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 독후감
이 문서는 김애란의 장편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2011, 창비)을 읽고 작성한 독후감이다. 한글 2010으로 작성되었으며, 한글맞춤법 검사를 실행했다.
1.작가 김애란 2.두근두근 내 인생 (1)구성 (2)줄거리 (3)나이를 먹는다는 것 (4)고통의 철저한 독자성 (5)부모-자식의 관계 (6)삶-누군가에게 슬픔이 된다는 것. (7)두근두근 내 인생, 두근두근 그 여름
|
1.작가 김애란
<2011년 6월 김애란> 이 책의 마지막에 붙은 <작가의 말>의 끝이다. 이 책은 2011년 6월 작가 김애란에 의해 완성된 그녀의 첫 장편소설이다.
내가 김애란이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 언제인가 하고 생각해본다. 역시 내가 대개의 작가들을 알게 되는 방식대로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이었다. 연수가 기억나지 않아 검색해 보니 2007년 제3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이다. 전경린 작가가 ‘천사는 여기 머문다’라는 글로 대상을 받았고 김애란 작가의 ‘침이 고인다’는 우수상 수상작으로 실렸다.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특이했지 않나 싶다. 이름도, 눈빛도, 외모도, 학력도, 작품의 제목도. 그야말로 스타 작가가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그대로 타고 나지 않았나 싶은 조건. 물론 나는 그것이 그녀가 모두 순전히 타고난 것만은 아님을 안다. 아니 안다기보다는 믿는다. 아니 믿는다기보다는... 모르겠다. (이리 보면 나는 아직도 천부와 노력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춘기 소년이다.)
여튼 중요한 것은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매우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입시학원 강사로 생활하는 초보 사회인인 주인공이 자신에게 신세를 지는 후배를 바라보며 마주하게 되는 갈등, 다양한 투사와 합리화 등의 방어기제의 다양함이 선사하는 그러한 생생함을 나는 그 작품에서 느낄 수 있었다.
다시 그녀의 작품을 만난 것은 이효석 문학상 수상 작품집의 대상 수상작으로 그녀의 소설 ‘칼자국’이 선정되었을 때였다. 그 즈음의 나는 도서관에서 이효석 문학상집들을 연이어서 빌려다 보고 있었는데 편혜영과 박민규 사이에 그녀가 끼어있었다. 그 연이은 세 명의 당선자들을 보면서 나는 퍽이나 잘 어울리는 삼인방이라는 생각을 했고 김애란은 그 3인 중에서 당연히 귀여운 막내 여동생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새롭게 만난 그녀의 소설은 무척 반가웠다. 좀 더 재치 있었고, 삶과 밀접했으며, 생에 대한 농밀한 고찰을 담고 있었다는 생각이며,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라는 것에 대한 그녀의 방향에 좀 더 일관성을 기해주는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다 내가 볼 때 그녀는 분명 누구보다 관계에 집중하는 작가였고 그 중에서도 가족관계, 그 중에서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무척 ‘소중하게’ 그려내는 이였다.
이후 찾아서 본 그녀의 단편집 『달려라 아비』와 『침이 고인다』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의 글에는 분명 그녀가 생각하는 가족, 부모, 관계에 대한 내용이 시각과 후각과 청각과 미각의 경로를 통해 각각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녀가 기억하고 또 꿈꾸며 어쩌면 실제로 맺고 있는 관계로서의 가족은 그녀의 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알면서도 모르는 보편성의 힘을 빌러 공감대를 형성하고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가족과 관계와 그 속의 자신을 발견하도록 만든다. 그런 것 같다. 그녀의 첫 장편을 읽고 쓰는 독후감에 앞서 보는 나는 아무래도 이렇게 그녀를 생각하고, 혹은 그녀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2.두근두근 내 인생
(1)구성
이 책은 주인공 소년이 자신의 삶을, 그리고 그 삶을 가능케 하는 사건인 부모님의 사랑 이야기를 주워듣고 또 상상하여 재구성되어 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초반에는 주인공이 재구성하는 부모님의 이야기와 현실의 주인공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구성으로 나아가다 나중에는 도중에 작중의 주인공이 쓰는 소설이 삭제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온전히 현실의 사건들에 천착하다가 다시 소설을 쓰게끔 만드는 사건이 생겨서 그 소설을 통하여 나름대로의 깊은 여운을 남기며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다. 소설 속에 도 하나의 소설을 만들어내서 그것을 구성의 장치로 훌륭하게 사용해냈으며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도중에 과감히 삭제까지 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신선한 시도였다. 