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자리
미끄러질 뻔 했다. 봄을 바라보고 잔뜩 푹해진 날씨였고,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그리고 한 차례 행렬에 의해 부지런히 밟히면서 땅바닥은 어지간히도 질퍽거렸고 물 만난 미숫가루처럼 신발에 달라붙었다. 영정을 든 팔이 저려서 조금 쉴 겸 멈춰 섰다. 잠깐만 바닥에 내려놓으면 안 될까 싶어 주위를 둘러봤다. 어른들도 이제 무얼 해야 하나 어찌할 줄을 모르고 서로 눈치만 보는 통인지라 그냥 조금만 더 참기로 했다. 꽃향기가 코를 찌르는 영정을 조금 더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터벅터벅 땅만 바라보며 걸었는데 뒤를 돌아보니 어느덧 꽤 많이 걸어 내려온 듯싶었다. 아버지가 묻힌 곧도 이제는 무수히 많은 나뭇가지들로 겹겹이 쌓여 보이지 않았고, 그저 인부 아저씨들이 피운 불의 연기만 방향 없이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형, 안가? 아직 어린 동생이 나를 따라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혼백을 든 형은 벌써 저만치 멀리 앞서 걸어가다가 역시 내가 멈춘걸 보고는 뒤돌아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멀리서 피운 연기가 여기까지 온 걸까. 돌연 눈앞이 흐려지면서 형의 표정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응. 그래 가자. 힘들지? 손을 내미니 동생이 손을 잡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그래도 주제에 사내라고 내미는 손을 매번 뿌리치는 녀석이었는데 그래도 오늘은 웬일인지 덥석 내 손을 잡았다. 초등학생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두꺼운 손바닥이 손안 가득 들어왔다.
영구차에 몸을 실었다. 아버지의 사촌 형제라던 아저씨가 먼저들 차에 가서 타있으라고 떠미는 바람에 억지로 쫓겨나듯 산을 내려왔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쉽게 발이 떨어졌다. 염습 때 다시 만난 아버지의 몸은 몇 년 만인 듯 낯설었다. TV에서 봤던 밀랍인형을 가져다 놓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곡성이 결국 눈가를 적셨다. 가장 행복하던 시절, 아직 병상에 눕기 전의 아버지를 생각하려 애썼다. 그제서야 뜨거운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아빠 어때 형?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염습에 참여하지 못한 막내는 걱정과 두려움과 호기심을 주무르며 물었다. 응, 괜찮아. 편안해 보이시더라. 편안했을까. 암 덩어리가 거머리처럼 온 몸의 기력을 빨아 먹어 고요할 수밖에 없게 되고, 점점 그렇게 멀리 작아져가는 세상을 바라봐야 했던 아버지는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는 고요히 잠이 들 듯 떠났다. 그것은 생각보다 갑작스럽게 다가왔고 상상해왔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병실을 지키던 밤이었고 얼굴을 닦아드리며 들여다본 아버지는 조용히 잠이 들어 있었다. 갑자기 상황이 악화되고 급히 형제들과 먼 친척들에게 연락을 돌려서 올 사람들은 다 왔다 싶었을 때도 아버지는 별 다른 변화가 없었다. 타이머가 울리듯 아버지의 몸에 붙어 있는 장비들이 아버지가 떠났음을 알려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방에서 각종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막내는 오히려 그 소리에 놀라 우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졌고, 입 안으로 뜨거운 무엇인가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리곤 이내 나도 눈을 감아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방이 좀 진정되자 사람들이 우리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없다는 게 아니 새삼 아버지의 빈 존재를 느껴야 한다는 것에 나는 쉽게 적응할 수가 없었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영안실로 보내고 복도 벤치에 모여 앉아 있는 우리의 손을 잡은 채 낯선 얼굴의 아줌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곡을 하듯 말했다. 어쯔케 이 어린 것들 두고 가나. 야들아 아빠가 너희 힘들지 말라고 이렇게 밤늦게 가셨나 부다.
엘리베이터 액정에 표시된 숫자들이 하나씩 더해져갔다. 지구의 중력이 쌓이는 값인지 쳐다보는 내내 무엇인가가 등을 짓눌러 오는 게 느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형은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능숙한 연극배우처럼 막내가 쪼르륵 달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귀에 익은 기계음이 울렸고 손잡이를 당겨 문을 열었다. 막내를 앞세우고 기차놀이를 하듯 집으로 들어갔다. 집의 냄새가 우리를 반겼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텐데 아직 입주하지 않아 가구 하나 없는 빈집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대강 짐을 부리고 각자 무엇인가를 찾아 넓지도 않은 집을 헤매다 결국은 모두 거실에 모였다. 감당할 수 없는 고요에 꼭 봐야 하는 프로라도 있는 듯 서둘러 TV를 켰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렸지만 볼만한 것은 전혀 하질 않았다. 형도 고개를 젓고 결국 막내에게 리모컨을 건넸다. 역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결국 저가 좋아하는 만화채널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이틀 밤을 새웠더니 눈알이 말라붙은 듯 뻑뻑했다. 형, 나 졸려. 세워놓은 볏짚처럼 막내가 내 어깨에 기대왔다. 세 형제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다가 나는 막내를 눕히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막내가 두 칸을 차지하고 눕고 형은 소파의 맨 끝 칸을 아슬아슬하게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안 피곤해? 좀 쉬어. 니가 제일 힘들 텐데. 가볍게 입맛을 다신 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냐. 희한하게 안 졸리네? 형도 눈 좀 붙여. 응 그래야겠다. 아이구구. 형은 며칠 사이 넓어진 어깨를 당기며 일어서더니 화장실로 들어갔다. 씻으려는지 물소리가 들려왔다. TV에서는 계속 만화가 한창이었다. 주먹밥처럼 생긴 말썽꾸러기 꼬마가 하루가 멀다 하고 엄마, 아빠, 어른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만화였다. 너무 조용하다 싶어 돌아보니 막내는 이미 입을 벌리고 눈을 감은 채였다. 베란다 유리창 너머 세상은 잔뜩 흐린 표정이었다. 물소리는 좀처럼 멎질 않았다.
