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인간의 노동,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서로 상이한 의견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양자는 '노동'이라는 주제에 대해 깊이 천착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한 배를 탔다고 할 수 있는 관계다.
인류의 경제활동 및 경제 체제를 해석하는 가장 대표적인 두 이론이 공통적으로 '노동'에 주목하여, 이에 대한 논의를 통해 그 철학적 토대를 구성해 나가고 있다는 점은 단순한 우연에 그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는 논리적 필연의 귀결이다.
인간이 살아가고, 사회를 구성하여 이를 영위해 나감에 있어서는 '재화'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재화에 포함된 '가치'를 필요로 한다. 속된 말로 '먹고 살기 위해'서 인간은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공히, '노동하기 싫어하는 인간', 혹은 '노동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으로 가득찬 현실을 포착함으로써 그 철학적 첫 단추를 꿴다. 물론 그러한 현실적 초상에 대한 해석은 다분히 달라지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노동하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인간들로 이루어진 세계에 대한 양자의 해석은 상이하다. 자본주의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노동하고자 하지 않는다. 귀찮아 한다. 인간은 한 없이 이기적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은 욕심이 있다. 그것은 더욱 더 많이 갖고 싶어하는 욕심이다. (어쩌다 인간은 그런 욕심을 갖게 되었을까? 안타깝게도 그에 대해서는 지금 이 장에서 적을만한 지식을 나는 갖고 싶지 않다. 루소식으로 말하자면 비교심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런 욕심으로서의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인간은 일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욕심과 이기심은 모든 이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성적 감정이기 때문에 그러한 이기심의 각축을 통해 결과적으로 사회는 번영에 이른다. 울며 겨자 먹기 식의 노동이 빚어낸 눈부신 결실인 것이다.
물론 위와 같은 기사를 참고한다면 아담 스미스가 언급하는 이기심에 대한 이해를 좀 더 심화시킬 수 있다. 그의 눈으로 봤을 때 인간이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이지,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할 수는 없다. 애당초 사회라는 것이 자신만의 이익 추구해서는 목표로 하는 자신만의 이익을 온전히 실현할 수가 없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반면 사회주의를 대변하는 마르크스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인간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노동을 마음껏 자유롭게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하고자 하는 존재라고 봤다. 그러니까 이쯤되면 이미 '노동'에 대한 정의가 달라진다.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이란 당연히 즐거움이라든지 개인적 만족과는 구분되어지는,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로 정의된다. 반면 사회주의/공산주의에서의 노동이라는 건 자아실현을 위한 생산적 행위를 의미한다.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이라는 행위는 나의 무언가를 투자하여 타인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이고, 그러한 행위를 통해 다른 한편으로 나는 다른 이들로부터 무언가를 돌려받는 행위다. 다시 말해 교환을 전제로 한다. 이익을 교환하기 위해 노동한다. 내가 이루어낸 것 이상의 가치를 되돌려 받기 위한 노동이다. 이에 실패한다면 말 그대로 헛수고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사회주의에서의 노동은 이 역시도 교환이랄까, 아니 사회에 대한 기여를 전제로 하지만, 기여하지 못한다고 해서 순전한 헛수고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아실현의 측면에서 그 개인에게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러한 노동의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요소들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자신의 자아를 보다 또렷하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인으로서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면모를 동시에 목격할 때가 심심찮다. 때로는 정말 즐거움에 도취되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일하지 않으려 애쓰는 경우도 많이 본다.
특히 소비에 도취된 현대인들을 목격할 때는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긍정적인 희망의 비전을 찾고자 했던 마르크스의 안목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무언가에 도전하고 노력함으로써 뭔가를 생산해내기 보다는 편안하고 안락하게 뭔가를 끊임없이 소비하고 누리며 그것을 자신의 권리라고 주장하며 그러한 권리를 놓지 않는 데에만 안간힘을 쓰는 이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들이 경주하고 있는 그러한 노력, 자신의 권리를 챙기고자 하는 노력을 하나의 노동으로 간주해야 하는 것일까? 그들은 권리를 챙기는 그러한 노력을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는 것일까?
대저 많은 경우 하나의 공동체가 방기될 경우 그 공동체 안에는 개처럼 일하는 자와 신선처럼 놀고 먹는 자가 공존하게 되고 그로 인해 불화가 발생하거나, 생산성의 저하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결국 해결책이랍시고 도출되는 것은 전반적인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각종 규제와 수량화다. 방기하는 자들이 있기에, 결국 의미 없는 시간과 숫자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능력이 떨어지거나 노력하지 않는 이들 때문에 발생하는 아이러니다. 인류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이다. 여전히 우리가 천박한 자본주의에 머무르를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담스미스와 맑스의 인간관은 모두 나름의 일리가 있다. 어쩌면 둘 중 어느 한 쪽의 본의라도 제대로 실현된다면, 그럴 수록 세상은 좀 더 나아지리라는 밝은 기대를 갖게 만든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자본주의임에도 그러한 자본주의의 이상을 제대로 실현조차 하고 있지 못하다. 아담 스미스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마르크스에 대한 이해를 보편화시켜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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