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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워 호스(War horse)> 영화감상문

by 통합메일 2014.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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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 호스 (2012)

War Horse 
8.1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출연
제레미 어바인, 에밀리 왓슨, 피터 뮬란, 톰 히들스톤, 베네딕트 컴버배치
정보
전쟁 | 영국, 미국 | 146 분 | 2012-02-09
글쓴이 평점  



워 호스(War horse) 영화감상문


목차

 

1.소개

2.줄거리

3.연출

4.옴니버스를 경계를 뛰어넘는 말

5.생명에 대한 거시적 조망이 생명에 대한 본질을 고찰케 한다

1.소개

이 문서는 2012년 2월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워 호스(War Horse)를 시청하고 작성한 영화감상문이다. 주연 배우로는 제레미 어바인, 베네딕트 컴버배치, 톰 히들스턴이 출연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이 영화에서는 말(馬)이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때문에 평소 동물에 대해 별로 흥미가 없었던 필자는 적잖은 의구심을 갖고 감상에 임했으나, 머지않아 영화 속에서 현란하게 행진해 나가는 서사를 바라보며 과연 거장 스필버그라는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2.줄거리

영국의 데븐 지방의 농부 ‘테드 너라콧’은 쟁기를 끌 농사용 말을 사기 위해 시장에 갔다. 마시장 경매에 참여한 테드는 그곳에서 매우 멋진 말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 말은 농사짓기에 적합한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은 차라리 경주용으로나 적합한 말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는 그 말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말에 돈을 걸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친구들이 아무리 만류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소작농인 그는 자신이 농사짓는 땅의 주인과 말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임하게 되었다. 서로 간의 자존심을 건 경쟁이었다. 결국 말은 테드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테드는 말 값으로 터무니없는 돈을 치러야 했다. 엉뚱한 말을 끌고 집으로 돌아온 테드를 맞이한 그의 아내는 불같이 화를 냈다. 정작 필요한 것은 쟁기를 끄는 말인데 남편은 터무니없는 값에 엉뚱한 말을 사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당장 말을 바꾸거나 환불해오라고 남편에게 요구했지만, 첫눈에 그 말에게 반한 아들 ‘알버트’의 애원 덕분에 말은 그 집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다음날부터 알버트는 말에게 ‘조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는 굉장한 정성을 들여서 훈련을 시켰다. 경주용 말답게 조이는 자동차보다도 빨리 달릴 수 있는 훌륭한 말로 자라났다. 그 시간동안 알버트와 조이는 매우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머지않아 지주 라이온스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알버트네 가족은 지주인 라이온스에게 빚이 있었다. 라이온스는 황무지를 개간해낸다면 빚 청산을 연장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농사용 말이 아닌 조이로 땅을 개간한다는 것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라이온스는 그 점을 악용해서 일부러 그렇게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알버트는 근성있게 조이를 달래서 결국 기적처럼 황무지를 개간해냈고, 결국 빚 갚은 기한을 연장할 수 있었다. 새로운 땅이 생긴 가족들은 희망에 들떴다. 하지만 분홍빛 나날은 또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폭우가 몰아치는 바람에 새로 심은 작물이 모두 죽어버린 것이었다. 결국 알버트의 아버지인 테드는 조이를 전쟁터에 나가는 어느 군인에게 팔아버린다. 알버트는 아버지에게 달려가 애원해 보지만 이미 말은 팔린 뒤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조이의 새로운 주인이 된 니콜스 대위가 말을 사랑하는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진실된 마음에 알버트는 마지못해 그에게 조이를 넘겨주게 된다.

이제 조이는 알버트의 품을 떠나 니콜스 대위를 태우고 전쟁터로 떠나게 된다. 때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이다. 전장에서 조이는 검은말 ‘초핀’을 만난다. 초핀 역시 조이 못지 않게 좋은 말이었고, 둘은 좋은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처음 출전한 전투에서 두 말은 모두 주인을 잃게 된다. 두 말은 독일군의 소유가 되었다. 독일군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는 것은 앳된 두 형제였다. 독일군은 말을 전투용으로 잘 사용하지 않아서 그들은 도살될 뻔 했지만, 이전에 알버트가 조이에게 마구를 쓰는 법은 훈련시킨 덕분에 두 말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독일군이 진격을 하면서 말을 돌보던 두 형제는 서로 이별을 하게 될 위기에 놓이게 된다. 형은 그대로 본부에 남고, 동생은 전장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동생은 전투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형은 그런 상황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결국 형은 전장으로 떠나는 동생을 빼돌려 탈영을 감행하고, 두 마리의 말은 그 형제들을 태우고 달린다. 그들은 어느 풍차에 숨었다. 하지만 이내 곧 발각되어 두 형제는 총살을 당하고, 조이와 초핀, 두 마리의 말들은 그대로 풍차에 남겨지게 된다.