특히 소설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고 할 수 있는 두 개의 또 다른 소설들은 그 장치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도 충분히 아름답고 또 적잖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누군가의 자식으로서, 삶의 과정에서 기억의 영역 바깥에 있는, 그래서 누군가 다른 사람, 주로는 부모의 기억에 의하여 그 존재 여부를 가늠할 수밖에 없는 부모님의 또 다른 삶을 상상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그 자체로 꽤 근사한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본다. 그런 근사함을 이 작가는 수려한 문체로 더욱더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각각의 소설이 작품에서 현실 세계와 맺는 관계의 고리가 다소 헐겁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두 번의 사건이 있는데 하나는 주인공이 부모님의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고는 심경에 변화를 맞이하여 지금가지 썼던 원고를 모두 지워버리는 부분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동갑내기 여자아이가 작가를 동경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녀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 다시 처음부터 작품의 마지막을 이룰 새로운 원고를 써나가게 된다는 부분이다. 물론 제법 개연성을 가지고 있는 내용이고 어쩌면 작가가 어떠한 상징을 주입하려는 시도를 한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가진 개연성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소재가 너무 쉽게 삭제되고 또 너무 쉽게 새로 쓰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첫 번째 소설의 경우에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소년이 적지 않은 시간을 들인 것이고, 그것은 소년의 죽음 뒤에 소년의 삶을 증명해주는 소중한 매개체가 될 것인데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소중한 것을 가볍게 지워버리는 것은, 그리고 지운 뒤에 소녀의 등장까지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은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라고 하겠다. 또한 서로의 꿈을 말하는 장면에서 이서하의 발언으로, 그리고 그녀의 집요한 물고 늘어짐으로 다시 새로운 소설이 쓰인다는 것은 일견 설득력이 있기는 하지만 작품의 중심흐름에서는 벗어났다는 생각, 그래서 그로 인하여 견고함을 상실하게 됐다는 생각이 든다.
(2)줄거리
아버지의 이름은 한대수, 어머니의 이름은 최미라다. 시골의 고등학생이고 동갑이다. 남자는 체육고등학교 학생이고, 여자는 인문계 여고생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방황해야만 하는 청춘에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된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봐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아무리 서둘러도 마음처럼 서둘러지지 않는 것, 그래서 그것은 운명이라 부를만한 것이었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그들은 처가살이로 신혼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공사장에 나갔고, 어머니는 태교와 집안일을 했다. 나는 상상한다. 어머니의 태중에 있는 나를. 그때의 자신이 경험했을 일들을. 경험하고 기억하지 못했을 일들을. 그리고 그때의 부모를 생각한다. 아직 자신이 존재하지 않아서 부모이자 자식이 아닌 온전한 자식으로서의 그들을. 그리고 마침내 내가 태어난다. ‘나’가 태어나는 장면은 뭇 생명들이 그렇듯이 뭔가가 터져 나오는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이제 그들은 누군가의 자식인 동시에 누군가의 부모가 되었다. 그들의 부모가 그러했듯이.
행복한 탄생이 이루어졌지만 불행하게도 세 살 때 주인공은 조로증 진단을 받게 된다. 치료방법이 없다는 병이었다. 화자의 시점인 17세까지 가족들은 병과의 치열한 다툼을 벌이게 된다. 물론 그 싸움의 한가운데에는 주인공인 ‘한아름’이 존재한다. 부모는 여기저기 손을 벌려 돈을 빌리고 그 돈으로 자식의 병원비를 감당하지만 입원치료를 앞두고는 더 이상 돈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소년의 결심으로 이웃돕기 방송에 출연하여 그들은 병원비를 충당할 수 있는 돈을 구할 수 있게 되었고 주인공은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게 된다. 무료한 병원생활에서 주인공 소년은 자신의 방송을 본 시청자들의 반응을 살피게 된다. 좋은 반응, 나쁜 반응, 엉뚱한 반응들이 있었다. 소년의 마음에 깊숙이 박히게 되는 반응은 방송국에 문의해서 알아낸 소년의 메일로 직접 날아든 한통의 편지였다. ‘이서하’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밝힌 그녀는 자신도 불치의 병을 앓고 있다고 말하며 소년에게 접근했다. 소년은 난생 처음 접하는 이성의 존재에 당황하며 자신을 보호하기에 급급했지만 상대방의 집요한 붙임성에 그만 마음의 문을 열고 그녀와 깊은 영혼의 교감을 이루게 되었다. 소년에게 그녀는 이성으로서도, 그리고 소울 메이트로서도 무척이나 큰 의미를 갖는 존재였다. 두 사람은 자기만의 비밀이라든지 사춘기에만 가능할 것 같은 생각들을 주고받으며 더욱더 깊은 관계로 발전해 나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연히 소년은 ‘이서하’라는 인물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36세의 남성 시나리오 작가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작품에 필요한 정보를 얻으려고 소년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어른들은 그 사실을 애써 숨기며 이서하가 중환자실에 들어가서 더 이상연락을 못하게 되었다고 둘러대지만 주인공은 이미 사건의 모든 내막을 알아차린 뒤였다. 