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을 읽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독후감

by 통합메일 2012. 5. 4.
반응형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독후감


1.소개

2.줄거리

  1)뫼비우스의 띠

  2)칼날

  3)우주여행

  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영수의 시점

    (2)영호의 관점

    (3)영희의 관점

  5)육교 위에서

  6)궤도 회전

  7)기계 도시

  8)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9)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10)클라인씨의 병

  11)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12)에필로그

3.구성과 문체

4.현실사회와 이상사회

5.인간소외와 가치전도

6.현실 마주하는 난장이의 자세

7.정의에 대한 생각 차이

8.허수아비 춤, 호밀밭의 파수꾼

9.오늘날의 난장이-청계천, 용산참사, 한진중공업 파업, 희망버스

10.난장이의 아픔에 공감하는 일-내 아버지


1.소개

이 책은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조세희 작가가 각종 문예지에 ‘난장이 연작’이라는 개념으로 연재한 단편 소설들을 묶은 것이다. 단편 소설들의 묶음이지만 그것은 집합이 되어 온전한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고 있다. 처음 책을 읽어 나갈 때는 여느 단편집들처럼 개별적으로 독립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몇 개의 단편을 읽어나가면서 이것이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서 점차 중심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 책은 1970년대의 우리 문학을 대표하고 있는 동시에 그 시대를 대표하고 있기도 하다. 각종 문학상을 휩쓴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역시 가장 유명한 것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단편이겠지만, 연작으로 묶인 다른 단편들을 읽으면서 나는 좀 더 온전히 그 난장이의 세계를 이해해 나갈 수 있었다.

이 독후감에서는 책에 실린 순서대로 각 단편의 줄거리를 살펴보고, 이 책의 구성을 점검한 뒤에, 조세희 작가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과 내가 느낀 점을 이것저것 이야기해볼 것이다.


2.줄거리

1)뫼비우스의 띠

이 단편에서는 두 개의 장면이 교차되어 나온다. 하나는 고교 3학년 마지막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훈시를 하면서 두 개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다. 하나는 굴뚝 청소부에 대한 이야기고, 하나는 뫼비우스의 띠에 대한 이야기다.

또 하나의 장면은 꼽추와 앉은뱅이의 이야기다. 앉은뱅이와 꼽추는 난장이에 마을에 살던 주민이었다. 마을이 재개발 정책에 의해 강제철거 결정이 나자 그들은 거간꾼에게 아파트 입주권을 팔았다. 하지만 얼마 후 입주권의 거래가격이 두 배가 넘게 뛰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들의 입주권을 산 거간꾼을 덮치기로 한다. 그들은 거간꾼의 차를 세우고 그를 죽인 뒤에 어디론가 사라진다.


2)칼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난장이 마을 근처에 사는 중산층 주부 ‘윤신애’다. 아직 상수도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시절이라서 주부인 신애는 깊은 밤에만 나오는 물을 받기 위해 언제나 잠이 부족한 상태다. 남편과 신애는 젊은 시절 사회에 대한 꿈이 있던 영혼이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상과 타협하고 그런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꿈을 잃은 남편은 무기력했고 언제나 신문만 볼 뿐이었다. 신문에 보도되는 내용들은 각종 부패와 고통들이었고, 30년이 지난 지금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녀의 뒷집 가장은 세무서에 다니는 부정부패 공무원이다. 공무원 비리 사건이 터졌지만 그 집은 멀쩡했다. 앞집은 제과회사 선전부 직원이다. 각종 로비가 들어오는 자리라는 것을 그 집 아주머니는 당당히 자랑하고 다녔다. 피곤에 찌든 남편과 짜증을 내는 아이들에 그녀도 조금씩 지쳐간다. 다행히 딸은 세견이 조금이라도 들었는지 수돗가에 나와 있는 그녀의 곁에 앉아 의젓한 말을 꺼낸다. 신애는 낮에 있던 일을 떠올린다. 낮에 그녀는 난장이를 만났다. 난장이는 앞뒷집 아주머니들에게 일을 달라고 사정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난장이를 신뢰하지 않았고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왠지 그 꼴이 보기 싫은 신애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에게 일을 맡기겠노라고 소리쳤다. 난장이는 수도를 고치는 일을 했다. 그는 신애네 수도를 손봐줬다. 다른 집보다는 몇 시간쯤 더 빨리 물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난장이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었고 땀 흘려서 먹고 살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신애는 그런 난장이가 좋았다. “전 아저씨 같은 분이 좋아요. 방금 아저씨와 이웃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 수도수리점 사장이 신애네 집으로 들이닥쳤다. 주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대뜸 난장이를 패기 시작했다. 자신의 일감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꼴을 보던 신애는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가져다 그를 찔렀다. 다행히 칼은 그를 스쳐지나갔고 그는 황급히 도망갔다. 신애는 이 세상은 난장이에게 안전하지 않다고, 그리고 사실 우리 모두가 난장이라고 생각했다.


3)우주여행

주인공은 난장이 마을 근처에 사는 법관의 아들 윤호다. 아버지가 데려온 지섭은 대학생이었으며 윤호의 가정교사다. 지섭은 윤호의 할아버지의 친구의 손자였고 행색이 매우 초라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본군을 죽인 사람이었다. 윤호의 집은 꽤 잘 살았다. 누나는 초라한 지섭을 멸시했다. 하지만 윤호는 지섭을 좋아했다. 지섭은 윤호를 빈민촌 난장이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지섭은 그들을 우주인과 그 가족이라고 소개했다. 난장이네 집 마당에는 ‘재개발 사업 구역 및 고지대 건물 철거 지시’라고 적힌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지섭이 윤호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여 그를 쫓아냈다. 대신 윤호는 고액과외를 시작했다. 그곳에는 온갖 타락한 아이들이 다 모여 있었다. 아이들은 환각제를 마시고, 슬라이드로 포르노를 봤다. 윤호는 거기서 은희를 만났다. 은호는 악마 같은 인규를 따라서 타락의 늪으로 빠져든다. 그런 스스로를 그는 증오했고 또 괴로워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책장에 숨겨놓은 총으로 자살을 하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총을 찾았을 때 은희가 집으로 찾아왔다. 그녀를 밀쳐내는 윤호를 알몸의 은희가 껴안았다.


