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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by 통합메일 2010.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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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1.서론

이 시대의 작가로 거론되는 박민규가 2009년에 쓴 장편소설이다.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발견한 것은 동생의 책꽂이에서였다. 역시나, 현대 순수문학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됐던 아이였기에 적잖이 의외이기도 하였으나. 알고 보면 이래저래 박민규라는 작가의 장편을 ‘모으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여튼, 개인적으로는 적잖은 기대와 일종의 긴장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정의하듯 그리고 나 스스로 조차도 정의하듯, 나는 실로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아름답지 않은 것을 미워하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나는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을 가리켜 아름답다고 하지는 않는 사람이었고, 내가 전해들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외모지상주의에 대해 일침을 가하고 있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나는 과연 이 책이 나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그렇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책을 읽어나가는 내내 계속 품고 수시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어본 결과, 과연 많은 사람들의 말대로 이 책은 추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책이며, 외모지상주의에 대하여 일종의 자기 의견을 표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책의 끝까지 읽어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누구나 이 책은 단순히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책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순수하게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젊은이들의 사랑얘기라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까 싶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부수적으로 이 책의 장점들을 언급하자면 우선 박민규 특유의 문체를 들수 있겠다. 읽는 이를 아찔하게까지 만드는 그의 메타포는 실로 그의 글에 그만의 특색을 부여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박민규를 찾게 만드는 마력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의 구성을 큰 장점으로 들겠다. 이 책에는 실로 두 개 혹은 세 개의 이야기가 들어있다고 할 수 있겠다. 요슈타인가아더가 쓴 ‘소피의 세계’라는 책에 나오는 소피라는 주인공이 겪는 모든 이야기가 실은 ‘힐데’라는 소녀의 아빠가 자신의 딸에게 선물하기 위해 쓴 소설의 내용이었던 것처럼,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은 실은 이 책의 또 다른 저자가 쓴것이고 그 이야기는 현실과 가상이라는 절벽에 양 다리를 걸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이야기를 쓴 ‘요한’이라는 인물 역시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현실에서 박민규라는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구성으로 인하여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점점 더 희미해져가는 것이고, 나아가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도 누군가 인간을 초월한 존재의 손에 의하여 차분하게 혹은 격정적으로 쓰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들게 만든다. 이야기의 후반부가 책의 가장 첫페이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것도 어쩌면 그런 효과를 위한 장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또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삶에 대한, 사랑에 대한 사색은 결국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며 우리를 계속 끊임없이 살아가게 하고 생각하게 해준다. 나는 그렇게 이 책을 읽었다고, 생각한다.

 

 

 

2.추녀(절대적 아름다움과 상대적 아름다움)

작가 스스로도 강조했듯, 어쩌면 이 책은 처음이자 혹은 마지막으로 추녀가 주인공인 소설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것이 책을 읽는 내내 ‘그녀’가 ‘나’에게 속삭이는 분홍색의 글씨를 볼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나도 모르게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이미지가 형성되어 가는 것이고, 나는 차마 그것의 형성을 내 힘으로도, 나의 생각으로, 내가 가진 모든 이성과 관념으로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지난 나의 삶을 통틀어 내가 접한 혹은 내가 만들어낸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위치에는 언제나 아름다운 미녀가 ‘어쩔 수 없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잔인하게 증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굉장히 신선하면서도 위험한 시도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과 하지 않은 일에는 언제나 그 두 가지가 반갑게 혹은 아찔하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더욱 더 강조하고 싶은 위험이 있다면 사람들이 오직 그것에 대해서만 기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나에게 이 책을 건네면서 동생이 했던 말 역시도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일침’이 아니었던가. 또한 비슷한 관점에서 비판을 가하자면 작가가 만들어내고자 했던 것은 ‘절대적으로 추한 여자’였지만 기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만들어진 것은 ‘상대적으로 추한 여자’가 아닌가? 정말로 절대적으로 추한 여자였더라면, 이야기와 같이 남녀가 맺어질 수 있었을 것인가? 어쩌면 주인공이 처음으로 그녀를 봤을 때 느낀 감정은 ‘못 생김’ 때문이 아니라 ‘내 취향’이기 때문은 아닌가? 아니면 혹은 단순히 어머니를 버리고 간 잘난 아버지에 대한 반동형성은 아닌 것인가?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소설에 던지기에 그리 좋은 비판은 아닌 듯 싶다.

