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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기록

2012년 6월 18일 월요일

by 통합메일 2012.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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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눈을 뜨니 시계는 9시 30분이던가. 아까는 7시 30분인가에 일어났어. 나 이거 참 곤란하구만. 결국 도 지각을 해버렸다. 어제는 일찍 자려고 노력했는데 말이야. 출석률 순위권에 드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구나 한다. 돈이 아깝지도 않니. 짐을 싸고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고 망고주스를 냉장고에서 꺼내 마셨다. 문득 자아가 말을 걸어왔다. 나태했던 3일에 대한 양심의 목소리였다. 진짠지 가짠지 알 수 없는 어떤 자아가 답지가 번히 드러나 보이는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매우 어설프게 쏟아냈다. 또 다른 자아는 답지를 보여 서툰 연기로 그 변명들을 받아쳤다.

최근 나의 삶이 이토록 무기력해진 이유는 마음속에 아무도 없기 때문일까? 상현도 정원도 없는 것이다. 확신을 붙이지는 못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분명히 든다. 아마도 <감친연>을 보다가 문득 정원도 보통의 여자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고.. 내가 수없이 하찮게 봐왔던 세계로 그녀는 던져졌다. 아니 혹은 그 세계가 정원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침식해 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 세상이 하찮은 이유는 그곳의 모든 사람들은 혼자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무리를 이루고 있다거나 혼자가 아니라면 결과로서의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동기가 중요하다. 나의 세계 혹은 초인들의 세계에도 모두가독고다이로 혼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집단을 이루는 동기가 혼자를 두려워함인지, 그리하여 자신의 알량한 삶에 대한 소이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을 사랑하기에 그들과 함께 하는 것뿐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나에게 정원은 초인의 세계에 사는 인간이었다. 다수의 세상을 선택하지 않은 존재였다. 그리하여 나는 그녀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곳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세계를 지키면서 다수의 횡포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다수들의 ‘보통세상’과 화해를 하는 데 성공했다. 어쩌면 한 때의 그녀는 나에게서 그러한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마치 거울을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화해에 실패했다. 그녀가 본 게 있다면 그것은 내가 애써 화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낸 나의 굴종일 뿐이다. 오랜 굴종 끝에 나는 내 스스로마저도 그것을 화해이며 평화라 여기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배수의 진을 치고 근근이 목숨을 연명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화해에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녀다. 그리고 그 화해의 매개체가 되는 것이 어쩌면 그녀의 연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결정적으로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초조해봤자 어쩌겠다는 말인가? 별 일 없으면 그녀에 대한 의지를 지켜 가리라고 다짐했던 일은 무엇이 되는 것인가? 그런 상황에서 아마도 나는 그녀가 이루어 낸 화해를 다수의 세상에 대한 굴복으로 평가하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 가능성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현존하는 가능성 중의 하나이다. 현실은, 미래는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아침에 기숙사의 낮은 벽도 울타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나는 내 삶의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했다. 전혀 이야기스럽게 흘러가지 못하는 일상들을 바라보며 어쩌면 그것들은 진짜 이야기를 위한 토양이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시간의 조급함을 목도하며 하루에 한 권씩의 책을 뚝딱뚝딱 읽어나가는 나를 상상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녀에 대한 마음을, 의지를 지켜내는 상상을 한다. 사랑은 의지의 문제임을 나는 안다. 그리하여 상대방의 현현이나 수용이 엇더라도 나는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기대 없이 사랑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칸트의 발자취를 더듬어 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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