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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독후감 -이만교의 『나쁜 여자, 착한 남자』

by 통합메일 2019.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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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교의 나쁜 여자, 착한 남자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던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쓴 작가 이만교가 쓴 책이다. 읽고 싶다고 생각되는 책의 제목을 적어 두었던 목록을 잊어버리는 바람에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책꽂이 사이를 헤매다가 작가의 이름을 보고 멈추어, 제목에 이끌려 집은 책이었다. ‘나쁜 여자, 착한 남자라니. 마치 Vive라는 발라드 듀오가 부른 노래의 제목을 연상케 하는 제목이었다.

책을 펼치고 미끄러지는 손가락으로 목차를 찾았다. 5개의 챕터로 나누어져 있었다. 주섬주섬 책의 무게라도 가늠하듯 페이지를 들춰보고서는 전에 읽었던 책에 부록으로 끼워져 있던 작품을 발견하면서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책은 단편집이었다.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고, 단편의 순서대로 하나씩 읽어 나갔다.

 

<목차>

1,나쁜 여자 착한 남자

2.농담을 이해하다.

3.눈빛과 마주치다.

3.그녀 번지점프 하러 가다

4.투레질

5.너무나도 모범적인

 

 

1.나쁜 여자 착한 남자

우선은 책의 제목과 같은 이름의 단편으로 시작하게 된다. 책을 대표하는 작품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작가만이 알 수 있으리라.

아주 나쁜 남자가 나온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아주 나쁜 여자가 나온다. 아 물론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적인 도덕의 규범의 잣대를 들이댔을 때의 이야기이다. 혹자에게는, 그러니깐 사회에 범람하고 있는 상식적인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게 된다면 어쩌면 이 나쁜 주인공들은 그렇게 나쁘지는 않고 그저 살아가는 요령이 있는 인물들로 비추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착한 여자가 나온다. 이 역시도 어찌 본다면 착한 게 아니라 어리석고 둔하여 살아가는 요령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으로 비추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의 제목이 나쁜 여자 착한 남자인가 보다 싶었다. 물론 맨 처음 이 글을 (힘겹게) 다 읽고 났을 때는 분명히 글의 줄거리나 임팩트는 어느 정도 머릿속에 기억이 되고 있는데 도무지 글의 제목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가 없어서 더욱 힘겨워 했었다. 나의 도덕관이 사회의 도덕관과 그렇데 크게 상이하지는 않을진대 대체 여기에서 왜 남자가 착한 역할이고 여자가 나쁜 역할인지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작가가 이 글의 내용을 비꼬아서 제목을 정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 이야기 속에서의 여자는 정말 착하다. 순진하고, 성실하며, 건전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상당히 헌신적이며,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약삭빠른 행동을 하는 것을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그런 여자이다. 그리고 남자는 사회에 만연하는 부조리를 단순히 방관만 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 부조리들을 흡수해서 그리고 그것들을 이용해서 더욱 약삭빠른 부조리를 재생산해내는 인물이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그런 자신의 행위에 별다른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 정도쯤 되면 누구라도 당연하게 이 글의 제목은 착한 여자, 나쁜 남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분명히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규범에 따르면 착한 여자, 나쁜 남작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를 더듬어 보자면 작가는 아마도 저런 여자가 나쁜 여자가 되고 저런 남자가 착하 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고발하는 의도에서 이러한 제목을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라는 공간에서는 타인을 배려하고 헌신하는 인간들을 어리석에 바라보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인간들을 영리하고 위대하며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시선이 암묵적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은가? 물론 TV나 라디오 신문 혹은 각종 문학이나 자기개발서에서는 쉴 새 없이 좀 더 헌신적이고 도덕적이며 올바르고 건전한 훌륭한 인간이 되라고 강조하고 강요하고 있지만, 그런 침 튀기는 설교와는 너무 대조적으로 흘러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세월 동안 어느새 세상에는 그러한 회의주의적인 시선이 형성되어 버려있고, 나아가 이젠 어느새 그것이 또 하나의 상식이 되어 버릴 위기에 처해 있는 그러 세태를 고발하고 있다고 생각되다.