그리고 또 여자아이가 소녀를 거쳐 여자가 되어가면서 자기 자신을 여자로 납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시기가 삶에 있어서 누구나 다 존재한다는 것을 고찰한 점을 탄복해마지 않아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무엇인가 지금 현실을 조명하기에는 그 빛이 약간의 핀트가 어긋나는 듯한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과연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못생긴 여자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인가? ‘외모지상주의자들은 반성하라’는 것일까? 내가 느끼는 이 괴리감은 이 글의 배경이 되는 1980년도와 2010년 사이 만큼의 거리일까. 모르겠다. 실로 시대가 변하여 이제는 더 이상 책에서 말하는 1980년대처럼 대놓고 추녀에게 그런 폭언을 내뱉거나 상처를 주거나 하는 등의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면 이 책이 던지는 의미는 그만큼 한정되기 때문에 나는 그저 이 감정의 원인이 단순한 시간적 괴리감이 아니길 바랄뿐이다.

일단은 이러이러한 이야기들이 전개되는 대목에서 작가기 이루어낸 것은 ‘외모’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자격’의 상관관계를 절단해낸 것이라고 해두고자 한다. 다만 ‘외모’와 ‘비난의 대상’의 관계에 대해서는 과연 애초에 그 사이에 연관관계가 있는가? 현실을 너무 비화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적어둔다.

 

3.아름다움에 대한 인류의 집착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또 반대로 좋아하면 좋은데 그렇게 반대로 좋아해주는 경우보다는 그냥 일방적으로 좋아하고 마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지 싶다. 작가는 이러한 관계에서 일종의 규칙성을 찾아낸다. 그것은 바로 ‘부러움’과 ‘부끄러움’이다.

작가도 언급하고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실로 인간은 ‘아름다움’을 사랑해마지않은 존재이다. 그것은 ‘집착’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 아름다움을 위해 수 많은 조각상들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고, 황금률이라는 것도 만들어 냈으며, 알게 모르게 조금씩 문명의 박동과 박자를 맞추어 인류의 기억 속에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을 조각하고 새겨왔다.

누가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도 조각한 자는 없지만 실로 모두의 머릿속에는 그러한 관념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관념의 정체도 모르고 태어나자마자 사물을 분간하고 좋음과 싫음의 구분이 가능하게 되자마자 마음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분을 끊임없이 쉬지 않고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양한 존재들에 적용이 가능하다. 가구나, 가전제품, 학용품, 집, 땅, 자동차 등 특히나 디자인이 중요시되는 현대사회가 발전해 나갈수록 이런 경향성은 더욱 심화되는 듯 하고 앞으로도 그런 경향에는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판단기준의 잣대가 비판 사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로까지 확장되고 있고 이미 충분히 확장되어 있다는 것이 되겠다. 아름다움을 가지고 인간은 구분하는 역사는 ‘이제와서 왜 이러신대?’하는 대답을 들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우리가 어릴 때 접한 동화에만 봐도 다 아름다움과 추함을 가지고 선과 악을 나누지 않았던가. 어릴적부터 우리가 접해온 이러한 인류의 문화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래도 혹시 나중에는 주인공이 예뻐진다거나 하지는 않을까 하는 스스로도 기분 나쁜 기대를 하게 만드는 가공할만한 힘을 가진듯했다.

