이란 것은 이 남성에 대해 이 여성이 가지고 있는 애틋함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가상의 상황이 만들어지고, 그 가상의 상황 속에 존재하는 여자는 다시 한 번 가상의 상황을 만들어 거기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감정은 가상의 남성에 의하여 밤의 골목 여기저기에 발자국으로 찍힌다. 가상이 가상을 낳고, 그 가상은 또 다른 가상을 낳는다. 즐거운 일이다. 이따금 인간과 인간들이 만나서 장래의 꿈과 희망을 논하는 일이 즐거운 까닭과 같으리라. 알이 알을 낳고 그 알은 또 다른 알을 낳듯. 지금의 나 역시 누군가 그려준 하나의 상황이라면 그것도 참 재밌지 않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이 상황의 감정에 대해 가장 깊고 풍부하게 공감할 만한 사람은 여자가 상상하는 상황 속의 남자다. 자신의 박자가 아니라, 여자의 호흡에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고 있는 이 사람이야말로 이 상황에 가장 공감을 하고 있는 사람이며, 문제가 되는 상황의 감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러하다.

 

애틋해지는 일

 

지금의 나를 러버의 창작물로, 그 애틋함으로 인식하기

 

사랑하는 길이 아닌가.

 

나름대로 서둘러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느낌이 많이 쇠퇴해버렸다. 문득 나름대로의 현상학적 사고를 해냈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일이 그토록 어렵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알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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