 

2.농담을 이해하다.

이 글 역시도 참 어려운 대상이었다. 글의 초입부터 자신을 농치’, 즉 사람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오고가는 농담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고백하며 이야기를 시작해 나가고 있는 화자는 이 글에서 정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이 글에서 중요한 소재는 바로 농담이다. 그것은 우리가 순수했던 어린 시절에 주고받았던 그런 농담이 아니다. 단순히 서로 기분을 들띄우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어른이라는 존재로 성장을 하고,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과거의 순수를 허물처럼 벗어 던져버린 이후 오랜만에 만난 원수처럼 살아가야 하는 사회에서 농담이라는 것은 일종의 무기이고 흉기이다. 사회 안에 존재하는 규범이나 규칙들 그것은 공공연하게 위반되고 있는 것이고, 물론 위반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오히려 현실적으로는 위반해야만 하는 것으로 까지 인식되고 있다. 이를테면 불륜과 같은 것이다. 남녀노소 너나 할 것 없이 서슴없이 불륜을 논한다. 인간이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의미의 이 단어가 함축하는 의미는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언급되지 않지만 바로 그 농담을 통해서 수면 위로 잠시 농염한 호흡을 내뿜고는 다시 깊은 심해 속으로 침전해 들어간다. 농담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 상대방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지를 정탐하며, 그렇게 찾아온 정탐꾼을 속이고, 어쩌다가 궁지에 몰리게 되면 면죄부라도 꺼내듯이 꺼내어 그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게 해주는 유용한 도구. 그러한 유용성의 옷을 입고 어느새 농담이라는 것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능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오죽하면 농담을 못하는 사람, 즉 사교성이 없는 사람은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스로를 농치라고 독자들에게 고백한 화자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후배를 대하게 된다. 그는 화자만큼이나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지 못할뿐더러 특히나 술만 취하면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내보였다. 그래서인지, 즉 동질감에 의해서 감정이입이라도 된 것인지 그는 후배가 처해 있는 어려운 상황, 그의 고민 등을 주의 깊게 들어주고 본의 아니었지만 꽤나 적극적으로 그를 도와주게 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그는 팀장으로 승진을 하게 되었고, 결국 그 역시도 농치에서 벗어나 농담에 꽤나 능숙한 인간이 되었다. 아니 오히려 화자는 다시 독자에게 고백을 한다. 사실 나는 농치가 아니었다. 그저 농담을 못 알아듣는 척을 했던 것이다. 세상은 무서운 곳이기 때문에 세상이 하는 농담을 알아도 못 알아듣는 척 혹은 못 알아들어도 알고 있는 듯이 적절하게 넘어갈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 농담에 아주 능할 자신이 없다면 아예 못 알아듣는 사람인 척을 하는 게 좋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그는 농담에 꽤나 능한 인간이 되었고 후배의 고민 역시 어느 정도는 해결이 된 듯싶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 장면, 즉 앞으로 그가 살아가야 할 모습을 보면 뭔가 씁쓸한 기분이 든다. 서로가 아무런 대상도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농담이라는 것을 통해서 그런 대화를 유지해 나가고 있는 모습이다. , 그들 사이에 그들을 매개하고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결국 그것은 공허한 관계에 지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농담으로 가득 찬 사회, 농담으로 얼룩진 사회, 그렇지만 그런 농담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고 차라리 농담을 못 알아듣는 척을 해야 하는 사회에서 과연 인간은 역시 인간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면서 제대로 된 진정한 관계를 찾을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들게 만들었다.

 

3.눈빛과 마주치다.

