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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기록

종손으로서 종가집 제사 없앤 후기(feat. 코로나19)

by 통합메일 2021.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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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연히 검색하다가 이 글 보고 들어와서 우리 집안이 콩가루니 어쩌니 욕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선택과 결정을 하고 실행에 옮긴 이상 후회는 없으며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것이 하등의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지도 않는다. 무치라면 무치라고 해야할테지만.

우리집은 흔히 말하는 종가다. 나의 아버지가 나름 맏아들로서 제사를 지내야 하는 전통 윤리적 의무를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집은 사실 좀 사연이 복잡하다. 우리집은 종가이긴 종가인데 엄밀히 말하면 방계 종가다. 짝퉁이다. 진짜 종가라고 하기엔 많이 모자라는 구색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전처와 후처가 있었고, 나는 후처의 자식의 자손이다. 그런데 듣자하니 다른 할머니들이 더 있다는 말도 들리던데. 할아버지 당신이란 사람은 대체;;

내 할아버지의 근거지역은 경상도였다. 경북 영천이었다. 큰아버지 댁이 영천에 있었다. 큰아버지는 지금 돌아가셨는데 큰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와 이복형제다.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어릴 때는 큰아버지댁에 제사를 지내러 갔고, 벌초와 성묘도 따라다녔다. 어색한 듯 하면서도 그냥저냥 괜찮았다. 피가 섞인 이들 사이에 나눌 수 있는 정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었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흠.. 내가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하여간 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장례식 때 가보지도 못했다. 고모가 집으로 전화하시더니 아버지를 찾았다. 아빠는 아직 퇴근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리니 울먹이면서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일이 더 중요하냐고 쏘아붙였다. 아마 아버지는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사실도 모르고 계셨을 텐데 좀 어이가 없었다. 아마 내 기억에 큰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아버지는 눈 시울을 적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늘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좋게 말하면 정이 많은 건데 그렇다고 푸근한 사람은 절대 아니다. 그 감정의 방향은 늘 자기 자신을 향해 있는 사람이었다. 흔히 말하는 '자기연민'이 강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평생을 자신의 처지를 동정하며 살았다. 큰아버지와 맺은 이복의 관계도 아버지에게는 스스로를 동정할 거리로 다가왔을 것이다. 내가 뭐 아버지의 속을 속속들이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여간 이유야 어쨌든 당시 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혔고, 아직 아버지의 내면을 지금처럼 잘 이해하지는 못했던 당시의 나는 아버지의 눈물에 적잖이 놀랐던 것 같다. 부모의 눈물은 으레 그렇게 한 없이 낯선 것으로 다가오는 법이니까.

큰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다. 경상도 사투리가 강하셔서 말을 잘 못 알아들었던 기억이고.. 여름에 놀러갔을 떄 모기장을 쳐주시던 기억이 가장 인상 깊었다. 어려운 분이었다는 생각이다. 애당초 아버지랑 나이 차이도 상당했다.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 관계를 많이도 남기고 가셨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어머니만 남으시고, 그 다음부터는 내게 큰형님 되시는.. 큰아버지의 아들네로 제사를 지내러 갔다. 큰형님네는 서울이었다. 영천에서 공부를 잘 해서.. 두 아들이 다 잘 됐는데 큰아들은 서울로 갔고, 작은 아들은 거제도로 갔다. 큰아들은 상경, 작은 아들은 이공계였다.

수년을 그렇게.. 살았구나. 순번을 나눠서 돌아가며 서울에 다녀오고는 했다. 그러다 이제 어느 순간 슬슬 자연스럽게 갈라서게 됐다. 이제는 제사를 분할하기로 했던 건 나의 친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였다. 그러니까 이제는 우리도 챙겨야 하는 제사가 생겼으니 각자의 갈 길을 가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 아버지는 종가의 가장이 되었다. 할아버지의 제사는 여전히 서울에 머물렀고, 우리 집에서는 할아버지의 두번째 부인인 나의 할머니의 제사만 이어졌다.

그리고 그 실무는 나의 어머니의 몫이 됐다. 제기를 구입하고, 제기 함도 구입하고.. 매번 제사상을 차리는 일들을 하게 됐다.