마음은 좀 괜찮니? 아버지 간병 때문에 그만뒀던 미용실에서였고, 내 이야기를 들은 원장님은 콧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일을 하고 싶다는 나를 원장님은 흔쾌히 받아 주었다. 빈집이 두려웠던 것도 있었지만 일단은 생활비도 경력도 필요했기 때문에 나는 그런 원장님이 참 고맙게 느껴졌다. 그렇게 일을 시작한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만두기 전에 일하던 사람들도 그대로였고, 정신없이 여기저기 불려 다니다 보면 어느새 슬픔은 일상에 녹아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았다, 아버지의 빈자리도 점점 빠르게 희미해져 가는 듯 했다. 그렇게 아침에 학교에 갔다가 바로 출근을 해서 녹초가 되어 돌아가는 일상이 유일한 희망처럼 느껴졌다.
형도 일을 구했다. 내가 밤에 일을 하니 형은 새벽에 신문 돌리는 일을 택했다. 아직은 사람들이 신문을 많이 볼 때였고, 용돈을 위해 혹은 생활비를 위해 신문 돌리는 일을 찾는 학생들을 찾아 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형이 출근 하면 나는 아침에 일어나 막내 아침을 챙겨 학교에 보내고 나도 학교에 가고, 오후에는 형이 막내를 챙기고 나는 아르바이트를 가는 일상들이 계속 됐다. 졸업까지는 앞으로 2년이 남아있었다. 재료를 살 돈이 없어 미용실습 시간에는 늘 눈으로 선생님의 손을 쫓고, 쉬는 시간에 친구의 재료를 빌려 허공에 빈 가위질을 해보는 것이 서러울 때도 있었지만, 학교를 다니는 틈틈이 아르바이트 경력을 쌓으면 남들 보다는 빨리 가위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다 외환위기라는 것이 왔다. 뉴스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나라의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고 역시 심각한 얼굴로 또박또박 발음해대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어려울 때 일수록 서로 도와야 한다며 국민들부터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목소리가 TV를 타고, 신문을 타고, 라디오를 타고, 입과 입 사이에 늘어진 타액처럼 줄줄이 이어졌다. 하룻밤이면 가게 하나가 문을 닫았고, 일주일이면 대기업이 하나씩 부도가 났다. 미용업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명분이었지만 사실은 손님을 끌어 모으기 위해 서비스 가격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 즈음 원장님은 하루 종일 전화통을 붙잡고 있는 날들이 많았다. 잘 아는 다른 원장들과의 대화였다. 대화 내용을 보자면 일단 한숨으로 힘겹게 첫걸음을 떼고 길고 긴 하소연을 걸어 베이스캠프에 당도하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이의 미간을 한 채 이 난국에서 살아남을 방안에 대해 상의하는 것으로 이어지곤 했다. 살아남아야 한다. 그 생각으로부터 모든 게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원장님뿐만 아니라 대다수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 ‘생존’이라는 단어가 수천 년 만에 발굴된 유물처럼 드러나는 시절이었고 실로 그렇게 하루하루가 전쟁 같은 날들이었다. 힘내세요 원장님! 동갑내기 여자애 하나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원장님은 힘겹게 푸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용히 세상의 입을 틀어막은 채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세상이 불안에 몸을 떨어서 그런지 유난히 더 추운 겨울이었고, 여느 날과 같이 생존을 위하여 하나 둘 셋을 외치며 몸을 일으켰던 평일의 아침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잠자리가 너무 비좁아서 보니 나와 동생 사이, 2인용 침대의 한 가운데에 깊이 잠든 형이 박혀 있었다. 그렇게 나는 형이 일을 그만두었음을 알 수 있었다. 동네마다 박혀있던 배급소가 광역적으로 합쳐지면서 형처럼 일을 잃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실존’ 따위는 집어치우고 일단은 ‘생존’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자세한 것은 묻지 않기로 했다. 직장을 잃은 것 보다는 직장에 붙어 있는 게 호기심을 자아내는 때였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부쩍 말수가 줄어든 형이었고, 그렇게 줄어든 말수에 비례해서 나 역시 언제부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게 되는 편이었다. 아마도 서로 활동하는 시간대가 달라서였겠지만, 평소에도 보통 막내를 사이에 두고 의사소통이 이루어졌음을 생각하면 결국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우리 둘을 가로 막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습관처럼 보일러의 온도를 낮추려다가 그만 두었다. 아침 햇살이 형과 동생의 허리춤까지 기어올라 있었다.
결국 원장님은 또 한 번의 가격인하를 결정했다. 금방 지나갈 것 같았던 ‘위기’는 좀처럼 끝이 보이질 않았고, 동네에서는 실직한 미용사들이 허름한 상가 한 채를 임대해 커트만 전문적으로 하는 가게를 냈을 때였다. 무려 3,0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 제대로 된 간판 하나 없이 볼품없는 현수막이었지만, 3,000이라는 숫자 덕분인지 세상 그 어느 간판보다도 비싸보였다. 다시 설산을 올라가는 이의 고뇌 끝에 결정된 우리 가게의 가격은 4,000원이었다. 원장님도 이제는 산소가 부족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만큼 그 가격은 원장님의 자존심과 생존 모두가 걸려있는 문제였고, 한 마디로 마지노선이었다.
다행히 가격을 내린 효과 덕분인지 가게는 하루 종일 손님으로 붐볐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정신없이 가게로 달려온 나의 인사를 받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롯드와 방수포를 빨고, 샴푸를 하고 돌아서면 방금 전 빗자루질 한 바닥에는 그 사이 또 까만 털들이 자라 있었다. 아르바이트생들의 손은 습진으로 갈라졌고, 미용사들은 손가락 관절염을 호소했다. 허겁지겁 뒤따라 가격을 내렸던 주위 미용실 중 몇몇은 역시 어느 하룻밤 사이에 등반을 포기했다. 경제적 소비가 온 국민의 미덕이었던 만큼 가장 싼 집이 어딘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것이고, 또 가장 먼저 소비자의 머릿속에 각인되는 것 역시 중요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그래도 원장님은 숨통이 트인다는 눈치였고, 역시 뭘 해도 앞서서 하는 게 중요하다는 진리를 깨우친 사람처럼 여기저기서 쇄도하는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국적으로 금 모으기 행사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 그 즈음이었다.