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난장이 가족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가족의 구성원은 아버지, 어머니, 영수, 영호, 영희다.

(1)영수의 시점

영수의 가족에게 세상에서의 생활은 지옥이고 전쟁이었다. 어느 날 철거계고장이 날아왔다. 동사무소 앞에는 철거에 항의하는 사람들과 입주권을 사려는 거간꾼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여있었다. 영호는 흥분하고 영희는 울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영수는 의외로 담담했다. 옆집에는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였던 명희라는 아이가 있었다. 그녀와 영수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다. 그녀는 영수에게 공장에 들어가 일하지 말고 꼭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영수는 그러겠노라 약속했지만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영희는 산업화의 역사 어딘가에서 비극적으로 죽었다. 나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다치면서 밑의 동생들도 공장에 들어갔다. 수도수리점 사장에게 얻어맞은 아버지는 몸이 망가졌다. 아버지는 서커스 일을 하려고 했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그만둬야 했다. 아버지는 장남인 나를 배에 태우고서는 서커스 일을 하려는 것을 막지 말라고 얘기했다. 아버지는 요즘 지섭이라는 사람이 빌려준 『일만 년 후의 세계』라는 책을 읽었다. 지섭은 이 땅에서 우리가 기대할 것은 없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벽돌공장 굴뚝 위에 올라가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2)영호의 관점

영희와 함께 입주권 시세를 알아보러 갔다가 입주권을 사려는 어느 아주머니를 만났다. 매매계약서의 계약 날짜를 위조하는 수법을 설명하자 그녀는 그건 불법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영호는 오히려 그녀에게 동사무소에 들어가서 왜 불법적인 일을 하느냐고 따져보라고 되물었다.

형과 나는 파업을 시도했는데 다른 노동자들이 배신을 해버려서 제대로 얘기도 못해보고 잘렸다. 공장끼리 연락이 다 돼서 다른 공장에서도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영희가 사라졌고 동네 주정뱅이는 외계인이 데려갔다고 했다. 공장에서 일어나는 노동착취, 근로악조건, 빈부격차,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 인간 소외, 자동화로 인한 해고, 계몽되어선 안 되는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영호와 영희는 공장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영희가 집을 나갔을까. 박식한 형은 세상을 폭력적이라고 규정했다. 보이지 않는 폭력. 영호는 형인 영수를 이상주의자라고 규정했다.

난장이네 가족은 이십오만 원에 입주권을 팔았다. 지섭의 책을 읽은 아버지는 이상한 소리를 한다. 아버지는 달에 가서 천문대 일을 하겠다고 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내게 아버지는 오히려 너는 우주의 법칙을 전혀 모른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배웠는데도 모른다고 말한다.

영희를 찾지 못해 가족들은 집을 떠나지 못한다. 지섭은 감옥에 다녀왔다. 그가 사온 고기로 가족들은 최후의 만찬을 갖는다. 철거인들이 담을 부수고 우리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지섭은 철거 지휘자를 때리고 잡혀갔다.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잠이 나를 눌러왔다. 나는 부서진 문 한 짝을 끌어내 그 위에 엎드렸다. 햇살을 등에 느끼며 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우리 식구와 지섭을 제외하고 세계는 모두 이상했다. 나는 햇살 속에서 꿈을 꾸었다. 영희가 팬지꽃 두 송이를 공장 폐수 속에 던져 넣고 있었다.’


(3)영희의 관점

영희는 입주권을 파는 날 우리의 입주권을 산 사내를 따라가서 신문을 스크랩하는 일을 하고 밤에는 그와 섹스를 했다. 그와 영희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이 달랐다. 그의 금고에서 우리의 입주권 서류를 훔쳐 나왔다. 동사무소에 가서 철거확인원을 썼다. 아버지 이름으로. 동사무소 사무장이 내게 와서는 윤신애 아주머니를 찾아가라고 했다. 구청과 주택공사에 갔다가 그녀에게 갔다.

영희가 집을 나간 사이 난장이 아버지는 벽동공장 굴뚝에 떨어져 죽었다.


5)육교 위에서

신애의 동생은 대학 시절에 운동권이었다. 함께 투쟁을 하던 학생들은 점점 변질돼 갔고 동생과 그의 친구는 고립돼 갔다. 학교신문에 기고하려면 그들의 글을 팽개친 주간교수는 친일파의 자손이었고, 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졸업한 뒤 동생의 친구는 신문사에 들어갔고 신문사 간부로 취임한 주간은 그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쫓기듯 술집에서 새삼 신념을 다짐했지만 결국 그는 주간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신념은 신념이되 살아야 하는 것, 가족과 같은 것들이 그러한 신념을 지킬 수 없는 인질과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6)궤도 회전

대입시험에서 인규의 수험번호를 쓴 것이 걸려 엄청나게 맞았지만 아버지는 결국 윤호를 놔줬다. 이사를 갔다. 은강그룹 회장이 사는 동네였다. 옆집에 사는 경애를 만났다. 그녀는 은강그룹 회장의 손녀딸이다. 윤호는 그녀를 따라서 셀 모임이라는 곳에 간다. 윤호는 이 아이들이 십대 노동자에 대한 토론을 핑계로 유희를 즐긴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실제로 토론이 끝나고 아이들은 은밀한 놀이를 이어갔다. 윤호는 아이들 앞에서 경애를 고문하는 흉내를 내면서 그녀의 죄를 묻는다. 은강 방직 사장의 손녀딸과 난장이의 딸 사이의 간격이 진하게 드러났다. 경애는 조롱이 섞인 문체로 할아버지의 묘비명을 써서 윤호에게 보여줬다. ‘윤호는 대학에 들어가는 대로 경애와 경혼 하겠다고 생각했다.’


7)기계 도시

윤호의 시선이다. 은강이라는 도시가 등장하는데 아무래도 인천을 말하는 것 같다. 아버지를 잃은 난장이의 아들딸이 이곳에서 일한다. 은희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녀가 얻은 것은 일시적 자유였다. 은강공단은 노동자들에게 엄청난 악조건의 공간이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도시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관심이 없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자신들에게 해가 되는 일이 일어날 때만 일시적으로 관심을 가질 뿐이다.

