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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쓰기]무덤짓기

by 통합메일 2013.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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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짓기>

 

김정환

 

어느덧 우리의 시절을 긍정하고 위로해주는 말들이 범람하는, 말들이라도 범람하는 시절이 도래했습니다 한 번 구경해 본 적도 없는 인쇄소에서 태어났을 그 말들을 듣고 있자니, 읽고 있자니 한 없이 달콤하여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잠이 밀려옵니다 이 추운 도서관에서 하늘에 떠있는 에어컨 구멍을 꺼칠꺼칠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결국 미소 짓는 생을 포기하려던 순간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학생이 새치기 하듯, 봉분을 쌓듯 책상 위에 팔을 포개고 그 틈에 얼굴을 묻습니다 몇 번이나 죽어본 적 있는 자의 능숙한, 현란한 동작에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립니다 잠을 깨기 위해 일어섭니다 GPS로 위도와 경도를 계산하듯 내 나이와 D-day를 가늠하며 서가를 서성입니다 그리고 역시 책 냄새에, 그 촘촘한 향기에 배가 빵빵해져 화장실로 갑니다 갔는데 마침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던 담배냄새와 마주칩니다 버릇처럼 금연 팻말을 찾아보지만 오늘도 쉽게 찾아지지는 않습니다 바지를 내리는데 호주머니 속의 담배가 갯지렁이 꿈틀대는 모양으로 손가락에 걸립니다 서리 내린 아침 같은 똥을 끄집어내고 활기찬, 당당한 사람들을 쉬쉬하는 발걸음으로 도서관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제서야 담배 한 대 젖은 머리로 목에 수건을 두른 담배냄새는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와 한껏 몸을 뒤로 젖힌 채 아- 합니다 나도 아- 하고 싶습니다 사실은 우아아아- 하고 싶습니다 지나가는 시선들도 우아아아- 하고 싶은 눈칩니다 꾸물꾸물 태풍이 온다고 꾸물꾸물, 개미들도 태풍이 온다고 혼비백산 담배연기는 재미있겠다며 사라졌는데 아마도 태풍이 오는 쪽으로 뛰어간 모양입니다 방공호 같은, 여리고성 같은 도서관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머지 않아 공습이 시작될 것입니다 아직 도망칠 힘이 남아있는 '우리'들은 살아남기 위해 여념이 없습니다 자리로 돌아오니 그 여학생은 완전한 하나의 무덤이 되었고 하늘에서는 더욱더 찬 공기가 하강하고 있습니다 나도 천천히 팔을 들어올려 나의 무덤을 짓습니다 그녀도 나도 살아남기엔 여념이 너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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