그 날은 아버지의 기일이 있고 몇 주 지난 후였다. 며칠에 한 번 돌아오는 일요일 아침 당번이 걸린 날이었고 4월 초였지만 아직 춥다는 생각을 하며 가게 문을 열었다. 불을 켜고, 보일러 온도를 올리고, 창문을 열었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실까 싶어 물을 끓이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원장님인가 싶어 총총 걸음으로 나가보니 웬 아줌마가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미용실에 들른 게 언제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머리였고, 머릿결의 웨이브 정도가 참 곤란해 보였다. 저 혹시 지금 영업 하시나요. 시계를 보니 가장 먼저 출근하는 팀장님이 오려면 아직도 한 시간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아직 원장님은 출근을 안 하셨어요. 혹시 손질 받는 디자이너 있으신가요? 그녀는 우리 가게엔 처음이라고 대답했다. 아, 예 머리 어떻게 하실 건데요? 그냥 좀 너무 추단이 안 돼서 좀 잘라볼까 하는데……. 아, 커트만 하실 거예요? 그럼 괜찮겠네요. 여기 잠깐 앉으시겠어요? 뭐 따뜻한 차라도 한잔 드릴까요? 사실, 아르바이트생이 허락 없이 머리를 만지는 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부쩍 실력이 늘기도 했고, 여전히 재료비가 부담이 되었기 때문에 호시탐탐 나는 손님들의 머리를 탐할 기회를 엿보곤 했다.
어떻게 자를까요? 스타일을 묻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여기저기에 시선을 흩뿌리며 잠시 머뭇거렸다. 미용의자에 앉기 직전까지도 스타일을 결정하지 못하는 손님들은 흔했기에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글쎄. 커트를 한번 쳐볼까 하는데. 짧게요? 이 정도로요? 꿈틀대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짚어보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에, 뭐 그 정도. 자신감이 비듬처럼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는 가위를 집어 들었다. 머리를 자르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여기저기로 뻗친 머리카락 때문에 공간을 나누는 게 쉽지 않았고, 추운 날씨에 손이 곱아서 더욱 더 그랬다. 하지만 그녀는 서툰 손길을 의식하지 못한 듯 편안한 얼굴로 깊은 잠에 빠진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마음에 드세요? 작업이 끝난 머리를 어루만지며 그녀에게 물었다. 전과는 달리 좀 더 자신감 있는 눈빛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샴푸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요샌 샴푸는 따로 천원 요금을 받거든요. 이따금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손님들이 있어서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녀를 휘감고 있던 천을 걷어 냈다. 빛바랜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고 다시 거기에서 사천 원을 꺼내 건네고 그녀는 잰 걸음으로 가게 문을 열었다. 나는 밝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시계를 보니 사람들이 올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흔적을 없애야 했기에 서둘러 청소를 시작했다. 어지럽게 떨어진 머리카락들은 아직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이 보였다. 소리라도 날까 조심하며 쓸어 담은 머리카락을 버리고는 가게 안을 한번 둘러봤다. 이 정도면 누군가 머리를 자르고 갔다는 사실을 알아챌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때 불현 듯 알 수 없는 느낌이 엄습했다. 몇 번인가 눈을 깜빡이니 각인이라도 된 건지 머리를 자르는 내내 눈을 감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허공에 찍혀 있는 게 보였다. 헤매듯 거울을 찾아 눈동자를 확인해 봤지만 아무 이상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 내려갔다. 혹시 내가 알던 사람은 아니었을까. 그녀가 걸어갔을 좌우를 확인 했지만 유난히 한산한 오전의 시내 뒷골목만이 흥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인광이 오늘 당번이구나? 추운데 밖에서 뭐해? 어디서 나타났는지 팀장 누나가 뒤에서 아는 체를 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누나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 증거가 될 만한 것이 남아 있지는 않는지 그녀가 움직였던 동선을 따라 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인광아 이거 니 꺼야? 누나가 가리키는 곳엔 찻잔이 놓여 있었다. 아 네 누나. 반사적으로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야 이거 다 식었다. 빨리 마셔야지. 그녀가 앉았던 자리였고, 찻잔 속에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녹차 속에 작은 녹차 잎이 조금 가라 앉아 있었다.
아침에 있던 일 때문이었는지, 왠지 몸이 으슬으슬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퇴근길을 걸어 집에 닿았다. 월급날이 다가오니 들어가면 치킨이라도 한 마리 시켜먹어 볼까 말까를 고민하면서 문을 열었다. 이상하게 집은 온통 암흑에 정복되어 있었다. 뒤꿈치를 비벼 눅눅한 신발을 벗고 불을 켰다. 닫힌 방문을 여니 마찬가지로 어두웠다. 불도 켜지 않고 컴퓨터 게임에 한창이었는지 막내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왔어 형? 불도 안 켜고 뭐해. 큰형은 어디 갔어? 부엌으로 건너가며 어깨너머로 물었다. 형 아까 낮에 나가서 아직 안 왔는데? 어디 갔는데? 몰라. 그냥 금방 온다고 하더니 나갔어. 부엌을 보니 나갈 때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너 오늘 밥 안 먹었어? 대답이 없었다. 다시 방문을 열며 말했다. 오늘 밥 먹었냐고 안 먹었냐고. 시퍼런 서슬에 그제서야 막내는 서둘러 컴퓨터를 끄면서 나를 돌아봤다.