노동자교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빈곤 때문에 일을 시작했고, 인간적 대우를 해주는 직장을 희망했으며, 항상 피로에 시달렸고, 노동조합의 간부들을 회사의 앞잡이라고 생각했고, 열심히 일해도 도저히 잘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근로자가 아니라 사용자를 위해서 일하는 것, 그게 노조다.

난장이의 큰 아들 영수는 새로운 노조를 만들려 했고, 딸은 해고당했다. 하지만 영수는 사용자들의 탄압에 수없는 좌절을 겪어야 했고 결국에는 무너져 내렸다. 난장이의 큰 아들은 좌절하고 윤호에게 은강그룹 회장을 암살 할테니 너희 집에 숨겨달라고 부탁한다.


8)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큰 아들 영수의 관점이다. 난장이 마을을 생각하니 아버지의 죽음이 더 슬프게 다가왔다. 나는 이제 가장이 되었다. 먹이 피라미드에서 우리는 맨 밑의 단계다. ‘삼남매가 똑같이 은강 그룹 계열 회사의 훈련공으로 들어갔다.’ ‘신분에 맞게 우리는 빈민굴에 살았다.’ ‘조립라인 사람들은 나를 또 하나의 보조기계로 보았다. 공장장에게는 노동자 전체가 기계였다.’

영희는 노동운동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나는 회사의 부당대우에 대한 조치를 노조에 요구했다가 뭔가 일이 잘못되어가는 것을 알고는 알아서 공장을 옮겼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최저 생계비를 벌 수 없는 세상이었다. 영수는 또 하나의 난장이 마을을 꿈꾸기 시작했다.


9)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영수는 산업혁명 당시 160여 년 전의 영국, 프랑스와 지금의 은강이 무척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고통이 그려진다.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법률이 있었지만 사용자들을 그런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 마음대로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나는 날마다 사무실 게시판 앞에 가 섰다. 퇴직, 해고, 출근정리 처분자의 명단이 거기 나붙었다. 나는 게시판 앞에 아버지보다 작은 몸이 되어 서 있고는 했다.’

영수는 노동자들을 계몽시키고 싶어 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소리 없이 사람들의 의식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노동자 교회 목사는 영수를 사회조사연구회에 끌어들였다.

영희네 공장의 노조지부장이 실종되고 부지부장이 지부장이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영이였다. 영수는 영희의 소개로 영이와 만나게 되고 그녀를 후방 지원한다.

영이가 지부장이 된 노사희의장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녀가 고분고분하리라 기대했던 사용자들의 예상과 달리 영이는 매우 강경하게 나온다. 일단 습관적으로 노동자 대표를 하대하는 말투를 지적하고, 노동자들을 옷핀으로 찌르는 행위를 고발한다. 사용자들은 공장을 돌리기 위해서는 모든 법을 다 지킬 수는 없다고 말한다. 영이는 같은 근로자라고는 하지만 사용자와 노동자의 임금격차가 너무 크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임금 인상과 부당해고자의 복직을 주장한다. 사용자들은 더 힘든 환경에서도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그 주장을 터무니없다고 일축하지만 영이 지부장은 그건 그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한다. 노사양측은 산업구조나 경제이익의 분배에 대한 관념이 완전히 달랐고 협상은 파결되었다.

‘아버지는 사랑을 갖기 않은 사람을 벌하기 위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그것이 못마땅했었다. 그러나 그 날 밤 나는 나의 생각을 수정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옳았다.

모두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은강에서는 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


10)클라인 씨의 병

은강에 장님이 많다는 것은 자신의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순종하는 노동자들과 그런 고난에 시달리는 이웃의 노동자에 무관심한 일반 주민들을 비꼬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머니는 영수가 조합의 일에 나서는 것이 매우 못마땅하다. 그녀는 아들이 언젠가는 잡혀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들이 그저 묵묵히 공장 일만 하기를 그녀는 바랐다.

‘애꾸눈 노인네 껍질나무 벽에는 지명 피의자 수배 벽보가 붙어 있었다. 내가 아는 죄인들의 이름은 올라와 있지 않았다. 잡범들의 사진 위에 검거 도장이 찍혀 나갔다. 큰 범법자들은 우리와 먼 곳에 있었다.’

영수의 이름이 기업들 간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기업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노동자 교회의 목사였다. 노동자들에게 사회적 의식을 심어주지 때문이었다.

영수는 지섭을 만났다. 행복동 사건 이후 지섭은 여러 고장을 전전하며 가는 곳마다 노조를 만들고는 했다. 지섭을 다시 만난 가족들은 과거의 기억으로 빠져들었다.

작가는 난장이 아버지가 죽기 전 큰 아들 영수를 배에 태우고 나눴던 대화를 들려준다. 작가가, 큰 아들이 꼭꼭 숨겨놨던 이야기다. 아버지는 죽음을 결심한 것을 아들에게 말했다. 약장수를 따라가 앉은뱅이와 꼽추와 함께 일하게 해준다면 죽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영수는 그러시라고 할 수 없었다. 가족 누구도 그런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지섭은 영수를 혼냈다. 네가 할 일은 이론에 매진하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노동자와 사용자가 충돌하는 지점에 서있는 일이라고 했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데 너무 많은 것을 허비해왔다고 그가 말했다.’

노동자의 편을 들어주는 중간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목사와 과학자 중 과학자가 영수에게 클라인 씨의 병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그것을 보고 영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알겠어요. 이 병에서는 안이 곧 밖이고 밖이 곧 안입니다. 안팎이 없기 때문에 내부를 막았다고 할 수 없고, 여기서는 갇힌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벽만 따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죠.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갇혔다는 그 자체가 착각이에요.” 영수는 은강그룹 회장을 죽이기 위해 뛰어나갔다.


11)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은강그룹 손자이자, 경애의 오빠인 경훈의 관점이다. 난장이의 큰 아들 영수는 그룹의 임원을 칼로 찔러 재판을 받았다. 경영자들의 아래 세대들은 윗세대와 다르거나 같았다. 유학의 경험이 그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들면서 자신들의 체제와 행위를 정당화하는데 능숙했다. 언변이 막힘이 없었다.

