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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생각

OOO 미안해 챌린지에 대한 일침[칸트의 합의무적 행위에 대하여]

by 통합메일 2021.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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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시개]"진정서? 미안해 챌린지?"..소아과 의사 일침

생후 16개월된 정인 양을 지속적으로 학대해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 가해 양부모를 엄벌해달라는 내용의 진정서가 법원에 빗발치는 가운데, 한 소아응급센터 의료진이 해결책 마련부터 나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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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이 사회적 현상에 대해 지나치게 시니컬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도 하지만, 나는 위에 링크된 기사와 원문의 내용에 깊이 공감한다.

 

물론 모든 챌린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방송이 나가기 이전에 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이루어진 챌린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당화가 가능하다. 더 나아가서는 방송이 이루어진 후에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챌린지에 대해서도 물론 정당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도덕적 정당화의 범주 바깥으로 끌어내어질 수 있는 챌린지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칸트의 [합의무적 행위]의 개념이다.

 

칸트는 의무론적 윤리학을 주장했고, 인간의 행위 동기를 기준으로 행위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윤리학을 제시했다. 다시 말해 인간 행동의 도덕성을 평가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행위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행위자의 행위 동기라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인간의 행위 이면에 도사리고 있을 수 있는 동기의 경우의 수는 무한대에 가깝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시피 하나의 목적은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오직 단 한가지 '행복'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하지만 칸트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행위 동기들 중에서 단 한 가지 [선의지]만은 행복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옳은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 떄문에 그 자체로 옳은 것이고, 이러한 [선의지]를 동기로 삼아 이루어지는 행위만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나의 어떤 특정한 이익을 위해 이루어진 행위는 결코 도덕적인 행위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또 다들 오해하시는데, [도덕적인 행위라고 할 수 없다.]는 게 꼭 [극악무도한 행위 or 비도덕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냥 도덕의 범주 바깥에 위치하는 행위라고 이해하는 게 옳다. 그러니까 도덕적인 행위 바깥에는 비도덕적인 행위 뿐만 아니라 무도덕적인 행위도 존재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태도나 입장 혹은 행위가 도덕의 영역 바깥에 존재한다고 해서 섣불리 버럭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면에 비추어 봤을 때 나는

 

'몇몇 챌린지들은 도덕의 바깥에 위치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마치 유행이라도 쫓듯이 혹은 자신의 화와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서 혹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동정심을 해소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챌린지도 분명히 존재하기 떄문이다. 매스컴으로도 보도된 바 있지만 심지어는 이 챌린지를 이용해서 굿즈를 만들어 판매하다가 걸려서 제명된 예술인도 있는 모양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나는 많은 챌린지들이 이러한 경우로 분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은 어떤 분노나 동정심으로부터 기인하는 모든 챌린지다.

 

선의지에 입각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아무리 선량한 동정심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도덕적인 행위로 인정받을 수 없다. 정의감이라든지 동정심이라든지 하는 그럴듯하고 거창한 말로 치장된 것일 뿐 결국에는 자기 만족을 위한 감정의 표명에 불과하다. 

 

이런 행위를 칸트 윤리학에서는 [합의무적 행위]라고 설명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도덕적 행위와 동일해 보이지만, 그 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동기/의지는 결국 자기 자신의 행복을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의무로부터 나온 행위]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행동이 도덕적인 것으로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바로 의무(선의지)로부터 기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혹은 심리적 차원에서 방금 내가 접한 극악무도한 행위로부터 심리적 거리를 두는 행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을 세월호 때도 숱하게 목격했던 것 같다. 재난이 발생하고 너무나도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서둘러 거리를 둔다. 나는 아니라고, 그들과 다르다고 입장을 표명하면서, 무사한 나의 나날에 안도한다.

 

이렇게 쓰면 무슨 '쿨병 환자'로 낙인이 찍히는 게 최근의 세태다. 그리고 또 이렇게 쓰면 '쿨병에 걸린 줄 알긴 아는 모양이네'라는 반응을 마주하게 되는 데 또한 요새의 세태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무덤덤한 척을 하는 걸 쿨병이라고 정의한다면 나는 쿨병 환자는 아니다. 나 역시 지난 주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면서, 특히 아이에게 가해진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험을 통해 검증하는 장면에서, 그리고 어린이집에서 외롭게 앉아있는 아이를 찍은 CCTV 영상을 보며서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낯선 감정을 마주해야 했고, 나도 모르게 욕지기를 내뱉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나의 감정을 인터넷이라는 공적 장소에서 분출하지 않는다. 그것이 차이점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그러니까 분노나 동정심을 해소하기 위해 [미안해 챌린지]에 동참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내가 적어도 그런 의미에서 적극적인 도덕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니까 도덕의 영역 바깥에 머물러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미안해 챌린지]에 동참하고 있는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자신이 도덕의 영역 바깥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도덕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잘못 알고 있다. 즉 나는 내가 도덕의 바깥에 있음을 알고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 반면, 나와 마찬가지이면서도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것이 그들과 나의 차이점이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나는 일말의 도덕성을 위해 노력한다. 즉 문제를 위한 합리적 사고를 경주한다는 측면에서 도덕적이다. 말인 즉슨

 

'나는 이러한 사회적 이슈가 매번 처벌 일변도의 논리로 이어지는 것에 강한 우려를 느낀다.'

news.v.daum.net/v/20210108145707399

 

[이슈시개]"진정서? 미안해 챌린지?"..소아과 의사 일침

생후 16개월된 정인 양을 지속적으로 학대해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 가해 양부모를 엄벌해달라는 내용의 진정서가 법원에 빗발치는 가운데, 한 소아응급센터 의료진이 해결책 마련부터 나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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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는 "가해자 엄벌을 탄원할 것이 아니라, 아동보호국을 정식으로 만들라고, 보호아동을 위한 시설을 만들고 거기에 인력과 예산을 넣으라고 호소해야 한다"며 "'약사에게도 신고의무를 부여하자' 따위의 되지도 않는 법령을 발의할 게 아니라 사설기관과 민간병원에만 속수무책 떠넘겨져있는 일을 나라에서 챙겨서 하라고 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나는 위 글의 저자와 생각을 같이 한다. 과연 처벌만 가지고 이런 범죄를 해결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모든 범죄에 대해서 사형을 집행한다면 우리는 범죄를 박멸할 수 있을까? 과거 고대나 중세나 근대에는 형벌이 엄청나게 가혹했는데 그때는 왜 범죄가 끊이지 않았는가?

 

나는 사람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너무 쉽고 간단하게 생각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적 한계의 근본적 원인 역시 [거리두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 나는 그런 범죄를 저지를 필요가 없다. 그리고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으니 아주 끔찍한 벌을 내려라."라는 심리다.

 

나는 오히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리두기]가 아니라 범죄를,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이해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또 사람들은 '범죄자랑 똑같은 놈이 되라는 거냐?'고 비아냥대기 일쑤다.(하기사 그것이 우리 사회의 수준인 것이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게 그래서 그렇게 힘든 까닭이고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적어도 처벌을 강화하라는 외침보다는, 대체 왜 그랬을까?를 헤아려보는 것이, 다시 말해 군중 속에 몸을 담고 그 속에서 극형을 외치는 것보다는, 홀로 조용히 그리고 좀 더 길게 지속적으로 사건의 원인을 궁금해하는 것이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도덕적 행위라는 것이다.(제발 사실적 차원의 이해와 도덕적 차원에서의 정당화는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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