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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엄마를 부탁해』(신경숙)에 비친 우리들의 어머니

by 통합메일 2010.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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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신경숙)에 비친 우리들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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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이라는 작가는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이름이었다. 매년 꾸준히 즐겨 보고 있는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에서도 만날 수 있던 이름이며, 대학 교수님의 연구실에도 몇 권씩 쌓여있던 그런 책들을 써내는 작가였다.

중학교 시절 작가 김정현이 쓴 『아버지』를 읽으며, 사춘기 소년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나는 메아리 없는 벽처럼 느껴지던 아버지의 등에 나름대로의 의미를 새기고,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대학에 들어가는 성숙의 시기에는 그 새겨진 기록들과 함께 아버지를 이해해가곤 했었다. (당시 이 책은 베스트벨러가 되었으며, 작가는 『아들아 아들아』라는 책을 쓰게 된다.)

하지만 아쉬웠던 점은 이후 우리들의 어머지를 조명하는 책을 만나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책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 나의 부족한 독서량이 그런 기회를 내게서 박탈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을 수 있던 것은 매우 행운이었다고 생각된다.

 

학창시절 나는 일찍부터 책에 재미를 붙여 책을 정말 즐겨 읽는 아이였고, 반면에 여동생은 책보다는 TV와 친했던 아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인지 대학에 들어오고는 나는 책보다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많이 읽던 책들도 그저 해마다 발간되는 문학상 작품집들로 때워버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어머니께 내민 빨간 표지의 책이 바로 『엄마를 부탁해』였다. 마침 11월에 큰 시험을 앞두고 마음이 좀 메마른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마음을 추스릴 요량으로 그 책을 집어 읽기 시작했다.

 

1)어머니와 가족

“엄마를 잃어버린지 일주일이 지났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어머니의 이야기이자,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이러한 글의 구조에서 우리사회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아버지는 무엇인가? 그래 아버지는 물론 한 집안의 가장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 명의 남성이기도 하다. 야망을 가지고 있고 포부를 가지고, 버리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을 품고 있는 남자 말이다. 하지만 어머니, 특히 전란을 겪은 세대의 어머니들은 우리에게,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그저 ‘어머니’이며 ‘엄마’일 뿐이다. 이상한 일이다. 생명체로서, 인간으로서 그들은 성장과 발전의 연속선상에 존재하며, 여성으로 태어난 그들에게도 분명히 누군가의 딸이며, 소녀였고, 처녀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 분명한데, 그녀들은 가족이 시작되는 바로 그 출발점이기에, 가족에게 있어 어머니는 그저 어머니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머니는 가족을 두고는 이야기 할 수가 없고, 가족은 어머니를 두고 이야기 할 수가 없는 것이리라.

그래,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를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정말로 우리는 어머니를 그저 어머니로만 만났을 뿐, 소녀 혹은 처녀로서의 어머니로 만나본 적이 없다. 혹시라도 그런 다른 모습의 어머니를 발견할 때, 우리는 거기서 이질감을 느끼고, 어머니와 나 사이에 연결된 고리가 느슨해지는 감정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또 누구도 그에 대해서 원망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저 철저하게 그녀들은 오직 ‘어머니’로만 인식됐다는 점에서, 그 오랜 시간 동안을, 우리들의 인생 전체를 삼켜버리는 그 시간 동안을 오직 어머니의 역할과 자각과 책임이라는 짐을 지고, 우리들을 자신의 꿈으로 삼고, 우리들의 삶을 껴안았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발전된 정치 사회 이론을 가지고도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구도 그녀들에게 그런 일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권리와 꿈을 주장한다면, 그들이 가진 자연권을 부정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하지만 그녀들은 그렇게 어머니로서 살아왔다. 그것은 오직 본성이라는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도덕의 최고봉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 맹자가 성선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것 같은 그런 잡히지 않는 아련함으로 그렇게 해왔다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 자식들이 밥을 먹는 것을 보면 주린 배를 잊는 사람들, 우리 모두가 태어난 몸과 마음의 고향,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들이다.

 

2)아들, 딸,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인간의 역할에는 선천적 역할이 있고, 후천적 역할이 있다. 누구나 사회에 나가기 전, 신발을 신고 집 밖을 나가기 전에도 우리에게는 아들 혹은 딸의 역할이 부여된다. 또 그러한 가정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이 있고, 그런 역할과 역할들이 모여서 가족을 이룬다. 이 책은 아들, 딸, 아버지의 입장에서 어머니를 그리고 있고, 그들이 평소에 발견하지 못했던 언제나 항상 자신들과 연결되어 있던 어머니와의 보이지 않는 끈을 발견하게 한다. 말하지 않아도 어디가 아픈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이 문제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당신 어머니, 사회가 우리를 바쁘게 한다는 이유로 머릿속에서 당신의 공간이 점차 좁아져 가는 것을 그저 목도하는 중에도 언제나 당신 마음 속 우리들의 공간을 그 무엇에도 양보하지 않는 당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떤 잘못을 저지르건 언제나 용서해주는 당신, 바로 어머니이다.

