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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기록

무궁화호 객차 내에서 큰소리로 통화하던 그 여자

by 통합메일 2021.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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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역은 제천역이었다. 새로이 지은 역사에는 어딘가로 떠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하지만 마냥 깔끔한 기분만 드는 건 아니었다. 플랫폼에 들어서기도 전에 대합실에서는 어딘가로부터 시작된 고함을 들을 수 있었다. 고함의 진원지를 따라서 두리번거리며 걷다보니 머지않아 근원지를 찾을 수 있었다. 웬 남자 노인과 여성 역무원이 실랑이 중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산발적으로 들리는 고함만 가지고는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갈등을 빚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장화를 신은 노인은 백패킹용 배낭에 침낭 따위를 우겨넣은 채 이를 들쳐매고 있었다. 제법 키가 훤칠했다. 그래서 여자 역무원의 작은 키가 더 큰 인상으로 다가왔다. 그들을 지나쳐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멀찌기에서 그들을 지켜봤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실랑이를 약간 신경 쓰는 듯도 했지만 결코 발걸음을 멈추는 일 없이 자신의 길을 갔다. 또 하나의 구경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이내 곧 나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미리 일찌감치 예매를 했으면 좋았겠지만, 하루 전에 예매를 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자리를 확보하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자리는 -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 맨 앞 창가 자리다. 울며 겨자 먹기로 앞쪽 창가 자리를 예매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제천에서 출발하는 열차는 좌석번호가 반대다. 결과적으로 나는 뒷쪽 창가 자리에 앉게 되었다. 기차에 타자마자 나는 무선 이어폰을 귀에 끼웠다. 세상의 소리 대신 내가 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리 다운받아 둔 유튜브 영상을 시청했다. 그런데 이어폰을 끼고 있음에도 들려오는 소리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바로 뒷자리에서 앞좌석 등판을 발로 차면서 열심히 게임에 몰두하는 남자 아이의 혼잣말이었다. 게임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가상의 캐릭터에 대해 감정 이입한 나머지 그를 쳐부수기 위한 추임새를 끊임없이 뱉어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같은 행(오)의 건너편에 앉아있는 젊은 여자의 통화 소리였다. 순간적으로 나는 두 가지 소음의 비도덕성을 저울질했다. 아무래도 아직 사회화가 덜 될 수 밖에 없는 아이의 무의식적 추임새보다는 지극히 사회화의 기회가 다분히 주어졌을 수밖에 없는 나이의 저 여성이 범하고 있는 행위에서 발생하는 소음이 훨씬 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시야를 넓여 관찰해보니 그는 헐렁한 회색 트레이닝복을 위 아래로 입고 있었고, 상의에는 후드가 달려 있었다. 양말은 신지 않았고 흰색 크록스를 신었는데 알록달록한 지비츠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데 반해 때가 꼬질꼬질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그가 옆 좌석 바닥에 내려놓은 커다란 짐가방이었다. 지퍼가 달린 보스턴백이었는데, 이케아 같은 곳에서 구할 수 있는 대형백의 소재였다. 그러니까 자신의 몸통 정도되는 커다란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여자였다. 그 안에 대체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짐작조차 가지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녀가 신경 쓰이는 건 비단 나 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실 내 앞에 앉은 남자도 적잖이 민폐이긴 했는데, 이 남자는 자신의 좌석을 한껏 뒤로 눕혀 나의 공간을 최소화시키고 있었다. 이래저래 나는 측면과 앞뒤로부터 나의 자유를 부단히 침해받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대중에 섞여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이가 감수해야 하는 불편인가 하는 생각으로 참기로 했다. 다만 저 여성이 연신 "오빠"를 남발하며 누군가와 통화하며 발생하는 소음은 공중의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어떻게라도 제재를 해야 하지 않나 싶어 이를 위한 적당한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기차라는 대중교통에는 이러한 민폐를 제재하기 위한 신고방법이 마련되어 있으리라. 하지만 나의 그러한 고민은 의외의 요소로 부질없는 것이 되었다. 내 앞에 앉은 민폐남이 언제 그랬는지 모르게 이미 승무원 쪽으로 신고를 한 모양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야기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승무원이 순찰을 돌면서 우리가 앉은 부근에서 신고자를 찾는 제스쳐를 취했고, 내 앞에 앉은 사내는 잽싸게 눈치로 저 여자임을 알렸다. 물론 승무원이 그 여자에게 너무 대충 경고를 하는 바람에 경고라는 게 상당히 무색해지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도 두세번 추가로 경고를 하니까 이 여자도 이내 눈치를 보면서 자제를 하기 시작했다. 흠.. 어쩌다 저런 사람이 됐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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