지섭의 공판일에 경훈은 법정에 갔다. 노동자들이 경영자를 조롱하는 노래를 경훈의 면전에서 불렀다. 기분이 상한 경훈은 난장이가 매우 나쁜 사람이었을 거라고, 그래서 그 영향으로 그 아들이 숙부를 살해했으리라고 생각했다.

사촌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인데도 그를 매우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경훈은 그를 이해할 수 없다.

지섭이 영수의 증인이 되었다. 영수의 상인행위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영수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경훈은 그것이 무척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온 경훈은 노동자들에게 약을 먹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본가들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생각은 정말 죽어도 안 했다. 그는 가시고기의 악몽을 꿨다.

‘사람들의 사랑이 나를 슬프게 했다.

경훈은 내일 아버지 몰래 정신과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12)에필로그

맨 처음 장인 ‘뫼비우스의 띠’에서처럼 두 개의 장면이 나온다.

우리가 처한 사회적 상황의 책임을 우리는 누구에게 돌려야 하는 걸까? 작가는 ‘그들’이라고 뭉뚱그려 답한다.

‘그들 자신에게는 죽을 때까지 져야 할 책임이 하나도 없다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모두 그럴 듯한 알리바이를 갖고 있다.’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사는 나머지 이 사회의 의도를 읽을 수가 없었다.


꼽추와 앉은뱅이는 약장수를 따라갔지만 어느 날 약장수 사장은 두 사람을 버리고 도망갔다. 영수는 감옥에서 죽었다. 꼽추는 고속도로에서 반딧불로 착각한 탱크로리에 치여 죽는다.


수학 교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야기를 끝낸다.

‘그들은 우리의 부분적 실태가 폭로되는 것도 어떤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작은 혹성으로 우주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내가 아직 알 수 없는 것은 떠나는 순간에 무엇을 대하게 될까 하는 것뿐이다. 무엇일까? 공동묘지와 같은 침묵일까? 아닐까? 외치는 것은 언제나 죽은 사람뿐일까? 시간이 되었다. 지구에 살든 혹성에 살든 우리의 정신은 언제나 자유다.’


3.구성과 문체

우선 구성에 대해 논하기 전에 나는 이 책의 제목이 나에게 주는 느낌을 생각해 본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제목은 무척 호기심을 갖게 하는 단어의 조합이 아닐 수 없다. 하나하나씩 놓고 보면 그냥 그런 단어들인데 그것들이 모이면 묘한 느낌을 선사한다. 왜 난장이는 공을 쏘았으며, 왜 공은 하필 난장이에 의해서 쏘아졌단 말인가? 이것은 마치 우화의 제목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우리 문학계에서 이런 느낌으로 제목을 작명하는 것은 어쩌면 이 소설이 원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단편소설집은 난장이 마을을 중심으로 그 주변부에서부터 각종 계층들의 관점을 빌려서 천천히 소개해 들어가다가 난장이 가족들의 이야기로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물론 각각의 챕터가 하나의 단편이기 때문에 작가는 개별적인 단편으로 읽어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능하도록 최소한의 겹치는 줄거리를 단서로 끼워두는 배려를 해두었다.

그리고 각 단편을 읽어 나가면서 다른 단편에서 등장하거나 주인공이었던 인물들의 이름이 언급되거나 혹은 등장하는 방법으로 작가는 각 단편을 그런 고리들로 튼튼히 그리고 꽤나 촘촘하게 엮어 놨다.

작가의 문체라고 할 수 있을지 잘은 모르겠지만 인상적이었던 것은 하나의 대화 도중에 갑자기 다른 장면의 대화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장면의 전환을 취함으로써 그 전환을 매우 날카롭게 만드는 글쓰기였다. 나중에는 제법 익숙해져서 그럭저럭 막힘없이 읽어나갈 수 있었는데 처음에는 적응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나아가 비슷한 개념으로, 하나의 대화에 다른 장면에서의 대화를 오버랩 시키듯이 교차시켜서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방법도 인상적이었다. 이 방법은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에서 노사대표가 회의장에서 나누는 대화와 난장이 가족들이 나누는 대화를 겹쳐서 보여주는 식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대화가 가지고 있는 닮음이 독자들에게는 무척이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4.현실사회와 이상사회

책의 끝에 붙은 해설에 나오는 대로 이 이야기는 대립적 세계관을 전제로 깔고 있다. 비단 부자와 가난한 자의 대립뿐만 아니라 현실과 이상이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각종의 대립들이 이야기의 곳곳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현실사회는 영수가 말하는 것처럼 전쟁이나 지옥과 같은 것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들은 무엇 하나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법과 사회 제도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자랑스럽게 외치고 있지만 그런 선전은 그들에게는 그저 아무 소용  없는 울림일 뿐이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노동의 구조였고, 부가 부를 재생산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병폐에 있었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고 아껴 쓰기만 한다면 잘 살 수 있는 사회라는 절대 깨지지 않는 규칙을 정해놓았지만, 애초에 그들은 그 규칙에 동의한 적도 없고, 그 규칙을 만드는 데 참여한 적도 없으며, 그 규칙은 실제로 그렇지도 않았다. 그것은 실제로는 매우 불공평한 규칙이었다. 그 규칙은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이 처하게 되는 불평등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고려하지 않은 평등이라는 것은 그저 허울에 불과할 뿐임을 모두가 알고 있는 동시에 모두가 그것을 부정했다. 심지어는 그런 규칙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까지도 그것을 부정하거나 애써 모른 채 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이 이야기 속에서 그려지는 현실 사회다. 그런 규칙을 만들어 놓은 사람들은 심지어 그런 규칙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그러면서 가지지 못한 자들이 그런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불법’을 운운했다.