형이 돌아온 건 늦은 저녁을 먹은 막내가 막 잠이 들었을 무렵이었다. 연락할 길도 막막했던 나는 집안의 불을 다 끄고 초점 없이 TV를 보고 있었고, 형은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꾼을 만난 들짐승처럼 어둠을 잔뜩 지고 들어왔다. 어디 갔다 와? 나는 TV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저녁 먹었냐. 기침하듯 형은 그렇게 말을 흘리며 욕실로 도망쳤다. 나는 벌떡 일어나 이제 막 욕실로 들어서려던 형의 어깨를 잡았다. 아 어디 갔다 오냐고. 퇴근하고 오니까 애는 밥도 안 먹고 게임만 해대고 앉아있고 대체 형 요새 뭐 하는 거야? 그러고 보니 낮에는 도통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알 수 없는 형이었다. 학교도 가지 않는 눈치였는데. 놔라. 어둠에 가려 형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형이 폼을 잡는다고 생각했다. 요새 유행하는 청소년 영화라도 본 걸까 싶어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물었다. 아니 말을 하라고 어디 갔다 오는지. 형 이러면 내가 어떻게 마음을 놔. 아 나도 힘들어 죽겠다고. 기분 탓이었을까. 형의 몸이 잠시 부르르 떨린 듯 했다. 아 씨발 놓으라고 개새끼야!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큰 소리였다. 니가 뭘 안다고 지랄이야. 씹팔 좆또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가. 뭘 안다고 짖걸여! 형은 나를 밀치고 문을 주먹으로 연거푸 때리면서 맹수처럼 울부짖었다 쇠로 된 문고리와 벽이 만든 파동이 이명으로 들려왔다. 시퍼렇게 날선 잔향으로 가득한 거실엔 너무 놀란 나머지 주저앉아 넋이 나간 나와 우두커니 선 채로 숨을 몰아쉬며 화를 어찌할 줄 모르던 형뿐이었다. 그리곤 형은 이내 현관문을 거칠게 닫으며 바깥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정신을 차린 것은 꽤나 시간이 흐른 뒤였고, 형을 찾으러 나갈 엄두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세수를 했다. 셔츠의 앞섶이 다 젖을 정도로 물을 끼얹고 방문을 열었다. 어느새 잠에서 깬 막내가 귀를 막고 침대와 벽 사이에 웅크린 채 숨어 있었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친구도 별로 없던 형이었기 때문에 금방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아직 밤에는 쌀쌀함에 옷깃을 여미는 계절이었다. 결국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파출소를 찾아갔다. 내가 들어오든 말든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경찰관들에게 어렵게 말을 걸어 형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뒤에서 뭔가를 작성하고 있던 경찰관이 끝까지 안 들어도 다 알겠다는 말투로 그건 실종이 아니라 가출인 것 같으니 좀 더 기다려보라는 말을 했다. 어차피 실종신고를 하려면 기간이 어느 정도 지나야 한다고 했다. 좀 더 잘 부탁을 해볼까 싶기도 했지만 그런 경우 보통 한 달 정도면 다시 기어들어오는 법이라는 충고를 위안으로 삼으며, 정말 형이 기어서라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집으로 돌아갔다. 혹시 그 사이에 돌아와 있는 건 아닐까하는 설렘을 가지고 문을 열었지만 형의 빈자리는 채워져 있지 않았다. 다시 지루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나날이었다. 늘 하던 대로 일상에 몰입해 형의 부재를 녹여보려 했지만, 그것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일상 위로 둥둥 떠올랐다. 대체 형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걸까.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무엇일까. 혹시 형에겐 지금 무슨 위험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쉬지 않고 순간순간을 찔러왔다.
한 달이 지나도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타이머처럼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던 심박계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함께 형을 기다리다 잠이든 막내를 침대에 눕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부엌에 벽을 기대고 쪼그려 앉은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기억나지 않는 엄청난 죄에 소름이 돋았다. 모든 게 다 나의 잘못인 것만 같았다. 미어지는 가슴에 잔뜩 몸을 움츠리고 소리를 낮춰 흐느껴야 했던 그런 밤이었다. 다음날에는 결국 다시 파출소를 찾아가기로 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데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충고하던 그 경찰관의 얼굴이 떠올라 울컥 화가 치밀었다. 막내에게 집 잘 보고 있으라고 하고선 나가려는데, 내가 미용실에 출근하는 게 아니라는 걸 눈치 챘는지 끝끝내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나마저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였을까. 결국 막내와 함께 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습관적으로 전화를 받으려는 막내를 제치고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나야. 형의 목소리에 나는 총을 맞은 것처럼 몸의 힘이 탁 풀렸다. 별일 없지? 아니. 형 어디야. 어디서 뭐해. 형이라는 소리를 듣고 막내도 달려들어 수화기에 귀를 갖다 댔다. 형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어쩔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너 정신 똑바로 못 차려? 별일 없지? 대답 안 해? 응 별일 없어. 울음을 씹으며 힘겹게 대답했다. 아마 이미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되어 있을 터였다. 인광아 잘 들어. 형 엄마 찾으러 간다. 꼭 찾아서 돌아 올 테니까 막내 좀 잘 보고 있어. 알았지? 눈물이 뚝 그쳤다. 엄마라니?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 엄마를 왜 이제 와서 찾는다는 걸까.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서둘러 되물었다. 하지만 이미 전화는 끊어져 있었다. 형 엄마 살아 있어? 눈물을 닦으며 막내가 물었다.