그녀에게서는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고, 주인공도 더 이상 답장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이서하의 가면이라고 할 수 있는 그녀의 메일 계정을 향해서 ‘누구세요?’라고 메아리 없는 외침격의 메일을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실연의 아픔은 소년을 게임중독에 빠뜨렸다. 노인의 몸이 되어 거동조차 불편한 소년은 가상의 세계에서 마음껏 뛰어놀면서 또한 마음껏 현실을 부정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게임을 모두 클리어 했을 때 소년의 마음속에 쌓여있는 아픔은 꽃을 피우며 무너져 내렸다. 얼마 뒤 소년은 시력을 잃게 되고 이내 완벽한 어둠 속으로, 한층 더 깊은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완연한 겨울이 되었고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장 씨 할아버지가 다녀갔고, 이서하 본인이라고 추정되는 인물이 다녀갔다. 소년은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이서하의 마지막 편지를 받았으며, 마지막 답장을 보냈다. 이미 이서하라는 인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 사람의 교류는 마지막까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부모와 자식의 차례다. 이서하 때문에 다시 쓰기 시작한 부모에 대한 소설을 소년은 마침내 그의 부모에게 선물한다. 자신이 들었고 또 상상했던 것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부모의 이야기다.
(3)나이를 먹는다는 것
이 책의 프롤로그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여러 번의 역설적인 문장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은 <이것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다.>라는 문장 때문에 드는 느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고 생각하지만 나중에는 이 작품에서 나루고 있는 ‘조로증’이라는 소재 때문임을 알게 된다. 그 병은 이 소설에 일종의 숙명을 부여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이’라는 관념을 객관적인 나이와 주관적인 나이로 구분해서 그것을 좀 더 제대로 관찰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실험도구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위의 저 문장은 얼핏 보기에는 조로증으로 인해 부모보다 늙어버린 소년의 육체적, 객관적 나이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말로 주관적인 나이도 자식이 부모보다 많은 경우가 존재하지 않는가?’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이래저래 쉽게 읽고 던져버릴 수 없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은 시제가 작중 화자의 현재로 돌아온 이후에도 주인공의 병명을 한참 숨긴다. 아무래도 그 역시 하나의 장치로 사용할 생각이었을 텐데, 방송 내레이션을 통해서 ‘조로증’이라는 병명이 처음으로 등장하기 전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통해서 주인공의 병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내가 먹은 나이 속엔 겹겹의 풍부한 주름과 부피가 없었다. 나의 늙은 텅 빈 노화였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오래 산 사람들의 인생이 궁금했다.1)’ 그리고 이 부분은 병을 암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주관적 나이와 객관적 나이의 존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늙어간다. 늙어가고 늙으면 어느새 누군가의 젊음에 의해서 천천히 잔인하게 잊혀지기 시작한다. 나이의 부재가 나이의 존재를 압도하는 것이다. 아니 사실은 가만히 있는 나이의 부재 앞에서 나이의 존재가 수시로 그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런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나이/늙음을 혐오하고 두려워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쉼 없이 나이를 먹어간다. 하지만 똑같이 나이를 먹어도 사실 객관적인 나이와 주관적인 나이가 일치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흔히 말하는 ‘나잇값을 한다.’는 것인데, 누구나 안ㄴ 말이지만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말이기도 하다. 여기에 어떤 가치를 부여해야 할까. 여기에서는 가치판단을 하기 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 그렇게 그런 ‘나이의 불일치’를 하나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직시’라는 게 나을 것 같다. 어차피 누구나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태도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니까 말이다.