 

3)추억 그리고 어머니

인간에게 추억이란 어떤 의미인가. 단순한 기억이 가치중립적인 정보라면, 추억은 아마도 인상적이며 개인적인 의미가 부여되어 지는 기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머니의 삶은 우리네의 인생을 포함하기 때문에, 우리의 기억은 그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언제나 어머니를 만나게 되는 듯하다. 또한 추억이란 일종의 정신적 에너지로서 인간의 일생을 통틀어 생명의 기력을 제공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들의 어머니는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상태, 혹은 사후에 정신적으로 이별된 상태에서도, 언제나 그 추억 속에 살아서 언제나 우리가 기억하는 바로 그 모습으로 우리 인생의 등대가 되어주는 듯하다. 이 글에서도 어머니는 그러하다. 어머니의 품을 떠나서 사회에 나와 이제는 다른 추억들을 만들어 가고, 과거 어머니와의 추억들은 점차 기억하는 빈도가 줄어든다 하여도, 우리의 삶, 우리의 행동, 습관, 삶의 방식 하나하나에 어머니와의 추억이 묻어 있다. 그리고 그 추억이라는 것은 그 추억의 근원이 사라졌을 때 더욱 진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래 추억은 그것이 완전히 추억이 되어버려서 다시는 또 다른 추억을 만들지 못 할 때, 눈부시게 빛나며 희미해져가는 것 이다.

 

4)행복과 어머니

나는 아직 부모님을 여의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을 여의는 기분, 옛말로 천붕(天崩)이라고 표현되는 그러한 고통을 아직 겪어보지는 못 했다. 하지만 가볍게 부모님의 부재를 생각만 하더라도, 그것은 상상하기 쉬운 일은 아니며, 어찌어찌 상상만 하더라도 어렴풋하게 나마 그 처절한 공허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참 아이러니 했던 것들은 책의 부분 부분마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문장들은 나로 하여금 지금이라도 당장 어머니께, 할머니께 전화를 걸어 잘못했다고 하고 싶고 앞으로 더욱더 효도하며 살고 싶게 만들지만, 책을 덮고 현실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종전의 철없는 아들로 돌아가 다시금 어머니께 투정을 부리고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왜 이런 끊임없는 허무의 무한반복이 내가 원치 않는 예상되는 후회를 잉태하게 되는 것인가?

나는 그 이유를 이데아로서의 어머니와 현실에서의 어머니, 그리고 이데아로서의 나와 현실의 나의 거리감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 책에 몰입했을 때의 나는 이 책의 주인공인 아버지와 자식들에게 감정이입된 나는 어느새 보편적인 아들이 되어 있다. 내가 인식하는 개인적인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 빌려 그 눈으로 바라보는 비교적 객관화된 시각으로 관찰되는 내가 되어 있고, 그런 시각으로 바라볼 때 나 역시도 부모님께 정말 어떻게 해서도 갚을 수 없는 그런 은혜를 받는 불효자가 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어머니도 그렇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조금 다르다. 어머니도 마찬가지고 나도 마찬가지다. 현실은 이데아(이상)와 같을 수는 없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괴리를 이룰 수밖에 없다. 현실이 현실인 이유는 바로 그것이 갖는 이데아와의 거리감 때문이다. 세상에 보편적인 어머니들, 즉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현모양처의 어머니의 이데아는 거의 모든 어머니에게 집중되어 있다. 또 어머니께 은혜를 입은 아들들 역시도 대부분의 아들에게 들어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어머니와 그러한 보편적인 이상을 통해서 관계 맺기 보다는, 좀 더 개인적이고 미시적이며 소소한 일상적인 요소들을 통해서 관계를 맺게 된다.

이 책을 한창 읽으며 내 안의 은혜 입은 보편적인 아들의 요소를 한창 극대화시킨 와중에 어머니께서 퇴근해서 나를 바라보신다. 평소와 다름없이 피곤에 찌들면서도 무덤덤하신 어머니와 이데아에 몰입하여 눈가가 촉촉하게 젖은 아들. 어머니는 이상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신다. ‘쟤가 왜 저러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들은 갑자기 효심이 발동하여 설거지를 하러 나선다. 어깨도 주물러 드릴까 싶다.