그렇게 형은 전화를 끊었고, 나는 형의 가출을 받아 들여야만 했다. 그 후 형은 아주 가끔 전화를 걸어와 우리의 안부를 물었다. 보통 자신의 얘기는 거의 하지 않은 채 우리의 이야기만 물었고, 이듬해부터는 불규칙하게나마 돈을 보내주기 시작했다. 늘 언제 돌아올 거냐고, 어서 돌아오라고 묻는 우리였지만 망설임 없이 형은 전화를 끊었다. 엄마를 찾는다는 게 무슨 말이냐는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우스운 것은 그렇게 몇 해를 보내니 어느새 전화기 너머에 존재하는 서로에게 익숙해졌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돌아오라고 말하는 간격은 점점 벌어져갔고, 형의 연락은 조금씩 잦아져 갔다. 그리고 그렇게 점점 줄어드는 간격을 바라보며 나는 형이 돌아올 날을 가늠할 수 있었다. 딱 한번 형이 집에 다녀간 적이 있긴 했다. 형의 신체검사 통지서가 날아왔고, 얘기를 들은 형은 아무도 없는 집에 도둑처럼 들어와 그 통지서만 가지고 갔다. 종잇조각이 사라진 탁자 위를 바라보며 나는 형이 다녀갔음을 알 수 있었고, 당연히 꽤나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전처럼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다. 형 집에 왔다 갔더라. 또 다시 걸려온 전화에 나는 덤덤하게 얘기했고 보이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형을 느낄 수 있었다. 군대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형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뜸을 들이더니 그건 걱정 말고 건강 잘 챙기고 막내 관리나 잘 하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형이 떠난 동안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졸업과 함께 자격증을 딴 나는 아르바이트생에서 수습 딱지를 떼고 부 팀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고, 오랫동안 근속한 만큼 원장으로부터의 신임도 가게 내에서 손가락 안에 들게 되었다. 그리고 막내는 어느새 대학에 들어갔다. 국립대학에 가면 좋았겠지만 사립대학이었다. 그래도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의 명문이라면 명문이라고 할 수 있는 학교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은근히 어깨를 폈다.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남들에게 막내 얘기를 할 때면 자꾸만 겸손이 옅어졌다. 대학 등록금이라는 것은 생각했던 것 보다 좀 비쌌다. 아주 오래전부터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막내를 바라볼 때마다 틈틈이 각오하고 준비했던 것이지만 두 달 치 월급이 한 번에 들어갔다. 다행히 형은 알아서 돈을 보내왔다. 굳이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그런 배려에 전화로만 만날 수 있는 형이었지만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
헤아리는 것을 그만둬도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어느 날 내 앞으로도 입대영장이 찾아왔다. 그리고 한 달 뒤 마침내 형이 돌아왔다. 늦은 밤 퇴근을 하고 막내와 함께 집에 돌아오니 형은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8년만이었고, 그 세월만큼 형의 얼굴도 많이 변해 있었다. 막내와 함께 우리는 한참 동안 형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이젠 훌쩍 커버려 내 키를 넘긴 막내였지만 왠지 수년전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의 얼굴이 보이는 듯 했다. 막내가 보는 나도 그런 모습이었을까. 다음날 아침에 보니 이미 형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나도 막내도 이제는 형이 돌아왔음을 알 수 있었고, 예상대로 그날부터 형은 집에서 출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 형은 회를 한 접시 사서 돌아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잔뜩 들뜬 막내가 먼저 나를 반겼다. 그리곤 소파에 앉아있던 형이 천천히 걸어와 악수를 했다. 수고했다. 형이 많이 미안하다. 어디에 두고 왔는지 검지가 사라진 형의 손은 유난히 두툼하고 따뜻했다.
회는 좀 오래됐는지 살짝 말라붙어 있었다. 막내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먹는 내내 형과 나를 바라보며 싱글벙글 이었다. 그래, 입소가 언제라고? 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두 달 정도 남았어. 얼굴을 맞대고 대화한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말끝에 희미하게 ‘요’자가 묻어 나오려 했다. 그래. 뭐 이것저것 준비는 하고 있고? 뭐 준비랄 것도 없지. 그냥 가게에서 인수인계만 하면 될 것 같아. 그리고……. 나는 말을 흐렸다. 그래 이제는 내가 있을게. 걱정마라. 넌 아무 생각 말고 몸조심해서 잘 다녀오기만 하면 돼. 그 동안 많이 힘들었지. 형이 고맙고 미안하다. 그 말에 뭉친 와사비라도 씹은 것처럼 울컥 또 눈물이 맺혔다. 상추에 회를 싸서 허겁지겁 입 안에 우겨넣었다. 술이 얼근해진 막내는 허리를 세우고 어깨를 편 채 애써 웃어 보였다.
며칠 뒤 형은 이사를 했다. 이삿짐을 옮기기 위해 찾아간 형의 집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렇게 가까웠다니. 잠재웠던 서운함이 다시 용솟음치는 것 같았다. 괜찮다고 했건만 막내는 굳이 따라나섰다. 근데 막상 이삿짐들을 보니 막내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뱃일을 하다가, 섬에 들어가서 살다가 그곳에서 어떻게 인연이 닿은 사람을 따라 취직을 해서 이젠 자신에게 보고를 하는 직원도 생겼다는 형은 제법 모아놓은 살림이 많았다. 집에 놓여있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아 보이는 TV며 냉장고, 세탁기들 앞에서 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팔을 걷어붙이고 짐을 나르는 형제들에게서 나는 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형이나 막내나 아버지를 닮아 굵은 팔뚝이며 떡 벌어진 어깨며 두툼한 손바닥을 가지고 있었다. 유독 나만 아버지를 닮지 못했다. 형제들 중에 유일하게 곱슬이 심했고, 피부가 건조했으며 눈이 나빴다. 그럼 나는 누굴 닮은 걸까. 막내는 물론이고 나도 엄마의 기억은 없다.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엄마는 꼭 어떤 부분이 찢겨진 사진 같았다. 귀가 잘 보일 때면 눈이 기억나지 않았고, 눈이 또렷하게 떠오르면 코 아랫부분은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형제들과 다른 내 몸을 가지고 엄마의 얼굴을 그려봐도 마찬가지였다.
이사를 하고 다시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 어느덧 입소일 전날이 되었다. 가게에는 미리 말을 해두었고, 일주일전에 인사를 마쳤다. 원장님은 여전히 콧물을 훌쩍이며 언제든 다시 찾아오라고 했고, 이제는 카운터 매니저가 된 동갑내기 여자아이는 면회 갈 테니 편지하라는 말을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말투로 건넸다. 저녁에는 베란다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는 것으로 최후의 만찬을 하기로 했다. 형이 돌아오고 나서부터 부쩍 이런 자리가 잦아졌는데 늘어나는 식비가 떠나는 입장에서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내일이 입소라는 생각을 하니 그깟 식비가 문제냐 싶었고 정신없이 먹어댔다. 그리고 평소처럼 설거지를 하고 안방에 모여 TV를 보며 사과를 먹었다. 형과 동생이 사과 한 개를 다 먹어갈 무렵 나는 한 개를 더 깎았고 칼을 내려놓으며 형에게 잠시 자리를 피해줄 것을 부탁했다. 형은 나와 막내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더니 순순히 거실로 피신을 갔다. 그리고 나는 막내에게 마지막 당부를 했다. 사실 모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얘기들 뿐 이었다. 공부, 끼니, 연락 같은 것들. 이제는 형이 왔기 때문에 별로 걱정할 것도 없는 생활비 관리에 대한 얘기도 했다. 떠나는 것은 나인데 꼭 막내를 떠나보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떳떳하게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또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어렵게 참아내야 했다. 막내도 붉어진 두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 그러니까 형수를 처음 만난 것은 제대를 몇 달 앞둔 휴가였다. 이제는 지겨울 만도 해서 익숙하게 집의 문을 열었는데 웬 여자가 서 있었다. 집을 잘못 찾았나 싶어 문 호수를 재차 확인했지만 확실했다. 이사라도 간 것일까? 아닌데? 도어락 비밀번호도 그대로인데?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혼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혹시 여기 장인수씨네 집 아니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마찬가지로 당황해하던 그녀가 다소곳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인광 씨죠? 저는……. 그녀가 자신을 밝히려는 데 이번에는 연극무대 뒤편에 숨어있다 갑작스레 등장하는 배우처럼 막내가 어디선가 튀어나왔다. 형 왔어? 잘 됐다. 우리 지금 밥 먹으려던 참인데. 남에 집에 불쑥 들이닥친 사람 마냥 주춤주춤 들어서서 방문을 열자 형이 젓가락을 든 손을 들어 손짓을 했다.