그런 사회는 누군가에게는 닫힌 감옥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쉴 새 없이 일하고 또 일해서 다음 날이 오고 또 와도 변하는 것은 없다. 그저 병들고 망가져가는 몸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닫힌 사회를 만들어 놓은 사람들은 오히려 웃으며 말한다. 어디가 닫혀있느냐고 언제나 열려있는 사회인데 네 생각이 틀렸다고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지지 못한 자들은 방황한다. 죽지만 않게 최소의 물자로 연명하면서 그들은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그런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상사회를 꿈꾸게 된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지섭과 난장이 아버지가 말하는 달나라다. 달나라라고 하지만 실제로 하늘에 떠있는 달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이다. 그들은 현실사회가 지옥이며 전쟁이고 그들에게 고통으로만 다가오는 원인은 그곳에 사랑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이 없는 사람들에게 벌을 주고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그런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사회가 이상사회인 이유는 그것이 절대 도래하지 않거나 혹은 쉽게 도래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둘 중 어떤 것이든 간에 그런 이유로 난장이 아버지는 죽음을 선택했다. 그에게는 그것만이 유일한 선택의 답지였을 것이다.



5.인간소외와 가치전도

이 작품에서 우리가 가장 여실하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은 산업화사회에서 일어나는 인간소외의 현상이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산업사회에서 인간이 노동과, 인간과,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에 주목했다. 이 책에는 그런 산업사회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은강공단에서 일어하는 노동자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열악한 근로조건이다. 소음과, 산업재해와, 환경오염으로부터 노동자들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건강이나 그 생존을 따로 챙겨줘야 할 필요가 없는 그저 기계와 같은 존재였다. 노동에서 인간의 자율성이나 능동성 혹은 창의성은 전혀 요구되지 않았고 그저 인간은 기계를 위해 존재한다. 기계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서 인간의 존재 역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사실은 인간 생활의 윤택함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기계일진대 이제는 반대로 기계로부터 인간의 존재 가치가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노동의 과정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자신이 만든 생산품으로부터도 소외된다. 그들이 만드는 자동차와, 방직된 천들을 그들은 쉽게 소유할 수 없다. 엄청나게 만든 재화가 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그들은 그 재화를 거의 얻을 수 없다. 나아가 결국 그들은 인간으로부터 소외된다. 자본가와 사용자 계층은 그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기계와 같은 존재로 인식한다. 물론 그런 대우가 대놓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인식에 있고, 나아가 스스로가 그러한 인식을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그러한 인식이 자연스러워지는 상황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생계를 위해 살아가면서 점점 그들 서로와도 멀어지게 된다. 삶 자체가 지옥이고 전쟁인 현실에서는 옆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챙겨주거나 그들에게 맘 놓고 기대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자신에게도 소외될 것이다. 스스로의 존재가치가 의문스러워지고, 더 이상 이 세계의 불합리를 골똘히 생각하는 자세로는 살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자본가들과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들어놓은 현실에서 근근이 연명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생각을 멈추고 그들이 시키는 일에 묵묵히 순종하는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노동자가 그런 길을 자의든 타의든 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가치의 전도다. ‘인간적인 것’이라는 가치의 개념은 이제 그 의미가 희미해지거나 상당히 혼탁해졌다. 그 원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사람들은 산업화사회를 살아가면서 빠르게 잊어갔다. 워낙 정신이 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그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죄를 물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체 사회를 놓고 볼 때 분명히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고 죄는 곳곳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널브러져 있었다. 일찍이 인류가 동경했던 사랑이라는 가치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우리가 굳건히 믿고 있는 가치가 산업화라는 짧은 기간 사이에 그렇게 급속도로 하찮은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그 사랑이라는 것은 애초에 그다지 강한 가치가 아니었다고, 그저 인류에게 일시적으로 주어졌던 가치였을 뿐이라고, 인류의 성정은 본래가 악한 것이라고, 사회 진화론에 입각하여 어차피 약한 개체들은 도태되는 것은 옳은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가치가 그토록 위대한 힘을 발휘하고 모두의 마음에 진정한 감동으로 다가왔던 것은 그것이 아름다운 동시에 모두에게 진정으로 받아들여지고 모두가 진정으로 동경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이따금 사람보다 기계가 낫다는 생각과 말을 하곤 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로 그것은 인간의 예측불가능성과 약속을 지키지 않은 성정을 보며 내가 좌절한 바에로 비롯된 행동들이다. 반면에 기계는 언제나 예측이 가능하고, 약간의 안목과 손재주만 있으면 쉽게 다룰 수 있다. 그들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 나는 내가 그런 말을 내뱉으면서도 그 말이 많이 잘못된 것임을, 그리고 결국에는 내가 다시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안다. 그것은 이런저런 이유를 댈 것도 없이 바로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답변만이 가능하지 않을까. 인간은 왜 인간을 사랑하느냐는 답변에는 아무래도 인간의 마음속에는 처음부터 인간을 사랑하도록 본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답변이 가장 효과적이고 납득이 가는 답변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종종 더듬어지는 이 시대의 가치전도의 관념들이 이 이야기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시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작품 속에서 전도되지 않은 가치를 꿋꿋이 일관하고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난장이다. 그는 이야기 속에서 가장 나약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소중한 가치를 놓지 않았다. 어쩌면 놓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마저 놓는다는 정말로 그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포기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그가 사랑이라는 가치마저 놓았다면 이야기를 읽는 우리는 그에게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사실 가장 우리에게 올바른 가치를 전해주는 그 이지만 그의 작품 속의 이름은 ‘김불이(金不伊)’다. 맞는 해석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이름이 사회가 그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철저한 자본의 시대에서 자본을 가지지 못한 그는 어엿한 사람의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오히려 가장 소중한 가치를 갖지 못한 마음이 가난한 자들만이 사람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가치가 철저하게 뒤바뀐 세상에서 그는 살아가고 있던 것이다.


6.현실 마주하는 난장이의 자세

작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의 화두가 있다면 앞서 언급된 현실을 마주하는 등장인물들의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관점을 보여줌으로써 과연 우리라면 저러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우리로 하여금 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지는 것 같다.

