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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

[영화]퍼머넌트 노바라를 보고 - 인본주의의 유토피아를 보다

by 통합메일 2013.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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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머넌트 노바라 (2010)

Permanent Nobara 
8.1
감독
요시다 다이하치
출연
칸노 미호, 코이케 에이코, 이케와키 치즈루, 우자키 류도, 나츠키 마리
정보
드라마, 로맨스/멜로 | 일본 | 100 분 | 2010-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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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칸노 미호 페이지 http://movie.daum.net/movieperson/Biography.do?personId=45388&t__nil_Biography=tabName

다음 퍼머넌트 노바라 페이지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ain.do?movieId=53560





이 영화는 한가로운 어촌 마을을 배경으로 하여 일어나는 일들을 그렸다.

주인공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노바라 미용실의 원장 노바라, 그녀의 딸 나오코, 그리고 그녀의 딸 모모 정도라고나 할까. 삼대로 이어지는 여자들이다.

위 구성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 영화에서는 남자가 끼어들 영역이 극도로 제한된다. 아무래도 미용실이라는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얻게 되는 효과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고,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의 문제를 가지고 인간 본질에 존재하는그 무엇에 접근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그렇게 그 의도를 짐작해 보는 것이다.



노바라의 손녀이자, 나오코의 딸인 모모

무척 귀엽다.


영화에서 나오코는 남편과 이별하고 딸과 함께 친정으로 돌아온 이혼녀로 나온다. 여장부 같은 어머니와 귀여운 딸을 키우며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그녀로 그려지지만, 그녀는 마을 학교 선생고 연애 중이다. 아무래도 일본은 우리나라 보다는 이혼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건전한 편에 속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녀가 외간남자와 만나는 것은 그리 곱게 보이지 않는 편인 모양인지 두 사람의 만남은 사뭇 조심스럽다.


노바라 미용실의 원장 노바라는 인생에서 무수히 많은 남자들을 겪어왔고 나오코는 그 중 한 사람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다. 얼마전까지도 나오코는 새로운 아버지, 그러니까 노바라의 새로운 남편과 살았으나 그 새 아버지는 이미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상태다.


마을에는 나오코와 친한 친구가 두 명 있다. 미쓰에와 토모다.

미쓰에는 술집을 운영하는 데 기둥서방을 두고 있다. 그 역시 여성편력이 심한 양반이라 아내의 눈 앞에서 다른 여자를 희롱하는 등 아주 행보가 불순하다. 결국 미쓰에는 차를 몰고 그를 치어 버린다.


토모는 성실한 여성이지만 남자 복이 유난히 없는 케이스에 속한다. 그녀를 거쳐간 남자들은 모두 여자를 등쳐먹는 부류였다. 폭력도 서슴치 않는 이들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드디어 때리지는 않는 남자를 만났지만 어김없이 노름꾼이었다.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남자들은 대개가 이런 느낌을 준다. 뭐랄까.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자신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세상 앞에서 좌절하여 이상행동 혹은 방어기제를 드러대는 인간들이라고나 할까. 그런 와중에서 숱한 고통들이 여성들을 찾아오고, 여성의 삶이라는 것은 그러한 고통이 익숙해지고 무덤덤해져 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라는 한 편의 풍경을 그려보여주는 것이 퍼머넌트 노바라라는 미용실에 모인 다양한 세대의 여성들의 군집이라고 나는 보았다.

















극중에서의 칸노 미호

새하얀 피부에 진한 쌍커풀

그리고 수수한 옷차림

실로 청순의 극치가 아닌가

구글 이미지 검색: https://www.google.co.kr/search?q=%EC%B9%B8%EB%85%B8+%EB%AF%B8%ED%98%B8&newwindow=1&client=opera&hs=bYi&channel=suggest&source=lnms&tbm=isch&sa=X&ei=IT2oUuD_NofwlAWZ0ICwCQ&ved=0CAkQ_AUoAQ&biw=939&bih=935#imgdii=_


그런 와중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으로 보이는 남자가 하나 있으니, 바로 나오코와 연인 사이로 나오는 마을 학교 과학교사인 <카지마>다. 또한 한편으로 나오코 역시도 세상 뭇 남자들에 대한 뼛속 깊은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모종의 평안을 외면적으로나마 보여준다는 점에 있어서 정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녀 역시도 어쩔 수 없는 생의 외로움을 가지고 있는 인간인 듯 하다. 겉으로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살고는 있지만 카지마와의 대화를 보면 그녀는 이 마을과 사람들을 싫어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물론 이 대사를 표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마 그런 생각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의 모습은 동경 같은 대도시의 매우 번잡한 풍경과 전깃줄이 빽뺵하게 이어진 하늘 밑의 주택가이거나 혹은 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한적한 시골마을인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은 그런 방식으로 양극화되어 가는 일본 사회의 모습(혹은 그것을 확장한 세상의 모습)인 것이고, 그 속에서 인간이 겪어야 하는 호오의 양립불가능한 감정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정체성 혼미, 결단에의 직면, 좌절, 실존의 문제, 외로움, 불안 등을 잔잔한 수면 밑에서 일어나는 듯한 풍경이라고 보았다.