이 글은 자신이 아는 사람과 얼굴이 매우 닮은 사람을 만나는 것을 모티브로 작동한다. 바로 그것이 이 이야기를 이어 나가게 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된다. 어느 순간부터 사물과 사물, 사람과 사람의 차이점의 경계가 무너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분명히 다른 사람이겠지만 자시이 알 던 사람과 너무나도 닮아서 심지어는 똑같이 생겼다고 까지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화자는 종종 목격하게 되다. 그런 것을 신기하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중에 그는 더욱 더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이번에는 반대로 상대방 쪽에서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자신에게 아는 체를 해온 것이다. 그런 경험을 많이 해봤기에 이런 경험을 하는 것이 비단 나뿐만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서 반갑기라도 했는지 화자는 장난으로 그 아는 체에 맞추어 역시 그녀가 아는 체를 했던 사람인 체를 해버렸다.

하지만 반전은 여기에서부터다. 사실 그 여자도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있었던 것이고 그녀는 그가 생각하던 진짜 그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 그녀(A)는 그를 B로 생각하고 아는 체를 했지만 그는 사실 B가 아닌 것이고, 반대로 역시 그가 그녀(A)로 생각했던 그녀는 그녀(A)아닌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이야기에서는 AB가 거세된다. 하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

얼마 뒤 그녀는 진짜 B를 만났다. 하지만 과거의 이미지만으로 B를 기억하던 그녀에게 있어서 B는 너무나도 많이 변해버린 존재였고 그래서 낯설었다. 오히려 현재의 B보다 주인공이 그녀가 알고 있던 그녀가 간직하고 있던 B의 이미지와 더욱 더 닮았고 그래서 그녀는 실제로 그와 B가 동일인물일 수도 있다고까지 말한다.

나는 이 부분이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 자아 외부의 타인을 인식하게 되고 그 기억을 갖게 된다면 살아가면서 내가 경험하게 되는 시간의 흐름만큼이나 그러한 이미지도 함께 성장을 하고 변화를 거듭하여 결국에는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타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이미지에 있어서도 우리는 온전한 과거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간직하게 되는 기억 역시도 어쩌면 기억하고 싶은 것들로만 골라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고 더불어 훗날 뒤돌아 봤을 때 어김없이 그것은 상당히 왜곡되어 있을 수밖에는 없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나 그 안의 사람들과의 관계나 자신에 대한 생각마저도 사실은 우리 스스로의 착각이 아닐까. 결국 아무도 동일한 세계를 마주하지 못하고 이데라를 경험하지 못하고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갇혀 살아가며 그러한 이미지에 너무나도 집착한 나머지 그만 그 이미지만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고, 우리가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인식되고 있으리라는 진정한 나의 자아라는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현상은 사회가 점점 더 가식과 위선으로 포장되어 나갈수록 더욱 심각해 질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4.그녀 번지점프 하러 가다.

그야말로 평범한 주부 그래서 권태에 빠지고 그래서 더욱 평범하고 또 그래서 또 권태에 빠지는 일상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글의 초입부터 지독한 권태와 짜증이 묻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이 이야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작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유부녀들에게 보편적인 일이라고 그려지고 있는 듯하다.

그런 지루한, 그래서 비참하기까지 한 일상에서 그녀는 변화를 시도한다. 그저 변화라고만 적기에는 굉장한 도전, 그것은 바로 번지점프였다. 사실 그녀는 번지점프라든가 그런 스릴있는 것들을 그다지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아마도 싫어하는쪽에 가까웠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번지점프를 하기 위해 하루를 온전히 비웠던 것은, 그러니깐 그런 그녀를 그 높은 번지점프대로까지 내몰았던 것은 비단 남편 같은 한 두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구조적인 책임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 구조 속에서 그녀는 스스로가 아마도 살찐 소파같은 존재로 생각되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것은 더욱 통쾌한 일이었다. 그녀가 번지점프를 하기 위해 집을 나가는 규모의 외출을 감행했다는 것은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에게 있어서 살찐 소파가 걸어서 집을 나가는 것과 같은 충격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번지점프를 하러 갔던 그녀는 안전하게 하지만 스릴 있게 하지만 생각보다는 빠르게 무덤덤해진 채로 뛰고 다시 지상에 내려왔다. 그리고 너무나도 기민하게 움직였던 탓인지 몰라도 아무도 자신이 번지점프를 하고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태가 벌어졌다. 실로, 살찐 소파가 제 발로 걸어서 집을 나가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녀는 거기에서 머물지 않는다. 물론 번지점프를 다시 뛰거나 하지는 않는다. 꽤나 무서웠기 때문이다.