이 책에는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일단 난장이 가족이 있고, 최고 부유층인 은강그룹 일족들, 법관의 자식들인 윤호와 은희, 그리고 중산층인 윤신애다. 중산층인 윤신애와 법관의 아랫세대인 윤호의 경우에는 제법 현실 사회의 모순을 잘 파악하고 있다. 물론 그들의 이웃이나 또래들은 아직 철저히 사회의 모순을 즐기며 타락하고 있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힘겹게나마 영혼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런 균형은 그들에게 모종의 회의감과 고통을 준다. 분명히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이웃들을 보면서, 그리고 그 이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맞이해야 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그들은 이중의 회의감과 자괴감을 맞본다. 그것은 무력감에서 기인하는 자기혐오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사회를 바꾸는 토양이 되는 것은 그들의 그런 현실인식과 자괴감과 회의감이 아닐까 한다.

부유층의 경우에는 철저히 현실 세계를 정상적으로 바라본다. 그들의 시선을 보고 있자면 사회학에서 말하는 기능론과 갈등론 중에서 철저히 기능론적 시각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사회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따금 정신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위기에 처하기는 하지만 인류는 무사히 그런 위기를 넘겨 왔다. 자본주의는 인류를 윤택하게 만들기 위한 최고의 발명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질서정연하고 그런 질서를 어지럽히려는 사람들은 바로 악 그 자체다. 열심히 일하고 아껴 쓰면 잘 살 수 있다고 크게 외치는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더 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눈에는 그저 게으른 멍청이들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현실이 그저 천국인 것만은 아니다. 날이 갈수록 그런 질서 파괴자들은 기승을 부리고 잠시라고 정신을 놓고 있다가는 그들에 의해서 체제가 전복될 수 있을 것이다. 이래저래 그들도 지옥 같고,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간다. 물론 그 모양새는 많이 다르지만 말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난장이 가족의 모습이다. 이들은 같은 빈민계층이면서도 비교적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일단은 윗세대와 아랫세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윗세대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경우에는 사회적 폭력에 대해서 묵묵히 참아내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이미 약자의 지위를 점유하고 있는 이상 그것에 굳이 맞섰다가는 오히려 더 큰 봉변을 당하다는 것을 그들은 그들의 경험과 선조들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내색은 하지 않지만 세상이 아직도 계급사회이며 노비제도가 아직 없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어쩌면 순순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식들만은 자신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한다.

자식들의 경우에는 그런 폭압에 대해서 저항하고 싶어 한다. 철거계고장이 날아왔을 때 부모들은 이상하게 담담했고 영희와 영호는 무척이나 흥분했다. 영수는 그 중간에 있었다. 큰 아들인 영수는 난장이 가족의 윗세대와 아랫세대를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결국 그 가족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윗세대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부모의 바람과는 반대로 결국 그 아랫세대 역시도 부모의 세대와 똑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저항의 노선을 택하게 되었다.


7.정의에 대한 생각 차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이야기 속에서 작가는 이 사회의 이런 불합리한 모순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 고찰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자본주의라는 것이 애초부터 부자들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고전적 자본주의 경우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을 활발하게 만들어서 풍부해진 재화가 모든 사람들을 풍족하게 만들리라는 계산으로부터 유래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자본주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현실을 그렇지가 못하다. 재화는 풍부하되 그것을 소유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정해져 있는 것이다.

짐작에 불구하지만 나는 작가가 그 근본적인 원인을 사람들 사이에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정의관에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사회정의에 대한 사회계층 사이의 이해 차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전체적인 구도를 본다면 수탈의 주체는 자본가와 사용자들이고 그 대상은 난장이 가족들이지만 가만히 읽다보면 그 누구도 자신이 나쁜 짓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나는 것은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에서 나오는 노사협의회 장면과,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에서 영수의 재판과정을 지켜보는 경훈의 심리묘사다.

이것은 정당화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이론적 정당화가 다원주의 사회의 상대주의적 경향과 맞물리게 되면서 그런 정당화의 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간다. 모두 각자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행위에 임한다. 때문에 그들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그 책임을 물으려 하면 그들은 그에 대한 꽤 그럴듯한 이유와 변명을 내놓는다. 그 앞에서 한 방에 통쾌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그리하여 작품 속에서 지섭은 영수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데 너무 많은 것을 허비해왔다고 그가 말했다.’

이러한 지섭의 생각은 어차피 이론으로 따지게 된다면 그 누구에도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때문에 더 이상 이론에 매진하여 그 누가 잘못한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뿌리라고 생각되는 것일 일단 움켜잡고 뽑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지섭의 말에 선뜻 동의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옳음과 그름을 생각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가 아닐까? 아니면 무엇이 옳은지 앎에도 불구하고 전혀 엉뚱한 답을 고르거나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끊임없이 찾아가고 또 그것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 나가려는 노력을 쉬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또 한편으로 나는 지섭의 말에 공감한다. 그것은 이론에 매진하는 우리의 노력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 속의 상황에서는 더욱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이론에 매진할 수 있다.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까지 난장이의 가족들의 고통을 겪지 않고 잘 견뎌줄 수 있다면 가능할 수도 있는 얘기다.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다. 인간은 삶은 영원하지 않고, 계속되는 악조건과 폭압 아래서 그 생명은 쉽게 꽃을 떨굴 수 있다. 아마 이런 의미에서 지섭은 이론에 매진하는 데 많은 것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현재의 나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이성적인 방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시선에서도 드러나듯이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정의에 대한 생각의 차이이며, 이것은 아무래도 이론 이성의 문제인바 이성적 토의와 연구를 통해서 해결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더 심각한 것은 모든 이 사회를 살아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책임이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러한 책임과 죄가 자신들에게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생각은 ‘궤도 회전’에서 절망감과 죄책감에 눈을 뜬 윤호가 아직 그런 생각에 눈을 뜨지 경애를 보이지 않는 고문 틀에 묶어 고문하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기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보자면 이 이야기를 통해서 작가가 꾀하는 우리의 변화는 우리들 스스로가 난장이인 동시에 또한 이 모든 일의 책임을 나눠 갖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일단 우리 모두가 난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우리가 난장이 가족과 같은 계층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만들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지 정책을 좋지 않고 보고,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냉랭한 태도를 갖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는 ‘중산층’, 혹은 ‘부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자유주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의 맥시민 이론에 따르면 원초적 상황에서 무지의 장막을 치고 최초의 사회적 조건에 대해 합의하는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최소 수혜자 즉 난장이 가족과 같은 처지에 처할 것을 염두에 두고 그런 합의에 임할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누구든지 난장이 가족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런 난장이 가족 같은 사람들이라도 제법 행복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제도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이 처한 사회적 위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합의에 임할 때 자신이 사회적으로 부자라는 사실 혹은 거의 확실히 부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들은 결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의 제한된 재화를 자신들이 아닌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예측불가능성이, 자신들이 난장이 가족과 같은 최하계층, 먹이사슬의 가장 밑바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빈민계층에 대한 복지정책에 합의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대부분의 난장이 가족이라는 자기인식을 해야만 하는 이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소유라는 것은 일종의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지위와 결부되게 됨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애써 중산층 이상의 계층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경향으로부터 저항해야 한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모두 책임을 나눠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나 실제로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이나 마찬가지로 이런 사회적 모순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한다면 그 근거나 정당성이 마땅치 않고 어떻게 해서 묻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모두 각자 나름대로의 변명을 한다. 때문에 언젠가는 이론적으로 그 옳음과 그름이 밝혀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의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이 사회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물론 자유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간다. 민주주의 사회는 개인이 아니라 시민이 그 사회의 주인이 되는 사회다. 시민이란 사회와 동떨어진 개인이 아니라 이웃과 그리고 다른 시민과 함께 어울려 그들 전체의 복지와 권리와 의무를 고민하는 주체를 말하는 것이다.