나의 어머니는 후덕하고, 푸근하게 혹은 묵묵하게 그런 짐을 받아들일 성격이 못 됐다. 제사의 전후로 아버지에게 파르륵 성질을 냈다. 제사를 지낸다는 결정만 내리고 무엇 하나 주도적으로 하지 못하는 아버지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에게도 아쉬움은 있다. 그렇게 파르륵 거렸으니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공덕이 많이 남지 않았다.

하여간 어찌어찌.. 방계의 자손들이 모여 근 10여 년을 제사를 지냈다. 기제사와 추석과 설날 그렇게 세 번이었다. 종가집이라고 하기엔 민망스러울 정도로 적은 횟수지만.. 직업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 어머니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라고 할 순ㄴ 없었다. 무엇보다 뾰족하게 도와주는 이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아버지는 요리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로 추론해볼 수 있는데.. 하나는 요리에 손을 대게 되면 많든 적든 남은 생애에서 요리를 해야 할 거라는 계산 때문에 일부러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냥 겁이 많고, 상상력이 부족한 탓에 요리에 도전할 생각 자체를 못 하는 것도 같았다. 아마도 두 가지 모두일 거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제사와 관련해 아버지가 하는 일은, 다 차려진 음식을 나르는 일이라든지,, 위패의 지방을 써붙이는 일 정도였다. 다만 손 재주가 조악하여 그마저도 힘겨워하셨다. 아버지가 잘 하는 일은 그냥 뭔가를 외우는 일 정도였다. 저장장치로서의 역할은 어느 정도 해냈다. 하지만 응용, 적용, 창조의 기능은 평균을 밑돌았다. 거의 매번 어머니는 제사를 준비하거나 제사를 끝내고 화를 냈고 두 사람은 자주 다퉜다.

제사를 없애게 된 계기는 내가 결혼을 하고 나서 나의 아내의 의견 때문이었다. 원래 나도 언젠가는 없앨 생각이었다. 지금은 부모세대가 한다니까 그냥 장단을 맞춰주는 것 뿐이지 제사를 물려받아 나의 나의 반려자가 거기에 구속되는 일은 단 한 번도 기꺼워하거나 상상해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는 버텨볼까 생각도 했는데, 아무래도 아버지는 자신의 손으로 이걸 제대로 정리할 의지도 능력도 없어보였다. 그냥 비가 오면 창문을 닫고, 비가 그치는 창문을 여는 것처럼 아무 생각이나 고민 없이 그냥 해오던 거니까 이어나가기만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갈등이나 불협화음을 해결할 의지나 능력이 없어보였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와 아내의 의견을 바탕으로 제사를 없앴다. 아버지가 없애지 못할 것이니 내가 없애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되는데는 '위근우'의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라는 책이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작가는 제사로 대표되는 가부장적 문화와 관련해 우리나라 남성들이 가진 문제는 이기적임이 아니라 비겁함이라고 지적한다. 제대로 이기적이지도 못 하면서 그냥 비겁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럴바에는 차라리 그냥 이기적이기라도 한 게 낫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교실에서도 이런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남자아이들이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제는 교사에 대해 간을 본다는 것이다. 물론 여자아이들이라고 그런 문제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남자아이들은 자기들이 인정하는 기준에 따라 강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달까. 좋게 말하면 그런 거고 ㅋ 무서운 교사에게는 복종하지만, 그렇지 않은 교사에게는 ㅎㅎ 나는 이것도 비겁함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비겁한 사람은 되지 않으려고, 설날인가 추석인가 제사상 차리다가 엄마랑 아버지가 또 싸우는 걸 보고는 친척들 다 있는 자리에서 이게 마지막 제사라고 선언했다. 아버지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칩거에 들어갔고, 작은 아버지는 집을 뛰쳐나갔다. 솔직히 이 정도의 반응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해서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들도 쉽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본인들도 바랐나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 정말 그 다음부터는 제사를 안 지내게 됐고, 때마침 코로나가 터져줘서 더욱더 명분이 컸다. 물론 아버지는 끝까지 제기들을 버리지 않고 아직도 버티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 두서너해째 제사를 안 지내고 있으니 아마 다시 부활하기는 힘들 거라는 생각이다.

가만 보면,, 정말 제사를 받아 마땅한 조상을 둔 집안의 자손들은 명절에 다 해외로 놀러다니고, 변변치 못한 조상을 둔 자손들만 찌질하게 집구석에서 기름 증기 들여마셔 가면서 제사상을 차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많이 한다. 길지 않은 인생. 제사를 폐하자. 죽은 사람을 위해 살지 말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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