방바닥을 더듬어 자리를 찾아 앉았다. 곧바로 그녀가 내 몫의 밥그릇과 수저를 가져다주었고, 네 사람이 둘러 앉아 밥을 먹었다. 늘 셋만이 마주하던 밥상이라 그런지 어색함이 씹혔다. 그걸 눈치 챘는지 그녀는 이것저것 말을 걸어왔고, 형과 막내는 대답을 가로채거나 맞장구를 치는데 여념이 없었다. 저는 인수씨 회사 동료고요. 오늘 동생 분 오랜만에 휴가 나오신다 길래 실례인걸 알면서도 이렇게 왔어요. 이따금 미소를 섞어가며 말하는 그녀였다. 아 예. 나는 얼떨떨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낯설기는 했지만 반찬들은 꽤나 맛있었다. 형과 막내는 연신 맛있다며 밥을 두세 공기씩 비워댔는데, 왠지 그게 얄밉게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나는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청소기를 한번 돌리고, 부엌에 있는 그릇이며 수저들을 모두 꺼내 하나하나 닦아냈다. 출근하던 형은 나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니 이제 짬 좀 찼을 텐데……. 군대에서 일을 안 시키니까 휴가 나와서 하는 거냐. 장난삼아 던진 말이었겠지만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내 관자놀이를 스치고 부엌 장판위에 꽂혔다. 뭐라고 대꾸를 하려다 말았다. 딱히 뭐라고 받아쳐야할지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대답이 없자 형은 좀 더 큰소리로 만류를 했다. 휴가 나왔는데 좀 쉬어. 니가 안 그래도 니 형수 될 사람도 도와주고 나도 힘닿는 대로 나름 잘 관리해. ‘형수’라니. 그 말에는 슬쩍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사귄 사이야? 응? 사귄지 얼마나 됐냐고. 뭐 한 1년 더 됐나? 허, 그럼 어떻게 그 동안 나한테만 한 마디 말도 없었대. 얌마 엉아가 다 너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그런 거지 임마. 그리고 너만 몰랐던 거 아냐. 막내도 얼마 전에 알았어. 형의 말은 어쩐지 나를 약 올리기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뭐가 좋은지 말하는 내내 얼굴에는 연신 웃음꽃이 숨 쉬듯 피었다 졌다. 이거 이거, 야 삐졌냐? 군바리 사내놈이 뭘 그런 거 갖다가 삐지고 그러냐. 더욱 더 능글맞게 나오는 형이었다. 아 기분 안 나쁘겠냐고! 나는 형의 능청을 뿌리치며 신경질을 한 바가지 모아 뿌렸다. 나의 정색이 의외였던지 아니면 기분이 상했는지 형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낯빛을 고쳤다. 얌마 너 뭐가 그렇게 기분이 나쁜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남의 물건 다른 사람이 맘대로 만지게 두면 당연히 기분 나쁘지 안 나뻐? 이런 식이면 내가 부대 들어가서 맘 편히 지낼 수 있겠어? 형은 이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야 너도 없고 나도 일 때문에 피곤한데 와서 그렇게 도와주면 고맙다고 하지는 못 할망정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너 엉뚱한데다 화풀이 하지 마라. 성한 쪽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형이 말했다. 아 됐고.... 됐어 출근이나 해. 그 말에 형도 시계를 보더니 시간이 아슬아슬한지 구두에 발을 끼우며 다짐을 했다. 너 이따 갔다 와서 얘기해. 이게 진짜 왜 이렇게 배배 꼬였어. 군대 가서 아주 이상해져서 왔어. 아 가라고! 마지막으로 나는 형의 등에 대고 소리를 내질렀다. 쾅하고 문이 닫혔다. 방바닥에 행주를 내던지고 벽에 기대어 앉았다. 아침 햇살이 점점 뾰족해지며 나를 찌르려고 달려들었다.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였을까. 머리가 띵하고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발자국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었다. 머리에 까치집을 짓고 쥐가 난 팔을 주무르며 막내가 나왔다. 앉아서 봐서 그런지 유난히 키가 커 보였다. 내 등에 박힌 햇빛이 눈부신지 잔뜩 눈을 찌푸리고는 이내 절뚝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아유 아침부터 왜들 싸우고들 그런대. 한 마디 중얼거림이 툭 떨어졌다.