평온해 보이는 나오코는 영화의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그 감정을 폭발시킨다. 짜지 않은 음식에 만족하고 살아갈 수 있겠다고 다짐한 인간처럼, 그녀의 생활은 담백함으로 계속될 것처럼 보여졌으나 결국에는 그녀의 삶 역시도 결단의 순간, 외로움에 직면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필요한 준비물이 있다면, 영화에 등장하는 조연들에 대한 타자화를 지양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평온하고 담백한 생활에 몸을 담근 나오코에만 집중하면 영화의 백미를 즐길 수가 없다. 소소해보면서도 이런저런 말썽으로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 집중하게 되다 보면 언젠가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했던 생각, 즉 "삶은 왜 꼭 이래야만 하는 것인가."하는 질문에 직면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그런 질문에 있어서 나오코는 관찰자인 동시에 그러한 질문을 잉태한 주체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질문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의 문제일 따름이다.


어쩌면 그러한 질문에 있어서 선후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누가 얼마나 삶의 고통과 인생의 쓴 맛을 많이 그리고 더 먼지 경험했는지는 판가름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고, 그런 이유로 인해서 별다른 중요성을 가지지 못하리라는 생각인 것이다.

<결적 에 한 가 니 오.>










영화의 반전은 나오코와 연인 사이로 나오는 마을학교 과학교사가 사실은 나오코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한 때 실존했던 인물이고, 실제로 고교생 시절의 나오코와 연애를 했던 인물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죽은 사람이었다. 영화 줄거리를 가지고 선후 관계를 이어보자면, 나오코는 고교시절 학교선생과 사랑에 빠졌지만 그는 죽어버렸다. 그것은 그녀에게 크나큰 상처로 남았다. 하지만 일단 그녀는 결혼을 했고, 귀여운 딸 모모도 낳았다. 그리고 이혼을 했다. 그렇다면 그걸로 일단락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었겠지만, 과거의 상처가 그녀를 찾아온다.


극중에서는 "잊혀지면 정말로 죽어버리는 것이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아마도 나오코는 그를 잊어버림으로써 그를 완전한 죽음으로 밀어넣을 수는 없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를 잊는 대신 그의 죽음을 잊어버리고, 오랜만에 돌아온 마을에서 다시 그와 만나 연애를 한다. 십 수년 전에 하던 연애가 그렇게 그녀의 마음 속에서 계속되고, 그런 추억과 기억에 대한 노력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외로움을 다스려 나간다.


하지만 이는 매우 무모한 시도다. 현실은 '엄습함'을 하나의 특징으로 하는 것이다. 결국 극중에서의 그녀는 외로움과 무자비하게 난도질 당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런 그녀에게 가장 힘이 되는 것, 혹은 그녀를 가장 열심히 수용하는 것은 다름 아닌 지금까지 우리에게 무의식적으로 타자화의 대상 혹은 그저 조연으로만 인식되던 그녀의 친구들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었다. 사실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그러한 환상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굳이 손가락질 하기 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다. 그들 모두 그 내용은 다를 지언정 꺼내놓고 보면 그와 비슷한 감정과 아픔과 기억과 추억들을 깊이 깊이 끌어안고 살아가는 동일한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 사회가 보여주는 매우 이중적인 모습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관찰한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에 비해서 개인주의에 보다 능숙하다. 이것은 장점과 단점을 공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매정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쓸데없는 오지랖을 지양함으로써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일에 충실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개인주의의 특성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고, 그러한 개인주의의 단점에 천착하여 그것을 민족주의적인 혹은 국가주의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간 결과물이 오늘날의 일본 우경화의 문제를 불러온 것이 아닌가 하고 개인적으로 추정해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은 일본인들의 그런 개인주의적인 모습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 하나를 지향하는 모습이었다. 뭐 이런 모습은 우리사회 특히 우리 농촌 사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러한 인상을 조금 더 극대화함으로써 하나의 자연과도 같은 수준에서의 통합성과 자연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를테면 인본주의 철학자 칼 로저스 등이 강조하는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이라고 할만한 것이 관찰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면 손가락질의 결여와 같은 것이다. 또 달리 말하면 실수에 대해 관대해지는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인생에 오점을 가질 수 있다. 그러한 대상에 대하여 어떤 이는 그것을 공론화시켜 손가락질을 하고 그를 정치적으로 공격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원래 인간과 인생을 그러한 것이라고 에두르며 그것을 수용한다. 고백하자면 필자는 전자에 더 능한 유형의 인간이다. 물론 모든 실수를 용납가능한 차원의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것은 무규범 사회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는 존재이며, 부끄러운 것을 품고 살아가는 동시에 인생에는 무릇 오점이 있기 마련이라는 점을 모두가 한 마음으로 인정을 하는 전제에서, 그러한 실수와 오점 등을 최소화하고자 다함께 노력하며, 또 한편으로는 이제는 더 이상 교정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해서는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습은 나에게 있어서 조금은 특별한 하나의 유토피아와 같은 차원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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