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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기록

[짧은글]돌아가는 배

by 통합메일 2012.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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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여가는 빈 맥주 캔들. 가위바위보라도 해서 지는 사람이 사오는 것으로 하자고 했으나 영준은 막내로서의 역할에 충실 하려는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여전히 배는 이따금 출렁이며 자신이 바다 위를 달리는 저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왔다. 희미한 조명 밑으로 낡은 카펫 깔린 바닥이 유난히 분위기 있었다. 운치라고 하기엔 너무 구려서 그냥 분위기라고 해두는 게 적당할 것 같았다. 맥주 캔을 세어보니 열 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영준은 금방 새로운 맥주를 한 아름 사들고 돌아왔다. 선내 매점은 여전히 라운지의 바로 밑에 있었고 역시 비쌌으며, 별로 파는 것이 없었다.

수고했다.”

병선의 한 마디에 길지 않은 적막이 깨졌다. 나는 슬쩍 문에 달린 유리창으로 바깥을 내다봤다. 달로 뜨지 않은 밤. 칠흑 같은 어둠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배에 달린 조명은 선체의 부분부분만을 힘겹게 밝히고 있을 뿐 한 방울의 바다도 비춰내지 못했다. 인식되지 않음과 존재하지 않음 사이의 간격은 얼마나 멀고 가까운 것일까. 배는 마치 우주를 항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툼한 철문에 의해 차음(遮音)되는 바다는 우주와 다를 것이 없었다. 모든 행성과 항성이 폭발해버린 우주. 바다가 우주를 닮아, 혹은 우주가 바다를 닮아 우주선이라고 하는 걸까. 그리고 그때도 나는 이런 생각을 했던가.

형님들 한 잔 하시죠.”

영준이 술을 권했다.

그래 마시자.”

가난한 소리를 내며 맥주 캔들이 불규칙하게 부딪혔다. 그 작은 사건에도 나는 어쩔 수 없는 기시감이 들어 현기증이 오는 것 같았다.

내가 실없는 소리나 한 번 해볼까.”

한참 동안 또 여행 경로나 명승지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우고 피곤의 적막이 찾아올 즈음 내가 입을 열었다. 병선과 영준은 반갑게 귀를 기울였다. “

그러니까 나는 시간 여행자야.”

두 사람은 잠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는 당황한 듯 손 사레를 치며 아니 그렇다고 해두자고 말이야. 이 양반들아.”라고 그들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제야 둘은 내가 농담을 하는구나 싶어 했다.

여행을 떠나면 별별 생각과 영감이 다 떠오르잖아. 나만 그런가? 하하 하여튼 그런 생각을 한 번 공유해 보고 싶은 거야.”

죄송하지만 형님 정말 실없는 소리군요.” 영준이 익살스럽게 말했다.

병선은 빙그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하하 그렇다니까. 하여간 나는 시간 여행자야. 자 퀴즈를 하나 내면서 시작하자고. 나는 미래에서 왔을까 과거에서 왔을까?”

미래에서요?” 병선이 바로 대답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글쎄요. 그냥 그럴 것 같아서요. 과거에서 왔다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 그래 맞아 나는 미래에서 온 시간 여행자야.”

얼마나 먼 미래죠?”

이야기의 전개가 흥미로운지 영준이 눈을 반짝이며 달려들었다.

음 그렇게 먼 미래는 아니고……. 가만 지금이 2007년이니까, 한 사오년 후의 미래에서 왔네.”

미래의 모습은 어떤데요? 이걸 형이 맞추면 나중에 정말 형의 말이 진실이라는 게 증명될 수도 있겠는데요?”

크크 야야 농담이라니깐 너무 깊이 들어간다. 그래 장단을 맞추자면, 내가 온 미래는 뭐 당연한 거지만 지금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고작 오 년 사이에 뭐가 바뀌겠누.”

에이 형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으니 오 년이면 강이나 산 중에 하나는 변할 것 같은데요.”