나가면서 단단히 엄포를 놨건만 퇴근한 형은 이미 화가 다 풀려 있었다. 형이 떠온 회로 오랜만에 셋이 포식을 했다. 아침의 일에 대한 사과였는지 형은 설거지도 하려 했지만 나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싱크대의 레버를 올려 물을 틀자, 물소리가 파랗게 부엌을 채웠다. 설거지통에 담긴 그릇들이 물에 잠기는 동안 뻐근해진 목을 뒤로 젖혔다. 막혀있던 무엇인가가 뚫리듯 뜨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군 생활에서의 휴가는 워낙 짧았다. 친구들을 만나고, 미용실에 갔다. 원장님은 여전히 코를 훌쩍이며 나를 반갑게 맞이했고. 매니저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벽에 붙은 요금표였다. 한 때 사천 원까지 떨어졌던 커트 요금은 어느새 다시 팔천 원까지 올라있었다. 입대할 때만 해도 육천 원까지 밖에 오르지 않았는데, 커트 요금이 만원이 되는 날에는 독립을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대로 복귀하던 날 형은 굳이 차로 태워다 준다고 했지만 나는 한사코 사양했다. 몇 시간이나 걸려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나서야 부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양손 가득 피자와 치킨을 들고 돌아온 나를 부대원들은 진심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맛있게 먹어주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이내 다시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제대 당일, 부대 앞은 인파로 붐볐다. 옆 중대의 연예인 하나가 제대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옆 중대의 이발병에게 몇 번인가 그 연예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멀리서 보니 멋지게 경례를 하는 그의 얼굴에는 끊임없이 플래시가 터졌고, 다른 전우들은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며 그런 광경을 고깝게 지켜보았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그를 보기 위해 찾아온 여성 팬들에게는 괜히 신경이 쓰였다. 함께 걸어 나가는 예비역들을 슬쩍 보니 마찬가지로 모두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로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실로 많은 인파였고, 덕분에 나는 마중 나온 형제들을 찾는데 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다. 물론 내가 찾은 건 아니고 나를 찾은 건 그 여자였다. 인광씨! 그녀의 소리가 내 등을 탁 때렸다. 저 연예인 팬들 중에 나를 알던 사람이 있었나? 깜짝 놀라 돌아보니 정장차림을 한 그녀가 서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나를 발견한 그녀는 나를 형제들에게로 데리고 가면서 월척을 낚아 귀가하는 태공처럼 즐거워했다. 겨우 며칠 전에 말년휴가를 다녀오긴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제대인지라 먼저 막내가 얼싸 안아왔다. 수고했다. 형은 두툼한 손으로 내 얇은 손을 꼭 쥐며 다짐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감동이라도 한 듯 눈시울을 찍어내는 그녀가 있었다.
차는 바로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건만 아버지의 기일 때마다 찾아오는 이곳의 땅은 언제나 질었다. 전투화를 신은 나는 괜찮았지만 올라가는 내내 나머지 세 사람은 지뢰밭을 통과하는 걸음걸이를 해야 했다. 묘는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지나가다가 혀를 찰 정도도 아니었다. 형이 바쁜 틈틈이 관리를 해온 모양이었다. 막내가 돗자리를 깔았다. 며칠 사이 더 듬직해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황태포를 올리고 배를 깎았다. 예전 일도 있고 해서 형은 몰래 내 눈치를 살폈다. 앞으로 손을 모은 채 나는 그냥 그녀의 등을 바라봤다. 삼형제가 술을 올리고 절을 했다. 남은 술은 형제가 돌아가며 마시기로 했다. 막내가 잔을 비우고 나는 그녀에게 잔을 건넸다. 형수님도 한잔 하셔야죠.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지만 나는 끝까지 권했다. 모른 척 형도 잠자코 있었다. 술을 다 비운 우리는 뜨끈한 속을 느끼며 다시 지뢰밭을 건너 차로 돌아왔다. 차에 타려는데 형이 황급히 외쳤다. 야야 신발 털고 타. 아니다 그냥 벗고 타!
스위치를 눌렀다. 여기저기서 박수라도 치듯 어지럽게 조명이 밝혀졌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녹차를 한잔 타서 손님용 소파에 앉았다.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떻게 간신히 출근을 하기는 했지만 어제는 동생 생일이랍시고 형이랑 너무 많이 마셔버려서 좀처럼 술이 깨지 않았다. 양치를 세 번이나 했건만 근원지가 어디인지 술 냄새는 가실 줄을 몰랐다. 아, 이렇게 죽는 거 아냐. 엄살을 떨어보지만 어차피 들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랜만에 걸린 아침 당번이었고, 사람들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꽤 지나야 할 것이었다.
형제들을 불러 모은 것은 형수였다. 형은 연말쯤 결혼을 계획한다는 말을 털어 놓았고, 형수는 우리에게 더욱 친근한 존재가 되어 갔다. 주말에는 가끔 산으로 바다로 놀러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조수석은 으레 형수의 자리였다. 막내와 나는 조용히 자리를 양보했다. 부엌에는 형수의 수저가 꽂혀졌고, 아직 희미하기는 했지만 밥상을 펼치면 생겨나는 그녀의 자리도 점점 분명해져 갔다. 형수의 자리가 생기고 누구보다 신이 난건 역시 막내였다. 확실히 그녀는 남자인 우리는 볼 수 없는 것을 봤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었고, 미처 보듬지 못한 것들을 품어낼 줄 알았다. 돌아보면 뭉클해지는 그런 소소한 것들에 막내는 이따금 다시 어린애로 돌아간 것처럼 투정을 부리기도 하였다. 퇴근해보니 사람들은 이미 케이크를 가운데 두고 모여 있었다. 밥상 아래로 쭉 뻗은 막내의 다리를 보아하니 제법 기다린 모양이었다. 외투만 벗고 털썩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노래를 부르고 초를 끄고 선물을 주었다. 아니 형 올해는 왁스야? 작년에는 샴푸를 주더니. 동생 생일에 참 야박하네. 내 선물을 뜯더니 동생은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임마 그게 그래도 얼마나 좋은 건데. 싫으면 내놓던가. 한바탕 터지는 웃음을 헤치고 형수가 선물을 꺼냈다. 옷이었다. 그런데 두 장. 커플티였다. 아니 우리는 세 명이라 주시려면 세장 주셔야 할 텐데. 형수를 향해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나였다. 내 표정이 웃겼는지 형수는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역시 남자들은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여자 친구랑 입으라고 주는 거예요. 막내 여자 친구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죠? 남자들은 정말 눈치가 없다니깐. 나와 형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막내를 휘어잡았다. 얌마 너 진짜야? 왜 말도 안했어. 이 자식 미용실 한번 데리고 와.