작중에서 그러한 불일치의 대명서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장 씨 할아버지’다. 줄거리에서는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그는 90먹은 아버지(큰 장 씨 할아버지) 앞에서는 언제나 어린애가 되고, 주인공 소년과는 좋은 친구 사이가 되는 60살 먹은 할아버지다. 아마 그가 자신의 나잇값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그는 소년과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거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나이의 불일치라는 것이 이 소년과 노인 사이에 기묘한 관계를 형성해주었다. 어느 소설에서든 주인공은 대개 한 명 정도는 좋은 친구를 곁에 두는데 이 소설에서는 이런 방식이다.
물론 모든 것은 소년이 ‘몸이 나이를 먹는 병’에 걸려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몸이 늙는 만큼 소년의 마음도 조금은 나이를 더 먹었다. 그리하여 각각의 나이에 허용되는 오차 범위 내에서 소년은 장 씨 할아버지와 친구가 될 수 있었고, 그 부모와의 세대차이도 극복할 수 있었다. (하긴 원체 나이차이가 적게 나는 부모-자식 간이었다.) 그리하여 작가는 작품의 첫머리에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이라고 적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왜 소년은 그토록 빨리 나이를 먹어야 하는 것일까. 이 점에 대해서는 언젠가는 결국 가치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이래저래 다양한 핑계로 긍정하려고 해봤자 그것은 역시 가혹한 현실에 다름 아니다. 작품에서 기대만큼 조숙하지 못한 소년의 마음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데 그것은 작가의 이러한 염두가 아닌가 싶다. 아무리 조숙해도 애는 애라는 것. 결국 마지막에는 자신의 나이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 장 씨 할아버지 말대로 “나이란 건 말이야. 진짜 한 번 제대로 먹어봐야 느껴볼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객관과 주관의 사이 어딘가에 존재할 우리의 진짜 나이라는 것이 아닐까.
(4)고통의 철저한 독자성
이 작품은 또한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도 성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방송국과의 인터뷰 장면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치료 받으면서 드는 생각에 대한 작가의 질문에 소년은 혼자라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p.96에 소년의 생각이 나온다. ‘세상에 육체적인 고통만큼 독자적인 것도 없다는 거였다. 그것은 누군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누구와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는 말을 잘 믿지 않는 편이다. 적어도 마음이 아프다면 살아있어야 하니까.’
나도 한 번 정도는 이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특성에 대해서 ‘존재와 존재 간의 간격’이라는 내 나름대로의 용어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다른 인간의 감각을 공유할 수 없다는 특질로 인하여 이간이라는 존재들 사이에 존재하게 되는 좁혀지지 않는 간격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들어낸 이 간격이라는 개념은 비단 육체적인 것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시작은 육체적인 것이었으나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정신적인 간격이 더욱더 무서운 것이었다고 하겠다.
작중의 주인공 역시 결국에는 정신적인 고통에 처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가 오직 그것일 수밖에 없음을 직시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 안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누구도 누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인간은 역설적으로 한없이 외로워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신 앞에 선 단독자’와 ‘던져진 현존재’로서의 자기를 인식하는 순간이다. 정신적 동료라고 생각되는 인물의 배신을 통해 겪는 고통이 그런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인간은 진정한 실존으로 첫 번째 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 그 역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역설이 아닌가 한다.
(5)부모-자식의 관계
『달려라 아비』나 『칼자국』에 등장하는 그녀의 아버지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대개 무능한 존재로 그려지고 자신의 소년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여 화자에게는 애증의 대상으로, 심할 때는 희화적이거나 한심한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아버지들은 작가로서의 그녀가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는 무척 중요한 소재라고 생각되며 그래서 나는 그들을 볼 때마다 그녀가 그 아버지들에게 가지고 있을 단순하지 못한 감정들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이 작품에서도 아버지라는 존재는 어김없이 무능하다. 그리고 김애란의 능청스러운 말투는 더욱더 빛이 나는 것 같다. 굳이 말하자면 견고해진 능청이랄까.
그녀가 그리는 어머니 또한 이 작품에서는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보통 무능한 남편 탓에 자식들을 키워내느라 억척스러움을 피해가지 못하는 여장부의 이미지가 강했다. 본 작품에서는 전작들에 비해서 그런 억척스러움이 덜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연애기라든가 신혼초의 두 사람을 보면 예의 그런 어머니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인상이다.
