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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

[극단새벽] 연극 <두꺼비 집에는 여우가 살고 있다> 연극 감상문

by 통합메일 2014.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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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 집에는 여우가 살고 있다> 감상문

 

-충북 청주시 극단 새벽 둥둥연극제직장인연극교실 해보자’ <두꺼비 집에는 여우가 살고 있다> 감상문-

 

안녕하세요. 2014125일 토요일, 극단새벽의 직장인연극교실 해보자가 공연한 연극 <두꺼비 집에는 여우가 살고 있다.>를 관람한 관객입니다. 저는 평소에 , 언젠가 연극이라는 걸 한 번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살다 보니라는 핑계를 앞세운 채로 살다가 오늘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연극이라는 것을 구경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처음 관람하는 연극이니 만큼 그에 대하여 어떤 규준지향적 평가 내지 감상에는 무리가 있겠습니다만, 연극이라는 것을 직관한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새롭고 의미 있는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학창시절 국어 시간에 희곡 단원을 통해 연극이라는 것에 대해서 배우기는 하였으나, 글로 배운 것과 오감을 통해 경험한 것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았습니다. 무대 위에서 수많은 관객을 마주하는 배우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그렇게 용기 내어 열연하는 배우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 역시도 관객의 입장에서 쉽지는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내가 가진 공감의 능력에서 기인하는 현상일 것입니다.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배우를 보면서, 그의 눈빛과 전율, 혹은 그의 입에서 튀기는 침방울을 목격하면서 관객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배우의 눈을 통하여 극장을 관조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연극에 익숙해지면서 이제는 제법 편안하게 배우의 연기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관객은 그렇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배우와 함께 하나의 연극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굳이 익숙한 단어로 적자면 이른바 소통이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연극 감상문이랍시고 글을 시작했지만, 처음 접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연기의 경험도 없는 제가 감히 배우들이 생업의 틈새에서 갈고 닦은 연기에 대해 평할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구체화된 연극의 구조와 그것을 관통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우선 이 연극은 크게 두 가지 톱니바퀴로 설계되어 있는 듯합니다. 하나는 유령이 되어버린 고회장이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의미심장한 메시지 부분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밖의 다른 배우들이 보여주는 서사적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연극이 시작되고 관객들은 고회장의 유령을 마주하게 됩니다. “인생은 강 건너편에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와 같은 것이다. 돌아보면 개도 없고 소리도 없다.” 사채시장의 마왕, 사채시장의 염라대왕, 심지어는 사채시장의 라고 불린 그는 죽은 뒤에 그렇게 나름의 방식으로 인생이라는 것을 정의하면서 관객들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서사, 그것은 죽은 그의 자식들의 이야기입니다. 죽은 고회장은 막대한 유산을 남겼지만 그와 함께 숨겨둔 자식에게 유산의 20%를 물려준다는 유언도 함께 남겼습니다. 고회장의 삼남매에게 있어서 그러한 유언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에, 거기서부터 파생되는 갈등이 이 이야기에 역동성을 부여하게 됩니다. 그렇게 서서히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관객은 이야기의 공범이 됩니다. 대체 고회장이 숨겨둔 자식은 누구였을까? 자식이랍시고 나타난 그 청년은 정말 숨겨둔 자식이 맞을까? 이야기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까? 그런 궁금증을 갖게 되면서 관객들은 점점 연극에 몰입해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몰입은 고회장의 자식들이 각자 딴 생각을 품고 음모를 꾸미는 과정을 보면서 그들의 공범이 됨으로써 더욱 심화되어 갑니다. 물론 이러한 서사적 부분에도 나름의 메시지가 담겨있으며, 해학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서사의 중간 중간에 고회장의 유령이 등장하여 부지런히 관객들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환기시킵니다. 이런 식으로, 이 연극은 서사와 메시지의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저는 그렇게 보았습니다.

 

다음으로 이 연극이 보여주는 이야기에 대하여 제가 본 함의를 적어볼까 합니다. 앞서 적었듯이 이 이야기의 메시지 대부분은 죽은 고회장의 유령이 전해주는 듯합니다. “인생은 강 건너편에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와 같은 것이다. 돌아보면 개도 없고 소리도 없다.” 혹은 인생은 주는 인생과 빼앗기는 인생이 있다.”와 같은 대사를 통해서 고회장의 유령은 끊임없이 인생은 무엇인가?’라는 화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객들 앞에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인생에 대해 정의한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관객들이 생각하는 인생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연극에서 고회장이 생각하는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인생은 강 건너편에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와 같은 것이다. 돌아보면 개도 없고 소리도 없다.”를 보면 그는 인생에 대해 다분히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무슨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지만, 돌아보면 그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질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무 것도 아닌 존재>와 같은 형용 모순적 언명을 연상시킵니다. 인생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 그는 인생에 내재된 어떤 모순을 통찰한 것 같습니다. 죽어서 유령이 되어버린 그의 눈에 인생이란 분명히 그곳에 있었지만, 이제와 돌아보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고회장은 인생의 본질을 허무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있어서나 우리에게 있어서나 인생은 분명히 존재하던 실체에 다름 아닌 것이기 때문에 존재와 부존재라는 양립 불가능한 수사로 묘사되는 인생이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잉태하고 있는 모순을 어렴풋하게나마 직관함으로써 묘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비록 부도덕한 방법을 통해서였지만, 어쨌든 나름의 방법으로 성공을 이룬 그는 살아생전에 매우 성실하고 악착스러운 인간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죽을 때는 누구나 빈손으로 떠나기 때문에 생전의 그런 노력과 축적은 더 이상 연장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을 지극히 평등하게 만들어주는 일입니다. 생전에 괴롭고 비참한 삶을 산 누군가에게 있어서 그것은 가난과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고, 생전에 막대한 부와 명성 따위를 쌓은 누군가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 모든 노력이 무()로 돌아가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종의 응보관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심판적 응보관은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에서는 염라대왕 같이 사자(死者)를 심판하는 어떤 재판관이 등장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재판관과 그가 내리는 상벌 없이도 죽음이라는 사건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충분한 응보를 제공합니다. 이 연극이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삶을 살다가 죽느냐에 따라, 사후 세계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승이 다양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베푸는 삶을 살다간 이에게 있어서 사후세계에서 바라보는 이승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비춰질 것이고, 악착스럽게 살다간 이에게 있어서 사후세계에서 바라보는 이승은 다시는 소유할 수 없는 미련으로 비춰질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이야기는 응보적 생사관을 전제로 하는 듯합니다.