여러 가지가 혼동되어 있기에 나로서는 그 많은 것들을 제대로 말할 수 가 없지만, 분명히 이 책은 이것은 확실히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예쁘고 못생긴 것으로 선과 악을 결정할 수는 없다”라고 말이다. 기실 별것 아닌 것 같고 이미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 같지만 과연 그러한가?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봐야 한다. 어쩌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 역사가 순환의 궤도상에 있듯. 어쩌면 다시 그러한 관념이 우리를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는가.

 

4.아름다움과 사랑

앞서 내가 작가의 부끄러움과 부러움에 대한 통찰력을 이야기 했다면 이번에는 사랑을 어떻게 봤는지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우려했던 것들 중에 하나는 혹시나 ‘실은 마음이 예쁜 사람이 정말 아름다운 사람입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끝나버려서 결국 진부한 설교로 돌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교과서나 설교문이라면 몰라도 현대순수문학이라는 것은 ‘진부함’이라는 장애물을 교묘하게 피해나가야 하는 하지만 때로는 그냥 밀고 나가야하기도 하는 숙명을 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다행히도 그것은 기우에 그쳤고 작가도 그런 점을 염려했는지 ‘마음이 예쁜’ 따위의 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어느새 나의 머릿속에서 다시 예쁜 얼굴의 예쁜 목소리의 여자의 모습으로 변해있는 그녀의 심상을 발견하고는 놀라움이나 나 자신에 대한 분노를 경험할 수 있었다. 실로 이처럼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관념으로부터 자유롭기가 힘겹다.

앞서 얘기 했지만 나는 이 책을 ‘외모지상주의자들에 대한 일침’이라고 정의내리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저 ‘현실적인,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외모지상주의니 관념이니 하는 말을 집어넣는다면 순수한 이들의 사랑이 자칫 훼손될 위험이 너무나도 농후하기 때문이리라. 그냥, 서로의 상처를 맞추어가며 하나가 되어 가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어떨까.

 

5.눈부신 기적, 그리고 그 평범함.

그래서 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연예인 같은 사람들이 빛나 보이는 이유는 사실은 그 사람이 빛을 내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좋아하고 부러워하고 결국 자신은 부끄러워하는 이들의 자신의 빛으로 그 한사람을 밝혀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기 빛이 나는 거라고. 하지만 두 사람 서로가 그렇게 서로를 비추어주며 빛날 수 있다고. 그것은 기적이라고 한다. 작가가 발견해낸 하나의 기적. 그 철저한 평범함. 그래서 더욱 기적이 되는 것이겠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다른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인생에 그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역시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부러워하고 보듬으면서 ‘사랑’이라는 것을 해나간다. 객관적인 현실의 시선으로 볼 때는 그것이 아무리 두 사람이 다 평형이 맞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도저히 그들의 시선으로는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런 누군가들은 그렇게 아무 거리낌없이 신경 쓰지 않고 자신들만이 세상에서 자신들만의 빛을 낸다. 그리고 그 빛은 한 없이 아름답고도 한없이 평범한 기적의 빛이다. 이렇게 기적이 많은 데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항상 누군가의 빛에 의해 밝게 빛나는 이들만을 쫓는 이들, 그들에게서 아름다움과 추함의 저주가 시작된 것은 아닐지. 혹은 언제나 연애를 하지 않고 다른 연인들을 시기하는 것도 어쩌면 마찬가지의 맥락은 아닐지.(이것은 좀 확신이 서지 않긴 한다)

 

6.아름답지 못한 이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누차히 말하고 있지만 이 글은 어렵다. 내용 자체는 남녀+남의 사람얘기이고 스토리도 그렇게 크게 충격적이지는 않지만, 내가 보기에는 두 종류의 독자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선은 앞서 계속 말했던 외모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 작가는 그들에게 외모를 가지고 사람의 도덕성이나 선악을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여러번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아름다운 것만을 사랑하지는 말라’라든가, ‘추한 것도 사랑해라’라는 등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인간은 결국 태생적으로 본질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태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이 그토록 증오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사실은 우리 같은 모든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토록 아름다운 것만을 사랑하던.