그리하여 김애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녀가 자신의 가족, 특히 자신의 부모에 대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감정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었고, 이번 작품을 마주하면서 그녀가 자신의 그런 감정을 어떤 식으로 발전시켰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예전의 작품들이 이미 존재하는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관찰하는 시도였다면 『두근두근 내 인생』이라는 책에서는 부모-자식의 관계의 보다 근본적인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 관계가 성립하는 과정을 추적하고 또 그것의 의도와 의미를 풍부하게 고민하는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실로 이 작품의 가장 중심적인 의도를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이 부모-자식의 관계 속에 포함된 모든 의미를 밝히려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책에서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대해 한번 쯤 시선을 멈춰놓고 곰곰이 생각에 빠지게 하는 구절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리고 가장 근원적인 문제의식이라고 한다면 바로 p.77 쯤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부모는 왜 아무리 어려도 부모의 얼굴을 가질까? 자식은 왜 아무리 늙어도 자식의 얼굴을 가질까?”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바로 이러한 질문들이 이 작품을 씀에 있어서 작가의 주된 문제의식이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바로 다름 아닌 부모와 자식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이에 대하여 작가는 나름의 대답을 내놓는다.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부모가 됨으로써 한 번 더 자식이 되는 것. 사람들이 자식을 낳는 이유는 그 때문이지 않을까?”
이와 관련해서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삶을 대신 기억해주는 이들과의 관계. 나는 그것을 “서로에게 기억을 빚지고 살아가는 관계”라고 정의한 바 있다. 자식이 어릴 때는 부모가 대신 기억해 주고, 부모가 늙어 치매에 걸리거나,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는 부모가 대신 기억해주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아무래도 효심이 발동했는지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서 제일 웃기는 자식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식’이라는 단어는 ‘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들/딸’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부모에게 언제나 웃음을 드릴 수 있는 자식이 되는 것. 작품의 주인공은 그것을 희망했다. 이런 발상은 나에게 ‘최고의 효도는 절대 철들지 않는 것이다.’라는 명제로 간직되어 있다. 자칫 정말 철없는 생각으로 전락해버릴 것 같은 말이지만 그 이면에는 자식으로서의 우리가 부모에게 갚을 수 있는 은혜라는 것이 얼마나 한정되어 있는가 하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하여 자식이 부모를 가장 기쁘게 하는 순간을 생각해보니 역시 태어나는 순간이지 않은가 싶은 것이고, 최대한 어릴 적의 모습을 간직하는 철부지가 되는 것, 다시 말해 부모 앞에서는 언제나 철저히 자식이 되는 것이 가장 큰 효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고, 지금 새롭게 생각하기로는 손자를 보여드리는 것은 또 어떤가 한다. 자식의 자식은 또 어떻게 다가오는 것일지. 혹 어쩌면 자식을 낳아버린 자식은 다시는 온전한 자식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부모-자식의 관계’에 연관되는 인상 깊은 구절은 다음의 것들이다.
p.31-그 뒤로도 어머니는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긍정과 부정 사이를 오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촉촉하고 어두운 공간 속에서 내 몸은 자꾸 자라났다. 주위에선 쉴 새 없이 쿵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귀가 아닌 온몸으로 들었다. 그러고 지하벙커에서 모스부호의 해독에 열중하는 병사처럼 내 주위를 감싸는 그 떨림의 실체를 파악하려 애썼다. 그리고 그 암호는 다음과 같았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두근두근’
p.36-“얘가 우릴 좋아할까.”
p.45-많이 기다리고 기대하셨을 텐데 초면에 너무 더러워서 송구할 지경이었다.
p.48-‘아버지도 이제 다 컸구나.’ 하는 대견한 생각이 들었다.
(6)삶-누군가에게 슬픔이 된다는 것.
이 책의 표지에는 제목 이외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글씨로 쓰인 글귀가 있다.
‘미안해하지마.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뻐.’
대충 이런 문장인데 이것은 p.50에 아버지가 소년에게 한 말을 말투를 좀 바꿔서 옮겨놓은 것이다. 이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너는 자라서 꼭 누군가의 슬픔이 되렴. 그리고 마음이 아플 땐 반드시 아이처럼 울어라.”
아무래도 지금까지 범주를 나누어 정리한 내용들의 나머지 것들, 좀처럼 어떤 범주로 묶어내기 쉽지 않은 것들을 나는 ‘삶’이라는 이름으로 둘러 묶어야 할 것 같다. 대개의 소설들은 다름 아닌 우리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삶이라는 것은 실로 많은 것을 묶을 수 있는바 이런 애매한 경우에는 참으로 유용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삶 속의 슬픔에 주목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글은 어차피 새드엔딩이 예약된 글이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어쩌면 누군가의 슬픔이 된다는 것. 그리고 때로는 아이와 상관없이 아이처럼 우는 일이라는 것. 작가는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유한한 자가 무한을 꿈꾸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작가는 매우 재미있는 전환을 선보인다.