나아가 같은 맥락에서 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생사의 구도는 인생에 대한 해석학적 관점을 암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이 이야기의 가장 주요한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인생이라는 것은 산자와 죽은 자에 따라서, 그리고 어떤 삶을 살아냈느냐에 따라서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인 모양입니다.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비록 우리 모두 개인에 따라서 다양한 내용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인생이라는 것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동일한 것일진대, 그러한 인생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입장에 서고, 어떤 맥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지극히 상이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된다니 말입니다. 살아생전의 고회장과 이승에 남은 자식들처럼 산 자의 경우에는 여전히 인생은 욕망의 대상으로 비춰지게 되는 것이고, 죽기 전에는 그토록 욕망으로 똘똘 뭉쳐 살았던 고회장이었지만 유령이 되고난 이후에 그가 생에서 발견하는 것이라곤 그저 허무뿐이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런 인생은 우리가 살아 있느냐 혹은 죽어 있느냐에 따라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도 상이하게 다가옵니다. 극중에서 고회장은 스스로의 인생을 끊임없이 빼앗긴 삶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진술에 대해서 관객들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을 것입니다. 평생 동안 사채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착취해 온 그가 유령이 되어서 스스로의 삶을 그런 방식으로 정의내리는 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뻔뻔하다고 평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실로 뻔뻔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살아생전의 그는 철저한 가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그는 스스로를 철저하게 피해자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관객들이 느끼는 감정은 최근 들어 이슈가 되는, 이른바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것에 대해서 사회가 공감하는 분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캐릭터에 대해서 감정이입 해 본다면 그러한 고백은 유령이 된 그가 직면하게 된 극도의 허무와 절망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역할채택에는 역시 해석학적 발상의 전환이 요구됩니다.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시각에서 볼 때 그의 삶은 불쌍한 사람들의 고혈을 착취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철저히 빼앗는 인생이었지만, 그의 입장과 그의 맥락에서는 그런 악행의 대가로 스스로의 양심을 수없이 빼앗긴 인생이라고 정의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행의 합리화 혹은 정당화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그러한 도덕적 문제에 선결되는 것으로 간주될 여지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분명, 그의 삶은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자체적인 판결을 받을 것이고, 나아가 관객에 의해서 평가되는 것일 텝니다. 하지만 극 자체를 조명해 볼 때, 그리고 그 캐릭터의 존재에 천착해 볼 때 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그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후회할 여지가 분명하게 존재하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때론 진부하게 다가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반대로 쉽게 습관처럼 간과되는 측면이기도 합니다. 이 연극이 던지는 메시지는 그러한 습관적 사고를 반추하고 스스로, 혹은 인류 전반의 인생에 대해 고찰하는 계기를 찾는 인간에게 적지 않은 무게로 다가옵니다.


그렇게 자신의 생을 불행한 것으로 회고하는 고회장의 자식들이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사리사욕에 눈이 먼 채로 그의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관객들은 또 한 번의 모순을 마주하게 됩니다. 여기서 생각나는 단어는 답습입니다. 그 자식들은 아버지의 죽음에서 어떤 교훈도 느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에서 고회장의 죽음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는 캐릭터를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죽은 고회장의 생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의 회의를 더욱 깊게 만들 것입니다. 이러한 답습을 목도하면서 우리는 익숙한 답답함을 경험합니다. 인류는 대체 왜 이렇게 좀처럼 진보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러한 부질없는 욕망과 우둔함이 인간의 본질이라면 대관절 인류는 대체 왜 그 모양으로 존재하게 된 것일까요. 그리고 인생이란, 태초의 우리에게 있어서 무한의 미지로 선사되던, 그리고 그때부터 언제나 궁구의 대상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또렷한 형태로 다가오게 될 날을 기다리게 만들던 인생이란 어쩜 이렇게 모순으로 똘똘 뭉친 존재인 것일까요? 생을 살다보면, 이젠 어른이 된 것일까, 하고 자문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자문은 스스로의 인생이 얼마나 뚜렷해 졌는지, 그것이 품고 있는 모순이 얼마나 해소되었는지를 몰래 슬쩍 들여다보는 일일 것이고, 그 때마다 어김없이 저는 여전히 미지의 대상으로, 모순으로 남은 생을 확인합니다.


우리의 생처럼 연극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모순을 남겨둔 채로 막을 내렸습니다. 욕심쟁이 두꺼비들의 불화를 틈타 최후에 웃게 되는 것은 여우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여우들 역시 또 다른 두꺼비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모순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사이판에서 해후한 여우들은 반갑게 웃으며 잠시 생의 모순을 외면할 것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거울 속에 자신을 바라보는 두꺼비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문득 어디에선가 유령이 되어버린 고회장의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습니다. 그 목소리가 즐거운 것도, 행복한 것도 같습니다.

 

즐거운 연극이었습니다. 좋은 시간과 경험을 선사해주신 단원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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