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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65

[단편소설]그녀의 자리 그녀의 자리 미끄러질 뻔 했다. 봄을 바라보고 잔뜩 푹해진 날씨였고,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그리고 한 차례 행렬에 의해 부지런히 밟히면서 땅바닥은 어지간히도 질퍽거렸고 물 만난 미숫가루처럼 신발에 달라붙었다. 영정을 든 팔이 저려서 조금 쉴 겸 멈춰 섰다. 잠깐만 바닥에 내려놓으면 안 될까 싶어 주위를 둘러봤다. 어른들도 이제 무얼 해야 하나 어찌할 줄을 모르고 서로 눈치만 보는 통인지라 그냥 조금만 더 참기로 했다. 꽃향기가 코를 찌르는 영정을 조금 더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터벅터벅 땅만 바라보며 걸었는데 뒤를 돌아보니 어느덧 꽤 많이 걸어 내려온 듯싶었다. 아버지가 묻힌 곧도 이제는 무수히 많은 나뭇가지들로 겹겹이 쌓여 보이지 않았고, 그저 인부 아저씨들이 피운 불의 연기만 방향 없이 멀.. 2018. 10. 30.
[단편소설]왕자와 거지 왕자와 거지 사람들이 지나간다. 담배연기 건너 건물 입구를 통해 뿜어져 나오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동자에 성에라도 끼는 것처럼 시야가 뿌옇게 될 때가 있다. 잘 봤어? 못 봤어. 어땠어? 어려웠어. 공부한 거 많이 나왔어? 안 나왔어. 남자도 여자도. 선배도 후배도. 그래 정말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재잘재잘 조잘조잘 말이 많다. 시험이라는 것이 끝난 직후 바로 그 시간에는 모두들 이렇게 그 동안 인내심이란 놈으로 묶어 두었던 그 무엇인가를 해방하는 심정으로, 아니 혹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 그렇게 그들 안의 그 무엇인가를 분출해낸다. 건물 출입구의 구석진 곳에서 그들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다 보니 나는 그렇게 그들처럼 누군가에게 시험에 대한 에피소드나 어려웠던 점을 토로할 수가 없었는데 .. 2018. 10. 30.
[단편소설]프레데터는 이렇게 말했다 프레데터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중학교 2학년 때 즈음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프레데터를 만났다. 어느 계절이었을까. 춥진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늦봄이나, 여름, 그래 아무리 늦어도 가을에는 일어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굳이 한정을 짓자면 유난히 길고 길게 느껴져 무서울 정도로 많은 추억을 촘촘하게 품고 있던 그해의 여름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싶다.그때만 해도 내가 살던 동네는 그 도시에서 새로 개발된 아주 깔끔한 동네였고, 내가 살던 아파트도 그와 함께 꽤나 젊은 건축연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다만 조금 특이한 점이 있었다면 완전히 새로 개발된 지역이 아니라. 기존에 개발됐던 곳을 몇 년이 지난 후에 새로 개발한 탓에 내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지도 위에 그 경계를 그릴 .. 2018. 10. 30.
[단편소설]집에 가는 길 집에 가는 길 땅은 화가 나 있었다. 누군가 잘근잘근 씹어놓은 검은 하늘 밑으로 무수한 빛들이 힘겹게 땅의 표정을 비추고 있었다. 제법 밝은 빛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땅의 혈색은 좋질 않았다. 변함없이 시커먼 얼굴로, 유흥가의 가로등 불빛 아래 희번덕이는 눈빛으로 살벌하게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겁게 내리깐 눈동자. 아무리 걸어도 그 눈동자를 벗어날 수 없었다.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젖은 아스팔트는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미끄러움으로 인해 더욱 더 위험해 보였다. 이미 상당히 늦은 시간일 텐데도 불구하고 드문드문 코너에서 만나거나 저 멀리에서 걸어오는 사람의 형상은 지하 무저갱에서 뱉어 올린 가래침과도 같이 느껴졌다. 나는 그들을 의식하는 것이 너무 티 나지 않게, 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긴장시킨 채.. 2018.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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