“완전한 존재가 어떻게 불완전한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지 그건 정말 어려운 일 같거든요. 그래서 기도를 못했어요. 이해하실 수 없을 것 같아서.”
이 부분은 유한-무한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는 듯하다. 보통의 생각이라면 유한자가 무한자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보는데 작가는 바대로다. 모든 것을 가진 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는 오히려 그 때문에 유한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능력의 존재가 오히려 능력의 부존재를 이해하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물론 무한자가 유한자를 이해하는 행위 자체를 하나의 능력으로 치환한다면 쉽게 풀려버리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유한한 인간의 존재이기에 가능한 것이 있다는 결론을 가능하게 하는 이러한 시도는 매우 의미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쩌자고 인간은 그렇게 이해를 바라는 존재로 태어나버리게 된 걸까?”
앞서 말했듯이 철저한 육체의 단절로 인해 인간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간격’을 마주하고 있고, 신에게마저 이해를 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하지만 그토록 인해를 바라는 존재로 태어나버린 인간.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을 것이다. 실존주의에 입각하여 존재를 초월한 독립을 수행하거나, 다른 인간의 이해를 구하는 것. 앞서 나는 ‘존재와 존재 사이의 간격’이라는 것이 비단 육체의 영역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정신적 영역에서 더 잔인하게 노정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육체와는 달리 정신은 ‘공감’이라는 통로를 이용해서 이해를 추구할 수 있다. 물론 완벽한 이해해 도달할 수는 없고, 자칫 잘못하면 가혹한 ‘간격’에 직면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이해를 기대해볼 수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러한 인간의 처지에 주목한 거라고 보인다.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이해되기를 기대하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그에게 슬픔이 되는 것, 그리고 결국 언제고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것. 이 책에 그려진 인간 삶의 커다란 모습이 아닌가.
(7)두근두근 내 인생, 두근두근 그 여름
지금까지 내가 이 소설에서 발견한 이야깃거리들을 나열해 보았다. 나이를 먹는 것, 고통의 독자성, 부모-자식의 관계, 삶 같은 것들이었다. 이 책이 가진 장점 중의 하나는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 같이 진한 생생함을 선사하는 김애란 특유의 실제성이고 그와 함께 위에서 언급한 소재들이 뚝뚝 끊기거나 따로 놀지 않고 잘 섞여서 하나의 글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고 한 나머지 출생 이후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좀 김애란 답지 않게 평이해져버린 느낌도 있다. 특히 후반부는 차라리 신경숙 작가가 썼으면 눈물 콧물이라고 제대로 뺐을 텐데 싶기도 했다. ‘남자아이의 화자는 김애란에게는 영 아닌가? 역시 김애란은 여성 자아가 너무 강해서 여성 화자가 제격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부모가 극단적으로 무능하거나 억척스럽지 않아서 김애란스러움이 덜하다는 생각도 들기도 했지만 저 많은 생각들을 하나의 글 속에서 맛있게 요리해낸 점만큼은 확실하다 생각한다.
결국 정리를 한다면 ‘삶이란 두 사람의 사랑을 시작으로 그들의 자식이 되고, 또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 나이를 먹고 평생 그렇게 부모인 동시에 자식의 얼굴을 하며 살아가다가 누군가를 이해하고 누군가의 슬픔이 되며 어린애처럼 우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겨우겨우 한 문장이 될 수 있는 많은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두근두근 그 여름>이 가장 마지막에 실린 것을 보니 니체의 영원회귀가 생각났다. 나는 커서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말하던 아이. 부모의 마음을 고토록 알고 싶어 하던 자식에 대한 이야기. 끝인 것 같지만 끝은 아니다. ‘생이여 다시 한 번!’이라고 말하겠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어, 귀를 기울이면 어디에선가 변함없이 내 어머니의 두근두근 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린다. 실로 두근두근 내 인생이다.
-끝-
1) p.53
'책을 읽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독후감 (0) | 2012.05.04 |
---|---|
무중력 증후군 독후감 (0) | 2012.04.19 |
박민규의 「핑퐁」을 읽고 (0) | 2011.01.15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0) | 2010.11.27 |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고 (0) | 2010.09.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