8.허수아비 춤, 호밀밭의 파수꾼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두 권의 책이 떠올랐다. 우선 첫 번째는 조정래 작가의 『허수아비 춤』이다. 2010년에 나온 책으로서 우리 사회의 경제적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의 비리에 대해서 폭로하고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과 그 책은 묘하게 대비가 되는 데, 조정래의 허수아비 춤이 대기업과 정부가 국가경제를 어떻게 가지고 노는지 그 은밀한 치부를 고발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 책의 경우에는 산업화로 인한 노동착취와 인간소외를 그리는 동시에 그 원인에 대한 고찰을 시도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좀 더 인간의 본질과 존재에 대한 고민이 가미된 것이 『난장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는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작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생각났다. 『난장이 쏘아올린 작은 공』의 전체 모두에서 연상된 것은 아니고 가장 마지막에 있는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라는 단편을 읽을 때 유독 그렇게 생각났다. 처음에는 그 두 개가 어떻게 닳아있는지 명확히 짚어낼 수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난장이 쏘아올린 작은 공』의 그 단편의 경우에는 대기업 총수의 아들인 경훈의 시점에서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시선을 보여주고 있었고, 『호밀밭의 파수꾼』의 경우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점 속물이 되어가는 인간들을 바라보면서 그런 사회의 모순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약한 영혼의 몸부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인간의 영혼이 병들어 있는 치부를 드러내는 점에서 두 작품의 유사성을 느꼈던 것 같다.

그 단편의 마지막 장면에서 경훈은 나약한 스스로를 발견하며 아버지 몰래 정신과를 찾아갈 생각을 한다. 이야기 속에서 전형적인 자본가로 나오는 그이지만 사실 그 내면에는 진정한 사랑을 구별할 줄 아는 마음이 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그는 그런 마음을 부정해야만 한다. 경제학자들이 뭐라고 하던 자신들이 보고 싶은 이론만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이론만을 받아들여 끊임없이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그렇게 해서 마음과 이론의 벽을 치고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바로 잡아먹히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이다. 어쩌면 오히려 그들이 이 이야기 속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물론 샐린저의 홀든 콜필드의 경우에는 조금 다른 선택, 즉 그렇게 자신을 지키며 치열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기 보다는 그런 세상을 등지고 이상적인 세계로 나아가려는 선택을 했지만, 그 기본적인 영혼의 모습에 있어서 두 자아는 무척 닮은 점이 있었던 것 같다.



9.오늘날의 난장이-청계천, 용산참사, 한진중공업 파업, 희망버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느새 이 책을 쓰인 1970년대 보다 훨씬 더 윤택해진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써 모종의 우월감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분명히 나는 중산층의 아들로 태어나서 별다른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자라, 대학교육을 마친 오늘 날의 평범한 청년인 것이다. 나는 난장이인 아버지를 두지도 않았고, 아르바이트가 아닌 이상 생계를 위하여 공장에 취직하려 해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세상은 여전히 난장이들에게 안전하지 않았고, 풍부한 재화는 모든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어찌 보면 나는 난장이였다.

독후감을 쓰면서 나는 최근 이슈가 된 삼성 일가의 법정 분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돈을 가졌지만 이건희 회장은 웃는 모습이 드물다. 변호사와 법조항과 언론의 보도를 통해 전해지고 또 확산되는 형제간의 다툼 사이에서 사랑의 여지는 없다. 난장이 아버지는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까.

한편으로 난장이 가족의 비극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사건도 많이 있다. 쌍용차 파업 사태와, 용산 철거민 참사 사건, 청계천 철거 상인들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나름대로의 이유로 파업을 시도했으나 정부의 물리력을 동원한 진압에 의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물러 나와야 했던 쌍용차,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른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에 의해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기까지 했던 용산참사, 그리고 버려진 운동장으로 강제 이주된 청계천 상인들이 있었다. 무려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건만,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한다는 세월 동안 세상은 별 반 달라진 게 없었다. ‘칼날’에서 신애의 남편이 읽고 있는 신문에 나오는 기사들은 정부와 기업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었고, 지금 현재 발간된 신문의 기사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는 내용일 만큼 세상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조세희 작가의 이 책은 아직까지도 슬픈 호흡을 하며 우리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희망적인 일도, 개선된 점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2011년에서 2012년에 일어난 한진중공업 파업 사건이었다. 경영진의 경영 실패로 인하여 만들어진 기업 손실을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떠넘겼다. 책임이 있는 경영진들은 오히려 성과급을 받았고, 애꿎은 노동자들은 정리 해고가 될 위기에 처했다.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투쟁했다. 물론 습관처럼 탄압이 시작됐다. 회사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보기를 원했다. 어떤 노동자들은 그 타협에 응했고 어떤 노동자들은 응하지 않았다. 물러설 수 없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 누구도 해고되지 않게 해야만 했다. 여성 용접공 김진숙 씨가 85호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자신의 생명을 담보고 고공 농성을 시작했다.