이라는 단어에서 나는 뭔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환경보호에 대한 보편적 인식 때문에 잘 안 바뀐단다.”

에이 그래도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뭔가 큰 사건이 몇 개는 있을 텐데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영준이었고 나는 혹시 이 녀석도 미래에서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야 천기누설 같은 거에 걸려서 그런 건 말해줄 수가 없어. 혹시 너도 미래에서 왔니? 질문이 굉장히 날카로운데!”

헤헤 사실 저는 100년 뒤의 미래에서 왔습니다.”

아이고 그럼 영준이가 내 선배 아닌가? 하하

그즈음에서 화제를 바꾼 것은 병선이었다.

어떻게 과거로 오게 되신 거예요?”

드디어 기다리던 질문이 나왔다.

그렇지 역시 병선이의 좋은 질문이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나도 모르겠어.”

두 사람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건배를 했고 각자 얼마간의 맥주를 홀짝였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나는 시간 여행자가 아니라 단순히 미래에서 현재로 끌려온 거라고 해야 할까. 한마디로 눈 떠보니 여기였다. 어느 날 술이 이빠이 취해서 잠이 들었는데 말이야 분명히 2012년이었는데 눈 떠보니 2007년이더라고.”

당황하지 않으셨어요?”

당황했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5년이나 땡겨지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 2007년의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좋을 것 같은데요? 누구나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잖아요.”

영준이 또 한 캔의 맥주를 따면서 말했다.

“100년 뒤에서 오신 너는 어떠신데요?” 다 함께 가볍게 키득거리고 나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지 그게 아무래도 미래라는 것이 현실이 되면 최선의 선택을 위해서 누구나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 것인데, 막상 와보니까 생각보다 그때까지 이루어 놓은 게 많아서 또 그것을 하려니 눈앞이 캄캄하더라고. 그나마 군대는 다녀온 시점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때의 형은 뭐하는 사람이었는데요?”

백수였어. 어 이렇게 말하니까 꼭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말하는 것 같네.”

그럼 별로 잃을 것도 없지 않나요?”

그게 그렇지가 않더란 말야. 생각해보니까 그때의 나는 백수이기는 해도 이런 저런 물건들이나 사람들과의 인연이나 성취 같은 것들을 지금보다 많이 가지고 있던 거야. 뭐 당연한 거지만, 그 물건들을 사기 위해 또 돈을 모으고, 인간관계를 위해서 신경을 써야 하는 걸 생각하니 막막하더라. 거기다 처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갖고 있다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는 개념이라고 갖게 되도 감흥이 처음만 못해.”

오 진짜 그렇겠는데요? 이러니까 진짜 실감나네요. 그렇죠 병선형?”

병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운 질문을 했다. 나는 아슬아슬한 이 상황이 싫지 않았고 두 사람도 즐기는 눈치였다.

그래도 기억이나 지식은 다 그대로 유지되는 건가요?”

뭐 일단은 그렇긴 한데 인간의 머리가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망각되고 헷갈리는 게 많더라고. 특히 그 오 년 사시의 사건의 전후관계가 많이 헷갈려.”

후후 그렇겠네요. 근데 왜 하필 오 년 전으로 돌아왔을까요? 5라는 숫자에 뭐가 있나?”

아니 뭐 정확히 오 년 전인 건 아니고, 아무래도 내가 이따금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때라서 그런가 싶기도 해.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다른 시절들도 많이 그리워했는데 이상하네. 아무튼 그 문제는 여전히 미스터리야.”

그럼영준이 입을 열었다. “원래의 형의 인생에서 형은 이미 한 번 우리를 만났었겠네요?”

맞장구를 치듯 병선도 나를 바라봤다. 나는 맥주 캔을 입에 붙인 채로 글쎄 어떨까?’ 하는 표정으로 뜸을 들였다.

너희 두 사람은 처음 만나는 거야. 지난번에서 나는 너희 둘을 만나지 못했다. 어쩌면 한 번 쯤 스쳐지나갔을 수는 있어도 함께 우연히 만나 팀이 되어 같이 여행을 하는 사이는 아니었어.”