형수를 바래다주고 온 형은 내게 나가서 둘이 술을 한잔 하자고 했다. 다음날 아침 당번이라는 생각이 떠오르긴 했지만 워낙 분위기가 좋았기 때문에 별 소리 않고 따라나섰다. 형을 따라 간 곳은 동네 포장마차였다. 가끔 들리는지 형은 메뉴판도 보지 않고 꼼장어를 주문했다. 예상했던 대로 형은 형수나, 막내의 진로나, 우리의 미래 같은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다 4번째 병을 땄을 때 형은 문득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너 기억나? 응? 뭐가? 가만 있어봐 벌써 몇 년 전이냐. 9년 전인가 10년 전인가. 나 집나가던 날. 아 형 미쳐서 나랑 싸운 날? 뭐? 이 자식 말하는 거 봐라. 하하하. 그래 그날 말야. 이제는 말을 해도 되겠다. 아니 이제는 말을 할 수 있겠다 싶다. 무거운 짐을 들어올리기 전처럼 호흡을 고르며 형을 말을 이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오르는 취기를 억누르며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당시의 형은 신문배달 일도 그만두고 좀 막막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미뤄뒀던 아버지의 사망 신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보내드려야지 생각하고 구청에 가서 사망신고를 하고 확인 차 호적등본을 떼어봤는데 그곳에 적혀 있는 어머니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직 어머니는 아버지의 호적에 올려져있었고, 무려 주소지까지 적혀 있었다. 눈을 비비고 아무리 봐도 주소지였다. 집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알아보니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도시의 외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음날 형은 바로 그 동네를 찾아갔다.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외곽의 달동네였다. 그래서인지 주소를 찾는 게 쉽지가 않았다. 동네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어 해당 건물을 찾아갔지만 재개발 대상지라 아무도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포기할까도 생각해봤지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다시 찾아갔다. 아침에도 가보고 오후에도 가보고 저녁에도 가봤다. 그즈음에는 이미 학교 같은 건 안중에도 없던 거지. 오랫동안 묵혀 왔던 이야기라 쉽지 않은지 형은 연거푸 잔을 내밀었다. 나도 눈을 질끈 감은 채 술을 넘겼다. 어느 날 평소처럼 또 그 동네를 찾았다. 어슴푸레 날이 저물기 시작했을 때 버스에서 내렸고, 그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완전히 져서 제법 어두웠다. 그런데 별 기대도 하지 않았던 그 걸음 끝에 형은 불이 켜진 그 집 창문을 볼 수 있었다. 떨리는 손, 그보다 더 떨리는 가슴을 매만지며 형은 문을 두드렸다. 있었어? 엄마가? 한번 씩 웃어 보이더니 형은 잠시 뜸을 들였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뒤에 마침내 문이 열렸다. 희미한 전등불을 뒤로하고 중년여성의 실루엣이 서있었다. 엄마였어. 독 사과를 삼킨 백설공주처럼 나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다시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놨다. 뜨끈한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주위를 살핀 뒤 꺼억하고 한번 트림을 해봤다. 뜨거운 차가 들어가니까 다시 술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현기증이 느껴져서 소파에 등을 기대고 목을 뒤로 젖혔다. 어서 빨리 술이 깨야 할 텐데.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천정의 무늬가 사라지고 그날 어둠 속 형의 모습이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 형은 자신도 모르게 엄마를 불렀다. 가진 것이라곤 아주 어릴 때의 기억 뿐 이지만, 왠지 분명히 엄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나마 삼형제들 중에 엄마를 가장 분명하게 기억하는 형이었다. 누구세요? 엄마는 형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위험한 사람이 아닐까 싶어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그 말에 형도 조금은 흔들렸지만 이내 다시 확신을 가지고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엄마 나야 나 인수야. 엄마 아들 인수. 엄마가 외할아버지께 부탁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그 말에 엄마가 흔들렸다. 인수? 인수라고? 아닌데, 우리 인수 이렇게 안 생겼는데. 엄만 아들도 못 알아봐? 나야 인수. 형은 생각나는 대로 엄마의 기억을 늘어놓았다. 추억이 한 개씩 널 부러질 때마다 엄마의 눈동자는 점점 크게 흔들려갔다. 그리곤 마침내 두 모자는 어두운 길 위에서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너 여기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니. 여긴 왜 왔어. 생각보다 빨리 정신을 가다듬은 엄마는 이내 아들을 몰아세웠다. 엄마의 정색에 형도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었다. 아니, 엄마. 아들이 왔는데 그런 말 밖에 못해? 안 돼. 안 돼 인수야. 이제 다시는 여기 찾아오면 안 된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동생들한테는 절대 말하면 안 돼. 알겠지? 엄마 말 들을 수 있지? 엄마는 있는 힘을 다해서 형을 떠밀었다. 넘어질 듯 위태위태하게 형은 밀려갔다.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긴 듯 그렇게 얼마간을 걸어 내려가던 형은 다시 돌아서 달려 올라갔다. 말을 듣지 않고 돌아온 아들을 엄마는 곤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너 정말 엄마 말 안 들을래? 니가 이러면 엄만 더 살 수가 없어. 아냐. 엄마. 엄마 말 들을게. 들을 건대. 엄마 나 한번만 안아줘. 이렇게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냥 가. 한번 안아보기라도 하고 가자. 응? 너무나도 서럽게 울면서 매달리는 형이었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엄마는 형을 안았다. 벌써, 이렇게 크게 컸구나. 정말 듬직하게 컸다.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장성해버린 아들을 안으며 엄마도 다시 눈물을 흘렸다.
딸랑하는 소리.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소파에서 일어났다. 깊은 꿈이라도 꾼 걸까 정신의 일부는 아직 목을 젖힌 채 소파에 누워있었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니 유리문 사이로 중년의 여성 한분이 목을 배꼼 내밀고 있었다. 손님이었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웬 손님일까 싶었지만, 술자고 있던 걸 들킨 게 면구스러워서 하는 둥 마는 둥 인사를 하고는 얼굴을 문지르며 안내를 했다. 따뜻한 차 한 하시겠어요? 대강 미용의자와 자리를 세팅하며 물었다. 아니오. 괜찮아요. 구름이 움직이는지 아까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잠시 진해졌다. 그리고 그래서인지 참 따뜻한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그녀는 외투를 벗고 미끄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팀장으로 승진하면서 얻게 된 내 전용 의자였다. 머리 어떻게 하시겠어요? 빗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늠하며 물었다. 기르든 짧게 치든 관리가 어려울 것 같은 웨이브의 곱슬머리였다, 글쎄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요? 봐서 무난하고 예쁘게 잘라 주세요. 가끔 이렇게 디자이너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물어보는 손님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손질이 쉽진 않은 머릿결이었기에 계속 그녀의 머리를 빗으며, 유리창에 비친 그녀를 확인하기도 하며 뜸을 들였다. 구상을 마치고 천천히 가위를 집어 들었다. 늘어진 햇살은 어느새 그녀의 자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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