풍차에 남겨진 말들을 발견한 것은 에밀리라는 이름의 예쁜 소녀였다. 부모를 여읜 그녀는 할아버지와 함께 단 둘이 잼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멋진 말 두 마리를 갖게 된 그녀는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그녀의 할아버지는 몸이 허약한 자신의 손녀가 말을 가까이 하는 것이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 센 손녀를 그는 이길 수가 없었다. 에밀리는 과거 알버트가 그랬던 것처럼 조이를 훈련시키면서 그 동물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결국 조이와 초핀은 독일군에게 발견되는 바람에 다시 독일군에게 끌려가게 되었다. 사랑하는 말들을 빼앗긴 소녀 에밀리는 그 충격으로 죽게 되고, 그에 대한 상실감으로 인해 할아버지는 말들을 되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조이와 초핀은 다시 전장으로 끌려간다. 초핀은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조이는 죽을힘을 다해 대포를 끌었다. 전쟁은 갈수록 독일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듯 했다. 초핀은 결국 전장에서 죽음을 맞았다. 후퇴하는 독일군은 조이를 버리고 도망을 쳤다. 홀로 남겨진 조이는 겁에 질린 나머지 전장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 그만 철조망에 휘감겨 전쟁터 한복판에 쓰러져 버렸다. 조이가 쓰러진 곳은 마침 영국군과 독일군이 대치하고 있는 전장의 한가운데였다. 전장에 쓰러져 꿈틀대는 말을 발견한 양쪽에서 군인이 한 명씩 나왔다. 그들은 절단기를 이용해서 조이의 몸을 휘감은 철조망을 잘라냈다. 서로 전쟁 중인 두 군인이 힘을 합쳐서 하나의 생명을 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전을 던져서 누가 말을 데려갈지 결정하기로 했다. 그 결과 말은 영국군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때 마침 망아지 때부터 조이를 키워왔던 알버트는 친구와 함께 군에 입대해서 전쟁터에 있었다. 그는 전투 중에 눈을 다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였다.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살아 돌아온 조이는 영국군들 사이에서 ‘기적의 말’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하지만 철조망에 온 몸을 찔렸던 조이는 파상풍에 걸려버렸다. 조이를 구한 군인은 그를 군의관에게 보였지만 워낙 바쁜 군의관은 말을 그냥 안락사 시키도록 했다. 명령을 받은 하사관의 권총이 조이의 대가리를 겨눴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귀에 익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알버트가 어릴 적에 조이를 훈련시키면서 불었던 휘파람이었다. 그 소리를 잊지 않은 조이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수많은 군중 사이로 자신의 옛 주인이 있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알버트는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조이를 만났다. 자신의 말이 틀림없음을 확인한 그는 군의관에게 조이는 자신의 말이니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군의관은 그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고 안락사를 계속 진행하도록 명령한다. 하지만 알버트는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조이의 생김새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 말에 군의관은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군의관은 알버트에게 조이를 부상병 치료하듯 치료하겠노라고 약속했고, 그 약속대로 조이는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전쟁이 끝났다. 알버트는 조이를 다시 만났지만 군법에 따라서 조이는 경매에 부쳐져야 했다. 이렇게 또다시 조이와 이별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는 찰나 동료들은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을 알버트에게 전달했다.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알버트는 경매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치열한 경매 와중에 누군가가 정말 터무니 없이 높은 가격을 불렀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꼭 그 말을 자신의 것으로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말을 잃은 충격으로 죽은 소녀, 에밀리의 할아버지였다. 손녀를 잃은 상실감에 대한 보상으로 그는 말을 되찾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조이의 고삐에 매달려 있던 휘장을 통해서 그는 조이의 원래 주인이 알버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구입한 말을 다시 알버트에게 돌려준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서 말과 주인은 다시 재회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3.연출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아무리 영화라지만 어떻게 말이 저렇게 연기를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떻게 발을 구르게 하고, 콧김을 내뿜게 하고, 뛰쳐 나가게 하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주인공 말이 전쟁터를 헤매다가 철조망을 온 몸에 휘감고, 그 철조망에 걸려서 공중에서 한바퀴 돌고 땅바닥에 나뒹구는 장면이었다. 컴퓨터 그래픽 같은 것을 썼나 싶기도 하면서도 그게 그래픽이라 하더라도 또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대단하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잘 조련된 말들을 썼다 해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4.옴니버스를 경계를 뛰어넘는 말