대신 시기적절하게 그녀의 일상에 파동을 일으키는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번지점프를 하러 가서 만난 청년이었다. 그때 찍은 사진을 전해주기 위해 만나자는 이 청년의 제의에 그녀는 그만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버렸다. 한참 어린 연하의 남자의 유혹을 받은 것처럼 그녀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야한 속옷을 입고 약속장소에 나갔다. 하지만 그녀를 맞이하는 것은 그때의 그 청년과 그 청년의 여자 친구였다. 사진만 주고 바이바이였다. 그리고 그들이 먼저 떠난 자리에 홀로 남겨진 그녀를 향해 스멀스멀 다가오는 그것!

그래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사실 그 청년 커플은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혼자 남은 그녀에게는 이건 강간당한 것보다 더해라는 말을 읊조릴 정도로 무서운 감정이 침투했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래 결국에는 그렇게 될 것이니 주부가 집에서 밥이나 하지 왜 싸돌아 다녀서 그런 추태를 부려?”라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상당히 많은 것들을 풍자적 시선으로 풀어내는 작가이기에 읽을 때는 즐거움이 있고 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말 어렴하게그리고 희미하게는 느낄 수 있지만 거기서 느낀 것을 뭔가 말로 풀어내고자 한다면 이렇게 쉽지가 않다.

결국은 자의적인 해석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일상을 탈출하기 위한 주인공의 도전을 회상해 볼 때 사실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 그러한 도전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그 정도의 사회적 공감대는 형성되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일탈이 완전한 공감을 얻고 또 지지를 받을만한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도 역시 아니다. 문제는 그녀에게 찾아온 그러한 권태이고 그러한 권태는 역시 우리들 모두의 미래에 혹은 현재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란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권태를 피하려다가 결국 더 무서운 것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 권태라는 것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은 우리에게 그다지 달갑지 않은 대상으로 인식된다. 지겨움, 혁신과 쇄신 혹은 신선함의 부재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가급적인 만나고 싶지 않고,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새롭게 우리가 삶을 갱신해 나아가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세태가 아닌가 한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 옛날 우리 어르신들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자식을 바라보며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인간의 삶을 좀 더 발전시키고 좀 더 높은 단계로 올리기 위해서는 그러한 권태에 대응한 쇄신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쇄신의 방법과 방향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 문제는 많은 이들이 그러한 권태의 원인이 어디 있는지 오해하고 있는데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권태가 찾아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 내가 왜 이러지, 권태긴가?”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대체 원인이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되고 결국에는 삶에 변화를 주자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인데. 그 원인을 대부분은 자신의 일상생활 스케줄에 두고 있고, 자신이 일상에서 마주한 인간의 종류와 수에 두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스케줄을 변경해서 평소에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하려고 할 것이고, 만나보지 않은 사람을 만나보려 할 것이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 관광을 가기도 하는 것이고, 큰맘 먹고 책을 사거나, 교양강좌를 듣거나, 새로운 사교모임을 기웃거리기도 하는 것 같다.

이런 시도들은 물론 좋다. 하지만 마음가짐이 문제라는 생각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일탈은 어디까지나 일탈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쉽게 너무나도 쉽게 망각하고 시작한다는 점이 문제다. 아무리 그렇게 일상을 벗어난다고 해도 결국 그들이 돌아올 것은 일상 밖에는 없다. 마치 여행과도 같은 것이다. 걸어서든 자전거를 타고든 버스나 기차를 타고든 두려움 반 설레임 반으로 여행을 떠나지만 여행은 언제나 여행이다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여행인 것이다. 즉 아예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갔다 오는것이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가진 욕심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실 그것은 그들이 자초한 것이고 달리 말하자면 그들이 원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욕심이란 무엇인가? 결국 좋은 대학을 가서 좋은 결혼 안정된 직장과 수입과 보금자리 등등을 원했던 것이 아닌가? 그런 안정됨이 바로 권태가 자라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 아닌가? 그렇다면 결국 현대인들은 제 발로 그런 권태의 소굴로 걸어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래서 생각하기로는 현대인들은 권태의 정체와 그 원인에 대해서 좀 더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들의 스케줄과 관계하는 사람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스케줄이 연원하는 근원과 그 사람들과 그런 관계를 맺게 된 자신에게 바로 문제가 있지 않나 먼저 돌아보고 그 다음에 일탈을 하고 그런 일탈을 일상으로 흡수시키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5.투레질