또 한편으로 작가가 이야기를 하는 대상은 ‘아름답지 못한 이들’이다. 앞서 절대적인 아름다움과 상대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과연 작가가 그려낸 것이 절대적으로 추한 여자인지 상대적으로 추한 여자인지에 대해 생각해봤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작가가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그리고 우리가 보통 일상에서 접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과연 절대적인 것인가 추상적인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들이 가지고 보고 접하는 모든 아름다움은 모두 상대적인 아름다움이지 않은가? 물론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일단 현실은 그렇다. 지극히 평범한 아름다움들뿐이다. 그것은 반대로 그것들은 어느 정도 추함을 함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설익은 아름다운 설익은 추함을 갖고 있는 우리 같은 보통의 사람들의 경우에는 스스로의 아름다움보다는 ‘추함’만이 부각되게 마련이고, (특히나 우리 자신보다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사람의 앞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기존에 우리가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대해어느 정도의 자각이나 자신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결국 모두가 부질없는 것으로 전락해버린 후 우리에게 남는 것은 사실은 상대적인 것이지만 자신에게는 한 없이 절대적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는 어둡고 검은 추함뿐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과연 작가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그래도 희망을 가지라고? 아무리 추하더라도 이 이야기처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상당히 진부하긴 하지만 나는 그것이 바로 작가가 말하는 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우리에게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은 그저 상대적인 아름다움일 뿐이지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도 같다.

그리고 내가 그의 말을 해석하기에는 사랑받지 못하는 자들에게도 깊은 메시지를 전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고 인기가 없고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를 자신의 외모나 지위, 특징, 개성 등으로 돌리지만 사실은 그게 아닐 수도 있으니 자신을 한번 찬찬히 둘러보기를 요청한다. 앞서 말했지만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에나는 어머니 뱃속에 있었거나 혹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도저히 그 당시의 사회적 정서라든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짐작을 할 수가 없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벅찬데 사회적 정서라니. 다만 오늘날과 같이 다원주의가 발달하고 ‘상대주의’라는 것이 오히려 하나의 ‘사회악’의 씨앗으로 의심되며 경계되는 시기에 과연 누군가가 미움을 받고 상처를 받는 것이 단순히 그의 외모 때문일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을 해석했다고도 할 수 있고 그 책의 메시지를 내가 변용했다고도 할 수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대가 못 생겨서 미움을 받고, 나쁜 사람이 되는게 아니라. 그대가 나쁜 짓을 하기 때문에 미움을 받고 그래서 그대의 이미지가 못 생겨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한 때 내가 정말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 있었다. 나는 아름다운 사람을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정말 싫은 것은 그냥 못 생긴 여자가 아니라 ‘못생기고 시끄러운 여자다.’ 물론 사춘기 때 만들어낸 말이었고, 성인이 된 지금은 하지 않으며 이런 말을 심심풀이로 하고 다닌다면 나의 수준도 참 의심될만한 것이었지만, 그땐 그랬다. 실제로 이 말을 만들어내게 만든 모델이 있었고, 그 모델은 실로 ‘못’ 생겼으며, 무엇보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호들갑을 떨었고, 말이 많았다. 많은 이들이 침묵을 토해내도록 만들던 그 아이. 그리고 이제는 숙녀 행세를 하며 다분히 조숙해진 그 아이를 보면, 과연 내가 정말로 싫어하던 것은 단순히 못생긴 아이가 아니라 못생기고 시끄럽고 못된 아이를 싫어한 것은 아닌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묻는 물음은. 과연 나는 이 책 속의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녀의 우려처럼 섣부른 감정으로 상처만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런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떨리는 손끝처럼 나는 쉽사리 자신감이 없다. 하지만 그 분홍 글씨. 그 분홍 속삭임을 생각하며 이제는 되새김질을 끝낸다. 몇 번씩이나 그녀를 예쁘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인류의 기억에 새겨진 미녀의 조각이 아니라 그녀의 그 분홍 속삭임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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