마침 다행인 것은 SNS(Social Network Service)라는 새로운 매체가 우리 사회에서 매우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이들의 투쟁이 사회의 각 구성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힘을 보아서 버스를 대절해서 부산으로 달려갔다. 버스의 숫자는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사람들은 주말이면 습관처럼 버스를 대절해서 부산으로 갔다. 이 버스의 행렬에는 ‘희망버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들은 비폭력적으로 노동자들을,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는 김진숙을 응원했다. 결국 노동자들이 승리했다.

나는 생각한다. 난장이 가족들이 저렇게 승리한 노동자들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면 어땠을까. 세상이 노동자들의 시위를 관심 있게 귀 기울여주고, 노동자들도 이성적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달했다면, 그래서 공장에서 쫓겨나는 일 없이, 기업의 총수를 살해하는 일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한진중공업 파업의 결과를 보면서 나는 그래도 조금은, 삼십년이라는 세월 동안 세상이 약간이나마 나아지긴 했구나 하고 위안을 삼는 것이다.

물론 한편으로는 가슴이 묵직해지는 요소도 있다. 그것은 파업의 과정에서 SNS와 인터넷 매체들을 통해서 그러나는, 국민들 사이에 여전히 분명하게 존재하는 사회정의관의 불일치였다. 물론 파업을 성공했고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났지만 내가 볼 때 그것은 불완전한 승리였다. 그것은 그저 여론이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을 뿐인 것이고, 일시적으로 노동자들과 생각을 같이 했을 뿐인 것이다. 어찌 보면 이것은 또 다른 탄압에 다름없다. 새로운 매체들로 인하여 노동자들의 입장과 주장이 보다 효과적으로 대중에게 전달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대중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 역시도 명확하게 노정되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주기에 충분한 차이였다. 너와 내가 이만큼 다르다는 것이 그렇게 분명하게 노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얻은 승리.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서로의 이해와 사회정의관에 대한 불일치를 좁혀 나가려는 노력이다. 이를 위해서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부단한 이성적 노력이 필요하다. 인류의 철학이 걸어온 역사가 그렇듯 인류는 이성적 존재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10.난장이의 아픔에 공감하는 일-내 아버지

역시 억측일 수 있겠지만 나는 작가가 단순한 대립적 구도로 노동자는 착한 사람이고 기업가는 나쁜 사람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작가가 다소 변증법적인 사고를 통하여 그 두 개의 존재를 하나의 사회의 다른 모양의 피해자로 바라보고 있다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 이사회의 씁쓸한 피해자라는 시선을 건네는 작가라서 나는 더욱더 그 안목에 동의하고 감탄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난장이고, 빈민계층이며 고통과 농밀함 역시 그들이 훨씬 심하다. 작가는 난장이 아버지가 죽기 전 큰 아들 영수를 배에 태우고 나눴던 대화를 들려준다. 작가가, 큰 아들이 꼭꼭 숨겨놨던 이야기다. 아버지는 죽음을 결심한 것을 아들에게 말했다. 약장수를 따라가 앉은뱅이와 꼽추와 함께 일하게 해준다면 죽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영수는 그러시라고 할 수 없었다. 가족 누구도 그런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다. 그걸 알아야지. 찢어질 것처럼 아파.”

이야기를 통틀어 난장이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아픔을 호소하는 유일한 장면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의 대사와 그가 물가의 풀숲에 머리를 박고 주저앉는 장면이 최고로 가슴에 아프게 다가오며 그 고통에 매우 효과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감히 ‘효과적’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조심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장면이 이 이야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이야기를 읽고 또 회상할 때 내 눈 앞에는 어두운 물가에서 난장이가 아들과 가족과 세상 앞에 마지막으로 절망하고 뭍으로 돌아와 그 어둡고 차가운 땅에 주저앉아 머리를 박고 오열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그 생생함은 내 가슴을 저미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 좀 이상한 기분이었다. 살아있는 감정, 나는 며칠 지난 뒤에야 그 이유를 찾아냈다.

이따금 곰곰이 그 감정을 곱씹던 나는 내가 이 이야기를 읽은 후 종종 아버지를 떠올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장남을 앞에 두고 얘기하는 난장이, 엎드려 오열하는 난장이의 모습 위로 아버지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그리고 그 앞에 앉은 영수에는 나의 모습이 겹쳐졌다. 물론 내 아버지는 난장이가 아니다. 약 165센티미터의 신장을 가진 평범한 한국 중년 남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아버지의 유년 시절은 난장이의 그것과 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지금은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믿을 수도 있을 만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유년 시절의 아버지는 무척 가난한 집의 장남이었다. 공부를 너무 잘해서 인문계 고등학교에 꼭 가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이 도무지 받쳐주질 않아서 결국 농업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물론 아버지와 난장이는 완전히 같지는 않다. 이를테면 아버지는 명희와의 약속을 지킨 영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수가 명희와의 약속을 지켰다면 그는 공장에 들어가지 않고 학업을 계속해서 살인 따위는 할 필요 없이 지금의 우리 아버지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닮은 점도 있다. 내 아버지는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제법 민감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그런 사회 앞에서 무력했다. 그것이 난장이와 내 아버지가 닮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몇 번인가 보았던 아버지의 그런 고개 숙임에 나는 나도 모르게 이 이야기 속에서 내 아버지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나는 영수가 되었다.

이렇게 이 이야기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나의 존재 안에 들어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인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진리의 존재가 되었다. 실로 작지 않은 영향력임에 분명하다. 앞으로는 어떤 이야기가 어떤 모양으로 이어지게 될까. 나와 아버지 역시 언제나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을까. 내 자손들은 어떨까. 나 역시 달나라의 천문대 일을 꿈꾸게 될까. 글쎄, 일단은 내 안의 난장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길 우선 바란다.


-끝-

반응형

'책을 읽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랭 드 보통의 불안 독후감상문  (0) 2012.05.18
7년의 밤 독후감  (0) 2012.05.18
무중력 증후군 독후감  (0) 2012.04.19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고  (0) 2012.04.07
박민규의 「핑퐁」을 읽고  (0) 2011.01.1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