이 글은 말년휴가를 나온 군인이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정체성이 아닌가 싶다. 사실 이만교의 글들을 보면 일관적으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정체성의 문제이다. 물론 이만교만이 이런 정체성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대표적으로 편혜영 같은 작가가 좀 더 밝은 느낌으로 그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만교의 경우에는 좀 더 일관되고 노골적이라는 기분이다. 독자의 눈앞에 계속해서 그 문제를 들이밀고 있다.

이야기는 동명이인의 문제를 가지고 진행된다. 과거 사귀었던 연인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계속 이어진다. 그러다가 결국 실제로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새로 만난 이 사람은 과거의 그 연인과의 차이점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과거의 그 사람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말해보라는 말에 주인공은 그저 코에 있는 점 정도가 다르다고 말 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 점만 빼면 두 사람은 완전히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인가?

공교롭게도 새롭게 만난 이 여자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상당한 집착을 보이는 자아였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말 속에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차별화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확고하게 자리 잡아 있었고 그런 사고방식에 따라 살아온 듯 보였다. 다른 사람과 같은 옷을 입거나 같은 책을 입거나 같은 사고를 하는 것에 상당한 불쾌감을 보이는 캐릭터였다.

인간의 정체성이란, 본능일까 아니면 시대의 조류일까. 그러니깐 조류 독감 같은 시대의 열병일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자신의 특별함을 표현하고 그것을 상대방에게 각인하면서 쉴 새 없이 다른 이들에게 특별한 존재로 인식되고 기억되기를 갈구한다. 그래 정말 정말 그렇다. 안간힘을 써가며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어느 샌가 누구나 그렇게 자신만은 이 세상에서 좀 더 다르고 특별한 존재로서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 살아가고 그래서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특별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런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러한 삶 역시도 하나의 패턴이 될 뿐이다. 물론 그러한 사고를 하지 않으며 그냥 시류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가는 인간들도 적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화를 시도하는 사람 역시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인 것이다.

이것은 상당한 아이러니를 포함한다. 죽도록 자신을 차별화시키려고 해봤자 그것은 결국 더욱 깊고 깊은 보편성의 늪으로 자신의 자아를 내던져 나가는 꼴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타고난 모방의 능력에서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현상세계의 사물이든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이데아가 같은 이미지이든 간에 인간은 쉴 새 없이 그런 것을 모방하며 살아간다. 물론 애초의 그러니까 최초의 차별주의자는 그러한 모방이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그 아무도 자신의 독립성과 특별함을 생각해내지 못했을 당시가 존재했던 적이 있다면 그는 아마 인류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발현한 사람일 테고 그 이후의 사람들로부터 중요한 그 무엇인가를 앗아간 가장 잔인한 존재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지워진 보편성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있을까. 보편성을 통해서 윤리규범을 만들어낸 칸트의 시선은 일단 외면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러한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불가능하다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태어나서 보편성의 늪에 던져진 채로 권태를 느끼며 그러한 권태에 무감각해지는 나이가 될 때까지 고통스러워하고 배알이 꼴리는 느낌을 가지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나는 꼭 그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갱신해 나아가는 니체의 초인을 생각해볼 때 인간에게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새롭게 함으로써 그 존재를 신선하게 유지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모방의 위험, 하다못해 모방을 했다는 위험을 쓸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지만 그런 위기마다 인간은 새로운 변화를 생각해냄으로써 그런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구조의 변화가 상당히 필요하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가르치는 것과 만들어내는 것의 비율을 아주 신중하게 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인류에게 내재된 가능성을 죽이지 않아야 한다. 창의력이 중요하다는 말이 되겠다. 도구적 인간, 원시시대의 인간이 돌도끼를 만들었다면 오늘날의 인간은 그러한 창의력으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만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지킬 수 있을 것이다.

