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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기록

장남병에 대한 고찰: 자기연민의 또 다른 이름

by 통합메일 2021.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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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직장 어르신과 함께 저녁 식사할 일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장남병'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었다. 장남병이라니 뭔가 듣자마자 알 것 같으면서도 또 의미가 모호하게 다가오는 단어였기 때문에 우리는 장남병에 대해서 몇 가지 사례를 언급하고 또 맞장구도 치면서 그 의미를 명료화하며 개념에 다가갔다.

 

결론적으로 정리하자면..

 

장남이기 때문에 내가 마땅히 집안의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자기 강박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쉽게 간단히 말하면 자의식의 과잉이며, 과도한 책임감의 부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만 표현해버리면 이게 언제나 대단히 숭고하고 아름다운 태도라고 오해할 수 있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많은 경우 우리나라의 '장남'들은 그러한 삶의 무게를 온전히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거나 강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러한 짐을 짊어지려고 시도하다가 그게 안되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떠넘기는 모양새를 취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그 짐을 짊어지게 되는 건 일단 아내이고, 그 다음은 간접적으로 그 자식들이 피해를 떠안게 된다.

 

나는 이것이 일종의 자기연민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음.. 직장 어르신께서는 당신의 남편에 대해서 이야기하셨고, 나는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상대방의 남편은 삶의 무게를 어떻게 짊어지셨는지 궁금했지만,, 그것이 쉽게 정확히 표현될 수는 없기에 묻지 않았다. 나 역시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그 무게를 힘들어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나의 어머니와 자식들이 그에 대해서 수습해야 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위근우가 쓴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라는 책을 떠올리게 된다. 그 책에서 가장 마음 아프게 찔러들어오던 부분은 우리 나라의 가부장들과 가부장제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그 문제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모든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비겁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남자들의 문제점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비겁함이라는 것. 차라리 합리적이고 당당하게 이기적일 수 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덜 나쁜 게 될 것이다. 하지만 채 이기적이지도 못하고.. 비겁하게 문제를 회피하려고만 하다가 문제가 생긴다.

 

나는 장남병이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게 있을리 없지.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짐 앞에서 비겁하게 그것을 거부하지도 못한채 어정쩡하게 받아들인 뒤 그것은 다른 무고한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것은 정말 나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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