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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철학

에반게리온의 세계관과 니체의 영원회귀

by 통합메일 2012.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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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게리온의 세계관과 니체의 영원회귀

(니체의 영원회귀가 가진 잔인과 희망의 이중성)


영원회귀

영겁회귀(永劫回歸)라고도 한다. 니체의 공상적인 관념. 그에 의하면 생은 원의 형상을 띠면서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고, 피안의 생활에 이르는 것도, 환생하여 다음 세상에서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는 것도 모두 부정하고, 항상 동일한 것이 되풀이 된다는 사상이다. 여기에서 니체는 현실의 삶의 고뇌와 기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순간만을 충실하게 생활하는 데에 생의 자유와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영원회귀의 관념은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학파나 스토아학파 등에서도 보이지만, 니체는 이것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발전의 사상에 대립시켜서 부활시켰다.

<철학사전, 임석진 외 편저, 2009, 중원문화사>

쇼펜하우어가 금욕을 주장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나는 그의 이론을 읽으면서 불교의 이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칸트와 달리 그는 인간의 본질을 이성이 아닌 의지로 규정한다. 얼핏 보기로서는 이때의 의지라는 것은 흄이 주장하는 정념과 비슷한 개념인 것으로 사료된다. 때문에 동일한 논지에서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도 이성이라는 것은 의지를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그러나 흄은 인간이 가진 정념이 비단 이기적 행위의 근거로 작용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유용성을 지향하는 인간성의 정서에 의해서 도덕적 행위를 실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반면, 쇼펜하우어의 경우 인간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의지라는 것은 그야말로 ‘눈멀고 정지할 수 없는 충동 혹은 욕망’ 같은 것이어서 이러한 욕망의 완벽한 충족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바, 이것이 곧 삶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근본적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삶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방법이란 첫째로 심미적 관조이다. 예술과 지적활동을 통해 사물의 이데아를 관조함으로써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단지 일시적인 안정만을 가져다 줄 뿐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쇼펜하우어는 근본적인 치유법으로 금욕을 제시한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나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의 본질이 의지이며 그것을 모든 인간과 생명체가 공유하고 있음을 인식함으로써 모든 존재가 고통에 처해 있음을 깨닫게 됨으로써 그는 동정심의 정서를 갖게 된다. 이러한 금욕과 동정심이 바로 그가 제시하는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이다. 이렇게 볼 때 그 구도가 불교의 그것과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다. 불교 역시 생을 고통 그 자체로 인식했고, 뭇 존재들에 대한 자비를 설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니체를 공부하면서 나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그와 불교의 유사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른바 영원회귀 사상이라는 것이다. 위에 붙인 인용문처럼 이것은 ‘반복’이라는 것을 그 주요한 개념으로 채택하고 있다. ‘삶의 반복’이라는 것은 연장되는 내세관을 공유하는 근현대 서양세계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고방식인데 그런 환경에서 니체가 이러한 생각을 한 것은 반 기독교적인 그의 기본적 입장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할 것 같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반기독교를 추구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불교와 비슷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불교 역시 윤회관이라 하여 생을 마친 존재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계, 천상계의 6도를 각자의 업에 따라 다시 살게 되며 이러한 순환은 열반에 이르기 전까지 영원히 계속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니체의 영원회귀와 불교의 윤회설은 결정적인 차이점을 갖고 있는데 불교의 경우 개인의 선업과 악업에 따라서 다음에 살게 될 세상이나 존재의 등급이 결정되고 무엇보다 열반을 통해 그러한 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는 일종의 탈출구를 상정하고 있는데 반하여 니체의 경우에는 그러한 탈출구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으며, 삶의 반복이라는 것은 조금의 변화도 없이 그 발자취 그대로 영원히 계속해서 이어지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한 삶이든 불행한 삶이든 그것은 더 이상의 악화나 개선의 여지없이 무한히 반복된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은 최초의 경험이라기보다는 아마도 기억은 못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무수히 몇 번이나 살아냈던 삶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니체의 이론을 마주하며 나는 그것이 무척 잔인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불교의 경우 최악의 상황에서는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지만 노력에 따라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거나 천상계로 올라갈 수도 있고 나아가 열반을 통해 윤회의 고통에서 영원히 해방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인간 행위의 능동성과 변화 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인간이 무수한 선업의 결과물인 자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 세계관에서조차 자비심이 느껴지는 것이 바로 불교의 사상인 듯하다.

반면에 니체의 경우에는 그러한 능동적 행위를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행위나 사건은 그저 무한한 반복일 뿐이다. 내일은 더 낫겠지 하는 희망이나 내세에서의 구원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엇보다 내세를 삭제해 버린 것이 이론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그것은 인간이 상상되나 믿음으로나마 그릴 수 있던 탈출구를 완전히 박탈해 버리는 효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하긴 기독교의 내세 역시도 그곳에 이르게 되면 영원한 행복과 고통으로 갈라진다는 점에 있어서는 별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다.) 개인적인 시각에서 이 이론이 가진 가장 커다란 모순적이고 잔인한 면모를 보여주는 부분은 뭇 인간 존재라는 것이 서로 각기 다른 질과 무게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다고 보여진다. 물론 대개의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니까 용인할 수 있을 정도의 행복과 고통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영원회귀를 제안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도 나쁘진 않은 삶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의 사람에게 그리 큰 어려움이나 도전이 아닌 이상 많은 이들은 그것을 수용하고 자신의 삶이 ‘계속 반복 되도 좋을만한 삶이 되도록’ 더욱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자 노력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은 행복을 향유하는 이들에게는 당연히 그와 비례하여 더욱 수월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옥 같은 삶에서 현실의 노력으로는 그것을 개선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들에게는 어떻겠는가.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생을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까지도 편히 눈감지 못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런 이들에게 ‘당신의 삶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고, 그러니 반복 되도 좋을 만한 삶을 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 그런 사람에게 니체의 영원회귀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두려운 것이다.