하지만 그게 얼마 가지는 않는다. 왜 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바로 일상이며, 일상에서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는 그러한 본질적인 요소를 전제로 하고, 그 위에 존재하게 되는 보다 특수하고 현실적인 요소들을 통해서 관계 맺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과거 유교윤리가 지배하던 사회에서는 사회의 흐름이 그다지 빠르지 않고, 경제와 생활의 고리가 비교적 느슨했기 때문에 어떤 속세적 요소들이 우리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지금보다는 적었고, 그로 인하여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에서 바로 그 관계의 본질적 요소가 부각되는 일이 좀 더 수월했을 거라 생각된다. 하지만 오늘날 급격하게 돌아가고, 수많은 사건들이 일회적으로 치부되는 세태에서, 또 무수한 정보가 공개되며 다양성이 존중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그렇게 암묵적으로 본질적 요소를 전제로 특수한 요소들을 가지고 지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관계는 언제 다시 본질적 요소,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과 자식이 받은 한량없는 은혜로 이루어지는 관계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이 글에서는 ‘부재’의 상황을 통해 그런 상황을 연출한다. 어머니의 부재. 일상적 요소가 필연적으로 포함하는 ‘당연히 존재하는 요소’들 중에는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어머니의 부재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것들의 부재와는 다른 파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모든게 쉽게 생겼다가 쉽게 사라지는 가치를 갖기에 우리의 감각이 무뎌졌지만, 어머니의 부재는 잊고 있던 감각을 다시 돌려놓는다. 그녀들이 바로 우리의 뿌리였음을 새삼 깨닫게 하고,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누려온 소소한 일상들이, 그 지겨운 반복적인 일상들이,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그 본질적인 요소들이, 언제부턴가 거들떠보지 않게 되던 그 당연한 것만 같던 관계가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 우리에게 낮은 울림으로 전달하게 되고, 자식으로서 남편으로서의 우리는 밑이 없는 어두운 구렁으로 떨어지며 가라앉는 슬픔을 마주한다.

“좀 더 잘할 것을”, “살아 계실 때 더 잘해드렸어야 하는데”라며 아무리 후회를 해도, 존재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후회를 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후회할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수많은 핑계와 합리화, 정당화를 통하여 미루고 미루며, 또 스스로를 용서했다. 하지만 엄마를 잃어버린 후의 우리는 결코 우리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다. 존재의 부재 후에 더욱 부각되고 확대되는 은혜와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절대 용서받지 못할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어 버린다.

 

5)용서 그리고 끝없는 사랑(내리사랑의 철학)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용서를 받아야 하는가? 이 책의 결말은 처음의 주인공이었던 첫째딸이 이탈리아의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서 피흘리며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상 앞에서 엎드려 우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나로서는 정말 난해한 부분이었다. 그 장면을 통해서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기독교 신앙에서 에덴 동산 사건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가 되지만, 그의 자발적인 희생으로 인해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통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즉, 구원의 목적이자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성모 마리아는 어떤 존재인가? 동정녀로서 그리스도를 잉태한 ‘어머니’이다. 이것은 어떤 관계를 함의하는가? 신의 아들이며, 인류를 사랑해 그들을 대신해 극한의 고통을 견뎌가며, 죽어간 숭고한 인격(혹은 신격). 하지만 그도 어머니가 있는 것이다.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이지만, 그 역시도 누군가의 아들이며, 성모 마리아는 인간으로써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 앞에 엎드리는 존재이지만, 신의 아들은 역시 그의 아들로써 그녀 역시 누군가의 어머니이다.

아마도 이 부분은 우리 모두가 어머니 앞에서 원죄를 지닌 존재들임을 암시한다고 생각된다. 우리에게 그 무엇도 바라지 않고 그저 사랑만을 베푸는 그녀 앞에서 우리는 한 없이 작아지고 연약해지고 온순해지며 한편으로는 사랑을 받기만 하는 죄인이 되고 만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자신의 원죄를 인식은 하면서도 한편으로 일상에서 쉽게 잊고 살 듯, 우리 역시도 어머니의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그 은혜를 쉽게 잊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녀가, 우리의 뿌리가 소멸하는 순간, 그 은혜를 갚을 새도 없이 무한한 사랑의 근원이 소멸하는 순간, 우리의 존재는 거할 곳을 잃고 허공을 헤매고, 그 사랑과 은혜가 눈부시게 빛나면서 우리는 분명한 죄인이 되어 버린다.

죄인으로서의 우리는 분명히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는 인과의 법칙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이 물음에 도착하게 된다. “우리는 영영 죄인으로 살아가는가? 혹은 용서받을 수 있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 버린 바로 그 사랑이야 말로, 소멸하는 순간마저 우리를 사랑하며, 우리 때문에 당신은 행복하다고 함으로써 우리를 죄인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의 아버지이며 어머니로써 당신께서 주신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는 원동력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민족의 문화, 나아가 전 인류가 공존하는 내리사랑의 기저에 깔린 원리가 아닌가 싶다. 물에 자식과 부모가 빠졌을 때 인간은 자식을 구하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해 나는 효율성이나, 인과의 법칙 등의 원리를 통해 분석해보려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그렇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本性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러한 숙명을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고, 그러한 숙명 속에 살 수 있는 것에 행복해 하고, 그래서 더욱 더 우리들을 사랑한다. 그러한 도저히 갚을래야 갚을 수 없는 은혜 앞에서 우리는 작아지고 죄인이 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한 순간도 쉬지 않는 그녀들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그 죄를 벗고, 이제는 당신들의 자식이자 누군가의 부모로서 또 다시 세상을 살아가며, 당신을 추억하고 이해해 나가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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