 

 

6.너무나도 모범적인

맨 처음 이 글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지금도 나는 이 글이 대체 작가의 자서전인지 혹은 상상에서 기원한 소설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글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이 바로 만교이고, 공간적 배경도 작가의 고향인 충주인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듯 적어 나가고 있어서 정말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이것은 아마도 소설이리라.

그나마 이 글을 읽으며 작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은 주인공 소년 만교의 대쪽 같은 성격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올 곧고 바른 성격의 소유자. 그것은 내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다소 눈살을 찌푸려 왔던 그런류의 인간과 좀 많이 닮아있었다.

내가 제일 처음 작가 이만교를 접했던 표정관리주식회사를 우선 생각해 본다면 각종 유머와 풍자로 가득했던 글로서 그때만 해도 박민규의 글과 그의 글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고,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보면 기존 사회의 고정관념이나 세상의 선입견 등에 대하여 강한 반대를 외치는 그 캐릭터는 나로 하여금 나름대로의 이만교라는 인물을 그리게 만들었는데, 그 이미지는 이 글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래서 이 글을 소설로 인식할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좀 불편했던 것도 같다.

아무튼 본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상술했듯이 아주 올곧은 성격의 소녀이다. 삼형제 중의 차남으로써 형과 동생이 있지만 그들과 비교했을 때도 유난히 바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래서 그의 성격이 이 글의 모티브가 된다.

이 글은 가장 맨 앞에 등장하는 나쁜 여자, 착한 남자와 상당한 대응을 이룬다. 그 글에서 등장하는 여자의 경우에도 그녀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녀의 올곧은 성격때문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그녀의 성격 덕분에 그녀는 사회가 옳게 생각하는 도덕성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나쁜 여자로 낙인찍히게 되고 결국에는 자살이라는 방법을 선택하게 되는 아주 슬픈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 글은 좀 다른 전개를 보여준다. 마치 앞서 유명을 달리한 그녀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주인공 소년의 올바른 성격은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준다. 우선은 같은 뱃속에서 나온 형제들에게다. 어지간한 잘못은 넘어갈 법도 하건만 소년은 어떤 잘못이건 부모님께 고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도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모난 돌은 어떻게든 세상이 가만히 놔두지를 않는 법이다. 일단은 가끔씩 형제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동네에서 가장 불량스러운 형과의 갈등이다. 여름성경학교에서 어쩔 수 없이 부대껴야 하는 처지에 놓인 두 사람은 서로 으르렁거린다. 주인공 소년은 불량소년보다는 나이가 어리지만 자신이 가진 굳은 신념을 가지고지지 않고 맞섰다. 물론 처음에는 그 불량소년이 일부러 심불을 부려 주인공을 유난히 괴롭히기도 했지만, 반전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턴가 그는 주인공 소년을 철저히 신뢰하기 시작한 것이다. , 자시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손해를 보는데도 불구하고 진실과 옳은 방법을 추구하는 소년을 보면서 그 역시도 감화를 받을 것 까지는 아니지만 놀이를 하다가 분쟁이 생기거나 할 때는 그 소년에게 분쟁을 조절하는 역할을 맡길 정도로 그를 신뢰했고 나중에 장성하여 그 지역의 폭력배가 된 이후에도 주인공을 신뢰하고 아끼는 그런 사이로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글을 마치면서 작가는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이 소년의 입을 빌려 독자들에게 마지막 말을 전한다. 바로 그런 아름다운 마음 깨끗하고 올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참 좋고 아름답고 예쁘게 느껴진다는 것. 모두들 그렇게 예쁜, 아이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좋겠다는 소망을 전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그런 아이들의 마음이 착한 마음으로 비추어지는 사회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일 것이라고 보여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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