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의 기록

좋은 술집

by 통합메일 2012. 12. 6.
반응형
'붐비어'라고 동네에 즐겨 찾는 술집이 있습니다. 터에 마가 끼었는지 업종이 바뀌기를 부지런히 하는 곳이었는데 언젠가 생긴 이 가게가 제법 오래 가더군요. 중년의 부부가 운영하는 데 꽤 자주 가서 그런지 들어서면 아는 체를 하고 길가다 마주치면 웃으며 목례라도 하지요. 이 가게에서 가장 맘에 들었건 것은 인사인 것 같습니다. 뭐랄까 단순히 주인이 손님을 잘 섬기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공손함으로써 격과 예를 갖출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하긴 술집에서 예의를 찾는 게 어불성설이기는 하지만 친구와 함께 즐겁게 마시고 계산을 한 뒤 서로 마주보고 꾸벅 깊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나오면 "이 공간에서 헤어짐에 있어 진심으로 서로가 안녕하게 있어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구나"하는 기분이 들어 상쾌하고 나쁘지 않습니다.

언젠가 동네 친구와 함께 그 가게에서 술을 마시는 데 그날 따라 조소 어린 푸념이 시선을 타고 안주 위를 맴돌았습니다. 안주가 치킨이었는지 과일이었는지 또 그 푸념의 정확한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답답한 현실에의 토로였을 것입니다. 이루는 것 없이 빌빌대며 짬짬이 술집에서 푸념을 흩뿌리는 나날에 대한 자괴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멍한 시선을 좀처럼 추스리지 못한채 저는 어린 아이가 더듬더듬 책을 읽듯 답했습니다. "벗이여 그래도 괜찮지 않겠는가. 어차피 더 나은 날에 대한 우리의 의지가 이루어 지리라 믿는다면 아니 혹은 더 나빠진다 하더라도 이렇게 맘에 드는 가게가 계속 있어주고, 친구들 중 몇몇이나마 부지런히 만나서 소중한 뭔가를 열심히 낭비하는 것도, 그것은 그것대로 괜찮지 않은가.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내 소원이지"

물론 정확한 워딩은 아니고 흐린 기억을 토대로 그럴듯하게 재구성한 것입니다. 철부지 같은 답에 그 친구가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어쩌면 알게되는 것이 두렵고 그래서 그냥 모르는 상태로 두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되는 류의 일입니다.

그 날 이후로 친구는 노력인지 행운인지 모를 일이지만 고난을 이겨냈고 "좋다"는 못 돼도 "괜찮다"라고 할 수 있을만하게는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가끔 그 술집에서 만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맥주와 소주, 치킨과 과일, 친구와 연인, 결혼과 사랑, 효도와 부모님, 교육과 문학과 사대강 수질오염, 사진과 카메라, 종교와 철학, 탄소배출권과 플라즈마와 중성자, 대통령선거와 안철수와 문재인과 박근혜와 나로호 같은 것들을 씹어 먹습니다.

동네에는 좋은 술집이 하나 있어 이따금 그곳에 가면 반가운 벗을 만나 기분 좋게 인사를 하고 열심히 먹고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때로는 너무 많이 먹어 토하기도 하고 또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반응형

'일상의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Kirinji-Ailiens  (0) 2013.03.09
2013년 1월 12일의 꿈 (뉴욕 테러의 현장에서)  (0) 2013.01.12
잡념  (0) 2012.10.30
교통체증 같은 요즘  (0) 2012.10.28
남성연대 성재기 대표에게 멘션을 보내니  (2) 2012.10.1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