원래는 다른 사람이 있었나요?”

있었지. 너희를 만난 여객터미널에서 만났고 함께 여행을 했으며, 이렇게 육지로 돌아가는 배에서 맥주를 마셨어. 한 명은 나보다 형이었고, 한 명은 병선이 너랑 동갑. 각각 부산과 천안에 살았어.”

어쩌다 못 만나게 된 거죠?”

모르겠어. 여행 경로며 날짜나 시간 모두 똑같이 했는데 그들을 만났던 곳에 그 사람들은 나타나지 않았어. 대신 너희 두 사람이 나타났지.”

형 이 얘기 혹시 진짜예요?”

아씨 믿거나 말거나 라니까. 실없는 소리라고. 아무튼 그곳에서 예의 그 두 사람이 아니라 너희 둘을 만나서 함께 여행을 하게 되면서 대체 어디에서 잘못된 건지 계속 생각해봤는데 도저히 모르겠더라. 너희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 두 사람은 정말 소중한 인연이라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나비효과 같은 거 아닐까요.” 병선이 말했다. “어쩌면 과거로 돌아온 게 형 혼자가 아닐지도 모르고요.”

그래 그럴 수도 있을 거야. 하여간 이런 일을 겪다보니 앞으로도 어쩌면 계속 내가 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엇갈릴 수도 있겠다 싶더라. 친구들이라든지 연인이라든지.” 어쩐지 숙연해진 분위기에 우리는 말없이 맥주 캔을 부딪치고 들이켰다. 꿀꺽꿀꺽. 다들 유난히 오랫동안 맥주를 넘겼다. “그래서 다행인 건 말이야. 일이 이렇게 되니 내가 단순히 과거로 끌려온 게 아니라 내 인생은 그냥 그대로 새롭게 계속되고 있는 거다 싶더라고. 똑같은 삶을 지겨워하면서 살지 않아도 되고. 아 물론 큼직한 사건은 무덤덤해하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그 오 년 동안의 인연들도 내가 망각하지 않는 이상은 나의 삶 속에 녹아들어 있을 테니까. 아 어쩌면 내가 못 잊어도 아예 무의식에 각인이 되어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자 훈훈하지 내 소설은 여기까지다!”

앗 형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영준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2012년에 정말로 지구가 멸망하나요?”

그건 12월이잖아? 나는 8월 달까지 밖에 안 살아봐서 모르겠는데? 흐흐 아이고 난 이제 자련다. 너네는 어쩔래?”

저희는 한 잔만 더 하고 자려고요.”

그래 젊은 게 좋다. 나는 나이를 오 년은 더 먹어서. 하하하.”

쉬세요.

두 사람을 뒤로 하고 나는 객실을 찾아 나섰다. 어렵지 않게 찾아 짐을 부리고 화장실로 향했다. 몇 캔이나 들이킨 맥주에 방광이 얼얼한 정도로 소변이 마려웠다. 파도가 높은지 육중한 배는 이따금 기묘하게 휘청거렸고, 그럴 대마다 나는 낯선 우주의 법칙과 싸워야만 했다. 화장실 앞에 도착했을 때 한 남자가 나오고 있었다. 그때 또 한 번 배가 휘청거려 그와 나는 좁은 복도에서 어깨를 부딪쳤다.

아이고 죄송합니더.”

아 예 죄송합니다. 어째 배가 이리.”

그에게서도 옅게 술 냄새가 났다. 우리는 무사히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급한 나머지 지퍼를 내리며 화장실에 들어선 나는 오줌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앞에 붙은 거울에 내 얼굴이 떠올랐고, 그 얼굴 속 눈동자에 조금 전 그 남자의 뒷모습이 비추는 듯 했다. 귓가에는 부산 사투리의 억양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변기에서 맥주보리 냄새가 끼쳐 올라왔다. 오줌을 다 누고도 잠시 그대로 있었다. 확실히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한 번도 끊어진 적 없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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