이 영화는 각각의 사연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는 않지만, 조이라는 말의 여정을 카메라가 쫓아가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모종의 옴니버스적 효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보인다. 즉, 처음에는 알버트네 가족의 사연을 보여주고, 그 다음에는 조이가 니콜스 대위를 새 주인으로 맞이하여 초핀이라는 말과 친구가 되는 사연을 보여주고, 그 다음에는 독일군 형제의 우의를 보여주고, 그 다음에는 손녀와 할아버지의 사연을 보여주고, 그 다음에는 전쟁터에서 서로를 적으로 두고 있는 두 인간의 협력과 화합 가능성을 보여주는 매개체로 조이를 보여주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다시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는 사연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성은 주인공 말의 파란만장한 여정을 그려내는 동시에 그 말이 이동하는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또한 놓치지 않고 충실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구성이 매우 탁월하게 느껴졌다. 물론 옴니버스식 구성을 취하는 영화들 중에 이렇게 어떤 공통되는 매개체를 가지고 각각의 이야기들 사이에 모종의 일관성이나 연속성을 추구하는 작품1)들이 꽤 된다고 알고는 있지만, 그런 영화들과 비교할 때도 이 영화는 다른 영화들과 차별되는 탁월함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그러한 이야기들을 매게하고 있는 매개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면서, 인간은 아니지만, 또 엄연한 생물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5.생명에 대한 거시적 조망이 생명에 대한 본질을 고찰케 한다

미국계 유태인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듣다보면 그 속에 몇 가지 공통되는 평들이 겹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글로벌 히어로 국가로서의 미국, 가족의 소중함, 생명에 대한 존중, 인간 이외의 존재를 통한 인간에 대한 고찰 같은 것들이다. 물론 이와 같은 특징이 모든 영화에 공히 반영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고, 그의 영화들이 대개 이러한 특징들 중에 한두 가지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를 회상해보자 죠스, 이티, 인디아나 존스, 그렘린, 백투더퓨처, 태양의제국, 후크, 쉰들러 리스트, 쥬라기 공원, 트위스터, 맨인블랙, 라이언 일병 구하기, 딥 임팩트, 글래디에이터, AI, 바닐라 스카이, 밴드 오브 브라더스, 마이너리티 리포트, 캐치 미 이프 유 캔, 터미널, 우주전쟁, 게이샤의 추억, 뮌헨, 링컨 등이 있다. 기억나는 것들만 해도 이 정도인데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지금까지 제작된 그의 영화를 생각해본다면 이 영화의 제목을 볼 때 우리는 일단 밴드 오브 브라더스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같은 스필버그류의 전쟁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확실히 전쟁터를 공간적 배경으로 해서 촬영된 장면들이 꽤 되기 때문에 틀린 예측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전쟁(war)에 초점이 맞춰져 있느냐 아니면 말(Horse)에 초점이 맞춰져 있느냐 하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면 나는 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일단 나는 동물에 대한 애호감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는 인간의 부류에 속한다. 애완동물을 기르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쩌다 누군가의 애완동물을 길거리에서 마주치게 된다고 하더라도 기분이 좋다는 느낌을 받는 일도 드물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제법 재미있게 봤고, 이 영화 속에 들장하는 말 ‘조이’에게 애정을 느낀 것도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영화에서 그 동물을 단순한 미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에 근접한 주체로서의 생명으로 묘사하고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영화의 줄거리를 다시 회상해보자, 평생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알버트를 만난 조이는 알버트에 의해 훈련을 받는다. 그 훈련의 내용이라는 것은 주인의 휘파람 소리에 맞춰서 주인에게 달려가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강아지를 훈련하는 것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휘파람을 불어서 말을 부르다니. 그런데 그것이 진짜로 통한다. 알버트가 휘파람을 부니 말이 달려오는 것이다. 관객들은 그 순간에 처음으로 큰 기쁨을 느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까닭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생명과의 교감을 지향하는 욕구에서 찾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천성적으로 다른 생명체와 교감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 소통과 교감하고 싶어 하며, 나아가 인간이 아닌 생명체에 대해서도 그런 욕구를 가진다. 동물은 물론이거니와 식물의 교감을 시도하는 사람도 있다. 세간에서는 흔히 자연에 대한 사랑이라고 표현되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표현보다는 생명과의 교감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굳이 다른 인간과의 교감이 아니라 인간이 아닌 말과의 교감을 묘사하는 영화를 만들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 영화를 통해서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을까?그 이유에 대해서 나는 인간의 본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혹은 생명의 본질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인간, 그리고 생명에 대한 보다 넓은 범위에 대한 조망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이를테면 성리학에서 말하는 격물치지와 같이 말이다. 격물치지라는 것은 사물을 관찰하여 그 속에 내재된 하늘의 이치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러한 하늘의 이치는 인간의 본성에도 내재되어 있는 것인바, 그렇게 발견한 사물의 이치가 곧 인간본성의 이치라고 주장하는 개념이다. 즉,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인간 이외의 존재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고, 인간이라는 범주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생명에 대한 보다 넓은 영역에서의 고찰을 통하여 생명 그 자체의 본질을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나 하는 것이 바로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궁극적으로 갖게 된 생각이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론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내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본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생명 그 자체에 대한 본능적 존중감과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 나아가 그러한 생명과 교감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가진 존재라는 것, 그리고 나라는 존재 역시도 그러한 인간으로서 그와 같은 욕구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1) 이를테면 영화 <러브 액추얼리>가 ‘크리스마스’라는 소재를 공통의 매개체로 하여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는 점에 있어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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