때문에 나는 니체가 영원회귀를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이 ‘너의 삶을 영원히 반복되고 좋을만한 것으로 만들라’는 메시지를 담은 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앞서 말했듯이 나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 함축하는 바가 단순히 ‘우리 각자의 삶은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니 뒤를 생각하여 그것이 영원히 반복 되도 좋을 만큼 훌륭하고 행복하게 그리고 열심히 살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쉽게, 아니 어쩌면 결코 그 스스로의 욕구를 충족할 수 없는 존재이며, 위와 같은 주문은 각기 인간들에게 천차만별의 무게로 다가오며 무한한 고통 속에 생을 체험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주문이기 때문이다. 물론 삶이란 무척 불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빈자와 부자의 처지가 일순간에 뒤바뀔 수 있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거의 0으로 수렴되는 확률이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모든 인간이 완벽한 행복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 그것이 모든 인간에게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결코 자신의 삶을 개선시킬 수 없는 인간이 한 명이라도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사고를 벗어나기 위해 나는 영원회귀가 가리키는 것이 ‘지금의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 역시도 이 삶 이전에 몇 번이나 무수히 반복되던 것과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는 의미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일본 가이낙스社가 제작한 유명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에 투영된 세계관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제작인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두터운 마니아층의 분석에 의하면 새롭게 연재되고 있는 최근의 新 극장판 에반게리온은 이전에 발표된 작품의 세계가 멸망하고 그것이 다시 반복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즉 그것은 기존의 작품을 단순히 극장판으로 리뉴얼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중 등장인물은 인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 이미 멸망했던 세계가 되풀이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니체의 영원회귀를 이해하게 되면 중요한 것은 삶의 개선이 아닌 것 같다. 아무리 힘들게 삶을 개선해봤자 다음 생에서 나는 그러한 이전 생의 노력이나 성취를 기억할 수 없을 것이고, 그저 온전히 처음 경험하는 것으로 인식되는(하지만 사실은 무수히 반복된) 삶을 살아가면서 또 어김없이 자신의 생을 개선하려 노력하다가 생을 마감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장 절실한 것은 그러한 영원회귀를 인식하는 일이다. 좋든 나쁘든 자신의 생이 무수히 반복되고 있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현실을 개선해봤자 다음 생에서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하다. 그것을 깨닫는 것은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알게 모르게 다음의 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로로든지 간에 일단 영원회귀를 인식하게 되면 인간은 무력함을 심각한 경우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 결코 개선될 수도 긍정될 수도 없는 자신의 삶이 영원히 반복될 거라는 사실로부터의 당연한 귀결이다. 하지만 이런 절망은 정확한 판단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 절망은 언젠가는 끝나리라는 고통을 똑같은 과정을 통해 고스란히 다시 겪어야 한다는 예상에 의존하는데 이전의 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상 그의 자아는 연속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원회귀의 사실에 있어 우리의 생은 처음도 끝도 아닌 것이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생은 딱 한 번 밖에 없는 것이다. 영원회귀를 깨달은 인간은 모든 것이 반복될 것임을 알기에 고통이 끊어지는 탈출구서의 희망을 기대하지 않는다. 다음 생의 자아가 이전 생의 기억을 가질 수 없음을 알기에 지금의 고통이 반복되리란 두려움도, 지금의 행복이 반복되리라는 기대도 무의미하다. 똑같이 반복되는 사건이라도 다음 생의 자신에게는 오롯이 난생 처음의 경험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같은 생 안에서 같은 고통을 피하고 같은 행복을 좇는 노력은 필요할 것 같다. 자아는 오직 생에 의해서만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면 우리의 삶은 유래 없이 순수한 가치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극단적인 행복도 극단적인 고통도 영원의 잣대 앞에 서면 어느새 한없이 무로 수렴되는 것이다. 내세에 약속되는 구원이 아니라 현재의 모든 것이 반복된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생 그 자체가 가진 가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해준다. 불확실한 듯 보이는 삶은 영원 반복되는 과정에 맞춰 다 정해져 있지만 그 결정된 내용이 우리에게는 전달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그러한 영원회귀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해야만 하는 것은 삶을 개선하거나,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법칙을 인식하고, 법칙의 일부로 작동하는 이 생을 긍정하는 것이다. 비록 현세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천차만별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법칙에 따라 반복된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사실 그러한 상황에서는 누군가의 자아가 연속되지 않는 이상 누군가를 동정하거나 부러워하는 것이 모두 무의미해진다. 잘 살든 못 살든 누구나 본의 아니게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생의 이면에 존재하는 법칙에는 누구의 의지도 개입될 여지가 없다. 신의 뜻조차 아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조차 이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차피 누렸던 행복이며 앞으로 누려야 할 행복, 어차피 겪었던 고통이며 앞으로 겪어야 할 고통이다. 그런 삶을 위해 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순수한 삶을 순수하게 긍정하는 일이다. 삶에 대한 긍정은 유일하고도 완벽하게 무근거에 근거하게 된다. 행복하든 행복하지 않든 그것은 긍정되어야 하고 긍정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인간의 실존가능성을 긍정한 니체가 선사하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니체의 해당 사상에 대한 필자의 불충분하고 불확실한 이해에 근거하여 작성된 것이니만큼 상기 인용문을 제외하고는 그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니체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초래할 수 있음을 밝힙니다.- 특히 다 쓰고 보니까 어차피 전생과 내생을 기억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하여 우리의 삶은 반복된다기 보다는 그저 지금과 똑같이 단 한 번의 삶으로 인식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점에서 오류가 여실히 노정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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